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짐승이랑 인간. 그 둘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식상한 질문을 한다면, 그 답은 수 없이도 많을 것이다. 그래, 그 선을 긋는 답은 너무나도 많다. 그 어느 한 쪽에 서지 못하는 카사는, 인간 에릭을 바라본다. 애매모호한 답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하는 중인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실감이 난다. 에릭의 손에 들려진 치료서가 눈에 든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책.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짧게 불평하는 카사.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시선을 먼저 돌리는 것은 카사고, 패배자도 카사일테다. 어질어질한 마음에 애꿏은 벤치를 발로 찬다. 깡, 하는 소리가 나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벤치. 날라갔다면 그것대로 곤란 했을테지만, 왠지 자신의 무지함과 무력감이 생각나 얼굴이 구겨진다.
희망을 잃은 눈의 소년과 망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녀는 침묵한다.
"..."
본능이 의무를 속삭인다. 본능이 현실을 속삭인다. 그리고 소녀는 수많은 모르는 것 중에서 아는 것 하나를 집어 낸다.
에릭의 미소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소년이 동료라고 느껴버린 카사는 그 사실을 손쉽게 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듯 에릭의 말이 카사의 작은 심장을 죄어온다.
카사는 훌륭한 워리어가... '카사'. '훌륭한'. '워리어'. 아아. 작은 속삼임. 워리어의 의무는 지킨다는 거야.
"싫어."
에릭의 긴 말을 한 마디로 답한다. 어느 부분의 대한 답일까. 하나의 답이긴 할까? 카사는 찌뿌린 얼굴을 피지 않고 뒤로 돈다. 에릭과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명쾌한 대답 하나 없이, 말 하면 할 수록 심장이 아프다. 어질어질하다. 엉킨 실타래가 생각난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것에서 멀어지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 뒤로 돌아서, 멀리 걸어가기 시작한다.
시작만 하고, 잠시 멈춰선다.
"그때 말이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이해하지 못하고 실패만 나타내는 치료서의 감촉. 그래도 놓기 싫어진다.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럴까. 얼굴을 돌려 에릭을 바라보지 않는다.
"조금 더 강해지면. 도와줄께. 도와줄꺼야."
일방적인 약속이자 다짐을 내뱉으면서도 에릭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카사는 그래도 멀리 뛰어 간다.
// 연애 상담하러 왔는데 결국 서로의 상처만 후벼 판 동문. 그 둘의 운명은?!
수고했습니다 에릭주!!!! 진짜로 막 감정적이고 에릭의 캐릭터 짱이고 막 서로의 과거사가 이렇게 엃히고 막 (주접
지금 같이 있는 동료는 워리어. 의념기는 공격 계열은 아니지만, 적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계열의 능력. 자신은 서포터. 둘의 딜로는 저 무시무시한 자판기를 격퇴하기엔 무리다. 자판기... 얼만큼의 딜이 들어올진 모르겠지만 일단 무섭다. 닿는 순간 썰릴 것 같은 이미지다. 다른 사람... 어디에 있지?
이름도 모르는 1학년(추정)이 달리며 하는 말을 한 줄 한 줄 머리에 새기며 방안을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압도적인 적을 상대하는 법. 학교 안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선생님이 나타나서 수습해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당장은 와줄 것 같지 않다. 둘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료수를 발견하고 벌써 한 바퀴 돌았던가, 를 생각하기도 전에 은후가 음료캔을 발로 차 날렸다. 그 킥은 의외의 결과를 나타냈다. 내용물이 흘러나온 것치곤 꽤 많은 양이 남아있던 콜라 캔이 가볍게 날아가며 동전투입구로 콜라가 조금 흘러들어갔다는 것. 그 순간 자판기는 뭔가 처리하는 듯 칼날을 집어넣고 움직임을 멈췄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듯 붉은 라이트를 깜빡이며 움직임을 재개했다.
"확실히... 뭔가 먹힌 것 같긴 하네요." [동전 투입구엔 동전만 넣어 주세요!]
자판기가 멈춘 동안 꽤 거리를 확보한 나이젤이 은후를 보며 말했다.
