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가에서 벌이는 축제는 너무나 화려했다. 이런저런 만찬이 차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가하며 제각각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기적으로 이렇게 파티를 벌여서 다른 나라와 동맹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혹여나 비슷한 또래의 황족이 있으면 연을 맺게 해서 모두가 한 가족, 한 핏줄이 되는 것이 이런 파티의 주목적이었다. 당연히 란델 역시 하얀 예복을 입고 자리에 참여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비슷한 나이의 황자와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란델은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하나하나 수행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지는 또 별개라고 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란델은 이런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즐길 수 없고 정치적 목적으로 이런저런 인사를 돌아야만 하는 것은 영 제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란델은 슬며시 자리를 비울 것을 계획했다. 허나 성 밖으로 나가면 난리가 날테니, 적어도 성 어딘가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란델은 어디로 가면 좋을지를 떠올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란델은 자신의 전속기사인 헬레나가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보이던 란델은 슬그머니 살금살금 다가간 후에 그녀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고기와 과자, 그리고 샌드위치 류가 담긴 접시를 뒤로 숨기면서 란델은 헬레나가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를 기대하듯 조용히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면 미소를 짓고 있는 란델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장난끼 가득한 웃음소리만 내고 있는 그런 란델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들었냐는 그 말에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란델은 헬레나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누군가의 뒷담이라도 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들어서는 안되는 혼잣말이라도 한 것일까. 빨개진 얼굴을 괜히 더 빤히 바라보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감추면서 란델은 헬레나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뭘 들었냐는건진 모르겠지만 여기 초대객 중 누군가의 뒷담을 깐 거라면 난 못 들은 것으로 할게. 입장상 그런 것이 있으면 나는 꾸짖을수밖에 없는데 괜히 화를 내고 싶진 않거든. 아. 물론 나도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이는 있긴 해. 같은 황족이면서 되게 급을 나누려는 이들이 간혹 있거든."
누군지 말을 하진 않지만 이번에도 그런 이가 오기라도 했는지 란델은 괜히 혀를 차면서 쓴 소리를 냈다. 아무튼 잠시 딴길로 가버린 이야기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헛기침소리를 내며 란델은 접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배고프지 않아? 좀 먹으라고 가져왔어. 기사들은 지금 아무 것도 못 먹고 경비서기 바쁘잖아?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여기에 좀 있게 해주면 되게 고마울 것 같은데. 아. 절대 도망친게 아니야. 그냥 나는 여기가 좀 더 편할 것 같아서 온 것 뿐이야."
결국 그게 그거지만 완전 다른 것인양 이야기를 하며 란델은 한 손을 자신의 허리에 대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먹으라고 가져온건데 안 먹으면 곤란하지. 물론 배가 부르다면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배가 고프다면 어서 먹어. 괜찮으니까. 이럴 때 이런 곳 음식을 먹어보지. 언제 먹어보겠어?"
물론 전속 기사니까 결국 성 안에서 지내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는 것이 온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최고급 식재료들은 모두 황족들을 위해서 사용되니, 그보다는 조금 질이 떨어지는 음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적어도 그녀가 먹었던 성의 음식보다 훨씬 더 맛이 좋으리라. 란델은 그렇게 예상했다.
"더 먹고 싶으면 이야기하면 가져와줄게. 평소에 일을 열심히 하니 가끔은 황자로서 이런 상도 줘야하지 않겠어? 물론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지만."
만약 자신이 황제라면 더욱 더 많은 상을 줄 수 있겠지만 그래봐야 란델은 제 2황자였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상기하며 란델은 근처에 있는 벽에 등을 살며시 기댔고 헬레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 나라면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못할 것 같은데. 역시 기사들은 다르구나. 믿음직한 기사가 옛 친구라서 다행이야."
헬레나의 말에 란델은 절로 감탄했다. 이 연회를 위해서 기사들은 정말로 일찍 기상했을테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면서 서 있었을테니 자신이라면 절대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니면 기사들은 교육을 받을 때 이렇게 가만히 있는 훈련도 하는 것일까하는 순수한 호기심을 품기도 하다 곧 들려오는 그녀의 물음에 란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원래는 안되지만 여기라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일단 성 안이잖아? 나는 저런 정치적인 느낌이 가득한 곳은 별로여서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도 있어. 아. 하지만 성 안이니까 도주한 거 아니야. 단지 모두가 있는 곳과 거리가 있는 곳일 뿐이지."
적어도 자신은 규율을 어기지 않았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란델은 조금 더 편하게 등을 댄 후에 그녀를 바라보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귀족가의 영애로서 이런 비슷한 연회에 많이 참여해봤어? 넌? 귀족들끼리만 모이는 곳은 어떤 분위기야? 황가는.. 보다시피. 알게모르게 꽤 불꽃이 튀거든. 특히 다음 황제의 자리를 이을 이들끼리는 더더욱. 가끔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게 또 보통 어색한게 아니란 말이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란델은 가만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안과는 다르게 바깥은 상당히 고요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마을은 아마도 더욱 조용했을 것이다. 그 분위기를 머릿속에 그리다 란델은 헬레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역시 나는 성보다는 저기가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네. 아. 그렇다고 성의 생활이나 황가의 생활이 싫다는건 아니지만...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헬레나가 픽,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로, 자신은 목표로 하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인지도 몰랐다.
“그게 뭐야, 확실히. 여기는 거리가 좀 있는 위치이긴 해.”
