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되어라. 그 말이 얼마나 잔혹한 단어인지 아직 여기 대부분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수많은 고통과, 위협과, 희생을 감수하고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일어나는 것을 할 수 없어 쓰러진 채, 눈을 감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드디어 길다 긴 잔소리가 끊기자 카사의 얼굴이 환해진다. 드디어! 드디어 해방이다! 잠시라도 돌려진 말꼬리를 놓칠라 붙잡는다.
"나, 말 가르쳐준 사람! 가디언이었데!"
후르르륵 고기를 마시듯이 먹으면서도 말을 잘한다. 할멈을 설명하면서도 죽어도 키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할멈'이라 불리는 여인이 일방적으로 모성애 같은 것을 느껴도 카사에서 그녀는 그저 집사일 뿐이라는 비정한 현실이 있다. 말을 하다 설명을 충분히 안했다는 것을 깨달았는 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 덧붙인다.
"말했나? 나 산에서 자랐으니까!"
...물론 덧붙혀서도 별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지훈의 지적에 그게 왜? 라는 의문어린 시선을 던질 뿐. 아예 감정을 숨긴다는 전제가 입력되지 않은 것일까? 오히려 그 덕분에 지훈에게 숨김없는 호의와 친금감을 보이는 지라 좋은 것일테다.
물론 살의도 함께지만 말이다.
"그치!"
나 착하지! 지훈을 말에 의기양양하다 못해 힘을 얻은 듯 당당하고 힘차게 어깨를 핀다. 아니, 피는 것도 모자라 지훈이 손을 내뻗는 기미가 보이자 아예 쓰다듬기 편하라고 고개를 숙인다. 후훗, 보는 눈은 있구만! 자, 어서 나를 쓰다듬어라 닝겐!
"엑..."
금지?! 쿠궁, 동공에 지진이 난다. 난 맨날 날것으로 먹었는데, 이 깐깐한 한지훈 같으니라고! 잔소리도 무릅쓰고 그냥 생고기를 집어 입에 넣으려고 했으나, 뒤따르는 말에 우뚝, 멈춰선다. 아, 안 사줄 것이라니... 치사했다! 그래도 결국은 굴복. 다시 자리로 찌그러지고, 더 빨리 구워지라는 듯이 고기판을 노려본다.
"....쳇.... 날 것으로 먹을 깡도 없으면 왜 숲으로 간거야?"
진심으로 먹이 사냥만을 이유로 숲에 갈 것이라 생각한 질문이다. 다만 반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사람들은 주로 숲으로 가지 않지 않나?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도 지훈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절로 묻어나온다.
강찬혁의 과거사는 신체가 훼손되는 잔혹성보다는 강찬혁이 처한 상황의 비참함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글을 목표로 했는데(언급한 바 있는 딸 심장병 수술비 때문에 돈을 빌린 아버지를 협박한다던지) 글이 늘어질 우려도 있고 결정적으로 저어가 심적으로 힘들어져서 포기했읍니다...
난... 평범한 캐릭터도 좋다고 생각해... 진석이도 좋아. 정말 좋아해. 불행하고... 특별하고... 특이하고... 그런 것보다 뒤쳐질 것 없다고 생각해. 좋지 않아? 캐릭터가 늘 평범하다고 해도... 진석이도 재밌고. 진석주랑 얘기하는 것도 재밌고. 난 그걸로 좋은데.
말꼬리를 놓치지 않는 카사를 보고는 계속 잔소리를 할까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을까. 더 놀리면 화낼지도 모르고.
" 흐응. 말 안 해줬는데. 이번에 처음 들었어. "
...아닌 것 같아도 이건 꽤나 놀란 표정이다. 카사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채를 띠기 시작했으니까. 산에서 자랐던 건가. 어쩐지, 공격받을 때마다 느껴지던 짐승같은 기백은 정말로 포식자의 무언가였구나...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지.
" 그러면 말 가르쳐준 사람하고는 무슨 관계야? "
키워줬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잘 이해가 안 된 부분을 질문했다. 지훈의 생각으로는 아마 그 할멈이란 사람은 양어머니... 라는 느낌이었다. 카사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게 왜? 라는 시선에, 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으려나.
