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방과후 기도를 마무리 하고 학교를 나섰다. 딱히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느긋하게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느긋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앞으로 나아간다. 학교를 뒤로 하고 어느덧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하루는 푸르른 녹색빛이 가득한 공원에 도착한다.
" ... 날이 좋네 "
새하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중얼거린 하루는 마음에 드는지 입술을 가볍게 끌어올려 미소를 머금는다. 따스한 햇볕을 받아 새하얀 머리와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지만, 혹시나 탈지도 모른다는 걱정조차 하지 않는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한적한 공원의 길을 나아가던 하루는 공원의 광장에 도착한다. 광장 한 가운데에 힘차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를 눈에 담고선 여느때와 다름없이 지나가려던 그때, 고개를 돌리던 하루는 굉장히 인상적인 뿔을 가진 키가 큰 여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하루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해보였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도 운명이라는 것처럼.
공원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머무르고는 하는 장소, 인간관찰을 좋아하는 바다에게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한낮의 햇빛은 뜨겁고, 바다는 햇빛을 받을만한 신체 부위가 일반적인 사람들 보다는 컸기 때문에 시원한 장소를 찾게 되었다. 분수대의 근처. 그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고 눈 앞의 사람 처럼 독특한 사람을 볼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 ! "
자신이 보았던 순정만화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 주인공들은 정말 반짝반짝거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품게 되었다.
삑사리를 내면서도 자신의 가벼운 목례에 밝은 목소리로 화답하는 바다를 잠시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상냥한 눈웃음을 지어보인 하루는 걸어가던 방향을 틀어 바다에게로 다가간다. 자연스럽 자신과 마주보게 된다. 마주본 순간 하루는 분홍빛 입술을 열어보인다.
"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 같아요. "
학원섬을 넓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건낸 하루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려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우아하게 고정시키곤 마주한 눈을 빛낸다. 당신이 궁금해요, 라고 말하는 듯 빛이 나는 하루의 금빛 눈동자는 하루의 이질적인 눈동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
" 저는 성학교에 다니는 하루라고 해요. 이하루. 학교에서 뵌 적이 없는 것 같은 걸 보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중이신가요? "
키는 자신보다 컸지만 연령대는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상냥한 물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히는 것은 분명 혹시라도 눈 앞의 바다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경계심을 풀려는 노력일 것이다.
하루는 흥분한 듯 특별한 바다의 눈에 보이는 동공이 커진 것을 발견하곤 한손으로 입을 가린 체 후후 하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중얼거린다. 학교를 들으니 납득이 된다는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입술을 살며시 열어 바다의 이름을 자그맣게 몇번인가 되뇌이던 하루는 천천히 입을 가리던 손을 내리곤 바다를 바라본다.
" 연바다라는 이름.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네요. 근데 어떻게 그런 이름을 생각하셨을까 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다 양의 머리카락이 푸른 바다처럼 예쁘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을거에요. "
하루는 자신은 바다와 이름이 확실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하루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가서 좋은 말을 해주지 못 한 것을 후회할 바에 망설일 것이 없도록 제대로 말해주는게 좋으니까.
" 기왕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괜찮다면 제가 잠시라도 말벗이 되어드려도 괜찮을까요, 하루양? "
홍조를 띈 바다가 들뜬 목소리로 칭찬을 해주는 것을 들은 하루는 다시 입가를 가린 체 웃음소리를 흘린다. 어찌보면 투박하고 단순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던 칭찬이었다. 그런 것은 일절 신경을 쓰지 않은 체 올곧은 바다의 마음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하루였다.
" 저는 바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좀 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 다른 학교에는 아는 분이 없었는데.. 바다양이 처음이거든요. "
고마워요, 하고 고개를 격렬히 끄덕이는 바다의 손을 새하얗고 가녀린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 새하얀 하루의 볼 위에도 옅은 분홍빛 홍조가 어느샌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 그러면 그늘로 갈까요? 바다 양의 예쁜 피부가 상하면 곤란하니까요. 새로 사귄 친구의 피부가 상하는 것을 보고 있는 건 마음도 아프구요. "
두 손으로 바다의 손을 감싼 체 살며시 고개를 올려 눈을 마주한 하루가 조곤조곤 말을 하곤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별 의미 없는 관계이지만, 오타쿠로서의 연바다는 작은 것을 과대해석하거나,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는 했다. 지금은 < 순정만화 주인공의 첫 다른 학교 지인 > 이라는 감투에 순수하게 감동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지어, 그 부드러운 손으로 바다의 손을 감싸주지 않았던가. 이미 상상 속에서는 연애상담도 해주는 만화 조연이 된 체였다.
