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의 섹터 09 이동도시, 그 한복판에 위치한 사무소. 인력대행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그 실상은 온갖 용병들로 들어찬 사설경비업체이다. 이 업체가 특이한 것은 시류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이익이 된다고 독자적으로 판단한 가치를 따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르고 에이전시는 당신이 누구던, 어디서 뭘했던간에 방주 밖에 남겨진 모두를 받아들인다.」
문을 열어보면, 그 곳에는 조금 의외의 풍경이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의 단발머리 소녀가 잠들어있는 모습. 쿠션을 끌어안은 채로 앞으로 고꾸라진 건지 절을 하는 건지 고양이가 식빵 굽는 것 같은 자세로. 하얀 머리카락은 관자놀이에서 돋아난 검붉은 뿔 위로 흐트러져 있고, 그 아래의 속눈썹 긴 눈은 곱게 꾹 감긴 채로, 기묘한 자세로 잠들어있는 것 빼고는 별다른 잠꼬대도 하지 않고 그녀는 곱게 잠들어 있었다.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는 술안주로 가져왔음직한 닭꼬치와 튀김이 들어있는 스티로폼 접시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이미 비어 있는 맥주 캔이 하나 있었다. 십중팔구 냉장고를 열어보면 다른 맥주캔이며 술병이 들어있을 모양이다.
에덴 마이어. 작년 이맘때쯤 입사한 루키로, 리아에게 멘티로 붙여진 오퍼레이터였다. 함께 전장을 몇 차례인가 굴러다니며 몇 달을 보내자 그녀는 제법 혼자서도 1인분을 할 수 있는 오퍼레이터로 자라났지만, 멘토와 멘티 생활을 하면서 다져진 유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녀는 종종 이렇게 리아의 집을 찾아오곤 했다.
리아가 들어오는 소리가 에덴의 귀에 들렸는지, 에덴은 앞으로 고꾸라진 채로 눈을 움찔했다. 숱 많은 속눈썹이 찬찬히 열리나 싶더니, 석류석을 보는 것 같은 새빨간 눈동자가 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인사 대신 에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샤워하니까 살 것 같다. 오니가 샤워장을 나서면서 느끼는 단촐한 감상이었다. 언제나 임무에 나설 때면 날뛰고 마는 오니였기에, 치료를 받고 피냄새를 최소화 하는 것은 빼먹어서는 안될 작업이었다. 따스한 물에 먼지와 말라붙은 피를 씻어내고 나면 한결 쉬기 좋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배운 몇 안되는 좋은 것으로 어지간하면 샤워를 미루는 법이 없었다.
" ... 배고파 "
오늘은 다행히 팔부분만 다쳤기에 오른팔에 붕대를 감아두는 간단한 치료로 마무리 했기에, 기력 회복까지는 안 했기 때문에 배고프고 마는 오니였다. 집에 사다둔 것이 있었나 고민을 하면서도, 배고픔에 머리가 그리 잘 굴러가지 않는지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집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무언가 시켜먹던가 하면 될지도 모르니까.
차분한 걸음걸이로 사무소 근처의 방으로 걸음을 옮긴 오니는 언제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집 앞에 멈춰선다. 한순간 비밀번호 키로 손가락을 옮기던 오니는 무언가 냄새를 맡듯 코를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평소의 향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있었다. 그렇지만 그리 낯선 향은 아니었다. 잘 알고 있는 익숙한 향. 그렇기에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연다.
" .. 에덴? "
에덴의 붉은 눈동자가 오니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오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잔잔하게 이름을 부른다. 자신의 집에 먼저 들어와있는 방문자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는 않은 듯 차분하게 전투화를 벗고 집으로 들어선 오니는 겉에 걸치고 있던 새하얀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곤 천천히 누워있는 에덴에게 다가온다.
" 오늘, 쉬는날? "
천천히 붕대가 감겨있는 손을 내밀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에덴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 하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속삭인다.
리타 무에르테, 그녀는 제법 가창에 소질이 있었다. 이에는 신앙의 국가인 라테라노 출신으로서 어릴 적부터 갖가지 성가를 들으며 커온 탓도 있겠지만 타고나길 그녀가 노래를 좋아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가득 들어찬 성가를 좋아했다. 신이시여, 내 생명을 드리니 부디 받아주소서. 어두운 밤의 길을 밝히소서. —와 같은.
