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근처에 자리한 숙박업소들은 지금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여름, 방학, 바다라는 삼박자에 맞춰 피서객이 몰려왔고, 작년처럼 올해도 많은 손님들이 찾고 머물고 있으니까. 물론 그건 나기네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신없이 손님을 받고 안내하고 손님이 나간 방의 정리를 하고… 바쁜 부모님을 돕느라 나기도 바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바탕 손님이 나가고 오고를 반복하다 일단 오늘의 체크인은 모두 끝났다. 바쁜 것이 잠시 끝난 지금, 나기는 한숨 돌리기 위해 집을 나와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바쁘게 일한 다음에는… 잠시 혼자 있고 싶은 때가 오는 법이다.
“…응? 앗! 아사기리 씨?”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쐬며 해변가를 걷다가, 시끌벅적하게 바다에서 노는 피서객을 찬찬히 보며 시선을 돌리던 그 때,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라? 온천 쪽에서 일하고 있을 줄 알았지만, 생각해보면 그도 일단은 관광객으로 온 사람이었다. 맞아, 그랬지. 그럼 바닷가를 보러 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혼자 그리 생각을 끝내고 천천히 다가가며 상대를 부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 아사기리 유키를 향해서.
“아핫☆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아사기리 씨! 수영이라도 하러 오셨나요? 아니면 태닝?”
분명히 소년은 이곳에 일을 도와주러 내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황금기인 방학을 온천 일로만 보내기엔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는지 이전부터 오늘은 꼭 바다에서 놀고 싶다고 자신의 고모와 고모부에게 요청하여 하루 쉬는 날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당연히 바닷가에 왔으니 바다로 가야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을 하며 소년은 돗자리에 파라솔까지 구한 후에 해변가에 자리를 잡았다.
"좋아! 오늘은 마음껏 놀아볼까!"
비록 혼자뿐이라고는 하나, 분위기를 제대로 차리기 위해 소년이 가지고 온 짐은 꽤 여러가지 있었다.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불판에 버너, 그리고 고기 어느 정도.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수박 도시락까지. 원래는 수박을 한 통 가져오려고 했지만 꽤 무게가 무거울 것 같아 결국 잘라서 도시락처럼 만들어서 가져왔다는 사실은 외면하며 소년은 따뜻한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태닝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 바다까지 왔으니 여름 햇살을 조금 즐기고 싶은 마음에 소년은 싱글벙글 웃으며 따스함을 즐겼다.
그러는 와중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고 곧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미쿠모 양! 정말로 우연인걸? 아.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바닷가에서 놀까 해서 왔어. 그래도 아와나미까지 왔는데 바다에 안 오면 좀 그렇잖아? 사실 어릴 적부터 여기에 오면 항상 바닷가는 꼭 들렸거든. 올해도 마찬가지고."
문뜩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소년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지인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근처에 있던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은 남아있었기에 괜히 그때를 떠올리다 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옷을 털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짐이 이것저것 한가득 있는 걸 보니 정말 제대로 벼르고 온 건가 싶었다. 파라솔에 돗자리까지 있는 시점에서 이미 확정이지. 응. 고개를 끄덕이던 나기가 어릴 적부터라는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금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하긴, 온천 일을 돕는 것도 친척집 일을 돕는 거였으니, 아와나미에 친척이 산다면 어릴 때부터 놀러 왔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가만히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어릴 적 추억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네 맞아요☆ 좀 전까지 엄청 바빴거든요~ 그래서 한 숨 돌릴 겸 나왔어요! 아사기리 씨도 아시죠? 손님이 엄청 왔다가 간 다음에는 뭔가… 도망쳐 나오고 싶잖아요…?”
밝게 말하다가 점점 죽은 눈이 되고 힘이 없어지는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손님이 몰아치는 날이었고, 부모님을 돕는 건지 중노동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지경까지 갔다가 간신히 돌아온 것이다. 미적대다간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 같아 재빨리 나왔는데,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아, 아무튼! 바닷가에서 노는 거면… 수영인가요? 수영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네요~”
말 그대로, 지금 바다에는 사람이 그득했다. 피서객들이 신이 나서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이 여기서도 잘 보일 정도로. 물 반, 사람 반인 상황에서도 즐겁게 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딱히 상관은 없지만… 제대로 수영을 하고 싶다면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사기리 씨가 꼭 수영을 하러 왔다는 보장은 아직 없지? 파라솔과 돗자리를 보면 그냥 쉬러 온 것 같기도 하고… 도시락도 저렇게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확정이 아니니 일단 떠보는 말을 던지며 바다 쪽을 바라봤다. 응, 역시 사람이 많다.
"그치? 우리 온천도 뭔가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그런지 꽤 바쁠때가 있거든. 슬슬 사람들이 찾아오는 시기야? 여기? 하기사 지금은 여름방학 시즌이니까! 그런데 미쿠모 양. 괜찮아?"
죽은 눈이 되어가고 힘이 없어지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소년은 크게 당황하며 살며시 그녀의 눈 바로 앞에 손을 삭삭 흔들었다. 물론 그녀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거나, 혹은 의식을 잃는다거나 하는 상황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소년은 그녀가 꽤 일에 시달리다가 여기로 나왔다는 것을 인지하며 살며시 돗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영도 하고, 수박도 먹고, 가볍게 고기도 구워먹을까 해. 모래찜질을 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어때? 미쿠모 양도 쉬는 중이라면 여기서 쉬다가 갈래? 물론 일이 너무 바빠서 가야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일단 혼자서 노는 것보다는 같이 노는 것이 좀 더 즐겁다고 생각하기에 소년은 그녀에게 같이 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누가 보면 여름에 현지인을 헌팅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런 것을 두려워해서 여기서 누군가와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저버린다면 분명히 후회할테니까.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는거고,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같이 놀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아. 지금 같이 논다면 수박을 잘라서 가지고 온 수박 도시락도 있어. 이렇게 먹으면 되게 맛있거든."
