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되어라. 그 말이 얼마나 잔혹한 단어인지 아직 여기 대부분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수많은 고통과, 위협과, 희생을 감수하고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일어나는 것을 할 수 없어 쓰러진 채, 눈을 감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 지금 떠올랐는데... 츄리닝만 입고 등교하면 학생들이 인사할 것 같이 생기긴 했어. 음음! 더 안되겠네! 그래서... 짐승인가? 사람인가? 결국 뭘까? 흠... 스케치북을 꺼내서 새로운 페이지에.. 일단 맹수를 그린다. 그리고 그 옆에 사람을 그린다. 초간단하게. 이 둘을 섞었다는 말인가? ...수인 같은 식으로?
"그런데, 결국엔 사람이니까 맹수... 취급 하는 것도 아니지 않아요?"
의외로 인성이...
"그렇죠.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무작정 먼치킨으로 나오는 건 독자들도 식상하다고 피하는 판국이니까요.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저 겉돌기만 할 뿐! ..하지만, 그런 사람이 꼭 영웅이 된다는 법은 없어요. 영웅이라는 건.. 그에 걸맞는 시련이 있어야 하니까요."
"진짜 관심 끄는 걸 싫어하는 분이시네요? 그래서 평범한 차림을 좋아하시고? 그런데, 그런 곳에서 평범을... 좋아하시면... 더 눈에 띄지 않을까요?"
이게 좋은 방법인지 아닌지.. 아니,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까? 바꾸고 말고는 진석씨가 할 행동인데 말이야. 나도 모르게 너무 오지랖을 떨었나보다.
"비유법이 이상한데... 여고생 = 맹수, 사람 ⊂ 여고생, 맹수 = 사람 이라는 건가요?"
차라리 사람 취급을 안 하는게 더 나을 정도야... 이런 이야기에서 어두운 이야기.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노력이 만능은 아니니까, 노력해도 겉돌 수는 있죠. 하지만, 그 노력이 사라지진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저 멀리 갈텐데 노력해서 겉에서 맴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해도, 잊혀지는 건 아니에요. 가족, 친구, 혹은 언젠가 도움을 받았던 혹은 줬던 사람이 기억할 거예요."
이렇게 말했지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거겠지... 이런 어두운 이야기 질색인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를 보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카사의 볼을 살살 간지럽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라서 눈이 휘둥그레 변한 카사를 바라보며 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보인 하루는 그대로 카사의 이마에 상냥한 입맞춤을 전해준다. 찰나의 순간 닿았다 떨어진 입술을 확인하듯 카사의 손이 자신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고, 그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며 하루는 마주 웃어보였다.
" 카사도..? "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카사의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해보이던 하루는 이내 깡총깡총 뛰다가 자신의 볼에 톡하고 스치는 카사의 입술을 느낀다.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이 커졌던 하루는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듯 밝은 웃음소리였다. '덕분에 저도 행복해질 것 같아요' 하고 읊조리는 것은 진심이겠지.
" 든든하네요, 카사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카사만 믿고 있을게요. "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카사에게 얌전히 대답을 돌려준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더라도 카사에게 위험한 부탁은 하지 않을 하루였다. 카사가 다치는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이 다치는 것보다도 좋지 못 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카사의 밝은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며 그저 따스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줄 뿐이었다.
" 많이 놀아야죠.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참 많으니까.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이 있고, 내일이 아니어도 모레가 있으니 얼마든지 놀 수 있어요. "
하루는 자신이 다칠까 자신의 손을 머리 뒤에 끼워 받쳐준 카사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간다. 머리를 받쳐주느라 가까워진 탓인지, 코 끝에 카사에게서 풍겨오는 기분좋은 향이 간질거리듯 매달려 있었다. 자신을 꼬옥 끌어안는 카사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하루는 조용히 따스한 자장가와도 같은 것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조금이라도 카사가 편안하길 바라면서.
" 우리에겐 시간이 많으니까 조급해 할 필요 없어요. 하루하루 그날의 일상을 즐기면 분명 카사가 바라는 만큼 즐겁게 보낼 수 있을거에요. "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는 걸 깜빡했다... 흠.. 테러리스트나 좋아할 물건? 독이나 폭탄 같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식으로 취급하면 안돼! 아무튼, 그가 나름대로 바라는 것이 뭔지 알아냈다. 동의까지 얻었으니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특별히 영웅이 무엇인지 한 번 그려주도록 하지! 오늘은.. 무리.
"좋아요~ 그럼, 다음에 어디 가실 때, 저도 끼워서 같이 가요. 지금처럼 평화로울 때는 사용하는 게 아니라서..."
밝게 말하며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는 카사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원래 살던 야생에서는 다 같이 사냥하는게 당연해서 그런 것일까? 아무리 떨어져도 가까우면 일단 같이 싸워주는게 당연한 무리에서 자란 카사에게는 하루의 심정을 짐작도 할수 없을테다. 적어도 현재로선 말이다.
"그렇지! 시간이야 많네. 그때까지 계속 있어줘야해?"
비밀을 얘기하듯, 하루의 귓가에 소곤소곤 얘기하고 다시 하루의 품속에 자리를 잡는다. 등위로는 나뭇잎 사이사이로 내려오는 따사로운 태양, 귓가에는 하루의 잔잔한 목소리. 들숨과 날숨에 하루의 온기와 풀내음이 섞여오고, 손을 꼼지락하면 하루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진다. 이 정원에는 자신과 하루밖에 없었고, 그 점을 생각하면 작은 세상에서 둘 밖에 없는 거 같아 기분이 저절로 하늘로 솟아 오른다. 카사는 욕심이 많은 짐승이라, 독점한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 거기에 좋아하는 것을 독점하는 것만 같은 기분은 더더욱 좋다.
카사가 좋아하는 하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소리가 크고 신나는 노래같은 게 아니라, 잔잔하고 이상하게도 잠이 오는 노래다. 새로운 것을 접하는 흥미도 결국 그 순간의 평화로움에 져, 카사의 눈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한다.
"하루는 햇살같아... 많이 좋아해... 진짜야..."
잠꼬대에 가까운 말이다. 얼마나 편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옅어진다. 색색, 새하얀 소녀의 품에서 작은 소녀가 잠든 소리가 정원의 새소리에 묻어져 간다.
잠깐의 대화 이후에, 시간이 꽤나 지남을 느꼈다. 처음보는 사람과 이렇게 터놓은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사실 꿈에도 몰랐는데... 참, 분위기의 힘이란. 어쩌면 한번 무너진걸 내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러면 언젠가 그때 보도록 하자."
하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간 다음에 땅에 떨어진 돌조각 하나를 줍는다. 그리고는 그걸 손 안에서 굴리며, 뒤를 돌아 보며 말한다.
"내 의념이 뭐냐고 물었었지?"
그러더니 거의 수직에 가깝게 하늘 위로 그것을 던져 올린다. 돌조각에 가해지는 힘이 관성에서 슬슬 중력으로 전환되기 시작할 때 쯤, 왼쪽 주먹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올린다. 이제 그 엄지를 다른 손가락에 누르는 손짓을 하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돌조각이 섬광과 파열음을 내며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