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의 섹터 09 이동도시, 그 한복판에 위치한 사무소. 인력대행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그 실상은 온갖 용병들로 들어찬 사설경비업체이다. 이 업체가 특이한 것은 시류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이익이 된다고 독자적으로 판단한 가치를 따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르고 에이전시는 당신이 누구던, 어디서 뭘했던간에 방주 밖에 남겨진 모두를 받아들인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의무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볕의 색채만 보더라도 바깥 하늘을 어떤 물감으로 표현해야할지 상상이 될 정도야. 이런 날씨면 바깥에 나가 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나는 아니지만 말이야. 머리를 쓰다듬는 햇볕에 노곤해지기 보다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던가, 하얀 종이를 그림으로 채우던가 하는 게 더 좋은 사람도 있어. 나처럼.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방이란 건 아냐. 앞에서 말했듯, 나는 지금 의무실에 있어. 다친 건 아니야. 다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는 애매한 실력을 가지고 있긴 해도 메딕이니까,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의무실에서 보내고 있거든. ..사실 의술보다는 그림이 좋아. 하지만 해야할 일이 있는 한 노력하지 않을 순 없잖아. 나는 쓸모 있고 싶단 말야.
의술서적을 보고 있던 중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어. 문이 열리는 소리도 났고. 문가에는 나무가 떠오르는 색채에 사람이 있었어. 황금색 꽃이 뿌리부근에 피어있는, 자그마한 키의 나무. 잠시 그녀를 관찰하느라 조금 늦게 나는 대답했어.
"어디를 다쳤나요."
내가 들어도 딱딱한 목소리야. 정이 안가. 색으로 따지면 차가운 파랑일까. 이름부터 딱딱한 스틸 블루 같은. 서늘한.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책상 위에 내려놨어. 대답하기 전에 아까 관찰하며 봐둔 상처부위를 생각하며 약을 챙겼어. 소독제랑 연고랑, 거즈.상처 부위를 닦을 필요도 있겠네. 나는 가까운 의자로 손짓했어.
"앉으세요. 치료할게요."
목소리가 건조해. 조금 더 정감있게 말하는 것도 좋겠다 싶지만, 됐어. 딱히, 친해지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띈 체 물어오는 에덴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오니는 자게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뜸을 들이는 것이 시간이 좀 걸려서 몸을 일으킨 에덴의 등에 대고 답하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목소리는 그리 작지만은 않아서 제대로 전해졌을 것이었다.
" 짖궂어, 에덴. 그치만.. 아니라곤 못 해. "
솔직히 에덴의 부축을 받기 전의 오니였다면 에덴의 말대로 됐을 가능성이 꽤나 높았으니까. 부정을 하지 않은 체 눈동자만 살짝 굴려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짧게 답할 뿐이었다. 그치만 그건 그거고, 자꾸만 놀리는게 분하긴 한 모양인지 가슴팍을 두드리자 웃음을 터트리는 에덴을 몇번 더 두드려주는 오니였다. 물론 힘을 주지 않은 것은 여전했지만.
" 어차피, 그만두라고 해도... 안 그만할 거 잖아. "
그리고, 괜찮아. 나는. 오니는 고개를 기울인 체 자신을 응시하는 가넷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작게 중얼거린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선배를 엄청나게 걱정하는 후배였는데. 어느샌가 이렇게 장난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오니는 자신이 너무 무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어두운 것보단 밝은 것이 좋으니까.
" 에덴이 편하고, 좋다면. 그거면 돼. 응. "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손을 그대로 다시금 에덴의 머리 위에 얹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하며 다시금 비슷한 색을 띤 에덴의 눈과 마주하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에덴이 좋으면, 무엇을 하든 받아줄 수 있다. 매번 잔소리를 듣고도 어기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오니는 잘 알고 있었다.
" 근데, 에덴, 다른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놀러다니는게 좋지 않아? "
여기 있는 것보다. 말수도 적고, 어설픈 자신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다른 곳에 놀러가는 것이 에덴에게 더 즐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니는 째깍거리며 시간이 흘러가는 전자레인지의 소리를 배경으로 물음을 던진다.
어쩌지, 어쩌지?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적잖이 당황했는지 혀를 샐쭉 내민 도나는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의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늘상 있던 의무관 선생님은 자리에 없고, 그 대신...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엔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낯선 사람이. 이건 메딕이 아니라 주술사가 분명해! 그쪽에서 어디를 다쳤냐는 물음이 들려오자, 흡. 하고 도나의 혀가 입안으로 쏙 들어간다.
"무, 무릎이요."
차가운 목소리에 사무적인 말투.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나는 악당에게 붙잡힌 인질처럼 순순히 그의 말대로 의자에 가 앉는다. 악당이라는 건 단지 그녀의 과도한 상황 몰입일 뿐이지만.
"네에..."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다리는 움찔움찔. 조심스럽게 코트를 들춰 무릎의 상처를 보인다. 눈에 띌 정도로 긁히긴 했지만 피는 이미 멎었고, 잠깐 새에 피가 가맣게 굳어 딱쟁이까지 앉으려고 했다.
