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떠올리려니 상당히 힘드오. 그 당시의 모든 사건들은 혼란스럽고 불분명하오. 기묘한 여러 감각들이 일시에 나를 사로잡았소. 그런 까닭에 나는 동시에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맡았소. 사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양한 감각 작용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소. 조금씩 더 강렬해지는 빛이 신경을 압박해서 눈을 감아야 했던 기억이 떠오르오. 그렇게 눈을 감자 어둠이 몰려왔고, 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소.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눈을 떴고, 그때 내게 빛이 쏟아졌던 거였소.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中
뭔가 잡다하게 말이 길어지는데 이 둘 엔딩 여러 개가 생각나더라구.. 클맆이 다시 또 우히힣 여행 떠난다•클맆이 정말 죽고 나서도 옆에 있어서 숲에 괴물 산다는 소문만 난다•둘이 행복하게 산당•벨맅이 약혼자에게 남은 감정을 완전 갈무리하고 먼 곳으로 이사or여행 등등 아무튼 떠난다•둘 다 모종의 이유로 죽는다(??)•한 명만 죽는다 등등 등 등 등,, ,, 벨리타주가 생각나는 거 있어? 이거 그냥 심심해서 하는 질문이니까 아 그냥 클맆주가 심심한갑다 해조.. ㅎㅎ 🥰
클리프주도 고생하셨습니다 💃✨ 약혼자 관련 건은 그렇게 알아둘게요! 둘 사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사건 🤔... 환경설정을 거의 고립에 가깝게 짜버려서 일상적인 사건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오히려 외부에서 일상을 좀 깨줘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드네요. 일단 벨리타에게 초대장이 오거나 릭먼 가에서 맘대로 고용인 하나를 보내는 상황은 평범하진 않아도 있을 법 하네요. 혹시 클리프가 여행 기간 동안 만난 사람 중이 찾아오는 상황도 가능한 선 안에 있을까요? 🥺 클리프가 저택 위치를 알려줬거나 알아낼 권력을 쥐고 있거나 집착적인 증세를 보일 정도로 집요해서 결국 알아냈거나 하는 이유로요. 많은 사람을 만났으면 그중 일부는 클리프가 보통 사람이랑은 다르게 느껴져서 흥미를 가졌거나 매력적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클맆이 밤에 잠 안 와서 돌아다니다가 벨리타의 어떤 행동을 봐서 약혼자 그 분!에 대한 관심이 어ㅓ엄청청엄청 늘어날 수도 있겠네.,, ,) 오 초대장은 무슨 초대장?! 고용인이랑 클리프가 여행 때 만난 사람 찾아오는 건 엄청 좋다 벨리타주가 나한테 아이디어를 막 주네.. 🥰🥰
밤에 할 만한 행동이라면 숨겨뒀던 약혼반지 꺼내서 한참 만지작대고 원래 끼고 있던 자리에 다시 끼워보는 일이겠네요. 청승 중의 청승 🥲... 초대장은 사교모임 초대장을 생각했어요. 이제 슬슬 나와서 사람구실 하라는 의미로 본가에서 막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걸루요! 아무래도 고용인은 제3자 입장에서 둘을 보게 될 것 같고, 클리프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클리프를 집중적으로 볼 테니까 흘러가는 상황 따라 원하는 거 골라 잡으면 될 것 같네요. 둘 다 써도 좋구요 💃✨
오예 쌈바~!~!~! 🕺🕺🕺💃💃💃✨✨✨ 솔직히 맘 같아선 다 하구 싶다 와 완전 최고의 서사! 청승 중의 청승이라니 짠내가 난다 짠내가... .. ,, . (아 그리구 >>38 못 봤을까 봐 툭 던지구 감..) 그래 일단 머 좀 더 일상을 두 세번은 더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구~!