“예… 네… 괜찮아요… 지금은 쉬는 중이니까 괜찮아요… 내일도 일하겠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
중얼중얼, 죽은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듯 대답하던 나기는 눈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손에 정신을 차렸다. 으윽, 아무리 일이 버겁다고는 해도 관광객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불찰이다. 조심해야지! 살짝 손을 들어서 볼을 가볍게 두드린다. 정신차리자.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 감사히! 아, 모래찜질 할 거면 제가 묻어드릴까요? 저 그거 잘해요☆”
자랑스럽게 말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지만, 실제로 잘 하는 걸. 어릴 때부터 많이 해봤으니 말이야. 그리고 수박 도시락까지 나왔으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 아닌가! 수박은 맛있으니까! 언제 죽은 눈을 했었냐는듯 밝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앗, 역시 아사기리 씨 수영하려는 거네. 잠시 사람이 많은 바다를 보면서 물어보듯 말했다.
소년은 아직 죽은 눈을 뜬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남 이야기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신만 해도 요즘 들어 온천 청소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온천을 깨끗하게 이용하면 참 좋을텐데 어지럽히고, 혹은 일부러 물건을 파손시키거나 갖고 나가는 이들도 허다했다. 물론 소년의 고모와 고모부는 그냥 웃어넘기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무튼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에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적이며 괜찮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물론 그래도 되지! 내가 먼저 권했는데. 혼자 노는 것보다는 다른 이와 같이 노는게 더 좋거든. 아.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모래찜질 부탁해도 될까?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하고 싶거든. 그보다...."
이어 소년은 수박 도시락을 꺼낸 후에 그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조각조각, 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수박이 가득했다. 소형이라고는 하나 아이스박스 안에 들어있던 것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시원한 냉기가 벌써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우선 수박부터 먹지 않을래? 아. 그리고 수영이야 어떻게든 공간에 들어가면 할 수 있을테니까.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적은 편이잖아? 대부분 아무래도 입구 부분에서 노니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며 소년은 포크 하나를 그녀에게 살며시 내밀었다.
시원한 수박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수박이다. 그것도 시원한 수박. 상온에 방치해 미적지근해진 수박과는 차원이 다른 수박이다! 그것도 이 바닷가에서! 아이스박스에서 막 꺼낸!! 이건 맛있을게 틀림없어!! 최고로 귀여워!!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수박을 응시했다.
“우와아… 수박… 고마워요 아사기리 씨! 잘 먹겠습니다!!”
포크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감사인사를 한 후,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다. 입술에 가까이 가져가기만 해도 냉기가 느껴진다. 입에 넣자 그야말로 시원한 감촉이 가득 퍼지고, 그에 질세라 단맛도 따라온다. 이건… 극락이다…!
“너흐 마히써….”
입을 손으로 감싸고, 한 손에는 포크를 든 채로… 그야말로 하얗게 불타버린 것처럼 되어 중얼거렸다. 너무 맛있어… 반칙이야. 이 맛있음은… 이 시원함은 반칙이라고… 여름의 햇살을 쬐고, 업무에 쫓겨 지쳐있던 몸에 스며드는 치유감… 최고입니다…
“아, 아무튼… 으음, 그건 그렇지만… 그래요. 일단 수박도 먹고 모래찜질도 한 다음에 수영 얘기를 하도록 하죠! 근데 이 수박 진짜 맛있네요! 시원하고! 맛있어!”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누군가와 나눠먹는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많이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맛있는 것은 누군가와 나눠먹어야 제 맛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소년의 입가에선 미소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따.
"그렇지? 이거 완전 맛 좋다니까. 어디 그러면 나도 하나."
그녀가 하나 먹고 나서야 소년은 포크를 챙기고 수박을 하나 입에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함은 카페에서 파는 수박 주스의 달콤함과 전혀 뒤지지 않았다. 미지근하게 다 식어서 맛이 없는 수박이 아니라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과즙이 가득한 수박. 그리고 더운 날씨. 모든 것이 딱 좋은 최고의 환경이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카페에서 파는 거 못지 않은걸? 어젯밤부터 미리 준비해서 만들길 잘했어! 아무튼 온천에 작은 아이스박스가 있었거든. 시원함을 최대한 보존하고 싶어서 빌려달라고 해서 받은거야. 그 대신에 온천에 돌아가면 이거 정리를 내가 다 해야하지만 그런 것이 두려워서야 어디 놀 수 있겠어?"
하나 더 냉큼 포크로 집어서 먹은 다음 소년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어 오른손을 뒤로 해서 자신의 몸을 받친 후에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내가 이렇게 아와나미에 찾아와서 재밌게 노는 것처럼, 미쿠모 양은 도시에 오면 혹시 찾아가서 놀고 싶은 곳 있어? 있다면 어디야?"
“어제부터 준비한 건가요? 엄청 나네요, 아사기리 씨☆ 아아, 뒷정리… 좀 귀찮긴 하겠네요. 그래도 대단하네요.”
엄청 기대했던걸까, 어제부터 준비라니. 게다가 정리를 감수하고 아이스박스까지 챙겨서… 행복하게 웃는 유키를 보며 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사자가 좋다는데 뭐. 그리고 덕분에 자신도 이렇게 수박을 얻어먹게 되지 않았는가. 나중에 집에서 뭐라도 가지고 와야겠다. 얻어먹기만 하는 건 역시 미안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들린 질문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도시로 가면 찾아가서 놀고 싶은 곳…?
“그야 많죠! 유명한 곳들은 꼭 가보고 싶다구요☆ 꿈의 나라 랜드라던가, 유니버셜이라던가! 그리고 스카이 트리! 그리고 하루카스! 그리고 그리고 동물원도, 아, 아쿠아리움도 꼭! 바닷가에 살긴 하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다구요!”
