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3924> 자유 상황극 스레 2 :: 574

이름 없음

2020-11-15 00:13:19 - 2021-06-22 00:58:30

0 이름 없음 (/8xYPD6Tn6)

2020-11-15 (내일 월요일) 00:13:19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524 이름 없음 (DyV5k1pyw2)

2021-06-04 (불탄다..!) 19:27:08

>>523

"별 걸 다 묻는다니요. 새벽에 나가서 사온 케이크라고요. 당연히 맛이 궁금하죠! 그런데 괜찮아요? 한 입 먹었다고 양 줄어든다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방금 그 말, 이 신사까지 와서 기도하는 이들이 들으면 난리 날 거라고요. 물론 정말 혼자의 힘으로 못 하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방금 제가 말한 것처럼 사사로운 것들인데."

못난 것이라고 말하는 말에 그는 괜히 얄미운 어투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물론 방금 여신이 말한대로 대가가 배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배웠기에 삐지거나 심통이 나거나 톡 따지는 어투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장난기를 가득 담은 말을 끝으로 그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입꼬리만 위로 활짝 올렸다.

"어쩌겠어요. 이렇게 자라버린 것을. 언젠가 제가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면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면 되겠네요. 물론 먼 훗날의 이야기 같지만."

결혼이고 자식이고 아직 그런 것에는 접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겐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애초에 결혼을 할지, 자식을 얻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딱히 연애나 사랑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자신을 대입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멋 훗날의 이야기였기에 전혀 감이 오지 않는게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저도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여워해주던 누나가 알고 보니 집에서 저만 볼 수 있는 신님이었고 이렇게 심부름을 시킬 것은 예상도 못했거든요?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당황했는줄 알아요? 아. 보셨겠구나. 아무튼 그것 때문에 넌 무조건 신주가 되어야한다고 말을 듣고 교육을 받았고..."

생각해보면 그때가 모든 시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을 볼 수 있는 신주의 아들이었기에 반드시 신주가 되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교육을 하고 예법을 익히고 절차를 익히고, 해야 하는 이를 배우던 그때 그 순간을 기억하며 그는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무조건적으로 네네 하면서 순종적인것보다는 이런게 좀 더 낫지 않아요?"

/괜찮다아! 편할때 이어주면 그걸로 족해!

525 이름 없음 (mey99Xcd8U)

2021-06-04 (불탄다..!) 20:34:49

>>524

"본녀가 주겠다 해놓고 그런 째째한 짓은 하지 않을테니 염려 마라. 일일히 시끄러운 녀석 같으니. 정녕 그들이 그것을 알아도 난리 칠 이는 거의 없을거다. 애시당초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의지하려 하는 시점에서 문제를 어떻게든 해볼 여력이 남았다는 의미 아니더냐. 정말로 위급하고 궁지에 몰렸다면 신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게 인간임을 본녀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여신은 케이크를 먹던 손도 멈추고 따박따박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장난스레 말하던 그와는 좀 다르게 진지함이 살짝 들어가있었다. 경도의 인간불신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신이 하는 말이니 그냥 인간을 잘 아는구나 싶을만한 말이었겠다. 손을 멈춘 김에 그대로 턱을 괸 여신은 얄밉게 웃으며 떠드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웃음까지 흘리는 그를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네 자식 역시 나를 볼 수 있을거란 보장이 없지 않느냐. 아마 못 볼게다. 본녀를 보지도 못 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를 상대로 너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면, 따끔히 정정해주마. 절대 그렇지 못할 거다."

그의 집안에서 그가 보이는 아이로 태어난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면 여신에게도 정말 정말 드문 일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가 처음일수도 있었다. 여신이 이곳에 신으로 모셔진 이래 처음으로 소통하게 된 인간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 주제 탓인가, 어쩐지 차분해진 여신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당황했어도 금방 기뻐하지 않더냐. 신주 집안에 신을 볼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네 아비가 난리를 떨던게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거기에 결과적으로 신주 일이 너와 잘 맞으니 된 것 아니냐. 네가 받아들였기에 그리 된 것을 너도 알고 있을텐데? 네 그런 성미상 맞지 않는 일을 떠맡았다고 해서 억지로 하지도 않을테고. 그거야말로 네에네에 하며 순종적인 것보다는 나은 셈이지."

본녀가 굳이 말로 하게 만든다며 여신은 다시 한번 그를 못난 것이라 불렀다. 말은 그렇게 해도,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응! 고맙다 너참치야!

526 이름 없음 (DyV5k1pyw2)

2021-06-04 (불탄다..!) 20:53:20

>>525

"혹시 모르잖아요. 그럼 저는 어디 태어났을 때 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일단 절반은 제 피가 흐를텐데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인 그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면 그건 아니었다. 자신처럼 신을 볼 수 있는 케이스가 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분명히 이야기를 해줬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었고 따로 조사를 해도 비슷한 케이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신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답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우연이자 기적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에 딱히 싫어하지도 않고 괜찮으니까요. 지금처럼 갑자기 심부름 시키는게 아니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신 님은 절대 그럴리가 없을테고, 오히려 제가 볼 수 있고 교류를 할 수 있다고 더 신나서 시킬 것 같고. 신력으로 인간처럼 변해서 돌아다니는 그런 것이 좀 더 편하지 않아요? 그것도 금지되어있을 것 같진 않은데."

물론 신은 신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테니 굳이 더 추궁하진 않으며 그는 곧 여신의 말에 괜히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면서 두 눈을 활짝 떠 여신을 바라보면서 괜히 한마디 더 대꾸했다.

"자꾸 못 난 것이래. 진짜 못난 것에게 제대로 대접 받아볼래요? 신사 안 대청소 할 거니까 몇 시간 나가 있으라고 할지도 모른다구요. 아니다. 순종적인 것보다는 낫다고 하니 봐줄게요. 사실 대청소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신사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대청소를 했다간 정말 하루종일 해야할 수도 있었다. 영상물에서나 볼법한 대비로 신사 앞을 무한정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걸래로 구석구석 닦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기에 그것은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는 양손으로 깍지를 낀 후에 앞으로 쭈욱 뻗으면서 말했다.

"오래오래 아주 잘 모셔줄테니까 쭉 있어요. 심부름만 좀 줄여주시고. 아무튼 케이크 다 먹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잘 버려요. 슬슬 들어가서 잠이나 잘건데 더 지시할 일 있어요?"

527 이름 없음 (RkBPUIp4VE)

2021-06-04 (불탄다..!) 23:04:27

>>522

#기다려줘서 미안하지만 자꾸 텀이 길어지고 현생 사정상 여기까지밖에 못 이을 거 같아. 놀아줘서 고마웠어!

528 이름 없음 (VZ9DT4j7jM)

2021-06-04 (불탄다..!) 23:24:35

>>527 아쉽네… 그래도 재밌었어! 현생 일 다 잘 풀리길 바랄게~ 언젠가 또 놀자~

529 이름 없음 (eizg77vJak)

2021-06-05 (파란날) 03:29:01

" ••• 스러져가는 영토의 마지막 여제가 되는 것 만큼, 비참하고도 숭고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

노파가 여자의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그 손길에 맞춰 백색에 가까운 상아빛 금발이 햇빛에 비추어 아름다운 빛깔을 뽐낸다. 비참하고도, 숭고하다라. 여자가 마주한 거울을 물그럼 바라보며 눈꺼풀을 깜빡였다. 구김 하나 없이 고요한 얼굴이다. 노파가 슬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항상 그렇듯, 심드렁한 얼굴로 손길을 옮겨 여자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것이다. 새하얀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옷가지들. 온갖 티 없이 맑은 것들로 치장된 그녀가 거울 저편의 자신을 바라본다.

" 우리의 신을 알현하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

'신'. 여자는 말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부모의 손에서 빼앗아 푸른 첨탑에 가두어 둔 그들은 항상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 전, 우리의 신이 찾아와 손수 대륙을 빚으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먹이시고••• 그들은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읊고, 매정한 손길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오직 '신' 만을 위한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신'은, 미바렌의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수 천년이 지날 동안 미바렌을 떠나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는 것이라고. 그러나 결국 지금의 미바렌은 어떠한가. 황금빛으로 빛나던 과거는 아스라진지 오래다. 점차 황폐해져가는 대륙과,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마족들과, 살 길을 찾아 도망치는 사람들과, '여제'를 믿지 않고 엇나가기 시작하는 지방 영주들. 그는 정녕 미바렌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가.

" '그 분' 의 존재를 부정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별안간 노파가 입을 열었다. 여자는 별다른 기색 없이 고요한 얼굴이다. 감정은 그녀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기에. 여자의 얼굴을 살핀 노파가 말을 이었다.

" 사실, 전대 여제께서도, 그 전대의 여제께서도 처음에는 그 분의 존재를 믿지 않으셨지요. 허나 그분들의 최후는 어떠했습니까. 기꺼이 그 한 목숨을 바쳐 희생하셨지요. 미바렌을 위해, 또 '그 분'을 위해. "

노파가 자세를 낮추어 다시 한 번 여자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 분'의 앞에 서기에, 주름 한 점 용서치 않는다는 것이다.

"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

노파가 허리를 피며 끄응, 하고 소리를 냈다. 허나 아픈 기색 없이 심드렁한 얼굴이다.

" '그 분'의 존재는,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

신을 알현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여자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와,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옷. 그 사이에서 옅은 녹색 눈동자만이 이질적으로 빛나고 있다.

*

성의 가장 윗층은 여제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오로지 여제와, 그녀의 '신' 에게만. '신'은 탑의 가장 높은 곳으로 찾아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평소에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병약한 여인네의 모습으로, 새침한 동물의 모습으로 세상을 보살핀다 말했다. •••웃기는 소리. 여자는 그 말을 씹어삼켰다.

여자는 성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기가 차갑다. 오랜 시간 생명이 머무르지 않은 듯한 공허한 분위기였다. 생명이 고팠던 바람이 주위로 들러붙듯 모여드는 그 감각에, 그녀의 피부 위로 소름이 끼쳐온다. 쏟아내리는 빛줄기를 향해 몸을 낮추고, 다리를 굽혀 앉고, 차분히 눈을 감아내리며 그녀가 중얼였다.

