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3924> 자유 상황극 스레 2 :: 1001

이름 없음

2020-11-15 00:13:19 - 2021-09-12 23:02:17

0 이름 없음 (/8xYPD6Tn6)

2020-11-15 (내일 월요일) 00:13:19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825 이름 없음 (SPO8trDW6A)

2021-08-31 (FIRE!) 06:51:51

>>822 ...당신과 보게 되어서 좋아요. 그렇지만, 그건 궁금한데...
(당신을 다시 돌아보며 무언가 질문을 하려 했으나... 당신의 손에 그만 말문이 막힌다. 입을 막아버린 것도 아닌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따뜻하게 엮여오는 당신의 손에 말이 끊긴다. 이렇게 잡고 싶었던 거야...? 하고, 원래 하려던 질문과는 다른 질문이 입으로 나가려는 것을 참는다. 그저 당신의 손이 좀더 편안하게 쥘 수 있도록, 손을 조금 고쳐쥘 뿐이다. 손가락 사이에 당신의 손가락이 얽혀있는 것을 느끼면서. 얼굴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뜨겁다. 영화관의 어둠으로도 가리지 못할 얼굴색이 되어있을 것 같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왜 나와 이걸 보고 싶었던 거에요? 라고, 원래 꺼내려던 질문을 꺼내면 얼굴이 펑 터져버릴지 몰라 둘러대는 말 뒤로 숨는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당신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어서 당신 쪽으로 몸을 기울여보았다.)

826 이름 없음 (j8GU2/Vruc)

2021-08-31 (FIRE!) 18:55:29

>>823

" 저는 이런거 좋아해요. 작은 여흥이 되잖아요. 세상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더라구요. 저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그래서 그런 말이 있는걸까요? "

조금은 낭만적인, 그러면서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 말이었다.

" 실력에 자신이 있나봐요? 상대에 맞추어서, 상대가 하는 행동 그대로. 그러면서도 당신은 고고한 긍지를 갖추고 있는것처럼 보이네요. 당신은 위선자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선인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평범하게 고뇌하며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하는 사람인가요? "

그녀가 살풋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물어보았다. 민감한 질문을 거침없이 내뱉으면서도, 그녀는 전혀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것처럼, 그런 의도처럼.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띄워지자, 꼭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같네. 그녀가 생각했다. 관심없다는듯 빙글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고.

" 제 말 뜻을 이해하나요?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는데. 신기한 우연이군요. 그건 당신의 경험에서 비롯된건가요? 아니면, 철학? 당신이 좋아하는 신념? "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한 제안,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어쩌면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리겠지. 사실 그대로, 우리는 방금 만났지 않은가. 대화를 나눈지 몇 분이나 되었지? 풋내기 모험가가 고블린을 한 마리 죽이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좀 더 짧을것이다. 다만 그 뿐인 인연인데, 조금 솔깃해졌다. 그녀는 많이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만 서투를 뿐. 궁금한것이 많았고, 묻고 싶은것도 많았다. 그러면서 알려주고 싶은것도 많았다. 그녀가 이렇게 솔직한 반응을 보일 줄은,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 잘 됐네요. 믿지 마세요, 그리고 용서해달란 말도 하지 마세요. 구태여 상처받을 필요 없잖아요? 믿음, 배신, 그 뒤에 남는건 결국 한 사람일테고. 그 사람이 모든걸 떠안게 될텐데. 저도 당신 별로 안믿어요. 우리의 이 여행이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어쩌면 어느날 갑자기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모르죠. 내가 당신을 배신할지도 모르고, 당신이 날 배신할지도 모르죠. 하고싶은대로 해봐요, 우리. 서로가 아닌, 각자를 위해서. "

그게 더 편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연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꽤 고압적인 말투였지만, 그녀 딴에서는 배려하고 있는걸지도 모르지.

" 답이요? 뭔가 저한테 묻기라도 하셨나요? ...아, 속내를 드러낼거면 여기서 드러내라? 좀 웃기네요. "

키득거리면서 그녀는 꽃을 피워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성인 남성 크기로 커진 꽃은, 눈 앞에 있는 청년과 똑같이 생긴걸 뱉어냈다. 하얗고 긴 머리도, 입고 있는 옷의 세심한 부분들까지도. 그리고 금세 시들어버렸고, 곧 그녀는 다시 꽃 하나를 피워내어 이번엔 그의 칼에 찔린 자신의 시체를 뱉어내게끔 하였다. 그걸 대충 의자에 앉혀두고, 시체 옆에 아까 피워냈던 푸르른 꽃을 던져두었다. 그리곤 만족스런 얼굴로, 집 주변에 평범한 들꽃들을 피워냈다.

" 이제 궁정마법사가 와도 우리 시체가 아닌걸 밝혀낼순 없을거에요. 멀린 정도는 와야 알걸. 좀 긴가민가 하겠지만. 아, 이건 꽃으로 만든거니까 막 기분나빠하진 말구요. "

그럼, 이제 가요. 어디로 갈까요?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로 가서 일단 밥부터 좀 먹을래요? 아니면, 뭐. 생각해둔 그쪽 가문 부흥 계획같은거 있어요?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집 밖으로 앞장서던 그녀는, 갑자기 멈춰서고 빙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러고보니 우리 통성명도 안했네요. 제 이름만 말했지. 저는 이자벨, 당신은요? "

827 이름 없음 (N4aq8VZGVE)

2021-08-31 (FIRE!) 19:43:47

>>826

"그저 마지막까지 살아있고 싶은 사람일 뿐이지, 그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그 답에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당신이 느끼는 것이 곧 답이 아닐까 싶으니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지요."

자신이 위선자인지, 선인인지 아니면 왔다갔다 하는 사람인진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때로는 위선자일 것이고, 때로는 무자비한 악인이오, 또 때로는 상냥한 선인일지도 모른다. 만약 가문이 숙청당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의 자신은 그저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싶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으나, 그 운명의 끝에서도 혼자 죽을 생각은 없어 마지막까지 추하게 발버둥을 칠 존재. 그 정도로 스스로 평을 내리며 그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잠시 짓다가 다시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적어도 피가 어쩌고에 대해서라면 그냥 추측만 할 뿐이지, 제대로 이해를 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당신이 말하는대로 저는 제가 원하는대로 하도록 하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서, 당신을 이용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당신이 원한다면야."

어쩌면 딱 그녀와 자신의 사이는 그런 벽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청년은 스스로 납득했다. 애초에 자신을 죽이려고 파견 나온 이였다. 뭐든지 다 믿고, 하하호호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완전히 경계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믿음을 완전히 주기는 힘든 존재인 그녀가 만들어낸 시체를 바라보며 그는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꽃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자신의 시체를 직접 보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것으로 완전히 추적이 끝나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능하면 이 제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군요. 이렇게 했다고는 하나, 얼굴을 아는 이들이 보면 결국 술수가 들키게 될테니까요. 항구도시로 가서 밥을 먹고 배를 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서 조용히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가문 부흥이라. 크게 생각해둔 건 없다는게 유감이군요. 제 가문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을테니까요."

다른 곳으로 가서 공을 쌓던지, 아니면 힘을 쌓아 언젠가 복수를 하러 돌아올것인지, 그건 아직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다. 그녀의 힘을 빌린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다지 내키지 않는 길이었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답을 알 수 없는 저 너머를 바라보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제대로 허리춤에 메고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천을 떼어낸 후, 곱게 접어 챙겼다.

"죽이러 온 사람의 이름을 익히지 못하셨나요? 그렇다면 저도 정식으로 소개를 하도록 하죠. 나인. 대대로 제국의 검으로서 충성을 다하던 허드먼트 가의 말석인 존재에요. 이제와서는 그런 제국의 검도 뭐도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요."

더 챙길 것은 없다는 듯, 그는 소개를 마치며 천천히 발을 옮겨 집 밖으로 나섰다.

"당신은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828 이름 없음 (DlpSlFdhpw)

2021-08-31 (FIRE!) 20:25:48

>>827

" 마지막까지 살아있고 싶은 사람이라. 그게 당신이군요. 확실히, 스스로 말하는것 보단 제가 이해하는게 맞겠어요. 아무리 제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져있어도- "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살짝 슬프게 웃어보였다.

" 당신에겐 제가 어떻게 보이죠? "

그리곤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웃었지. 그녀는 그가 입꼬릴 올려 미소짓다가, 입꼬리를 내리는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살아있고 싶은 사람. 그녀는 그에게 흥미가 있었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는건, 저 붉은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가진것이 많으면 나누어주지만, 가진것이 없으면 빼앗는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이건 선인일까, 아니면 악인일까? 신에게 물어보는수밖에 없겠지. 대답을 들을 일은 영원히 없겠지만.

" 상관없어요. 당신도 직접 제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세요. 그때쯤 되면 서로를 이해할수 있을까요? 오래 보았던 친구처럼. 네, 원하는대로 하세요. 저도 제가 원하는대로 할테니까.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굳이 더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주제였다. 숙녀의 비밀이란 언제나 무거운 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그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는걸 바라보았다.

