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만약에 카사가 덜 공포에 질려있었다면, 에릭의 반응에 매우 즐거워 깔깔 웃었을 것이다. 허나 에릭에게 행운, 카사에게는 불행하게도, 카사는 본인의 공포 상태이상에 온 신경이 쏠려있는 상태였다. 몸을 숨기듯 쭈그려 앉아, 벤치의 등 받이를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있던 카사는 숨 조차 멈추며 에릭의 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해방. 매너모드 핸드폰 마냥 덜덜덜덜덜덜 떨고 있던 카사의 떨림이 잦아들어간다. 에릭은 카사의 반응이 고로의 반응과 꽤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꽤가 아니라 판박일수도 모를테지만 말이다.
"! 성이었구나! 아, 아니."
눈이 동그래 뜨여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정말 몰랐다! 이름이라는 개념조차 별로 쓰지 않던 카사로선, 누가 이름을 소개할때는 그게 바로 불리는 명칭인 줄 알았다! 카사처럼 말이다! 특히 말로 할때는 어떤게 성이고 뭐고 알기도 힘들다! 이름을 통채로 부르는 버릇은 이 간단한 사실에게 유래했다.
왠지 저 인간이 이름을 불린 거 만으로도 엄청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으로 불리는 게 그렇게 슬펐나 보다! 잘못된 판단을 한 가디언 박제범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그나저나, 에릭이란 이름은 꽤 흔한거 같다. 그리고 조금 뒤적이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치료서」.
자판기에서 스포츠 음료 한 병이나 뽑아 마실까-. 그런 생각이 자판기에게 쫓기는 결말을 가져올줄은 그때의 은후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제노시아에서 가장 짜릿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개봉박두!!!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꾸준한 수분 섭취는 필수!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동아리방을 나온 은후는 허전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지금은 수업 후 충분히 시간이 흐른 상태고, 아직까지도 부활동을 하는 일부의 학생을 빼고선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등등, 가지각색의 이유로 학교 밖으로 나갔을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렇게 조용하다니, 신기하네."
그리고... 보통 이런 혼잣말은 미래로의 플래그를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계단 근처에 자판기가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모퉁이를 도는 은후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전력... 질주? 누군가가 뛰는 소리 같은데. 뭐, 방과후니 이렇게 뛰어도 괜찮을지도. 같은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이, 그 요란한 발소리는 점점 은후를 향해 다가왔고...
"으잉?"
아니 이게 뭐시당가. 평온한 표정으로 달려오면서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는 정체모를 누군가와 이상한 자판기를 본 은후는 A라는 영성에도 불구하고 잠시 스턴 상태에 빠졌다.
"뭔데? 뭔데뭔데뭔데???!?!?!?!?!"
아니 저게 나한테 음료수캔을 쏘는데요! 다행히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은후는 가까스로 음료수캔을 피했지만, 이상한 자판기는 그런 은후를 보고(?) 더 열이 오른 모양이다. 발광하듯 사방팔방으로 펄쩍펄쩍대면서 뛰던 그것은, 언제 자신이 발광했다는듯 다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 저기... 아, 아니... 일단 다시 뛰어!"
나이젤에게 뭘 물어보려다가, 자판기를 보고 포기한 은후는 이렇게 나이젤과 같이 자판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사... 사람살려...!
역시 침울해 하는 걸까. 기껏 얻은 첫 사냥 수확을 뺏긴 사자마냥 바라보는 카사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에릭에게 있어서 이 치료서는 광인의 산물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이기적인.. ..... .... 하나미치야가 싫어하는 귀나 꼬리를 없에준다면 날 다시봐줄까?
에릭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고갤 저어댔다. 어째서일까, 붉은 피의 바다의 여왕 때문 일 것 이다. 이런 생각을 할리가 없다.
