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우가 일어나며 제안을 하자, 타다는 일어나며 똑같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수분 보충도 마쳤고, 슬슬 다시 몸을 움직일 시간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가볼게."
그 말과 함께 철우를 뒤로하고 다시 운동을 재개하였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였겠지만 행동이나 타이밍은 마치 경주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무척이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였기에, 타다는 암묵적으로 대결을 시작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포기하지않고 움직이는 원동력에는 승부욕도 포함되어있었으니깐, 그런 의미에서 철우는...매우 좋은 경쟁 상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말이다.
"학생. 지금은 진짜로 돈이 없지만, 다음주 금요일이면 대금이 결제가 되니까, 다음주 금요일까지만..."
"아저씨, 내가 오늘 돈 달랬지 다음주 금요일에 돈 달랬어? 다음주 금요일이 상환기일이었으면 내가 다음주 금요일에 왔지 지금 와서 여기서 꼬장 부리겠냐고."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를 내온 대리는 헛기침을 하며 외근을 핑계로 나갔고, 사장은 자기보다 살아온 나이도 몇십년이나 어린 새파란 강찬혁에게 연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다른 곳도 아니고 수상한 불법 캐피탈에 돈을 빌리는 인생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대한민국에서 연장자를 공경하는 문화는 사회혼란 속에서 점점 희석되었고, 그가 발을 들인 이 세계에서는 비웃을 때나 소환되는 우스꽝스러운 개념이었으니까.
"자아, 빌린 돈에 이자 붙여서 1억 주셔야지. 초등학생 수준의 수학도 못 하면서 사업은 왜 하셨어요?"
강찬혁의 동료들은 회사의 서랍을 마구 털었다. 물론 불법추심의 범위에 걸릴 수 있는 짓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만큼 법의 철퇴가 가벼운 때도 없었으니까. 대한민국의 법은 강한 이들을 위해, 그리고 강한 이들이 잠깐 관심을 보인 이들을 위해 돌아갈 뿐 그들과 같은 벌레들의 사정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강찬혁은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건들거리면서 협박을 계속했다.
"불법 추심? 신고해봐. 그럼 나는 불법추심 혐의로 깜빵에서 3년 썩는거고... 아, 아저씨는 게이트 피해서 배타고 온 난민들 불법 채용해서 개처럼 부려먹었지. 그 조그마한 공장에서 벌써 10명이나 죽었다며? 잘 됐네. 그럼 아저씨는 근로기준법이랑 노동착취 가중처벌법,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에 UN 제2헌장에 ILO 협약 준수를 위한 특별법 등등 아주 별별 법으로 여태껏 벌어먹은 돈 전부 범죄수익 환수로 나라한테 토해내고, 못 낸 벌금은 아오지 탄광 끌려가서 탄 캐면서 갚다가 죽는 거야. 처신 잘해."
강찬혁은 자기가 알고 있는 법 이름들을 술술 나열하면서 사장을 협박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 동료가 메일함을 뒤지다 찾은 것을 인쇄해서 강찬혁에게 건넸다. 강찬혁은 그 메일을 술술 읽다가 껄껄 웃었다. 귀엽네, 시대가 언젠데 이런 방법을 쓰나. 이러니까 다음주 금요일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군. 강찬혁은 인쇄된 종이를 사장 앞에 내던졌다. 사장의 얼굴이 그것을 보고 파랗게 변했다.
"이야, 우리한테 갚을 빚은 없으면서 밀항 브로커한테 쥐여줄 돈은 있다?"
결국 사장은 강압에 못 이겨 돈을 전부 다 뱉어냈다. 결혼 패물부터 보석, 금고에 있는 돈까지 싹싹 털었고, 그동안 지체된 것에 대한 배상으로 에어컨 따위까지 전부 뺏겼다. 실적이 아주 좋다. 군소 대부업체 치곤 상환율이나 성장률이나 최고였다. 이게 다 강찬혁 덕분이었다. 웃는 얼굴의 사무원이 돈을 쥐여서 보내면, 험악한 인상의 강찬혁이 몇달 뒤 그 사무원이 빌려준 돈을 도로 뜯어간다. 실패할 수가 없는 사업 모델이었다. 이번에도 성과급 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더러우면 어떤가. 어차피 다 더러운 세상이다. 세상의 정치인들도 뇌물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나쁜 짓 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들을 면전에서 무시하던가? 뒤에서 욕한다고? 욕하라고 해라. 뒤에서 욕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강한 자의 특권이니까. 강찬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술학교로 진학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동식아. 내가 살게."