지금까지 사진이나 TV에서만 봤던 곳들을 하나하나 말해본다. 도시로 나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들… 이런 시골에는 없는 곳이 입에서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서 이건 도저히 하루만에 가는 건 무리고, 몇 박 며칠을 묵어야 갈 수 있겠지만. 게다가 지방도 제각각이라 분명 한 번에 다 이루기는 무리겠지. 그래도 말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정말 가고 싶은 곳이 많구나.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도시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곳을 다 가본 것은 아니니까. 훗카이도의 눈축제라던가 그런 곳도 가보고 싶은데 아직 가본 적이 없거든."
TV나 사진으로는 봤지만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기에 소년은 정말로 가보고 싶다는 듯이 괜히 아쉬움을 목소리에 담았다. 한편 그녀가 말하는 곳 중 자신이 갔던 곳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자신이 간 곳이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간 곳이 있을 때마다 절로 미소를 내비쳤다.
"꿈의 나라 랜드라면 내가 데려갈 수도 있긴 한데. 정말로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말이야. 어른이 되면 한번 놀러와. 근처까지 오면 마중 나가줄테니까."
수박을 한 조각 더 먹으면서 소년은 그녀가 갈 수 있다면이라고 말을 하는 것에 살며시 의문을 품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집에서 도시에 찾아가는 것을 아예 반대하고 있는 것일까. 괜히 그런 생각을 하지만 더 묻진 않으면서 소년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방학도 슬슬 끝나가네.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조금 아쉬운걸. 이번에 가면 또 언제 아와나미에 올 수 있으려나. 최소 2년일까. 왜 나는 내년에 고3인거지?"
괜히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소년은 작게 혀를 찼다. 그만큼 아쉬운 모양이었다. 허나 곧 미소를 내비치면서 다시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앗 맞아요! 홋카이도! 삿포로나 후라노도 가보고 싶고, 오키나와도, 큐슈도… 으으, 가보고 싶은 곳이 정말 많아서 큰일이라구요!”
앗, 생각해보니 도시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가보고 싶었다. 아사기리 씨의 말대로 홋카이도 같이 먼 곳도 가보고 싶은 걸! 뒤늦게 덧붙이다가 꿈의 나라, 치바 현에 있는 모 랜드에 데려갈 수 있다는 말에 눈을 번뜩였다. 맞아! 치바! 아사기리 씨는 치바에 산다고 했지!!
“정말요?! 약속인가요?! 약속인거죠? 어기면 바늘 천 개 먹는 거라구요!”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게 된다면! 어른이 된다면 놀러갈 수 있을까. 가업을 잇는다던가, 이런 저런 장애물은 있겠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 놀러가는 건… 음,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일단 약속은 해두는 걸로 하자. 손가락을 걸자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사이에 화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네요. 슬슬 방학도 끝나가고… 아, 맞다. 아사기리 씨는 좀 있으면 돌아가겠네요. 아하하☆ 어쩔 수 없잖아요. 수험이 있으니까. 음…”
최소 2년. 맞다. 눈 앞의 이 사람은 내년부터는 고3. 수험생인 것이다. 진로를 어떻게 잡았는지,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그런 이야기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험 때문에 바빠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뚱한 표정을 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유키를 보며 킥킥 웃었다.
“—당연하죠. 아사기리 씨가 언제 오더라도 저는 여기 있을 테니까요. 아, 다음에 올 땐 숙소는 저희 집으로 해도 된다구요? 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좋은 방을 준비해둘게요!”
"바늘 천 개는 먹기 싫으니까 약속은 꼭 지킬게! 애초에 그 정도 약속은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말해두는데 난 못 지킬 약속은 안 해."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험생활이 아니면 마중을 나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철역에 나가고 거기서 바로 꿈의 랜드로 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물론 온다고 한다면 하룻밤을 어딘가에서 자야겠지만 그 정도야 좋은 곳을 소개해줄 순 있으니 그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도시락 통에 들어있는 수박을 한 조각 더 꺼낸 후에 사각사각 씹어먹으니 달콤함이 입 속에서 사르르 흘러내렸다. 역시 전 날, 냉장고에 수박을 넣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곧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이 소년은 웃음소리를 크게 냈다.
"하하하하!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그래도 고모와 고모부가 사는 곳인데 그곳에 가지 않고 미쿠모 양네 집에 가면 되게 섭섭해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마음만 받아둘게. 하지만 그 방이 어떤 방일지 궁금하니까 또 오게 되면 하루는 미쿠모 양 네 집에서 묵는것으로 하면 어떨까?"
바다가 잘 보이는 방이라면 필시 정경도 시원하고 보기 좋겠지. 아침에 일어나서 보는 느낌이 참으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키는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한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그럼 미쿠모 양이 치바에 놀러온다면 도시 야경이 잘 보이는 방을 하나 소개해줄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에서 묵게 할 순 없을테니까."
앗 그것도 그렇네! 친척 분들이 좀 서운해할지도. 그러니 아사기리 씨의 제안대로 하면 딱 좋겠다. 딱 하루라도 제일 좋은 방을 준비해야겠어! 꿈의 나라를 위해!(?) 살짝 주먹을 쥐며 굳게 다짐했다. 물론 금방 시원한 수박 덕에 헤실헤실 풀어지긴 했지만. 아무튼 뭔가 상부상조하는 느낌이다. 치바에 가면 좋은 숙소를 소개해준다는 아사기리 씨의 말을 들으니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되었다. 뭐, 나야 좋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나기는 수박 한 조각을 더 집어 먹었다.
“와아☆ 신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잘 부탁할게요☆”
일단 아사기리 씨도 그렇고 자신도 수험 기간을 지난 다음의 이야기니, 제법 먼 이야기다. 아니, 그리 머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의외로 훌쩍 지나가기 마련이니 말이다. 어느 새 끝이 다가오고 있는 이 여름방학처럼. 슬쩍 시선을 바닷가로 돌려 피서객들을 봤다. 해는 여전히 뜨겁고, 바람은 여전히 후덥지근하지만… 방학의 끝은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래도 아사기리 씨… 돌아가는 건 태풍이 지나간 다음일라나? 그게 지나간 다음에야 방학이 끝나니까요. 매번 바람에 비에 장난 아니고, 길도 가끔 막히기도 하니까 조심해야해요☆”
/유키주도 오늘 하루 수고했다구! 으으 애옹이 수발과 답레를 동시에 하는 건 제법 힘들구나...
