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늑대는 말이야, 다 같이 태어나니까. 죽는 것은 혼자인건 공통점이지만. 이리 저리 생각에 잠긴 채 손을 이끌린다. 깜박 깜박, 두 손을 상냥하게 잡힌 채 하루를 올려다 보는 두 눈이 맑기 그지없다.
"당신을... 사랑해요."
홀린 듯이, 조심스레 두 입술을 떼어서 하루의 말을 따라한다. 말라 약간 갈라진 입술에서 같은 말이 나온다. 한 박자, 한 박자 조심스레 따라하며 하루의 눈을 살핀다. 하루의 눈은 어떻게 이렇게 예쁠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을 따라하고선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어지는 말에 곰곰이 생각한다.
"잘 모르겠어."
담백한 말이다. 두 손을 하루에게서 빼내고, 꼬옥, 쥐어 턱을 지탱한다.
"하루의 말 대로라면, 나는 아주 신중해야해. 늑대는 인생에 한명만을 선택해. 만약에 내가 잘못 선택해서 그 사람이 먼저 떠난다면, 나는 쓸쓸해 죽고 말꺼야."
그러니까 끝까지 아껴둬야겠어.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데, 나중에 상대가, 싫증났어! 안녕! 이라고 말하면, 난 아주 아주 큰일나잖아! 특이 인간들은 여러번 연인이 되었다 말았다 하니까. 난 특히 조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이 확신에 찬 듯 한다.
"그래!"
두손에 새하얀 머리카락을 모은다. 아이 예뻐라! 한 동안 묶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데에 여념없다. 막 말린 채라 그런 지, 촉감은 최고급 실크에 가깝지 않을까?
헉, 맞다. 묶어야지. 힘껏 기합이 든 표정을 들고 하루의 머리카락을 손에 든다. 새하얀게 진짜 실크같아서 정말 이쁘- 핫, 집중, 집중! 꾸낏, 미간을 한 껏 찌뿌리고 기억을 더듬는다. 일단 머리를.... 반으로 나눠야 해! 그리고 당기면... 안돼! 당기다가 하루가 아파하면 어떡해!
느릿, 느릿. 거북이도 이것보다는 빠를테지만, 하여튼 양갈래 비슷한 것이 만들어져가는 듯 했다. 얼마나 집중하는 지, 카사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렸다. 시험에도 이 만큼 집중해준다면 소원이 없을텐데.
모았다! 카사의 표정이 환해진다! 이제... 헤어밴드......... 어..... 어떻게 묶지? 카사의 표정이 혼란으로 물든다. 와중에 손에 든 하루의 머리칼은 부드럽다 못해 흘러내릴꺼 같았다. 카사는 결심했다. 최선을 다 해 보자!!!!!
이곳은 수족관. 새로 개장했다길래 헐레벌떡 뛰어왔다. 물고기 같은 건 먹는 걸 좋아하지, 보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심해어나 조개류, 해삼, 말미잘, 멍개 같은 건 또 좋아해서 볼 수 있나? 싶어 왔더니... 역시나 있구만! 초롱아귀 같은 것을 빤히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머리에 돋아난 촉수같은 걸 잡고 빙빙 돌려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유리를 툭툭 손가락 끝으로 두들겼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서 수족관 내부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손에 들려있는 팜플렛엔 수족관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해산물은 맛있죠." 사실 싼 게 많아서 그럴 수도. 하긴.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생선을 사는 거랑. 고기를 사는 건 좀 다르던가..아닌가. 둘 다 비싼가.. 그래도 집에서 고기 굽는 거랑 생선 굽는 거를 비교하면 생선이 좀 더 번거롭지(납득)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개성 하나는 꽤 대단한걸요?" 그렇다.개성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단골 서비스라는 말에 무엇일까. 했는데. 레코드 플레이어를 선곡할 수 있다는 말에 그럼 이런 것도 있으려나요.라고 골라봅니다. 클래식 하나를 집어들고는 선곡해도 되나요? 라고 말하는군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no.2라던가." 는 농담이지만요. 농담이 맞는 게. 클래식 표지만 보고 고른 거라. 안에 재즈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살면서 따로따로 만나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 알고보니 전부 아는 사이였을 확률이 얼마나 되려나.. 같은 걸 생각하다가도, 에미라 덧붙이는 말에 "나쁘지 않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 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어진 지아와 에미리의 말에
" 둘 다 호텔에만 있었구나. 마도일본은 어떤 풍경이었는지 알려달라고 하고싶은데 어려우려나. "
아무래도 마도일본은 커녕 제주도도 못 가본 지훈이었던 만큼, 해외의 풍경은 꽤나 궁금했을까? 뭣 때문에 움직이지 못 했는지도 물어볼까 싶었지만... 에미리와 지아가 불편할지도 모르니,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 나는 그동안 의뢰하거나... 친구..? 음. 어... 하여튼 그 사람하고 데이트 하거나.. 그랬어. "
아직 사귀지는 않았으니까. 구태여 따지자면 친구에 가깝겠지. 그때 했던 말은 보류나 다름없어졌으니.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얘기도 얘기지만 둘 얘기가 더 궁금해." 라며 에미리와 지아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지훈은 화현의 뒤에서 소리없이 다가오더니 일부러 놀래키려는 듯 화현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보통 때 같으면 이미 했을 다른 인삿말도 없이 화현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려고 시도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혹은 실패했더라도 화현에게서 살짝 떨어지며 손을 작게 흔들어보이지 않았을까.