어이구 진짜 못 봤네요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생각한 엔딩 저기 다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아직 초반이라 그런가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하나 더 있긴 한데 좀 괴랄하다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보시구 지뢰면 말씀해주세요. 숨겨놓을게요! 저는 벨리타가 사고든 뭐든 어떤 이유로 죽게 됐다가 클리프랑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생각해본 적 있어요. 자기가 제일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다시 살아가게 되는... 어떻게 보면 수미상관 엔딩이기도 하구요 🤔 맞아요 아직 일상 몇 번 더 굴려봐야 갈피가 잡힐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행은 열린 문~🎤🎶
우예~ 🎤🎙🎶🎵 사실 벨리타주가 말한 그 엔딩 ㅋㅋㅋㅋㅋㅋㅋㅋ 방금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이렇게 써주네 ㅋㅎㅋ 짱 신기하당.. 이것보다 더 괴랄하고 그런 거 완전 좋아하니깐 서슴없이 말해달라!! ✊✊✊ 🥰 다음 일상 선레는 벨리타주가 가져올래!? 아님 내가 가져와두 갠찮구🐮 (아니 근데 그 엔딩도 짠내가 만만치 않네 휴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이거 진짜ㅠㅠ 휴 하 후 동네 애들이 숲 속엔 두 마리 괴물이 살아요~ 이러면서 막 뛰어다닐 것 같고 ㅍ ㅠ 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헐 진짜요? 신기하다... 저는 으; 하면서 지워달라고 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ㅋㅋㅋㅋㅋ 선택지가 하나 늘었네요! 옆에 붙은 소 임티를 보니 이번 선레는 제가 써보고 싶어요. 다만 생각나는 상황이 없어서 🥲... 아니면 벨리타가 여행 얘기 해달라고 했으니까 듣는 상황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시간대랑 장소를 어떻게 설정할지 모르겠네요. 저 상황이 괜찮으시면 낮vs밤, 저택 내부vs정원(aka 쟈근숲)을 같이 정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소 임티를 보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 알겠어 소 임티를 많이 많이 써줄게!!.. 🐮🐮음🐮🐮머🐮🐮우르르 🐮🐮 흠 나는 밤이랑 쟈근숲? 이쁠 것 같아!! 🥰🥰✨ 상황은 같이 밥 먹는 거 소소하게 할 수도 있구 (이때는 저택 안) 클리프가 안 보여서 또는 벨리타가 안 보여서 찾으러 가는 것도 있구.. 나두 별로 생각은 없지만 상황 설정에 도움이 됐음 좋겠다.! ✊🐮🐮 아니그러니까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우리 눈물 무덤 판 거 아니냐구 ㅋㅋㅋㅋㅋ ㅠㅠ
말씀해주신 거 바탕으로 써올게요! 저도 밤이랑 숲이 끌려서 아마 이쪽 배경이 주가 될 것 같네요. 근데 제가 지금은 잠이 와서 선레는 아마 내일 올릴 것 같아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어째 풀어놓은 설정들이 해피보다는 ㅋㅋㅋㅋ큐ㅠㅠㅠㅠ 저 아무래도 염전 주인이 꿈이었던 모양입니다...... ☺️
낡은 나무바닥을 걸어가는 발소리와 유난히 낡은 자리가 삐걱대는 소리, 이따금 책장이나 신문을 넘기던 소리 사이로 새로운 소리가 끼어들었다.
“클리프.”
낯선 이름이 이렇게나 빨리 입에 익다니 이상한 일이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 누군가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데도 벨리타는 그를 무엇으로 명명하려 한 적 없다. 이름 같은 건 언제든 붙이면 그만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부르는 말 없이 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붙여진 이름이 누구에게 족쇄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는지도 모르지. 벨리타는 이제 제가 낭떠러지 앞에 서 있으며, 언제 그 아래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이게 고르고 판판한 길로 변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오히려 마음은 편안하다. 쓸데없는 희망에 불을 지르고, 절대 같은 게 자라나지 않도록 그 자리를 헤집은 뒤와 같다. 끝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거나 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 말곤 없다. 복도를 걷던 벨리타는 그제야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정리되지 않은 나무들은 햇볕을 받은 만큼 멋대로 가지를 뻗었다. 떨어진 이파리들은 그대로 말라 바람에 날리고, 무성하게 자란 풀은 듬성듬성 잘려 우스운 모양이다. 새파란 눈은 그 사이에서 단 하나만을 찾았다. 발견한 후에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계단을 내려간다. 빠르고 거침이 없는 움직임은 아래로 뚝 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클리프.”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에게 다가간 벨리타가 이름을 부른다. 숨이 찬 모양인지 호흡이 거칠었다.