" 제가 생각하기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는데. 저는 제멋대로 굴다가 당신이 빼어든 칼에 죽고, 당신은 제가 던진 꽃 향기를 맡아서 죽고. 동귀어진,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었나요? "

위로라고 하는 말일까? 그녀는 조금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어봤지만, 고압적인 말투 탓에 어떻게 들릴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그녀는 곧 저 시체들을 평범한 꽃으로 돌려놓겠지.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 다른곳이라. 그것도 확실히 나쁘진 않네요. 한 번도 이곳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거든요. 새장속의 카나리아처럼. 당신은 다른 대륙, 아니면 다른 나라로 가본적이 있나요? 들리는 소문으론 동방의 섬나라엔 사람을 잡아먹는 미개 민족이 산다던데. 엘프들의 대륙에선 늘 풀만 뜯어먹고, 드워프들의 광산에선 철괴를 씹어먹는다더라구요. 그게 맞나요? "

그녀는 꽤 어리숙해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 다시 처음부터라. 꽤 오래 걸리겠네요. 저는 그런 쪽으론 전혀 관심이 없어서. 애초에 뭘 하면 가문을 부흥시킬수 있을까요? 영주는 누가 시켜주는걸까요? 영주가 되려면 뭘 해야할까요? 어렵네요, 뭐. 잘 생각해보세요. 약탈도 괜찮고, 아니면... 작은 마을의 촌장으로 시작해도 되겠죠. "

저도 아는게 별로 없어서.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그리고 그가 간소하게 짐을 챙기는걸 보고는, 돈은 없겠구나 싶었다. 뱃삯은 있나요? 밥값은요? 애초에 여비란게 있나요? 설마 저랑 노숙을 하자는건 아니겠죠? 조금 쏘아붙이듯이,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그녀였지만- 조금은 신나보였다. 여행이란것이 기대되는 신출내기 모험가처럼.

" 네, 별로 관심이 없었어서. 들었는데 잊어버린건지, 듣지도 못한건지... 이것도 별로 의미없는 얘기네요. 잘 부탁해요, 나인. "

그녀는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올려보이며 고개를 숙여 예의차려 인사했다. 조금전까지 경박해보이던건 어딜가고, 꽤 기품있어보였다.

" 저는... "

그녀는 그의 물음에 조금 고민하며 발을 내딛다가-

" 환상섬에 가고싶어요. 천사들의 정원, 누구도 발을 내딛어보지 못한 조용한 낙원. "

그리고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마지막의 얘기에요. 지금으로썬, 글쎄요. 세상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어디를 가든, 재밌을것 같네요. "

그럼 배를 타러 가나요? 아니면,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그녀가 물었다.

/
다음은 또 내일 이어줄게!! 참, 혹시 일댈 의향있어? 부담스러우면 지금같은 관계로도 괜찮아~

829 이름 없음 (N4aq8VZGVE)

2021-08-31 (FIRE!) 20:59:55

>>828

자신이 어떻게 보이냐는 말에 그는 아직 판단이 힘들다는 듯,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자유로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그는 이어 자신이 생각한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쩌면 가장 감시를 받는 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장 자유롭기에 가장 경계되고 가장 감시받는 자로서 말이에요."

제국의 현 황제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청년은 그저 쓴 웃음소리를 냈다. 물론 그 진의는 알 길이 없었다. 자고로 권력이란 그런 것이고, 그로 인해서 숙청당하는 이들은 그에 대해 뭐라고 말도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렇기에 그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황제는 결국 조용히 살고 있는 자신마저 죽이려는 자이니. 그렇다면 자신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결론지으며 쓴 표정을 지어 성이 있을 그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방법은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자신이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이 영 유쾌한 것은 아니다보니. 당신을 탓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역시 가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세상은 넓으니 그런 이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어쩌면 그와는 다른 것이 보일지도 모르지요.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동방의 섬나라도 있을 것이고, 고기를 먹는 엘프가 있을 수도 있고, 평범하게 우리가 먹는 것을 먹는 드워프들도 있겠죠. 발을 옮기다가 발견하면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가능하면 사람을 먹는 이들을 만나고 싶진 않지만요."

설마 그럴까.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이 꽤 가볍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위험한 이가 있다면 피해가면 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검에 피를 묻히는 것 또한 망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생각이었기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고집할 마음은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많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있어요. 그래도 귀족 가문의 말석이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현 귀족들 수준을 생각하면 곤란하지만, 적어도 며칠 정도 버틸 정도는 되겠죠. 정 안되면, 이런저런 일이라도 하면서 돈을 벌 수밖에요. 해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애초에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것 자체가 계산밖의 일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트러블이 있을지 떠올리며 기품있게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는 마찬가지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다시 올렸다.

환상섬. 누구도 발을 내딛지 못한 조용한 낙원. 그곳이 어디인진 알 길이 없었으나, 어차피 같이 길을 떠난다면 그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으니까. 저 너머에 보이는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길을 바라보며 그는 눈을 감다가 다시 뜨며 그제야 제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그곳도 찾아보죠. 일단 지금은 항구마을로 가서 배를 채우고 환상섬이라는 곳에 대해서 아는 이가 있는지 들어보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정보는 많아서 나쁠 것이 없으니까요."

/일댈이라. 사실 권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뭔가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830 이름 없음 (N4aq8VZGVE)

2021-08-31 (FIRE!) 23:28:08

음. 미안해!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일댈은 힘들 것 같아. 뭔가 가만히 보니 여행물이 될 것 같은데 여행물이 취향은 아니다보니. 그래서 일댈까진 조금 힘들 것 같네. 8ㅁ8 미안하다. 이어준 참치.

831 이름 없음 (cRDaMaB2KI)

2021-09-01 (水) 00:40:52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각, 예고 없는 소낙비가 내렸다.
언젠가 들고 와서 가져가지 않은, 책상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파란 우산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어두컴컴한 로비 앞에 누군가 덩그러니 서있다.
움직임이 없어 조용히 꺼진 센서등 아래에서 곤란한 듯이 하늘을 올려보고만 있는 가느다란 실루엣.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독 나에게만 까칠하게 구는 직장 선배이다.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과 땅이 꺼질 듯한 한숨소리. 내가 무얼 잘못했냐 이유를 물어도 말버릇처럼 반복되는, 똑바로 하라는 꾸지람만 돌아올 뿐이다.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차가운 사람이다.
그런 선배가 고작 우산이 없어 쩔쩔매는 모습에 맘속이 약간 고소했으나, 곤란한 상황을 보고도 모른체하고 휙 지나가버릴 정도로 내게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부러 기척을 내며 걸어가, 눅눅하게 켜진 센서등 아래서 이쪽을 돌아보는 선배에게 대뜸 우산을 내밀었다.

"이거 쓰세요."

선배는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진 못하겠고, 우산을 받아들기를 재촉하듯 내민 손만 한번 흔들어 보일 뿐이다.
마음은 벌써 저만치 도망가서 정류장을 향해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선배가 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도의 맥가이버만 아니면 자유롭게 이어줘도 좋아!

832 이름 없음 (cRDaMaB2KI)

2021-09-01 (水) 00:43:12

>>831
/맥가이버랜다... 맥커터!!

833 이름 없음 (KdQ549bziw)

2021-09-01 (水) 18:01:02

>>831

마지막 여름 비가 지줄지줄 쏟아지는 궂은 날은, 감옥과도 같은 직장 밖으로 걸어나가는 기분좋은 퇴근길까지 온통 음습하고 눅눅한 불쾌함으로 물을 들여놓았다. 흡사 에드거 앨런 포의 싯구절처럼 불길한 기색이 흐르는 현관 가운데는 아주 그럴듯한 갈가마귀까지 한 마리 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갈가마귀를 닮은 인간이다.

어쩌다 보니 직장 선배로 만나게 된 저 사람은 당신에게는 까칠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랭했다. 당신이 가까워진 다른 선배들도 그와 가까워지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오하는 은둔자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랬다. 그 사회성의 결여를 감수하고라도 팀장이 그를 자기 휘하에 어떻게든 붙들어두려고 안달을 하는 그 경이로운 업무능력만 아니었더라도 진작에 그 사회성에 발목이 잡혀 회사를 자기 발로 나가거나 쫓겨났을 인간이었다.

다가가 보면, 그는 쩔쩔맨다기보다는 진작에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이 자기 맘대로 안 될 때 보이곤 하는 안달하거나 어딘가에 초조하게 연락을 넣어보거나 이럴 리 없는데, 하고 차갑게 무언가 곱씹으며 생각해보는 모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선배의 회색 눈은, 슬픔 가득한 상념에 한가득 잠겨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 눈은 울고 있는 눈이었다. 그러나 눈물샘마저 말라버린 모양인지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고, 대신 하늘이 지금 쏟아지는 소낙비의 일부를 그의 눈물인 것으로 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넋을 잃은 창백한 회색의 연기가 빗줄기를 뚫고 맥없는 선을 그린다.

그러나 그도 잠시이고,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선배는 평소대로의 그 짜증과 신경질을 꽉꽉 눌러담은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당신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방금 불을 붙였던 듯한 장초를 미련없이 꺼버리더니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뭐야. 당신 아직도 회사에 있었습니까? 설마 내가 맡겨둔 그 간단한 장부정리가 이제서야 끝났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표정을 안 보려고 눈길을 피하니 친절하게도 귀에 때려박아버리는 이 자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보라. 그 눈빛은 자신이 언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냐는 듯, 당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싸늘하게 내리쪼는 눈으로 돌아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방금까지 하고 있던 모습을 감추려는 허장성세인지도 몰랐다.

그는 당신이 내민 우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당신을 쓱 훑어보았다.

