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3924> 자유 상황극 스레 2 :: 574

이름 없음

2020-11-15 00:13:19 - 2021-06-22 00:58:30

0 이름 없음 (/8xYPD6Tn6)

2020-11-15 (내일 월요일) 00:13:19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 이름 없음 (2N8pgbTVWU)

2020-11-15 (내일 월요일) 23:28:02

“그냥……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 해줘.”

흡연을 하러 나온 듯한 너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손두덩으로 눈가를 꾹 누르고 있다. 목소리도 울먹이는 탓에 전혀 그 답지않다. 하아, 깊게 숨을 내쉬는 데에는 술기운이 있을 뿐더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다. 그야, 애인의 바람피는 모습을 하필 학과 술자리를 갖은 술집에서 발견해버렸으니까. 아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붉게 튼 눈으로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있다.

2 이름 없음 (NCwRffb.ck)

2020-11-16 (모두 수고..) 00:10:13

>>1

술기운을 핑계로 집에 가려고 슬쩍 빠져나왔더니, 어쩐지 우는 것 같은 동기와 마주치고 말았다. 못본 체 지나가려 해도 이미 마주친 상황에 뻘쭘하게 서 있는데, 아무것도 못 본 체 해달란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동기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적인 연민과는 별개로 좀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래, 난 먼저 가려고. 술기운 아직 있으면 택시 불러서 조심히 들어가."

내일 보자. 손을 흔들어보이곤 걸음을 재촉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3 이름 없음 (ANW8NYRhJ6)

2020-11-17 (FIRE!) 00:06:37

뻐끔. 뻐끔.

둥글고 큰 눈에 양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 여자아이가 하는 말은 이 방에서 당신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당신이 여자아이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이 방은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방이다. 문은 닫혀있고 평범한 가구들이 있다. 여자아이는 오버사이즈 점퍼와 치마, 스트라이프 스타킹을 신었다. 얼굴은 꽤 귀염상이다.

여자아이는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해보이더니 이번엔 어깨를 으쓱한다. 이런식으로 대화를 하려나 본데.........당신, 알아들을 수 있어요?

이번엔 자기 가슴팍을 가리키고 또 뻐끔꺼리더니 이번에는 상큼하게 웃는다. 아마도 자기 소개를 한 것 같다. 불행하게도 소녀의 이름이 당신에게 전달되지 못햇지만 말이다.

4 이름 없음 (ANW8NYRhJ6)

2020-11-17 (FIRE!) 00:09:47

>>3 +추가) 방! 못나감! 문! 잠겼음!

5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00:17:02

>>3

잠에서 깨자 생전 처음 보는 방에 와있고 그나마 만난 사람도 일면식도 없는 상대. 게다가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청년은 직감적으로 서로는 말로 소통할 수 없으리라고 깨달았다.

'안 들려!'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뻐끔거리곤 양손을 X자로 교차시킨다. 아무래도 소녀는 자기소개를 하려 했던 모양인데... 손가락 글씨를 거꾸로 알아볼 정도로 소년의 머리회전이 빠르진 않았다. 저런.

"너는! 여기가! 어딘지! 아니?!"
바닥을 손가락으로 두 번 가리킨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마치 B급 공포게임의 도입부처럼 처음 보는 방에 떨어졌는데 이걸 먼저 묻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6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0:24:35

>>5

여자아이이 눈썹이 팔자로 축 처졌다. 저것은 누가봐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나 침울해요오.

여자아이는 여전히 뻐끔거리면서 당신과 똑같이 자기 귀를 가리키고 손을 교차시킨다. 이번엔 입술을 뾰족 내민다. 이 상황이 답답한 것 같다.

청년은 입을 크게 움직이면서 뭘 말하는 것 같다. 여자아이가 볼때 그랬다는 말이다. 여자아이는 멀리 산을 보듯이 이마가에 손을 대고서 청년을 열심히 쳐다보고있다. 정확히 보면 청년의 입에 완전 집중하고있다. 모르기는 해도 청년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으려는 목적이겠지.

소녀는 고개를 젓는다.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뜻일까? 뭐라고 하는지 못알아듣겠다는 뜻일까?

소녀는 방을 휘 둘러보더니 푹신해보이는 침대에 퐁 주저앉는다. 매트리스 탄력성에 앉아있는 소녀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소녀는 뻐끔뻐끔거리면서 청년에게 웃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러더니 자기 자리 옆을 톡톡 친다.

7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00:36:28

>>6

맙소사, 저렇게 침울한 표정을 짓다니. 그렇지만 울고싶은 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꾹 참으며 여자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쌍따봉을 날려준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단 건지 내 말이 전달되지 않은 건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움직임이어도 소년의 고개를 떨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좌절도 잠시, 소녀가 침대로 갈 동안 기운을 회복한 소년은 문고리를 잡고 돌려본다. 철컥 소리만 요란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방 안에 갇혀버린 것이겠지.

소년은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삐그덕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 침대 위에 앉은 여자아이가 자신의 옆을 톡톡 치고 있다. 저건... 그래, 누가 봐도 옆에 앉으라고 하는 거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춘 듯 보이겠지만 소년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중이다. 저 아이는 왜 자기 옆에 앉으라는 거지? 우리 오늘 처음 보는 거 아닌가?! 처음 보는 이성과 그렇게 스스럼없어도 되는 거야?! 나한테 뭔가 볼일이 있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일이야?!

...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극도로 어렵겠지.
소년은 기름칠 안 한 로봇같은 움직임으로 소녀가 통통 두드린 그 위치로 가 앉았다. 긴장이 가득찬 얼굴이 소녀를 향한다.

#세상에 미처 수정을 다 못 했네 청년X 소년O!!!!ㅋㅋㅋㅋㅋㅋ

8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0:46:22

>>7

쌍따봉? 쌍따봉! 소녀는 침울한 표정을 짓다말고 같이 쌍따봉을 날려준다. 표정을 보면 소년의 쌍따봉을 도저히 해석하지못해서 혼란에 빠져있는 것 같다.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입을 ㅅ자로 끌어올리면서 굉장히 더 침울하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려는 소녀다. 소년이 침울한 표정을 좋아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소년이 문고리를 열어볼때 소녀는 뒤에서 고개를 절레잴레 저었다. 벌써 해봤지만 안됐다는 뜻이겠지. 머리를 쥐어뜯는 소년엔 소리는 안들렸지만 똥그랗게 눈을 뜨고 깜빡거린다. 놀란 것 같다. 그래도 소년이 어떤기분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은 것 같다.

소년이 삐꺽거리면 옆에 오자 소녀는 화-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의사가 잘 통해서 좋은 것 같다. 소녀는 뻐끔뻐끔거리지만 전달될리가 만무하다. 소녀는 입술에 검지를 얹더니 방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고민하는 것 같다.

소녀는 시계를 가리키고 소년에게 뭐라고 열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손가락을 시곗바늘 시침분침과 비슷하게 움직인 다음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 문을 가리킨다음 양손을 곧게펴 양쪽 손가락들을 가로로 마주친다음 앞으로 밀어낸다.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옼게이!

9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00:56:52

>>8

'미치겠네!!' 더더 침울해진 소녀의 표정을 보고 소년이 했던 생각이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눈 앞의 어린 소녀가 자신의 위로(?)에 더 침울해진 거다. 말이라도 통했으면 더 좋았잖아! ...하고, 소년은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게 불평을 토했다.

그거야 어쨌든 지금 현재 소녀의 뻐끔거리는 입을 보는 소년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는 건 좋다. 침울해하는 것보단 훨씬 도움이 된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말이 안 통하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은 별개였다. 소년은 자신의 마음이 점점 조급하고 초조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계를 향하는 소녀의 움직임에 소년도 시계를 바라본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시계 자체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으니 시간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거겠지.
소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계 앞으로 갔다. 시계를 가리키고 손가락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린 다음, 이번에는 문으로 가서 문고리를 돌리며 여는 시늉을 했다. 소녀를 돌아보며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받으려 한다.

10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1:10:15

>>9

소년이 시계를 본다. 할 말(?)을 다마친 소녀는 생글생글 웃고있다. 소년이 시계 앞으로 가자 소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지켜본다.

소년은 시계를 돌리기 시작한다. 소녀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눈썹이 ㄱ자를 거꾸로 뒤집은 모양과 ㄴ자를 붙여놓은 것 같이 된다. 이윽고 소년이 문으로 가서 여는 시늉을 하자 소녀는 두눈을 찔끈 감고 양손을 앞으로 뻗어서 홰홰 흔든다. 세게 흔드는 바람에 바람까지 나고있다.....아무래도 그게 아니라는 뜻 같네요?

소녀는 벌떡 일어서서 팔짱을 낀다. 고민하는동안 양쪽으로 기우뚱기우뚱하는게 전자동인형같다.

소녀는 뻐끔뻐끔하며 다시 자기가 앉았던 침대로 돌아가앉는다. 발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아주 쉬는 동작을 한다. 그다음엔 침대에 아예 드러누워 팔을 베고 자는 동작을....

갑자기 단숨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폴짝하고 뛰어내린 소녀는 방의 한 모서리로 뛰어간다. 거기서 침대 쪽으로 걸어간다. 멈추더니 허공에 문을 두드리듯 똑똑 하는 손시늉을 한다. 입도 똑똑을 말하고 있지만 소리는 나지않는다. 그리고 손으로 뭘 돌리는 동작을 한다. 문고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 같다.

그다음에는 또 재빨리! 침대위로 뛰어올라간다. 소녀는 다시 자는 동작을 한다. 뛰어올라간 반동때문에 이번엔 소녀가 공중에 잠깐 떴다가 돌아온다. 자는 척을 하다가 기지개를 켜더니 자기가 서있던 곳에 대고 귀 뒤에 손을 펴서 대서 뭔가 소리가 났다는 시늉을!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아까 서있던 곳으로 쭉 걸어간다.

만세!

...알아들었어요 당신?

11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1:15:54

#>>9 헉ㄱ 이제보니까 잘못읽었다! 시계를 돌린게 아니네! 소녀가 잘못 이해한걸로해줘 ;ㅁ;

12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01:24:41

>>10

소녀의 혼신의 연기를 보고 소년이 감상평을 내놓았다.

"엥?"

그렇다, 소년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엉거주춤하게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멈춰선 소년은 방금 목격한 장면을 찬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으로 나가자는 이야기는 아마도 확실하게 아니다. ('아마도 확실하게'라니 이 얼마나 모순인지!) 뭔가... 소녀는 소년이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전달하려 하는 것 같... 아니아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다른 건가?

황당함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채로 소녀를 보던 소년이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는다. 만세를 부르고 있던 소녀의 어깨를 한손으로 턱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무언가를 만지듯이 휘젓는다. 무언가를 힘차게 말하고도 있었는데 당연히 당신에겐 전달되지 않았을 테고. 자기가 메만졌던 빈공간에 서서 문을 똑똑 노크하는 시늉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 빈공간을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이번엔 맞았겠지? 하고 은은한 기대감이 어린 채 소녀를 바라본다.

13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01:27:10

# >>11 서로 소통 잘 안 되는 상황도 잘못 이해한 게 잘못 이해한 걸로 이어지는 상황도 너무 재밌어서 웃으면서 글쓰고 있으니까 문제 없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

14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1:32:36

>>12

소년이 어깨를 붙잡자 소녀는 만세 상태로 팔을 들어올린체 머리만 돌려서 소년을 본다. 눈이 반짝반짝하다. 자기가 잘 설명했다는 자신감에 빠져있는 것 같다.

이번에 소녀의 눈썹은 한쪽만 괄호 ( ( ) 모양을 하고 있다. 저거는 누가봐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소녀는 소년을 보고있지만 맞았다고 하지못하고 아방하게 입만 열고 있다. 아- 으- 하는 입모양일뿐이니 소녀가 냈을 소리는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의 동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아방하게 벌어져있던 입을 흡 닫은 소녀는 작게 끄덕거렸다. 양팔을 몸통에 붙여서 긴장된 자세를 취한다. 그러더니 러시아 병정인형처럼 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문앞으로 걸어간다. 양팔을 머리뒤로 높게 쳐들더니! 문을 내리친다!

쿵!!!!!!

......

소녀는 손을 흔들면서 울상을 짓고있다. 어버핏을 입어서 손가락은 안보이지만....빨갛게 됐을 것이다.

15 이름 없음 (xLvvWzms8o)

2020-11-17 (FIRE!) 01:34:39

# >>13 고마워 ^ㅅ^! 나도 너무 재미지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6 이름 없음 (OtShCoRuYk)

2020-11-17 (FIRE!) 13:53:51

일찍이 암벽이 희다 해서 붙은 이름인 백암산은, 그러나 동리 사람들에게는 으레 여우골로 통했다. 산 중턱 즈음에 깊은 골이 하나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가면 천 년 묵은 여우가 산다고 해서 생긴 별칭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아비에서 아들로 전해진 설화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살이 붙었다. 꼬리가 아홉 갈래로 나뉘어 있네, 눈처럼 흰 털에 꼬이면 간을 빼먹히네 하지만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랐다 길을 잃은 김 씨네 막내아들이 이레가 지나서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온 일이 또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여우에게 홀린 게라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발길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산다는 여우 요괴는 작은 시골 마을의 화젯거리가 되어 주기 충분했다. 어린 손주는 매일 밤 할미의 무릎에 올라앉아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으며, 어미는 목 놓아 우는 아이에게 여우가 잡아간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 모든 게 사실일지는, 오직 여우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실바람을 타고 날아든 작은 흐느낌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저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실려 온 피 내음이 코끝에 서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였지만 들리는 소리는 미약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는 호흡. 상처입은 짐승일까, 인간의 아이일까, 그도 아니면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무엇이려나.

괴이하게도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 대더라니, 누가 오려는 징조였나 보군.

엇차, 하고 작게 기합을 내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구리에 낀 바구니를 바로 하고는 나무 등치에 기대어 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며 이마께를 간지럽혔다. 삿갓 아래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노인의 그것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탁탁 소리를 내었다. 눈이 두 짝에 여분으로 하나가 더 달려 있어도 까딱 잘못하면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라는 산에서 사내는 눈을 감고도 잘만 발을 내딛었다. 적막한 산중에는 바람 소리, 새 소리, 누군가의 신음 소리, 그리고 지팡이가 탁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17 이름 없음 (lnsW.Bo0hs)

2020-11-17 (FIRE!) 15:43:30

>>16
천잠을 짜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산누에는 양잠이 불가능하다. 오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지에서만 고치를 만든다. 그러니 사람이 할 일이라곤 많이 없다. 애벌래나 번데기 따위를 잡아 참나무 군락에 모아 풀어놓고, 천지신명께 빌 뿐이다. 누에들이 덜 잡아먹히게 해 주십시오, 많이 살아남아서 고치를 많이 짓게 해 주십시오.

올해는 운이 좋았다. 옥색 고치로 가방을 가득 채우자 그만큼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릴 적부터 뛰어다녔던 너럭바위의 생각은 달랐다. 습관적으로 밟고 지나가던, 밟고, 밟고, 또 밟았던 그 자리를 다시 밟았다. 그게 푹 꺼지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 뭣하는가? 이미 늦었다.

희고 커다란 바위의 비탈 위에 난잡한 검은 선이 그려졌다. 한때는 뜨겁고 붉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선의 끝에 붉은 먹을 품은 붓이 있다. 붓을 벼루에 푹 담근 것처럼, 아직도 먹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으윽....그르륵...."

호흡에 거품 끓는 소리가 올라온다. 온 몸이 부러지고 깨져 그렇게라도 숨을 쉬는 것이 기적이었다. 누군가가 눈 앞에 검은 종이를 가렸다 치웠다 하는 것 같다. 시야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간간히 암전이 일어난다. 골통과 눈이라고 성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가방에서 새어나와 굴러다니는 고치들을 보았다.

