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이분법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손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살기 위해선 이 소년의 발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영웅이라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분명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영웅이 말이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날 바라봤다. 마치 즐거운 장난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저런 눈이라도 괜찮다. 나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좋아. 내 소원을 이루어다오.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다가간다. 어쩌다보니 "나는 바보다"라는 팻말이 걸리적거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10m면 사람이 정말 작게 보이는 거리다. 그리고 말을 하기에는 정말로 힘든 거리.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한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처분을 하기 전에 피해자 자격인 강찬혁의 이야긴느 왜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다. 강찬혁은 약속한다.
문제: 에릭 하르트만에게 책을 돌려줘야 한다. 난관: ...........무서워........ 해답: 혼자일때 덥치자.
그리고 지금.
소년이 슬피 청춘과 인연의 스림을 되짚어보던 중 스윽, 벤치뒤에서 작은 소녀 한 마리가 나타난다. 스으으윽, 에릭이 정신이 팔린 사이, 그의 뒤에서부터 코를 가까이 댄다.
킁킁. 의념까지 사용해가며 냄새를 맡는 카사.
...주위에 「그녀」의 냄새는 없다. 에릭 하르트만에게도 「그녀」와 헤어진지 꽤 된거 같다. 왠 다른 이상한... 그, 사람? 여우? 같은 냄새가 묻어 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아니, 매우 다행이었다. 이상한 비인간 생명체를 숭배하는 광신도로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같이 싸워보니 그건 아닌거 같았다. 많이 많이 도와주고, 같은 편이었으니까, 이제 닥치는 대로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었다.
"에릭 하르트만."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속삭이듯이 등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카사. 확인을 해도 잔뜩 긴장한건지 몸을 내리깔고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불쑥 하고 나타나자, 에릭이 가장 처음 보인 반응은 점프스퀘어 공포물을 봤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두자, 벤치에서 꼴 사납게 넘어진 에릭은 어버버 거리며 카사를 올려다 보았지만. 곧 메리가 지금 없냐고 물어보는 카사의 말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아? 어 메리는 지금 없지. 기숙사에서 고로(고양이)와 놀고 있어.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
에릭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카사를 바라보며 왜 여기 왔는지 살펴보기도 잠시. 뭔가...자신의 이름을 성추행범. 혹은 수상한 무엇이 아닌 에릭으로 기억하는 그녀의 반응에 감동한듯 에릭은 왈칵 하고 눈물을 흘렸다.
휘휘휘휘힉. 두두두두ㅜ두두두두ㅜ. 찬혁이 다가오는 만큼 빠르게 물러서는 카사. 팻말을 덜렁덜렁 매달고 좆아오는 소년과 신속하게 뒷걸음으로 도망치는 소녀는 괴이한 관경을 만들어냈다. 와중에 카사는 매우,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아니, 애초에 왜??? 내가 떨어져 있는 건 너한테 좋은 거 아니야~~??"
솔직이, 처음 의념을 깨웠던, 아주아주아주 어릴 적 기억이 나서 훨씬 더 무섭다. 꺄르르 놀다가 그냥 약간 힘내야지, 하고 생각하며 툭 쳤는 데 깽- 하며 멀리 날아간 형제의 모습이 눈앞에서 일렁인다. 그리고 카사에게 깃드는 의념! 능력의 의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념! 「지켜야 한다!」
문득, 기나긴 꿈에서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납치사건 이후 기나긴 잠에 들었다 깬 듯 흑색으로 칠해진 기억과, 자릿수가 바뀐 달력.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그날 크게 다쳤다 깨어난 것 처럼. 어린 지아는 자신의 몸에 걸쳐진 늘 입고다녔던 캐릭터가 그려진 긴팔 티셔츠가 아닌 새하얀 병원복 차림의 자신의 모습, 자신이 기억하는 것 보다 한 마디쯤 커진 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와서 펑펑 울며 껴안았다. 지아야, 정말 미안해, 왜라고 물어도 그저 미안해라는 말만 되뇌이는 엄마의 말에 어린 나는 괜찮아, 이렇게 일어났는걸. 나 몇년이나 자고있었어? 라며 그저 느낀대로 대답했다. 어째서인지 엄마는 더 꽉 안아주시더니, 힘든 일 있으면 이야기 해줘야 해? 라며 그때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말을 남기고는 바쁘게 통화를 받으며 나가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날의 단편이었다.
...
창 밖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흑색으로 칠해진 기억은 꿈으로나마 알게되는 불완전한 귀퉁이조각들 뿐이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내 가장 어두운 기억들과 마주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싶다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나름대로 평온한 표정으로 의념까지 써가며 복도를 달리고 있는 한 명의 학생이 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복도에서 뛰지 마시오'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 정도면 학교에서도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긴급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판기가 쫓아오고 있다. 제노시아에서는 자판기가 사람을 쫓아옵니다! 날카로운 칼날같은 여러 개의 금속 다리로 무서운 속도로 벽과 바닥을 오가며 달려오는 자판기는... 꽤... 아니 많이? 위협적이었다.
"거기 계신 분, 계속 계시면 위험해요."
그리고 도망치던 나이젤은 복도에 있던 한 명의 학생을 발견했다. 어라, 휘말리게 하면 곤란한데? 하고 생각하며 말을 했지만 차분한 말투로 내뱉은 말은 너무 길었고, 자판기가 그 학생을 발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잠깐 멈춰선 자판기는 잠깐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투입구를 열어 수수께끼의 음료수를 학생에게 투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