나름대로 어떤 곳을 소개해주면 좋을지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하는 도중 태풍이라는 단어에 소년은 살짝 움찔했다. 태풍이 올라온다고? 바람에 비에 장난 아니고 길이 가끔 막히기도 해? 믿기 힘든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소년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뻔 했다. 두 손을 바둥거리면서 겨우 떨어뜨리지 않게 잡은 후 소년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미쿠모 양.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태풍이 여기에 올라온다는거야? 그것도 상당히 강하게? 혹시 말이야. 온천...의 물 범람할 정도야?"
내부는 그렇다고 쳐도 온천에는 야외 온천도 있었다. 즉 그곳은 비를 막을 지붕이 없었고 태풍이 몰려오면 다이렉트로 직격탄을 맞을 위치였다. 태풍이 분 이후에 엉망이 되어있을 그곳을 상하는 순간, 소년의 눈빛이 순간 죽은 느낌으로 바뀌었다.
멍하니 있다가 바둥바둥, 필사적으로 포크를 사수하는 모습을 보며 킥킥 웃다가 다시 물어보는 말에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여름 끝물을 장식하는, 나름대로 계절의 풍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취급하기엔 피해가 너무 어마무시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오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살짝 해탈한 듯한 웃음을 띄운 채로, 난처하게 웃는 유키를 보며 나기는 입을 떼었다.
“그야 올라오죠? 운이 좋으면 빗겨나가지만 매년 직격으로 관통해서 올라가는 일이 많아서요~ 올해는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으음, 온천… …여차하면 범람할지도 몰라요.”
범람하지 않더라도 야외 온천이라면 나뭇가지에 이파리 같은 것들이 날아와 온천욕을 즐길 가능성이 100%지만. 아, 아사기리 씨가 그걸 치워야 하는 건가? …나기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X를 연타했다. X를 눌러 조의를 표합니다.
“아니이 그건 말이죠 아사기리 씨, 그건 그 때가 되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뭐, 저도 태풍이 오면 할 일이 많아지니까 번거로워서 그냥 별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지만요☆ 예전엔 방에 창문이 깨지거나 간판이 날아다니거나 하는 일도 있었으니까, 올해는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네요.”
/그 애옹이... 잡아다 무릎 위에서 재우는 중입니다... 아냐 사실 거짓말이에요 잡아다 재우는 게 아니라 애옹님이 와서 무릎을 수탈해 갔습니다 흑흑
그녀의 말이 이어질때마다 소년의 표정이 절망스러움으로 바뀌어갔다. 결국 그것을 청소해야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물론 다른 직원이나 고모와 고모부가 도와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청소를 해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보아하니, 대부분은 직격으로 관통하는 일이 많다고 하니, 올해라고 해서 그게 바뀔리는 없을 거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 돌아가는 것오 조금 생각해봐야겠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리는 모습이 소년은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며 두 뺨을 강하게 치면서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보단 지금은 즐거운 시간을 가득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 이 즐거운 여름바다를 앞에 두고 암울한 생각에 빠지기엔 뭔가 아깝잖아? 아. 그러고 보니 미쿠모 양도 수영할거야?"
물론 수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녀가 같이 할 지는 또 알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은 혼자 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같이 노는 것이 조금 더 재밌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소년은 약간의 기대를 섞은 눈빛을 보냈다.
"아. 물론 그것까지는 조금 힘들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아."
/애옹이 사장님의 침대가 되었구나. 무게감은 있겠지만 그래도 따뜻한 무게감일 것 같아서 뭔가 귀여워!
아, 이거 맨 처음의 나 같은데. 절망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유키의 등을 나기는 천천히 토닥이려고 했다. 하하. 어쩔 수 없다구요 아사기리 씨.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무력하니까… 뭐, 그래도 금방 기운을 차린 것 같으니 다행인가.
“그것도 방법 중에 하나긴 하죠. 아무튼… 아, 바다요? 흐음~”
수영? 그러고 보니 바다에 왔으니까, 수영도 해야겠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보인 스스로의 옷차림은 아무리 봐도 수영에 적합하진 않았다. 음, 사실 이대로 들어가도 상관은 없지만, 들어가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만 그 후가 문제니까… 고심 끝에 나기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다만 준비가 필요하니까! 잠깐 집에 갔다올게요! 금방 갔다올게요!”
마침 새 수영복도 입어보고 싶었고! 괜찮겠지? 집은 바로 코 앞이니까! 금방 갔다오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한 다음 후다닥 집을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가는 김에 수영복도, 다른 것도 이것저것 챙겨와야겠어!
/처음엔 그렇지만 가면 갈수록 다리에 감각이 사라져... 아무튼 이렇게 나기의 수영복 루트가 열렸군!(?
"응? 괜찮아? 미쿠모 양이 괜찮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천천히 갔다와도 돼. 오늘은 그냥 쭉 바다에 있을 거라서."
아와나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바다에서 제대로 놀기로 마음 먹었으니 소년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미 수영복을 옷 안에 입고 오긴 했지만 그녀가 수영복을 안에 입고 산책을 할 확률은 적을테니 수영복을 챙기기 위해선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일단 수박은 어느 정도 남겨놓을게! 아. 이렇게 되면 미쿠모 양의 오늘 하루는 내가 다 예약하는게 되나? 그렇다면 올 예약제로 하겠어! 아. 이러면 너무 플레이보이 같은가? 아무렴 어때."