이렇게나 많이 땄는데. 이렇게 많이 땄는데..... 그녀는 초 단위로 다가오는 죽음을 부정한다. 집에 가서 이걸로 천잠을 짜야지. 우연히 손 안에 들어온 고치 하나를 꽉 쥐었다. 그녀는 혹시나 자신이 너무 꽉 쥐어 으스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다. 그저 고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꿈틀대는 것 뿐이었으니까.

18 이름 없음 (hb/NqNdQJU)

2020-11-17 (FIRE!) 15:59:02

*헉 17번이 이었네 요거는 아무나 이어조~

어디 돈 될 만한 약초 같은 것이라도 캘 수 없을까 싶어 여우골에 올랐던 것이 발단이었다. 울퉁불퉁하고 굽이 진 길은 자칫하면 발목을 삐기에 충분해 보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만들었다. 망할 여우 새끼. 이렇게 고된 길을 올라 약초 한 포기도 얻지 못 한다면 다음은 너다. 드세게 내뱉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드세기만 할 뿐, 주위에 들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을 뿐더러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전부였기에 힘만 빠졌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우를 욕한 이는 결국 온몸에 힘이 빠질 대로 빠져 벌러덩 땅에 누웠다. 이상했다. 분명 남들보다 체력이 좋다는 것만을 장점으로 밀었는데 고작 등반 좀 했다고 이렇게 드러눕다니. 나도 이제 한물 갔구나, 라고 생각하던 아명雅溟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흙과 돌이 뺨에 닿아 시원했다. ......세상에나 이게 뭐야!

삐죽삐죽한 잎에 길게 늘어진 줄기들. 지금까지 찾던 약초가 틀림 없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뜨겁게 피가 도는 느낌과 고생길의 설움이 합쳐지며 아명은 저 약초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짐짝만 될 뻔 했던 바구니는 그제서야 아명의 허리춤에서 벗어나 제 본분을 다했다. 역시 신은 존재한다니까!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채집하는 손은 빨라졌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귀에 걸릴 것 같다 싶으면 적당히 내려오고 올라가고를 반복했는데, 입구멍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여우야 넌 오늘 운이 좋았다든가, 오늘 여우가 비명횡사 할 일은 없겠다든가.

그래, 비명횡사할 사람은 나지.

아명은 순식간에 일어난 방금의 일을 떠올렸다. 흥에 취해 그만 비탈을 디뎌 주욱 미끄러진 방금의 일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천치같아 실소가 나왔다. 역시 사람은 제 이름대로 살아야 한다. 바다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가 짠내 폴폴 풍기는 이름으로 산에 발을 들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19 이름 없음 (yfQraA1rJc)

2020-11-17 (FIRE!) 20:24:22

>>14

소녀의 완만하게 휜 눈썹을 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아, 이번에도 헛다리 짚었구나. 소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추욱 내려갔다.

방 어딘가에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통하지 않는 대화를 뒤로 하고 새로운 소통 수단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소녀가 입을 합 닫고 굳세고 결의에 찬 표정을 하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소년에겐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뭐, 뭘 하려고?"

지금껏 엉뚱하고 아방해보였던 소녀였지만 저렇게 잔뜩 힘을 주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걷는다는 건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뜻이겠지.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자,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름 모를 소녀여!

쿵!!!!!!

......

"으아악!!! 뭘 하는 거야!!!"

다친(?) 건 소녀였지만 자기가 더 아프단 듯 소리를 빼액 지른다. 빠르게 달려 소녀 옆으로 간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살펴보려고 한다. 소리가 엄청났는데 뼈 어딘가가 부러진 건 아닐까? 울상이 되어 조물딱거리려 해본다.

20 이름 없음 (ZjxTMMbEB.)

2020-11-17 (FIRE!) 21:05:35

여인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방 안을 노려보았다. 텅 비었던 공간이 어느새 낯선 이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명실상부한 자신의 집이니까. ─비록 죽은 자는 집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됐어. 일주일 안에 도망가겠지.”

이미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이가 다섯에 이르렀다. 이만하면 귀신 들린 집이라고 소문날 법도 하건만, 어째서 방문자가 끊이질 않는 건지. 사실 여인도 추측은 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조카가 죽자마자 홀랑 집부터 낚아챈 비정한 삼촌이라면. 마치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행동한 그 인간이라면. 어떤 감언이설을 써서라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나 죽은 것 자체에 유감은 없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도 않으므로. 하지만 집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남은 부모님의 유품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다.

“너도 참 불쌍하다. 하필 우리 집을 골라서 살 곳도 잃고, 돈도 날리게 생겼네.”

여인은 침대에 다가가 낯선 이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말이니 사과는 하지 않는다.

21 이름 없음 (ANW8NYRhJ6)

2020-11-17 (FIRE!) 22:53:44

>>19

소녀의 큰 눈에 아픔이 모여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할듯하다. 아프면 싫어! 왕 싫어! 윗입술 아랫입울을 모아 꼭 깨물었는데 파르르르르르 떨리고있다. 조금있으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지만 용케 울지는 않는다.

소녀는 소년이 손을 잡고 살펴보는동안 가만히 있었다. 자기의지랑 상관없이 파를르르르르 떨리는 입술은 예외다 예외야! 오버사이즈 소매가 쭈르륵 흘러내려서 소녀의 팔이 윤곽을 드러냈다. 손크기 자체는 작지만 의외로 손가락은 통통하다. 조물딱거리면 뼈위에 통통하게 오른 손가락살이 말랑하고 만져진다.

소녀는 입을 빵끗빵끗 열어서 뭐라고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분위기로 유추하면 대충 아프단 말일 것 같다. 소년이 울상짓고 자기가 다친 것처럼 소리지른 게 소녀로 하여금 어리광을 부르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녀는 이제 손가락을 쥐었다폈다하면서 손가락이 건재하다고 보여주려고 한다. 벌써 꿋꿋씩씩한 표정도 짓고있다!

소녀는 교훈을 얻어서 이번에는 문을 살살 두들린다음 문에 귀를 대본다.....입술을 뾰쪽 내밀고 문에서 귀를 떼더니 눈썹이 처진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소녀가 문을 쳐서 무엇을 하려고 했든지 그게 잘 안된 것 같다.

22 이름 없음 (wk0gsZ4TvY)

2020-11-18 (水) 12:49:02

>>20

그 때였다. 세상 모르는 듯 쿨쿨 자고 있던 이가 갑자기 번쩍 눈을 뜨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반갑게 웃으며 귀신을 향해 말을 붙였다.

"와, 안녕하세요! 이 집에서 사셨던 분 맞으시죠? 언제 마주치나, 하고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잘 때 와주실 줄은 몰랐네요."

두려워하기는 커녕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건넨 그는, (잠옷차림이나마) 머리와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다음 바로 말을 꺼냈다.

"아까 하시는 말씀 들어보니까 제가 여기 사는 게 싫으신 모양인데, 저랑 거래 하지 않으실래요? 간단한 부탁 하나 들어주시면 내일부터 준비해서 방 빼드릴게요."

23 이름 없음 (5Af7peds/Q)

2020-11-18 (水) 20:45:27

쿨럭

정신을 놓을것 같은 아릿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그/그녀는 겨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내부에 고여 있던 혈액이 마른 입술새로 주르륵 힘없이 흘러나와 검은 골목 바닥에 방울져 떨어졌다.

검붉고 응어리진 비릿한 액체가 마찬가지로 검고 비릿한 기름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빗물 웅덩이에 섞이고 붉게 퍼져 어둠속에 스며들어갔다. 사라져 가는 붉은 흔적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며 다시 괴롭게 아려오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어둠속을 바라보는 시선엔 경멸과 후회와 원망 그리고 그 모든것이 뭉게진 비탄이 얽기설기 엮여 응어려지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타오르는 격정에 바르르 떨렸다.

힘겹게 색색 숨을 몰아쉬며 힘이 풀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다리를 움직여 검은 바닥을 딛고 먼지가 쌓여 지저분한 벽에 손을 기대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억지로 일으켜진 육체에 격통이 몰려오고 그/그녀는 저도 모르게 윽 소리를 내며 단말마를 내지를 듯 입새를 벌리다 급하게 입술을 꽉 물어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토록 믿던 이에게 배신당한것도 모자라 제 몸 하나 어쩌지 못해 천치처럼 구는 꼴을 외부인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넝마가 되었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싸게 팔아 형편없이 무너진다면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야 말로 배신자가 바라는 그/그녀의 결말일 것이다.

일어서야 한다. 막 아물어진 상처가 과격한 움직임에 터졌는지 옆구리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다량의 혈액이 흘러나오자 순간적으로 머리에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뭐라도 잡기위해 급박하게 뻗은 손에 무언가가-아마도 사람- 걸렸다.

(이쪽의 성별은 받는 참치가 아무렇게나 정해줘~ 배경도 판타지든 현대물이든 다 괜찮아:D)

24 이름 없음 (nP4i5dP5rM)

2020-11-18 (水) 21:46:25

>>23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 개운하게 바람이나 쐬려고 열어둔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 대신 비릿한 피냄새가 흘러들어온다면 거기에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방금 막 씻고 나온 상태라면.

"..에이씨..."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나오자마자 상스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안 가득 신선한 공기 대신 비릿한 피냄새가 가득해서였다. 분명 환기의 목적이긴 했지만 이런 공기를 원한게 아니었다. 쿵쿵거리며 창문으로 다가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 시덥잖은 피냄새의 근원을 없애버릴 심산이었다. 바람결에 흘러오는 피냄새는 그렇게 먼 곳도 아닌 바로 앞 건물 사이 골목에서 나고 있었다. 위치를 알았으니 가서 치워버릴 일만 남았다. 문으로 나가는 것도 번거로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집은 3층이었지만 착지에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젖어서 들러붙던 긴 머리에서 물기가 싹 털어져 가벼워졌다. 손으로 머리를 훑어 정리하고 곧장 앞 골목길로 들어갔다. 피냄새에 유독 예민한 후각에 이 골목은 유독 그 자체였다. 방으로 흘러들어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으로 진한 피의 향취로 가득했다.

"어느 구역 놈들이 장난질을 했길ㄹ, 어엌."

바닥에 떨어진 피웅덩이를 밟고 걸어가며 투덜대던 중 뭔가가 몸에 턱 하고 걸려서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버렸다. 얼떨결에 걸린 걸 잡고 보니 인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상처투성이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어 피냄새의 근원인 듯 했다. 하도 냄새가 진동을 해서 눈치채는게 늦었나보다. 인간이 상처입은 상태건 어쨌건 나름대로의 용건을 끝내기 위해 붙잡은 손을 생각없이 잡아당겨 피냄새를 두른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인간. 살아있어? 어? 대답 안 하면 처리장에 갖다 버린다."

처리장이라 함은 '이런 식'으로 죽은 시체나 잔해를 버리는 일종의 쓰레기장이었다. 말 그대로 처리되기 싫으면 대답하라며 잡은 손을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이쯤 하면 뭐라도 반응이 나오겠거니 싶어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을 가늘게 뜨고 인간의 반응을 살폈다. 바늘처럼 좁아진 세로동공이 차갑게 그의 전신을 훑도 다시 얼굴로 스윽 돌아갔다.

25 이름 없음 (5Af7peds/Q)

2020-11-18 (水) 23:01:42

>>24

생존본능이 따르는 대로, 어쩌면 그대로 차가운 안식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픈 욕구를 거스른 의지의 힘으로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고 앞의 물체를 부여잡았다. 축축한 것의 촉감이 핏기 없는 손가락에 잡히고 상대의 온기에 덥혀져 뜨뜻미지근한 물기가 손마디에 흘렀다.

‘거슬린다..’ 식은땀과 붉은피가 섞여 이마에 흐르고 곳곳에 유혈이 낭자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말 듯 서 있는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신경을 쓸 만큼 그는 습기를 꺼렸다.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몸을 겨우 가누는 상황에서 불쾌함이 더해지니 머리에 열이 몰리고 아파와 절로 얼굴이 찌뿌려졌다.

귓가가 웅웅거리는 것이 말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기위해 둔중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팔이 잡아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외부자극에 숨이 턱 막히자 작게 컥컥였다.

"야 인간. 살아있어? 어? 대답 안 하면 처리장에 갖다 버린다."

흐리멍텅해서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낯선 목소리가 꽃히고 묘하게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에 독기어린 청록색 눈으로 상대의 얼굴이 위치할 곳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인간..으윽 너는 인간이 아니라기도 한 모양이지.“

우왁스럽게 잡히고 흔들려 골이 흔들리고 절로 불쾌함과 무력감이 뇌리에 자리잡고 다시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와 힘없는 몸짓으로 상대를 그러잡았다. 핏방울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려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야에 이질적인, 샛노란 빛이 뚫어져라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훝어보는 눈길에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도 무력하게 누군가에게 기대어 겨우 서 있는 상황도 모든 것이 심기에 거슬렸다. 씨발. 마르고 피딱지가 얹힌 입술 사이로 낮게 읖조려진 욕설을 내뱉었다. 갖다 버린다고. 감히 누구를, 나를? 망할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26 이름 없음 (nP4i5dP5rM)

2020-11-18 (水) 23:51:56

>>25

배려없이 당기고 흔들어서인지 막힌 숨소리가 들렸지만 알게뭐냐. 아픈가 어쩐가보다 숨은 쉬고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래 숨은 붙어있네. 다음은 정신이 아직 붙어있나 보려고 피범벅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있자 독기 가득한 녹색 눈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를 본다기보다 적당히 눈이 마주칠만한 곳을 보는거 같았다.

"목숨 구걸보다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가 먼저냐? 기가 찰 놈이네."

어이쿠. 맥없이 흔들리는 몸을 나머지 팔로 붙잡아 지탱해줬으나 스스로 설 힘은 없어보였다. 그야 이렇게나 피를 흘렸으니 당장 숨이 안 넘어간 걸로 대단하다고 해줘야 할 판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귀찮게 됐다. 죽었으면 마음 편하게 갖다 버리는 건데 이건 아직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냥 두고 가자니 누가 치울 때까지 근방에 피냄새를 풀풀 풍길게 분명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밤잠이 편할까. 고민하던 중 희미하게 흘러나온 욕지거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오호."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징글징글한 정신머리까지 갖고있는건가. 흥미로워보이는 반응에 머릿속 결론이 먼 곳으로 갖다 치우자는 생각에서 주워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주워다가 영 시원찮으면 그 때 가서 버려도 되잖냐. 내면 속 못된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그의 피투성이 얼굴을 치켜들어 나를 보게 만든 다음 제안을 하나 했다.

"어이 인간. 너 이대로 있으면 출혈사하던가 뒷골목 놈들한테 조각조각 해체될거다. 모든 뒷골목이 그렇듯이 말야. 하지만 네놈은 운이 좋아. 적어도 살기 위해 발악한다는 선택지가 생겼으니까. 그래, 네놈이 원한다면 내 재주껏 그 명줄 이어주지. 약간의 대가는 받아가겠지만. 어쩔래? 이대로 뒤질래. 한번 발악이나 해볼래?"

어쩌면 이대로 죽는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기회는 줘봐야 하지 않겠어?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빛나는 눈을 휘어 웃으며 혀끝으로 도드라진 송곳니를 훑었다.

27 이름 없음 (KRG/kj6irA)

2020-11-19 (거의 끝나감) 20:10:51

>>27

흔들고 품평하는 듯 훝어보다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정체도 모를 낯선자에게 기대어 물밖에 나온 물고기 마냥 헐떡일 수 밖에 없다는건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웠다. 추상적인 개념이든 물리적인 개념이든 그 어떠한 것이 되었던 간에 최대한 파악을 하여 손아귀에 놓고 시작해야 마음이 놓이는데 지금은 저 자를 볼수도 물리적으로 제약을 가할 수도 없다. 절대적으로 상대가 우위에 놓인 상황.