연바다는, 클래식과는 연관이 전혀 없다. 만약 연관이 있다면 차라리 덥스텝과 있을 것이다. 덥스텝도 정작 잘 모르지만! 라흐마니노프가 엄청 어려운 곡을 친 사람 정도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레코드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협주곡. 아는 사람의 귀에는 분명- 라흐마니노프는 아닐 것이다.
손가락으로 찌른다는 소리다. 툴툴 거리면서 그에게 가서 목적지인 식당까지 걸어간다. 폐사한 물고기... 죽은 거라고 해도...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윤리적인... 그런 의미다. 과연 키우던 반려 사슴이 죽었을 때 그 사슴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와 같은... 이건 물고기지만. "위생적으로 좀... 그렇잖아요." 그리고 위생문제.
"회까지 떠버리다니, 갈 때까지 가버렸구나! 자본주의!"
내가 요리 기술을 배워서 망치피자를 만드는 수 밖에 없어!! 아, 이 초밥 맛있겠다. 그가 보여준 페이지에 짤막하게 표시된 초밥. 음~ 윤기있네.
“ 그렇죠? 저도 이 부분은 어렵다고 생각해요. ” 자신의 말을 들은 카사가 담백한 답을 돌려주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미소를 지은 체로 다정하게 답을 돌려준다. 그야, 사랑이란 그리 쉽지만은 않은 부분이니까. 사람마다 사랑의 형태도, 방식도, 추구하는 것도 모두 다 다르니 자신의 말처럼 단정지을 수는 없을테니까.
“ 근데, 그렇게 카사처럼 혼자서 지켜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사랑이란, 둘이서 하는거니까요. 예를 들면, 카사가 저를 이렇게 좋아해줘서 지켜주고 싶어하는 만큼, 저도 카사를 좋아해서 그만큼 지켜주고 싶어요. 예를 들면, 저나 카사 둘 중 한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저는 분명 카사를 살리는 쪽을 고를거에요. ”
하루는 카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려주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면서도, 여전히 카사와 마주한 눈을 떼지않았다. 분명 자신은 눈 앞의 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이 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것이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후후, 그러면 카사는 제가 ‘사랑해요’ 라고 말하면 어떻게 할거에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지하게 말하는 카사를 바라보던 하루가 슬쩍 물음을 던지며 어떻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여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눈빛은 아까전과 변함이 없어서, 하루의 속내를 알기는 쉽지 않겠지만.
#
“ 잘 하고 있네요, 카사. ”
꼼지락 꼼지락 열심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카사를 흐뭇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확인하던 하루는 중간중간 카사의 칭찬을 잊지 않고 해주며 바라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카사의 모습에 한순간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지만 간신히 웃음을 집어넣은 하루는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고 카사가 마무리 하기를 기다린다.
“ 와, 카사.... 카사도 머리 묶는데 재능이 있는거 아니에요? ”
어쩌면 누군가 보기엔 엉망이라고 말할지도 모를 정도로 삐죽삐죽 머리가 튀어나와있는 서툰 양갈래머리가 완성됐지만, 하루는 한점 망설임도 없이 박수를 치며 카사를 돌아보며 칭찬을 들려준다. 고맙다는 듯 꼬옥 안아주기도 하고, 집중하느라 고생했다며 등을 토닥여주기도 한 하루는 머리를 묶어준 포상이라는 듯 자신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이리오라는 듯 양팔을 벌려보인다.