" 좋아요! 참 하루양..? 은 나이랑 학년이 어떻게 되나요? 저는 16에 1학년이에요! "
손을 잡은 체 잔뜩 고양된 기분으로 자신의 정보를 흘리고, 또 상대의 정보를 듣기를 원하는 모습.
손을 맞잡은 바다의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낀 하루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 좋지 않은 부분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고 얼굴을 살펴보지만 잔뜩 미소를 짓고 있는 바다의 표정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얼굴은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잠시 의아함을 품던 것을 날려버리곤 다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 어라라, 바다양은 신입생이였던 모양이네요? "
키는 자신보다 큰 데 한살 어린 바다를 보며 조금은 놀랐다는 듯 바라보며 말한다. 역시 외모로는 나이를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을 되새긴 하루는 이내 놀란 기색을 지우곤 조금 더 힘을 주어 손을 잡아주며 말을 이어간다.
" 전 올해 17살이에요. 성학교 2학년생이구요. 바다양보다는 조금 일찍 학원섬에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학원섬은 어때요? 지낼만 한가요? "
고양되어있는 바다를 진정시키듯 바다의 두손을 감싸쥐던 손 중에 한손을 풀어 부드럽게 바다의 손등을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음을 건낸다. 어린 나이에 이곳까지 왔다면 혹시나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런 부분을 신경써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들뜬 하루의 물음에 고민 한점 없이 선뜻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애초에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고아원에서도 한없이 듣던 호칭이었으니 어렵거나 꺼려지는 호칭도 아니었다. 오히려 귀에 익숙하다고 하면 익숙하겠지. 게다가 바다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허락을 해주게 되는 것은 귀여워서 그런 것이겠지. 순한 대형견을 보는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 바다 양은 학원섬을 잘 즐기고 있는 모양이네요. 후후, 괜히 적응하는데 어려워 하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필요도 없던 것 같네요. 다행이다. "
천천히 한손을 맞잡고 그늘에 놓여있는 벤치로 향하며 들뜬 바다와는 비교되는 차분한 목소라로 조곤조곤 말을 들려준다. 그렇게 걸어가면서도 바다의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것은 그렇게 들떠있으면 금방 지치니까 조금만 차분해지는게 좋겠지, 하는 하루의 배려였다.
" 방금도 바다양 나름대로 학원섬을 즐기고 있던건가요? 아까 전에 광장에 혼자 있었던 것 같은데. "
바다를 이끌어 벤치에 같이 앉으려 한다. 물론 심적거리나 몸의 거리는 이미 한없이 가까워진 것처럼 붙어있는 것은 왠지 자연스러웠다.
어찌 이리 상냥하고 성스러운지! 바다는 그런 하루의 태도에 대단히 감동하였지만 한 편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설마—, 저번에 보았던 그 철장 속의 소녀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이신 걸까? 그러면 내가 이렇게 가까워 져도 되는걸까? 현실과 픽션을 구분 못 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다.
" 으흠, 으헤헤, 감사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비각성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뿔 보면 되게 무서워 하셨거든요. 경찰이랑 가디언도 되게 많이 봤고... "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순록 코스프레라며 빨간 머리띠를 두른 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루가 진정시키려는 시도를 지속해서 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저 눈길이 맞잡은 손을 향해 내려갔을 뿐이지.
" 아, 아니에요. 저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관찰 하는것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이런 곳에 나와서 산책하는 사람을 구경하거나 그래요, 그리고 그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직접 사람이랑 대화하는게 더 좋고... "
그리고 눈동자가 마주치면 헉 하고 숨을 멈추었다. 눈 앞의 숙녀분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고 있지 못 한 것이 틀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