이리저리 어디 건질것이라도 있나 재보는지 서늘한 안광이 어둠속에서 흔들리는걸 집요하게 쫓았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지 않더라도 여태 겪어온 경험으로는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건 여태 길러온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시퍼렇게 빛나는 샛노란 불길에 흐려져가는 머리가 경종을 울렸다.

무엇이 흥미를 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승의 동공이 유쾌하다는 빛을 띠었다. 짧은 감탄사 끝에 반응할 틈도 없이 고개가 우왁스럽게 제쳐졌다. 핏물이 매서운 겨울 공기에 식어 서늘함을 품어 지나간 자욱에 남기고 얼굴을 지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윤곽이 보일 정도로 저를 쥐고 흔드는 자와 가까워지고 핏기가 빠져 창백하게 싸늘해진 입가에 더운 숨이 얽혔다.

"씨발." 다시 한번 더 뚜렷한 발음으로 혈향섞인 숨과 함께 욕설을 토해내고 상대의 옷깃을 그러쥔 손에 더 힘을 가해 거칠게 움켜쥐었다. 여상한 말투로 건내어진 제안은 명백하게 자신이 피식자임을, 제안을 내밀은 본인이 포식자임을 전제하고 있었다.

"...대충 보기에 재밌어 보이는걸 찾았으니 갖고 놀겠단 뜻인가. "

망할. 들끓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몸이 핏물을 내뱉고 뿌옇게 눈앞이 흐려지다 맑아졌다. 후원자라 부르고 부모라 여기던 놈에게 뒤통수 맞은 것도 모자라 이런 뭔지도 모를 자에게 목숨줄을 내맡기고 어쩌지도 못하는 꼴이라. 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곤 비소를 흘렸다.

"하하..흐으...그 죽음보다 더한곳 데려가봐. 원하는 데로 마지막까지 발악해볼테니. 것보다 상대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하는게 예의 아닌가. 어차피 네 손아귀에 쥐어진 목숨인데 물음에 답하는 자비라도 보여주지 그래"

살아있으면 언제든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진...

붉은 피에 물들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노란 동공을 뚜렷한 눈으로 응시했다.

(내가 현생이 바빠서 텀이 좀 길 수도 있어 ㅠㅠ)

28 이름 없음 (O4PaKFRnD.)

2020-11-19 (거의 끝나감) 22:53:02

>>27

재차 튀어나온 욕설에 히죽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고 슬금 더 올라갔다. 수치스럽겠지. 화가 나겠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어쩌지 못 해 죽을 맛이겠지. 나는 이런 인간들을 잘 알았다. 언제나 우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느닷없이 바닥으로 내쳐진 것도 분한데 당장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그나마 붙잡고 있는 목숨마저 끊어질지 모른다는 상황이 얼마나 엿 같을까.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 답지 않게 이글거리는 청록빛 눈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아. 원래는 냄새나는 걸 치우려고 왔을 뿐이지만 말야. 네놈이 살아있어서 생각을 슬쩍 바꿔준거라고."

안정을 취해도 모자를 그의 속을 더 긁을 심산으로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하고 갓 흘러내린 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살려준다는 말 따위 무르고 당장 저 목을 물어뜯는 것도 좋을거 같은데. 아직 맥이 살아있을 때 말이다. 반은 장난으로 든 생각에 피식 실소했다. 그 웃음기가 고스란히 남아 더욱 속을 긁는 말투로 그의 의문을 일축해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그럴듯한 말로 끌어들이고 대가랍시고 목숨에 준하는 것을 앗아가는 존재를 인간들 사이에선 악마라고 하지 않던가?"

도둑고양이마냥 노란 눈에 일순 황금빛 이채가 감돌며 등 뒤로 거대한 두 쌍의 날개가 펼쳐져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정말 악마인지 어쩐지는 재쳐두고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지. 그리고 그가 한 대답을 무르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도. 날개를 두어번 움직여보고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날개를 도로 접어넣고 눈빛도 처음의 가벼운 샛노란 색으로 되돌렸다.

"이 이상은 네놈이 제대로 지옥에서 기어올라왔을 때 대답해주지. 그 전에 응급처치는 해야겠구만."

응급처치 라고 말하고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 당겨 피투성이 입술에 키스했다. 다 죽어가는 인간 붙잡고 뭐하는 짓일까 싶어도 입술이 닿은 순간부터 숨쉬기가 편해지거나 고통이 덜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거다. 지혈은 덤이고. 입술을 떼고나서 내 입술에 남은 피를 혀로 훑으며 그를 붙잡은 손을 움직여 등과 다리를 받쳐들고서 피범벅인 골목길을 벗어났다.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길은 평소보다 깨끗한 것 말고 어떤 이변도 남아있지 않았다.

간만에 입맛을 돋구는 인간을 만났다는 즐거움에 나는 그를 데리고 한달음에 내 집으로 돌아갔다. 푹신한 침대에 그를 던지다시피 내려놓는 행동에 배려는 없었다. 그가 아파하건 말건 콧노래를 흥얼대며 그의 옆에 털석 앉아서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적이자 계약서로 보이는 종이와 나이프가 나타났다. 내가 먼저 나이프로 내 손가락을 찔러 내 서명란에 새빨간 지장을 찍은 뒤 그의 서명란만이 기다리는 종이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며 재차 확인삼아 물었다.

"이제 여기에 피로 서명만 하면 네놈은 죽을 고비 정도는 가뿐히 넘기고 원래의 몸보다 휠씬 좋은 상태로 깨어날 거다. 대가는 그 다음에 치르면 돼. 무슨 대가인지는 깨어나서 확인하고. 그럼 찍는다?"

이미 손을 잡아 엄지에 나이프 끝을 쿡 찌르고 있으면서 묻긴 뭘 묻나 싶지? 나이프 자국을 따라 흘러나오는 붉은 혈액을 계약서에 찍은 순간 엄청난 격통이 전신을 강타하고 그 뒤로 소름끼치게 웃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어디 잘 버티고 돌아와 봐. 주워온 보람은 느끼게 해달라고."

(괜찮아! 텀 긴거 익숙해서!)

29 이름 없음 (luA0tfHdFM)

2020-11-20 (불탄다..!) 00:33:01

이봐아. 일어나. 어~이. (마치 표백된 것처럼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 속에, 어딘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기억이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라는 것을 인식한 당신이 눈을 뜨면,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 대신 달린 헬멧에 ^_^ 이모티콘이 떠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V-3. 드디어 일어났구나. 꽤 오래 기다렸어. 뭐, 갑작스럽지만 네 구속을 풀어주려고 해. 구속 당한 기억조차 없겠지만 말야. (당신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가, 금새 내렸다.) 오케이, 완료. 자, 부디 엘라흐에게서 잘 도망치길 바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전자 헬멧은 또다시 방긋 웃는 이모티콘을 띄웠다. 당신이 정신을 차리면 헬멧을 쓴 사람은 없고, 육면이 전부 새하얀 방에 있음을 깨닫는다. 피가 아래 틈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는 문 하나만 빼고. 이름, 본인의 성별, 나이까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 속에, 선명한 붉은 빛만이 당신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30 이름 없음 (15M3BbDR6A)

2020-11-20 (불탄다..!) 01:05:23

>>29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니, 이건 꿈이라고도 할 수 없다. 나는 의미 없는 포말처럼 끝없는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고 파도가 없으며 하늘에는 새와 바람과 구름이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없었다. 하늘과 바다는 흰색마저 표백당해 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투명하다고 하기에는 어두운 기묘한 색이었다. 아무것도 없음조차 없는 완전한 무의 바다 위에, 오직 나의 잠든 의식만이 번데기 안에서 표류했다.

그리고 나는 서 있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던 것처럼, 누군가 나를 낚아 올려 흰색 방에 집어넣었다. 나는 '흰색'과 '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번데기 껍질이 찢어지고 굳어있던 의식이 움직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 목소리는 나를 V-3라고 불렀다.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고 만져보았다. 피부가 희다. 몸 위를 덮고 있는 건 영 어설프다. 백색 천 두 장을 끈을 사용해 성의없이 앞 뒤로 설겁게 이어놓은 것 말고는 어떤 옷도 몸에 붙어있지 않다. 가슴팍은 불룩 튀어나왔는데 허리는 안으로 들어가 있다. 손목과 발목이 손아귀 안에 쏙 들어온다. 손으로 머리를 쓸자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묻어나온다. 길이를 재어보니 정수리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온다.

"......"

방은 흰색이다. 주사위처럼 모든 면과 변이 고르다. 주사위의 눈은 단 하나다. 그 밑으로 붉은 것이 새어나온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선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색깔인가. 나는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리와 옷 밑단이 붉게 스며든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만져보고, 또 그것을 손 안에 쥐고 조물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원래 있던 곳으로 떨어진다. 손에서 쇠 냄새가 난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새어나오는 것들을 손으로 걷어내고 몸을 낮추었다. 뺨을 바닥에 붙이고 문 아랫틈을 통해 그 밖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자 한다.

31 이름 없음 (luA0tfHdFM)

2020-11-20 (불탄다..!) 01:14:12

>>30
(당신이 문 틈 아래를 보면, 그곳엔 피웅덩이가 이어져있다. 핏물의 근원지는 아마도 문 바로 앞. 그리고 피웅덩이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지금 당신이 있는 방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흰색만이 펼쳐져있는, 아무것도 없는 방처럼 보인다. Memento Mori. 그 글자가 당신의 부글거리는 뇌수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일격의 고통이 엄습해왔지만 정말 일순이었을 뿐, 금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당신은 불안해질 수도, 호기심에 찰 수도 있겠지만 선택지는 결국 하나 뿐이다.)

32 이름 없음 (QS/N1JfP9Y)

2020-11-20 (불탄다..!) 01:40:12

>>31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해라

Hominem te esse memento너는 그저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이다

Nam mors indecepta너는 결코 죽음을 속일 수 없다


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었다.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까지의 호기심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찾아온다. 본능적인 공포. 죽음, 피, 빨간색. 나는 황급히 방의 구석으로 달려갔다. 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수십 분을 -내가 만약 분의 개념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 그렇게 있다가, 나는 마침내 일어나 다시 문 앞으로 돌아갔다.

"으으..으..."

표정을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손잡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나는 손가락 끝으로 손잡이를 몇 번이나 건드렸다. 그러다가 결국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돌렸다. 금속의 차가운 질감과 기계 부품이 자그락거리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손잡이를 쥔 채로 문을 조금씩 열고 들어간다.

33 이름 없음 (cfOrJ3xjSo)

2020-11-20 (불탄다..!) 23:27:42

>>20

살아있는 인간은 죽은 자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의 법칙이다. 그랬을 터인데 황당하게도 낯선 이가 말을 걸어왔다.

"너, 너, 내가 보여?"

예기치 못한 일에 오히려 귀신인 자신이 놀라버렸다.

"거래? 내가 왜? 그런 거 없어도 너 하나쯤 쫓아내는 건 쉬워."

여인은 팔짱을 끼며 코웃음쳤다. 우습다. 자신이 지금까지 쫓아낸 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를 만났는데, 이대로 쫓아내긴 아쉽다. 수많은 혼잣말들 사이에서 대답이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 듣는다고 손해보는 건 아니니까. 뭔지 말이나 해 봐."

// 답레를 놓쳤어. 미안ㅜㅜ

34 이름 없음 (cfOrJ3xjSo)

2020-11-20 (불탄다..!) 23:28:45

>>33 은 >>22 의 답레야.

35 이름 없음 (QPvY.AVZUE)

2020-11-21 (파란날) 19:15:36

>>28 기다리는중!

36 이름 없음 (OkjMouRHgo)

2020-11-21 (파란날) 19:19:04

>>35 지금 쓰고 있어~ 오늘 9시까지 답레 올릴게 미안해 8ㅁ8

37 이름 없음 (QPvY.AVZUE)

2020-11-21 (파란날) 19:25:50

>>36 헐 그런줄 모르고;; 천천히 써 천천히!

38 이름 없음 (OkjMouRHgo)

2020-11-21 (파란날) 21:10:47

>>28
산보를 하러왔다는 얘기를 하듯 시답잖다는 어투의 말들이 귓가에 멍멍하게 울렸다. 이런취급은 그날 이후 10년만인가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앞에서 방만하게 구는 자 따윈 본적이 없었다.

'이유야 내 앞에서 감히 멍청하게 구는 유사 유인원들은 그 즉시 목을 따주었으니.'

자신의 머리위에 서서 놀겠다는 의도를 가진,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그 어떤 이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젠 그따위 거치적이는 일을 볼 장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다 꺼져가는 심장박동이 거세지고 단전에서 부터 불길이 옮아 머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입안에 고인 핏물이 가느다란 줄기를 남기며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도 무시하고 눈에 날을 세워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앞의 작자를 바라보았다.

'우습나. 우습겠지. 젠장 좆같은.'

참자. 지난 날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저런 자들은 지겹도록 보지 않았었나. 먹잇감 하나를 물고는 질릴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끈질긴 맹수들. 더 이상 수작에 놀아나선 안된다. 다시 흔들리는 순간 저 괴인에게 확실하게 목줄을 잡았다는 확신을 던져주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곤 천불이나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홧홧거리는 속을 삭였다. 서릿발 같은 입김이 나와 얼굴을 식힌자리를 싸늘한 겨울바람이 지나가 얼얼했다.

" 장난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그렇게 입맛만 다시다간 기껏 잡은 유흥거리가 죽을 수도 있지 않겠나."

빈정이는 목소리가 다 쉬어가는 목에서 거슬린 쇳소리를 내며 나왔다. 장시간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목안이 따끔거렸다. 악마라 그럴듯했다. 세상의 모든것으로부터 내쳐져 낭떠러지로 굴러떠러진 자신을 쥐곤 재밌어하는 이가 악마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머금고 입매를 비틈과 동시에 짐승을 닮은 샛노란 안광이 순간 기묘한 금빛이채를 내었다. 거대한 날개가 희미한 선을 쏟아 내리귿던 달빛을 가리고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친. 인외의 것이 바깥에 존재한다는 얘긴 어렴풋이 들었지만 단 한번도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은적도 생각하여 본적도 없었다. 눈앞이 순간 깜깜해져 앞으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것인가 저절로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순간 입술이 벌어지고 이물질이 고인 혈향과 함께 뒤섞였다.

"...! 무슨 짓거리야!"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경악인지 정체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몸이 벌벌떨렸다. 묘하게 방금전보다 힘이들어간 몸을 움직이려 시도하려 하자 부유감이 들고 중심이 아래로 쏠려 짧은 신음을 흘렸다.

정신차릴 틈도 없이 옮겨져 매트리스에 내팽겨쳐지자 다시 신음성을 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세차게 뛰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활기가 도는 몸상태와 방금전의 이상행동의 연관성이 떠오르는 것을 무시하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가정집인가.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옆의 매트리스가 푹 꺼지고 여태 어둠속에 가려져있던 상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뭐하려는 거지?"

계약의 자세한 내용따위 어차피 협상이 가능할거라곤 기대도 하지않았다만 적어도 어떠한 항목이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젠장맞을 악마에게 상식을 바라는것 자체가 잘못이지. 역시나 저 맘대로 상황을 정리하는 상대를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잠시후 어마어마한 격통이 전신을 강타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뜨곤 난간을 붙잡았다.

.dice 1 10. = 7
1~5.기절
6~10.의식있음

39 이름 없음 (QPvY.AVZUE)

2020-11-21 (파란날) 22:46:28

>>38

손에 돌돌 만 계약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자 의식이 살아있는지 힘껏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딱 정신 놓기 좋을만큼 마력을 넣어주었을텐데 그걸 정신력으로 버티는 인간을 보면 참 어리석다는 감상 밖에 들지 않았다. 애써 배려해줬는데 그걸 걷어차다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둘 다인가? 인간은 정말 변치 않는구나. 나는 내 고급 침구를 식은 피범벅으로 만든 그를 보며 조롱하듯이 말해줬다.