“아무 데도 없어서 다시 가버린 줄 알았어.”
걱정보다는 강박적인 경향이 짙은 말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일부이고, 제 손으로 만들어 살려냈으니 애틋한 마음이 들 법도 한데. 벨리타는 클리프의 앞에 설 때마다 불안을 가장 크게 느꼈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 모르는 것도 불안의 요소가 됐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주먹을 쥐었다. 불필요하게 많은 힘이 들어간 주먹은 붉은 손톱자국만 만들어냈다. 딱 핏방울이 맺히기 직전이었다. 바깥에서 있었을 때도 ‘경계심으로 인해 과한 힘을 주는’ 나쁜 습관이 늘 따라다녔는데, 저릿저릿한 고통이 있는 만큼 합당한 결과를 물어와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 습관 덕에 불구 하나 없이 무사하게 벨리타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겠지. 물론 지금은 바깥이 아닌 집인 데다 인기척의 주인이 벨리타라는 것을 몇 초 만에 알았기에 합당한 결과 없이 욱신거리기만 했다. 둘만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상기시켜주는 통증이 억울하지는 않은 한편, 나쁜 습관은 그저 과거의 부산물이 되어 멀리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클리프가 조심스레 소망해 본다. 그것 또한 놈의 욕심일 뿐이란 걸 알 날이 언제쯤 올까. 욕심꾼은 이름이 불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듣고 있어요 벨리타. 불필요한 대답이었다. 숨을 토해내는 벨리타를 보며 구경하듯 눈알만을 굴렸고 거친 호흡을 귀로 들었다. 관조는 즐기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가 한마디를 내뱉자 관조는 망망히 깨졌지만
“전 여기 있어요. 여기. 바로 옆.”
얄따란 웃음기가 돌았다. 본인이 직접 이름까지 주었는데도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한마디는 벨리타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깔린 의문들이 더 동요하고 더 불어나는 촉매제가 되었다.
“벨리타와 약속한 여행이 아닌 이상 훌쩍 떠날 생각이 없는데. 이 몸뚱이를 밧줄로 묶어놔야 그런 걱정이 덜 들까요? 밧줄은 아픈데. 여튼 갑자기 뛰쳐나오는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 썩 좋지 못해요.”
클리프는 말을 마치고 한쪽 무릎을 땅에 붙여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하늘과 벨리타를 향하는 시선이 꽤 순종적으로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고, 속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확언하기에는 부족하다.
쉽게 익숙해졌던 낯선 이름과 달리, 그에게 불리는 제 이름은 낯설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묶어두다니. 그런 비인간적인 짓은 안 해."
벨리타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을 드러냈다. 비록 벨리타는 그에게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고, 내보내려 들지도 않았지만, 클리프의 말대로 밧줄로 묶어두는 일은 비인간적이라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그의 존재를 감추려 들었으며, 사라진 그를 수소문한 끝에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했지만말이다. 그뿐인가? 벨리타는 함께 하는 여행을 거절함과 동시에,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쓸모없는 희망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이게 줄로 묶어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순식간에 불안한 눈빛을 딴 벨리타가 고개를 가렸다.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선 입술에 닿는 살을 꽉 깨물었다. 자국이 남을 정도로 물었다 놓곤 손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주변을 훑은 눈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며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여행에서 '교양 없는 사람 비난하기' 같은 걸 배워서 내게 써먹고 싶은 거라면 더 해봐도 좋고."