리타가 커피잔 안으로 각설탕을 넣으며 콧노래를 흥얼였다. 오늘은 제법 널널한 날인지라, 휴게실에서 간단한 다과를 즐길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했다. 다만 아직도 커피의 씁쓸함 즐기지 못해, 그것을 중화시키고자 꼭 설탕을 쏟아야만 했다. 따뜻한 머그컵을 쥐고 리타가 휴게실 안쪽 의자에 앉았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 리타는 적막과 고요를 좋아했다. 외로운 것을 싫어하는 그녀가, 적막과 고요를 좋아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 I'm lying on the moon. My dear, I'll be there soon… "
느릿히 눈꺼풀을 감고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별안간 흥얼이던 멜로디를 입 밖으로 꺼내들기 시작했다. 차마 이곳에서까지 찬가를 노래하긴 싫었던지라, 그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노래 중 가장 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 것이다. 노랫말을 타고 흐르는 여자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위축되고, 불안에 차있는 대신 평화와 고요가, 차분함과 부드러움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향수가.
" It's a quiet and starry place. Time's we're swallowed up "
여자가 노래를 흥얼였다. 옅은 커피향과 고요함에 젖어, 채 앞을 바라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휴게실 근처로 사람의 기척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가사를 읊어나갈 뿐이었다.
#리타가 부른 노래도 같이 올려둘게요! 리타 목떡으로 쓸까 생각했던 노래인데, 영화 OST라서... 고민이 참 많았...ㅎ.ㅎ
리아가 에덴의 이름을 부르자, 에덴은 아직 졸음이 덜 떨어진 게슴츠레한 눈으로나마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리곤
"왔어요?"
하고, 자연스럽게 리아를 반겼다. 리아가 코트를 걸 때, 옷걸이의 옆자리에 에덴의 하얀 야상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리아가 손길을 뻗어 에덴의 머리에 손을 얹자, 에덴은 눈을 감으며 리아의 손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곤 리아의 속삭이는 목소리에 맞춰 나직이 대답해왔다.
"새벽부터 경호 임무를 나갔거든. 일찍 시작해서 일찍 끝났어요. 오후 다섯 시쯤..."
반말과 존댓말이 반씩 섞인 기묘할 말투- 그러나 그것은 에덴의 친근감의 표시들 중 하나였다. 휴일을 리아와 보내고 싶었던 건지, 에덴은 그 이후 간단한 마실 것들이며 간식을 사서는 바로 리아의 집으로 온 모양이다. 시간이 약간 엇갈려 리아를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만 잠들어버린 듯하지만. 그리고 이제 리아가 돌아온 기척에 깨서는 리아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
잠기운이 남아있는 눈으로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에덴의 물음에, 에덴의 머리 위에 얹은 손을 살살 움직여 매만져주며 잔잔한 목소리로 답한다.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도 오니 본인이었으니 어찌보면 비밀번호를 알려준 의도를 자신의 멘티가 제대로 잘 써먹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쓰다듬에는 칭찬의 의미도 담겨있음이 틀림없었다. 물론 에덴이 반가운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 경호.. 에덴, 잘하니까 별 문제, 없었겠네. 응. 고생했어. "
여전히 에덴을 내려다보는 오니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가라앉은 듯한 붉은 눈동자, 그리고 자그마한 입술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분명 에덴에게는 조금의 부드러움이 느껴졌을 것이다. 조금 더 손을 움직여 머리를 매만져주던 오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천천히 닫혀있던 입술을 연다.
" 깨운거야, 내가? 더, 잘래? "
자신이 문을 여는 소리에 깨버린 것이라 생각했는지 피곤하면 더 자도 괜찮다는 듯 조용히 물음을 던진 오니는 답을 기다리듯 살짝 고개를 기울 체 에덴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자고 싶으면 좀 더 자도 괜찮다고, 딱히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오니였기에 불편할지도 몰랐지만 에덴이 쉬고 싶으면 더 쉬어도 좋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 ... 샤워, 하고 오길 잘 했네. 이상한 냄새 맡게 할 뻔 했어."
응, 다행이네. 작게 중얼거린 오니는 샤워를 하고 오느라 묶지 않은 머리가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묶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차피 이젠 쉴 일만 남았으니 그다지 묶을 필요성은 못 느끼는 듯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