"그냥 눈 딱 감고 정신 한번 놓았다 잡으면 전부 끝나있을텐데 왜 아득바득 깨어있으려고 하는거냐? 편해지라고 해준 응급처치가 무쓸모해졌잖냐. 어휴 미련하다 미련해. 인간이란 언제 어느 때든 미련하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말 못 봐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다 한술 더떠서 손등으로 그의 뺨을 두번 툭툭 두드렸다. 봄바람처럼 가볍디 가벼운 두드림이었지만 격통 중인 그에게는 골이 흔들릴만치 아프게 느껴질 거란 걸 알면서 그랬다. 느끼기 싫었으면 순순히 정신을 놓았어야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보아하니 약을 써도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할 거 같고. 그럼 약만 아까우니까 그대로 계약서 내용이나 들어봐. 불만 있으면 말해도 되는데 할 수나 있겠냐?"

그의 고통을 덜어줄 의향은 전혀 없어서 그 옆에 앉은 그대로 하고싶은 말들을 떠들어댔다. 어차피 남는게 시간이고 또 시간이라 그의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러고 있어도 됐다. 곱게 말아놓았던 계약서를 도로 펴서 들고 잘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그의 눈 앞에서 휙휙 흔들었다. 보여도 인간의 문자가 아니니까 못 읽을게 뻔했지만 일부러 약올라보라고 그런거였다. 그야 나는 악마니까. 잔뜩 약올려놓고 혹시나 뺏기기 전에 휙 가져와 내용을 한줄한줄 적당히 가위질쳐서 읽어주었다.

"그러니까 위는 서문이라 패스. 나랑 네놈이 계약한다 뭐 그런 내용이야. 본론만 말하자면 이 계약은 내가 네놈을 살려주고 신체를 강화시켜주는 대가로 네놈은 일정기간 이 몸의 보디가드가 되면 된다 이거야. 일정기간이라고 해둔 건 네놈이 얼만큼 강해졌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정확한 기간은 아직 몰라. 예상해보건데 못해도 최소 세달은 될 걸?"

손가락 세개를 쫙 펴서 그에게 보이도록 내밀었는데 이거 역시 보이긴 할라나. 입꼬리를 삭 올려 경박한 웃음을 지으면서 선심 쓴다는 말투로 나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몸도 고쳐주고 더 강하게 해주니까 완전 좋지? 그렇지만 솔직히 이렇게 아픈데 왜 그런거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들긴 하지? 그래서 특별조건을 하나 넣어줬어. 본 계약의 대가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요구사항 하나를 들어주는 걸로. 아 대가의 기간을 줄여달라던가 그런 건 안 돼. 그랬다간 나한테 패널티가 돌아오니까. 자 내용은 여기까지. 질문 있냐? 아니 그 전에, 정신은 아직 깨어있어?"

계약서를 근처로 홱 던져놓고 그에게로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골목길에서 그의 턱을 쥐어올렸을 때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히죽거렸다. 이렇게 근처에서 보니 또 군침이 도는게 아주 살짝만 물어볼까 하는 장난기가 들다가도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참자는 기분이 동시에 들어 혀로 그의 턱에 남은 핏자국을 한번 핥아올리는 걸로 참아주기로 했다.

40 이름 없음 (qmpnDrHvVk)

2020-11-22 (내일 월요일) 01:34:12

" 젠장... "

짧게 머리를 자른 채 페도라를 깊숙히 눌러 쓴 남자가 나지막히 욕설을 중얼였다. 오후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남자는 멀끔히 정장을 빼입은 채 제 옆으로 각진 서류가방을 꼭 붙여놓고 있었다. 제법 부내가 나는 옷감과 반짝이는 시계. 분명히 말할 수 있건대, 불안과 격동의 시기였던 1930년과는 제법 어울리지 않는 외관이었다.

개업하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의 테라스에는 낭만에 젖은 연인들이 가득했다. 혼란의 시기에도 그들은 꿋꿋히 사랑을 피워냈다. 젠장, 젠장. 그저 젊음의 새싹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분명 여섯이 정각이 되기 전에 온다고 했거늘. 이런 중대한 자리에서도 기어코 지각을 하고 마는 당신이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를 쥔 남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 일념 하나로 당신을 만나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이상의 돈을 썼고, 죽음의 문턱 직전에 동앗줄을 붙잡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남자가 제 미간을 거칠게 문질렀다. 얇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담배는 재떨이에 짓이긴지 오래였다. 설마 그 돈을 들이고도 사기를 당한 건 아니겠지. 미간에서부터 손길을 끌어 제 얼굴을 어루만지던 남자가, 먹이를 포착한 맹수의 눈으로 카페의 입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발견한 것이다.

" 늦었잖아. "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따지듯 입을 열었다.

" 아니, 아니야. 그건 됐어. 됐고...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지. "

남자가 서류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금과라도 들은 듯 제법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만들었다.

" 돈은 필요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주지. 내 요구는 딱 두 개야. 나를 이 도시에서 탈출시켜주는 것, 나머지는 빌어먹을 내 보스가 나를 영원히 찾지 못하게 해주는 것. "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진 모습이었다. 그대로 말문을 막은 남자는 카페 안을 한 번, 밖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자세를 낮춘 채로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 죽여도 상관 없어. ...할 수만 있다면. "

망할, 시간이 없다고. 남자가 불안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41 이름 없음 (Vbg8poHfwU)

2020-11-22 (내일 월요일) 02:39:40

>>40
"내가 네 보스 모가지 자를 수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했겠어~ 안 했겠어~? 그게 그렇게 애기 손모가지 비틀듯 되는 일이 아니야~."

"그보다 사람이 구석탱이에 몰리더만 물독 빠진 생쥐처럼 눈깔이 아주 뒤집어지려 하네. 아이고~ 그렇게 안 굳어도 돼~. 내가 여기 와 있다는게 무슨 뜻이야? 벌써 주변에 내 사람 쫙 깔렸어~. 지금은 바늘 하나 못 들어와~."

회색 정장 조끼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탁자에서 의자를 당겨 꺼내 그 위에 앉았다. 한쪽 팔로는 손을 휘적거리고, 다른 팔로는 그 팔의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부드럽게 너스레를 떤다. 나름 뒷세계의 기둥 중 하나라지만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그보다 너 여기서 나간다고 새벽이슬처럼 싹 쨀 수 있을 것 같니? 어휴~ 힘들걸 힘들어~? 도시서 나가기만 해서 될 일이었으면 네가 돈 퍼부어가면서 나한테 왔겠어~? 어디 항구 밀수꾼이랑 작당하고 석양 지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게 훨씬 싸게 먹히지~."

"안 그래도 그간 분위기를 보니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예수님 옆에 못을 박아버릴 기세던데~. 암만 돈을 많이 받았어도 평생동안 안 들키게 뒤를 봐달라는게 말이 돼~ 안돼~? 누가 보면 도망은 둘째치고 날 돈으로 후려쳐서 예쁜 옷 입혀놓고 메이드 삼으려는 줄 알겠어~. 내가 암만 사랑스러워도 그건 좀 아니지~."

당신의 조급함은 전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는 흰 궐련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반쯤 탄 성냥을 휘둘러서 껐다. 잠시 눈을 감고 매캐한 연기를 음미하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연다.

"하아~ 이 짓도 오래오래 해처먹으려면 담배도 끊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내가 살려고 일하는지 일하려고 사는지 모르겠어~. 아이구~."

"대체 뭔 짓을 저질렀길래 저것들이 저래 미쳐 날뛰니? 이게 무슨 사태인가 해서 알아보려 했는데, 당신 보스가 소리지르다가 목이 쉬었다는 것 빼곤 도통 뭔 일인지 알 수가 없더라~. 이렇게까지 정보에 락이 걸린 걸 보면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거야~ 그렇지이~? 나두 뭘 알아야 일을 하지~. 나한테 조금만 말 좀 해봐~ 응~?"

42 이름 없음 (w2zy7DjQQs)

2020-11-22 (내일 월요일) 17:23:11

>>39

쏟아지는 고통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떨리는 손을 쥐었다. 손톱면이 나이프에 찔린 환부에 스쳐 화끈거렸지만 그를 뛰어넘는 온몸에 퍼지는 통증에 입을 꽉 다무는 움직임만을 겨우 취할 수 있었다. 옆에서 잔뜩 신나 알짱이는 놈의 모습이 가늘게 뜬 눈거풀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정신 사나워 신물이 올라오는 속으로 말하지 못할 욕설을 짓씹었다. 무어라 경박하게 떠들어대는 움직임이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자신을 비웃는 내용일거라 확신이 들어 손마디를 뚜둑 소리나게 움켜쥐었다. 망할 새끼가. 또 무슨 기가 찬 생각을 하는지 근처에서 정성스레 야단을 떠나 싶었더니. 가벼운 촉감이 뺨가를 조롱하듯 두드리는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골이 울리고 이명이 귓가에서 윙윙거려 쥔 손을 풀고 시트를 움켜잡았다. 버거운 고통을 견디는 몸이 땀을 흘려대고 이미 흘린 피로 너절해진 셔츠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게 상당히 거슬렸지만 의식이 멀쩡해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작자 옆에서 곧이곧대로 정신을 놓고 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타들어 갔다. 이토록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 몰렸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본가에서 나온 후에 이런 추태를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을 실컷 조롱하는 것도 지겨워졌나 잠시 다른데를 바라보며 무어라 신나게 떠들더니 불쑥 종이를 내밀었다.

멍멍해진 귓가에 쏟아지는 말들이 흐려졌다 선명해져 모든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계약서라는 단어가 어렴풋이 들려 숨을 몰아쉬고서 눈에 힘을 주었다. 환해진 배경에 적응이 덜된 동공으로 빽빽한 글씨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자니 두통이 배로 심해졌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심지어 대학에 아시아인 동기가 있어 잠시 보던 중국어도 아닌 기묘한 문자가 나열되어 있는 종이가 패턴이라도 찾아내어 암호문처럼 해석할 틀이라도 만드려는 틈에 금방 감추어졌다. 고통과 낙담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놈에게 보이기 싫어 고개를 내리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내려와 시야가 가려졌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상대에게 정보를 의존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 없는 상황이라니 최악이다. 앞으로 몇 달간은 제대로 힘들 것이 뻔히 보였다.

지금 그가 말한 대로라면 적어도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전제 안에서 단순히 마땅히 줄 역할이 없어 충실한 개새끼 노릇이라도 하라 주는 명칭인지 진실로 필요로 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보디가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대신 요구사항 하나를 말할 권리를 가진다는 걸로 정리가 된다. 막상 듣고 보니 상상했던 최악보단 별거 아니긴 하지만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선 다시 장난기가 동했는지 얼굴을 들이미는 상대를 응시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는 예측하는 것도 피곤해 뭐 하냐는 감상을 담아 쏘아보던 중 턱밑에서 뜨뜻하고 미끌한 촉감이 올라왔다.

진짜 뭐하자는 거지. 내가 무슨 디저트라도 돼? 돌발행동에 애써 유지하던 표정을 적나라하게 일그러뜨렸다. 고통을 참기에도 바빠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시트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쥐고선 겨우 입을 열었다 닫았다. 지금 몸이 무거워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평정이 무너지고 감정이 올라와 머리가 뜨거워지자 겨우 잡은 의식이 흔들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뒤의 오너가 12월 초까지 굉장히 시간이 없을 예정이라 오늘 이후로 이렇게 길게 주고 받는게 너무 힘들것 같아 ㅠㅠ. 진행되는 걸 보니까 서로 풀릴것도 많아보이고 꽤 길어질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1;1로 따로 어장을 만든다면 12월초까지 짦게 일상이나 잡담등을 주고받거나 생존신고를 할 생각이야. 만약 1;1을 하기 힘들다면 지금 얘가 기절한걸로 해서 일차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 종료된걸로 엔딩을 내야할것 같아...

43 이름 없음 (5Ov74AZROQ)

2020-11-22 (내일 월요일) 22:27:26

>>42 // 확인 늦어서 미안. 1:1도 괜찮긴한데 너참치 현생에 어장까지 끼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어. 그러니까 너참치 현생에 시간적 여유가 나아지고서도 이 내용으로 1:1을 하고 싶어진다면 그때가서 어장을 세우는 건 어떨까? 괜히 무리해서 겸하다가 너덜너덜하게 지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버려서. 생존신고도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44 이름 없음 (w2zy7DjQQs)

2020-11-22 (내일 월요일) 22:38:17

>>43
아니야 괜찮아. 나도 몇번 늦었고. 밤에 생존신고를 하는것 정도는 괜찮아. 단지 걱정되는게 있다면 소통을 거의 못하니 너참치가 지치는 거지. 12월 초 10~14일 후엔 확실히 현생이 풀릴거라 그 후의 일은 크게 우려되는건 없기도 하고. 게다가 10일하고 며칠후에 서로 찾는게 가능할까 싶기도 해서. 만약 부담스럽다면 1:1로 억지로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아

45 이름 없음 (5Ov74AZROQ)

2020-11-22 (내일 월요일) 22:51:48

>>44
사실 너참치 말대로 소통이 거의 없을지도 모를거란 점이 좀 걸리긴 했어. 나로서는 생존신고만 하기보다 아예 확실히 집중할 수 있는 시기에 딱 시작하는게 좋거든. 그래야 썰도 잘 나오고 잘 풀리고 그러더라고. 찾는거는 걱정 안 해도 되는게 나 거의 지박령 수준이라;;; 혹시나 중간에 너참치가 내용에 흥미를 잃어서 안 찾게되도 괜찮기도 하고. 확실한 건 12월 중순쯤에 와서 찾으면 분명 나 있을거야. 1:1이 부담스러운게 아니니까 그것만은 알아주길!

46 이름 없음 (w2zy7DjQQs)

2020-11-22 (내일 월요일) 22:53:46

>>45
Ok~ 알겠어! 1:1은 서로 성향이 있으니까 맞추는게 더 좋겠지. 그럼 12월 초 중순쯤에 못다말스레에서 보자~!

47 이름 없음 (5Ov74AZROQ)

2020-11-22 (내일 월요일) 23:03:44

>>46 그래! 너참치 현생이 꼬이지 않고 술술 잘 풀리길 바라! 나중에 보자!

48 이름 없음 (a1aN6xm.pI)

2020-11-24 (FIRE!) 00:21:46

끌올

49 이름 없음 (DoIeWxOONc)

2020-11-27 (불탄다..!) 13:32:07

'베사일리스 궁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되다. 4년 전쟁의 종지부.'

'패배 속에서도 우리는 승리를 추구한다. 신이시여, 조국을 보우하소서!'


땅바닥에 버려진 신문 한 부가 자동차 바퀴에 휩쓸려 볼썽사납게 날아간다. 고물상 무리가 포탄 껍질 따위를 수레에 가득 싣고 걸어간다. 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은 살풍경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표정이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도 보인다. 고풍스러운 자동차 뒷자석에 앉아있는 여성은 눈을 돌렸다. 푸른 눈은 새벽빛 하늘처럼 공허하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가족 분들께서도 돌아오신다는 소식 듣곤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나이 든 기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여성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는 그녀의 뒤바뀐 인상이 낮설었다. 그녀가 저택을 떠나갈 때는 반드시 조국과 민족을 지키겠다며, 웃는 얼굴로 호기롭게 떠나갔었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귀향길 기차 안에서 3시간 정도를 생각했다. 역시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패전이라도 전쟁이 끝난 게 그녀는 안심스러웠다. 그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대로 군인이었던 가문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잘못하셔서 패전한게 아닙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하루만에 사단이 몇 개씩 녹아내리는 그 지옥을 마다하지 않고 싸우셨....."