괜히 장난스럽게 웃어보이면서 소년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선 후에, 편안하게 돗자리 위에 누웠고 그 상태로 고개만 돌린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체력을 채울겸 조금만 누워있을게. 갔다오면 불러줘."
잠깐 잠이라도 자고 있을 생각인건지, 아니면 파라솔 아래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소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릴 생각인 듯 보였다.
체력을 채울 겸 누워있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후다닥 향했다. 아니 근데 플레이보이 같다고 자각하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사기리 씨? 역시 도시 사람은 다르구나!(?)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서 가방을 꺼내고, 일단 수영복을 입고 아까보다 가벼운 차림의 옷을 걸치고 수건을 챙겨 넣었다. 또 뭘 들고가지? 여자력을 발휘해서 도시락이라도 가져가야하나? 하지만 짧은 시간 내로 준비하긴 무리야! 그리고 수박을 먹어서 이미 배도 불러! 수영하면 금방 꺼지겠지만! 살짝 갈등하던 나기는 결국 물병에 차가운 보리차를 넣어가는 정도로 타협하기로 했다. 운동화가 아닌 샌들로 갈아신고 다시 바다로 향했다. 누가 봐도 피서객으로 볼 것 같은 차림이다.
“기다리셨죠, 아사기리 씨! 준비 다 됐어요!”
파라솔 아래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유키를 보고 깨울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도착한 건 알려야지 싶어 적당한 정도의 소리로 말을 건넸다. 돗자리 위에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려두고 유키가 일어나는 걸 기다렸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이 그새 난 땀을 식혀주고 있었다.
바람을 쐬면서 눈을 감으니 절로 잠이 솔솔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잠들어버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어떻게든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꾹 버텼다. 그리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곧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눈을 뜬 후에 천천히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기다리긴. 그렇게 안 기다렸어! 그냥 이렇게 느긋하게 누워서 쉬면 시간이 금방 가거든. 아. 그렇다고 해서 오래 기다렸다..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지?"
가볍게 키득거리는 와중 보리차 소리가 들려오자 소년은 살며시 관심을 보였다. 물론 음료수가 있긴 했지만 보리차는 또 다른 느낌이 아니던가. 잠시 생각을 하던 소년은 한 잔 받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면서 살며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한 잔 마셔도 될까? 가방에서 꺼내줄래? 따르는 건 내가 다를테니까. 아무튼 미쿠모 양. 센스가 좋은데?"
역시 이런 날씨에는 시원한 보리차가 좋다고 생각을 하며 소년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척 올렸다. 그러다가 문뜩 궁금해졌는지 소년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쿠모 양은 수영 잘하는 편이야?"
/그래서 방금 전에 그냥 사이다를 마시고 왔지! 냉장고에 남아있는 사이다가 있었는데 엄청 시원해!
"현지인이라고 해도 수영 못할 수도 있잖아. 도시인이라고 해서 도시를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지. 좋아. 그럼 나중에 수영 실력좀 볼까? 말해두는데 나도 수영부 소속이라서 수영 못하진 않거든."
물론 현지인보다는 조금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면서 소년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다. 허나 자신보다 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에 얕보진 않기로 하며 소년은 물병을 받았다. 이어 종이컵에 천천히 따르고 마시니 그 시원함이 수박 못지 않아 소년은 절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시원한데? 수박도 있고 보리차도 있고 둘 다 시원하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네. 올해 여름 피서 최고다아아!"
괜히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키득키득 웃어보이다 소년은 좋은 장소가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오. 그래? 그럼 고맙지! 현지인들만 아는 비밀장소 그런 거야? 아. 그러면 파라솔하고 돗자리를 옮기는게 나을 수도 잇겠다. 그 앞에 까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테니 말이야. 아. 그런데 그런 비밀장소는 마을 사람들끼리만 공유할 것 같은데 나에게 알려줘도 되는 거야?"
나중에 왜 외부인에게 알려줬냐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소년은 그녀를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물론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으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는 유키를 보며 씩 웃으면서 내기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이~ 이렇게 놀 땐 이런 내기가 있어야 더 재미있기도 하고? 그리고 보리차 한 잔에 행복해하며 피서 최고다아아아하고 외치기까지 하는 모습에는 큭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고긴 하지만 그렇게 외칠 정도? 하지만 자신도 수박을 먹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니까 말로 꺼내진 말자.
“아~ 괜찮아요☆ 딱히 비밀로 하는 건 아니니까요! 출입금지 구역도 아니고. 단지 이… 숙소가 모여있는 이쪽 해변에 비해서 거리가 좀 있어서 그런지 여행 온 사람들은 잘 안 가더라구요. 그리고 아사기리 씨, 아와나미에 친척이 있으니까 아예 외지인도 아닌 셈이고☆”
혈연 만만세라는 거네요! 농담 삼아서 덧붙이고 까르르 웃고서는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파라솔이며 돗자리 정리를 할 거라면 자신도 돕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지난 일의 과오 및 오만함을 떠올리며 소년은 난처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때도 가만히 있었으면 자신의 승리였건만, 왜 굳이 기회를 한번 더 준다고 해서 그런 결과를 맞이했는지. 하지만 정말 치열한 승부였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결국엔 편안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럼 이번엔 뭘 걸거야? 또 소원권은 조금 애매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이건 운이나 그런 것으로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잘해버리면 다른 쪽을 이길 기회조차 없잖아?"
물론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며 소년은 다시 보리차를 마시면서 온전히 열기를 식혔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해변은 아니지만 현지인 친구와 같이 지내는 것도 소년에게 있어선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그 순간이 괜히 아쉽다고 느끼면서. 태풍이 가급적이면 늦게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굳이 말을 하진 않으며 소년은 짐을 정리하려는지 파라솔을 접었다. 자연히 뜨거운 태양빛이 들어왔으나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아와나미에서 보낸 적도 있어. 그러니까 정말 어릴 때. 여섯 살? 일곱 살? 아마 그때였던 것 같은데. 부모님이 많이 바쁘셔서 일시적으로 여기서 어느 정도 있었거든. 그런 것까지 포함하면 명예 현지인 정도는 될까? 하하하하. 물론 농담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하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어 정리를 천천히 마치며 짐을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아하핫☆ 불안할 게 뭐 있나요! 사실 타코야키 때는 거의 막상막하의 운이었잖아요? 마지막 빼면요!”
