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 확실히 이것저것 신경 쓸 부분이 많기는 하죠? 그래도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면 금방 적응할거에요. 카사도 나중에는 제가 없어도 카사가 그대로 할 수 있을걸요? ”
카사가 왠지 미간을 찌푸린 체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이 있자 하루는 부드럽게 대답한다. 확실히 카사가 자라온 환경을 생각하면 그녀에겐 모든 것이 복잡하게 느껴질 것은 분명했다. 이어진 자세한 설명만 들어도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보통 고아원 아이들이 놀고 들어오면 그런 식으로 대충 씻고 하루를 속이려 하다가 자주 혼이 나고 제대로 씻곤 했던 것을 떠올리니 카사의 반응이 영 낯선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습관이 되게 도와주면 분명 나아질 것이다.
“ 그건 친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성별이 다른 분이거나 하는게 대부분이니까요. 저랑 카사양은 그런 것에 아무것도 포함되지 않으니까 같이 씻어도 괜찮아요. 싫어하지도 않고. ”
목욕을 하던 중의 카사를 떠올리면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졌으니, 그녀로선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자연스럽게 목욕을 하러 같이 갈 의욕이 마구마구 솟아나고 있었으니, 카사가 귀찮아지지 않을까. 아무튼 머리를 말려주기 위해 자신의 앞으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한 하루는 얌전히 다가와 앉아서 말똥말똥 쳐다보는 카사를 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 자, 그럼 머리를 한번 말려볼까요. 다음번엔... 머리카락도 손질해주면 좋겠네요..”
하루는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들의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어주던 것을 떠올리며, 카사의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해볼 생각을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물론 카사가 싫어한다면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드라이기를 들어보인 하루는 조심스럽게 카사의 머리카락에 가져가서 따스한 바람을 쐬어주기 시작한다. 카사가 뜨거워서 놀라지 않게 먼저 자신의 손등을 거쳐서 카사의 머리카락에 쐬어지도록 하나하나 신경을 써가며 머리를 말려가기 시작한다. 카사의 머리카락이 짧은 머리는 아니었지만, 고아원에서의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책임져오던 하루의 솜씨가 어디 가지 않는지, 금방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이 되어갔다.
“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더 참아줘요, 카사. 다 끝나면 지난번에 해줬던 것도 해줄게요. ”
머리가 일단 뽀송뽀송하게 말려진 것을 확인한 하루가 드라이기를 내려놓으며 자상하게 말하더니, 카사의 이마를 손 끝으로 살살 간지럽히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리곤 이번엔 빗을 든 하루는 척척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손질을 하지 않아서 조금 삐죽삐죽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빗질을 하고, 잘 말린 덕분에 꽤나 매끈한 머리카락으로 변한 카사의 머리를 빗어주던 하루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뻗어 얇은 헤어밴드 두 개를 집어와 요리조리 움직인다.
“ 자, 카사. 거울가서 보고 올래요? 마음에 드는지?”
카사의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준 하루는 방긋 웃으며 거울을 가리켜보였다. 아마도 카사가 거울을 확인하고 올 동안 자신의 머리를 말릴 생각인 듯 했다.
“ 오늘은 머리 모양도 똑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저도 그렇게 해볼거에요. 후후. 카사 마음에 들면 좋겠네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카사를 보면 귀엽다고 할거에요. ”
강찬혁은 연유+크림+우유+딸기라는 딱 봐도 건강에 안 좋아보이는 구성을 보며 고개를 젓는다. 저렇게 먹으면 몸무게(kg)와 키(cm)숫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비만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아니면 당뇨에 걸려서 수술 하나 제대로 못 받는 몸이 되거나. 아니면 가로세로 크기가 같은 정사각형 몸매가 될지도. 뭐 그건 저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고. 강찬혁은 그렇게 생각한다.
강찬혁도 노트를 펼쳤다. 강찬혁의 필기는... 암호나 러브크래프트 호러에 나오는 광인의 노트라 봐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강찬혁 그 자신만큼은 아주 잘 읽고 있었다.
하지만 가디언은 칼로리나 달달한 걸 많이 쓰면 썼지.. 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괜찮지 않을까? (사실 다림주는 무서워졌다! 최애 음료인데!(대신 그걸로 점심이나 저녁을 대신하니까 아직 괜찮겠지..)) 고개를 젓는 걸 보고는 다림은 찬혁을 빤히 봅니다. 뭔가 이상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다가 울리면 받아오겠죠.