" 여제 에르바가 신을 뵙습니다. "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다.

530 이름 없음 (S4izcHicuc)

2021-06-05 (파란날) 12:53:49

베고 또 베어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섰다.
그러나 내게 남은건 허망함 뿐이었다.


일곱살때. 처음으로 잡은 검, 마을에서 제일 강한 용병과 싸워 스무합만에 승리를 쟁취했다. 녀석은 분했던지, 진검을 꺼내었고, 나는 열 아홉 합만에 다시 승리했다.
재밌었다.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머릿속에 가득 터져나왔고, 더 많은 승리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여덟살때. 허름한 망토와 낡은 목검이 전부인채, 집을 나와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 길은 멀었지만 현상수배범, 초보사냥꾼, 그럭저럭 강한 몬스터와 자웅을 겨뤄 전부 이겨내었고, 수도에 도착하여 모험가로써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즐거웠다.

열두살때. 더이상 제국에선 날 이길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지루했다. 듣기만 해도 즐거운 포부를 밝히며 내게 덤벼왔지만, 전부 두 합도 겨루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제국과 홀로 전쟁을 벌여도 이길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자, 나는 검을 버리고 나뭇가지를 손에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잡은채, 다시 한번 허름한 망토를 두르고 변방의 나라로 떠났다.

열다섯살때. 어느덧 오른손으로 밥 먹는것이 익숙해질 즈음, 처음으로 내 공격을 받아낸 전사를 만났다. 그만 감격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왼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전력으로 베어버렸고, 녀석은 그렇게 두 합만에 죽어버렸다.
그리고 날 덮쳐오는, 절망의 해일. 어째서? 좀더 놀아줬으면 했는데. 짜릿한 승리의 기쁨이 이때부터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좀더 약했더라면, 아니, 약한 너네가 나빠. 그런 생각을 하며 들고있던 나뭇가지마저 버렸다.

열아홉, 지금으로부터 삼년전. 무형검이라는 이명이 생겼다. 그리고 더이상 아무도 나와 싸우지 않았다.
세상의 끝에서 절망하던 도중에, 한 아이를 만났다. 버려진 고아였고, 금방이라도 죽을것같이 보였다. 그런 아이가 꼭 나를 닮은것같아서 거두었다. 치료해주고, 밥을 먹였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은건 얼마만인지. 오랜만에 맛을 느낄수 있었다.

스물. 아이가 건강해졌고, 뭘 해야 할지 모르던 내게 목표가 생겼다. 이 아이랑 살아가자. 아버지가 되어서, 이 아이가 크는걸 지켜보자. 제국의 변두리에 집을 지었고 농사를 시작했다. 사악한 드래곤도 한번의 칼질에 베어버린 내가, 고작 채소를 갉아먹는 벌레를 다 잡지 못해 끙끙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아이와의 물장난에서도 이기지 못했고, 그만 기뻐서 울어버렸다. 요새는 고아원에서 수녀님을 도우며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당당하게 돈을 벌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매일을 충실하게 보냈다.

스물 하나. 아이에게 엄마가 생겼다. 수녀님과 결혼할수도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신님, 고마워요.

스물 둘. 아이에게 동생이 생겼다. 예쁜 여동생이구나. 네가 오빠니까, 잘 지켜줘야해.

스물셋의 여름.
집에 오니 모두가 죽어있었다.
제국의 기사들이 집을 불태우고 있었다.
왜?

아이가 수인이라? 내가 너무 강해서, 내 아이가 두려워서?

나는 두렵지 않은가?

스물 셋의 겨울. 현재로 돌아와서.
제국의 수도, 국왕이 사는 드높은 성문 앞에, 나는 진검을 들고 서있다.
눈 앞에 펼쳐져있는, 수많은 기사단과 화포. 다중마법방어진과 하늘을 나는 용들, 그 위에 올라탄 기사단.

" 저기 말야, 문좀 열어줄래. 그냥 국왕에게 묻고 싶은게 있을 뿐이야. "

나는 나지막히 성문 앞에 서서 말을 뱉었다.

531 이름 없음 (F7F4Fyg4NM)

2021-06-05 (파란날) 14:58:34

>>526

여신이 했던 것처럼 그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왔지만 이번에는 장난으로라도 노성이 돌아가지 않았다. 여신은 아까와 같은 미소를 띈 채로 으이그- 하듯이 그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보이는 체질은 혈연이 아닌 자질이란 것을 여신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그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들어주고 있다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라며 적당히 주제를 흩뜨렸다. 그가 하는 말들에 일부러 웃음을 터뜨리며 여신에게도 그 주제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야 금지된 건 아니지만 일일히 돌아다니는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느냐! 본녀가 그걸 알면서 그리 할 것 같으냐? 십수년이 지나도 그런 것 하나 스스로 생각지를 못 허니, 몸만 큰 아이로구나."

우후후! 그의 웃음소리에 뒤따라 여신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방울이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반응하는지, 바람도 없는데 주변 나무들이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사사- 하고 나뭇잎이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는 단 한명에게만 들렸을 소리였다.

"네 성격에 대청소 잘만 하겠다. 혹여나 정말로 하거든 본녀는 네 방에 들어가 있을 거란 걸 명심하거라. 물론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야."

대청소로 내보내겠다는 으름장을 비슷한 수준의 으름장으로 받아주었다. 이 몸을 여기서 내보내면 네 방의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주겠다 라는 의미 쯤 될까.

"본녀의 신사에 본녀가 있을지 없을지는 본녀 마음이지. 계속 투덜대면 휙 하니 사라져버릴테다. 지금은 이걸로 되었고 한숨 자고 일어나거든 적당한 청주나 한잔 올려다오. 얼음 세알 띄우는 거 잊지말고."

이제 되었으니 어서 가라고 방정맞게 소매를 흔들며 여신은 생각했다. 한없이 유쾌하고 가벼우며 뒤끝 없는 대화였다.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고, 더이상 이어지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532 이름 없음 (zvZF1QQT/M)

2021-06-05 (파란날) 15:38:28

>>529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지던 빛줄기가 흐려지고, 성의 최상층은 다시 공허와 냉기 흐르는 공간으로 남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 사내가 비어있던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 금으로 실을 짜 가늘고 길게 녹인 것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한 때는 그가 걷는 걸음을 따라 생명이 피어나고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신성으로 충만해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몰락의 시대…….

“에르바.”

공기가 아닌 머리를 직접 울리는 것처럼 여제에게 전달되는 목소리는 몹시 아름다웠고 그러나 동시에 공허했다. 신이 여제를 향해 손짓했다. 신은 균형을 맞추는 자. 그의 손으로 균형을 부순 결과 그는 빠른 속도로 신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사랑하던 미바렌, 그의 손으로 지어 낸 대륙도 함께.
안식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백 번째로 다시 환생한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 그는 영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영혼을 빼돌려 백 한번째로 그녀를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신은 눈을 감은 채로도 정확히 여제를 응시하며 말했다.

“말해다오. 네 눈으로 보는 세상을.”

네가 그토록 사랑한 미바렌을. 나와 함께 스러질 그 영광을.

533 이름 없음 (2RBDT6sKRc)

2021-06-05 (파란날) 19:04:07

>>531

"오히려 귀찮다고 꿋꿋하게 안하겠다고 하는 신 님이 게으른거 아니에요? 신화책을 보면 막 신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그런다던데."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장난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심으로 여신을 질타한다면 이 정도로 끝날리가 없고 분위기고 달랐을 것이다. 평범하게 언제나처럼 티격태격을 하는 분위기를 보이면서 그는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듯이 방긋 웃었다. 자신이 네네 하는 순박한 성격이 아닌 것처럼, 여신이 근엄하고 무게만 있는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 그로서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개인공간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죠! 물론 제 방의 침대 밑을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안 나올테니 저야 떳떳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뒤지면 곤란하다고요. 뭔가 제 컴퓨터도 막 뒤질 것 같고."

자신의 방이 오히려 어지럽힐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그는 두 손을 강하게 휘저으며 그것만은 참아달라는 듯이 부탁했다. 물론 방금 말한대로 침대 밑이나 기타 등등에 이상한 물건은 없을테지만, 잘 뒤져보면 매우 중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보이고 싶진 않다는 듯 그는 결국 손수건을 꺼내 백기를 흔드는 시늉을 했다.

"결국 또 술이에요? 알았어요. 알았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술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볼게요. 케이크 잘 먹어요."

정말 못 말린다는 듯이 그는 그렇게 대답을 마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마 저녁 쯤에 세전함 위에는 청주가 가득 들어있는 잔과 얼음 세 알이 띄워져있었을 것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짓궂음과 심술 없이, 오로지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서 정성스럽게.

/상황상 막레일 것 같으니 이렇게 막레를 올릴게!
신님이 정말로 너무 귀엽고 재밌었어!! 놀아줘서 고마워!

534 이름 없음 (ATM7kLGjlM)

2021-06-07 (모두 수고..) 16:43:22

" 안녕. "

책상 위에 엎어져 자던 당신이 팔에 턱을 올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보내면 딱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한 줄의 형광등만 켜져 당신 혼자 있는 교실은 반이 어두웠다. 창문으로 빛이 밖으로 나가지만 밖의 어둠은 들어오지 않기에 창문을 바라보면 저녁이라기도 한참 지난, 간판 불이 들어오고 멀리 보이는 건물의 창문 몇 개만 빛나고 있는 밤 풍경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있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려면 소녀도 바닥이나 똑같은 책상에 앉아 있어야 마땅하련만, 소녀의 다리는 바닥 밑에 바닥이 있는 것처럼 바닥을 뚫고 서 있었다. 그것은 벽이나 바닥을 통과해 지나다니곤 하는 영화 속 유령의 모습과 같았다. 하복을 입긴 이른 이 계절에 하복을 입고 있는 소녀, 그래. 당신의 상식대로라면 이 소녀는 유령이 틀림없을 것이다.

535 이름 없음 (JMFnIxfCTE)

2021-06-07 (모두 수고..) 20:23:36


>>534

"……안녕."