벨리타가 맥없이 웃으며 말했다. 자조적인 기색이 뚜렷하다.
"내겐 시간이 필요해. 네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시간."
클리프는 벨리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가 더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벨리타에겐 단지 처음 생긴 약속에 그가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 지켜볼 시간이 필요했다. 편지에 적고 말한 게 잘 짜여진 거짓인지, 순수한 진심인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벨리타는 문득 시선을 들어 클리프의 두 눈을 바라본다. 고작 이따위 행동으로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비인간적. 비인간적. 지면과 가까웠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며 똑같은 말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반복했다. 뜻을 곱씹어 인간의 명확한 기준을 그어보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당치도 않은 짓이다.
자신의 잘잘못을 남에게 들어 뭐 하겠어요. 귀만 아프고 말지요. 딱히 힘이 실려있지 않은 말투가 그녀의 기색과 어울렸다면 어울렸다. 클리프가 진짜로 여행 중에 그런 것을 배웠는지 아닌지는 깜깜했지만, 끝끝내 배움의 유무에 관해서는 일절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제가 약속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확인하려면 상당히 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 긴 세월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시려고요?”
사람에게 시간은 절대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각이 바뀌고 모습이 바뀐다. 가히 모든 것이 조금씩 틀어지고 변화한다 해도 맞는 말일 수 있는데 긴긴 시간 속에서 약속만을 일관하다 죽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말한 확인 시간이 최대한 짧기를 바라본다. ‘평생 내 곁에 있어.’ 편지에 적혀있던 문장이 자꾸만 염원을 유린했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갑갑할 일인지, 속이 탔다. 하지만 주위에 물 따위는 없었고 보이는 것은 시퍼런 눈동자뿐이니 물과 가장 비슷한 색의 그것으로 속을 달래본다. 와중에도 그녀가 제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되뇐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시간은 낭비가 아닐지도,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클리프는 사람의 불안과 시간의 상성을 너무나도 잘 익히고 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을 말할 자신은 없었다. 지금도. 이전에도.
몇 발자국 움직여 벨리타와 가까이 있던 꽃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보니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받고 나서야 꽃의 이름을 대답할 생각인 것 같았다 톡. 잡고 있던 꽃잎 하나가 손길에 의해 끊어졌다. 일부러 상처를 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크게 자란 침엽수와 눈 사이로 작게 머리를 내미는 꽃들이 주류인 북부의 숲과는 대조적으로, 릭먼 가 북부의 별장 정원에는 이파리가 넓적하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남부의 식물들이 자랐다. 별장의 자랑이었던 정원이 만들어진 과정은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어 아직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먼저 겨울이 시작되면 남부에서 들여온 묘목을 기르기 시작한다. 여름엔 자란 걸 정원에 옮겨 심은 뒤, 겨울을 견뎌낸 나무만을 그대로 두고 죽은 것은 골라낸다. 동시에 살아남은 사이에서 열매 맺은 것은 다시 온실에서 어린나무로 기르고, 여름이 되면 정원에 심어 겨울을 보내도록 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일종의 품종개량이었던 셈이다. 시간이 흐른 정원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보단 조잡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게 관리되어온 것들은 인간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제멋대로 자라기 시작했고, 꽃들은 눈을 아프게 하기 위해 기이하게 선명한 색을 뽐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일어나는 클리프를 보며 벨리타는 숲의 나무를 떠올렸다.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뒤범벅된 이곳에서 유일하게 맞는 옷을 입은 존재는 그뿐인 것 같다.
"못 할 것도 없지."