찬혁의 노트를 보면 매우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반대로 다림의 노트는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막 영성 B같은 이들이 처음으로 이해하기 쉬운 정도..? 아닌가? 심화학습이야 당연히 어렵겠지만.
"무엇이 가장 어려운 것인가.." 고민하는 듯 빈 노트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건 찬혁과 맞막을 정도로 더러웠지만.
강찬혁은 계속 공부한다. 의념 충격상, 의상 충격념...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여기가 1-3n이라고? 이게 뭐야! 머리 터지겠네. 강찬혁은 한숨을 쉬고 계속 공부하다가 음료수가 나오자 음료수를 쭈우욱 빨아버린다. 사장이 음료수를 내려놓기도 전에 청포도에이드를 다 마셔버린 강찬혁은, 청포도에이드 빈 병을 돌려주며 말한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 말하는 것이, 카사의 평상시와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다. 혀의 쓴 맛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미간을 찌뿌리며 생각을 말로 찬찬히 정리하려고 한다.
"있잖아, 사람들은 원래 다 혼자서 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혼자서 자고, 혼자서 씻고, 혼자서 놀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인지 뭐든 혼자서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 것일까?
"외롭지 않아?"
하루는? 하루는 안 외로워? 카사는 기숙사를 둘러본다. 1인실이 가장 좋다고 들었긴 한데, 혼자서 자는 것은 역시 외롭다. 하루도 하루 같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많은 곳에서 왔지 않나? 원래 그런 차이에 익숙해져야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흐음, 하고, 짐심으로 궁금한듯, 내리깐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건 좋아."
헤실, 하루의 설명에 웃어보인다. 그렇치, 그렇치! 우린 친하고! 응! 성별도 같고, 응! 난 하루랑 친하다! 하는 사실이 대단한 상이기도 한 듯, 어깨를 당당히 피게 된다. 둘 만이 방에 있음에도 거들먹거리는 폼이 여간...
이내 하루 앞에 나름 다소곳히 앉아 있는 카사. 하루의 손에 들려 있는 드라이기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존재는 알고 있고, 본 적은 있긴 한데, 제대로 써보는 건 처음이다! 켜지자 위잉-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하루의 손길에 애써 침착해진다. 끄윽, 참아야 해! 하고 속으로 되내기지만.... 그 노력 무색하게, 기분 좋은 따뜻함에 녹아내린다. 저거 무기가 아니었구나!! 혼자서 써봤을땐 화상입었는데! 신기하다!! 따뜻한 바람도 모자라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내리게 된 하루의 손길. 카사를 함락시키고도 모자랐다. 입안 얼음처럼 주욱 녹아내리지 않게 온 힘을 다하는 카사.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이내 위잉- 하는 소리가 끝기고, 카사는 머리를 한번 푸르르, 흔들었다. 톡, 톡, 조심스레 손 끝으로 만지다가 벌써부터 뽀송뽀송한 감촉이 신기했는 데, 손 바닥으로 머리를 투다닥, 매만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하루가 빗을 가지고 오자 내려나야 겠지만 말이다.
"나, 하루를 위하면 뭐든 참을 수 있어!"
믿어달라고! 완전 믿음직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는 카사. 이리저리 삗친 머리가 신빙성을 더해주는 지는. 글쎄. 그래도 이마에 하루의 간지러운 손길이 닿자 에헤헤, 하고 웃어보이는 것을 보니, 뭐든 좋은 게 아닐까.
"???"
머리카락이 빗겨지다 왠지 이상한 방향으로 머리카락이 틀어지자 얼굴이 혼란스러워진 카사. 금세 그 묘한 감각의 원인을 알아낸다.
?!???? 눈을 동그래 뜨다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본다. 이게... 나? 소녀 만화 같은 감상을 내뱉으며 머리를 툭툭, 건드리고 양 손으로도 잡아보는 게, 여간 신기한듯하다. 휙휙, 머리를 흔들어도 풀리지 않는 깜직한 양갈래에 탄성을 금치 못한다. 핫, 그러다가도 하루의 말에 튀어올른다. 열정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