그의 말은 방금 깨어나 목이 잠긴 덕분인지 차분하게 느껴졌다. 비스듬한 자세 덕에 얼굴에 진 그늘이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게 해서 더 그런 걸지도. 어찌되었든 실례, 짧게 말하고 기지개를 켜는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태연하다. 잠에서 막 깨어났다고는 해도, 눈 앞의 소녀가 유령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마치 하복을 입기는 이른, 아직 서늘한 봄비가 내리는 이 계절을 빼닮은 체온의 당신을, 처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나, 그렇다. 그야 그럴 법도 했다. 단추를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와 가디건을 입고, 아무도 없는 밤의 학교에 남아 있는 소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소근소근 숨죽인 목소리들 사이에서 약간의 웃음소리 섞인 호기심으로 들려오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들을 본다는 소년의 소문을.

536 이름 없음 (rdLH/exuwk)

2021-06-08 (FIRE!) 12:07:30

(좀비 사태가 일어난 지, 1년 반. 자신과 같은 또다른 생존자가 있을 거라는 실날 같은 희망을 지니고서 수많은 구역을 돌아다니고, 지도를 만들고, 빈틈없이 샅샅이 조사를 하고 다녔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은 빽빽히 가득 찬 빌딩의 숲과 무수한 시체의 무리 뿐이다. 정말 이 도시에 살아있는 인간이 한 명도 없음을 직감했을 때,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을 벗어버린다.) 그럼 내 세상이다 이거지? 고인물이 뭔지 보여주겠어. (그 뒤로 한참을 팬티 차림으로 빌딩 옥상 사이를 뛰어다니고, 한 끗 차이로 좀비의 손길을 벗어나거나 도약한 뒤, 엉덩이로 좀비의 얼굴을 찍어내리며 넘어뜨리기도 한다. 행복한 얼굴로.)

537 이름 없음 (Bx1blKzMgo)

2021-06-09 (水) 07:30:55

>>535
" ...도와줘. "

단언의 삭막함이었다. 소녀는 그 이상 설명할 것도 없이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세상의 것들을 본다라던 당신을 본격적으로 소녀가 보는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유령의 초대. 소녀가 서 있는 바닥 밑의 바닥을 이 손을 잡으면 디딜 수 있을 것이다.

" 무용실... 도와줘. "

어느 부분부터 지적하면 좋을까? 이 학교에는 무용실이 없다는 점부터 지적해 볼까? 아니면 애초에 '이 학교에 소녀의 유령이 있을 리가 없다'는 점부터 지적해 볼까? 아니면 정말 상식적으로 당신이 소녀를 도와줄 의무가 없다는 것부터 얘기하면 정말 간단히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친한 사이었던 것도 아니었던, 오늘 처음 말을 섞은 소녀는 당신이란 사람에게 끌어들여졌는지 그 소문에 끌어들여졌는지 어쨌건 당신 앞에 창백한 얼굴로 당당히 섰다. 도와줄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538 이름 없음 (lzNVT23CEA)

2021-06-09 (水) 23:26:55

담배를 꼬나 물고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어차피 어딜 가던지 취객 투성이의 이 거리는 누구나가 최고라고 외치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나서 어딘가 맛가버린 이 시대는 자기 같은 사람을 비이상적이라고 비난하는게 정상일 것이다. 이 휘영청한 밤거리 한가운데를 걸으면서 사내는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세상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라고도 할 수 없었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아득바득 기어올라왔다. 시궁창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적나라한 밑바닥부터 올라왔다. 그렇게 조직에 몸을 담고,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정당당하게 상대방을 때려눕혀가며 그는 그렇게 위를 향해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밤거리, 라고 하기에는 네온싸인과 온갖 간판들이 사위를 밝히고 있어서 올려다본 하늘 조차 밤하늘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거의 다피운 담배를 땅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 꺼버린뒤 그는 천천히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마지막 자리, 그것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장 구석의 자리가 있었다.

"여기, 라거불린 한잔."

분명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이런 시대에 무슨 라거불린(몰트 위스키의 한 종류)이냐고 말하겠지만, 어차피 술보다는 분위기를 마시는 걸 좋아하는 자신으로선 이정도가 충분했다. 그는 그렇게 의자의 등받이에 자신의 몸을 푹 파묻은 채 천천히 호박색의 액체가 얼음이 든 잔을 물들여가는 것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지금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까, 유일하게 사람이 빈 테이블이 여기밖에 없었고, 지금은 자신또한 조직을 상징하는 뱃지를 안 달고 있어 건달이라는 증거를 안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539 이름 없음 (0wHPeNd7H.)

2021-06-09 (水) 23:51:54

>>538
취기와 담배연기로 물든 밤거리는 한때 그녀가 가장 경멸하던 장소였다. 밑바닥을 드러낸 인생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 이 때가 되면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잠조차 이루지 못 할 때가 있었다. 자신을 낳은 이들에게 한없는 증오를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옛 일, 옛말이 된지 오래다. 지금은 그 거리의 정상 중 한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유일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유약하지도 않은 여제로써.

실상이 그러한 그녀는 지금 혼자였다. 거리에 들어설 때도, 가게에 들어설 때도.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몇몇 이가 그녀를 흘끔거렸다. 증표는 없으나 어느 조직의 간부쯤 되어보이는 차림, 서늘하다못해 얼어붙은 눈빛에 알아서 수그러들 이는 수그러들고 그럼에도 눈을 빛내는 이도 있으나,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가 유일하게 자리가 빈 테이블로 다가갔다.

"실례하지."

그가 홀로 차지하고 있던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가 던진 말은 고작 그것이 다였다.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하다. 낡았지만 앉는 감은 좋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주문을 받으러 온 이에게 싱글 몰트 위스키의 한 종류를 주문한다. 그런 다음 가볍게 팔짱을 끼고 낮게 숨을 내쉰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540 이름 없음 (W2wU45mpaA)

2021-06-10 (거의 끝나감) 07:43:26

>>539

"....?"

시끌시끌한 그 분위기를 눈을 감은채 조용히 느끼던 찰나, 누군가가 자신이 앉은 테이블에 앉아 주문하는 것을 느꼈대. 이미 이곳의 단골이었던 자신이었기에 웨이터가 양해를 해줄거라 생각했지만 웨이터의 곤란한 눈빛을 보아하니 아마 웨이터 선에선 절대 정리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걸 눈치 채고는 호빅빛 잔을 들어올려 한모금 넘긴뒤 잠시간의 침묵을 지켰다.
이미 조직에 몸을 담근지 어언 10년, 이미 30대가 되어가는 몸이었지만 현 동부 지역 최고의 단체라 알려진 류도회 2차 단체의 서열 2위라면 젊은 나이에 수라장을 거쳐온 거라 자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만의 독자적인 파벌을 가지기엔 관록이 부족했지만, 글쎄, 본인은 그런쪽에 욕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여인은 자신이 봐도 위험해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범접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용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고, 한마리 봉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성으로서는 대단한 기백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느꼈다.

"대단하신 분이군."

자신의 등에 새겨진 백룡의 문신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말했었지, 새겨진 문신은 그 주인의 운명을 점치는 것이고, 그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고, 그렇게 그는 천천히 용으로 탈바꿈 해가는 중이었다. 과연 자신의 눈앞의 이 여인도 자신과 마찬가지인 것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자 왔는가?"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진짜 의미로 동행하는 자가 없었다고 묻는 것 뿐.

541 이름 없음 (HKF7nsLiB2)

2021-06-10 (거의 끝나감) 16:28:09

>>540
본의 아니게 합석을 해버렸긴 하나, 그렇다고 정답게 환담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상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피차 그러려고 이런 구석진 술집의 구석진 자리에 앉은 것이지 않은가. 그녀는 자리에 앉을 적과 주문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말만 하고 그 뒤로는 입을 다물었다. 눈 역시 감는 것과 비슷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었으나... 짧게 들린 목소리에 시선이 소리없이 그에게로 향한다. 그제서야 그의 행색, 기백을 살피듯 천천히 훑어보았다.

"......"

그녀의 눈에 보이는 그는 아직 이름을 떨치기에는 멀어보였다. 기껏해야 산하 조직의 서열 상위쯤 될까. 은연중에 보이는 기량이 나쁘지는 않으니 헛짓거리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와 동등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만.

재차 이어진 말은 듣기에 따라 무수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의 의도를 캐어보기라도 할 듯 그녀의 눈이 얇게 가늘어졌다가, 불순한 의도는 아님을 깨닫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엷은 금빛 술이 담긴 잔을 들어 입술에 가장자리를 대고 약간 기울였다. 단호히 다물려 있던 입술 사이로 약간의 술을 흘려넘긴 뒤, 잔을 든 채로 짧게 답했다.

"보다시피."

그녀쯤 되는 이가 혼자 다닐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이 가게에 들어올 적엔 혼자였으니 아주 아닌 말도 아니었다. 손에 든 잔을 느릿하게 기울이자 각진 얼음들이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그녀는 서서히 얼음이 녹아 술에 스며들어가는 것을 보며 혼잣말에 가깝게 읊조렸다.

"어느 자리에 있건 숨 돌릴 틈은 필요한 법이지."

그렇지 않나, 라는 반문 없이, 손을 움직여 희석시킨 술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이 닿고 떨어진 잔에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칙칙한 조명 아래 연하게 비추어졌다.

542 이름 없음 (gB.lG9e2V.)

2021-06-10 (거의 끝나감) 22:45:24

>>541

술잔에 흐르는 문답을 따라 그는 무언의 긍정을 하듯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라거불릿 특유의 요오드향 속 꽃향기에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자태와 다르게 전혀 밀리지 않는 기백의 모습을 보며 그는 조용히 조장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류도회가 유일하게 관동에서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이 거리다. 여제가 버티고 있는 이 도시가 우리의 마지막 관문이지."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 그런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건달은 변해가고 있었다. 더이상 의와 협으로 약자들을 버호하지 않고 돈과 권력에 취해서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춘기의 동경은 결국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백룡을 만들어 냈지만 그 백룡이 내려다본 풍경은 전혀 자신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쓴 것일까. 다시 한모금 들이킨 술이 너무나도 달게 느껴졌다.
그 순간, 주변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그는 천천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수작인 걸까, 라고 생각하기엔 상대나 자신이나 정체를 몰랐기에 가능성은 낮다고 본 것일까. 그리고 설사 상대가 여제더라도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더욱 낮다고 여긴 그였다.

