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렸다. 세상이 바뀌었다.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붉은 하늘이었다. 아이는 색맹이었다. 그것도 가장 특이하다는 붉은 색만 볼 수 있는 적색색맹말이다. 거기에서 나아가 아이는 모든 색을 붉은 색으로만 볼 수 있었다. 먹는 음식도, 보는 무언가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붉은 색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색을 몰랐다. 아이에게 있어 색이란 붉은 색의 명암 차이였다. 아이는 숨을 내뱉었다. 입에선 새빨간 연기가 내뱉어졌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이의 감수성? 아니면 감정?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진한 붉은 연지를 입술에 바르고, 방긋방긋 웃으며 삶을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아이의 앞에서 그 지독한 문이 열렸으니까 말이다. 아이는 입을 방긋거렸다. 문에서는 수없는 존재들이 걸어나왔다. 강철의 군단이 세상을 휩쓰는 동안에도 아이는 누구도 건들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무시하기라도 하듯 문 너머의 존재들은 아이를 보고도, 지나쳐 넘어갔다. 아이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도망쳤다.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희망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누군가가 아이의 뒤에서 둔기를 휘둘렀다. 아이는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때 아이는 두 손발이 묶인 채였다. 꼼꼼히 묶여 풀리지 않는 그것에 체념한 채,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신 소리를 들었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피려는 행위였다.
" 저건 팔아 넘기려고 그러죠? "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꽤나 목청이 큰지 이 주위에 목소리가 울렸다.
" 그래. "
말을 취소해야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목소리도 울렸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곳의 풍경은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는 곳의 풍경에 따라 익숙해졌다. 낡은 컨테이너를 가정용으로 개조한 것 같은 풍경이었다. 아이는 조소를 지었다. 이제야 바닥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이제는 컨테이너에 갖히는 운명이라. 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날, 아이의 꽃이 꺾였다. 그 뒤로도 아이의 꽃은 찢겨지고, 밟히고, 부서졌다. 붉은 세상 속에서 붉게 피어난 자신의 탓이라고 아이는, 아이는 이해하려 했다. 그렇게 부러져 꺾인 뒤에야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버린 그것은 이제 우는 법도,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잊어버렸다. 단지 몇 푼 되지도 않을 돈에 팔려버린 자신의 가치에 따른 이름을 가졌을 뿐이다. 물건이라는 이름 말이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은 물건이 되었다. 자신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물건은 그저 휘둘렸다. 물건처럼, 물건답게, 휘둘리고, 사용되며, 마침내 부서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버려졌다. 하지만 그런 물건을 주운 누군가가 있었다.
" 괜찮나요? "
그는 물건에게 처음으로 '상태'에 대해 물어봤다. 고개를 갸웃거린 물건의 상태를 살피고 상처를 치료해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 배가 고프진 않나요? "
더러운 빵으로 연명하던 물건에게 처음으로 먹을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비록 여러 재료들을 모아 만든 스프였지만 수 년만에 먹은 제대로 된 음식에 맛을 느끼기도 전에 마셔버린 물건에게 그는 자신의 몫을 더 나누어주었다. 때때로 물건은 원래 하던 것처럼 스스로 휘둘려지길 바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물건을 잡지 않았다. 다만 거부하고, 손을 잡아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물건이 놀랐던 것은 그때였다.
"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
이름? 이름이 무엇인지 물건은 몰랐다. 물건의 호칭은 아이였고, 꼬마였고, 꽃이었고, 물건이었다. 물건은 그 단어들을 나열했다. 아이, 꼬마, 꽃, 물건. 그러자 남자는 그 단어들을 듣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
" 그럼 당신의 이름을 제가 지어주어도 괜찮을까요? "
물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라고 부르더라도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자신은 아이니까. 아이는 어른이 시키는 것을 따라야 했으니까. 꼬마니까. 꼬마는 말을 잘 들어야 했으니까. 꽃이니까. 꽃은 누군가가 부르기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물건이었으니까. 물건은 정해진대로 불려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