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파블로바. 바닐라 향이 보이는 듯한 달콤한 크레이프 케이크. 새빨간 딸기가 올라간 쇼트케이크...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카페의 특정 케이크는 한정이라는 것이죠. 사실 그 주문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으음.." "죄송해요. 합석하는 것만 가능하니까요."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한 번 둘러보려 하지만 확실히 카페 안은 자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차 있었습니다. 가장 좋아보이는 자리는 물론이고, 불편해보이는 자리까지도. 뭔가 감으로는 주문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네. 라고 중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내일도 날이니까. 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오늘이 가장 적합한 날이었는데. 백색과 청색 그런 머리카락이 미련이 흐르듯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려 했어.
...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던 것이 너의 운을 증명하는 것이겠지만.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목적은 달성한 오늘. 나이젤은 종이봉투를 들고 길을 걸었다. 너무 어두운 곳은 잘 보이지 않아서 힘들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여기로 떨어지면 얼만큼 충격이 갈까, 같은 쓸모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익숙한 길을 불빛 따라 걷던 중. 붉은 눈처럼 발광하는 자판기의 붉은 버튼에 눈이 갈 때 자연스럽게 사람도 볼 수 있었다.
"거기 누구 있나요?"
많이 맡아봤을, 확신은 하지 못할 냄새가 풍겼다. 음료수를 뽐내기 위한 하얀 조명에 비친 얼굴은 본 적이 있었고, 그 안면 있는 사람이 다친 것도 알았다. 나이젤은 벤치로 향했다.
"병원이 멀게 느껴질 만도 할 것 같네요."
의학적 소견은 없지만 좋아 보이진 않는다. 슬슬 어두운 것에 적응할 듯한 눈에 힘을 풀었다. 거리가 가까워져 막아서지 않는 이상 다음 말을 꺼낼 때쯤은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바닐라향이 향긋하게 감도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바라보고 앉은 하루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수녀복이 아닌 수수하지만 새하얀 원피스를 걸치고 나온 그녀는 느긋하게 거리를 걸으며 산뜻한 바람을 즐겼다. 그러다 그 바람에 실려오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카페에 들어온 결과물이 눈 앞에 가지런히 그릇 위에 올려져 있었으니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럼, 잘 먹겠습니다. "
하루는 가볍게 성호를 그으며 우아하게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살며시 먹기 좋게 잘라내려고 했다. 손을 내밀던 하루의 귓가에 누군가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하루의 자그마한 손에 쥐어진 포크가 케이크를 잘라냈겠지만, 포크는 케이크 위에 멈췄다가 천천히 테이블 위로 돌아간다. 포크를 내려놓아 자유로워진 새하얀 팔을 살며시 들어 다림과 이야기 하고 있던 종업원이 자신을 보게 만든 하루는 살풋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 ... 제 앞에 자리가 비어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합석해서 드셔도 될 것 같아요.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못 드시고 돌아가는건 아쉽게 될테니까요. "
하루의 상냥한 목소리가 종업원과 다림에게 들렸을 것이다. 종업원은 그런 하루를 보곤 곤란해하던 얼굴에서 화색이 감돌더니 조심스럽게 다림을 바라본다.
' .. 저쪽 분 말씀대로 합석하시겠어요? 아무래도 기다리시거나 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
강찬혁은 남은 병 하나를 따서 마저 들이마셨다. 저 사람에게 준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선택지를 고르기에는 강찬혁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마시자 한결 몸이 나아졌다. 당장은, 당장은 걸어서 갈 수 있을까? 조금만 쉰다면 가능하리라. 목소리의 주인이 가로등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벤치로 가까이 오자 몸을 옆으로 끌어 자리를 양보했다. 오늘도 실수였나? 강찬혁은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수라, 실수를 많이 하긴 했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정말로 실수의 연속이었으니까.
"애매해요."
하지만 오늘은 실수라 하기도 애매했다. 실수란 게 있었다면, 강해질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방법도 일단 쓰고 보는 정신나간 놈을 부장이랍시고 만난 게 실수였을까?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찬혁이 오크랑 싸우지 않았다면 강해지지는 못했더라도 이렇게 온몸이 박살났을 리는 없었기에, 그건 실수인 것 같기도 했다. 강찬혁은 피가 배어나온 지 오래라 검게 물든 왼쪽 어깨 부분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쉰다.
케이크들이 예쁘게 있는데다가 자리에 내리는 햇살과 합쳐지면 사진찍기 아주 좋은 느낌일 겁니다. 정말로 돌아가려고 버스라던가 이래저래 검색하려 했다가. 잠깐만요. 라는 하루의 말을 듣고는 잠깐 멈칫합니다.
종업원이 합석을 권하는 말에 다림은 잠깐 망설이는 듯 하지만, 하루의 매력이나.. 기다리는 게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자리에 가벼운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감사합니다. 라고 하루에게 인사합니다.