"요 앞에서, 넘어져서..."
긴장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는지 도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정신 차리라고 제 엉덩이를 꼬집어주고 싶지만 꼬리에는 손가락이 없는걸 어떡해.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린다.
>>924 휴우 다행이다. 무섭게 물어보셔서.....!! 원작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참고했긴 한데 감염 여부 문구랑 사람 몸에 꼬리가 있다는 것 정도만 참고했어요.(피티아가 걔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다 짜고 나중에 보니 단발이라던가 몇가지 설정이 겹쳐보이긴 했는데 보고 짜진 않았서요!
짧고 굵은 감탄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겠지만 그 복잡한 표현에 대해 딱히 무어라 되묻지는 않았다. 최소한 그쪽에 흥미는 안가지길 바란다만, 사람일이란게 어쩔 수 없으니 그녀는 살짝 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오리지늄 파편으로 공기놀이를 하다가 질리면 알까기도 해보고 싶은건 아니겠지. 그건 이미 정상이 아니라 위기감이라는 것에 취한 중독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부디 그가 그런쪽은 아니길 바라며...
"...어머나, 어쩐지 입안에 바람이 좀 들어찬다 했더니~ 후후후... 미안~ 이거야말로 확실히 결례를 범했네?"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더니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게 보였다.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지만, 그녀도 스스로의 표정을 거울에서 본적이 있기에 뒤늦게나마 입을 가리며 웃을 뿐이다.
"걱정 마. 이래뵈도 문제없으니까, 확실히 멀쩡한 사람도 이성을 잃게 만드는게 오리지늄이긴 하지만... 이건 그저 내 개인적인 특성일 뿐이니까, 종족차이란 말인 거지."
그가 이미 질색하는듯 행동을 보이는데도 그녀는 보란듯이 자신의 입꼬리 끝에 검지를 걸어 쭉 벌렸다가 얼굴에서 손을 떼며 키득거렸다.
그녀는 겁먹은 것처럼 보이네. 내 탓이겠지. 붙임성 없는 울적한 꼬맹이를 좋아해줄 사람은 그리 없거든. 미드나잇 블루 같은 어두운 녀석이야 나는. 그래도 내 말을 들어줘서 다행이야. 무시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어. 준비해둔 약을 들고 앉은 그녀의 앞에 쪼그렸어. 코트가 들춰지며 보인 무릎의 상처는 피가 멈춰가고 있었어. 크게 다친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야. 나는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정이 많지도 않고, 부정적인데다, 소심하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성질이 있지만, 남이 다치는 걸 좋아하진 않거든. 다친 사람이 적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착하기 보다는 당연한 거야.
상처를 닦아내려 하기 전에 흘깃 올려다 본 그녀는 이래저래 불편해 보였어. 남의 표정을 보고 어떤 기분인지 아는 건 나로써는 못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그냥 나오는 대로 말했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거든. 좋은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해. 나는.
...아마도.
"따가울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뻣뻣해. 죽어가는 고목이 더 유연할 거 같을 정도로 빳빳해.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상처 부위를 닦고, 소독하고, 거즈를 붙였어. 그리고 바로 일어서지 않고 잠시, 생각했어. 내 안의 좋은 사람의 대표라 친다면 네로 선생님일 거야. 좋은 의사의 표본 같지. 어색하고, 어려워서 멀찍이 떨어지려 해도 다가오는 사람이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듯 해. 확신은 못해. 아마의 아마의 아마야.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좀 더 친근하게 굴기 위해 노력했겠지. 그래도 조금 좋은 사람인 척을 해보고 싶어. 윤기가 없이 건조하여 더욱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어.
선배를 엄청나게 걱정하는 후배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아가 어딘가 다쳐올 때마다 잔소리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염려가 가득 담긴 눈빛은 한 치도 줄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반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이렇게 끼를 부려대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리아의 말에는 에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아가 손을 뻗어 에덴을 쓰다듬자, 에덴은 늘 하던 것처럼 당신의 머리에 손을 기댄다. 에덴의 머리에 처음으로 손을 얹었을 때 흠칫 놀라더니 망부석처럼 굳어서는 리아의 쓰다듬이 끝날 때까지 차렷 자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와 1년 남짓한 세월을 보내면서 꽤 많이 풀어진 게 느껴진다. 아니, 이게 원래 그녀다운 모습이 아닐까. 그러다 리아가 꺼낸 의외의 질문에 에덴은 눈을 깜빡였다.
"별 말을 다 하네. 나 여기저기 많이 놀러다닌다구요."
그리고 에덴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리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포갰다.
"그렇지만 언니에게 놀러오는 것을 좋아할 뿐이에요. 언니처럼."
그러다 전자레인지가 작동을 끝내는 삑삑삑 소리가 울리자, 에덴은 "아, 다 됐네요..." 하고는 리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곤 전자레인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