"아무래도 둘 다 미움을 많이 받는건가."

그는 그렇게 술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통성명이 늦었군, 아키야마 미네라고 한다. 별볼일 없는 건달이지."

//퇴근 하고서 이제야 봤네요

참고로 2차단체 서열 2위면 대기업으로 따졌을때 계열사 전무급입니다! 여제에겐 많이 딸리지만 나름 꽤 높은 직ㅇ읍읍

543 이름 없음 (HKF7nsLiB2)

2021-06-10 (거의 끝나감) 23:46:48

>>542
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한창일 때 그녀는 느긋히 술을 즐기기만 했다. 숨 돌릴 틈, 이라고 앞서 말했듯이, 잠깐 쉬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까지 피곤한 일을 벌릴 마음은 없었다. 서로의 상황을 이해했다면 이대로 각자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녀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상대 쪽에서도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으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제 3자에게는 이 자리가 몹시도 불편히 보였던 것일까. 살기를 느끼고 시선을 돌린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졌던 듯한 방향을 향해 잠깐 눈을 굴렸다 되돌릴 뿐이었다. 호들갑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미숙한 행동은 일부러가 아닌 이상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저 어디쯤에서 살기가 날아온지나 확인하고, 그녀 역시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미움이야 그렇다 쳐도, 통성명이라.

"시라유키 코하네. 그저 그런 사업가야."

먼저 통성명을 해오는데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그녀도 스스로를 그저 그런 사업가라 칭하며 이름을 댔다. 실제로 사업을 하고 있었으니 이것 역시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이름 역시 본명이었다. 기껏 정체를 숨겨가며 와놓고 본명을 그대로 대는 것은 아니러니하지 않나 싶지만, 그의 분위기상 그녀의 이름이 이 거리의 여제라는 것을 알아도 즉각 행동을 취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믿었다기보다 그녀의 안목을 믿은 선택이었다.

"사업가와 건달의 공통점이 미움을 많이 받는 직업이라는게 우습군. 그렇지 않나?"

그녀는 그가 했던 말에 둘의 대답을 섞어 그렇게 말했다. 둘의 직업이 다른데 둘 다 미움을 많이 받는 듯 하니 그것이 곧 공통점이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이. 딱 그정도 생각만 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자질구레한 말 없이 가볍게 다리를 꼬고 그 위에 손을 포개 얹은 채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오호... 약간 용과 같이 느낌인데 내가 생각한게 맞으려나?

544 이름 없음 (rH/MCFnrvs)

2021-06-11 (불탄다..!) 00:00:43

낮이 길어진 시기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마련이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속으로 품는 어둠이 깔린 밤 시간이었다. 허나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땅에 설치되어있는 가로등 불빛과 함께 잔잔한 빛을 아래로 내렸다. 달빛이 비추는 건, 작은 공터에서 목을 가다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 아, 아. 소리를 내며 소년은 목을 가다듬었다.

곧 소년의 목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멜로디를 만들었다. 누군가가 들으라고 내는 노래는 아니었다. 순전히 자기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에 흠뻑 빠져 소년은 절로 눈을 감았다. 잔잔한 바람을 담은 멜로디는 여름의 시원한 파도를 노래했다.

언제나 이 시간이 되면 소년은 이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달빛을 스포트라이트 삼고, 근처를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벌래나 고양이를 관중 삼아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소년의 입가에는 절대 꺼지지 않을 달빛같은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노랫소리는 조용히 주변으로 퍼졌고, 어둠은 소년의 멜로디를 부드럽게 감쌌다. 더욱 멀리 퍼져나갈 수 있도록 살며시 밀어주며.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울릴지라도, 아마 소년은 쉽사리 그 발소리의 주인공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가볍게 시골 공터 같은 곳에서 밤에 노래를 부르는 선레 상황이야! 소년을 아는 이도 좋고, 모르는 이도 좋고, 하물며 인간이 아닌 존재라도 상관없어. 다만 배경이 공터인만큼 집에서 잠자는데 방해된다고 항의를 하러 온다거나, 막 꼽주는 그런 것은 사절이야.

그 외에는 어떤 전개라도 괜찮아!

545 이름 없음 (6SDusjC6pU)

2021-06-11 (불탄다..!) 00:18:44

>>543

"사업가, 라."

절대로 평범한 사업가는 아닌거 같지만 말이야, 라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남겨둔채 그는 조용히 술을 마셨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목숨을 노리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언제 총을 맞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시대였으니까. 우스운 일이었다. 언제 총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그런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시대라니, 그는 남아있는 술을 한모금 남긴채 가만히 살기를 넘겼다.
이미 이 자리는 두 사람의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어차피 살기라고 해봤자 그들이 할 수 있는것은 지금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는 부딪힐 두 단체의 기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이 그 때는 아니었으니까, 때이른 폭팔은 언제나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미네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시대라면 이상할 것도 없지."

돈이 돈을 먹어치우고 사람을 먹어치운다. 비뚤어진 욕망이 가득 부풀어오른 이 시대야 말로 괴물 천지를 만든 원흉이라, 용은 가만히 상대를 응시 하였다. 밤하늘을 덮어오르듯 날아올랐지만 결국 남아 있는것은 욕망에 뒤덮힌 풍경뿐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드러낸 시점부터 해를 가할 의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문채 불을 지피고는 가만히 여인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결국 건달은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고, 사업가는 돈으로 누군가를 누르니까, 미움 받는 시대라는 것은 변함없겠지. 앞으로도 그럴테고."

류도회 직계 대하일가 서열 2위 아키야마 미네, 일기당천의 남자, 건달 세계서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그저 시대에 휘둘리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용과같이 같은 분위기로 굴려보고 싶어서 쓴거거든요 :)

546 이름 없음 (2hpuffWWkU)

2021-06-11 (불탄다..!) 08:26:08

>>544
낮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식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그는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가볍게 달리고 있었다. 뙤약볕 아래일 지라도, 구슬땀을 흘리며 한계를 시험하듯 달리다 시원한 물을 들이키는 것이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큰 재미였지만, 자기 전에 한번 이렇게 몸을 풀듯이 달려주고 나면 개운하고 잠도 잘 오기에 전학으로 인해 이사를 와서도 꾸준히 밤산책을 나오곤 했다. 늦은 시간이니만큼 취객을 보기도 하고, 차라리 묶는 게 낫다는 이유로 긴 머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불쾌한 경험을 할 뻔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슬기롭게 해쳐나가왔기에 밤산책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한참 달리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 노래? 아, 뭐 근처에 주택가도 없으니 나쁘지 않은 장소 선정이네. 이런 시간에 코노는 좀 무섭겠고. 비는 날엔 나도 기타 가지고 나와야지. 그렇게 지나치려던 그는, 제법 자신의 취향에 맞는 청량감있는 목소리에 괜히 땅을 앞꿈치로 콕콕 찍으며 고민했다. 기척만 안 내면 되니까 구경이라도 갔다와 볼까. 결국 그는 살금살금 걸어 노랫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걸어가보니, 그 곳에는 전학온 뒤 같은 반이 된 남자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 친구였구나. 몰랐는데 노래 잘 하네? 연예인 하려는 애 아니면 보통 공개적으로 노래 안 부르니까. 남자애랑 노래방을 간다면 운동회 뒤풀이 같은 걸텐데 운동회도 아직 남았고. 그렇게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자니, 노래가 끝나갔다. 이제 갈까, 좀 멀리 왔기도 하고, 더 시간 때우다간 늦잠 자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나려던 순간, 파직, 하는 파열음이 제법 크게 울리며 정적을 깼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그의 발에 밟혀 부러진 것이어다. 급히 숨고자 주변을 둘러봤으나, 광활한 공터에는 여학우들 중에서도 훤칠한 키를 가진 그가 몸을 숨길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숨어서 특기인 고양이 울음소리로 위기를 모면하는 건 글렀으니 신속하게 튀자고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노래하던 그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쳐버린 것은.

// 대강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도시 출신 동급생 체육계 여캐로 이어봤어. 남캐 나이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제시해주는 거에 맞출게:) 이름 정도는 아는 사이지만 친하지는 않은 정도로 생각하고 이었는데 달리 원하는 관계가 있으면 말해줘:)

547 이름 없음 (rH/MCFnrvs)

2021-06-11 (불탄다..!) 19:24:51

>>546

파직하는 파열음에 그는 순간적으로 노래를 멈췄다. 야생 고양이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소년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곧 눈이 마주치는 이가 있었다. 자신과 같은 반인 여학생의 모습이 소년의 눈에 들어왔고 소년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면서 먼저 인사했다.

"안녕. 좋은 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근처에 주택이 없는만큼 어둠이 깔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는 이의 모습은 드물었다. 하물며 도시에서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가 여기까지 올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기에 소년은 궁금증이 들었는지 두 눈에 여학생을 담으며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튼 들었어?"

딱히 추궁하는 목소리 톤은 아니었다. 그냥 여기에 있었으니 노래를 들었냐는 작은 궁금증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기서만큼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숨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환경적 요소를 감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평 들어볼 수 있을까? 그냥 궁금해서."

/딱 원하는 관계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이 선레로 자유롭게 누군가와 상황극을 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남캐 나이는 그냥 고등학생 쪽을 생각하면서 썼어! 한창 청춘을 즐길 그런 나이!

548 이름 없음 (SPG3Ihvoq2)

2021-06-12 (파란날) 01:56:38

>>547 "...어, 안녕. 나 밤마다 조깅하거든. 지나가다가 노랫소리 들리길래."

저 친구 원래부터 저렇게 붙임성이 좋았나? 아니 뭐 쪽팔려하는 거보단 낫긴 한데, 의외라면 의외네. 나라면 노래 부르다가 들키면 좀 수치사할 것 같은데. 그래, 뭐 쪽팔려하지 않음 된거지. 경직되었던 몸을 풀려던 찰나, 들었냐는 물음에 그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왜 내가 부끄럽지? 디즈니 영화를 현장 라이브로 보면 이런 느낌인가? 그거 생각나네, MR 제거하고 목소리랑 생활 소음만 남겨서 듣기 좋은데 되게 뻘하게 만든 거.