"한스. 나 좀 피곤한데."


말허리를 끊어먹자 기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산길을 올라 예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의 저택으로 향한다. 차 문을 열자 습기 먹은 바람이 느껴진다. 그녀는 금발 위에 모자를 눌러썼다. 차에서 내리자 가슴에 달린 금속판이 흔들린다. 상이훈장, 그리고 전투 참전 기장이었다. 기사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투박한 전투 참전 기장에 아로새겨진 그 최후의 전투는 마치 악마의 모루 같았다고 들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작달막한 몸은 칼처럼 다려진 장교 제복과 그닥 어울리진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힘들게 대문 앞까지 걸어가 섰다.

"이런 몸으론 뭘 하지도 못하겠어. 이런 개같은..."

그녀는 작게 뇌까리며 대문을 두드린다.

쿵 쿵 쿵

50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1:40:51

울고 싶으면 울어. 괜찮으니까. (당신을 코트 안으로 품어안은 남자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는 당신이 울음을 다 울을 때까지 서있을 모양이었다.)

51 이름 없음 (ZhVBTWqF02)

2020-11-29 (내일 월요일) 11:49:20

>>50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얄밉다는 듯, 주먹을 쥐어 당신을 몇번 때리려 했지만 이윽고 힘없이 떨어졌다. 울음소리를 참으려 했는지 딸국질같은 소리만 새어나오다가 어느순간 울음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울음 탓에 엉망으로 갈라지고 끊어진 목소리였다.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52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2:00:17

>>51
(남자는 조용한 눈빛으로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양을 지켜보았다. 당신의 주먹이 힘없이 떨어지자 손을 깍지 껴서 쥐고 손바닥을 조용히 문질렀다. 남자가 입은 코트 안쪽이 당신의 눈물로 젖어갔다. 당신이 묻는 동안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당신의 머리를 당겨 어깨로 안으며 나직히 말했다.) 네가 혼자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53 이름 없음 (.PPS4cysng)

2020-11-29 (내일 월요일) 12:43:08

>>52
(잡힌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손등을 감싸안았다. 줄곧 아래를 향해있던 시선은 당신의 말에 퍼뜩 들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당신의 의중을 샅샅이 파헤쳐보려는 것처럼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가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당신을 노려보다시피 하다, 얼마 가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고백이라도 하는 거야?

54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2:54:59

>>53
(손등에 닿는 당신 손가락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했다. 당신을 위로하고자 손을 잡았는데, 이쪽도 함께 위로받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시선, 흔들리는 눈동자. 당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노려보는 듯 하다가 얼마 안가 고개를 떨구면, 목소리를 눌러 웃는다. 당신이 웃는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웃었다.) 고백, 하면 받아줄건가? (담백한 어조로 말하며 당신의 붉어진 눈가를 한손으로 쓸었다.)

55 이름 없음 (TCpP6HMGlY)

2020-11-29 (내일 월요일) 13:01:20

>>54
(손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헛웃음을 지었던 입매가 일그러졌다. 네가, 나한테? 질나쁜 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담백한 말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려버렸다. 입술이 꾹 다물렸다.) 네가 너무 손해보는 장사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긍정이라기에도 애매한 답이 나왔다. 희미하게 웃으며 제 손으로 당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려했다.)

56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11:47

(당신의 일그러지는 입매를 매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꾹 다물리는 입술의 입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귀여운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 모르는 것 같지만.) 인간관계에서 전혀 손해본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이들을 대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릎을 숙여 당신의 손에 제 볼을 갖다대어주며 말했다.)

57 이름 없음 (6oWNgqBEas)

2020-11-29 (내일 월요일) 13:35:45

(머릿속의 생각들이 한순간, 뒤엉켜버렸다. 꼬여버린 생각의 실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심호흡하듯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진심..이겠지, 그래. 언제부터? (전혀 상상도 못했다. 아니, 그 정도는 이니었다. 알아차리지 못한 척 굴었다. 네가 나한테 그럴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당신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58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47:09

>>57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생각했다. 당신의 손길을 한참 느끼면서 있다가 손바닥에 입술을 내리누르고 떨어졌다.) 네가 전애인이랑 헤어지고 우리 집에서 묵었을 때 있잖아. 아마 그때부터. (어깨에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해는 아직 떠 있었다. 여우비가 올 모양이었다.) 비 오네, 어디라도 들어가자. (당신을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밥 아직 못 먹었지?

59 이름 없음 (oTaoBLAPo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58:29

>>58
(손이 잠시 허공을 떠돌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것이 너의 고백 때문인지 손바닥에 느껴진 생경한 감각 때문인지 헷갈렸다.) 오래도 숨겼네. (마지막 이별은 몇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냈고.) 오늘 비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햇볕은 쨍쨍했다. 이런날을 뭐라 그러더라, 여우가 시집긴다고 했나.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았다. 내밀어진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나야 뭐, 그렇지. 넌 먹었고?

60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4:07:42

나도 아직. (당신이 내민 손을 잡으면 조용히 미소지었다가 마주 깍지를 꼈다. 팔과 팔이 스쳤다.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어 제게 더 가까이 붙였다.) 오래간만에 집에서 요리 해줄까? 재료 있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더 떨어지기 시작하자, 제 재킷을 벗어 당신의 머리를 가려준다.) 역시 너한텐 약간 남네. 아쉬운대로 그냥 덮고 있어.

61 이름 없음 (/QQ9.0rkYE)

2020-11-29 (내일 월요일) 14:57:31

>>60
그거 잘됐네. (당신에게로 몸을 가까이 하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나야 좋지, 뭐 해줄려고? (키득거리며 웃다가 머리에 재킷이 씌워졌다. 당신의 체취가 훅 다가왔다. 열이 오른 귓가를 감추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귀를 가렸다.) 나한테 주면 넌 어쩌려고? 그러다 감기 걸린다.

62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6:43:46

>>61
...! (당신이 가까이서 싱긋 웃으면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당신이 키득키득 웃는 사이 재킷을 씌우고 나서 모른척 말한다.) 그, 그냥, 집밥 종류. (후드를 덮어서 머리를 가렸다가 당신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말에 아직 약간 얼굴을 붉힌 채로 미소지었다.) 그럼 그 땐 네가 돌봐줘.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재킷은 당신에게 덮어준 채였다.)

63 이름 없음 (vPjBH676zA)

2020-11-29 (내일 월요일) 18:08:58

>>62
(당신이 말을 더듬자 약간 의아한 기색을 보인다.) 그것도 좋지. 네가 해준 건 언제나 맛있었으니까. (당신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라, 이걸 이렇게? (깔깔 웃다가 무엇인가 깨달은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잠시만, 그러면 고백은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는 거야?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면 내가 먼저 해야겠다. 좋아해, ㅡㅡㅡ. 나랑 사귀어줄래? (붉어진 귀는 이미 재킷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당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푸르른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64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20:00:34

>>63
기대해, 오늘도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당신의 말에 기운이 돋아 미소지었다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당신이 그렇게 웃을 때마다 내 마음이 두근거리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 어쩐지 조마조마했다.) 으, 응? (고백이라는 말에 약간 정신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당신이 눈을 찡긋거리면 그만 웃고 말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당신이 먼저 좋아한다 말해오면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방금, 뭐라고.) -나, 나를, 좋아한다고. (양손으로 제 화끈거리는 뺨을 덮었다가 넘치는 사랑스러움에 당신을 끌어안았다.) 나는 사랑해. 사귀자, 우리.

65 이름 없음 (4tLtLcyoOI)

2020-11-30 (모두 수고..) 09:43:37

>>64
그 정도야? 오늘은 또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되는데. (말을 마치곤 짓궃게 씩 웃었다.) 응, 너를- (당신의 뺨이 붉어진 걸 보고 파하- 웃음을 터뜨렸다. 한손으로는 당신을 마주안고 다른 손으로는 당신의 볼을 살살 쓸었다.) 아, 어떡해...나 이미 콩깍지 꼈나봐! 너무 귀엽다, 진짜.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릴 정도로 한바탕 웃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응, 나도 사랑해.

#답이 늦어서 미안해. 어젯밤에 일이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66 이름 없음 (eNx4/xvOP.)

2020-11-30 (모두 수고..) 13:26:09

>>65
한참 울었으니까 맛있는거 먹고 기운내야지. 안 그래? (당신이 웃는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당신이 저를 마주 안으면 한층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볼을 쓸어주는 당신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잠시 편안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난 이미 예전부터 네가 하는 행동은 다 예뻐보였는데, 이거 어쩌지. (웃느라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말에 당신의 이마에 이마를 툭 맞대고 웃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잠깐만 이러고.. 잠시만 더 이러고 있다가 들어가자.

#괜찮아! 답레하는데 부담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

67 이름 없음 (Cph13PWk3o)

2020-11-30 (모두 수고..) 19:29:00

흔들리는 붉은 빛, 붉은 하늘.
그 날의 석양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너와 함께.

늦은 오후. 시간으로 따지면 5시쯤. 적막한 교내에 방과후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퍼지면, 느즈막한 이 시간까지 남아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교사 밖으로 나온다. 그들은 어느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외의 용건으로 남아있던 학생들이었다. 밖으로 나온 뒤 저마다 두서넛씩 무리를 지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조용하던 학교와 운동장에 자근자근 발소리와 웃음소리들이 잔잔히 울려퍼진다. 멈춰있던 물이 흐르듯이 지나가는 풍경에서 눈을 살짝만 돌려보면,

"선배. 이제 나오는 거에요?"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영원히 바라지 않는 사진처럼.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저를 기다리게 한다니까요. 뭐. 그럼 점도 포함해서 좋아하지만요."

한 학년 아래의 그녀는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곱게 주름이 접힌 교복 치마가 걸음을 따라 흔들린다. 그와 거리가 좁아지자 멈춰서 소리없이 눈을 깜빡 접어 미소를 짓고 한 손을 내민다. 가는 손가락이 인상적인 하얀 손이었다.

"선배 기다리느라 손 다 식었으니까, 선배가 따뜻하게 해주세요. 그래줄거죠?"

어서 잡아달라는 듯이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그녀가 그를 올려다본다. 부드러운 갈색의 눈과 머리칼이 저녁 노을에 물들어 불그스름하다. 붉음에 대조적인 하얀 손은 잡으면 사라질 것처럼 보여도, 그럴 일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68 이름 없음 (0FKiwyOv4Y)

2020-11-30 (모두 수고..) 21:32:19

>>67
흥미가 생겨서 덥석 가입한 동아리였지만 활동은 예상외로 무척이나 힘들었다. 중간에 졸 뻔한 것을 다리 꼬집기로 간간히 버텼고 자꾸만 제자리를 벗어나려는 혼을 몇 번이나 끄집어 원래대로 두었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열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대답에 의지박약이 어떻게 열정을 낼 수 있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이 백 중에 오십은 넘을 것이다. 열정의 까닭은 그 애다. 뭐 까닭이랄 것도 없고 열정 자체가 그녀라 해도 무방했다. 혼자서는 힘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럽지만 이것만이라도 확실히 단언해야 나 자신이 온세상에 떳떳해지겠다. 세상아, 아주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그 애가 있어서 내가 열정을 냈다! 그 애가 있어서 냈다고!

‘역시 매일 기다리는 건 지치겠지.’

계단을 내려가고 인파가 거진 향하는 방향을 보고 걷다보면 뚜렷하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동아리 내내 상상만 하던 부드러운 갈색이 저곳에 실존해 그녀가 없는 이곳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침내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 흐릿하던 체취가 진해져왔다. 추워보이는 양 뺨이 안쓰러워 눈썹을 기울였지만 ‘좋아한다’는 소리에 연신 헛기침만이 나왔다. 남 속내 간지럽히는 말만 모아둔 책이라도 열심히 읽는 건지, 머리가 어질어질한 적이 한 두 번도 아니다.

“예, 예. 해 드려야죠.”

처음엔 하얀 손을 제 두 손으로 막 비비다 놀이 지는 하늘과 땅으로 가기 위해 한 손으로만 살짝 잡아당겨 선두로 나갔다. 은연 중에 붉은 빛을 가려 뒷사람이 사라질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본인을 비웃으며 손만 더 꽉 쥐었다.

69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1:58:16

여기까지 인 것 같다. 주인. (피로 점철된 바닥이 지평선 너머에서 비쳐오는 밝은 오렌지빛으로 점차 물들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당신의 손에 들린 검이 웅웅거리며 소리를 냈다. 길고 긴 싸움. 주인이라 부른 이와 첫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같이 성장했고, 같이 모험을 했으며, 같이 생사를 넘나들었다. 검의 내구도는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고, 단순한 수리라는 걸로 고쳐질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금의 주인을 잃고싶지 않아 매 위기들을 끊임없이 베어왔다. ─이제 이 이후로, 에고 소드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말은 하지마. 약해빠진 주인을 여기까지 끌고오느라 힘을 다 쓴 거 뿐이니까. (괜히 퉁명스런 목소리를 낸다. 웃음기를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70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2:12:22

>>69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더는 물건이 아닌 동료라고 생각할 만큼. 맨 처음 그를 뽑아들었던 순간 운명이란 걸 알았다. 당신을 쫓는 사람이 나 역시 뒤쫓았지만 그에겐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고 난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완전히 손에 쥘 수 있던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단 걸 모르고서 기뻐한 시간이 거짓말 같다.) ...그럴 법도 하겠지. 나는 못난 주인이었어. 너 같은 명검엔 어울리지 않는 주인이고말고. (칼집에 새겨진 낡고 닳은 문양을 손으로 덧그렸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찾아주기 전에 떠나보내는 게 유감이야. 아아, 나도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워. 하지만 네 덕분에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를 들어 눈부신 석양에 비춰 보면 희미한 오렌지빛이 살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실금 사이사이로 비춰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어쩌지. 너의 근원으로 널 다시 데려다놓으려면 다른 검을 쥐어야만 할 텐데. 네가 아닌 검을 쓰고 싶지 않아졌어.

71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2:23:16

>>70
글쎄...낯간지러운 말은 딱 질색이라서. 잘 알지않나. (마치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백색의 고동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울려퍼진다. 그 박자는 물론 당신의 심장 박동과 일치하다. 하지만, 이쪽은 서서히 그 박자가 느려지며 어긋나고 있다.) 이제서야 깨달았냐. 망할 주인. 그러니까 잘 하지 그랬냐. 나도 너처럼 약한 주인의 손에 쥐어지고 싶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세기의 명검, 의지에 따라 그 백색은 모든 그림자를 베어내고 그 검날은 푸른 날의 구름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을 몰고다니는 저주받은 검이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또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기로 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붕. 마치 버럭 화내는 것처럼 한순간만 빛을 뿜어내자 칼날에 굳어있던 피가 순식간에 벗겨졌다.) 주인은 검을 쥐기 위해 태어났어. 내가 키운 역작이란 말이다. 지금의 주인이라면, 섬기는 걸 마다할 검은 없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고, 탁한 회색빛으로 뭉쳐들었다.) 주인은 그저 죽을 때까지 검을 쥐고나서, 늙어 죽기 전에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모든 검 중의 최강의 명검은 바로 이 몸이었다고. (짧지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주인, 거기 있나?