라고 말해도 이번 수영 승부는 순전히 운으로만 되는 건 또 아니니까! 복불복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승부다. 뭐 운도 실력이라고 하긴 하지만. 어라, 그러면 나기는 운이 좋으니까 실력도 좋다는 거? 후흥~ 이번 승부도 따놓은 당상일거라고! 혼자 그리 생각하면서 실실 웃다가 뭘 걸거냐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응… 뭘 걸지…
“소원권은 저번에도 걸었고, 나기도 아직 안 쓰기도 했으니까… 그래, 이번에는 간식 내기라도 하는 거 어때요? 진 사람이 카페에서 달달한 간식 사기!”
저번에 갔던 카페 음료수 맛있었는데~ 도시처럼 큰 지점은 별로 없지만, 지방의 가게는 그 지방만의 특색이 또 있는 법이다. 물론 이 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기에게는 지겨운 메뉴일 뿐이지만. 아무튼 이거라면 누가 져도 크게 타격을 입진 않을 테니까. 아마도 괜찮겠지? 그렇게 제안하고 나서 명예 현지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킥킥 웃었다.
“명예 현지인이라~ 좋아요! 인정해드리죠☆ 아, 이쪽이에요!”
안내를 부탁받은 나기가 앞서서 걸어나간다. 해변을 벗어나 길가로 들어서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눈 앞에 또 다시 해변이 펼쳐진다. 다만 아까의 그 해변보다는 인적이 드물고, 좀 더 인위적인 느낌이 적은 그런 해변이었다. 확실히 사람이 적다. 여기까지 넘어오는 길이 번거로워서인지, 아니면 크게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좋아! 그럼 그렇게 가자! 수영을 다 하고 돌아가는 길에 간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면 괜찮을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고기도 있으니까 그것까지 먹으면 배가 부르려나.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먹는 것으로 하자!"
물론 그녀가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년은 먹을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식사까지 하고 완벽하게 시간을 다 보낸 후에 온천으로 돌아간 후, 자기 전에 온천에 들어가서 몸을 데우고 나온 후에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누우면 최고의 하루로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까.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을 하기로 하며 소년은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해변을 벗어나 언덕길에 오른 후 조금 더 걸으니 보이는 해변은 확실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비밀명소 같은 느낌에 소년은 절로 감탄했고 짐을 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달려가며 해변가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와.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는데? 가르쳐줘서 고마워! 아. 여기는 SNS에 올리지 않을게. 일단은 비밀장소 같은 곳 같으니 말이야."
원래 같았으면 바로 SNS에 업로드를 했겠지만, 이런 장소는 지켜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어 돗자리와 파라솔을 내려놓은 후에 소년은 우선 돗자리를 깔고 파라솔 설치작업에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걸릴테니까 근처에서 쉬고 있어줘. 다 되면 부를테니까."
/별 건 없고 그냥 이것저것 잡다한 일이 있다보니 말이야. 하지만 내일은 쉴거다! 물론 잠깐 나가서 놀기도 한거지만!
“으음~ 올려도 상관은 없는데요? 아, 그치만 사람이 늘어나면 좀 그런가? 좋아요! 그럼 비밀장소로 하죠!!”
딱히 비밀은 아닌데,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 여기에 사람이 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아쉬워졌다. 결국 왔다갔다 하다가 비밀장소로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파라솔 설치에 돌입한 유키를 보며 도울 거라도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쉬고 있어달라는 말에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엣, 나기 설마.. 도움 안 되는 걸까… 뭐어, 괜히 돕는다고 갔다가 방해하면 큰일이니까. 대신 나기가 택한 것은 큼지막한 바위 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안에 수영복을 입고 와서 그냥 겉에 옷만 벗으면 그만이지만 그걸 또 눈 앞에서 하기엔 애매한 기분이라…
“흐흥~ 어때요 아사기리 씨? 잘 되고 있나요?”
갈아입는 데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옷을 잘 정리해서 가방에 넣어둔 후 다시 유키쪽을 느긋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가서 도울 수 있다구요!라고 주장하는 듯했지만, 글쎄. 파라솔 설치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 아마 도울 기회는 없지 않을까.
"사람이 늘어나면 여기도 수영하기 힘들어질걸? 나는 별 상관없다고 치더라도 현지인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조용한 명소는 자신들만의 장소로 간직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소년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그녀는 괜찮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현지인들을 위한 장소 정도로 남겨둬도 좋겠다는 쪽으로 소년은 생각을 정리했고 그녀 역시 그렇게 하자고 했으니 소년은 더 말하는 일 없이 생각을 종료했다.
파라솔을 설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기둥을 세우는 것은 조금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깊게 넣으면 나중에 넣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너무 얇게 하면 금방 쓰러지기 좋았으니까.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소년은 파라솔 기둥을 적당한 깊이로 설치했고 활짝 파라솔을 폈다. 돗자리 위에 검은 그늘이 생겨났고 소년은 괜히 뿌듯하게 웃으면서 팔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 응. 이쪽도 작업 종료했어!"
그녀의 목소리에 유키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 순간 보이는 것은 그녀의 수영복 차람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두 눈만 멀뚱멀뚱 깜빡이던 소년은 아무런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웠다.
파라솔을 무사히 세우고 성취감이 가득한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며 나기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아아~ 고생했네요 아사기리 씨☆ 그리고 수영복을 귀엽다고 해주다니 역시 아사기리 씨, 보는 눈이 있네요!
