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의 섹터 09 이동도시, 그 한복판에 위치한 사무소. 인력대행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그 실상은 온갖 용병들로 들어찬 사설경비업체이다. 이 업체가 특이한 것은 시류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이익이 된다고 독자적으로 판단한 가치를 따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르고 에이전시는 당신이 누구던, 어디서 뭘했던간에 방주 밖에 남겨진 모두를 받아들인다.」
식인마귀라 불리는 살카즈라고 해도, 이럴 때는 어째 반려견이나 반려묘라도 하나 키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눈을 감고 리아의 손길을 만끽하던 에덴은, 리아가 손을 떼자 입을 가리고 조그맣게 하품을 하더니 팔을 쭈욱 펴서 기지개를 늘어지게 하고는 기묘한 자세로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깍지를 끼고 팔을 든 채로 상반신을 이리저리 뒤틀자 두둑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야 에덴은
"별 문제도 별 일도 없었어요."
하고 리아의 말에 웃으며 대답해주는 것이다. 그러다 또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아니, 지금 자버리면-" 하고 뭐라 말을 하려던 에덴의 눈길이 리아의 팔에 묶인 붕대에 닿았다. 에덴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리아에게로 시선을 맞춰온다. 피냄새는 어찌 씻어냈지만 이건 감추지 못한 모양이다.
"또 다쳐서 왔네. ...아프지 않아요?"
이미 입어버린 상처에 대해 에덴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에덴이 잔소리를 하는 것은 리아와 함께 전장 한복판에 있을 때-다시 말해 리아에게 잔소리를 해도 제일 소용없을 때-뿐이었다. 이미 입어버린 상처에는 안쓰러운 눈길을 보낼 뿐이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하고 리아의 상처입은 팔 쪽의 손목을 공연히 쥐어보던 에덴은, 이내 "튀김, 데워올까요? 냉장고에 맥주도 몇 캔 사뒀는데. 목이라도 좀 축여요." 하고 화제를 돌렸다.
살아가면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언가를 잃는것도, 부수는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세상에서 닳을 대로 닳아버린 눈동자가 새하얀 구름처럼 푸근한 연기가 가득한 방 안을 비췄다.
언제부터 잠들었던 것일까,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그는 불편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연기가 거쳐가는 방 안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침이 가르키고있는 어느 시간. 아르고 에이전시로 돌아온지 고작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3시간을 수면으로 낭비해버렸다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연기로 가득해져버린 방을 나서며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있던 적막을 깨트린것은 2층의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나즈막한 노랫소리였다. 고요하게 떠올라 시간마저 먹혀버린 듯 조용하고 반짝이는 목소리. 휴게실로 향한 라샤의 눈에 들어온것은 노래를 부르고있는 여성이었다.
녹색의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분명 1년 전 부터 에이전시에 몸을 담게된 리타라는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못한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이 고요함을 깨트리고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는 말 없이 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한 편으로는 처음부터 지켜보고있었다, 라는 모습에 어떤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해한 걸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채 노래를 부르고있는 그녀를 놀리고 싶었던 걸지도.
"......"
//역시 시작이 힘들단 말이지 시작이..ㅇ...너무 늦어버렸다ㅡ.. 하지만 첫 단추는 꿰었으니 이 다음부턴 빠르게 답레를!!
다음에 가보겠다는 태만한 대답만으로 충분했던 것인지, 에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붙임성없지만 정겨운 선배님을 직접 병원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도를 넘은 간섭도 실례니 이 정도의 권유만으로 참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광석병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시대고... 특히나 PMC 오퍼레이터처럼 광석병에 노출될 위험이 높은 직업군이라고 한다면 조심하는 것만으론 광석병을 피할 수 없으니, 사샤의 저런 스스로의 건강에 무관심한 태도가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만 해도 결국 자신의 왼팔이 자신을 잡아먹어 버릴 것이라는 운명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이에요. 근처에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두고 있어요. 여기 기숙사는 방이 다 찼기도 하고... 제가 원하는 조리기구를 놓는 데 한계가 있기도 하구요."
하고 엑스칼리버는 후후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 무시무시한 살카즈 용병은 엑스칼리버라는 거창한 호출명에 걸맞지 않은 꽤나 깜찍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긴 말은 하지 않는다. 에덴이 아무일도, 별일도 없었다면 오니는 그저 믿을 뿐이었으니까. 추궁하지도, 되묻지도 않는다. 이건 누군가에게 파고드는 것을 망설이는 것인지, 아니면 신뢰하는 것인지 오묘했지만. 아무튼 오니는 그러지 않는다. 그저 에덴의 말을 올곧게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 ... 조금, 근데 그리 심하진 않아. 오늘, 큰 일은 아니었어. "
에덴의 안쓰러운 듯한 눈빛과 상처를 알아차린 말에 혹여 잔소리를 들을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던 오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에덴을 보며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 에덴의 잔소리는 꽤나 무시무시하니까 각오를 했었는데 별로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마냥 기뻐하는 오니였다.
" 에덴도 같이, 먹자. 자고 가도, 괜찮으니까. "
자신의 손목을 잡은 에덴과 다시 눈을 마주한 오니는 화재를 바꾼 에덴의 말에 조심스럽게 말을 던진다. 혼자 먹는 것은 그다지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에덴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에덴에게는 뭐라도 챙겨줘야 할 것 같은 것이 멘토로서의 마음이었다.
" 음, 그러니까... "
문득 심심할 때 읽었던 잡지가 떠오른 오니는 잠시 입을 열더니 뜸을 들인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 말하면 상대바이 좋아할 대사 같은 랭킹에서 읽었던 것인데 그것을 현실로 옮기려니 조금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먹은 듯 에덴에게 잡힌 손이 아닌 반대손을 들어 살며시 주먹을 쥔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린다.
" 에덴이랑, 먹고 싶은데. 괜찮지? "
물론 여기엔 매력적인 표정이 함께 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오니의 표정은 무덤덤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저 손동작만 따라한 체 말한 오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리타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마치 퍽퍽한 세상에서 혼자 분리된 듯 말이다. 일말의 여유를 느끼며 노랫말을 흥얼이던 그녀가, 별안간 가사의 끄트머리를 천천히 늘이며 노래를 끊어버린다. 다음 가사가 뭐더라...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참 자주 흥얼였고, 참 자주 듣던 노래였는데. 가사가 기억나질 않는 것이다. 그녀가 아쉬운 듯 느릿히 눈을 뜨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주 잠시나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그 끝맛이 너무도 아쉬운 것이다.
" ...어? 누구세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씁쓸한 향수에 젖을 시간은 그리 오래되질 못했다. 애초에 이곳은 그녀의 직장 휴게실이다. 그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그 누구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에서 대담히 노래를 부르다니. 리타가 눈 앞에 보이는 낯선 이를 향해 당황한듯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이'는 아니고, 저보다 연차가 꽤나 많은 선배였다. 부끄러움, 창피함, 죄송함…. 그 모든 감정들이 한 순간에 그녀를 현실로 집어끈다. 이곳은 과거의 라테라노가 아닌, 현재의 아르고라는 것을 말이다.
" 죄송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게... "
여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끝이 그녀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한 손으로는 커피잔을 든 채로, 그녀는 제 눈가를 어루어만지며 열감이 오른 얼굴를 차분히 식혔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갈까. 차마 눈 앞의 남자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채 함부로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는 꼴을 보아하니 제법 난처해진 모양이다.
" 그, 방해해서 죄송... 합니다, 정말... "
여자가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황하는 눈길이 남자의 발끝을 바라보다, 힐금 남자의 눈을 바라보다, 다시 발끝을 향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