란델의 말이 재미있던 건지, 헬레나가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리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웃는 모습 뒤에 칼을 숨기고 있다고 할까.... 우리 집은, 권력욕이 없어서 아버지가 최대한 사교회를 즐기고 와라. 라고 하셨지만, 그 분위기가 가끔 숨 막힐 때가 있더라고. ....... 권력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바꾸는구나, 싶어지는 순간이 자주 생겨. 그 외에는, 마음이 맞는 영애들과 놀거나 해.”
디저트도 많긴 했지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아니, 제법 많이. 예를 차리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다만, 그녀는 약간 딱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란델을 따라, 시선을 마을 쪽으로 돌린 헬레나가 두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알아, 확실히 저 쪽에서 만났을 때의 너는, 엄청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러면, 잠행할 겸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진 헬레나가 존댓말로 물었다. 잠행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의상은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상점가에서 사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로브 같은 거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던 헬레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결국엔 권력싸움이라는 이야기에 란델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놈의 권력으로 왜 저리 싸우는 것인지. 물론 그건 황자인 란델이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그는 굳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강하게 저어보이는 것이 그런 이야기는 질색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친한 사람들은 있다고 하니 다행이네. 어릴 적의 너라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인데 역시 시간이 달라지게 하는걸까."
어릴 적의 그녀는 어땠더라.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란델은 괜히 얄밉게 웃어보였고 조금 더 편하게 등을 기댔고 갑자기 말을 올리는 모습에 슬며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조금 곤란한데. 여기서 바로 잡혀가고 싶진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란델은 살며시 그녀에게 다가간 후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다음에. 아무리 그래도 지금 나갈 순 없으니까. 그보다 같이 근무서는 기사처럼 있을테니까 연기 잘하기다. 알았지?"
이어 란델은 살며시 그녀의 뒤로 이동한 후에 등을 맞대듯이 앞을 바라보았다. 인기척의 주인공이 이곳으로 와도 기사로 착각하게 하려는 듯이 일부러 그렇게 자세를 잡았다. 물론 헬레나가 그것에 맞춰줄지는 자유였다.
다음 황제가 될 예정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황족인 그가 온전히 같을 순 없었다. 교육을 받는 것이 있었고, 성장 과정 속에서 환경은 큰 영향을 끼친다고 했었으니까. 어릴 적의 자신은 어땠더라. 잠시 그리 생각을 하며 란델은 곧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도움 덕에 란델은 어떻게든 들킬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사라지자 겨우 안도를 하면서 란델은 자세를 풀고 헬레나를 바라봤다. 미소를 환하게 지으면서 란델은 곧 헬레나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고마워.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 물론 황족으로서 좋은 자세는 아니긴 한데. 이건 서로에게 비밀이야. 너도 어떻게 보면 임무를 내팽겨친거니까."
황족이 다른 짓을 하고 있으면 그것을 막는 것 역시 전속 기사의 일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헬레나 역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셈이었기에 란델은 괜히 얄밉게 웃어보였다. 오른손을 들어 쉿 자세를 취하면서 손을 아래로 내린 란델은 다시 편한 자세로 서면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한편, 케이크를 가르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참으면서 웃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일까.
"설마 이렇게 반으로 나눌 줄은 몰랐는데. 됐어. 큰 것을 먹어. 난 이미 많이 먹었으니까. 정말 일을 잘하는 기사라니까. 누가 뽑았나 몰라."
괜히 뻔뻔하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란델은 작은 쪽으로 괜찮다고 하며 오히려 큰 쪽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가려고 했다.
안녕이야! 헬레나주! 많이 피곤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몸은 괜찮은지 걱정이 되네! 아무튼 황가는 사자 머리 모양의 문양을 달고 있고 란델은 자신의 신분은 속일수 있다고 무척 좋아하겠지만 황가 사람들이나 기사단장님은 아마 거품을 물지도 모르겠어. 황자님에게 그런 옷을 입히다니. 기사. 자네 제 정신입니까? 이렇게 될지도 몰라!
한편 손으로 잡아서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을 벌리고 냠 받아먹는 헬레나의 모습에 란델은 살짝 당황했다. 물론 여동생에게 이것저것 먹인 적이야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었다. 물론 주군으로서 기사에게 이것저것 먹일 수야 있다지만 예상하지 못한 행동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허나 당황하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며 란델은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듯이 웃어보였다.
"하하. 당연하지. 이래보여도 최고급만 취급하고 먹고 있어. 물론 가끔은 서민들이 먹는 그런 것도 좋긴 한데 황가의 체면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있으니까. 알게 모르게 신경쓰는 것이 많거든. 이미지라던가. 황가가 평범한 것을 먹으면 그 나라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해서 일부러 더 고급적인 것을 먹을 때가 많아. 솔직히 무슨 상관이냐 싶긴 한데 아바마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란델도 공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매일 최고급 음식만 먹는 것은 조금 질릴 때도 있었다. 물론 배부른 소리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똑같은 것을 즐기는 이의 욕심에 가까운 생각을 슬며시 밝히면서 란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누굴 위해서 가져와야 해? 내 기사는 너 뿐이잖아. 내 기사는 내가 챙겨야지. 형님이나 동생들이 챙기게 할 순 없잖아?"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이 란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자신이 먹으라고 그녀가 자른 부분을 먹으면서 그는 그 맛을 즐겼다.
"역시 맛있네. 그러고 보니 너는 춤을 추는 시간이 있을 때 춤을 추는 편이야? 파티라던가 그런 곳에서 말이야. 나는 어쩔까 고민 중이야. 형님도 있고 동생들도 있는데 슬쩍 빠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