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가 열리고 혼란스러웠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강해진다는 개념에는 물론 의념을 각성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게이트의 존재들에게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안해찬은 게이트 사건 당시 이제 갓 사회에 나서기 시작한 부검의였습니다. 갓 꿈을 가지고 출근하였던 날, 게이트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는 살아남기 위한 연속이었습니다. 부상자들을 의료 지식으로 치료하면서도 때때로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를 연구하기도 하던 그는 대형 게이트의 보스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념을 각성하였습니다. '해체'. 의념을 통해 갖가지 몬스터들의 약점을 알아내어 그는 전세계에 자신의 지식들을 풀어내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적에게도 위험을 감수하며 전투를 해야만 했던 의념 각성자들은 강적을 상대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의념 각성자의 생존률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을 보면 그는 서포터 포지션을 맡고 있을 것만 같지만, 놀랍게도 현역 시절 그의 포지션은 랜스였습니다. 한 자루 메스를 들고 적의 약점을 후벼파며 아군의 창이 되었던 그를 아는 가디언들은 '헤체자'라는 이름 대신 '약점 포식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학생들에게 너그러운 선생님이자 가디언시절 가장 친절할 것 같은 선배의 이름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들긴 하지만, 전시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껄껄 웃음을 짓곤 합니다.
비록 비전투원은 올 필요가 없는 곳이지만 아직 난 이 학교의 구조를 100% 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곳에 이런 데도 있구나 하고 알아보기 위해 어느 건물로 들어섰다. 전투강평시설이랬던가? 듣기로는 홀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전투 패턴과 장단점을 분석할 수 있는 곳이더랬다. 들어가자마자 보기만 해도 섬뜩한 홀로그램들이 여기저기에 켜져 있는게 눈에 띄었다. 나와는 상관 없는 모습들이지만 그래도 꽤나 흥미로운 시설이었다. 소위 말하는 모의 전투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비전투원이 아닌 워리어나 랜스 쪽 분들이 정말 자주 오실 곳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잠시 넋을 놓고 홀로그램을 보며 걷던 도중, 바로 앞을 보지 못하고 그만 이쪽으로 걸어오시는 분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쿠! “
아이구 어때야 아이구 어깨야! 부딪히며 받은 충격만으로 알수 있었다. 이 사람 분명 워리어다…! 절대로 워리어다! 절대로 불화를 만들어선 안된다 하는 생각에 사과를 드리려던 차, 예상외로 먼저 숙여오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이게 되었다. 어? 이게……무슨? 일인지?
“으응~? 그, 저, 이름모를 도련님?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괜찮사와요~? “
오른손을 들어 턱을 살짝 괴며 일단 괜찮다고 말해드렸다. 하지만 말해드리면서도 조금 찝찝하긴 하다…저 정도로 험상궂은 인상이신 분이 먼저 사과해 주시다니 혹시 내가 너무 날티가 많이 나보인 게 아닐까? 아아~ 에미리는 정말로 슬프답니다~! 분해요! 이 정도로 최대한 줄였는데 어째서~!! 이 학교 와서는 피어싱도 정말 많이 줄인 편이라구요!!!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밑도 끝도 없을 거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상대방은... 말 그대로 "아가씨"였다. 백몇십년 전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전쟁 전 일본제국의 우아한 아가씨였을 것이고, 몇백년 전 유럽에서 태어났더라면 귀한 아가씨였을 것이다. 말투부터 그랬다. ~사와요라...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은 현실에서 본 게 처음이었다. 그렇다ㅡ 강찬혁에게 있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구시대 귀족의 화신이었으니. 강찬혁은 변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미리 끝내놓고, 연락처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 딱히 번호를 따려는 것은 아니고, 순수하게 세탁비 변상을 위해서였다.
"만약 입으신 옷이 제 비천한 몸뚱아리로 인해 더러워졌을 경우를 대비해 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만약 돈이 부족하다면 제 신장 한쪽을 떼서라도 드릴 테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찬혁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삼봉캐피탈에서 일할 때, 사장은 이런 사람들한테 무조건 숙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 사장과는 아주 나쁜 관계로 끝났지만, 이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강찬혁은 그렇게 관련 문제들을 정리하고 나서 물었다.