줄곧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통째로 불안 위에 올려두는 가정을 한다. 무심하게 내뱉은 사람 치고 예민함의 그림자가 들러붙어 있는 눈빛은 어딘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전에 더 알고 싶지 않아지거나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이 말까지 하고 나서, 벨리타는 누구들의 말대로 제가 정말 미쳤거나 최소한 신경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행동과 말의 하나부터 열까지 일관성이 없다. 심지어 어떤 말은 사고의 속도보다 빨랐다.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널 속박 못 해. 내가 붙인 네 이름조차도."
행동이라고 다를 것 없다. 벨리타는 무의식중에 팔을 뻗었다. 방금 클리프의 손을 지나친 꽃이 손가락에 닿자 그걸 그대로 쥐었다. 꽃을 꺾는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뜯어내는 행위에 가까웠다. 손안에서 덜 여문 꽃잎 일부가 짓이겨졌다.
"꽃 이름, 기억해?"
# 클리프가 꽃 이름 얘기하는 상황인 경우 아무 꽃 이름이나 대주셔도 돼요. 식물... 잘 모릅니다... 품종개량 더욱 모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가상의 꽃도 괜찮습니다! 🌺✨
못 할 것도 없다는 말에 입 안쪽 살을 꽈악 깨물었다.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은 아니었다. 벨리타라면 응당 이렇게 나와야 했으니 만류 따위 하지 못했다. 긴 시간 속 잠잠히 있다가도 꿈틀대는 불안이 사람 속을 파먹는다 한들 그녀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만, 클리프는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벨리타의 모순을. 모순을 발견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녀를 부정하지는 못해도 필히 그녀의 모순은 부정했으리라.
클리프는 자신의 발치에 있던 해골화를 밟았다. 스스로 엉성하게 핀 해골화는 밟히는 순간까지도 엉성했지만 밟은 놈은 무얼 밟은 지도 몰랐다. 몸이 바스러진 해골화는 억울했다. 맘 같아서는 이 괴물을 죽도록 패고 싶었지만 망가진 팔다리로 무엇을 할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촉촉한 땅을 느끼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것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클리프는 또 원망을 샀다. 원망을 사든 말든 그녀가 말한 그 날이 조착하길 바라며 가무스름한 눈에 벨리타를 담기 바빴다.
자신의 발목으로 눈을 돌려 단단히 묶인 이름을 보았다. 동시에 저 밑에 밟힌 무언가가 보였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벨리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쓸 뿐이었다. 때때로 그녀가 자신보다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머리가 아팠는데, 그럴 때마다 당장이라도 어깨를 붙잡아 그곳에 멈춰있게 하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포인세티아.”
느릿하게 옮긴 시선이 향내가 진동하는 벨리타의 손에서 머무르다 이윽고 발간 꽃에서 멈췄다. 언젠가 그녀가 가르쳐주었던 꽃 중 하나였다. 분명 과거에는 많은 이름을 알고있었지만 조잡해진 환경과 긴 여행이 자꾸만 이름을 까먹게 했다. 절반 정도는 기억이 안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다시 배울 생각에 소량의 기쁨을 느꼈다.
“틀렸다면 다시 가르쳐주세요.”
클리프는 이곳저곳 장성하게 성장한 초목을 둘러보며 관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쨍한 꽃들을 보며 웃기도 했다.
레스에서 정원 비중이 높아지니까 계절감도 같이 중요해지네요 🤔 혹시 지금보다 약간 앞선 계절도 괜찮으실까요? 가을 초입 정도라 일찍 떨어지기 시작한 것들이랑 버티고 있는 것들이 공존하는 시기 어떠세요? 아무리 강한 애들만 남겨놨대도 겨울에는 침엽수 빼곤 이파리랑 꽃들이 다 질 것 같아요. 실제 시간이랑 달라서 약간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괜찮으시다면 일단 저렇게 설정해두고 몇 차례 일상을 거치면서 계절 맞추고 싶어요!