"그런 와중에 의외의 배려심에는 감사합니다만, 이 우산을 내가 덥석 받으면 당신은 뭘 쓰고 갈 참입니까? 당신이 가방에 우의를 넣어다닐 정도로 스마트한 사람은 아니리라 보는데요."

정말이지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을 이렇게 밥맛떨어지게 할 수 있는 건지, 신기의 경지라고 해도 되겠다.

834 이름 없음 (/3jXollFZk)

2021-09-01 (水) 18:28:51

>>830 그런가.. 그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겠네! 어딘가에서 또 보자구~

835 이름 없음 (042nFPa672)

2021-09-01 (水) 18:54:33

>>834 그렇게 되겠네. 그래! 어딘가에서 또 보자! 짧지만 재밌었어! 너참치!

836 이름 없음 (GpBp6dAeL.)

2021-09-02 (거의 끝나감) 00:38:50

>>825
(잠깐. 손을 맞잡은 건 좋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깍지를 낀 손을 내려다본다. 왜 이렇게 비현실적이지. 그리고 이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으면 되는 걸까. ……후우. 타이밍을 찾자. 계속 깍지를 낀 채로 있는 것도 당신에게 불편할 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 전체로 느껴지는 당신의 뜨듯한 체온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걸 무서워하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혼자 못 본 이유가 궁금한 거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보고 싶었어. …그럼 갈까. (중간에 목소리가 잠깐 작아졌지만, 담담한 척을 하며 네 질문을 추측해 대답한다. 좋아, 쓰레기를 버리면서 자연스럽게 놓는 것이다. 근데 굳이 놓을 필요가 있나? 라고 유혹해오는 악마의 속삭임을 애써 무시해본다. 애석하게도 당신이 기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당신 몫의 음료수 병을 한 손으로 집어들며 일어선다.)

837 이름 없음 (hW8c7ftQgU)

2021-09-04 (파란날) 08:16:20

아침 7시 43분. 파란지붕 편의점 앞에 있는 소년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학교에 등교를 해야 할 시간이나 항상 이 편의점 앞에서 만나서 같이 가는 이가 있었다. 사실 딱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먼저 간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항상 같은 시간에 만나 같이 학교를 가는 이가 있었다.

7시 44분.
7시 45분.

정확한 시간대가 되자 소년은 저 앞에 있는 골목길을 바라봤다. 거기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는 이였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후, 소년은 팔을 들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근처까지 다가오자 소년은 입을 열었다.

"늘 느끼지만 항상 같은 시간대네. 아니, 뭐 빨리 나오라는 것은 아니고 신기해서. 몇년 째 이 시간이잖아?"

새삼스러울지도 모르는 발언이었으나 그래도 굳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캔커피 중 하나를 상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앞서가듯 천천히 걸어갔다.

"1+1이라서 하나 처리하기 애매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 먹던지. 아무튼 가자. 학교에."

무심함이 어느 정도 섞여있는 어투로 말을 하며 소년은 아주 살짝 발걸음을 앞으로 향했다.

/사람 잘못봤어요라던가 꼽주는 맥커터만 아니면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자유롭게 해도 괜찮아! 다만 같이 학교를 가니 비슷한 또래였으면 해!

838 이름 없음 (upf4wT.9BQ)

2021-09-06 (모두 수고..) 00:38:15

(허리춤에는 롱소드를 차고 등에는 백팩을 멘 영락없는 모험가의 모습으로 횃불을 들고서 던전을 돌아다니던 도중, 앞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검손잡이로 손을 뻗으며 횃불로 앞을 밝힌다. 서서히 다가오는 인영에 눈가를 살풋 찌푸렸다가, 금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 가 왜 여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전 애인의 모습이다. 뒤늦에 엄습해오는 어색함에 말을 채 잇지 못한다.)

/던전탐사물~ 맥커터 사절!

839 이름 없음 (X0OrQTcZjo)

2021-09-06 (모두 수고..) 01:08:57

>>838
(동료들과 함께 던전을 탐사하러 나섰지만 모두가 전멸한 상황. 시체수습은 커녕 소지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간신히 완드 하나만을 가지고 도망치자 그 흔한 횃불 하나 없이 혼자 어두운 던전 안을 돌아다녀야 할 지경에 이른다. 결국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절망적인 마음으로 헤매던 중 빛이 보이자 살고싶다는 본능으로 빛을 따라간다.) ...아.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전 애인. 눈을 찌르는 피를 닦던 손조차 멈출 정도의 어색함이 흐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어색함이나 창피함따윈 생존 본능에 비할 수 없었다.) 살려줘. (자존심조차 없는 것처럼 절박하게 매달린다.) 이 던전에서 무사히 나가게 해줘. (과거에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은 간 데 없이.)

840 이름 없음 (upf4wT.9BQ)

2021-09-06 (모두 수고..) 01:25:17

>>839
...자, 잠시만. (숨이 턱 막힌다. 잠깐, 나도 모르게 어느새 환각 마법이라도 걸린건가? 팔소매로 눈가를 슥슥 비벼보고, 눈을 깜빡인다. 아무리 전 애인이고, 사람 대 사람의 도리가 있다지만은. 횃불은 그대로 든 채, 칼집에서 스릉, 하고 칼을 꺼내든다. 그리고 칼 끝으로 당신을 겨눈다.) 이게 환각이면 좀 창피할 것 같지만...확인은 해야할 것 같아서. 제대로 대답해주었으면 해, 안 그럼 베어버릴 거니까. 우리가 헤어진 뒤로 네가 옮겨간 파티 이름은? 그리고 헤어지기 전 날, 내가 준 꽃 이름은? (전자는 내가 모르는 정보, 후자는 내가 아는 정보다. 아니, 그 꽃 이름은 나와 너만이 알겠지. 아무리 환각이라 해도, 저런 절박한 피투성이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피하기 보다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841 이름 없음 (FwPVzdJ5ZY)

2021-09-06 (모두 수고..) 02:01:57

>>840
(칼 끝이 겨눠지자 흠칫, 떨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고작인 몸으로는 저 칼이 움직이는 것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은 살고싶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당신이 적대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피가 찌르는 눈이 충격에 물든다.) ...빅토리아. 그리고... (힘겹게 대답하던 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리고 토해내듯 답한다.) ...금잔화. (눈물이 날 것 같다. 이건 피 때문일거야. 피가 눈에 들어갈 것 같으니까, 따가우니까, 그래서일거야.) ...환각 아니야. 믿어줘. 살려줘. (고개를 숙여 눈을 피한다. 이제서야 이런 절박한 모습을 당신에게 보인 것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것도 죽일 것처럼 칼을 겨누는 당신에게. 하지만 여전히 살고싶었다. 고작 완드 하나 간신히 들고있는 꼴이면서도.)

842 이름 없음 (/CckK4YMio)

2021-09-06 (모두 수고..) 13:55:52

>>841
빅토리아 네 파티에...?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다시금, 당신이 준 정보를 곱씹는다. 베테랑은 아니지만 초신성 같은 루키들이 모여있는 파티로, 경쟁률이 높은 곳이다. 실력이 뛰어난 당신이라면 들어갈 만 하지만, 이런 던전에서 호락호락하게 당할 파티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미 그곳엔 당신과 같은 직업이 있을텐데.) 설마, 중층이 아닌 하층을 공략하러 들어간거야? 왜 갑자기 그런 무리를... (싸늘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하층의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물리 공격으로는 해치우기 힘드니까. 게다가 금잔화라는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칼 끝을 천천히 내린다. 저 이야길 듣고나면, 아무리 환상이라도 벨 수 없다. 얼굴을 쓸어내린다.) ...일단 거기 앉아서 기다려. 임시 캠프를 치고, 그 다음에 응급치료라도 해줄 테니까. (커다란 배낭에서 조립형 2인용 캠프를 꺼낸다. 당신과 함께할 때부터 사용했던 캠프로, 지금은 많이 헤쳐있지만 쓸 만 하다. 그리고 캠프 주변에 인식방해 가루를 뿌려 몬스터에게 쉽게 인식되지 않도록 한다.) 소음 차단제는 비싸서 못챙겼어. 소음 조심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와. 어디 다쳤어? (걱정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설마 전멸은 아니겠지. 일부러 말은 꺼내지 않으면서 응급치료 도구들을 꺼낸다.)

843 이름 없음 (4UNYSAbilM)

2021-09-06 (모두 수고..) 14:40:05

>>842
...필요했으니까. 돈과 '심연의 눈물'이. (하층의 아주 낮고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다는 비밀 방에 대한 소문. 안개에 가려진 그곳을 찾으면 막대한 돈과 보물, 그리고 다친 자들과 병든 자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 살릴 수 있다는 '심연의 눈물'이라 불리는 흐르는 강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그 소문은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으니, 당신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도, 당신과 헤어지고나서 더 무리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들려주지 않고, 천천히 내려가는 칼 끝을 따라 눈을 내리깐다. 나를 믿어주는구나. 살았다. 다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다리에 힘이 풀린다. 쓰러지듯 주저앉은 자리에는 떨어지던 피들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이 배낭에서 캠프를 꺼내 준비하는 동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너무나 익숙한 캠프다. 당신과의 달콤한 기억이 눈물이 되어 찾아온다. 다행히 피가 모든 것을 가려준다. 처음으로 피에 감사했다.) ...복부랑 다리. 그리고 머리랑 왼쪽 팔. (간신히 완성된 캠프 안으로 들어가자, 당신의 걱정이 들려온다. 너는 변함없이 다정하네. 익숙하고도 낯선 다정에 입술을 살짝 깨물다 답한다. 얼마나 긴장하고 두려워했던지 마법 완드를 처음으로 내려놓는 오른손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닦아낸 피들로 범벅이다.)