대체 저 험상궂은 도련님께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진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부딪혔을 뿐이고! 돈까지 보내주실 정도로 옷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정도는 내가 직접 낼 수 있는데 어째서 얘기가 이쪽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진심으로 거짓 하나도 안 보태고 지금 굉장히 당황스럽다. 내가 고상한 아가씨들만 계속 봐 와서 그런 게 아닐까??? 헛소리고 지금까지 봐온 사내들 중에서도 심지어 전남친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굽혀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딱 봐도 선배님인듯 보이신데 도대체 이걸….이걸 정말 어찌하면 좋담?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조용히 옆머리를 넘기며 말을 시작했다.
“저어🎵 이름 모를 도련님~? 저희는 그저 길 가다 조금 부딪혔을 뿐이지요~? 제 원피스는 멀쩡하고! 도련님의 옷도 멀쩡하지요? 전혀 더러워진 부분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은지요~? “
제 너무나도 멀쩡한 검은 원피스와 사내의 말끔한 가죽자켓을 가리키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너무 숙이지 마시구! 에미리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어요~! 그도 그럴게 이제 1학년이와요?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와요~? 그러니 이 새내기를 봐서라도 조금은 진정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선배님~? “
자! 이정도면…이정도면 끝난 거겠지? 더 이상 자책하지 않으시겠지 그렇지?? 한참을 말해서 그런지 목이 타는 것 같다. 조용히 제 성대가 있는 부분을 쥐듯 쓸며 숨을 고르다 물음에 대답했다.
“으음~🎵 그렇지요~? 잠시 구경을 하러 왔사와요~ 제가 이 학교의 구조에 익숙하지 않아서 파악차 온 것도 있구요~ 선배님은요? “
딱 봐도…딱 봐도 나처럼 구경하러 오신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상황 수습이 먼저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환기라도 시켜보자 좀!!
강찬혁은 그렇게 대답한다. 신입생이었구나, 1학년이었구나... 하지만 강찬혁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학년이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강하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뭐, 그래도 강찬혁의 이런 반응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니 그만 집어치우기로 했다. 강찬혁은 비생산적인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제가 고블린 소굴 게이트에서, 불구자가 된 오크랑 싸웠거든요. 그래서 이 전투를 여기서 재생하고, 최소 한명 이상이랑 전투에 대해 논의를 하라는 과제를 받아서..."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물었다. 하필 과제를 낸 선생도 미친 싸이코여서 가라도 불가했다.
해냈다...해냈다! 어쨌든간에 해냈다...! 분위기도 전환됐고, 한결 가벼이 얘기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전투를 재생해? 아~ 저어 홀로그램 말씀하시는 것일까, 어느정도 이해는 갔다. 굉장히 곤란한 과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완전 조별과제나 다름없지 않은가. 확실히 혼자 하기엔 굉장히 힘든 과제이긴 하다....
"으음~? 과제인가요? 지켜보는 거라면 에미리는 얼마든지 OK이와요? "
아무튼 논의드리는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봐줄 수 있냐는 물음에 두말않고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1학년의 의견이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잘은 모르겠지만 오크와의 전투라니 뭔가 굉장했을 것 같사와요~ 저는 조금 떨어져서 봐드리면 되련지요? "
살짝 벽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홀로그램이 어디에 펼쳐질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은 최대한 벽쪽에 있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다행히도 첫인상에 비해 마음은 따뜻한 사람 같다. 강찬혁은 그렇게 평가했다. 상대방이 어디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에미리는 성학교 신입생이었지만, 강찬혁은 그녀를 청월고교의 무시무시한 엘리트집단이나 이너서클의 일원일 것이라 생각했다.) 뭐 어떠랴. 현수막 좀 찢어서 쓸 수 있는거 가지고 시비 거는 샌님만 아니면 된다.
"그럼..."
강찬혁은 빈 홀로그램 콘솔로 가서 자신의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강찬혁과 고블린들이 드러났다. 그리고, "재생 시작"이라는 음성과 함께 고블린들이 강찬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강찬혁은 고블린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팼다.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고블린을 저 멀리 쳐내고, 머리를 내리쳐 터뜨렸다. 잔머리 있는 고블린들이 바람총으로 독침을 쐈지만, 강찬혁은 그딴 것에 쓰러지기에는 너무 튼튼했다. 고블린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강찬혁이 허리가 부서진 채 양 팔로 도망치려는 고블린을 잡아서 방패로 쓰려는 모습은, 아무리 게이트 너머의 야만적인 짐승이더라도 심해보였으리라.
