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아원의 아이 중에는 희망을 품은 것들이 많았다. 순진한 것들은 어떤 착오로 자신과 떨어지게 된 부모와 다시 만나 돌아가는 꿈을, 덜 순진한 것들은 좋은 새 부모를 만나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꿈을. 그 중에서도 천국을 믿는 것들이 제일 순진하고 또 서글펐다. 그 아이들은 현실엔 희망이 없단 걸 알고있었다. 나는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원래 부모가 우리를 찾으러 온다는 건, 우리가 쉽게 버려진 만큼 변덕으로 쉽게 되찾아갈 수도 있는 물건에 불과했단 걸 증명해주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 [ 돌아온 나는 말했다. 이 세상엔 기쁨과 희망이 있단다. 하지만 너희들에겐 오지 않을 것 같아. 너희들은 평범한 아이로 돌아갈 수 없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꼭 밉지 않아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내 머물 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곳이 내가 떠나왔던 곳이며, 내가 상처준 이들은 언젠가 같이 구제불능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이들이었다고 알게 된 건 조금 지나서였다. 그들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바뀌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었다. ] [ 나도 그랬다. 나는 평범한 아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넘치는 기쁨과 희망은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 사이에 섞일지언정 거무튀튀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평범한 사랑을 주지 못할 것이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아 사랑을 주며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내 반쪽에겐 내가 물려받은 혈육의 성질과 살면서 배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재현해내고야 말 것이다. 걷기 힘들 만큼 발을 붙잡는, 무언가 덕지덕지 엉겨붙어 질척이는 레인부츠를 끌었다. 그래도, 나는 걷고 있었다. 맨발의 아이들을 버려두고 신발 신은 것들의 사회로 가고 있었다. 낡고 더럽지만. 그걸로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선 곧잘 새 신발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는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그러면 보고 베껴서 만들면 된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부드러운 미소와 조곤조곤한 말투와 섬세한 성정을 만들어 신었다. 낡은 가죽과 이따금씩 떨어질 듯 덜렁이는 뒷창과 밑창에 튀어나온 송곳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날카로운 쪽은 나를 향하지 않았으니까. 그것마저도 신발 속에 들여놓으면 타인을 찌를 일이 없었다. 걸을 때 조금 불편할 뿐이다. 조금... 조금뿐이었다. ]
"그럼 그렇게 생각해. 굳이 안되는 모범생 흉내를 내어서 서로에게 큰 이득이 있는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미 내가 네게 그런 척 하기에는 늦지 않았어?"
만족스럽게 더 입꼬리를 올리고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놀리려는 의도보다는 진심으로 편하게 생각하여 대답하는 것에 가까웠다.
"...와아 재미없는 반응."
이렇게 쉽게 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장난에 가까운 행동에 방금 전까지 저와 비슷하게 은근히 툭툭 건드리며 대화하는 편일거라 생각한 상대가 당황한 것에 조금은 놀랍다는 듯 눈을 살짝 접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을, 그것도 앞으로 아군으로서 행동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척을 져가면서까지 몰아붙이는 취미는 없었다. 가볍게, 중립적으로, 적당히 마음에 거리를 두며, 학원도에 들어가기 전 다짐한 그녀의 인간관계의 모토.
"그럼 여태 그쪽이 놀린 사람들의 기분을 이 기회에 알았다고 생각해. 미국이었다면 어땠을까 음..내가 가본곳은.."
적당히 말을 늘이다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여기부터는 만18세 이상 관람가야. 바른 청소년에게 그리 정신적으로 좋지 못할거라는 정도만 말할게. 라 마쳤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도 도시 변두리에만 가도 갱과 불법이, 밤새토록 총성과 추격전이 이어지던 국가이니 빤히 들여다보는건 보는 쪽에도 시선을 받는 쪽에게도 치외법권 아닌 치외법권에서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라, 표준적인 답안이네 동시에 쉽지 않기도 하고. 난 아직 신용불량자 정도는 아니라 괜찮을 거야. 이래봐도 일은 확실하게 잘 해."
웃다가 다시 특정한 생각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숙취해소제 덕에 슬슬 정신이 돌아오고 술기운이라 여겼던 기시감이 더 뚜렷하게 머릿속을 두드렸다. 손 등위로 얹어진 상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감싸쥐었다. 검사인가? 작게 중얼거렸다.
" 지금이라도 모범생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어쩌면 늦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네. 네게도, 내게도. "
미소를 흘긋 보더니 곧 편안한 표정으로 -무표정이긴 했지만- 답했을까. 그녀는 저 본연의 모습이 편할테고, 자신 역시 본연의 모습을 내비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껴졌으니, 상관 없는 것이겠지. 그러다가 재미없다는 말에 피식 웃으며
" 놀리는 건 좋지만 놀림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
라고 말하며 방금과는 대조적으로 미사의 시선을 이쪽에서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데 그가 먼저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든 상관 없었던가. 성격 나쁘다고 누군가가 말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성격 나쁜 것은 사실이기도 했으니. 지훈은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이며 고민하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미사 쪽으로 살짝 다가가고는 "혹시 장난스레 대하는 것이 편하다면 딱히 상관은 없어." 라고 작게 속삭였던가.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가 자신에게 친근함을 느낀다면, 그렇게 하여 '친구'를 하나 더 쌓을 수 있다면, 그는 만족했으니.
" 뭐, 알았다고 해도 계속 할 거지만? 그리고 만 18세 이상 관람가인가. "
"그럼 너도 알면 안 됐던 거잖아." 라며 반 농담 삼아서, 반은 드러나지 않을 걱정 비슷한 것을 담아서 말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대충 짐작이 가긴 했지만... 그렇기에 걱정이 반쯤 담겨있던 것이겠지. 최대한 숨기기는 했지만.
" 어딜 가든 표준적인 편이 좋지 않나? 흐응. 그러면 앞으로 지켜볼게. 네 신용이 네 말마따나 좋은지 아니면 반대일지. "
무표정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마주했다. 기시감...을 눈치로 읽었는지, 지훈 역시 무언가 떠오를락 말락한 표정을 지었을까. 그러고보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손 끝을 감싸는 감촉에 검사는 아닌 것 같고. 라며 살짝 중얼거리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