844 이름 없음 (ZNSw9iNNxg)

2021-09-06 (모두 수고..) 15:54:26

>>843
(심연의 눈물이 흐르는 강. 그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있을리가. 다만, 하층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빅토리아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설마... (술집에서 얼핏 들려왔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아니길 바라지만, 정황상 물어볼 수 밖에 없다.) 혹시 빅토리아, 원 아이드 잭한테 정보 산 적 있어? (물어보는건 물어보는 것이고, 우선 치료다. 고개를 숙인 당신의 볼을 슬며시 붙잡고 들어올려 눈을 마주친다. 약간의 충혈, 그리고 출혈. 복부랑 다리가 보기엔 가장 심각한 상태였다. 응급처치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자신은 그저 소독약과 붕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머리와 팔에 붕대를 둘러주고, 복부 쪽 옷을 들쳐올려 상처를 살핀다. 말없이 있다, 당신의 입에 생수를 먹여주고 흰 밧줄을 물게 한다.) ...셋에 소독할게. 많이 아플거야. 하나, (하나, 에 그대로 소독제를 바른다. 근육이 경직되면 소독약이 제대로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 미안해. (입술을 꼭 깨문 채 후속처치를 이어가다, 당신의 오른손과 완드를 내려다본다. 완드 주변에 하얗게 변색된 완드 조각이 떨어지는 모습에 놀란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마력 과소비 후유증이잖아. 너, 후유증에 약하면서... (그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하층 입구와 여기까지의 거리가 꽤 있는데도 용케 걸어왔구나. 더 이상 말을 걸면 피곤하겠지. 얼굴에 눌러붙은 피를 닦아주고, 진통효과의 찻잎을 우려낸 차에 포션을 섞어 먹여준다.) 나한텐 귀환 스크롤이 없어. 걸어서 올라가자. 중간에 다른 파티를 만나면 도움을 청하고...사제한테 치료 먼저 받아야 할 것 같아.

845 이름 없음 (niewr/Vsg.)

2021-09-06 (모두 수고..) 17:35:10

>>844
네가 그걸 어떻게... (당신이 볼을 붙잡고 들어올린 얼굴이, 놀람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설마 무언가 비밀스러운 뒷정보가 또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해도, 무리한 하층행에 동참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겠지. 그만큼 나는 절박했으니.) 흐읍...! (당신이 둘러주는 붕대며, 생수며, 심지어는 흰 밧줄마저도 얌전히 받아들이지만, 준비할 새도 없이 발라지는 소독제의 고통은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음 차단제가 없다는 당신의 말을 기억하고 가까스로 비명을 참아내는 것은 기적적인 정신력에 가까웠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밧줄을 꽉 깨문 입술이 밧줄만큼이나 하얘진다. 당신의 사과마저 당신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모를 고통처럼 느껴진다.) ... (당신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살고싶다는 본능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아득바득 버텨왔다는 말이, 마음을 약간 놓으니 생겨난 얄팍한 자존심에 가려진다. 얼굴의 피를 닦아주고, 차에 포션을 섞어 먹여주는 당신의 변함없는 다정 앞에서는 그 자존심마저 다시 무너질 것 같았지만.) ...내 마력이 조금만 회복되면 치유 마법을 사용하면 되니까 괜찮아. 그러면 올라가는 길에 더이상 네 발목을 붙잡을 일은 없을거야. (과거에 함께 다니며 서로 힘이 되어주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너에게 있어서 걱정스러운 짐짝은 되지 않겠지. 올라가서 재정비를 한 후에는 다시 하층으로 향하겠지만.) ...너...는 혼자 온거야? (차가 효과가 있는지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다시 찾아온 어색함을 피하려 얼굴을 돌리며 묻는다. 치료 때문이었지만, 당신이 너무 가깝다. 더이상 피 핑계도 댈 수 없는데.)

846 이름 없음 (upf4wT.9BQ)

2021-09-06 (모두 수고..) 20:04:37

>>845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다만, 빅토리아한텐 적이 많았잖아. 잭도 몇 주 전에 한번 호되게 당했었고. (특유의 올곧은 성격으로 기존 의뢰가 아닌 다른 의뢰들을 해결한 경우가 몇몇 있었다. 뒷골목의 인간들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겠지.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곤 고통을 참는 당신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네가 살아남았으니까. 자연스레 당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하는 손길을 의식적으로 우뚝 멈추었다. 이렇게, 여지를 주지 말자. 내가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마력의 리미트 이상을 사용했다면, 적어도 하루 동안은 안정을 취해야해. 부탁이니까 좀 쉬어둬. 이건 같은 모험가로써의 조언이야. (미련 같은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아두지만, 깔아내린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나는...맞아. 최근엔 던전 탐사보다는 중층의 새 루트 지도를 만들고 있어. (어색하지만, 감정에 솔직한 엷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던전 탐사에 불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더 이상 당신과 파티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의 부족함으로 사랑하는 이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금잔화 같은 걸 주는 게 아니었어. 좀 더 미련을 떨쳐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중얼거린다.) 그 날, 그렇게 통보하고 가버린 거랑 의도적으로 연락 피한 거. 지금 이 모든건 그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해줘. (가까이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눈을 마주치지 못해 가늘게 웃고는 옆자리에 앉는다.) 잭은 안떠났을거야. 빅토리아 파티를 보낼 정도라면 단단히 준비해뒀단 걸테니까. 너가 원한다면 지상에 올라가서 정보상 조합에 연락해볼 수 있어.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해?

847 이름 없음 (/rREDtfx/E)

2021-09-06 (모두 수고..) 21:37:36

>>846
...알 것 같네. (특유의 올곧음이 빅토리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 동료 전멸로 이어질 정도의 죄인 것인가? 허탈함과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실소가 새어나온다. 곧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머리카락으로 향하던 당신의 손길이 우뚝 멈추자, 고통이 더 짙어지는 것 같다. 당신의 손이 닿았어도 아마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미련이 다시 생길 것만 같아서.)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네. (고통이 조금 잦아드니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아픈 몸으로 던전 탐사에 나서려 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만류했던 당신이 생각났다. 이제 우리는 애인이 아니라 단순히 같은 모험가일 뿐인데도 여전히 너는 그렇게도 다정하네. 잔인할 정도로.) 그것도 나쁘지 않네. 중층도 지도의 수요가 꽤 있기도 하니까. (당신이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한다. 그래도 던전 탐사보다는 덜 위험한 일이니 당신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에 안심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입술을 살짝 깨문다.) ... (사과 하지마. 사죄 하지마. 더이상 나를 흔들지마. 날 버린 것도 너고, 날 피한 것도 너고, 금잔화를 남긴 것도 너면서, 이제 와서 그렇게 사과 하지마. 당신의 눈을 피한다. 당신의 표정따위 보고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 해야했다. 날 내려다보는 네 눈을 보면 널 다시 붙잡아버릴 것만 같으니까, 그러지마.) ...됐어. 이건 내 일이니까. 이 던전을 나가는 것까지만 신세질거야. 그게...너의 '사죄'의 값으로 끝이니까. (나를 다정하게 대하지마. 얄팍한 자존심으로 다시 치장한다. 당신에게는 나에 대한 미련조차 없을텐데도, 당신이 남긴 금잔화 꽃이 시들지 않는 것처럼 당신의 말 한 마디에 여전히 홀로 이렇게 휘둘리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물론 잭이 남아있다면 더 비참한 끝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살고싶어. 나를 살려줘. 당신에게 말하지 못할 진심으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고개를 더 숙인다.)

848 이름 없음 (upf4wT.9BQ)

2021-09-06 (모두 수고..) 22:25:33

>>847
(알 것 같다며 조소하는 모습에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한다.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완벽하게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헤아릴 수는 있으니까. 모험가의 세계는 으레 그렇다. 자신 외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될 때는, 자신의 목숨이 스러질 때 뿐이다. 당신도 모르는 것은 아닐테니, 어설픈 위로보다는 가장 보편적인 신에 대한 기도문으로 짧게 애도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여전히 바뀐 점이 없네. 나는 할 말 다했어. 정녕 다시 하층으로 내려갈 생각이면, 그들이 왜 너만큼은 살리려했는 지 생각해보았으면 해. (자신들의 무리로 인해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당신을, 당신만큼은 살리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진 당신의 말을 들으며 찻잔을 정리한다. 알고있다. 당신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너의 일' 이라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지나친 오지랖은 주변의 죽음을 부른다. 약한 자신의 신념은 주변 모험가들로부터 기피당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비도덕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느 쪽에서도 자신을 받아주는 이들은 없었다. 당신,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성은 당신을 그냥 보내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 다리로 더 걸으면 영구적인 손상도 입을 수 있어. (이미 늦었다. 차에는 가벼운 수면약이 들어있으니까. 당신을 이 던전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슬슬 약효가 돌 즈음,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눈시울이 묘하게 뜨겁다.) 조금 자고 있어. 눈을 뜰 때까진 데려다줄테니까. (여태 어색함을 감수하고 당신의 옆에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쓰러질 당신을 받쳐주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849 이름 없음 (7QTF027uio)

