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세상에. 나는 저런 표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너무나도 익숙했다. 지워진 기억의 한 모퉁이에서, 느낌만 남아버린 허무한 감정들. 마치 거울에 비춘 것 같아서 꼬옥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쥐고있던 손을 놓지 않는 것. 아주 작은 움직임이지만 잔혹한 진실이더라도 덜 아프게 해주는 것.
>> 프랑켄슈타인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여기서 살아남기란 어렵단 사실 정돈, 모두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던 카사는 바닥에 처박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고 아군의 공격을 담당하던 메리는 붉은 드레스가 먼지에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포터들의 상황도 좋은 편은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반복했습니다. 운이 좋지 않았을 뿐. 다림은 전선의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이건, 운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저 운이 나빠서, 운이 나빠서..
에릭은 가방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정체 모를 책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방 속에 나타난 이 책에는 이제 갓 스무장의 이야기가 쓰여있었습니다. 에릭의 행동, 삶, 생각. 하나하나 모든 것이 쓰인 이 책을 처음에는 메리가 하는 지독한 장난이라 생각했던 에릭은 메리에게 책을 들여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릭은 그때 돌아왔던 반응을 잊을 수 없습니다.
' 무엇이 보인다는 말인지 모르겠어서요? 제 눈에는 아주 깨끗한 백지인데 말이죠. '
에릭은 그 뒤에 이 물건의 정보를 알고 나서 작은 혼란을 느꼈습니다. 비록 '절대로 파손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더라도 이 물건에는 당당히 코스트란 이름이 붙어있었습니다.
만약 이 물건이 코스트라면,
에릭은 이 물건의 사용이 과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분명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이 것의 도움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지만 에릭은 이 물건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아군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것이.. 영웅이니까요. 에릭이 책을 펼치려는 순간, 책은 무언가를 거부하는 것처럼 스무 장 이후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책은 천천히 에릭을 책의 첫 장으로 안내합니다. 검은색의 책장을 바라보며 에릭은 혼란을 느낍니다. 그것은 완전히 흑빛으로 물든 종이입니다. 아무 내용도 쓰이지 않은, 검은 페이지를 바라보며 에릭이 분노를 토하기도 전에.
책에는 붉은 문장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 협회의 7검 에릭 하르트만은 독일의 가디언으로써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북아시아 가디언 아카데미 청월고등학교를 수학하고 학생회장의 자리를 역임하였으며 사랑하는 연인, 하나미치야 이카나와 결혼하여 독일의 가디언이 되었다. 그 뒤로 검성의 가르침을 받고 수학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를 다스리고자 노력하였으며 수많은 대형 게이트들을 닫았고, 초대형 게이트인 '검은 역병'을 클로징하여 일약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에릭은 이 문장을 읽고 의문을 느낍니다. 검을 잡기로 한 것은 최근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에 쓰이는 문장은 마치 그때, 유찬영을 만나지 못 했고 에반에게 가르침을 얻었다는 에릭의 서사가 쓰여있습니다. 그래요. 마치 거짓된..
" 언제나 희생할 필요는 없데요! 때론 누군가에게 매달려서 방법을 기대보는 것도 방법이래요! 이만 갈게요! "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던 만큼, 토끼는 갑작스럽게 사라집니다. 에릭은.. 검을 붙잡고 앞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에릭은 폭발할 것만 같은 의념의 힘을 느낍니다. 에릭의 손을 시작으로 팔과 다리, 머리, 눈, 혈관 하나하나. 그 모든 곳에 스며드는 의념의 힘을 그대로 느낍니다.
.. 에릭의 머리카락이 연한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눈을 감고, 천천히 눈을 뜹니다. 눈동자는 진한 붉은 색을 띄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에릭은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에릭이 저 검은 페이지의 결과를 따라갔더라면 이루어졌을 결과. 그 일부일 뿐입니다. 협회의 7검. 그것은 협회에 소속된 강력한 일곱 검사를 뜻할 뿐, 그것이 에릭을 상징하는 이명은 아닙니다. 에릭은 자신의 이명을 기억해냅니다.
시구르드에릭 하르트만
비록, 이미 말소된 미래라 하더라도, 지금은 힘을 빌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에릭은 검을 잡습니다. 용을 베는 마검, 발뭉은 에릭에게 묻습니다.
' 저것은 용인가? '
아니다.
' 그렇다면 왜 나를 휘두르고자 하는 거지? '
저것은, 무엇도 되지 못한. 괴물일 뿐이니. 영웅인 내가 처벌할 뿐이다.
발뭉은, 웃음을 터트립니다.
' 그 지독한 영웅심은 여전하구나! '
에릭은 천천히 자세를 취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에릭은 에릭이되, 에릭이 아닙니다. 검을 들고 있는 자세부터가 그렇습니다. 에릭의 파지법은 서툴었지만 지금의 에릭은 누구보다 능숙하게 검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릭은 천천히 걸음을 뗍니다. 그 것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바르르 떨고 있습니다.
단지 에릭은 천천히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검집에서 발뭉을 뽑아들고 천천히 검을 휘둘렀을 뿐입니다.
키이잉
검의 청량한 검음이 울리고,
세상은 붕괴됩니다.
괴물의 육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불가능, 비이상, 비현실적인 참격일 뿐입니다.
의념기
그러나 그것이 일격이라는 사실만큼은 모두가 눈치채고 있습니다. 다만 저런 것이 가능한 것은 최소로 두더라도 2세대의 중역밖에 없습니다. 3세대. 그것도 늦은 3세대인 에릭이 휘두를 일격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독한 현실이 세상에 구현됩니다.
파프닐의 추락.
말 그대로 용을 베어버린 일격이 세상에 재현됩니다! 한 번의 참격에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했던 비늘을 베어내고, 끝나지 않은 참격은 용의 목을 떨어트립니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더더욱, 멀리, 참격은 나아갑니다.
무너집니다! 무너집니다! 용의 거대한 육체를 망가트렸던 일격이 그와 어울리지 않은 상대에 의해 닿아, 말 그대로 몸을 찢어발겨버립니다.
하늘을 바라본 채로, 괴물은 에메랄드빛 눈으로 에릭을 바라봅니다.
에릭은 두 손을 모으고, 가볍게 고개를 숙입니다.
" 주의 품에선 안식을 찾으시길. "
그리고, 완전히 무너진 괴물의 육체를 끝으로. 에릭은 숨을 몰아쉽니다. 원래의 에릭 하르트만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 경고. ]
가디언 칩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 망념의 한계치에 도달. ]
에릭의 망념은 아득히 100을 넘어 가르키고 있습니다.
[ 본 가디언의 망념화를 확인.. ]
그때, 메리는 천천히 에릭에게 다가와 에릭의 목을 물어뜯습니다. 모두가 그 움직임을 말리기 전에, 에릭은 그 행위를 알고 있기에 무거운 팔을 들어올립니다. 수없는 피를 삼킨 뒤에야, 메리는 천천히 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