72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2:44:51

>>71
그래, 마지막까지 너답네... 부드러운 말이라곤 한 마디도 안 해 주고, 그 와중에 자기 잘난 건 잘 알아서. (느려지는 고동에 내 심장소리도 맞아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심장 고동을 통제할 수 없기에, 점점 그의 박자가 느려져간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같은 게 잡았는데. (많은 이들이 검을 노렸다. 마검이라고 불리는 그를 큰 사냥감을 잡는 것처럼 하나의 트로피로 가지려는 자, 금전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 그를 가지려는 자, 그에게 파멸할 나를 구하려는 과거의 현재의 인연들. 그러나 그의 주인은 언제나 나였다.) ...뭐- (화내는 듯한 그에게 놀라다가도 금이 깊어질새라 눈을 부릅떴다.) ... (긴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긍의 한 마디도 없이 흐려져가는 그를 바라봤다.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응. 밤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도 베어버리고, 주인이 원한다면 구름 위에서 운명을 연주하는 신의 현도 끊어 잘라버릴 수 있고, 자신이 부러져도... 주인을 살리는, 세계제일 성검의 주인이 여기 있지. (아직 듣고 있을까? 말라버린 목으론 기침을 내뱉지 않는 게 고작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도 잃어버린 나의 찬가에, 분명 그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73 이름 없음 (43mqMEzTB.)

2020-11-30 (모두 수고..) 22:52:40

살이 베일듯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당신과 나는 새하얀 눈이 덮인 설원에.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죄수들이 메고 떠난 새하얀 헝겊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허연 눈밭에 무릎을 처박은 당신이 처량하다. 죽음을 직감한 숲은 숨을 죽이고서 가련한 나뭇잎마저 숨을 멈춘다.

" …선택해. "

설원에는 오직 당신과 나. 그 뿐이었다. 무릎을 처박은 당신과, 허리를 꼿꼿히 펴든 나의 사이에는 긴 침묵보다도 무거운 시간과 추억이 내려앉았다. 당신을 담은 나의 눈이 시렵다. 차디찬 겨울 바람 때문일지, 처연한 그대의 숨소리 때문일지.

" 나를 죽여. 사람들에게 마녀를 잡았다고 말해. 그럼 당신은 사형에서 면하겠지. "

나는 당신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붉게 물든 눈조각이 낡은 신발 밑창 아래로 눌려버린다. 한 발짝 더 다사가자 조금 더 붉게 불든 눈덩이가. 다시 한 발짝 더.

" 아니면, 이대로 내 손에 죽던가. "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마녀, 상대는 마녀와 내통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남자. 상황은 남자가 총살형을 집행 받기 직전 마녀가 사형 집행인들을 죽이고 상대에게 선택권을 쥐어주고 있는 상황! 아무렇게나 이어줘도 좋아!

74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2:57:39

>>72
(이 성격은 본디 타고난 것이었다. 타고난 것이면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멀리 하고 싶은 곳으로부터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자신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도 정말로 변하지 않았구나. 당신과 함께 해온 시기는 자신이 살아온 시기에 비하면 아주 일부의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당신이라고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첫만남부터 어느정도 예감했는 지도 모른다. 일시적으로 빛을 뿜어낸 탓인지 더이상 이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소재로 만들어진 몸체 일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뎌진 칼날이, 정신이, 천천히 풍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새벽녘의 바람은 따듯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이름들은 이제 그만둬라. 이제 주인만의 이름을 만들어라. 나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말야. (당신의 걱정을 비웃듯이, 대답하고선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해서...이 몸을 쥐었던 것에 부끄럽지 않을 영웅이 되어라. 주인은...이전부터, 이 몸이 모든 걸 해줬다고 생각하지만...그렇진 않아. (내뱉는 말이 점점 더뎌지고, 에고소드의 정신은 천천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줄 말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죽음을 버텨낸다.) 주인은...이 몸의 첫번째 친구였다. 가족이었고, 동료였고, 또...또. (소리가 멎는다. 불어오는 바람이 수풀을 간지럽히는 소리만이 당신의 주변에서 맴돈다. 꽤 긴 침묵이 이어지다, 갑작스레 왁! 소리를 낸다.) 하, 놀랐냐, 주인. 자꾸 졸려와서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러니까...날 최대한 높이 치켜들어라. 제일 높은 곳에서 지켜봐줄테니. 알겠나, 주인, 아니, ─.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다.)

75 이름 없음 (Cph13PWk3o)

2020-11-30 (모두 수고..) 23:24:31

>>68
그의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실체가 있었고 분명한 실감이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차게 식은 손에 그의 손이 막 비벼지자 그녀가 작게 키득이며 웃었다. 해달라고 해주는 그 행동이 간지러워서, 간질거려서.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환히 웃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앞을 향할 때 그녀도 같은 방향을 향하며 가는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크고 든든한 그의 손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밀어넣고 꼬옥 쥐었다.

"그거 알아요? 선배 손은 항상 따뜻해서 손난로 대신 쓰기 딱 좋아요."

간질간질하게 깍지를 끼어놓고 천연스럽게 말을 하는 그녀. 앞을 향한 얼굴엔 희미한 웃음기가 감돈다. 금방이라도 돌아보고 농담이에요. 라며 할 것 같은데 하지 않는다. 대신 붉디 붉은 황혼을 드리우고 천천히 걸어간다.

"오늘따라 노을이 엄청 붉네요. 꼭 세상이 불타는 것 같아요."

그녀의 보폭에 맞춘 걸음으로 걸어가는 귀갓길은 정말 그랬다. 황혼이 드리운 것은 그녀와 그만이 아닌 온 세상이어서, 색채가 옅은 배경은 그야말로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가까이 가도, 손을 대도 전혀 뜨겁지 않은 불길로 감싸인 세상은 익숙하고 동시에 그립다.

"그래서 선배, 오늘은 어디로 갈래요? 늘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 아니면 제가 지금 가고 싶은 카페?"

답이 정해진게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하며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본다.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한결같은 빛이 빙글 감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니 다른 각도로 빛이 둥글게 감싸돈다. 시선에 한술 보태어 가는 손가락 끝이 그의 손바닥을 살짝 간지럽혔다.

76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3:34:27

>>74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이 탄생하는 순간 수많은 별이 축복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늘에서 막 내린 눈처럼 하얀 그를 보고, 그는 혹시 별으로부터 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의 동지인 당신을 찾으러 눈이 계속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일까라며. 더는 어린애가 아니지만 그 생각은 발자국 없는 설원 한 조각을 떠 놓은 것처럼 순수히 줄곧 내 마음에 살아 있었다.) 없어질 때가 되니 마음도 약해지는 모양이야? 네가 그림자를 자처하다니. (그의 웃음에 맞춰서 웃으려 했다. 작게 툭, 튀어나온 웃음소리. 웃어야 해. 이제 그의 햇살을 맞고 서 있을 수 없지 않니.) 나도 이제 컸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컸지. 하지만 나한테 더 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지. (그는 모든 걸 해주진 않았지만, 많은 걸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그를 점차 지워갔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짐작했을 때, 어쩌면 처음부터였다.) 미안해. 나한테 너는 첫 친구도, 첫 가족도, 첫 동료도 아니었어. 하지만 나한텐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네가 유일한 친구고 가족이고 동료였지. (너를 반대하는 가족에게 도망쳤다. 너를 갈망하는 친구를 죽였다. 나를 연민하는 동료를 쫓아냈다. 그때도 그는 경고하고 있던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사슬에 걸린 사슬처럼 이어지던 생각은 왁! 하는 소리에 툭 끊어졌다.) 으악! ...놀랐잖아. (졸림을 호소하는 그의 말에 침묵하며, 유언과도 같은. 아니, 유언을 가만히 들었다.) ...알았어.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가만 안 둘 테니깐.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가 하얀 눈가루가 되어 별이 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칼끝을 겨눴다. 석양─ 이 아닌 막 뜨는 반원의 해를 향해, 새벽녘의 해를 향해. 그리고, 그 해가 뜰 저만치 높은 하늘 위로 칼끝을 치켜세웠다. 어둠이 슬금슬금 물러가는 하늘이 보였다.) ...이거 봐, 저녁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해가 떴어. 일몰이 아니라 일출이었네. 어느새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 (아무도 모르는, 나만, 그의 주인인 나만 알고 있는, 내가 지어준 그의 이름을 부른다.)

77 이름 없음 (OGWaQ8myLw)

2020-11-30 (모두 수고..) 23:40:24

>>73
머리가 눈 색으로 새어버리는 줄 알았다. 자기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 수발총의 공이 넘어가는 소리와 정교회 목사의 기도소리-그것은 기도를 빙자한 저주였다-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오자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당신, 당신이야? 그렇지?!"

손이 뒤로 묶여있었다. 나는 꼴사납게 자루 쓴 머리를 휘두르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았다. 뜨거운 입김이 자루 안에서 얼어붙어 그것은 버석버석히 흔들렸다.

"더 이상 여기선 안 돼. 우리 도망가자. 산맥 너머 동쪽으로! 그곳 시비리로 도망가면 교회도 황실도 아무것도 안 쫓아올거야! 아무도 죽을 필요 없어!"

나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공황 상태였다. 그야 일분 전까지만 해도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생존'과 '도주' 단 두 단어였다. 풀려버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 눈밭에 머리를 쳐박는다.

"빨리...지금 가야 해..당장..!"

78 이름 없음 (2hMiGEhcUA)

2020-12-01 (FIRE!) 00:07:21

" 그래… 당신은… "

자루를 뒤집어쓴 남자는 연거푸 머리를 처박았다. 셀 수 없는 총알 세례가 아닌 찬바람에 휘청이며. 나는 그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당신도, 나도, 찬바닥에 무릎을 처박고서 서로를 마주했다. 설산이 고요하다. 마치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린다는 듯. 표독스럽게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 아직도 모르겠어? "

나는 당신의 자루를 벗겨냈다. 목에 단단히 묶인 밧줄을 펴내고, 거칠게 자루를 끌어냈다. 겁에 질린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머리칼이 새하얗게 새어버린 듯 눈발이 내려앉은 나의 얼굴도.

" 당신은…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도망치지 못해. "

담담히 쓸어내리는 문장이 메마른 노랫말과 같다. 하나하나 내뱉어내는 그 말들이 너무도 거칠어 입 안이 비릿해지고야 만다. 새하얗게 질린 당신의 뺨을 한 번, 바닥에 떨구어진 장총을 한 번. 장총을 쥔 손을 당신과 포개었다. 보란듯, 총구를 하늘 향해 치켜들고, 목젖에 맞춰들고. 나는 조용히 내려깐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 그 어디에도 우리의 낙원은 없어. "

겹쳐둔 당신의 손을 어루어만졌다. 산송장의 손을 감싸쥔듯 차갑다. 당신이 느끼는 나도 산송장과 같을지.

79 이름 없음 (2hMiGEhcUA)

2020-12-01 (FIRE!) 00:07:45

# >>78 앗 앵커 안 달았다...! >>77

80 이름 없음 (KXl1y9uQqY)

2020-12-01 (FIRE!) 00:26:23

>>76
웃기지 마라. 이 몸이 주인의 그림자라니, 이미 나약한 본체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아니, 언제였지. 흐릿하고 막연한 사건들만이 존재하고 정작 나열은 되지 않는다. 시간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운데, 마치 포커싱을 맞춘 것처럼 당신과 함께 지냈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망할, 주마등이라니, 시덥잖은 짓 하지마 여신. 그런 말을 분명 입으로 담은 거 같았는데,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몸 끝이 세워져,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당신이 해오는 이야기는 선명하게 들려오지만 주변의 공간을 능숙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마치 꿈결 같다.) ...망할, 난 그 이름이 맘에 안들었어...마지막이니까 봐준다. (어라, 내 마지막 말은 욕짓거리가 되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당신의 말마따나 일출을 보려 노력한다. 우웅, 마지막 떨림, 마지막 빛, 그리고...그리고.) ...후에 저승에서도, 이 몸을 주워라. 기다리고 있겠다. (우뚝.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의 바람마저 멎었다. 어둠 한 점 남아있지 않은, 여명의 빛이 이 세계를 가득 메우는 순간─당신이 상상한 별의 죽음과도 같이 순백색의 가루가 되어 빛을 타고 오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한없이 높은 곳으로. 에고 소드의 흔적이라곤 당신이 꽉 쥐고 있는 손잡이 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곳엔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글귀가 어느새 새겨져있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

81 이름 없음 (Xf4rmajAhM)

2020-12-01 (FIRE!) 01:41:32

>>80
응, 기다릴 너를 위해 영웅이 될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다. 그쪽을, 위를 쳐다보지 않으려 하면서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느린 고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피가 들어가 먹먹한 귀도 이명을 멈춘 때. 팔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가지 마. (순간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에서 눈을 돌리고 위를 향했다. 뒤늦게 바라봐도 더 볼 수 없는 먼 하늘로 가는 금속가루만 보였다. 아, 보지 말 것이지. 더 슬퍼질 테니 뜨는 해를 바라보며 모두 잊어버릴 것이지.) 가지 마. 소테르σωτήρ. 가지 마... (그러나 손에 남은 건 그의 인격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손잡이뿐. 아니, 그의 마지막 말이 하나 새겨져 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별을 향해... 별. (가슴이 답답하다. 서늘한 새벽바람을 맞아 피가 말라가는 옷이 체온을 빼앗으며 몸을 얼려간다. 문득 참을 수 없게 우습다. 그러니, 웃자. 시원하게 웃자.) 하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 아하하, 흐, 으흐, 흑, 으, 으으, 흐읍, 흐, 하, 하하하하, 흣, 하, 아아아, 하, 아, 아, 아, 흐, 흑... 하악, 아아아아... (그리고 그를 위해 감정을 쓸 수 있을 때 모두 풀어버리자. 지금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그러고 나선 나를 위해 새 검을 구하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시작해야지.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세상에 하나의 영웅담으로 매듭지어져야 한다.) 응, 나 별을 향해 갈게. 무언가 가로막아도 피하고, 부수고, 뛰어넘고, 밀어서 은하수 길을 따라갈게. 하지만... 만약에 내가 실패해서 죽었다고 하면 네가 같이 환생해야 해. 내가 별을 찾을 때까지 계속 내 검으로 태어나. 도전 횟수 안 정해놨으니까 불평할 거리도 없지? 난 더 이상 네 말 같은 건 안 들을 거니까, 얼마든지 말 못하는 검으로 태어나던가. 답답한 건 먼저 죽은 대가로 치자. 우리 또 만나. (밤이 다 갔다는 것처럼 뜨는 순간을 놓친 해가 부지런히 하늘을 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횡설수설 내뱉은 말을 주워섬기듯 새가 지저귄다. 아침의 시작이었다.)

82 이름 없음 (KXl1y9uQqY)

2020-12-01 (FIRE!) 03:00:33

>>81
(얼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 대륙 내에서 당신의 이름을 칭송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뒤였다. 이제 그 어떤 검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검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명성 높은 대장장이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든. 그저 당신은 난폭하면서도 절제하며 검을 휘둘렀고, 더 이상 휘두르는 것 조차 불가능해질 즘이면 수리하지도 않고 새 검으로 갈아치웠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도 보였고, 당신의 상대를 베어나가는 것은 그 뒤의 문제처럼도 보였다. 이제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어지게 되었으나, 당신이 뽑아들었던 또 하나의 명검도 수명을 다해 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지금의 당신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공허함? 허탈함? 혹은 그저 새 칼을 들여야하는게 성가시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하는 아주 일말의 기대감은 마치 아기새의 숨소리처럼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저 가장 가까운 도시의, 가장 가까운 대장간을 들른 당신이었지만 이미 당신의 소문은 날 대로 나있어, 유명한 대장장이들이 당신 곁으로 몰려와 자신들이 직접 만든 칼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명검이며, 한 자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이 중에서 한 자루의 칼만 집어들면 끝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장간 창고 구석, 낯익은 순백색의 짧고 미약한 공명을 보기 전까진. 대장간 주인은 당신의 시선에 당황해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 볼품없는 검은 먼 대륙에서 찾은 에고 소드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건지, 의식이 없는 불량품이라고. 당신은 그 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한 맥박, 그리고 칼날에 새겨져있는 ‘구원자’ 라는 글귀. 여기까지가, 영웅으로써의 당신과 관련해 남아있는 마지막 기록이었다.)

83 이름 없음 (bTZzzmVI7.)