2021-09-06 (모두 수고..) 23:27:41

>>848
너도 마찬가지야. 여전히 바뀐 점이 없네. ...내가 왜 다시 하층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해. (당신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면서 웃음을 피식 흘린다. 물론 처음 하층으로 나섰던 목적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그렇게 자신만큼은 살려준 그들의 손톱 하나, 소지품 하나 챙겨오지 못한 나였다. 지상에 올라가 장례를 치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 껍데기의 관에 불과하겠지. 그들의 목숨의 무게까지 온전히 다 나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더 살려고 하는 것이고, 필사적으로 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서라도, 자신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남아 그들의 시체를 수습해줄 생각이었으니. 만약 심연의 눈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을 사용해서라도.) ... (알고있다. 너의 그 오지랖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정함을. 주변 모험가들은 그런 너를 기피하고는 했지만 나는 아니었으니. 나와 비슷한 너의 그 신념에 나는 이끌렸고, 너를 사랑했고, 끝내 너를 잊지 못했다.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는 순간까지도.) 상관 없...어... (그런데 이상하다. 어쩐지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아득바득 버텼던 정신마저 흐려진다.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 네가 차에 무언가를 탔구나.) 너... 이... (방심했다. 당신을 올려다보는 눈이 충격과 배신감과 절망에 물든다. 붉어진 눈시울. 마지막으로 당신을 향해 아주 옅은 사랑의 미련을 눈물로써 한 방울 흘려낸 눈이 마침내 감기고, 정신을 잃은 몸이 당신을 향해 힘 없이 쓰러진다.)

850 이름 없음 (nHoPUDC/K6)

2021-09-07 (FIRE!) 01:11:29

>>849
(쓰러진 당신이 바닥에 닿기 전에 안아들고, 그제서야 당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그 뒤로는 캠프의 뒷처리를 하고, 배낭은 앞으로 멘 채 당신을 업고서 최단 루트로 중층과 상층을 빠져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간에 만난 파티나 몬스터는 없었고 던전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잠시 푸른 지상의 하늘을 올려다보다, 당신을 흘끗 돌아본다.)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나름 익숙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대상이 당신이라면 다르다. 단지, 당신이 수면에 빠지기 전 자신에게 내비친 시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처럼 시큰거렸기에 단순한 자기 위로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대로 입구에 있던 다른 모험가들의 도움을 받아 당신은 신전의 치료실에 맡기고, 자신은 정보상 조합에 가는 것보다는 주점을 향했다. 자신의 행색에 주목이 쏠리고, 빅토리아 파티의 전멸을 전했다. 다행인 점은, 빅토리아 파티의 선행을 몸소 겪은 모험가들이 많았기에 자청해 하층으로 가 수습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서게 되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당신의 역할도 그 이상의 효과를 내놓았다. 거기까지 일을 마친 뒤에는 본래 묵고있던 숙소가 아닌 당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치료실로 향한다. 보라색 히아신스 한 다발을 옆에 내려다놓고, 잠들어있는 당신을 지켜본다.) 네 말이 맞아. 바뀐 점이 없다는 거. 또다시 나 혼자 억지를 부리고, 멋대로 떠나려하니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고 말았다. 채비를 갖추고 자리서 일어선다.) 던전 안에서 널 만났을 때, 환각 마법이라고 해도 기뻤을거야. 심장도 진정이 안될 정도였거든. 그런 걸 내 입으로 담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넌 좋은 사람이야. 이번 일이 네 책임도 아니고. 얼른 낫길 바래.

851 이름 없음 (qaNlUFMBm.)

2021-09-07 (FIRE!) 02:05:09

>>850
(잠에 빠져 쓰러진 후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당신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첫만남부터 우리의 끝까지. 그 시간 사이에는 수많은 추억들이 있었고, 당신이 선물해주었던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처음에는 뭘 이런걸 선물해주냐며 쑥스러워 했고, 다음에는 고맙다고 속삭였으며, 나중에는 당신의 꽃 선물을 기대하며 꽃말을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나 역시 너를 보며 꽃처럼 웃었다. 쓰러지기 전 너를 원망하던 그 시선은 간 데 없이. 그러나 그 꽃들이 금잔화로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네가 떠나간다. 붙잡으려 하지만 너는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연락마저 피했고, 꿈 속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치료실에 누워 치료를 받으며 감고있는 눈에도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당신이 보라색 히아신스 한 다발을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는 그 순간에.) ...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손이 이불 위를 움찔거리더니, 아래로 떨어져 당신의 옷자락을 힘 없이 붙잡는다.) 가...지마... (잠꼬대일까. 잠꼬대일지도 모른다. 감은 눈은 뜨지 않았고, 목소리는 잠겨있으니.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손과 입은 당신을 붙잡는다. 어차피 얄팍한 자존심따위, 그 피투성이의 몰골로 당신에게 살려달라고 했을 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살고싶다는 욕망에 또한 숨겨져있던, 당신에 대한 사랑과 미련. 조금 더 너와 함께 있고싶어.) ...너랑 같이 살고싶어...나를 살려줘... (눈물이 흘러내린다. 미련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속삭이는 목소리며, 당신을 붙잡은 손은 전부 꿈 속인 것처럼 힘이 없다. 당신이 떠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놓고서 떠날 수 있을 정도로.)

852 이름 없음 (sL2SkBjcuM)

2021-09-07 (FIRE!) 16:26:42

>>851
(항상 같은 풍경이다. 나란히 서서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어느새 자신보다 먼저 앞서가있다. 발을 내딛고 싶어도 숨이 찬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지만, 당신을 떠난 이유는 아니다. 그런 나를 돌아보느라 같이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이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옷깃을 붙잡고, 잠결로 진심을 속삭이는 당신을 내려다보는 자신의 표정은 무슨 표정일까. 옆 창문에 비쳐진 것은 따스한 미소 뿐이다. 지독한 자기혐오, 미련, 먼저 떠난 입장으로써 가져선 안될 모든 감정을 함축해놓은 듯한 눈빛을 감춘 채. 역시 너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은퇴 후에 뭘 하고 싶냐는 이야기 나눴던 거, 기억 나? (무릎을 굽혀 앉아, 당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본다.) 너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고, 나는 꽃집을 열고 싶다고 했었지. (모르겠다는 네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3년만 힘내볼게. 그 때까지, 네 귀에 내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날 잊지 않는 다면.) 꽃을 사러 와줘. 나팔꽃을 선물해줄게. (옷깃을 붙잡았던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손등에 입맞춤을 남긴다.) 언젠가 다시 보자. (치료실을 나오고 나서 한참동안, 문 앞에 서서 소매로 눈가를 꾹 누른 채였다.)

853 이름 없음 (dx1eY/.Zuk)

2021-09-07 (FIRE!) 19:05:49

>>852
(당신이 짓고 있는 표정, 눈빛, 감정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섞어 먹인 수면약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던, 지쳐버린 온몸에 제대로 퍼졌기 때문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꿈 속의 당신은 얼굴조차 그림자에 가려진다. 당신을 볼 수 없었다. 이럴거면 아까 던전에서 너의 얼굴을 좀 더 봐둘걸. 이미 가득하게 차서 출렁거리는 미련에, 작은 후회가 한 방울 떨어진다.) ... (당신이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꿈 속의 당신이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 미련이 만들어 낸 소망인 것인지. 너는 나에게 꽃집과 3년을 약속했고, 네가 손등에 남겨준 입맞춤이 나팔꽃 한 송이를 만들어낸다. 아직 활짝 피어나지는 않았지만, 작지만 강한 꽃봉오리의 모습인 나팔꽃을.) ... (대답은 없다. 그러나 당신과 약속을 하듯, 손이 스르륵 당신을 놓아준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너와의 두번째 이별의 보라색 히아신스가 보이겠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나팔꽃이 되겠지. 언젠가 다시 보자. 그 때는 꼭 나팔꽃을 선물해줘.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팔꽃으로. 당신이 나서자 다시 홀로 남겨진 치료실에, 소리없이 눈물만이 흐른다. 당신이 한참동안 소매로 눈가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상황상 막레가 될 것 같네~ 재밌고 행복했어! 고마워!

854 이름 없음 (nHoPUDC/K6)

2021-09-07 (FIRE!) 19:47:03

>>853
/와아~~~~ 👏👏👏👏👏 같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해! 너참치도 고생했어! 재밌었어 X)!!

855 이름 없음 (fEYf//PanA)

2021-09-07 (FIRE!) 23:24:40

-쿨럭. 쿨럭. 늘 미안해. 그래도 너밖에 부탁할 이가 없어. 좀 부탁할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자의 대역인 그는 황자와 얼굴이 쏙 빼닮았다. 황자를 정말 잘 아는 이라면 아주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겠으나 얼핏 보거나 황자를 잘 모르는 이는 구분이 힘들었다. 다음 황위를 잇기로 결정된 황자는 현재 건강상태가 나빠진 것 때문에 비밀리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 허나 황자가 몸이 약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혼란이 올 수 있었고 나쁜 뜻을 먹은 귀족들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자는 자신의 대역을 세웠다.

