그리고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소년, 아니. 한 사람의 길을 바라보며 나이젤은 웃음을 짓습니다. 지훈의 행동이, 지훈의 생각이, 지훈의 마음이 꼭 보이는 것만 같아서 웃습니다. 자신의 재능에 짓눌리고, 자신의 길에 짓눌리고, 자신의 벽에 짓밟히고,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 말하자면.. '쓸모없는' 무언가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말은 본인에게도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소년, 루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붉은 하늘입니다. 평소의 하늘과는 다른, 피를 함뿍 머금은 채로 붉게 물들인 것만 같은.. 꼭 부끄러움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이젤은 간만에 얼굴을 구겨봅니다. 물론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얼굴을 구기고.. 마음을 짓누르는 감정들을 흘려내며 소년은 숨을 내뱉습니다.
그렇습니다. 뱉어지고 있습니다. 감정들은 숨이 되어 하늘 높게 흘러갑니다. 분명 초봄이 분명할 날씨에, 유독 추운 탓에 나올지도 모를 그 연기가 감정과 뒤섞여 하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을 바라봅니다. 손에 쥐고 있는 채찍은 무기이지만, 소년은 워리어도 랜스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따로 배운 기술이 있던지 물어본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소년은 말하자면 스스로의 무력감이 낳은 나태함이었습니다. 수많은 감정들이 섞여 사라지는 동안에도, 단 하나의 감정만이 당신이란 그릇의 바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은.
허무입니다.
손에 닿는 것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섞여들수도 없습니다. 선배가 되어 모범따윈 잘 보일 수 없었고 자신보다 어렸던 후배들이 자신을 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쓸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며 곧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것이라고, 현실의 당신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했지만 당신은 웃으며 그럴까? 하고 능청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런 재능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가졌을 것이 맞는 것 같으니까.
흩어지네요. 감정이란 것들은 참으로 찰나의 것들입니다. 당신을 이루고 있던 감정들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은 슬프게도 위장, 거짓, 그런 것들입니다. 당연하겠죠. 나 자신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이 '쓸모있는' 것이길 바랐습니다. 누군가에게 '쓰임받을' 수 있다면 그 가치가 있었기에..
자신이 사람이라는 인식조차 없이 그저 누군가의 손에서 흘러가길 바랐습니다.
흩어집니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았던 모든 것들이.
흩어집니다.
그러고 나서야 당신은 당신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망치를 잡고, 뜨거운 용광로 앞에 섰을 때. 처음으로 쇠를 두드리고 강철을 다듬어 하나의 물건을 만들었을 때. 그저 아무런 기능도 없는 총을 전시한 채, 이것은 쓸모 없지만 누군가가 봄으로 가치를 지닌다 하였을 때. 그때의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어릴 적, 당신을 챙겨주던 소년은 웃으며 당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 뭐해? 계속 쓰러져 있을 생각이야? "
흙투성이의 몸으로, 웃음을 지으며 당신을 끌어당기는 베온은 뜁니다. 둘은 숨이 거칠어지는 것도 모르고, 폐가 찢어질 만큼 죽어라 달려갑니다. 이유 따윈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베온의 변덕에 당신이 따랐을 뿐입니다. 그렇게 달리다가, 힘에 겨워 쓰러지듯 누운 뒤면 베온은 당신에게 물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 이제 좀 정신이 들어? "
왜 이런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요? 이제 죽은 그를 그리워나 하라고요? 그저 보고싶지 않은 장면을 보며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알라고요? 정말로 당신은, 나쁜 사람이군요.
" 가끔은 이렇게 생각 없이 뛰고 나면,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어. "
그러거나 말거나, 베온은 계속 이야기를 꺼냅니다.
" 단순히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 도중에도 무언가가 하고싶어서 움직일 때.. 기술은 발전한다. "
마스터 마이스터의 말을 꺼내며 베온은 웃습니다.
" 난 물건이라도 좀 만지러 가려고. 너는? "
나이젤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버립니다. 발을 헛디디면서도 웃으며 작업장으로 떠나, 그와 함께 물건을 다듬습니다. 사실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보다 지금의 시간이 소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바보같은 웃음을 따라 물건을 만지던 시간이.
나이젤을 바보같이 만드는, 아직 어린. 나이젤다운 시간이었으니까요.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가슴은 여전히 시큰거립니다. 나이젤은 책을 펼쳐듭니다. 그리고 바랍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어. 나이젤 그람답게.
그리고 그 마음에 영웅의 찰나는 말합니다.
나이젤 그람, 아니. 오드텔라 나이젤은 천천히 손을 뻗습니다. 여기 있는 것은 수많은 원석.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황금의 가치들. 각자 새로운 순간을 피워내고 있는 소년들에게 나이젤은 말합니다.
" 반짝이렴. "
그는 모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제 당신의 손에서 새로운 존재들로 태어날 것이기에.
" 내가 너희들을. "
장인은 불과 화로 앞에서 망치를 들었습니다.