2020-12-01 (FIRE!) 13:19:45

>>66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까르르 웃다가 당신이 꽉 끌어안자 숨막힌다며 당신의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것이 싫은 기섹은 아니다.) 그으러면...내가 책임지면 되겠네, 그렇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곤 고민하는 척 하더니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하는 모양이 제가 어떤 식으로 보일지 아는 것 같다.) 어리광이야? 나야 환영인데! (킥킥 웃으며 당신의 등을 토닥였다. 다른 손으로 당신의 뺨을 매만지다가, 충동적으로 뺨에 입을 맞췄다. 짧은 접촉 후에는 놀리듯 바로 얼굴을 멀리하곤 짓궃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양해를 구했는데 한참 더 늦었을 때의 심정을 구하시오(점수 미정)
#답레의 텀, 들쭉날쭉, 알아둘 것!

84 이름 없음 (HWemksMIfM)

2020-12-01 (FIRE!) 16:08:38

>>83
힘들 때는 밥이 최고지. 오늘은 수분 보충도 할 겸. (당신이 제 가슴께를 두드리면 아차, 하고 손을 떼어낸다.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당신을 보고 눈을 휘어 웃었다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알아줬으면 해. 내가 어리광 부리는 건 너 뿐이야. (당신이 뺨을 어루만지면 붉어진 뺨이 열기를 더했다. 당신이 뺨에 입맞추면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떴다.) 어.. (뺨에 남은 입맞춤의 감촉에 몸이 굳었다. 당신이 저를 짓궂게 바라보면 붉어진 제 얼굴을 감싼채 말을 더듬는다.) 너, 너 정말...

#문제없다! 짬날 때 확인할테니 부담갖지 말어라!

85 이름 없음 (UJ0K0iqO3Q)

2020-12-01 (FIRE!) 20:08:07

>>84
(당신이 손을 떼어내자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장난섞인 엄살에 가까웠나 보다. 내 행동, 손짓 하마에 얼굴 붉히는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는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은 잘하지, 아주. (킥킥거리며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듣기는 좋네! (굳은 당신을 보며 참치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당신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한손을 깍지껴 잡으려 한 후에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계속 이렇게 밖에 있을 생각이야? 나는 몰라도 그러다 감기 걸린다, 너. 간호해주는 건 상관없지만 아픈 건 보기 싫다구.

86 이름 없음 (owq6daphrQ)

2020-12-01 (FIRE!) 21:18:58

>>85
(당신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머릿속까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온통 빛으로 뿌옇게 보였다. 당신이 웃을때마다 그 빛은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깍지를 끼려는 것 같은 당신의 손길에 제 손을 겹쳐쥐어 먼저 깍지를 꼈다. 당신과 한 손을 잡은 채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하, 걱정해주니까 기분은 좋네. 고마워. (하지만 역시 너무 걱정끼치는 건 싫었다. 당신이 제 몸을 걱정하는만큼이나 나 역시 당신의 마음을 걱정했다. 현관문을 열고 하금테 안경 너머로 당신을 보며 웃었다.) 들어가자.

87 이름 없음 (quEkNWz0Fo)

2020-12-02 (水) 15:15:25

>>86
기분이 좋긴 뭘 좋아. 걱정할 테니까 아프지 말랬더니. (눈을 슬쩍 흘기며 툴툴거렸다. 생각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지. 금테 안경 너머의 눈과 마주쳤다. 웃음에 휘어지는 눈매에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응.

#어쩐지 막레 느낌이네. 짧게나마 달달한 거 돌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88 이름 없음 (XiS0y8/kfE)

2020-12-02 (水) 15:34:28

>>87
#그러게,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처음에는 우는걸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로 마무리되어서 참 좋다. 덕분에 즐거웠어!

89 이름 없음 (WIqzGEunYs)

2020-12-03 (거의 끝나감) 20:52:19

이 편의점은 제가 먹었는데요. 다른 데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방독면 안에서 정중한 말투로 꾸민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바닥에 거꾸로 세워둔 피묻은 야구배트를 빙글빙글 돌리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발치에는 쓰러져있는 좀비인지, 사람인지 모를 시체의 다리가 보인다.)

90 이름 없음 (6/QRhgzxjA)

2020-12-04 (불탄다..!) 00:53:57

>>89
그러죠 뭐. (이런 시국에 또라이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좀비보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련없이 문을 닫고 유유히 멀어졌다.)

91 이름 없음 (ihCyKh8f1g)

2020-12-05 (파란날) 02:15:29

"오 신이시여, 이런 젠장맞을!"

포격이 끝났다. 사나운 울림이 잦아들자 참호 속의 병사들은 하나 둘씩 고개를 든다. 인원 수를 파악하는 장교들의 고함소리, 재수없게 포탄에 당한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앤드류 또한 얼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그는 포격 소리에 머리가 띵한지 웅크려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쓴 편지가 피 섞인 흙탕물에 흠뻑 젖어버렸어! 사랑하는 메리에게 보낼 편지였는데!"

그는 속이 잔뜩 상해 푸념을 한다. 난장판이 된 편지지를 손으로 털어보지만 그게 될 리가. 이미 편지지는 검붉은 카키색으로 염색된지 오래다.

"후방 참호에서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편지에 썼는데, 이런 편지지를 보고 어떤 바보가 그 말을 믿겠나?"

"가엾은 메리.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았다간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겠지.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전해준다면 분명 메리는 쓰러지고 말 거야."

앤드류는 마침 옆에 있던 또 다른 병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물론, 새 편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이보게 전우, 혹시 멀쩡한 종이 남은 것 있나? 내 연인에게 보낼 편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네. 이 꼴이 난 편지를 부칠 수는 없잖은가."

92 이름 없음 (lYEKjiYtN2)

2020-12-05 (파란날) 05:00:02

>>91
앤드류에게 말을 걸린, 군모를 푹 눌러쓴 병사는 종이를 내미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앤드류로서는 낯이 익을 목소리였다.

"쓰러지긴 뭘 쓰러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퉁명스레 쏘아붙인 병사, 메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지만 같은 소대로 편성되었을 줄이야... 쯧. 어차피 다시 분대로 갈라지면 볼 일 없을 테니 굳이 아는 척 하지 마라."

말을 마친 순간, 멀리서 메리의 이름을 호명하는 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는 몸을 일으키고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너희 분대장님도 찾고 있을 테니 어서 가봐. 난 간다."

그렇게 말한 뒤, 메리는 금방 돌아서서는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자신의 분대를 향해 달려갔다.

93 이름 없음 (ihCyKh8f1g)

2020-12-05 (파란날) 13:28:57

>>92
"오 메리. 이 지랄맞은 상황 속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네. 전쟁도 웃으면서 해야지. 군인이 웃을 수 없다는 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아주 위험한 징후란 말일세 전우!"

육군성은 지역연대라 하여 한 부대에 같은 지역의 청년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마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아니면 아는 사람들끼리 모아 사기 증진을 기대한 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지역연대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조심하게! 메리! 참호족에 걸리기 싫으면 발을 잘 말리게!"

그는 멀어져가는 메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지른다. 시시껄렁한 뜬소리까지 덤으로 씌워서. 메리는 아는 척 하지 마라 엄포를 놓았지만, 그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다.

이내 앤드류 또한 양 손에 무거운 탄통을 하나씩 들고서 분주한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진다.

94 이름 없음 (61Mc8CnyVg)

2020-12-07 (모두 수고..) 16:54:44


그게 네 진심이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모든 상승은 늘 추락을 전제한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멍하니 떠올린다. 옳은 말일 것이다.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만큼 무심히 흘렸던 말이었는데, 이제와서, 이 순간에서야 생각나는 걸 보면.

너는 가겠다고 말한다. 가지마. 그 한 마디를, 나는 결국 하지 못한다. 너는 그런 나를 잠시 지켜보고 서있는가 싶더니, 미묘한 감정이 섞였을 날숨을 한 번 내뱉은 후, 돌아섰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맴돌아 어지럽다.

버릇처럼 내뱉던 비아냥. 별 시답지 않은 일에도 빙글빙글 웃음을 짓던 나와, 언짢은 듯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던 너. 별 것도 아닌 호기심을 내세워 네 방에 들어갔던 일이나,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책만 들여다보는 네게 답지않게 심술이 나 책을 빼앗아 들었던 기억.

그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었고, 너는 여느 때의 얼굴로 돌려달라고 말할 뿐이었고. 할 일 없으면 그땐 네가 찾아오라, 장난기로 감췄던 진심. 정작 네가 정말로 찾아온 이 순간에는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면서.

"………."

네가 좋았는데.


#렛츠 비터앤스윗 청춘물!

95 이름 없음 (t8vEai6kVQ)

2020-12-07 (모두 수고..) 17:21:34

>>94
진심이란 무엇일까. 진심이란 말로 내뱉기 전까지는 티끌만큼이나 가볍고 또 변덕스러운 것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만큼이나 아름답다가도 더럽고, 잔기침을 유발하는 그러한 진심을 나는 말했다. 그것이 중요했다. 입밖으로 내뱉은 이상 더이상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그게 진심인거야.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떻게 주워담겠어. 내가 뱉은 말을 네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제 그렇게 된 셈인거지.

" 갈게."

나는 발끝으로 선 발레리나처럼 발끝에 힘을 주어 천천히 그 축을 회전시켰다. 돌아선 방향엔 이제 네가 없었다. 여린 볼 안쪽 살을 송곳니 사이에 두고 짓이기며 나는 곧고 힘차게 나아갔다. 내 자신의 이런 면이 싫다. 이럴 때는 자존심을 내려놓아도 좋을텐데. 후회한다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나는 나를 세워야했다. 그리고 아마 너도 날 붙잡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따듯한 차, 낡은 책, 글자, 글자, 빙글빙글 머릿속의 단어들을 꺼냈다. 나는 빠르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꺼내어 펼친다. 가자. 여길 벗어나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커튼을 열어 달빛을 낼 것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결국 돌아돌아 다시 네가 떠오르고 만다. 지겹게도.

#고등학생 정도 나이대려나?

96 이름 없음 (61Mc8CnyVg)

2020-12-07 (모두 수고..) 20:29:53

>>95

멀어지는 네 뒷모습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어쩐지 붕 떠버린 사고로, 생각한다. 늘 웃는 낯이어서 속셈을 알기 힘들다던가, 빙글거리며 웃는 표정이 능청스럽다던가, 그러면서도 사물을 다루는 법이 영리하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참 많이도 들어왔는데. 그 끝에서 나는 궁금해한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쩌면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아마, 둘 다 아닌 거겠지. 지금의 내 얼굴에는 역시, 표정따위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하여 너와 내가 맞이한 끝은 어이 없을 정도로 고요한 것이었다. 문득 옛날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라벨? 아니면 사티? 한쪽 손에는 작은 MP3, 나머지 한쪽 손에는 이어폰을 들고, 너는 물어왔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자, 너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라벨? 아니면 사티? 여느때처럼 웃는 낯으로 속을 긁어볼 생각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그것이라, 제정신인가,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그랬지. 네 주변은 언제나 너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답했더라. 나는 사티의 3번, 그게 아니라면 라벨, 그랬던 것 같다.

그러자 너는 참으로 드물게도 웃는 표정을 한 뒤, 이어폰 한짝을 내게 건네주었다. 받은 이어폰을 귀에 끼우자, 익숙한 선율이 들려온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3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그게, 그 오래된 MP3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고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래서 진심이었는데, 너는 그리도 쉽게 진심에 답한다.

이젠 끝인가? 응, 이젠 끝이야. 내 짧은 확인 질문에 간결하게 대답해오는 것은 역시 나이다. 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나는, 그리하여 포기가 빠르다. 영리하기도 하지. 그래, 우리의 끝은 그리하여 그렇게도 고요했다. 그러니 고생스러울 일도 없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포기해도 될 리가 없잖아.
너인 걸.

살지도 죽지도 못하지만 제발 안아주세요.* 언젠가 읽었던 시를 인용한다. 나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점에서, 나는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좀 멀게 떠올린다. 영리하지 못해도 좋아요. 너를 붙잡지 않는 영리함은, 내 것일 필요가 없었다. 인생 첫번째 바보짓이어도 좋아요. 왜냐하면 너도 바보니까, 너는 멈추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나도 바보니까, 너를 멈출테니까.

"───."

그러니, 이름을 부른다.



# 쓰다가 한 번 날렸어… 울어…
# 예스 고등학생… 근데 전개가 너무 빨라졌나:3c…
# 김혜순, 좀비레인

97 이름 없음 (YHkM6N2Uc6)

2020-12-13 (내일 월요일) 13:06:19

"이제 곧 자정이야."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네 앞에 우두커니 서있어. 너는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이네. 하긴. 이제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다른 사람을 못 앉게 한다거나, 혼자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아다닌다거나. 디저트 카페에서 혼자 커플 메뉴를 주문하는 바보같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했어."

내가 그렇게 귀찮았구나. 그래서 얼굴도 바라봐 주지 않는 거구나. 이제 마지막인데. 열두 시가 지나면 나는 사라지는데. 너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 거구나. 여태 나만 행복했던 거야. 이런 나도 참 이기적이네.

"..."

미련이 남아서 너를 뚫어져라 바라봤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어. 나만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이 바보야.

98 이름 없음 (lF4Hp47LRs)

2020-12-14 (모두 수고..) 23:34:23

>>97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의 평소 모습에 비하면 그는 오늘 너무 과묵했다. 마치 침묵의 저주에라도 걸린 듯이,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늘어뜨린 채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몇 마디를 주워섬길 터였다. 추억을 되짚어본다거나,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던 일들을 이야기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바보같이 먹을 일도 없을 내일 저녁 메뉴를 묻는다거나. 사실 그 사람은 당신과 단둘이 있을 때면 꽤 수다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지금 그 사람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무언가 중요한 부품 하나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라도 되는 마냥,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련하다... 후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과는 됐어."

당신이 입술을 꾹 깨물 때, 그제서야 그 사람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며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아래 드리워진 그늘 안쪽으로, 그 사람의 눈동자가 선명한 빛깔을 띄고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행복했어?"

하고, 그 사람은 나직이 당신에게 질문을 건넸다.

99 이름 없음 (T1tK/jaEyA)

2020-12-15 (FIRE!) 11:04:38

"야,"

대뜸 던져진 말이었다.
당신과 나는 언제나처럼 학교 내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대화는 잠시 끊어졌었다. 나는 한구석에 만들다만 눈사람이라도 되는 것같은 눈뭉치를 두어번 툭툭 차더니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누구 안 사귀냐?"

당신과 나는 15년지기 친구였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당신이라면 실상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사귀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에 반해 당신은...경험이 있는 편이었고. 그마저도 짧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지만 아예 경험조차 없는 나보다야 나았다.

나는 다시 나무들로 시선을 돌렸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나무들에는 어지럽게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볼에 닿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100 이름 없음 (If2ejKLAkw)

2020-12-18 (불탄다..!) 04:52:16

>>99

"뭐."

뜬금없이 날아오는 야, 에 뭐, 로 대답하며 지내는 걸 15년 넘게 해왔지만, 가끔은 놀랍다. 내게 그렇게나 묵은 인간관계가 가족 말고 더 있다니. 그렇게나 알고 지냈다는 건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겠지만,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이윽고 들려오는 물음은 누구 안 사귀냐는 소리.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글쎄, 사귀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 티도 제법 냈고, 또 이번 크리스마스에 만나기로 했거든. 그날 꼭 고백할거야."

숱한 실패를 겪고 나서 연애같은 건 나한테 안 맞는가보다, 하고 체념했는데도, 좋은 사람을 찾아내고 마는 운과 안목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어느정도 내려놓으니 편해졌다.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준다면 기쁘겠지만, 아니면 또 어떤가. 그 사람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희망고문하지 않는 길을 알며, 그 숱한 실패의 경험 덕에 반한 사람에게서도 나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한 지금은 두려울 게 별로 없었다. 친구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좀 슬프겠지만.