대역인 사내는 가족이 없었다. 길거리를 떠돌면서 겨우 배만 추리고 살던 어린 시절, 정말로 우연히 마을에 시찰을 나온 어린 황자를 만났고 그 황자는 당시 어린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고, 황궁에서 살게 해줬다. 그 은혜를 갚고자 사내는 황자에게 자신의 인생 그 자체를 바쳤고, 지금은 마법의 도움을 받아 얼굴마저도 황자와 비슷하게 바꿔 황자가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대역으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사실은 황족 중에서도 극소수, 그리고 황자의 측근 정도만이 알고 있을 뿐, 그 이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 황자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사내는 오늘 역시 황자의 대역으로서 이런저런 일을 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조금도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정말 철저하게 황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연습 끝에 전혀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매일매일이 조마조마한 것은 사내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아침의 모임을 마치며 사내는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또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사내는 표정 관리를 하며 문 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반역자! 운운하는 그런 맥커터만 아니면 사실 누가 들어와서 무슨 말을 나눠도 괜찮으니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어줘!

856 이름 없음 (PnIOAylHU.)

2021-09-08 (水) 00:16:21

>>855

이제 막 평온해지려는 공간에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드레스에 잘 손질된 금빛 머리칼, 다소곳하며 우아한 몸짓이 보통 사람은 아닌 듯 보인다. 갓 스물쯤 된 듯한 여성은 문을 열고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다가,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미소지으며 사뿐사뿐 안으로 걸어들어와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이어요. 황자님. 간밤은 편히 주무셨는지요?"

생김만큼이나 목소리도 고운 이 여성은 황자의 부친 측 사촌 중 한명이었다. 본래는 왕래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곳에 살지만, 이 근처에서 유별난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단다. 하여 황궁의 손님방을 하나 받아 축제 기간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도착은 전날 했지만 시간이 늦어 이제서야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을 덧붙인 그녀는 잠시간 지그시 사내를 응시하는가 싶더니, 작은 소리로 웃곤 말했다.

"같이 화단을 헤집으며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못 뵌 사이 멋진 황자님이 되셨네요. 이제 저만의 오라버니가 아니시라니 조금은 서운한걸요."

그녀는 어릴 적에도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어릴 적 황자와 놀았던 때가 있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제법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이번에 올 때에도 남모를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사내를 보고 의아함이 들면서도 그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만큼 어엿하게 자랐다고만 생각했다. 아직도 종종 철없다는 소리를 듣는 그녀와는 참 다르다고도 생각하며, 말을 덧붙였다.

"공무가 바쁘신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차 한잔 마실 만큼의 시간을 제게 내주지 않으시려나요? 저는 오랜만이라 할 얘기도 참 많고, 듣고 싶은 얘기도 많답니다. 오라버니."

사내를 완전히 황자로 여긴 그녀는 어릴 적처럼 친근하게 부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소곳하게 선 모습은 설마하니 저 사내가 가짜일거라곤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 순수한 모습이었다.

//이런 전개는 괜찮을까나?

857 이름 없음 (bMHg5MHK1E)

2021-09-08 (水) 00:32:01

>>856 물론 충분히 괜찮긴 한데, 내 쪽에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아! 황자의 부친 측 사촌이라고 한다면 나름 황자와 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을 하거든. 아무래도 직속 친척이니 말이야.
그렇다고 한다면 대역으로서는 조금 고민을 하다가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면 진짜 황자에게 데려가서 사정을 알려주려고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858 이름 없음 (PnIOAylHU.)

2021-09-08 (水) 00:47:42

>>857 엇 그런 전개도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야 물론 괜찮지!

859 이름 없음 (bMHg5MHK1E)

2021-09-08 (水) 00:48:40

>>858 그냥 캐입을 해보니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사실 같은 황족가의 사람이 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해서! 아무튼 이어올게!

860 이름 없음 (PnIOAylHU.)

2021-09-08 (水) 00:52:29

>>859 나는 마침 딱 떠오르는게 저거였어서 ㅋㅋㅋ 부담없이 손 가는 대로 써주면 좋겠다. 잘 부탁해!

861 이름 없음 (bMHg5MHK1E)

2021-09-08 (水) 01:03:19

>>856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금빛 머리칼을 지닌 여성의 등장에 대역인 사내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으나 속으로는 크게 당황했다. 어린시절 이야기로 추정되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만의 오라버니가 아닌 것 같아 서운하다고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분명히 황자와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으로서는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나름 황자로서 만나야 할 상대를 열심히 익혔으나 적어도 그 리스트에 눈앞에 있는 여성의 존재는 없었다. 지금 황자에게 돌아가서 보고를 하고 조언을 구해야하나 싶었으나 적어도 자신이 아는 황자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뒷전으로 할 이는 아니었기에 철저하게 대역으로서 사내는 노력하기로 마음 먹었다.

"놀랐는걸. 언제 여기에 온 거야? 아무튼 마찬가지로 좋은 아침이야.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꿈 내용까진 기억이 나질 않아. 그래도 좋은 잠자리였어. 아무튼 너야말로 상당히 예뻐진 것 같은데? 서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에도 오라버니이니 말이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황자보다 연하. 적어도 자신이 아는 바, 황자에겐 약혼녀가 없었으니 아마 혈족이 아닐까 대역은 추측했다. 주변 사람들은 몰라도 황족까지 속이는 것은 원치 않은 일이었으나 황자가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쁜 마음을 먹는 이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대역은 우선 그녀가 누구인지 파악해보기로 했다.

"아니야. 공무는 방금 끝났어. 안 그래도 잠시 쉴 참이었어. 그럼 자리를 잠시 옮길까? 기왕 차를 마신다면 정원에서 먹는게 좋을 것 같은데."

우선 황자가 있는 방과는 조금 거리를 띄워야겠다고 판단한 그는 황족들에게 사용이 허락된 정원으로 그녀를 데려가고자 했다. 그녀가 어떤 이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널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전 그대로도 좋을지도 모르지만 불러줬으면 하는 호칭이 있다면 얘기해주지 않을래?"

862 이름 없음 (PnIOAylHU.)

2021-09-08 (水) 02:09:56

>>861

"어머, 정말요? 기뻐라.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라버니에게 예쁘다는 말도 듣고 말예요."

의심이라곤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순수해보이는 그녀는 예뻐졌다던가, 서운해하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대역인 사내의 말에 마냥 기뻐했다. 그리운 이와 만난 것이 기뻐서인지 조숙해보이는 외모에 비해 말이나 행동에서 조금씩 앳된 티가 드러나고 있었다.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 듯 하니 다행이어요. 아, 자리는 오라버니가 편한 곳으로 하셔요.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이 황자라고 생각하는 사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며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 정성들여 빗질한 긴 생머리가 살짝만 움직여도 살랑살랑 흔들리고, 고운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아직은 어른스러운 미소보단 함박웃음이 잘 어울릴 것만 같은 그녀는 사내의 다음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의문을 가진 듯. 하지만 곧 다시 해맑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하였다.

"어릴 적엔 그렇게도 별명을 고집하시던 오라버니가 왠일이실까요? 혹시 너무 오랜만이라 제 이름을 잊어버려서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그럼 저 성낼 거에요, 라며 그녀는 하얀 뺨을 볼록하게 부풀렸다 얼른 원래대로 되돌렸다. 다 큰 귀족가의 영애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걸 혹여나 주변인들에게 보였다간 무슨 말이 돌지 모르니까. 그럼 아예 안 하면 되겠지만, 그녀에게 황자는 어지간히도 특별한 존재인지 무심코 해버리게 된달까. 아무튼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 들뜬 목소리로 재잘대었다.

"이제 오라버니가 아니면 저를 그리 불러 줄 사람도 없으니, 예전처럼 티샤라고 불러주셔요."

예전처럼이라는 건 어릴 적을 말하는 걸 테고, 그녀가 댄 호칭은 아이들이 어릴 때 흔히 쓸 법한 별명 정도로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본명에서 따온 것이지 않을까 싶은.

863 이름 없음 (bMHg5MHK1E)

2021-09-08 (水) 02:26:46

>>862

"말했다시피 공무는 아까전에 끝났고 쉴 참이었어. 무엇보다 이렇게 왔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할리 없잖아?"

상당히 황자에게 호의적인 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너무나 예쁜 미소를 짓고 있어 속이는 것이 괜히 미안하다고 생각하나 자신 역시 황자의 명을 받들어 대역으로서 활동하는 중이었다. 마음을 조금 독하게 먹고 이 상대를 믿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사내는 파악해보기로 했다.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에 사내는 괜히 긴장하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어쩔 수 없는 모험이었다.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면, 어떻게 부르는지도 모른다면 필시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지간한 경우는 사전에 누구랑 만나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파악해두지만 그녀의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로서는 평소보다 더욱 조마조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에 사내는 안도하며 다시 황자가 지을법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이 아니잖아? 그래서 네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어. 아무튼 원한다면 그렇게 부를게. 티샤."

드디어 알아낸 이름. 허나 거기서도 딱 짚이는 것은 없었다. 어린 시절, 어린 황자에게 거둬져서 황궁에서 살면서 황자의 최측근으로 언제나 옆에 있었기에 나름대로 황가와 관련된 이들의 정보는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끼며 사내는 그녀와 헤어진 후에 다시 한 번 황가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생각을 전혀 표정으로 보이지 않으며 사내는 정원으로 향하는 오른쪽 복도로 향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전혀 보고를 받지 못했거든.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물론 이 말에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 진 알 수 없었다. 허나 적어도 겉으로 대는 이유라도 알아볼 겸, 사내는 답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그녀의 발에 맞췄다. 그리고 눈동자를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그녀에게 돌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만약 보고를 들었으면 사람을 시켜서 마중나갔을텐데."

/일단 이렇게 잇고 나는 자러 가볼게! 아마 저녁에 다시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864 이름 없음 (PnIOAylHU.)