덜 여문 잎이라 생각했던 건 이미 만개했던 시절을 지나 수그러지는 중이었다. 문득 뺨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계절이 바뀌었다. 여름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로, 이미 서늘한 바람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벨리타가 꺾은 건 냉기와 바람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던 한 송이였던 셈이다.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까? 하지만 그대로 두었어도 며칠이면 자연스레 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제 손의 꽃을 응시하던 벨리타가 클리프가 말하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가 기울어지며 눈이 감긴다.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소리없는 웃음이 샜다. 야트막한 행복에 잠긴 얼굴이다. 그 여운이 짙은 듯 흘러나온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디플라데니아.”
손을 살짝 기울이자 꽃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애초부터 버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으니 아쉬운 기색은 없다. 비어버린 손에 이파리를 쥔 벨리타는 클리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지만, 디플라데니아 잎은 둥글고 윤이 나.”
남은 손으로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차근차근 설명한 벨리타가 손에 쥔 걸 건넸다. 그가 잡지 않았다면 이파리 역시 꽃과 같이 떨어질 테고, 벨리타의 손은 무엇도 탐낸 적 없던 것처럼 굴 것이다.
“정원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할까?”
벨리타는 클리프를 따라 정원을 돌아보는 대신, 그가 보며 웃는 꽃에 눈길을 두었다. 과거의 어드메를 헤매다 돌아온 얼굴에서 물기가 마르듯 표정이 사라져갔다.
“네가 바란다면 내일이라도 편지를 써 정원사를 부를게. 사람이 오면 지금보단 나아질 거야.”
산산함은 사늘함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꽃과 나무에 사정이 있을지언정 생명력은 약해지고 생의 종착역은 가까워져만 가니 그들은 미처 다 나누지 못한 그들만의 사랑, 우정, 은애를 아쉬워하다 미련 한 톨 없이 떨어질 것이다. 낙화할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사람이기에 그들과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나 꽃잎을 보며 온 마음으로 슬퍼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여름의 암애를 그리워하며 스쳐 지나가는 게 다수일 거다. 언젠가는 계절이 바뀌겠지, 라는 생각으로.
클리프는 가을이 시작됨을 느끼자 이 정원도 곧 메마르겠거니 했다. 특히 지금 벨리타와 정원에 있으면서 추운 계절의 위협을 조금이나마 실감했다. 이렇게 우렁차고 쨍한 꽃, 나무, 풀들이 어디로 사라질까 믿기지 않지만, 이전에도 몇 번 경험했듯이 눈이 내리는 건 금방이었다. 하얗게 변한 정원을 바라보며 봄이 올 거라고 말하는 건 인간다운 면모일까?
생각은 또 인간다움에서 멈췄다. 인간다움은 잘만 흘러가던 생각을 곧잘 방해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 방해요소는 인간다움 뿐만 아니라 그녀도 있었다. 벨리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샐 때 클리프도 웃었다. 항상 웃는 놈이 헤벌쭉하든 통곡하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번만은 미묘하게 다른 웃음이었다. 여느 웃음과 같은 웃음이라면 생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걸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클리프는 디플라데니아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이파리를 건네받았다. 건네받는 순간에 꽃을 떨어트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디플라데니아를 말하고 웃는 모습이 그냥저냥 인상 깊었던 것 같다.
흐려지는 말끝으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윽고 나온 말에 짧은 탄식을 뱉었다. 스스로 존재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생명이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러나 배워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리는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벨리타는 어떠한 감흥도 일지 않은 사람처럼 밋밋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대답이라고 다를 건 없다.
"숨겨야지."
사실 벨리타는 누굴 가련하게 여기는 감정 따위에 취해있을 여유가 없었다. 무기질 같은 껍데기 아래로 생각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사람은 단 한 명만. 직접 사람을 구하는 방법도 고민했으나 수도에 편지를 보내 사람을 구해 달라 부탁하는 편이 낫겠다 결론지었다. 별장에 홀로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직 잠잠하다는 건 언제든 사람을 보내 들쑤셔도 이상하지 않다는 반증이 되기도 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이유를 대며 억지로라도 끌어내려 구는 꼴이 훤했다. 제가 쓴 편지를 받아본다면 적어도 사람 구실은 하고 있다는 확인은 될 테니, 귀찮은 일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떠들 입이 늘어나는 건 곤란하다. 제 불행한 사건을 모르거나 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애초에 아주 무심한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설사 있다고 해도 타인의 비극만큼 씹기 좋은 거리도 없지. 앞서 제시한 조건이 불가능하다면 타지에서 온 사람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문을 거쳐 온 사람이라면 그쪽에 무언가 말할 여지가 있으니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좋을 수도 있고.