" 쓰다듬는 거 좋아하나봐. "
의기양양한 카사의 모습이 귀여운지 그녀를 빠안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손을 갖다대더니 카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 부슬부슬한 감각... 기분 좋네. 한참을 쓰다듬던 지훈은 곧이어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카사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동시에 질문했다.
카사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 것 같지만... 뭐, 그건 넘어가자. 어차피 저런 반응을 예상했지 않았던가. 귀엽기도 했고.
" 사냥하러 가는게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러 가는 거야. "
짧게 말하고는 잠시동안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표현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 도시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들이 마구 내 생각 속으로 침범해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니까. 숲으로 도망치는 거지. 온전히 나만의 생각만이 남도록. "
"그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복잡한 일도 꽤나 수월해진 것처럼 느껴지니까." 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카사를 향해, 알 것 같아? 라는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건 덤이었지.
그으래?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숨긴 적은 없는데? 숨겨서 라기보단 딱히 말할 이유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 쪽으로도 생각을 안 했는지 의외라는 모습이다.
"관계? 으음... 많은 거 가르쳐주고. 고기를 구워주고. 글을 가르치고. 요리도 해주고..."
반절이 밥먹이는 것에 관련된 것은 착각이 아닐테다. 관계라니, 곰곰히 생각하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탁, 손바닥을 친다.
"내 무리 일원이지!"
내 깔이야! 라고 말하듯히 당찬 목소리다. (저 멀리 그 '할멈'이 피눈물 흘릴 이야기다.) 물론 한지훈 너도 내 무리 속에 특! 별! 히! 넣어줄께, 하고 비밀을 얘기하듯이 속삭인다. 아주 큰 선심을 쓴다는 건방진 표정도 같이 말이다.
"그래서 이 내가, 크흠, 쓰다듬는 것도 허락하는 거거든? 싫은 건 아니지만..."
고마워 하라고! 사냥감 주제에 이렇게 높이 대해주는 거, 크흠 크흠, 나 정도 되야 해주니까! 크흠 크흠. 콧대 높은 말과 다르게, 지훈의 손놀림(?)이 꽤 마음에 들었는 지 표정이 슬슬 풀어진다. 만족스레 지훈의 손길을 만끽하다, 이내 손이 떨어져 나갈때 머리도 같이 따라갈 뻔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하자.
"생각 정리?"
이해를 못했다는 듯 눈이 동그래지다, 이내 이어지는 지훈의 말을 귀기울려 듣고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알거 같아. 도시 같은 곳은 시끄러우니까. 나도 여기 오고 서야 다른 사람 말도 들었는데, 계속 있었으면 힘들겠다."
이제는 어때? 하고 진심으로 물어보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 생각이 침범한다니, 지훈은 독심술도 가능했구나! 신기하다, 라고.
뭐, 됐나. 딱히 카사에게 그 사람을 어머니로 여겨야 한다는 둥의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단지... 그 할멈이라는 사람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는 것 정도? 자신도 특별히 넣어주겠다며 속삭이는 카사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잘 부탁드려요 대장." 이라며 농담스레 귓가에 속삭였다.
" 그럼 다음번에도 쓰다듬게 해주실래요 포식자 카사? "
콧대 높은 말에 장단을 맞춰주려고 하며 멀리서 허공을 쓰다듬는 시늉을 한다. 그와 별개로 표정이 슬슬 풀어지자 속으로 사진 찍어두고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면 화내려나? 머리가 손을 뗄 때 따라갈 뻔 한 것은 눈치채지 못 했는지, 그저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었다. 미약하게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 그렇지. 더군다나 시끄러운 것도 그냥 시끄러운게 아니라, 이런저런 듣기 싫은 말들로 시끄럽기도 하니... 그런 말들이 아예 안 들리는 숲으로 가는 거야. "
"이해력이 좋네." 라며 가볍게 칭찬해주려고 했다. 이제는 어때? 라는 말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이제는 어떤가. 카사를 만나 꽤나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잊고 있었다. 다시 생각을 더듬어 아까 자신이 정리하던 것들을 마저 기억에서 끄집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