2021-09-08 (水) 04:59:23

>>863

사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기뻐할만한 말에는 숨기지 않고 표정에 기쁨을 드러내었고, 맑은 두 눈에는 미심쩍인 기색이라곤 일절 없이 상대를 향한 환한 감정들로 가득히 반짝였다. 그만큼 황자를 만난 것이 즐겁고 기뻐보였을 것이다.

"후후.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시나요, 오라버니? 먼저 훌쩍 어른이 되버리셔서 제가 알던 오라버니가 맞나 싶은걸요?"

예의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내가 황자의 대역으로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즐겁게 한 것은 분명했다. 제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다는 것도 한번 해본 말이지 설마라는 예상의 티끌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달리 보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더이상 추억 속 어린아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그만 저도 철이 들도록 노력해야 하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며 사내를 따라 오른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아, 음, 많이 놀라셨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워낙 예정 없이 나왔다보니 전갈을 보냈는지 어쨌는지도 잘 몰라서요. 요즘 본가가 좀 어수선하기도 해서-"

본가가 어수선하다는 말을 하며 잠시 말끝을 흐린 그녀. 아주 잠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가 사내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생긋 웃음지으면 말했다.

"그래서 할아버님이 잠시 기분 전환이나 하고 오라며 대뜸 내보내시지 뭐에요. 마침 이 근처에서 작은 축제가 열리니까, 여기 머무르면서 다녀오면 좋을거라고 하시면서요. 제가 도착했을 때, 머무를 준비가 다 되어있길래 전갈이 닿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그리고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뺨을 살짝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워요. 오라버니.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푸른빛의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며 사내의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뺨에 홍조를 띄운 채,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아니, 소녀의 모습으로 말이다.

//나도 저녁쯤 올거 같네. 그때보자.

865 이름 없음 (bMHg5MHK1E)

2021-09-08 (水) 19:58:44

>>864

"아니야.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었던걸지도 모르지. 깜짝 놀라보라는 의도로 일부러 당사자에겐 숨기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무튼 준비가 되어있었다니 다행이야. 아. 미안해. 별 의미는 없어. 아무 것도 안 묻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론 정말로 그런 지는 적어도 지금의 사내로선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그 진의는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황족들에게만 입장이 허락된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이었다. 눈이 절로 편해지는 푸른색에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볍게 앉아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그 근처에 만들어진 푸른 연못까지. 문에서부터 이어지는 돌길은 그 아름다운 경치 속으로 쭉 이어져있었고 사내는 그 돌길을 밟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원래라면 자신의 주군이나 마찬가지인 황자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면 이곳에 들어서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을 일이었다. 허나 지금의 자신은 황자의 대역. 철저하게 황자로서 이동하기로 하며 그는 근처에 있는 정원지기를 바라보며 차를 준비할 것을 명했다. 바로 준비하겠다는 말과 함께 정원지기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사내는 티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기에 앉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면, 역시 아무도 없는 장소가 좋을테니까. 성 안에서는 몰래 듣는 귀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말이야."

방금 언급하진 않았으나 사내에게 있어서 신경쓰였던 부분이 있었다. 일단 그녀의 눈동자로 보아 그녀는 연기를 할 법한 성정은 아니지 않나 사내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도 답을 해주지 않을까. 설사 대답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준 후, 건너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본가가 어수선하다는 건 무슨 의미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기분 전환을 하라고 여기로 보낼 정도니까 조금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물론 사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어수선함이 혹시 모를 불순한 움직임과 관련이 된게 아닌가였다. 만약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자신은 바로 황자에게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아무 것도 없이 떠돌던 자신에게 살 곳과 생명을 준 황자를 위해서라면, 그는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제대로 대답할진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생각보다 별 것이 아닐지도 모르나 진의 파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866 이름 없음 (nc/1aa7Txo)

2021-09-09 (거의 끝나감) 01:15:14

"후후 좋은 선택을 하셨군요"

쿠궁-
웅장한소리와 함께 마법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이세상것이 아닌듯 독기를 품은채 주위를 장식하고 그 사이로 수려한 인상의 남자가 등장한다.
세련된 정장의 핏이 딱 맞는 그 남자의 날카로운 인상은 꽤나 깐깐한 이미지를 준다.

"악마 유스타드, 부름에 응하여 이 자리에 오게되었으니 그럭저럭 잘 부탁합니다"

과한 격식으로 인사하는 그 모습이 꼭 무대위의 배우같아 우스꽝스럽기도 오만한 웃음의 얼굴이 상대를 비웃는것같기도 했다.

그리고 손을 올리라는듯 빈손을 건넨다.

867 이름 없음 (d9juHOFAAs)

2021-09-09 (거의 끝나감) 07:52:35

>>866

"잘 왔다, 유스타스. 내가 너를 불러낸 자, 클레아레스다."

그가 소환된 곳은 어두컴컴한 창고였고, 그를 소환한 이는 그와 같은, 그러나 인간으로 분하지 않고 뾰족한 귀와 피막 날개와 뿔을 드러낸 악마였다. 덤으로, 그가 건넨 빈 손에 쥐여지는 것은... 지푸라기를 야무지개 엮어만든 빗자루였다.

"시급 반띵해 줄 테니까 청소좀 도와줘. 이 넓은 교회를 나 혼자서 청소해야 하는데 인간 놈들이 축제다 뭐다 해서 잔뜩 어질렀다고. 오늘 안에 청소하지 않으면 감봉이란 말야!"

애초에 이 넓은 구역에 나 혼자만 배정된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망할 신, 망할 악덕 고용주같으니. 투덜거리면서 클레아레스는 자신도 대걸레를 집어들었다.

"자자, 서두르자! 자정까진 남았지만 여유부리다간 금방 날이 저울거야."

868 이름 없음 (vSzU2vvIac)

2021-09-10 (불탄다..!) 21:15:38

오, 딜러님. 그 반지 예쁘다. 어디 거에요? (레이드 쉬는 시간, 홀로 벽 근처에 앉아있는 당신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건다. 즉석으로 모인 32인 레이드인 만큼,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역할군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호칭은 조금 딱딱하다. 전장을 넓게 봐야하는 탱커니 안면을 트려는 걸 수도 있고, 단지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직업군이든 괜찮아~! 레이드물!

869 이름 없음 (rfd8oglh5Q)

2021-09-12 (내일 월요일) 12:15:26

갓 성인이 된 사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던 마을에 발을 들였다. 어릴 때의 기억보다는 조금 더 발전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살던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이제는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편의점에 잠시 들려, 가볍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음료수를 구입한 후, 핸드폰을 켜 미리 저장한 주소로 향했다.

약 3년 전, 마지막까지 살아계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시골집 앞에 멈춰선 사내는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봤다. 저 앞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일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논이 보였고 근처를 돌아보면 아주 큰 산도 보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바로 이런 곳일까 싶을 정도로 고요함과 조용함이 남아있는 시골집 벽면에 쳐져있는 작은 거미줄을 쳐낸 후, 청년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도시에서의 삶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좋았으나 그렇다고 앞길이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한적하게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아갈까해서 온 것이었으나 아는 사람 하나 제대로 없었고,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골 특성상, 어린 시절 시골집에 찾아왔을 때만 같이 놀았던 이들이 이곳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사실 있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길게 묶어내린 자신의 연한 회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꼬던 사내는 근처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 문뜩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누군가 오는 것일까? 이사 왔다고 인사라도 해야할까 생각하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발소리의 주인공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 뜬금없이 꼽주거나 그러는 거 아니면 어떤 전개라도 환영이야! 일단 목장이야기 시리즈 초반부를 생각하며 써보긴 했지만 크게 연관은 없고 그냥 기본적으로는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던 시골로 내려온 사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

870 이름 없음 (xL715CzTfQ)

2021-09-12 (내일 월요일) 16:26:11

>>869
그녀가 이곳으로 온 건 대강 1년 전 쯤이었다. 원래 도시 출신이라 나고 자란 것부터 성인이 되어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전부 고향인 도시에서 했었다. 그랬던 그녀의 인생에 하나 둘 일이 생기기 시작한게 1년 하고도 반년 전. 그리고 반년 간의 시간으로 인해 그녀는 그 때까지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이 시골로 내려왔다. 내려올 때 그녀는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였다.

혼자 살기엔 조금 큰 집에서 늦은 아침을 맞이한 그녀는 오늘도 어제와 별 다를거 없는 하루일거라 생각했다. 지난 1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 잔잔한 시골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거라 여겼었다. 그녀가 일어난 시간에 맞춰 찾아온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반찬을 나눠받으며, 누군가 빈 집에 이사왔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반찬을 받으며 들은 얘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3년 전, 거주하시던 어르신이 돌아가신 이후로 비어있던 집인데 오늘 대뜸 누군가 왔고, 아마 그 어르신의 가족이지 않을까, 젋은 남자 혼자인 걸 보니 어릴 때 놀러오던 손자가 아닐까 라는게 내용의 전부였다.