"아, 어... 들었지. 잘 부르더라? 나 저기서 지나가고 있는데도 또렷하게 들리더라고. 너 노래 부르는 건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좀 놀랐어. 뭐... 노래 이전에 대화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긴 한데."

출석부를 통해 이름은 외우고 오다가다 인사만 했지만 그 뿐, 이렇게 대화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진짜 핵인싸가 아닌 이상 남자애와 대화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잖아. 보통 끼리끼리 놀고. 그래서 더 어색한 것 같은데, 이 어색함, 어떻게든 해보자. 그는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아, 아까 그 노래 있잖아. 나도 좋아해. 그 노래 부른 가수를 좋아하기도 하고. 내는 노래가 다 자극적이지 않고 서정적인데 느낌이 다 달라서 취향껏 플리 만들어놓고 골백번 반복재생해도 안 질리더라고. 너도 그 가수 좋아해?"

549 이름 없음 (EzB4C8RvTg)

2021-06-12 (파란날) 07:53:48

>>548

"그렇다고 무시할 순 없잖아? 그냥 손만 흔들고 보내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상황인 것 같은데?"

대화를 처음 하건 나중에 하건 소년에게 있어선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냥 이번 기회에 말을 걸면 되는 거고, 대화를 나누면 되는 거니까. 물론 상대는 상당히 어색해하는 것 같긴 했기에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걸까 생각을 잠시 하나 비추는 것은 뻔뻔한 웃음이었다.

"지나가고 있는데 다 들릴 정도라니. 너무 크게 불렀나? 아무튼 나도 좋아해. 그래서 이렇게 부르는거야. 물론 자작곡을 더 많이 부르지만 오늘따라 그 가수의 노래가 괜히 부르고 싶더라."

헛기침을 하는 여학생을 바라보며 소년은 돌아온 물음에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입으로 멜로디만 내면서 좋아하는 것을 어필하듯 보였다. 그 멜로디조차 크게 흔들리지 않고 맑은 음색이었기에 소년이 꽤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밤마다 한다는 그 조깅 루트에 혹시 이 근방도 들어가? 만약 그렇다면 밤에 이렇게 한번씩 볼 수도 있겠네. 매일은 아니더라도 보통 이 시간대에 오거든. 난."

550 이름 없음 (SPG3Ihvoq2)

2021-06-12 (파란날) 10:16:21

>>549 "그런가? 그건 뭐 그거대로 뻘할 수도 있겠네."

미안, 난 아싸라서 잘 모르겠어. 큰 이변이 없으면 너랑 대화할 기회가 학기중에 있을 지 없을 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라는 말은 삼킨 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붙임성 있는 애 입장에선 그게 더 뻘할 수도 있지.

"아, 시끄럽다는 뜻은 아니고 발성이랑 딕션이 좋았다는 뜻이야. 노래 들을 때 시원시원하거나 가사전달력이 좋으면 좋아해서. ...아, 하긴 여름에 주로 많이 생각나지, 그 양반 노래. 나는 그 노래도 좋더라, 나이트 브리즈. 멜로디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그게 내 원픽이야. 기타로 칠 수 있는 유일한 곡이기도 하고."

자작곡도 있어? 음악 쪽으로 열정이 대단한가보네. 궁금은 한데 첫 대화에 자작곡까지 들려달라 하는 건 좀 투머치니까 굳이 물어보진 말자. 그나저나 그 양반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같은 반에 아는 녀석이 있다니 좀 기분 좋네. 같은 덕후를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워서일까? 긴장감에 다소 경직되어있던 얼굴이 슬며시 부드러워진 줄도 모른 채, 그는 이어진 질문에 대답했다.

"여기까지 와본 건 처음이긴 한데, 아마도? ...뭐, 싫지 않다면 학교에서든 여기서든 만나면 인사하고 지내자. 나 그 양반 노래 좋아하는 사람 오프라인으로는 처음 만나서 되게 반갑거든."

551 이름 없음 (EzB4C8RvTg)

2021-06-12 (파란날) 10:24:20

>>550

"매일매일 노래하는 보람이 있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지만 아무튼 고마워. 주변 친구들의 평보다는 이렇게 처음 듣는 이의 평이 제일 확실하다고 생각하거든. 친구들의 평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친하면 뭔가 조금 말을 돌릴 수도 있고 그렇잖아? 아. 넌 기타 칠 수 있어? 대단하네. 나는 노래는 자신 있어도 악기는 잘 못 다루거든."

그래서 이렇게 노래만 부를 뿐이라고 얘기하며 소년은 대단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바이올린이건 피아노건 기타건, 노래라면 모를까. 악기는 정말로 약한 탓이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시도했다가 박자도 꼬이고 멜로디도 이상하게 나왔다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괜히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경직된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소년 역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후 나오는 제안에 대해서 소년은 거절할 이유가 있나 싶어 바로 대답했다.

"싫을리가 있겠어? 같은 반인데 굳이 모르는 척 하고 지내는 것도 이상한 것 같은데. 전학 왔으니까 대화할 계기가 없어서 어색하게 지내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렇게 계기가 생기면 얼마든지 인사하고 지내면 되지. 나도 환영이야. 아. 괜찮다면 다음에 기타 치는 거 들려줄 수 있을까?"

역시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이 생기고 호기심이 생겼는지 소년은 여학생에게 그렇게 질문했다. 물론 곤란하다면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552 이름 없음 (6SIG/gDEwQ)

2021-06-12 (파란날) 12:15:56

>>537

잠시 동안 침묵이 연장된다. 소리가 부재한 공기 중에 흐르는 건 긴장감일까? 그러나 아무 말도 없이 당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소년은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이내 입을 연다.

“좋아.”

졸음이 덜 가신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조금 날카로운 듯한 눈매와는 달리 태연하다 못해 멍해보이는 표정을 하고도 소년은 선선히 대답해버린다. 이제와서 남학교에 나타난 소녀의 유령 쯤이야, 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하다. 책상에 엎드린 자세로 잠든 바람에 몸이 굳기는 굳었는지 다시 한 번 스트레칭을 하듯 몸을 움직이며, 소년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는 무용실이 없거든.”

듣고나서 능력 닿는 한 도와줄테니, 자세하게 차근차근 이야기해봐.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거기에 달려있고.

“그래도 이젠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까.”


/늦어서 미안…! 주중이 너무 바빴어…!

553 이름 없음 (b84e9ohhzs)

2021-06-12 (파란날) 22:29:08

" 이야, 결국 이렇게 되었나요?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고. "

능구렁이같이 휘어진 눈웃음, 그리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꼭 재밌다는듯한 어투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나 내뿜는 살기는 이미 주변을 에워싼 놈들 중 피라미 몇놈을 실신시킬정도였다.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내어 입가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길게 한숨과 함께 연기를 흩뱉으며 휘었던 눈을 가벼이 뜨며, 새빨간 눈동자를 드러내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아래에서 그녀는 그렇게 웃었다.

" 근데, 진짜 궁금한게 있는데 왜 저같은 무고한 소녀에게 이리도 많은 군세를 이끌고 찾아오셨나요? 설마, 단체로 저에게 이런저런 야한짓을 할 생각이신가요? 꺄아, 파렴치한 짐승이네요. "

연극의 독백을 뱉듯, 틀에 박힌 농담을 던진다. 두 손으로 뺨을 움켜쥐고, 부끄럽다는듯 발그레 볼을 붉히는 모습과,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살기가 뒤얽혀 이질적인 형상을 자아낸다. 군세중 한명이 닥치라며 욕을 뱉어내기 시작하자, 재미없다는듯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무심한, 아니. 너무나 차가워서, 이 세상 그 어느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표정이 너무나 어울려서, 마치 이게 진짜 그녀의 얼굴인것처럼.

" 시시해라. 재미 없네요. "

그리고 그녀는 말을 마치고, 목까지 덮인 드레스의 목부분을 뜯어내었다. 새하얀 뱀이 길게 새겨진 타투가 목부터 가슴까지, 그 존재를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혀를 길게 내밀고는, 조금은 즐거워졌다는듯 웃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움직여, 한 남자 앞에 코가 닿을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빙긋 웃었다. 쉿, 단말마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오른손 검지를 녀석의 목에 깊숙히 찔러넣었고, 그런식으로 순식간에 일곱을 해치웠다. 그녀의 손 끝에선 보라색 액체가 뚝 뚝 흐르고 있었다.

" 송곳니, 하나. 맹독. "

금술로 지정되어, 계승이 끊겼다던 전투형 암살술을 그녀는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군세가 곧 정신을 차리고 일순간에 그녀를 에워싸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벌려라, 집어삼켜라. 결국엔 너 자신조차 집어삼킬때까지. 꼬리 셋, 우로보로스. 그녀의 발 끝에서 일순간 방울소리가 들렸고, 아주 낮게 자세를 숙여 제 주위에 원을 그리듯 발을 돌려찼다. 거대한 충격파로 무리가 우후죽순 나가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두 손을 움켜쥐고,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크게 벌렸다. 뱀의 아가리처럼.

" 히드라. "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자 곧 그녀의 앞으로 거대한 뱀이 솟구쳐올라, 밀집되었던 군세속 일직선의 길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너와 눈이 마주쳤다.

" 금방 키스해줄테니 기다려. "

554 이름 없음 (eCAfg5YHZs)

2021-06-12 (파란날) 23:46:28

이제 날 풀어줘.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죽여달라는 거 다 죽였고, 도와달라는 대로 다 도와줬어. 부탁이야. 이런 씁슬한 가족놀이는 그만둬. (눈가에 안대를 찬 반나체의 남성이, 고통에 몸을 떤다. 등에 달린 커다란 검은 날개는 물론, 온 몸은 흉터투성이다.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555 이름 없음 (TllIRoL2cc)

2021-06-13 (내일 월요일) 00:31:13

>>554
ㅡ자기야, (나즉한 목소리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고압적인 태도가 묻어난다. 당연하다. 이 사람은 온 평생을 군림하는 위치에서 살았으니.) 이 모든 게 단순한 가족 '놀이'라고 생각했어? (표백된 것처럼 감정이라곤 알 수 없는 얼굴로 작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은 당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췄다.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 한다. 지극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다. 희미한 혈향이, 지울 수 없는 쇠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더할 나위 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당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갈 곳은 있니?)