"합석에 감사해요." 종업원에게 말하는 것은 그렇다면 저는 샘플러 세트 하나 주시겠나요? 라고 말하려 합니다. 샘플러란 케이크를 큰 조각이 아닌 작은 조각들로 다양한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세트라고 하네요. 이 카페에서만 한정으로 파는 것이죠. 세트에 음료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 모양입니다. 하긴. 케이크 종류가 다양하니만큼..
"여기 케이크가 대부분 맛있어서 샘플러 한정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꿀팁이에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려 하나요?
강찬혁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강찬혁 특유의 의념기가 시의적절하게 발휘되지 않았다면, 강찬혁은 아프란시아 성학교가 아니라 제노시아 성학교의 의학선생, 그리고 대장장이 선생과 함께 사용 가능한 의족 옵션과 강화수술 패키지에 대해 심도깊은 토론을 나누고 있었으리라. 아직도 그 오크 녀석의 하울링을 떠올리면 어깨 부분이 아려왔다.
"한번에 레벨을 두 계단이나 올렸지만... 글쎄.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합석을 권하는 말에,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다가와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내는 다림의 말에 상냥한 눈웃음을 지어보이곤 고개를 살살 저어보이며 말한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망설일 일도 아니었다는 듯 겸손한 말이었다. 물론 혼자 앉아서 즐기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이야기 상대가 생기는 것도 나름대로 반길만한 일이라는 것을 하루는 잘 알고 있었다.
" .. 그런 건 몰랐네요. 저는, 뭔가 알고 온게 아니라...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서 온거라서요. "
하루는 그런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듯 처음에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새하얀 볼위에 분홍색 열꽃을 피워내며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한손으로 입을 가린 체, 부끄럽다는 듯 말한 하루는 이내 고맙다는 듯 다음번에는 샘플러 세트를 시켜보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눈을 반짝인다. 이래뵈도 단것을 좋아했기에, 이런 정보를 알게되면 결국 또 와버리고 마는 하루였다.
" 카페에는 여기저기 찾아다니시는 모양이네요? 그런 정보 같은 것도 잘 알고 계신 것을 보면.. "
이런 부분에 있어선 하루는 백지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고아원에서 지낼 때에는 카페에 올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이렇게 카페에 앉을 생각을 하는 것도 학원섬에 오고 나서 변화한 모습이었으니까.
"혼자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좋은 일인데.." 양보해준다는 말과 겸손해보이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려운 것도. 망설일 일도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건 맞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림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겠지. 뭔가 알고 온 게 아니라는 말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운이 좋으시네요. 좋은 카페를 찾는 감각이 있으신가 봐요. 라는 말을 합니다.
"아니요." "저도 정보를 우연히 알게 된 거라서요."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거라고 해도 알아버린 걸 안 써먹기는 그러니까요? 라고 하루의 카페를 돌아다니냐는 물음에는 아니요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젓지만. 그리 말하면서 나오는 샘플러 세트를 봅니다. 9가지의 가지런한 케이크 조각들이 예쁘게 나오는 것이 눈을 즐겁게 하나요?
딸기, 블랙 포레스트, 단호박, 치즈케이크, 크레이프 케이크... 그런 걸 보면서 흥미롭다는 듯 바라봅니다. 자기도 처음 시키는 거면서 여유로운 척인가요?
강찬혁은 짜증을 냈다. 그래, 오크랑 싸우기로 한 건 강찬혁 스스로의 결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암묵적인 위계에 의해 강요된 결정이었다. 강찬혁은 자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간결하게 설명했다.
"처음에 전투연구부장이 고블린 소굴 게이트가 열렸으니 가서 다 죽이고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지, 그런데 들어가니까, 오크가 있었어. 적당히 눈치 봐서 도망치려는데 전투연구부장이 '튀면 뒤진다'를 아주 자세하게 풀어서 장문의 문자로 보냈더라. 오크를 죽이던지 아니면 내가 죽던지였으니까. 알았어?"
하루에게 그런 모습을 보고 외면하라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으니까, 어찌됐든 하루의 눈에 들어온 이상 같이 합석을 하던, 자신은 포장을 해서 카페를 나가던 다림이 카페에서 케이크를 즐길 수 있게 해줬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곤 이어서 들려오는 운이 좋다는 말에는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가요?' 하고 기분 좋은 듯 가벼운 대답을 돌려준다.
" 우연히 알게 된 것도 대단한걸요. 학원섬에 일년이 넘게 있었는데도 모르는 사람인걸요, 전."
하루는 다림의 말에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결국은 다림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로 가볍게 흘러가게 만들곤, 이내 다림이 주문한 세트가 나온 것을 보며 하루의 입에선 '와' 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리곤 그 아홉가지 케이크 조각을 눈에 담아두려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더니 히죽거리며 자신의 케이크를 작게 잘라 입에 넣는다.
" 다음번엔 저 그거 꼭 시켜서 즐겨봐야겠어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채워지는 메뉴라니... 최고네요. "
오늘 충분히 즐겁게 즐기실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을 건내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다림을 바라본다. 다림이 케이크를 즐기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슬쩍 눈을 피하긴 했지만. 분명 귀여운 얼굴로 힐끔힐끔 다림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