비싼 고깃집에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이런 곳에 있어도 되나, 자기 지갑까지 깨질까 걱정하며 연신 메뉴판의 가격대를 확인했다. 찬혁은 그 친구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학교의 먹물들 중에, 유일하게 친구로 삼을 만한 녀석이었다. 다른 이들이 강찬혁을 어떻게든 무시하지 못해 안달일 때, 그 하나만 강찬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두가 강찬혁을 손가락질할때 그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고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찢어진 지금도, 가끔씩 불러서 이것저것 챙겨주려 했다.
숯불의 밟은 빛이 붉은 쇠고기를 덧씌워가고, 두 사람의 눈에는 붉은 불빛이 비추었다. 강찬혁이 지나온 길, 넘어버린 선들, 수많은 후회를 생각하며 감상에 잠기려 할 때, 친구가 물었다.
"너 요즘 떼인빚 대신 갚는 그런 거 한다면서?"
"그래."
"이거도 그거 하면서 번 돈이고?"
"잘 아네."
친구는 침묵했다. 그래, 좋은 길은 아니지. 강찬혁도 알고는 있다. 동식이는 고기를 씹다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둘 수는 없는거지?"
"왜 그만둬야 하지?"
찬혁이 반문하자, 친구는 우물대다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래, 이래야 내 친구지. 그가 내뱉는 말들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하는 척하며 조언으로 마음을 살살 긁는게 아니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이건 네 길이 아냐. 너 착한 놈이잖아. 이 길로 가면... 진짜 괴물이 되는 거라고."
"돈 벌어야지. 안 그래?"
"그래도 이 방법은..."
"고기 탄다. 빨리 먹어."
"..."
말을 끊었지만, 강찬혁도 그가 하는 이야기는 솔직히 마음에 걸렸다. 오늘에야 강찬혁만큼이나, 어쩌면 강찬혁보다도 더 쓰레기인 녀석이 걸렸지만, 항상 쓰레기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갈데 없는 난민들을 쥐어짜서 공장을 돌리는 저런 개새끼가 빌린 빚도 뱉어내야 할 빚이지만, 딸의 심장병 수술비를 대기 위해 아버지가 마구잡이로 빌린 빚도 뱉어내야 할 빚이었다. 그리고...
"고기 고마워. 나중에 보자."
"...그래."
친구와 헤어지고, 다음 수금을 하러 들어갔다. 할망구가 사는 달동네, 그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서 몽둥이로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깥으로 나온 할머니는 강찬혁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자신은 채무자고, 강찬혁은 채권자 입장으로 왔으니 언제까지고 문을 걸어잠글 수도 없었다. 마지못해 문을 연 할머니는 약소하게나마 차를 대접했다.
"학생,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조금만..."
"할매요. 빌렸으면 갚는다. 아시잖아요."
"그게..."
상대방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강찬혁은 최대한 좋게 말했다. 불법추심을 신고할 수 없는 약점을 잡으려고 여러번 뒷조사를 했다. 명백한 범죄행위부터 불륜, 그리고 다른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빚까지. 하지만 약점과 동시에... 그들을 차마 몰아세울 수 없는 배경들까지 전부 드러났다. 괴물이 되겠노라 선언했지만, 이럴 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옛날이 생각났다. 집에 압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압류당했을 때. 부모님이 어렵게 구해온 싸구려 장난감 하나조차 가질 권리를 빼앗긴 그 때.
"...어쨌든, 다음 주까지 돈 안 가져오면 그때는 나도 못 봐줘요. 갑니다."
강찬혁은 바깥으로 나왔다.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왔다. 차라리 강도질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게 낫겠다. 동식이의 말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치킨 먹고 싶어.'
'꼭 사줄테니까, 오늘은 할미가 차려주는 밥 먹자. 응?'
"...아, 시발."
강찬혁은 담벼락을 발로 걷어차고 달동네를 떠났다. 동식이 말이 맞다. 이건 내 길이 아니다. 남을 도우며 살라고? 개소리다. 하지만... 부모님의 말을 무시하자고, 괴물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