"...이 다음이 진짜에요."
동굴 안으로 들어간 강찬혁이 발을 구르며 욕하다가, 한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간다. 고블린들을 대학살한 오크 전사가 나가라고 경고하지만, 강찬혁은 거부하고 싸우는 길을 택했으니. 강찬혁은 오크에게 달려드는 척하며 몸을 낮춰 슬라이딩한다. 그의 목을 노리던 오크의 글레이브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강찬혁은 그 틈을 노려 오크의 팔을 붙잡는다. 오크는 팔에 붙은 인간놈을 떼어내려고 하다 잘 되지 않자, 벽에다가 쳐박는다. 하지만 강찬혁은 오크가 정신이 팔린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박힌 독침을 뽑아 오크의 눈구멍에 쑤셔버린다. 그리고는 오크의 머리를 마구 두들겨패는데... 오크가 갑자기 광폭화에 걸리더니 강찬혁을 죽도록 두들겨패고, 마지막으로 글레이브로 강찬혁의 왼쪽 어깨를 내리친다.
"으, 기억만 해도 아프네."
그의 의념기가 피해무효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장애인이 되었으리라. 강찬혁은 오크가 당황한 사이 오크의 팔이 없는 쪽으로 달라붙고, 오크의 몸을 타고 올라가 마구 두들겨팬다. 눈구멍을 찌르고, 코를 때리고, 오크의 어금니를 부러뜨려서 목에 박고, 정말로 더럽고 천박한 싸움의 끝에 오크가 먼저 쓰러지고, 오크를 짓밟고 올라가 승리를 선언한 강찬혁도 이내 쓰러진다.
...그리고 홀로그램이 꺼지자, 강찬혁은 에미리를 돌아보며 물었으리라.
"강평 부탁드려요. 되도록 진솔하게요." //에미리주 죄송한데 답레 주시면 내일 아침 일어나서 이어도 될까요? 잠을 못 견디겠네요 ㅜㅜ
굉장히…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바로 전 게이트에서 검귀를 상대하고 왔는데도 검귀가 오히려 선녀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뒷통수를 후려치는 전투 기록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성을 잃기 전의 검귀라고 가정해도 선녀였다. 물론 검이 아니라 야구배트이니까 전투방식이 다소 거칠 수 있는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오크가 굉장히 거친 전투방식을 추구하는 몬스터이긴 하지만 이건… 이건… 대체 이걸 어떻게 평가한담? 솔직히 말해 말아? 차라리 가라앉기 전의 교토식으로 돌려돌려서 말씀드리는 게 백번 나을 것 같다. 정말이지 난…지금 대체 뭘 본건지 이해가 안 간다…..진짜 내가 뭘 본거지? 이게 소위 말하는 그 더치 파이트란 것인가?
“어머🎵 굉장히 강렬한 전투였네요! 전투적인 부분의 롤모델을 치오랑님으로 잡고 계신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정열적이셨사와요~! 오크분과 고블린분들이 굉장히 전투를 즐기시는 분이신 거 같아요! 호전적이라고 해야 되려나요~? 죄송해요, 뭔가 오크분의 싸움방식이 조금 즐기고 계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
애써 웃음을 지우지 않으려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최대한 천박과 야만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곱게 말씀드리려 노력했다. 초면에 그것도 윗전인 선배님께 대뜸 이런 단어를 쓰는건 예의가 아니다. 고상하지 못한 짓이다….! 에미리는 그런 예의 없는 아이가 아니어요!!
“전체적으로 음… 조~금 거친 싸움이었지만? 정말 괜찮은 싸움이었사와요? 그래도 급소 부분을 좀 더 집중적으로 친다면 좀더 빨리 전투가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 외에 흠잡을 부분은 없사와요, 제로이와요~!“
어찌저찌 평을 끝낸 뒤 살짝 입을 가리며 호호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정도면 나름…나로썬 성격 죽이고 괜찮은 평가를 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