"가끔은 보이는 곳에 숨기는 게 괜찮은 방법일 때도 있어. 생각은 좀 해야 하지만."
여전히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의 행세를 해야 한다. 무심고 짚은 자리가 모조리 상처인 양 굴어야지. 섣불리 무언가 묻고 알아내지 못하게. 낮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나뭇잎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벨리타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행하는 동안 누구에게 네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한 적 없지? …있대도 믿은 사람 없겠지. 믿었다면 미친 사람일 테고."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찌푸린다. 세상에 없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일이라면 신경 쓸 거리도 못 되었다. 이미 차고 넘치는 문제를 부러 만들어서까지 늘릴 필요 없었다.
숨겨야 한다. 어떤 게 괜찮은 방법이다. 클리프는 벨리타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제 존재에 대하여 여러 번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 때때로 나 자신은 괴물, 사람, 클리프, 등등 여러가지로 해석이 됐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짐짝이 된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서는 안 될 고깃덩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 ‘넌 고깃덩이야.’라고 한다면 십 중에 팔은 치를 떨겠지만 클리프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 거다. 지금처럼.
‘누가 널 만들었냐!’라는 질문도 미친 사람이 아니면 하지 않았고 미친 사람 중에서도 현저히 드물어 만들어졌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또 누가 먼저 질문을 해오지 않는 이상 대화의 물꼬를 먼저 트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로운 대화의 기록은 거의 여행에서 남지 않았다.
“네.”
상대방의 얼굴이 찌푸려질 때 생겨나는 모든 변화를 바라보다 인간인 척 굴라는 말에 즉각 대답했다. 대답한 뒤에는 이상하게, 심술이 났다. 어떤 짓을 해도 자신을 평생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의 입에서 인간인 척 굴라는 당부가 기어 나오니 미묘했다. 놈의 심술은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이제 클리프에게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는 정원사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인 척 굴다가 정원사한테 제가 남모르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실래요? 책에 보면 괴물은 막 사람 잡아먹고 그러잖아.”
재밌게 굴리고 있어서 넘 좋고 감사하다 생각했는데, 재밌게 봐주시는 분이 계셨나요?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표정을 못 찾았어요 ㅋㅋ큐ㅠㅠㅠㅠ) 그리고 답레를 자고 일어난 다음에 올릴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러 왔어요! 오늘이 일요일이면 마저 써서 올리는 건데 월요일이라 🥲... 클리프주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봐요!
속으로 편지의 인사말까지는 적은 것 같다. 클리프가 고분고분하게 굴어준 덕분이었다. 이젠 제가 겪고 있는 슬픔을 지어내 써야 하는 차례였다. 고약한 장난 같은 말이 아니었다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에 대한 내용까지는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클리프, 달래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하고 있잖아.”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니! 벨리타가 짧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택에 들일 계획이 있는 건 딱 한 사람뿐이다. 만일 클리프의 말대로 그로 하여 정원하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미쳤다는 소문에 어떤 말이 더해질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또 다른 사람을 구하기는 더 어려워질 테고, 수도에서는 당장 마차를 보내 저를 짐짝처럼 실어 갈지도 모른다.
“난 널 '사람 먹는' 괴물로 만들진 않았어. …혹시 나 모르는 사이 식성이 바뀌었니? 그건 정말 난감한데.”