할머니가 가신 뒤 반찬과 간단히 차린 음식들로 조용히 식사를 하며 그녀가 왔던 첫 날을 떠올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른 아침 조용히 왔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온 지 반나절만에 말이 돌아 저녁엔 옆집이라며 음식을 나눠주러 오기까지 했다. 처음엔 시골 특유의 그런 오지랖이 싫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한 자신이 있었다. 그 사람도 그렇게 될까. 문득 든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사람에 대해 생각해서 뭘 할 건지. 누가 오거나 말거나 그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다. 작은 돌이 일으킨 파문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기 마련이었으니.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까지 마치고나서, 그녀는 늘 하던대로 산책을 하기 위해 외출했다. 특별히 꾸민 것도 없이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새로 집 문을 나섰다. 시골 치고 잘 닦인 길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새 이웃집 할머니가 말했던 그 집 근처였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산책로에 이 집을 지나치는 길이 있었지, 라고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떡할까. 저 앞은 지나지 말고 돌아갈까. 순간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더욱 느려진 걸음이었지만 멈추진 않았다. 멈추지도 돌아가지도 않은 걸음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그 집 앞에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 집 앞에 딱 멈춰, 그녀와 사내가 서로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 ... ...안..녕..하세요."

왜 걸음이 여기서 멈췄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급하게 가버리는 건 실례라는 생각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고보니 이웃집 할머니 외에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를 말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단지 그것 뿐,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하며 인사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871 이름 없음 (T127jCMVNY)

2021-09-12 (내일 월요일) 17:17:53

>>868
(마치 죽은듯 홀로 앉아있던 딜러는, 당신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어서야 떨구고 있던 고개를 달싹였다.) 아아... (딜러가 앙상한 나뭇가지같은 손가락을 움직인다.) 이것 말인가? (어떤 장식도 달려있지 않은채 위협적으로 주홍색 광채만을 번뜩이는 반지. 그것은 단지 그 빛깔만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수준의 물건이었다.)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이것은 길드에서 직접 수여한 'PK 1000킬 보상 반지'이다. 너같은 녀석은 PvP용 계정을 새로 구해서 평생 투기장에 뛰어들어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물건이지. 큭큭... 탐나는가?
물론, 이것뿐만이 아니다... (딜러는 거기서 입을 다물지 않았다. 당신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독선적으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다들 굉장한 사연이 있는 아이들이지... (자세히보면 딜러의 몸에 걸려있는건 그 반지뿐만이 아니다. 그 밖의 여러 반지들, 팔찌, 목걸이까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물건들과 아티팩트들이 다들 제자리를 찾아온 듯 걸려있는 것이었다.) 전부 말해주고 싶지만 설명을 하면 할수록 네녀석의 처우가 너무나 초라해질게 뻔하니 이쯤 하도록하지...
...하지만 보는 눈이있군... 그러고보니 너, 지금보니 이 근방에선 보지 못 한 얼굴이구나. 어디 출신이지?
// 순수 판타지 월드 기반인지 게임 기반인지 몰라서 이렇게 썼어 ㅠuㅠ 전자라면 적절히 필터해서 써주거나 스루해줘~

872 이름 없음 (rfd8oglh5Q)

2021-09-12 (내일 월요일) 17:29:24

>>870

마을에 사는 어르신이 아닐까 추측했건만 발소리의 정체는 정말 예상도 하지 못한 존재였다. 적어도 어르신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시골에선 젊은 사람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사는 이가 있구나라는 생각에 사내는 괜한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시골에 찾아왔을 때, 같이 놀았던 이들 중 몇명은 이 시골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또한 품을 수 있었다. 물론 알아챌 수 있을지의 여부는 또 별개였지만.

"아. 네. 마찬가지로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내 역시 빠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뭔가 모를 어색한 분위기는 사내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시골에서 아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넉살 좋게 이런저런 말을 할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허나 갓 이사를 오고 이곳의 주민으로서 살아가려는 이인만큼 여기서 그냥 조용히 있는 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을 하며 사내는 애써 입을 열었다.

"여기 주민이시죠? 오늘 막 이 집에 이사를 왔어요. 나중에 떡을 돌리면서 마을에 인사드릴 참이었는데. 아. 혹시 바쁘신가요? 바쁘지 않다면 떡이라도 하나 받아가실래요?"

언제부터 그런 전통이 있었는진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챙겨온 것들 중에선 마을 사람들에게 이사왔다고 인사 할 때 돌릴 떡도 있었다. 허나 어딘가에 급하게 가는 길이라면 떡을 가져가기도 참 애매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사내는 우선 여성의 답을 기다렸다.

873 이름 없음 (xL715CzTfQ)

2021-09-12 (내일 월요일) 20:01:02

>>872
지난 1년간 교류한 사람이 이웃집 할머니를 제외하면 가게 종업원들 뿐인 그녀가, 이제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사람을 사귀거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연히 지나던 길에 어쩌다 걸음이 멈췄으니 인사했을 뿐이지,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왜 발은 쉬이 움직여주지 않는건지. 인사만 하고 얼른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가 돌아서는 것보다 사내의 말이 빨랐다.

"ㄴ, 네..."

인사를 받으려고 한 건 아니라서, 사내가 마주 인사해왔을 때 그녀는 흠칫, 하고 작게 놀란 듯이 반응했다. 여기 내려온 뒤로 주변에 어르신들이나 나이 지긋한 분들만 만났다보니 오랜만의 젊은 사람은 낯설었다. 그녀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원래부터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시군요..."

서둘러 가지 못 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 사내는 말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부터 이후의 뭘 할지에 대해서였다. 떡을 돌리면서 인사를 하는 전통은 들은 적만 있었지 직접 받아본 적은 없었다. 날 때부터 도시에서 살았으니까. 아직 이런 시골엔 이사떡 전통이 남아있구나 따위를 생각하다가 사내의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조금 서두르듯이 대답했다.

"아, 저, 그, 바쁜 건 아닌데... 그냥 산책, 하던 중이어서요. 이제 집으로 갈 거였고.."

너무 오랜만의 대화라 그럴까. 그녀의 대답은 확실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러는 걸 그녀 자신도 느꼈는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곤 짧게 말했다.

"바쁘, 지는 않으니까, 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결국 또 말끝을 어물거리긴 했지만 확실한 대답은 되었다. 고작 1년으로 이 지경이 되다니. 그녀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으며,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생기 없는 뺨 위로 스륵 흘러내렸다.

874 이름 없음 (rfd8oglh5Q)

2021-09-12 (내일 월요일) 20:30:52

>>873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아 조금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로 시작된 생각은 어쩌면 주민들 사이에 섞이기 조금 힘들지 않을까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텃세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새로 온 사람과는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아주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그 또한 어느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직접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으로 사내에게 다가왔다.

산책하던 중이라는 말에 사내의 시선이 과거 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셨던 집 앞의 길로 향했다. 도시보다 훨씬 개방되어있는 시골길의 특성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사내는 떡을 받겠다는 말에 자신이 챙겨온 짐가방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포장된 알록달록한 무지개떡 한 팩을 꺼낸 후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깄어요. 맛이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살던 곳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은 곳에서 샀거든요. 그러니까 맛이 없진 않을 거예요."

설마 집 청소와 짐 정리도 하기 전에 이렇게 주민 중 한 명에게 떡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나 이런 작은 예상하지 못한 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는 듯 짧은 인사를 덧붙였다.

"저기,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허나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 인삿말 이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여기에 막 이사를 와서 초면이나 마찬가지인만큼, 거기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으니 괜히 붙잡을 명분이 없다는 것도 컸다. 무엇보다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앞으로 살 집을 정돈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거미줄이 조금 남아있는 집을 바라보며 사내는 괜히 쓴 표정을 머금었다.

"물론 당분간은 집 정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잘 안 보일 것 같지만요."

875 이름 없음 (xL715CzTfQ)

2021-09-12 (내일 월요일) 21:56:32

>>874
그녀는 자신의 태도가 실례라는 건 인지했어도 그로 인해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당장 할 말을 생각하고 정리해서 입 밖으로 꺼내는게 고작인데, 상대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할지까지 신경쓰기에는 그녀의 의식에 여유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묻는 말에 겨우 대답하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른 자세로 서 있던 그녀는 사내가 내민 떡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무색, 단색의 소박한 시골떡과 달리 알록달록 색이 고운 무지개떡은 아직 말랑함을 유지한 채 손에 닿았다. 받은 그대로 떡을 든 그녀는 갈 곳 없는 시선을 떡이 담긴 팩에 향하고 있다가, 잘 부탁한다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보단 연한 보랏빛, 자수정빛 눈이 조금 위축된 기색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몇초간 머무르던 시선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며 대신 조용한 말을 내놓았다.

"저보다는, 여기 분들과.. 잘 지내시는게 좋을...거에요... 다들 친절..하시고, 좋으신 분들이시고... 전 타지 사람이라.."

일가친척은 고사하고 지인 한명 없는 그녀보다는 이웃집 할머니처럼 친절한 분들이 사내에게 도움이 될 거다, 라는게 그녀의 말의 의미였는데, 하도 드문드문 말하니 잘 전해졌을지 모르겠다. 중요한 말도 아니니 아무렴 어떠냐고 생각하던 그녀는 집 정비 얘기에 다시 시선을 움직였다. 겉도 겉이지만 이제 이사왔다면 짐이며 청소며 할게 많겠지. 그녀도 이사온 당일엔 종일 짐 정리만 하다가 날을 샜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라 별거 없을 거 같지만 혼자이기에 할 일이 더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바쁘실텐데, 시간을 끌어버렸..네요. 제가.. 그럼... 저는 이만.."

그녀의 성격상 초면인 사람에게 도와준다던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녀가 시간을 너무 뺏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이고 그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 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발도 뜻대로 움직여 천천히 사내에게 등을 돌릴 수 있었으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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