" 별로 만들어줄게. "
의념기
나이젤의 의념은 천천히 피어오릅니다. 피어오르고, 피어올라 하나의 혼을 만들어냅니다. 그 형상은 추하고, 두려운 형상이기도 합니다. 얼굴에는 화상자국이 있었고, 다리는 절고 있었으며, 눈 한 쪽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불타는 화로 앞에서 자신의 망치를 쥐고 철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외모는 가치가 아닙니다. 성격도 가치가 아닙니다. 인간을 상징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어떤 물건을 들고 있는가? 아닙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 하늘의 별들이 좀 더 반짝인다고 가치를 지니었습니까? 저 땅의 보석들이 그저 아름답기에 가치를 지니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이젤 그람,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당신을, 재능 없고, 나태하고, 심지어 심약하기만 한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 장인은. "
소년은 선언합니다.
" 오직 자신의 물건으로 말한다. "
소년은 손을 들어올립니다. 거대한 혼은 나이젤에게 깃들어 강대한 의념의 형상을 부여합니다. 나이젤은 손을 들어올려 '두드려냅니다.'
별의 불.
그 거대한 불속에서 오드텔라는 선언합니다.
" 너희들이 나를 증명해줘. "
'도구' 나이젤 그람이 아니라.
" 나 나이젤 그람의 창조물을 들고. "
대장장이, 장인 나이젤 그람의 물건을 들고.
" 영웅이 되어서. "
불이.. 타오릅니다!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불 속에 있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이 불들을 조정하고, 녹이고, 주물하며, 형태를 만들고, 가치를 새기고, 혼을 불어넣으며 완성하십시오! 영웅의 무구들을, 그 모든 가치들에 당신을 녹여내십시오! 가치를 불어넣어서 영원히 당신을 상징할 물건들을 만들어내십시오!
영웅이 되어라!
불은 무기들을 만들어냅니다. 지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귀신 베는 검 같은 것이 아니라, 맑은 하늘을 닮은 것만 같은 검을 쥐고 있습니다.
가람은 자신의 검을 보며 기운을 끌어올립니다. 번개의 야수, 그 혼이 검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한 곳에서는 뇌전이, 한 곳에서는 구름이 몰려들어 당신의 근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자신의 손에 들린 총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자신의 피를 쇠와 두드려낸 한 자루의 총입니다. 이 총구에 닿은 사특한 것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소년들에게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으니 나이젤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이 말합니다.
스스로의 손을 모으고, 눈을 감습니다. 하루는 누구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단 한 번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의념이 단순히 빛이기에 가장 연관이 있는 신성한 무언가를 찾아 기도를 올릴 뿐일까요? 신성한 성녀?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면.. 아쉽게도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의 하루의 삶을 요약해보자면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에 쥔 것은 가득 있었지만 더 많은 것을 바랐고, 더 부유해지길 바랐습니다.
당장 성격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는 성격이란 것. 언제나 솔직하지만은 않다는 것. 결국 필요에 따라 이득을 저울질하기 좋다는 것.
고아원에서, 성당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기에 그저 '신의 은혜'란 것에 보답하기 위해 부지런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겁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무언가에 욕심을 부리더라도 " 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야. "라고 했을겁니다. 의념을 각성했을 때에도 그게 신의 은혜라서가 아니라 그저 " 더 많은 것을 취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 라고.
자기 자신만이 신앙심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지금 이 생각조차도 아마도 공포에 질려 가졌던 생각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잊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당신이 볼 풍경은, 당신을 흔들테니까요.
바티칸. 기적과도 같은 신의 빛이 내리는 곳. 그 곳에서 하루는 검은 빛의 사제복을 입고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정해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걸음을 걸으며 긴 시간을 죽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손에는 위스키 한 잔을 쥐고 홀짝이면서요. 누군가가 본다면 신의 증명이라는 사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을 본다면 누구나 그런 말은 잊을 것이 분명합니다.
" 세인트 하루. "
누군가가 당신을 부릅니다. 하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봅니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
이 시대의 교황. 성 비오 13세는 하루를 바라보며 묻고 있습니다.
" 아.. 교황님이시네. "
하루는 술잔을 쥐고 흔들거리며 웃습니다. 지금의 하루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헤이하고도, 악한 모습입니다.
" 지루해서요. "
그 말에 교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내쉽니다.
" 그냥 이단자들 머리나 깨고 싶네요. "
말 그대로 하루의 삶은 지루해졌습니다. 신의 은혜를 믿고 성스러운 삶을 살아온 과거에는, 자신의 삶이 행복했습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의 삶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이 구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범인을 설득하여 자수하게 했다는 것 만으로 피해자들이 울분을 토하며 그를 돌을 던져 죽였을 때. 점점 하루는 망가져갔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가치가 없다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가 행한 일로 이루어진 결과는, 결국 자신이 치료했기에, 설득했기에, 살렸기에, 죽였기에 이루어졌을 뿐이니까요. 하루는 점점 마모되어 갔습니다.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기적을 상징하는 백색의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였던 것도 그때였습니다. 사람에게 질려갔던 하루는 바티칸에서 자신을 찾는다고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바티칸으로 향했습니다. 666 죄악심의회에 들어 거짓으로 신의 이름을 퍼트리고, 그들을 이용하던 자들을 처벌하였습니다. 그저 심판과 단죄만을 행했습니다. 그 뒤에 이루어질 것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바티칸의 책임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