556 이름 없음 (vIyJVaIVbw)

2021-06-13 (내일 월요일) 00:50:24

>>555
(당신의 목소리가 스며들 때마다, 심장이 미칠듯이 요동친다. 살얼음판을 기는 듯한 뱀의 목소리, 그리고 다정하고 따듯한 손길. 무릎이 꿇려진 채로, 천천히 고개가 떨어진다. 미처 참지 못한 숨이 간헐적인 헐떡임으로 튀어나온다. 날개가 천천히 오므라들고,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든다.) 내가 도망치면...또 내 주변 사람들을 죽일 거잖아. (내가 혼자 남을 때까지, 아니, 당신과 단 둘이 될 때까지 죽음의 무도는 멈추지 않겠지. 입은 꾹 다문 채지만 볼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입가에 스며든다.) 살려줘. 나만 죽여도 되니까. 죽여줘. 풀어줘. (겹쳐지지 않는 절박한 소원들이 엉망진창으로 내뱉어진다.)

557 이름 없음 (kqdmRuSpgw)

2021-06-13 (내일 월요일) 01:02:47

>>556
저런, (엉망이 된 당신과는 달리 참으로 단정한 목소리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유감이라곤 없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흐리게나마 있었던 웃음 소리마저 사라졌다. 적막이다. 그럼에도 당신을 매만지는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다. 상냥하다. 여성은 제 앞의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여리고 유약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이 바닥의 특성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자기를 감싸고 돈 건 나니까 탓할 사람도 없지만ㅡ, 이렇게 망가질 줄 알았다면 적당히 알려줄 걸 그랬나 싶네. (한참 후에야 혼잣말을 하듯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558 이름 없음 (P1pbYTcz2k)

2021-06-13 (내일 월요일) 01:09:57

>>553

이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천천히 가죽 자켓을 어루 만지며 걸음을 옮긴다. 다른 이들이 부화뇌동을 하던 간에 그는 상관 없다는 듯이 천천히 한발자국씩 걸음을 내딛었다. 처음의 목적은 오직 혼자서 결판을 지으려고 한 것이건만 또 다시 헛된 목숨들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시선을 내려다보자 자신을 따르던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혈혈단신으로 어둠에 발을 딛었고, 아무것도 쥐지 못한 맨 주먹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이긴다는 각오보다는 무언가를 위해 힘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어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남들과 엮이지 않고 살아가며 남들을 돕겠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가짐이었지만 그 마음을 보고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은 채 올곧게 나아갔다. 틀린 마음이라고 비방해도 괜찮았다. 길은 개척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모두 비키거라."
-"형님?"
"어차피 내가 스스로 승부를 내겠다고 결심한 길이었다. 너희는 돌아가야 한다."
-"안됩니다! 몸을 피하셔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뒤로 밀쳐내었다. 동시에 자욱하게 풍겨져나오는 독기와 뱀의 형상이 여인과 자신을 일직선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굳은 표정과 더불어 주변의 공포 섞인 시선은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만용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섬기는 남자를 믿고 싶었다. 항상 자신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잘못을 한다면 바로잡아주며, 때로는 아버지와 같이, 때로는 형과 같이 그들을 지켜주고 손을 맞잡아준 이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모습에 쏟아졌고, 남자는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될 수 있다면 물러서고 싶다."

그 말에 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그리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념이 흔들리는 첫 순간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나를 따르는 너희에게서 등을 돌리고 싶지 않다. 너희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살아라! 여지껏 우리가 살아가던 방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한마디에 장내의 모든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언의 외침이 울려퍼지고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또 살아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서둘러 그들을 등에 업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 모습을 뒤로 한채 주먹을 움켜 쥐었고, 자신의 상체를 찢어버리듯 벗어 던짐과 동시에 사이한 것으로부터 서방을 수호하는 수호신, 백호의 문신이 드러나보였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기꺼이 바칠 수 있지."

그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동시에 장내를 압도하는 거대한 기운이 천천히 솟아 올랐다.

"와라!"

559 이름 없음 (4xeHFIzAmQ)

2021-06-13 (내일 월요일) 09:25:20

>>558

" 흐응, 기대 이하로 시시하네요. 살라고 했다가, 목숨쯤은 기꺼이 버릴수도 있다고 하고. 아, 혹시 그건가요? 나는 죽어도 내 신념은 죽지 않아~ 날 기억해주는 동료가 있다면 난 그녀석의 가슴 안에 살아가는거야~ 아하하하, 그게 뭐에요. 창피하지도 않나요? "

좀, 수치감이라는게 없는건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길게 웃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어,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살아남은 놈들은 부상자를 업고 후퇴하기 시작하고, 네가 상체를 찢어버릴듯 옷을 벗어던진다. 솟아오르는 거대한 기운.

" 설마 이 가녀린 소녀에게 진심으로 덤벼들 생각이신가요? 그 흉악한 몸으로. 우리의 우정은 무엇이었나요? 저만 당신에게 연심을 품고있었던걸까요? 하긴, 저같이 더러운 몸을 가진 여자에겐 너무 많은 바램이었겠죠. 당신이 이곳에 목숨을 걸고 서있는 이유가 있듯이, 제게도 이유가 있답니다. 어릴적부터 가난했던 저는 아버지에 의해 팔려, 매일매일 입에 담기도 역겨운 짓을 당하며 살아남았답니다. 그래서 그거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해요,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극인가요? 그렇죠? "

지금이라도 용서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그냥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전부 윗선에서 시킨 일이에요, 지금이라도 개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요. 그녀는 긴 독백을 뱉어내듯, 과장된 몸짓과 격양된 톤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 전부 거짓말이긴 하지만. "

그녀가 혀를 길게 내밀었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보자. 상냥한 위로를 건네어, 천사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내뱉는 숨결속, 죽음의 향기만 숨길수 없음에.

맹독, 흑사.

그녀가 길게 검은 숨을 내뱉었다. 자욱하게 독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아주 낮게, 아주 낮게. 바닥에 붙어선 곧 놀라운 유연성으로 튀어올랐다. 꼬리 둘, 용오름. 거꾸로 뒤집어져, 순식간에 다른 남자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달콤한 송곳니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또 다시 뛰어올라,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 살아남고 싶었을텐데.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을텐데. 전부 네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

자욱한 안개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너와 마주했다. 뚜벅거리며 걸어와선 널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 교만한 혀, 날카로운 송곳니, 흐르는 맹독. 혈관을 타고 걸쭉한 피를 들이킴에, 나 여기에 너를 지켜본다. 송곳니 둘, 악독. "

키스해준다고 말했잖아. 춤을 추자, 전부 불타버릴때까지. 달콤한 맹독의 향에 이끌려 잠식될때까지. 나는 날카롭게 네게 달려들었다. 두 손가락의 끝에서 새카만 맹독이 뚝뚝 흘러, 닿는 바닥을 녹여버릴 즈음에야. 거칠게 오른손으로 네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드시 찔러버릴 생각으로.

560 이름 없음 (X2YN7CrIyE)

2021-06-13 (내일 월요일) 10:01:10

>>559

그것은 낡아빠진 긍지였다.

"그들은 단순한 머릿수가 아니니까."

폐부 깊숙히 숨을 들이킨다. 독기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정도 독기는 아직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기나긴 독백을 모두 들어주면서도 그는 천천히 자신을 궁지에 내몰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퍼지지만 그는 부동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과 지냈던 시간의 대다수는 자신의 거짓일 수 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말에 긍정한,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지들이었다. 이 수렁을 밑에서 부터 바꿔보자고 맹세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도 너에게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최소한 너희에게 있었던 모든건 거짓이라는거."

전부 거짓말,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제외하고 너희와 지냈던 모든 시간은 거짓이었다. 가장 맨먼저 너희 앞에서 힘을 보이고 나섰던 것도, 그리고 계속해 너희와 함께 여러가지 일을 동조해온 것도 모두! 전부! 거짓이었다! 그는 그렇게 되뇌이며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의 참상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죽어가던 놈들은 뭐가 그리 걱정이 된 것인지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천애고아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놈들, 부모에게 얻어터지는 그런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렁에 빠진 놈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끝까지 걱정한 것은 자신들과 어깨를 부딛히며 술잔을 나눈 형제들의 모습이었다.

"약속했다, 난 너희에게 내 삶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마치 암습을 당하는 걸 모르는 호랑이 마냥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스스로 심장을 가져다 대는, 마치 자살을 희망하는 모습이었다.

"격렬한 분노, 흔들리지 않는 의지, 결속되어지는 사슬, 모든 것은 나의 몸을 감싸는 갑옷이요, 무기일지니."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서방을 수호하는 수호신 백호,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는 금(金), 백호의 문신을 이어받은 그가 선대에게 이어받은 금술 또한 금속에 관련된 것이었다. 순식간에 피부와 동화되어가는 단단한 금속의 형체는 그의 전신을 감싸갔다. 여지껏 보지 못한 금속은 독기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해가기 시작했고, 단단한 매개체와 달리 가벼운 그 느낌은 금속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동성을 부여하였다.

-콰앙!!

그녀의 손이 가슴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살과 강철이 부딪혔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광폭한 소리였다. 그녀의 공격이 성공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반쯤이라도 증명하듯 그의 가슴을 감싸고 있던 금속의 갑주는 독기에 관통되고 부식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에게는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는 듯이 그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순식간에 그의 오른 손은 그녀의 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초 근거리에서 건틀릿과도 같이 강철에 단단히 쌓여진 주먹은 그가 여지껏 단련한 것 만큼 쾌속하지만 무겁고 강렬한 공격이었다.

