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한 둘. 가을 바다에는 차가운 바람이 슬슬 마중을 나오기 시작해, 바닷가는 사람없이 비어있었다. 바다의 손이 차가워질라, 꼬옥 붙잡고 달려나가는 카사, 물이 발목을 간지럽히기 시작해서야 그 손을 놓는다.
준비 없이 뛰어들다가 "으악 차거!" 하고 외치는 카사.
"왜 웃어!"
푸르르, 물을 털어내고도 눈을 찌뿌리다, 몸을 일으켜 다가간다. 바닷물의 추위에도 뜨거운 카사의 손이, 바다의 손목에 닿는다.
첨벙!
함께 바닷물이다! 꺄르르, 웃다가, 결국 나란히, 모래위에 누워버린다. 흘려오다가 다시 내려가는 바닷물. 넒히 펼쳐지는 푸른 색. 그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우리들의 고민은 한 없이 작아진다. 그게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작은 몸을 바다에게 대, 그 하나뿐인 온기를 만끽한다.
「인간성」이라는 조잡한 말이, 우리 둘을 얼마나 괴롭혀 왔을까? 결국 그 상상의 줏대를 만든 자는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바다의 눈가에 작디작은 입맞춤을.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부드러워, 밀려가는 파도와 함께 사라지게.
"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거 같아."
이 순간을. 이 바닷가를. 너를.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사랑할수 밖에 없게 되었어. 눈을 감고 내뱉는, 잔잔한 고백.
"바다를 좋아해."
연바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 내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었구나. 괜히 심술이 생긴다.
첨벙.
나의 손아래 흩어지는 모래알. 손가락 사이에, 바닷물에 따라 흐르는 너의 머리카락. 그리고 너. 나의 아래에서 눈을 동그래 뜨는 너. 너무나 사랑스러워, 눈이 휘어진다. 다시 한번, 천천히, 너의 아름다운 눈을 마주치고.
바다는 계절마다 그 향이 달라진다. 여름바다의 짠내와, 겨울바다의 청량한 냄새는 전혀 달라서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바다라면 자주 와서 놀았을 연바다에게 가을 바다의 냄새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익숙한 즐거움일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가름을 붕 뜨게 하는, 정체모른 단내가 공기중에 섞여 있는 것과도 같았다. 함깨 가면 산책을 나와 신난 강아지가 목줄을 팽팽히 당기며 앞으로 뛰듯 손을 꼭 잡고 나아가는 카사에게 바다는 웃음기를 숨기며 천천히 가라고 말을 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프니까, 아무리 가디언이지만 카사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 응? 좋아서 그렇지~ "
답지 않게 능청스러운 말을 하고는 서로 꺄르륵 거리며 소녀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물을 튀기다가 모래사장에 누웠다. 너와 함께 있으면 많은 것을 잊을 수 있고, 많은 것을 새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옆에 있는 너의 온도도, 맞닿은 살 너머로 느껴지는 너의 심장소리도 너무나 신선하고 행복한 배움이었다.
귓가에 파도소리가 청명히 들려온다. 쏴아아, 하고 파도가 부숴지며 발자국이 남았던 모래사장에서 우리의 흔적을 지워간다. 싫지 않게.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이게. 그 어떤 흔적도 여기에 있으면 언젠가는 사라질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 나도 좋아해. "
이 세상과 바다를 사랑한다는 카사의 고백에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첨벙, 하는 물소리와 얼굴에 튀는 물에 카사 왜그래~ 하고 상체를 들어올린 찰나에는 너무나 가까워진 네 호박색 눈동자가 유리가루들이 만짝이듯이 빛났다. 바다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이번에는 피할 수 없는 고백이 자신에게 달려왔다.
" 어....! "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얼굴에는 때아닌 홍조가 들었다. 대답을 유보하고 정적이 흐른 그 순간 바다는 카사의 작은 몸을 끌어안고 뒤로 몸을 뉘였다.
" 응.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해. "
부끄러운 얼굴은 감춰서 보이지 않게 신망차이를 이용하는 것은, 약삭빠른 영성의 역기능일 것이고 또 부끄러운 소녀의 앙탈일 것이다.
꼬마아이가 조용히 걸어간다. 그 앞에는 아직 소녀가 서있다. " " 라고 꼬마가 말하자. 소녀는 너무나도 슬픈 얼굴을 한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무력한 얼굴.
탁!
후안의 머리통에 잠을 깨우는 충격이 일었다. 부스스하고 후안이 일어나자 같은 반 학생들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례시간을 기다리며 책상에 누워 있는 다는 게 후안은 그만 잠들어 버린것이다. 그는 눌린 뺨 자국을 슥슥 문지르며, 조용히 자신을 깨워준 학우에게 눈빛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같은 느낌으로 인사를 받아주자 후안은 가방을 챙기고 방과 후 활동으로 향하려던 그 때.
"인 후안!" 호통 치듯 담임선생이 외쳤다. "적당히 좀 해라 어?"
후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담임 선생은 얼굴을 잔뜩 찌뿌리다가 한숨을 내쉬곤 교실을 나간다.
"어휴. 저런 게으름뱅이 시키 진짜... 하면 하는 놈인데..."
"..." 그 중얼거림을 멍하게 듣던 후안은 다시 가방을 제대로 매고 교실을 나간다.
저벅저벅 걸어간 끝에 그는 검도부에 도착했다. 검도부에는 후안보다 일찍, 유재찬이 있었다. 반에서 일찍 보내주기라도 한 듯 이미 도복을 입은 상태였다.
성적우수. 용모우수. 친화력우수. 거기에 이른 나이의 의념 각성 까지. 이런 시골 학교에서 이 정도는 학년이 아닌 학교 전체에서 빛나는 학생이다. 종례 없이 검도부에 온다던가 정도의 작은 특혜는 별거 아닌 정도.
검도부에 들어오는 후안을 발견한 재찬은 반갑게 인사한다.
"일찍 왔네?"
"..." 그에 반해 후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버린다. 마치 벽에 대고 인사해도 이리 어색하지는 않을텐데.
재찬은 안쓰럽게 후안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곤 생각한다. '검도부에 와서 하라는 것만 하고, 구경만 하던데...'
'저럴거면 왜 굳이 오는거지?'
저녁까지 검도부 활동이 이어졌다. 오늘도 후안은 검도부에서 시키는 몇 개를 하고, 구경을 하다가 , 활동이 끝나면 나머지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노을이 지는 너머로 걸어간 후안은 집으로 도착했다. 문을 여는 소리조차 낡고, 문 너머로 집안 전체가 다 보이는 8평짜리 작은 원룸. 그러나 후안이 가장 아늑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세상의 전체. 후안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 너머의 세상이 자신에게는 크나큰 사치이니까.
그러니 조용히 후안은 밥을 지으며 자신의 유일한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저녁을 준비하는 후안의 귀에 발걸음이 들린다. 후안은 이 발걸음이 누구인지 안다. 그의 누나 인유안이다. 지친듯한 발걸음이지만 조금은 힘차다. 걸음은 이윽고 문앞에 서서 잠시 있는다. 다짐 하는 것이다. 힘들어진 모습도, 참울해진 표정도 보여주지 않겠다며.
힘들지 않은 척 힘찬 척 밝은 척 발소리가 문을 연다.
"후안앙~ 나왔어~"
그런 모습에 후안이라고 어쩌겠나. 그저 기운차게 가족을 반겨주는것 뿐이다. "왔어?" "오늘 저녁은 계란 간장 소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