“ 자, 머리를 묶어준 만큼, 상을 줄 시간이에요. 카사, 이리 와요. ”
이제 진짜 파자마 파티 시작이에요. 하루는 상냥하게 말하며 눈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아마도 그정도로 따뜻한 미소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방을 열자 거기에는 수족관 카탈로그와 팜플렛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절반 정도를 그에게 건네주고 식당으로 가서... 그가 안내한 자리에 앉는다. 역시 돈을 많이 썼는지 테이블 한쪽 편에는 터치 스크린이 설치되어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면 레일을 따라 음식을 담은 접시가 테이블로 옮겨지는 형태였다. 이게 바로 하이푸드놀로지..! 일단일단 유부초밥이랑 우동이랑 계란찜이랑... 장어초밥이랑...
물론 먹을 수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으니까 구분해서 요리하겠지. 식당이니까!! 지갑 한도 내에서 주문한다고 해도... 음식을 다 못 먹고 남기면 약간, 양심이 찔려오는 K의 민족. 왠지 귓가에 이런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다. '음식 남기면 지옥가서 남은 음식 다 쓰까 묵으야 한다' 어흑 마이갓... 펩시가 아닌 콜라에다가 밥이랑 초밥을 말아먹어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하니 식욕이 조금 사라졌다... 하지만, 레일을 따라 테이블로 도착한 음식을 보니 다시 돌아온 식욕. 지갑이라도 두고 왔니...? 식욕아?
"왔다~ 연어초밥은 지훈 씨꺼고... 유부랑 장어, 계란찜은 제꺼. 우동은 아직인가.."
각자가 주문한 음식을 옮기고 우동 국물부터 마시고 싶었는데 우동은 아직이다. 주문을 안 했나? 싶어서 터치스크린을 쳐다보니...
서로 지킨다는 것은 익숙한 상황이긴하다. 하지만 희생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원래 사랑이란 것은 둘이서 하는게 맞긴 하니까. 그래도 하루는 내가 아닌 하루를 살리는 쪽을 골랐으면 좋겠어, 라고 작게 덧붙인다.
"그게 내 의무니까."
대장으로서, 가디언으로서, 그리고 워리어로서 그게 맞다고 생각해.
"물론! 내가 먼저 짱 쎄져서 우리 둘 다 구할께."
나만 믿어! 라고 한손으로 가슴을 퉁퉁 치는 카사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한 명이 희생해야 하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게 하겠다는 게 기정사실이라는 듯이. 만약의 만약은 없다. 카사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할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루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싫다? 그러면 아예 그런 선택을 할 필요가 없게 하면 된다. 참 탁월한 대답! 카사는 역시 천재적이다!
그렇게 웃다가도 하루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이 하루의 얼굴을 살펴본다. 장난치지마, 하고 하는 듯 눈이 가늘어지지만, 이내 눈을 감고서 깊이 생각한다. 신중히 생각하는 모양. 그래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못 들은 척 해줄께."
말과 함꼐 눈이 다시 뜨여 하루를 마주보는 카사. 두손을 들어 하루의 양 뺨을 감싸려한다. 그리 하고 하루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호박빛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 말 한 마디에 인생 전부를 줘야 한다고 말이야. 너도, 나도! 하루를 똑바로 마주보는 눈에는 한치의 원망이나 탓함은 하나도 없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이, 아니, 가르치듯히 차근차근 말하는 카사 나름의 부드러움뿐이다. 엄지가 하루의 뺨을 쓸어내린다. 장난치려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서 했으면 좋겠어! 콩, 이마로 하루의 이마를 약하게 부딫친다. 어른 늑대가 아기 늑대를 탓하는 듯이.
"하루야 말로, 내가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받지마."
말했잖아! 내가 지켜줘야한다고 말이야.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이는 카사. 인간의 평생이라면 늑대의 열배정도는 더 되는 시간인데, 그러면 카사의 마음은 아주 아주 무거울 것이다. 좋아하면 반대로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난 하루가 그런 무거운 각오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는 카사의 눈은 평소의 강렬함을 담고 있었다. 하루는 인간이잖아.
==
"후우...."
해, 해냈다. 해냈다!! 이 카사가 해냈단 말이다!! 말없이 환성을 지르며 두 손을 천장으로 뻗는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생애 처음 머리 묶기치고는... 잘... 했...을지도... 음.........
"진짜????"
재능있어???? 헐!! 나 재능있데!!! 헤벌레, 꼴사납게 입가가 하늘로 아주 끝없이 올라간다. 포옹도 받고 토닥임도 받고, 정당하지 않은 포상을 받는 카사의 기분이 아주 와우. 거기에 '상'이라는 말에, 이리 오기는 커녕 아예 뛰어든다. 하루의 몸이 튼튼해서 다행이다. 가디언 신체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