561 이름 없음 (4xeHFIzAmQ)

2021-06-13 (내일 월요일) 10:35:29

>>560

" 단순한 머릿수가 아니라구요? 이렇게 쉽게 쓰러지고, 무참히 짓밟히는데... 죄책감도 없나요? 당신이, 뱀의 아가리속으로 자그마한 병아리들을 들이민거나 다를바가 없다구요. "

위선자. 그녀는 나지막히 그리 뱉었다. 그리고 네가 깊숙히 숨을 들이키는걸 새빨간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맹독의 첫번째라고는 해도, 이름 그대로 맹독이었다.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알수 있을터다. 검은 연기를 들이킨 저들은 속수무책으로, 각혈하며 죽어갔고. 몇몇은 끔찍하게 독이 들어 죽기만을 기다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움찔거리고 있었다. 네가 부동을 유지하고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아무것도. "

그녀가 네 귓가에 속삭였다. 스스로 심장을 가져다대다니, 그게 뭐야. 자살이라도 할 셈인가?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여전히 속고 속이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백호의 금술.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곧이어 내 손가락이 네 가슴에 크게 부딛치고, 격렬한 폭음을 내질렀다. 욱씬거리는 통증이 손가락에서부터 뇌 안쪽까지 격렬하게 터지고있었다. 네 금속은 꿰뚫리고 부식되어갔지만, 그래. 네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다. 네가 날 가만히 내려다본다.

" 왜, 설마 정말로 키 "

펑.

금속과 살이 부딛쳤다, 라는 의성어로는 묘사하기 힘든 단어였다. 격렬한 폭탄이 터지는것과도 같은 굉음이, 세차게 귓가를 때렸으니까. 일순간 시야가 암흑으로 변했다. 아주 짧은, 만분의 일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정신을 잃었고, 격렬하게 부딛치는 뇌는 극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시쳇더미속에서 뚝, 뚝 피를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턱이 반쯤 분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널 노려보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손을 뻗어, 시체를 마구잡이로 쑤시다가 곧이어 손에서 새하얀 독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제 턱에 발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상처가 나았다. 빙긋, 여전한 미소를 띄웠다.

" 정말로 가련한 소녀에게 전력으로 펀치를 날릴줄은 몰랐네요. 진짜 거짓말이었나봐요~ 쌓아왔던 우정도, 같이 여행했던 긴 시간도,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모험과 경험조차도 말이죠. "

아? 그러고보니 말하는걸 까먹었네요. 전선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회복약을 조달하던거. 그거, 우리가 죽였던 이들의 피로 만든 내 백독인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재밌다는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여전한 조롱, 그리고 연극과도 같은 행동들.

" 송곳니 셋, 극독. "

약지까지 타고 흐르는 독은 선혈과도 같은 붉은색이었다. 여흥은 여기까지 할까. 그녀가 거세게 발을 구르고 널 향해 달려들었다.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가, 낮게 뛰어 배를 보이듯 뒤집은 상태로 우아하게 웃었다. 뱀은, 무릇 그 송곳니를 주의하기 십상이지만, 그 자체로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고, 일순간에 자세를 다시금 낮추어 네 발목을 다리로 잡아꼬려했다. 감히 교만하게 날 내려다보지마. 내 영역으로 끌어내려줄게.

562 이름 없음 (t49AzYE/Zs)

2021-06-13 (내일 월요일) 11:16:35

>>561

"그래, 불쌍한 아이들이지..... 불쌍한 아이들이야....."

그 한마디만 되뇌인다. 세상에서 사랑받지도 못하고 또 사랑할 줄도 몰라왔던 아이들이 아니던가, 그렇게 그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혼탁한 밑바닥을 천천히 씻어나가고자 하였다. 그렇게 세를 불려나갔고 동참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것이 지금 2만 5천에 가깝게 되었다. 자신의 멍청한 생각을 동조하는 이들이 이렇게 불어난 것이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도 변함 없지, 불쌍한 아이야."

그녀를 상대로도 불쌍하다고 말하였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강이나마 알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백독을 만들어오면서 그녀가 무슨 일을 자행해왔는지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묵인하였고, 그 죄를 매일밤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갈테니 용서를 끊임없이 빌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던, 자신의 연민이었다.
그 순간 그의 입가로 조용히 미소가 띄어진다. 잠시간 주먹을 쥔 손을 바라본다. 그녀는 알까, 지금 주먹을 휘두른 순간, 마지막에 자신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는 것을. 애시당초 뇌에 충격을 주어 편하게 하려 했던 것이지만, 그간 같이 지내왔던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에 아주 작은, 정말 아주 작은 망설임을 남긴 것이다.

"가자꾸나, 얘들아."

그가 발을 크게 한번 구름과 동시에 그와 함께 왔던 이들의 무기가 미친듯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떨어져 나가며 무기들이 한군데로 뭉쳐갔고, 그렇게 뭉쳐졌던 덩어리들은 그대로 그의 등뒤에 위치하였다. 마치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 모습에선 일말의 숭고함과 순수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입가로 아주 자그마한 실선이 보인다. 주변에 자욱한 독기가 드디어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는 증거이리라.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드는 소녀의 모습에 서둘러 발을 한번 구르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금술을 다른 곳에 집중되고 있는 지금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우위를 제외한 모든 것은 그녀보다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큿!"

그녀의 의도대로 그는 그대로 중심을 잃은 듯이 그대로 몸을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는 당해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도 그대로 손을 뻗어 소녀의 허리를 잡으려 하였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는 그녀를 집어던져버린뒤 서둘러 전투 태세를 취하려 할 것이리라

563 이름 없음 (4xeHFIzAmQ)

2021-06-13 (내일 월요일) 11:55:25

>>562

" 내가 불쌍하다고? 넌 끝까지 멍청하네요, 그리고 교만하구요. 아직도 내게 동정과 연민을 보내나요?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

송곳니 여덟, 머리 둘. 쌍두사. 그녀가 곧이어 태산과도 같은 거대한 크기의 뱀을 소환해냈다. 전부 집어삼켜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것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달려들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다시금 영창하기 시작했다. 서른 여섯의 송곳니, 아홉의 머리, 네 질긴 생명력으로 모조리 불태워라, 히드라. 이번엔 거세게 땅이 울린다. 땅의 아래에서 그것이 솟구쳐오르고, 입에서 불길을 내뿜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타오른다. 새빨갛게 물든, 진홍의 달처럼. 그가 발을 크게 굴러, 등 뒤에 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장관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압도되지 않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입가에 오른 실선을 놓치지 않았다. 뒤이어 다시금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것이 내뿜는 숨결은, 광경을 새로 써내려간다. 맹독 둘, 역병. 입에서 짧게 숨을 뱉어냈다. 무색 무취의 독, 확실하게 퍼져나가는걸 증명이라도 하는듯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네가 몸을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네요, 분명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녀가 다시금 중얼거렸고,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잡으려하자 순식간에 몸을 꼬아 반대쪽 다리로 뻗어나갔다.

" 땅은 내 영역이야, 무엄하게 굴지마. 쉽게 죽여줄 생각같은건 애초에 없어. "

그녀에게 있어서, 치명상을 노릴수 있는 부분은 비단 목, 가슴 등의 부위가 아니었다. 어디든 그녀의 손길이, 송곳니가 닿을 수 있는 부분만 존재한다면 전부 치명상이었으니. 그녀의 진정한 위력은, 강철을 꿰뚫는 강한 힘도, 몸을 조아 으스러트리는것도, 태산같은 뱀을 소환하는것도 아니었다.

" 송곳니 다섯- 엄니. "

손에서 흐르는 물과도 같은 맑고 청량한 액체. 그녀가 쓸수 있는 전력의 독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그의 발목을 향해 손을 찔러넣으려했다.

564 이름 없음 (x07HhdToQw)

2021-06-13 (내일 월요일) 13:23:43

>>563

"멍청한 것은 맞으니까."

아주 자그마한 중얼거림이었다. 옛 동료들을 모두 쳐죽여버리고 지금에 남은 것은 이제 이 소녀와 자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후회하고 또 속죄해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자해지, 모든 것을 스스로 끝내기 위해, 그는 어떠한 댓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순간 모든 것이 조용히 흘러들어간다. 모든것이 인지부조화 마냥 느리게 인지되어 간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히드라의 모습도,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은채 일격을 가하려는 소녀도, 그에게 있어 모두 느리게 느껴졌다.

"많은것을 잊었나보구나. 기억하고 있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그답지 않았다. 수많은 전투에서 가장 선봉에서 섰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다니. 전투센스, 힘 모두 동료들 중에서 가장 우수했던 그였다. 근데도 왜 그녀가 다리로 접근하는 것을 놔둔 것일까.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을 놔버린, 삶도 그 무엇도 미련을 가지지 않은 듯한 시원한 웃음이었다.

"필요하다면 내어주마."

찔러넣는 순간보다 더 빨랐다. 품속에서 칼을 뽑아 그대로 자신의 다리를 잘라버렸다. 아주 잠깐,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그의 전신으로 독이 퍼졌으리라. 하지만 왜 그러한 결단을 내린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철의 꽃봉오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피어나라, 우담바라(優曇鉢華, 3천년에 한번 핀다는 불교에서 전해지는 꽃)."

그 한마디와 함께 꽃봉오리가 깨져나가며 그 안에서 거대한 팔 두쌍이 튀어나와 달려들던 히드라를 제압함과 동시에 다리를 잘라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그를 천천히 감싸올라갔다. 그의 전신이 다시한번 철의 갑주로 휩싸이고, 히드라를 제압한 팔 두쌍이 합장을 올리며 그의 뒤로 안착하자 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땅은 네 영역이라고 하였더냐, 그렇다면 내어주마. 내 다리가 필요하다면 내어주마, 하지만 단 한가지 나는 허하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양팔의 합장이 풀리며 그녀를 향해 철권을 휘둘러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감은 허하지 못한다."

철갑옷을 입은 백호의 으르렁거림이 울려퍼졌다.

565 이름 없음 (4xeHFIzAmQ)

2021-06-13 (내일 월요일) 14:22:23

>>564

멍청한것은 맞다며 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많은것을 잊었다고, 그리고 기억하고 있다고. 네 말은 온통 모순 투성이야. 그런 주제에-

" 나를 내려다보지 말라고 했잖아!!!!!!!! "

격노.

새빨갛게 타오르던 그 눈동자가 요동쳤다.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공기를 찢으며 내지르는, 폭음. 이걸 맞으면 죽으리라는건 모든 이가 알고 있을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일렁이던 불꽃은 곧 희미해져, 스산한 재를 남기고 꺼졌다.

" 그림자에 몸을 숨겨라. 탈피. "

쾅.