"...저기, 조금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수락했으면... 대충 >>16의 진상과 "혹시 돈을 결제하면 저 자판기가 멈추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가 맞았지만... 이런 것이라도 제노시아라면 혹시? 가 역시!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유후, 실패던 성공이던, 경험이란 것은 유의미한 결과를 남기는 법이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다른 캔을 들어올린 은후의 행동이 잠시 멈추었다. 파티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좋은 파티원이지.
...
"아니, 그런 행동이 용인되나요??? 여기 제노시아는?????"
아무리 장인들을 만들어내는 아카데미라고 해도, 학생이 멋대로 함정 같은걸 만들어서 학교에 두게 놔둔다고? 은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여긴 제노로운 평화시아고, 이런 일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뭐... 다른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다시 속도를 높여 다가오는 자판기를 피해 달리면서도, 은후는 착실히 자신의 브라운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동전 여러개 정도는 주머니에 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사격을 하는 감각을 떠올리면서, 몸을 돌려 힘차게 자판기의 동전 투입구를 향해 그것을 던졌고... 힘차게 들어간 동전을 받은 자판기는 다시 칼날을 집어넣었다.
"근데... 음료 가격이 얼마죠? 숫자 보이시나요?"
방금 전 처럼 처리 상태로 돌아온 자판기를 노려보며 은후는 남은 동전을 꽉 쥐었다. 설마, 돌+I여도 가격 책정은 양심껏 해놨겠지.
확정된 건 아니겠지만 장난용으로 따로 만든 자판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장잉력 높은 잉여라고 해도 굳이 학교 자판기를 직접 개조해서 저런 걸 붙이진 않겠지. 기물파손이고 걸릴 가능성이 너무 크다. 학교에서 함정 같은 걸 설치하는 걸 가만히 냅두진 않지만, 마경-제노시아-의 악마들은 통제를 거부한다. 서류를 조작해서 아다만티움 4톤을 학교로 주문한 사람만 봐도... (대충 1스레에서 나온 공문 이야기라는 내용)
"잘 던지시네요?"
[투척]이나 비슷한 계열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젤은 동전을 받아먹고 다시 정지한 자판기를 응시하다가 가격 얘기를 듣고 콜라로 얼룩진 유리를 쳐다봤다. 이걸로 값이 안 된다던가 하면 피의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다행히 자판기는 평범한 자판기처럼 음료수 하나에 5GP~10GP의 가격대였고, 은후가 집어넣은 동전으로는 충분히 두 사람 몫의 음료수를 계산할 수 있었다.
자판기는 잠시 지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칼날을 꺼내지도, 투입구에서 음료수를 발사하지도, 미친 속도로 복도와 바닥에 칼자국을 내며 돌진하지도 않았다. 나이젤이 겁 없이 다가가 투입구가 열리지 않도록 발로 살포시 밟고 자판기를 똑똑 두드렸다.
"...된 것 같은데요?"
정말 이게 방법이었다니 이 함정 자판기의 제작자는... 정말... 평범한 사고방식의 돌+I였다. 물건을 강매하긴 하지만 제값에 팔아먹는 자판기라니. 하지만 둘이 산 음료수는 이미 자판기 앞면과 바닥에 다 엎질러진 후라서, 사라진 건 오직 은후의 돈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상처뿐인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승리라는 말도 무색하다. 이걸 만든 사람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까. 이 자판기를 증거로 제출하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은후는 말을 더 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으며 에휴, 하는 소리를 냈다. 뭐, 여러 방면으로 어리숙한 1학년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아무래도 깨달음이라는게 생기는 법일지도 모르는 법이다. 가령, 제노시아의 학생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 비율이 높다- 라던가.
"운이 좋아서에요."
본인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자판기에 대한 긴장을 풀지 않고 슬금슬금 조금만 앞으로 다가가 숫자를 본 은후는 긴장을 풀고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실로 다행이다. 은후는 거지라고! 아무리 일상이라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같은 것이기에(?) 그는 함정 자판기를 만든 돌+I가 의외로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를 올렸다. 겁 없이 자판기에 다가간 나이젤과는 달리 자판기에 다가가기도 싫은 은후는, 충분히 작동을 멈춘 그것을 들고 빛의 속도로 교무실에 뛰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이 파티는 이걸로 끝.