“아하하하☆ 그렇죠?! 열심히 골랐다구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쓸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구요. 아사기리 씨 덕분이에요☆”
프릴과 리본이 적당히 어우러진 귀여운 디자인의 투피스. 물론 학교 수영복이나 경기용 수영복에 비하면 물 속에서 저항을 받아 속도에 지장을 주겠지만(…) 뭐 어때! 귀여우면 장땡이다!! 애초에 그렇게 진지하게 승부할 생각은 별로 없기도 하고! 그냥 친한 사이에 하는 가벼운 내기니까 말이지.
“자자, 아사기리 씨도 얼른 갈아입고 오라구요! 안 그러면 저 먼저 들어갈 거라구요~”
말은 당장이라도 바다로 뛰어들어갈 것처럼 했지만, 몸은 모래사장에 서서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무작정 뛰어들면 위험한 것이다. 현지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준비운동을 꼼꼼하게 해야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구! 다들 물에 들어가기 전 준비운동, 잊지 말자!(공익광고풍)
"에이. 내 덕분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가 아니었어도 바다에서 놀 이가 충분히 있었을걸?"
애초에 여기는 바닷가고 친구들끼리 바닷가에 갈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름인데! 방학인데! 하는 생각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투피스 수영복을 조금 더 감상하다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소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나도 곧 갈아입을게. 어디보자."
이내 소년은 근처에 있는 바위를 확인하며 그 뒤로 쏘옥 들어갔다. 하늘색 트랭크스 수영복은 이미 속에 입어뒀기 때문에 그저 옷만 벗으면 될 일이었다. 소년은 웃옷을 벗고 이내 바지를 벗으면서 완전히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섰다. 누가 수영부 아니랄까봐 복부에는 꽤 탄력이 있었고 몸에도 은근히 근육이 붙어있는 것이 폼으로 수영부에 소속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이어 소년은 바위 밖으로 나섰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좋아! 준비 다 했어! 준비운동하는 중이구나? 그렇지! 수영 전에는 준비운동을 안하면 큰일나거든! 그러니까 나도 해볼까!"
이어 소년은 천천히 그녀의 옆에 서서 몸을 풀었다. 자연히 푸른색 바다가 철썩이는 모습이 보였고 소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스트래칭을 마치자마자 소년은 조금 속도를 내서 물로 뛰어들어갔고 절로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근육. 과하지 않고 탄탄하게 붙은 근육. 수영부라는 거 사실이었구나! 저건 운동한 사람에게 붙는 근육이다! 평상복을 입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모습에 살짝 멍하니 보다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아, 아니 뭔가 멋있어서 자동적으로 그만.
“우와, 아사기리 씨… 엄청나네요! 진짜로 수영부 소속이네요!”
그에 비하면 자신은… 음… 근육은 별로 없지… 나기도 운동을 좀 해야할까? 하지만 따로 운동하기엔 너무나도 바쁜 나날이다. 뭐, 괜찮겠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바다! 그리고 수영! 그리고 내기!! 서로 사이좋게 스트레칭을 하고 먼저 바다로 뛰어든 유키를 따라 나기도 바다로 들어갔다. 서늘한 바닷물이 기분 좋게 몸에 휘감긴다.
“으하☆ 차갑다~ 역시 바다네요!”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상체에 물을 적셨다. 아니, 이거 안 했다가 실려간 사람 제법 많이 봤었는걸.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그리고 끝나자마자 이쪽도 첨벙거리며 좀 더 깊이 들어갔다. 수년간 아와나미에서 살며 다진 수영실력… 오늘 보여주겠어!
“푸하! 아아~ 시원하다~ 참, 내기는 어떻게 할까요, 아사기리 씨? 저쪽 바위까지 누가 더 빨리가나? 아니면 다른 걸로 할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수평선 쪽을 가리켰다. 그렇게 가깝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바위...라고 할까 암초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키를 본다.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괜히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하는 그런 도시사람은 아니야. 나!"
괜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년은 자신의 배를 가볍게 툭툭 손으로 치다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래도 계속 치기에는 조금 아픈 것인지 소년은 더 이상 그런 행동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제 발을 적시는 차가운 바닷물을 느끼며 정말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물장구를 치는 것도 좋겠고 정말로 열심히 수영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소년은 그녀의 말에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녀가 가리킨 바위는 확실히 멀지 않고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수영을 하기 딱 좋은 길이라고 생각을 하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따.
"좋아. 그럼 저쪽으로 가자! 저 정도면 충분히 즐겁게 수영을 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거든! 아.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중간에 쥐가 나고 그러면 꼭 말하기야. 알았지? 나도 그럴 참이야!"
수영을 하다가 다리에 쥐라도 나면 그건 진짜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괜히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유키는 물로 뛰어들 자세를 갖췄다. 꽤 전문적인 폼을 유지하면서 소년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다시 한 번 역시 수영부!라고 생각했다고 할까. 아무튼 뭐, 아사기리 씨도 뿌듯해 보이고 됐나.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 내기를 수락한 아사기리 씨를 보며 씩 웃었다. 사실 저 바위는 아와나미에서 수영으로 내기할 때마다 쓰이는 유서깊은(…) 바위니까. 나기 자신도 물론이고 아빠 엄마, 어쩌면 이장님도 어렸을 때 했던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해졌으니 이제 시작하면 되겠네!
“당연하죠! 쥐가 나거나 위험해지면 곧바로 알리기에요! 그럼, 준비…. 시작!”
수영하다 쥐가 나면 그건 진짜로 위험한 거니까. 그 외에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알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자세를 잡았다. 유키 쪽은 정말로 전문적인 폼이라 다시 한 번 수영부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나기 역시 폼을 잡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폼은 아니었다. 아무튼 나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하고 물 튀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좋아! 그럼 다이스로 승부를 정하자구! 1~100을 돌려서 더 큰 숫자가 나오는 사람이 더 빨리 도착했다는 걸로 하자! 그런고로 나기의 속도는 이거다! 가라 다이스!! .dice 1 100. = 54
나기의 스타트 신호에 맞춰 소년은 빠르게 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상당히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숨 또한 확실하게 내쉬고 있었다. 상당히 안정적으로 나아가고 속도도 있었지만 문제는 바로 옆의 소녀의 속도였다. 전문적인 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떻게 된 것이 자신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게 현지인의 힘인가?! 순간 당황하며 소년은 빠르게 속도를 내려고 했지만 유속이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거 참!"
