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연거푸 잔을 꺾고, 여러분은 술기운에 취해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천천히 흐릿하게 변해가는 게이트를 두고, 김진단은 여러분을 하나하나 게이트 밖으로 내놓습니다. 잠시 뒤 이유 모를 힘에 의해 여러분은 모두 기숙사로 돌아갑니다. 아마, 오늘의 일은 숙취 정도만 남기는 꿈 취급을 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일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왜냐면 모두 같은 꿈을 꾸었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김진단은 잔을 닦으며 여러분의 모습을 다시금 기억해봅니다. 그러다가, 쓴 웃음을 짓습니다.
" 이거 참.. 색다른 분들이 많군요. "
진단은 쉐이커를 꺼내들며 빈 공간을 바라봅니다. 아니, 아까까지 비어 있었던 공간에는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메리 하르트만. 에릭의 표면상 동생이자,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의 분신. 하지만 원래의 그녀같은 분위기는 아닙니다. 좀 더 메리가 날카롭지만, 표독스런 느낌이 있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런 분위기는 아닙니다. 설명하자면, 좀 더 여유로워졌고, 느긋해 보였으니까요. 꼭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 처럼요.
" 한 잔 하시겠습니까? " " 응. 레몬 드러그로. "
잠시 후, 진단은 술을 내옵니다.
" 어때? 다들 귀엽지 않아? "
그녀의 대답에 진단은 피식 웃습니다.
" 그렇더군요. " " 그치그치~~!! 내가 역시 애들 보는 눈은 좋다니까! 다들 귀엽고, 재능도 넘치고, 크으으.. 내 분에 맞지 않는 애들이라니까? " " 당신의 분에 말입니까? "
그녀는 술잔을 든 채로 웃으며 말합니다.
" 조금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다들 매력적인 아이들이야. 내가 과연 이런 아이들을 보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
영웅의 자질을 가진, 그러나 아직은 평범한 소년.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지만 스스로에겐 한없이 나쁜 소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잡는 법을 고친 소년. 영웅이 되고 싶었지만 재능의 벽에 막혔던, 다시금 재능을 피워내기 시작한 소년. 야수의 심장과 인간의 눈을 가진 소녀. 과거에서 한 번 죽어버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소녀. 스스로를 악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정의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가치를 찾아가는 소년. 스스로 지독할 만큼 행운을 안고 있지만, 그로 인해 주위에 한없는 불행을 꽃피웠던 소녀. 누구보다도 인간으로, 그리고 바다로 살고 싶어하는 소녀. 자신에게 누구보다 비관적이지만,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자 하는 소년. 과거의 사랑 속에서, 현재의 미련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녀. 스스로의 손으로 영웅을 그리고자 하는 소년.
" 이 모든 아이들이 나에겐 사랑스러운걸. "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누군가의 과거,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삶. 그것들을 털어내면서 그녀는 이야기했다.
" 그래서.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어. "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 말에 진단은 대답 대신 잔을 닦으며 묻습니다.
" 그로 인해서 수십억의 생명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까? " " 당연히. "
아무렇지 않게 대답합니다.
" 비웃어도 좋아. 수십명을 위해 수백의 재능을 뺏고, 수천의 가능성을 뺏고, 수만의 길을 닫더라도. 난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존재하니까 말야. " " 무섭군요. "
그게 사랑이야. 하고, 말합니다.
" 슬슬 이 시간도 끝이네. " " 맞습니다. 다시금.. 이야기 속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 " 그거 알아? 지금의 당신은 꽤 멋진 모습의 미중년이라는거? " " 또입니까? "
자다 깼을 때 자기 방이 이유없이 불편해져서 대칭으로 정리할 뻔했었다. 술에 취해서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나 했더니, 다른 사람이 데려다 준 거였을까...
"소중한 사람이 평생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물건을 이런 사람에게 맡기겠단 건가요? 위험한데."
겸손함도 섞여 있지만 진담이다. 이런 선물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다르니까. 상대가 필요한 물건이기만 하면 사서 선물하는 게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고. 최악은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 버릴 순 없는데 필요없고 쓸모없고 거추장스럽고, 하는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지적 시점으로 보면 하나미치야가 그럴 리 없지만...!
"당신이 괜찮다면, 할 수 있어요."
구해 온 재료라면 여러 번 실패할 수 없다. 기회는 딱 한 번, 나이젤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물건은 어려웠다. 어떤 물건이고 어떤 용도에 쓰일지와는 별개로 다른 뜻이 들어가야 하니까. '날카로운 검'과 '지키기 위한 검'의 난이도 차이 같은 느낌?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란 말까지 들은 이상 정말 하나밖에 없다는 것 외에 가치가 없는 물건을 만들 생각은 없다.
"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보석이나 원하는 철을 제가 구해올테니까. 나이젤씨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주세요! "
하나미치야에게 줄 선물이니 더 대단한 장인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에릭은 나이젤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모든 장인캐들의 로망! 참치캐의 의뢰를 받아 무기를 만들어주기! 비록 그게 진행의 사정 탓에 힘든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로망에 가깝다!
" 어...우선 반지로 생각 중인데.... 강철로 공예같은건 하실 수 있죠? 이 부분은 꽃 처럼..."
아무튼 그렇게, 에릭의 리퀘스트가 시작되었다!
" 우선 카페로 자릴 옮길가요? 이야기가 엄청 길어질 것 같은데..."
물론 의외로 말이 많은 편인 에릭은, 자신의 의뢰를 받아준 장인에게 하나미치야와 어떻게 만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자신은 그녀를 밀어냈다가 다시 친해졌는지를 전부 무의식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물론 생략되겠지만, 앞으로 염장질을 당할 나이젤에게 미리 애도를 보내는 바 이다.
수첩에 에릭이 하는 말을 필기체로 휙휙 갈기며 받아적는 나이젤. 읽을 수 없을 만큼 혼란한 글씨체지만 본인은 읽을 수 있는지 강조해야 할 부분은 위쪽으로 올라가서 밑줄을 그으며... 아무튼 중요한 내용은 놓치지 않고 모두 적고 있다.
"저, 긴 이야기 듣는 거 좋아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카페에 가서는 생과일 주스 한 잔을 시켜놓고 말 많은 에릭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겠지. 말한 것과 달리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수첩에 적지 않는 대신 마음에 새겨넣을 각오로 들어야 한다. 사는 사람과 쓸 사람의 이야기니까. 장인은 만들고 싶은 물건을 만들지만, 상인은 손님이 사고 싶은 물건을 내놓는다. 지금의 나이젤은 둘 다를 겸하고 있고.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요."
얼만큼 이야기가 오갔을 때 손도 대지 않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던져놓듯 꺼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