" 그래도 뭔가 챙겨주고 싶은데.. 아마도 나는 이걸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거야. 어쩌면 그냥 줘버릴지도 모르고. "
에릭은 스스로를 잘 알고있다. 낮은 자존감, 형편없는 재능 그런 것을 희생플레이나 선의라는 포장지를 덕지덕지 바른 비틀린 감정을 통해 만회하려든다. 이 책도 그런 감정에 의해 희생될 바엔. 차라리 다른 이 에게 팔아서 카사에게 새로운 걸 사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 .......응? 메리와..왜 같이 다니냐고? 그게 궁금해? "
하긴 궁금할만도 하지, 그런 괴물과 왜 같이 다니는지 궁금해하는게 정상이다. 에릭은 카사를 향해 키를 살짝 낮추며 똑같이 흉내내듯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뭔데x4에 대한 답변이었다. 은후가 스턴 상태에 빠진 사이 거리를 벌리려던 나이젤이 멈췄다. 자판기가 뭔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였지만... 쫓아오는 걸 재개할 줄 알았더라면 그래선 안 됐는데! 투척된 음료수캔은 은후가 피하자 복도 저 너머로 날아갔다. 나중에 실수로 밟거나 하면 레이싱 게임의 바나나껍질 역할을 맡을...지도?
"그렇네요. 빨리 뛰어야겠어요. 저 자판기 굉장히 살의가 넘쳐보이는걸요-"
은후가 왔던 길로, 올 때는 하나였지만 갈 때는 셋이로다. 다행히 다시 음료수를 투척하는 공격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자판기는 빠르고... 위협적이고... 강력했다. 조금이라도 늦춰지면 목 뒤쪽에 금속질 다리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서늘한 바람이 와닿는다던가.
이게! 이게 무슨 자판기란 말인가! 은후는 나이젤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졌다, 물론, 그것이 나이젤의 잘못은 분명 아니지만, 두 사람 뒤를 맹렬히 쫓아오는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자판기가 아닌것은 맞지 않는가.
"어쩌다? 학교 자판기가? 학생한테 살의를 가진건데??? 아니, 애초에 자판기에 왜 다리가 달린건데???"
신속 S의 힘이고 뭐고, 소름끼치는 금속 소리와 서늘한 바람을 보아 저 자판기도 보통 내기는 아닌것이 분명했다. 은후는 이 세 사람... 아니, 두 사람과 한 기계와의 레이스가 까딱하면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선생님들은 아직 학교에 계시나? 보통 학교는 그렇지만, 가디언 아카데미도 그런가? 동아리실로 들어가서 선배들한테 도움을 요청하나? 그러다 동아리에서 쫓겨나면 어쩌지? 은후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에릭이 치료서를 바라보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왜 일까? 미간이 찌뿌려지면서도 고개를 기울어 에릭의 말을 듣는다.
"그래도 괜찮아. 에릭이 많이 힘냈잖아. 난 봤어. 에릭이 아니었다면 우린 거기서 죽었어."
꼼지락, 말을 곰곰히 생각하는 듯이, 카사의 거친 손가락이 이리저리 얽혀 움직인다. 사냥에서도 사냥에 제일 많이 기여한 녀석이 제일 먼저 먹는다. 그 다음은 아픈애들이랑 어린애들이고, 나머지는 마지막으로 먹는다. 카사는 첫번째도 아니었고, 아프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다 큰 어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앞서도 나머지를 지키는 데에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먹는 게 옳다. 에릭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는 채, 카사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다 에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미간이 모아져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숙여지는 에릭의 고개. 그의 금발이 귓불을 간지럽히자 숨을 잠시 멎는다.
눈이 커진다. 탁, 순식간에 에릭의 손을 잡아채려한다. 에릭을 똑바로 바라보는 떨리는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충격이 아니었다.
"위험해."
굳게 다문 입이 달싹이다 떨어졌다. 위험했다. 위험하고 위험했다. 카사는 알았다. 의뢰의 팀원들은 하나도 모르는 거 같았다. 「그녀」를 정말로 인간인 마냥 말을 걸고 같이 걸었다. 하지만 카사는 알고 있었다! 그때 도와주었다해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그리고 죽인다는 무게를 담은 에릭의 선언은 진실이었다. 카사의 몸이 떨린다. 지켜야 했다. 충촉되지 않는 본능이 속삭인다.
"...「그녀」는 정말로 위험해. 진짜로 위험해."
// 동문(?)의 두 학생이 다 자존감 바닥이다. 다 아브엘라 탓이다 (아님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