괜히 보글보글 거리는 느낌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소년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속도를 내려고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그녀보다 바위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소년은 바위를 잡고 물 밖으로 살며시 나왔으며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하하하하. 졌네. 엄청 빠른데? 미쿠모 양. 이 정도면 우리 수영부에서도 꽤 에이스로 뽑힐수 있는 수준이야. 우리 학교로 전학온다면 바로 수영부에 오라고 하고 싶을 정도인걸? 나름대로 진짜 진지하게 했는데 지다니. 조금 아쉬운걸."
지갑의 용돈 많이 쓰게 되겠네.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소년은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전혀 아쉬워하거나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운지 소년은 살며시 바위에 등을 대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늘상 해오던 것처럼 물을 가르며 나아간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고, 그저 바다에서 놀다가 자연스럽게 깨우친 쪽이지만… 이 바다에 익숙해져 무의식적으로 유속의 흐름을 잘 탄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운이 좋은 건지… 어쨌든 나기가 바위에 도착했을 때 유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렇다. 수영부 선수를 현지인이 이겨버린 것이다. 제일 당황하고 있는 것은 나기 자신이었다. 아니, 지지 않겠다고 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이겨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바위를 잡고 올라온 유키의 표정만큼, 나기의 얼굴도 난감이라는 두 글자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어어… 어서오세요…?”
바위로 올라오는 유키를 향해 이렇게 얼빠진 인사를 건넬 정도로 당황하던 나기가 멋쩍게 웃었다.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뭐랄까, 의외네!
“아하하… 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진짜 이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뭐, 뭐어! 현지인이니까요! 익숙한 물이라 그래요! 그, 그거네요! 홈 어드벤티지! 아마 전학가서 아사기리 씨네 학교 수영부에서 하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올걸요~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까, 나중에 카페에서 잘 부탁드릴게요☆”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응, 원래 친구끼린 이런 내기도 하고 이기고 지기도 하고 그런거니까!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멀진 않다고 해도 해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라, 바로 움직이면 엄청 지치거나 쥐가 나거나 할 수 있으니까.
“하아~ 그래도 재밌네요. 오랜만에 전력으로 수영한 느낌☆ 어릴 땐 좀 더 자주 했는데 말이죠~”
"그러게. 아니면 미쿠모 양이 수영에 재능이 있다던가. 어느 쪽이건 수영선수 노려봐도 되지 않겠어? 어드벤티지라고 해도 실력이 없으면 수영하기 힘들잖아?"
괜히 엄지손가락을 척 위로 올리면서 소년은 개운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고 더운 하늘이었지만 몸이 바다에 담겨져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덥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몸을 적시던 소년은 바위 위로 오른 후에 자연히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어 그 상태에서 고개만 살며시 돌리면서 소년은 넌지시 물었다.
"내기는 지킬게! 아무튼 두 번이나 져서 조금 아쉬운걸. 다음에 또 내기를 할 일이 있다면 꼭 이겨야겠어. 물론 그때도 미쿠모 양이 이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어차피 소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지. 승패가 아니었다. 물론 진지한 승부였다면 조금 더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놀이가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전혀 표정에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소년은 그 대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럼 요즘은 안 해? 나라면 이런 곳에서 지내면 매일같이 수영하면서 놀 것 같은데. 아. 사는 곳이 바다라서 오히려 그런 것은 질리게 되고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살던 도시가 가끔 질릴 때가 있거든. 그래서 이런 곳이 오히려 편할 때도 있어."
괜히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소년은 다시 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원한 바람이 소년의 코 끝을 콕 찌르고 달아날 쯤에 소년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다행인걸. 여기에 내려와서 미쿠모 양처럼 좋은 이도 알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으니까."
“아핫☆ 말씀은 고맙지만 선수는 무리 아닐까요? 저보다 수영 더 빠른 친구도 몇 있는데, 걔네라면 모를까~”
어렸을 때부터 쭉 함께 놀던 친구들 중 훨씬 수영을 더 잘하는 애가 있었지. 나기는 무리라도 걔라면 선수를 노려도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 친구는 가업을 잇는 쪽으로 가버렸으니. 아무튼 손사래를 치면서 그렇지 않다고 한 후, 슬쩍 한쪽 발을 내려 물에 담갔다. 찰랑거리는 파도를 발끝으로 느끼고 있자니 내기는 지키겠다는 말이 들려 살며시 고개를 돌린다. 하나도 아쉬운 기색이 없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눈 가득히 담긴다.
“좋아요! 나기는 다음에도 지지 않을 거지만☆ 도전정신이란 건 좋은 법이죠! 음, 요즘은… 확실히 잘 안하네요. 어렸을 때야 놀 곳이 바다 아니면 산이니까 자주 놀았는데, 몇 년을 바다에서 놀면 조금 시들해지기도 하고. 어릴 때보다 놀 시간도 적어지기도 했고… 그렇죠? …아무래도 오래 지내면 말이죠, 조금 질릴 법도 하니까.”
그렇네요. 도시도 질리는구나. 지금이야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 도시에 가면 하루하루 질리지도 않고 즐겁기만 할 것 같지만, 몇 년을 지내다보면 이 바다처럼 조금은 시들해지려나. 어쩐지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는 유키를 보며 나기는 소리없이 웃었다. 뭐, 도시에 가본 적 없는 자신이 상상해도 잘 상상이 안 되네.
“아하하☆ 그러네요! 나기도 처음에 온천에 가서 말 걸었던 거, 엄청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여행객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