자욱한 모래먼지가 공간을 자욱히 메운다. 어느덧 안개가 걷혔을 즈음에는, 그녀가 흩뿌렸던 독이 모두 사라져있던 참이었다. 깊숙하게 파인, 참상의 아래로 그녀의 시체가 보인다. 허나, 뭔가 이상했다. 본디 주먹에 맞으면, 사람이 저렇게 칼에 베인듯 죽어있진 않을 터였다. 그래-

" 그게, 숨겼던 네 진짜 힘이야? 고양아. "

그녀가 느지막히 중얼이며, 머리를 휘어넘긴채로 나타났다. 새카맣던 머리칼이 하얗게 물들었고, 어느새 몸에 새겨졌던 뱀의 문신은 사라진 채였다. 허물을 벗었다. 한번밖에 사용할수 없는 더미 목숨도 사라졌고, 잿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널 올려다보았다.

"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할수 있으면 해봐. "

그녀가 손을 뻗었고, 곧이어 그녀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손 끝에서 새카만 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짧은 단도였고, 엄니의 형상을 하고있었다. 날카로운 이형의 검을 양손에 쥐고선, 그녀는 순식간에 그를 향해 도약했다. 땅을 기던것도 지긋지긋하던 찰나였다. 네가 거기서 날 내려다본다면, 내가 더 높은곳에서 널 내려다보겠어.

" 흑사류, 일검. 쇄도. "

피어나라, 꽃으로 숨어든 독의 봉우리야.

널 향해 두개의 단검을 내리친다. 마침내 본모습을 드러낸 흑사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566 이름 없음 (x07HhdToQw)

2021-06-13 (내일 월요일) 14:57:07

>>565

"그렇게 해서 위로 올라가고자 함은 무엇이더냐."

한탄이었다. 너무나도 슬픈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한탄이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펐던 것일까. 내려찍은 허물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양손으로 합장을 올리는 것은 물론 우담바라로 피어올린 두쌍의 팔을 천천히 애도하듯 시신을 감싸 올렸다. 양팔의 형태중 위의 한쌍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자신조차도 제대로 시선을 두는게 안되었기에-대충 그의 몸 두배 크기- 시신의 형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시신을 가까이 가져오려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예의 그 조용한 시선으로 재차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번뇌도 욕심도 다 내던진 그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준다면 그의 입가로 내리던 실선이 조금 더 굵어져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고양이..... 그래 맞지. 백호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 몸만 큰 고양이, 그러면 그대는 무엇인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것을 보며 또다른 팔 한쌍을 들어올려 그녀를 붙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격이 더 빨랐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검격에 손닥이 뚫린 우담바라의 양팔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들어갔고 이내 마치 썩어들어가듯이 힘을 잃어버려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에 개의치 않는 듯이 그의 분노에 젖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너에겐 소중한 사람도 없고,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없다!"

아니다. 분노가 아니었다

"분에 넘치는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는 알고 있는게냐!"

슬픔이었다. 소중한 이들이 그렇게 굴러떨어지고 스스로 그렇게 죽여버린데에 대한 슬픔과,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소녀가 변해버린데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엔... 그 힘을 사용해 가로막는 훼방꾼을 계속 죽이는 인생이 있을 뿐... 그런 걸 바랄 정도로 너는! 바보가 아니었잖아!?"

그의 신형이 앞으로 튕겨져 나오듯 소녀에게 다가갔다. 마주본 그의 시선에는 증오나 분노가 아닌 안타까움과 슬픔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꽉 쥐어진 손에 감정을 담아, 그는 그대로 소녀의 가슴팍을 향해 휘둘렀다.

//점점 막나가서 죄송합니다 흑흑

567 이름 없음 (vIyJVaIVbw)

2021-06-13 (내일 월요일) 20:35:37

>>557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에, 여태껏 보이지 않던 기세로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이 고여있던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다.) 알고 있어! 내 진짜 가족들. 고아원의 아이들...모두 없어졌잖아. 내가, 내가...하라는 대로 안해서. (적막 속에서 흐르는 것은 오직 작은 흐느낌 뿐. 무력감이 분노를 이긴 지는 이미 한참이 지난 터였다. 이렇게나 상냥한 손길을 받으면, 그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나보고, 후회할 거라고. (언제나 올곧게, 본인 나름의 신념을 따르던 그였기에 믿으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되묻고 만다.)

568 이름 없음 (ZIk.BTO6Ig)

2021-06-14 (모두 수고..) 00:24:02

>>567
(절박할 정도의 흐느낌에도 돌아오는 것은, 무감한 시선이다. 무섭도록 냉랭한 눈동자가 당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아주 일말의 연민이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비추는 태양처럼. 여성은 한 손으로는 남성의 손을 잡아주려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마저도 눈가가 짓무를까 싶어 부드럽게 문질렀다.) 너나 나나, 이 정도 위치에 있으면 미움을 많이 받기 마련이야. (옛이야기를 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란 선문답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완벽히 연관이 없지도 않다.) 나조차도 이 자리에 오르면서 하이에나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어. 가족, 연인, 친구, 동료와 부하...그래서 생각했지. 아, 더이상 사랑하는 것을 만들지 말자! 이렇게 모래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 처음부터 사랑하지를 말자...그랬던 적이 있었지. (자신의 이야기를 함에도 지나치게 태연하다. 마치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동화를 읊어주는 것 같다.)

569 이름 없음 (p0Mav9qyRE)

2021-06-14 (모두 수고..) 00:49:19

>>568
(허망할 정도로, 슬픈 이야기. 그러나 자신은 어떠한 동정도 할 수 없다. 아니, 그녀 또한 동정을 바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겠지. 저 이야기의 목적은 그저, 자신이 결국에는 당신에게만 얽혀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끝내 도망치더라도, 그곳 또한 작은 장난감 상자 속이라는. 전부 깨닫진 못했지만 편린을 엿본 것만으로 몸을 떤다. 눈물을 닦아주는 당신의 따듯한 손길을 받아내는가 싶더니, 얼굴로 밀어낸다. 아주 사소한 반항에 불과하다.) ...난 그래도, 널...기다렸어. 옛날에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그 목소리 만큼은 또렷하니까. (지금에서야 덧없는 꿈과 같은 당신과의 추억이지만, 밤하늘에 박혀 반짝이는 별무리 만큼이나 선명하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간다.) 지금은 다르다는 거야? 내가 뭐라고?

570 이름 없음 (ACfolbMldY)

2021-06-14 (모두 수고..) 01:23:04

>>569
(그렇다. 동정 따위를 바라고 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단순한 사실 적시에 불과하다. '나'는 적이 많고, 사사건건 틈을 노리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잃었다. '너'의 활동은 그런 여성의 최측근에 가까웠다.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처지인 건 '너'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자, 다시 보자. '정말로 이 여성이 당신의 모든 것을 죽이고 만 당사자인가?') 그렇지만 나를 믿지는 않았지. (매정할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다. 여즉 표정의 변화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처럼 무감할 뿐이다. 여성은 손이 밀어내지자, 더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다.) 사소한 단어에 집착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똑똑한 너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알잖니?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래도 대답해주자면, 그래, 맞아. 사람의 감정이란 건 생각보다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더라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동하는 것도 아니고.

571 이름 없음 (p0Mav9qyRE)

2021-06-14 (모두 수고..) 21:44:03

>>570
(나를 믿지는 않았지. 그 한 마디에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날개마저 가느다랗게 떠는 모습은 마치 의지할 곳이 없어진 나약한 새끼새 같다. 항상 그는 그랬다. 머리가 좋으면서 이성보단 감정이 앞서고, 본인의 손으로 죽인 상대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하고, 같은 소속의 이들의 생일을 챙기는.)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미움 받는 데에 익숙해졌다고, 그게 좋은 건 아니잖아. 그런 건 포기하지 말아줘. 난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 (말투는 차분해도, 진작에 울고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이용당해놓고서도, 당신을 생각한다.) 왜 사소하다고 단정 짓는 건데... (조그만 중얼거림은 이어진 이유에 묻혀버리고, 손을 들어 턱부터 볼까지 눈물을 닦아낸다.) 약속해줘. 고아원의 아이들을 더 이상 한 명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 네 감정은, 나만 온전히 짊어지고 가면 되는 거잖아.

572 이름 없음 (MBesJIlhHw)

2021-06-16 (水) 20:06:00

갱신

573 이름 없음 (zd.jR6Lltc)

2021-06-21 (모두 수고..) 00:08:53

두 손이 벽에 달린 쇠사슬에 묶이고 두 다리에 족쇄가 채워진 사내는 살인혐의로 잡힌 이였다. 제국의 유력귀족 몇명을 무자비하게 참살한 20대 정도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귀족을 살해했는진 알 수 없었다. 그저 알려진 건 말단귀족의 자제라는 것 뿐이었다. 법의 엄격함을 보이기 위해서 반드시 처형해야만 한다는 유력귀족들에 의해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 제공되고 그것을 먹을 때만 잠시 두 팔이 풀릴 뿐, 그 이외에는 계속해서 그는 그렇게 붙잡혀있었다.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정말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내는 언제나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어둠 깊은 지하 감옥 안에 발소리가 울렸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예 그 발소리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지 사내는 눈을 감고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횃불이 어둠을 비추자 그는 그제야 눈을 살며시 뜨고 앞을 바라봤다. 누가 서 있는진 알 수 없었으나 누군가가 서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사내라는 설정이야. 누가 찾아왔는지는 그냥 자유롭게 해줘!

574 이름 없음 (lyzmOPgRHc)

2021-06-22 (FIRE!) 00:58:30

>>573 지하감옥에 들어서며, 죄수의 연행을 맡은 근위기사, 그로슐라는 돼지우리를 방불케하는 분뇨의 악취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끔찍한 냄새군. 아무리 귀족 살해범이라고 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밥 먹을 때 풀어 놓으려면 다른 생리적으로 필요한 순간에도 풀어놓으란 말이다. 에휴. 일이나 해야지. 죄수 앞에 선 그로슐라는 입을 열었다.

"오늘이 자네 사형 집행일일세. 형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할 시간 정도는 있네만, 하겠나?"

말을 마치고, 그는 옆에 선 사제를 힐끔 보았다. 마찬가지로 지독한 악취에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에 실없이 동병상련을 느끼며, 그로슐라는 대답을 기다리듯 죄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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