"수고하셨습니다. 신 은후에요. 1학년이고... 19살이고... 워리... 아, 이건 이야기 했지 참."
당신은요? 라는 말 대신 은후는 앉은채로 나이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똑바로 나이젤의 얼굴을 보는건 은후에게는 처음일지도.
적절한 관용구를 말하긴 했지만, 운만으로 작은 동전 투입구에 골인시킬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조금 돌려 말한 칭찬이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건지 주저앉은 은후를 보고, 거부하지 않는다면 격려의 의미로 어깨라도 툭툭 쳐줄 생각을 하며 손을 뻗었을까.
"저는 나이젤 그람, 19살이에요. 동갑이었네요. 저도 서포터란 건 아까 말했었죠?"
얼굴을 보려 했다면, 긴 앞머리의 소년이 눈을 찌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녹색 눈으로 미소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적당히 봐줄만한 정도는 되지만 매력은 은후에게 한참 못 미치는 C. 도망치느라 바빠서 보지도 못했던 당신의 얼굴을 보고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원래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은후의 과거는 모르니까 순수하게 외모에 놀란 것이었겠지.
"...아무튼, 이런 걸 만드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 자기 길에만 묵묵히 매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굳이 이런 말을 한 건... 제노시아가 1학년 학생에게 마굴로 인식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마굴이 아닌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아무튼 아주 나쁜 곳은 아니란 것이다. 즉 뒤늦은 수습? 이미 늦어버린 거 아닐까?
"이번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도 돼요. 평소엔 살인 자판기가 나타나도 지나가는 학생들이 처리하기도 하는데, 하필 사람이 없을 때여서..."
평소에 살인 자판기가 나타나는 학교에 들어온 것 자체가 이번이 아니라 그냥 운이 나쁜 것 아닌가? 라는 정론을 들으면 할 말은 없지만... 아니, 이 학교엔 행운아도 있으니까!
"이건 직접 옮기긴 힘들테니 선생님께 말해서 처리하는 게 좋겠네요."
청소거리가 생긴 걸 어떻게 알았는지 와서 바닥을 닦으려 하는 미어캣과 캔을 버리려고 하는 미어캣과 벽의 칼자국을 보고 (미어캣은 속았습니다)짤의 표정을 짓는 미어캣을 보며 나이젤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미어캣 씨 안녕하세요.
강찬혁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껄껄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글쎄, 아무리 카사가 그새 강해졌다고 해도 그건 아닐 거 같다. 적어도 한손가락에 죽지는 않을 거다. 그때 싸워봤을 때, 야수화된 카사를 상대로 꽤나 오래 버틴 걸 생각해보면 진짜로 대련을 해도 살아있을 수 있으리라. 그때는, 강찬혁이 거의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당한 특수한 상황이었고. 강찬혁은 2년을 겨우겨우 날로 먹은 터라 레벨 7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들어온 1학년이 벌써 강찬혁을 죽일 수 있을까. 강찬혁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감사하실 건 없는걸요.. 그..친구랑 시간을 보내고 싶던 건 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
이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꺼내기는 부끄러웠는지, 기쁜 듯 말해오는 에미리에게 하루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져선 우물쭈물 답하는 하루였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향한 칭찬이나 감사에는 몹시 약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러워 했다.
" 그, 그리고 오해하실까봐 말하자면... 전, 친구랑 공부하는 것만 좋아하는건 아니니까요.. "
하루는 부끄러움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며 (예시표정 @_@), 자그마한 두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무래도 고아원에선 친구라고 부를 존재들보단 동생들만 가득했던 환경이었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고아원 출신이라는 점과, 자신이 자처해서 고아원의 일을 도왔기 때문에 의외로 친구들과 노는 경험이 적은 하루였다.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자라오는 동안 그녀를 좋아해준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루는 알 수 있을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