밸리타는 클리프가 정말로 허기를 지우기 위해 사람을 해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농담을 할 줄 안다면 그쪽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편지의 몇몇 문장에서 느꼈던 협박조가 느껴졌다는 점에서 벨리타에게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일 테고. …클리프, 벨리타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 거야?”
그렇게 하고 싶어? 덧붙여 물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들린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달래는 목소리에 속이 따끔따끔했다. 심술은 사그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원인도 까먹은 채 거세져만 갔다. 그녀가 한숨을 뱉자 클리프는 눈썹은 움찔거렸다. 이 기분이 나으려면 정원사 발이라도 한 번 걸어 넘어뜨려야 분이 풀리겠다고 생각했다. 왜? 왜 애꿎은 사람 발을 넘어뜨려? 이런 질문은 눈꼽 만큼도 생각나지 않았다. 원인을 까먹었기 때문에.
본디 생선 뼈 발라 먹기도 싫어하는 놈이다. 뼈 많아보이는 인간 먹을 생각 추호도 없고 인간을 먹는다고 인간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니 일말의 관심도 없다. 식성 또한 바뀌지 않았으니 작은 소리로 꿍얼거렸다. 아니요...... 정말이지 답답하고도 빡빡한 꿍얼거림이었다.
벨리타가 제 이름을 부를 땐 주춤거리다가 몸이 가까워지니 걸음을 뒤로 뺐다. 원래 같으면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영 그런 상태가 아닌가 보다. 사실 클리프는 마음 같아선 정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다.
“정원사한테 절 뭐라고 얘기하실 건지 들어보고, 생각 좀 해볼게요.”
그녀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클리프는 시선을 모로 돌렸다. 머릿속에는 인간이 만약 연체동물이었다면? 같은 잡념이 그득하다.
예상대로 식성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골이 지끈거리는 건 여전했다. 내용과는 별개로 들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클리프가 물러섰을 때는 정말이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벨리타는 클리프가 멀어진 만큼 따라붙었다.
“잘 들어, 클리프. 우린 지금 거래를 하는 게 아니야.”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한 벨리타가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쉽다고 여긴 적 없지만, 점점 다루기 까다로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았으면 전처럼 굴어봤자 소용이 없지. 벨리타는 상황을 악화시켜 또 다시 그가 말없이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찾아냈으나 다음번에는 장담할 수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클리프 본인이 알고 있는지 모르나 그는 계속 무언가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꽤 빠르게. 벨리타가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평화가 좋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좋다고. 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무작정 들이닥쳐 ‘우리’를 들쑤시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벨리타의 얼굴이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질질 끌려가 방에 처박히는 상상으로 쉽게 침울해졌다. 클리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를 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연상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 뿐 이상할 정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내가 널 어떻게 설명하든 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야.”
어쨌든, 제 침울한 상상이 실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벨리타는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이제 더 무슨 일을 마다하겠는가?
정원의 향이 폐를 가득 메웠다. 가라앉지 않을 것 같던 심술은 들숨 날숨 수백 번에 사그라들었다. 아직 조금 남아있던 것 같은 심술의 잔재도 거래하는 게 아니라는 말에 휭 날아갔다.
벨리타의 말에 절반 정도는 동의했다. 물론 이해에 기반을 둔 동의이다. 그녀의 말대로 외부인이 우리를 들쑤시는 건 클리프 본인도 유쾌하지 않았다. 오롯이 둘만 존재해야 만사의 해답과 배움을 찾기 쉽기도 했고, 사유지에 손때를 묻히는 건 돼먹지 못한 개나 하는 짓이기 때문에. 하지만 평화가 좋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클리프로썬 이해가 어려웠다. 뭐 지금과 똑같은 흐름으로 사는 게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체된 삶이 그녀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요.”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당부받은 인간인 척 굴기였고,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발 걸어 넘어뜨리기였다. 왜 두 번째로 이런 게 떠오르는지 까먹었지만, 꼭 해야겠다는 간절함만이 손에 남은 괴물은 저택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