"근데 별일이네, 그런 걸 다 묻고. 그런 거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 아냐, 이건 너무 연애중심주의적인 발상이지. 최근에 순정물이라도 덕질하나? 아니다, 내 실패담이 은근 재밌었던 걸 수도 있지. 지나고 보니 나도 왜 그랬나 싶은데 뭐. 눈이 내린다. 우산은 깜빡했지만 패딩이면 충분하지. 지퍼를 잠그고 파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101 이름 없음 (gFj4F4Mumo)

2020-12-18 (불탄다..!) 09:44:18

>>100

"그러냐?"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잘되겠지, 무던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이야 꽤 인기 있는 편이 아니던가? 나와는 달리 다가가는 시람도 숱히게 보였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그냥, 생각나서."

뭐어어....여전히 사람대신 공부랑 결혼한 입장이긴 하다마는,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자조적이었다. 나도 아예 짝사랑조차 없지는 않았었나. 당신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든 짝사랑은 결국 외사랑으로 조용히 스러져갔다. 나는 코트의 목깃이나마 세우고 단추

102 이름 없음 (xBU7o1MQbA)

2020-12-18 (불탄다..!) 09:46:21

>>100

"그러냐?"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잘되겠지, 무던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이야 꽤 인기 있는 편이 아니던가? 나와는 달리 다가가는 시람도 숱히게 보였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그냥, 생각나서."

뭐어....여전히 사람대신 공부랑 결혼한 입장이긴 하다마는,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자조적이었다. 나도 아예 짝사랑조차 없지는 않았었나. 당신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든 짝사랑은 결국 외사랑으로 조용히 스러져갔다. 나는 코트의 목깃이나마 세우고 단추를 잠궜다.

"좀 춥긴 하다, 어디라도 들어갈래?"

패딩을 입은 당신이 아니라 코트를 입은 내가 추운 거긴 하다마는, 큰 상관은 없지 않겠나.

#중도작성!!! 위에 건 그냥 무시하면 된다...

103 이름 없음 (If2ejKLAkw)

2020-12-18 (불탄다..!) 11:53:16

>>102 "잘 안 돼도 상관없어, 잘 되면 좋지만 그 사람 기만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백이거든."

겁난다고 친구인 척 하면 속이는 거나 다름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며 어깨만 으쓱였다. 전형적인 둘러대는 듯한 대사로 대답하더니 공부와 결혼한 입장이라며 자조적인 투로 킬킬댄다. 흠, 외롭나? 누구 소개해주고 그런 일은 안 하는 주의니 안타깝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겠다 싶어 다시금 어깨나 으쓱였다. 그러고 있자니 춥다며 어디 들어가겠냐 묻는다.

"글쎄, 밥 시간은 애매하고. 카페에서 군것질이나 할래?"

추우니까 당 떨어지고 그러네. 김에 거기서 쿠키라도 좀 살까, 지난번에 무려 수제 마들렌을 받은 보답을 해야지. 수제는 아니지만 내 최애 쿠키니까 마음에 들어해주면 좋겠다.

104 이름 없음 (hzBq2DvwmQ)

2020-12-18 (불탄다..!) 15:59:55

>>103
"그게 그렇게 되나?"

잘 모르겠네, 그렇게 답하며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흐린 하늘에 하얀 눈이 점점이 떨어져내렸다. 장난삼아 혀를 내밀어봤다. 그러다 진짜로 눈이 혀에 닿자 움찔거리다 혀를 쏙 집어넣다. 요즘 눈은 먼지도 많다던데.

"그것도 좋지."

가는 김에 따듯한 커피나 한 잔 할까. 멍하니 생각했다. 귀가 시렵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정리해 귀를 가렸다.

105 이름 없음 (If2ejKLAkw)

2020-12-18 (불탄다..!) 21:06:30

>>104
"막말로 만약에 니 친구들 중 하나가 너 좋아하는 거 숨기고 친구인 척 하고 있으면 좀 소름돋지 않을까... 너 뭐하냐?"

엄마, 쟤 눈 먹어! 요즘같이 공기도 나쁜 시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식성도 특이하네. 아니면 목이 그렇게 말랐나. 경악 후에 찾아온 측은함에 서두르자고 생각하며 마침 저만치 보이는 카페를 가리켰다.

"저기야. 눈 먹지 말고 들어가서 음료수 먹자, 음료수."

거기 크리스마스 에디션 신메뉴도 눈보단 몸에 좋을걸... 이라고 농담 삼아 덧붙이며 먼저 앞장섰다. 15년 알고 지낸 실친이라도 저 친구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살인적인 추위에 얼죽코인건 그렇다 치고 아이스 산성비를 먹다니.

106 이름 없음 (kBos1peUDE)

2020-12-18 (불탄다..!) 22:04:01

>>105
"글쎄다, 걍 그런가 보다 하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강 말했다. 워낙에 무던한 성격이고 눈치도 없는 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제로도 별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뭐 사정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아니면 무섭기라도 했겠지, 그도 아니라면 티라도 좀 더 내고 싶었나보지, 라며 적당히 넘어갈 게 뻔했다.

"예, 예. 장난에 뭐 그리 정색하고 그러냐."

나는 종종걸음으로 당신을 뒤따라갔다. 당신을 앞서 계산대에 도착한 나는 언제나처럼 카라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나는 뒤로 시선을 던지며 너는, 하고 물었다.

107 이름 없음 (AI7O9K/oGU)

2020-12-18 (불탄다..!) 22:26:31

"어이."
어스름한 저녁 무렵, 한 정비소 앞 골목에 누군가 서있다. 짙은 갈색의 정장을 입은 여성이다. 여성의 다소 낮은 목소리는 저녁의 무거워가는 공기를 타고 골목을 흐른다.

"뭘 망설이는 거야?"
여성은 담배 한대를 꺼내 입술에 걸치듯 문다. 본래 붉었을 그것은 피로와 건조한 겨울 공기에 의해 바싹 말라있었다.

"네가 뭘 하든 이미 우린 이 일을 하기로 했잖아."
"아니면 뒤늦게라도 후회하는건가? 이런 일에 끼었다는 걸."

108 이름 없음 (w7iyiKOjhA)

2020-12-19 (파란날) 15:16:17

>>106
"비위생적이니까 그렇지."

탈 나면 니 손해지 내 손해냐. 그렇게 대꾸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선 뒤 주문을 마치길 기다리고 있자니 결제도 안 하고 내가 먹을 걸 묻는다. 뭐지, 각자 계산 아니었어?

"아아메 마실 건데 너 먼저 계산해, 나 살 거 있어서 그거랑 주문할거야."

그냥 뭐 먹을 건지 물어본 걸 수도 있지만 계산도 안 하고 물어본 게 걸려 그렇게 대답했다. 다행히 내 최애 쿠키는 좀 재고가 있네, 다행이다.

109 이름 없음 (9BMZES0b2.)

2020-12-20 (내일 월요일) 11:03:46

>>108
한방울 가지고 뭔, 청산가리도 그 정도 먹으면 안 뒤지겠다. 나는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말에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카라멜 마끼아또를 계산했다. 포인트 번호 있으세요? 네, 따위의 말들이 오갔다.

계산을 마치곤 나는 항상 하던대로 적당한 구석에 자리잡았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쌓이고 있었다. 아까 전보다도 굵어진 눈발에 그나마 부츠를 신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눈길에서 넘어지는 건 사양이다.

"눈 많이도 온다...이번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좀 되려나."

110 이름 없음 (u.OhFyPDBI)

2020-12-23 (水) 22:13:03

널 감히 누가 AI라고 생각하겠어. 누구 작품인데. (턱을 괸 채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엔 무조건적인 애정과 복잡한 심경이 뒤섞여있다.) 살 날이 좀 더 길었으면 여러 기능들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혼자 살아갈거면 요리 좀 할 줄 알고 그래야지. (테이블 위엔 각혈이 굳어있는 티슈가 몇개고 굴러다니고 있다.)

111 이름 없음 (A2tPf0jmh.)

2020-12-24 (거의 끝나감) 16:26:46

>>110
나한테 이럴 순 없어요. 이럴 거면 내게 왜 감정인식모듈을 탑재했나요? 왜 감정생성모듈을 부착했죠? (당신을 지그시 바라본다) 여전히 표정을 짓는 것은 서투르시군요. 이런 상황에 행복의 비율이 0.913865%라니요. 아니면 인간이란 모두 그런가요? 인간은, 이렇게 모순된 존재란 말인가요?

112 이름 없음 (PANjwgUxwk)

2020-12-31 (거의 끝나감) 00:10:20

"오오오! 왔다 왔다! 강력한 영혼을 부르고 있었는데 네가 왔다! 이 몸 어르신의 부름에 응한 거시다!"

상식 따위 없다는게 유일한 상식이 된 세상. 미친년 한 둘 만난다고 놀라울 건 없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인디언 추장 모자와 코스프레용 역병의사 마스크. 이 추운 겨울 날씨에 원시인처럼 허술하게 차려입고 마천루 위에서 수피 댄스를 추는 미친년을 만난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 미친년이 당신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건 조금 난처할지도 모르겠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잿빛 땅. 아무리 걸어도 식량은 나오질 않는데, 눈발 날리는 아스팔트 바닥엔 총알과 무기가 돌멩이처럼 채인다. 금속과 화약을 먹고 사는 신인류가 아니고서야. 한 때는 총성과 비명으로 문명의 장송곡을 부르던 약탈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극소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한때 찬란했던 영광의 마지막을 바라본다.

"강인한 영혼이다! 아주 강인하다! 바로 내가 찾던 자다!"

키가 작은 소녀는 당신에게 달려들어 목을 껴안고 매달린다. 커다란 부리를 당신의 어깨 위에 턱 얹고서. 가면 눈구멍 뒤로 초롱초롱 빛나는 호박색 눈이 보인다.

"아주 조타! 너는 이제 내 거다!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하늘이 그렇게 정한 거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굳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것인지 모를 노릇이다. 찬 바람 아래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신에게 전해져오는 그녀의 체온은 상당히 싸늘했다. 그리고 가면 뒤로 조금씩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113 이름 없음 (78W7Wc7esA)

2020-12-31 (거의 끝나감) 22:00:22

갱신

114 이름 없음 (dH2Ty2U0Q.)

2021-01-02 (파란날) 11:46:34

고양이는 날씨가 추워서 떠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주는 위압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지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 앞에 선 이는 고양이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물론 그도 고양이가 자신을 보고 떨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저 얼룩무늬 고양이는 다른 이들이 다가와도 피하지 않고 다가가서 애교를 떨기로 유명한 고양이였기에 그는 과감하게 고양이에게 다가섰다.

"옳지. 옳지. 착하지. 피하지 말아줘."

물론 그 고양이는 사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달라붙어 애교를 떨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근처에 사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아무리 친화력이 높은 그 고양이라고 해도 인간이 아닌 이에게까지 애교를 떨고 친근하게 다가서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고양이 앞에 선 키가 큰 고등학생 남학생 모습의 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수많은 동물들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인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인간으로 변했다고는 하나 드래곤 특유의 분위기까지 동물에게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도 안되나."

아무리 다가가도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멀어지는 거리에 그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눈앞의 고양이가 귀여워 친해지고 싶지만 본능적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처럼 딱딱해보이고 무게감이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멋지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모습으로 변했다면 저 고양이도 조금 경계심을 줄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나 자신이 변할 수 있는 모습은, 정확히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의 모습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다.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아쉬움을 느끼는 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양이. 쓰다듬고 싶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비둘기는 그가 앉자마자 화들짝 놀라 하늘 높게 놀아올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높은 나무 위로 올라섰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는 멀리 가지 않고 자신은 빤히 노려보는 그 고양이를 바라봤다. 물론 그 고양이는 조금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움직임을 살피려는 듯, 경계를 풀지 않고 털을 바짝 세우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115 이름 없음 (HKpDbMUndQ)

2021-01-03 (내일 월요일) 00:26:47

>>114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인근 공원을 지나던 중, 낯익은 고양이의 모습에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반갑게 다가가려니, 공원에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서 겁을 먹은 듯 물러나는 듯한 고양이의 움직임에, 그는 급한 걸음으로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귀리야, 왜 그래?"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라면 걱정이 될 정도로 애교를 부리며 살갑게 대하던 아이가 웬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털까지 세우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양이를 향해 쭈그리고 앉았다. 우리 학교 학생인가? 바지만 보고는 모르겠네. 무슨 일이지. 뱃살이라도 주물렀나? 그거 하려면 아무리 귀리 정도 개냥이라도 트릿 하나는 드리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저를 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많이 놀랐는지 서럽게 야옹거리며 파고드는 녀석을 감싸고 달래고 있자니, 우울하게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리가 어쩌다 이렇게 겁을 먹었는지 알겠네. 난처한 노릇이었다. 알고 지내는 고양이가 겁을 먹으며 품을 파고드는 데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낯선 사람이 그 고양이에게 거부당해 침울해하고 있으니. 그래도 달리 생각하면 애가 싫어하니 더 다가오지 않는 걸 보면 적어도 위험한 사람은 아니려나? 그래도 낯선 사람은 좀 경계할 필요가 있긴 해, 이 동네에서는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안 좋은 일을 당하는 애들은 대체로 귀리처럼 애교쟁이다보니. 조금 뻘쭘하지만, 일단 귀리가 진정할 때까지는 있어야겠다. 오늘은 학원도 없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뭐, 직접 말을 하겠지? 그는 애써 시선을 귀리의 위통수에 고정한 채로 귀리의 등을 살살 쓸었다.

116 이름 없음 (PGiB3eg//c)

2021-01-03 (내일 월요일) 00:48:25

>>115
고양이를 귀리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자연히 고개를 올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저 고양이 이름이 귀리였다는 것은 처음 들은 정보였다. 허나 자신이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다가가면 저 품 안에서 날뛸 게 뻔했기에 그는 다가서지 못했다. 이 순간엔 자신이 드래곤으로 태어난 것이 참으로 슬프다고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럽게 야옹거리며 자신을 안고 있는 이의 품을 파고드는 고양이의 모습은 자신을 대할 때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드래곤이 그렇게 무서운걸까? 하긴 자신은 동물들의 최고 포식자 자리에 있었으니 무서울 수밖에 없겠다고 그는 납득했다. 물론 그것은 옛날 이야기고 요즘 드래곤들은 다 인간으로 변해서 마트에서 반찬을 사먹지만 동물들이 그것을 알 도리는 없었으니까. 저 고양이의 눈에는 자신이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로밖에 보지 않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저기요."

그렇다면 자신이 더 다가갈 것 없이 그냥 이대로 지켜보는 것으로 오늘도 만족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양이를 안은 이를 불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츄르를 꺼낸 후에 받으라는 듯이 내밀었다.

"그 고양이. 귀리라고 하나요? 괜찮다면 이거 간식으로 주실 수 있으세요? 그 고양이. 저를 상당히 무서워해서 다가갈 수가 없거든요. 억지로 붙잡을 수도 없어서."

왜 무서워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존재는 그들만의 비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이에게 대신 간식을 줄 것을 부탁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라도 보면 자신의 마음도 편해질지도 몰랐으니까.

117 이름 없음 (HKpDbMUndQ)

2021-01-03 (내일 월요일) 01:16:55

>>116 저기요, 라고 부르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공원에 있는 건 자신과 귀리,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인 이름 모를 남학생 둘 뿐이니, 당연히도 그를 부른 소리일 것이었다. 대표적인 고양이의 간식인 츄르를 고양이가 아닌 자신에게 내밀며 하는 이야기를 듣자 하니, 고양이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자신에게 맡길 생각인 듯 했다. 음, 좀 짠하긴 하네. 방법을 모르는 것 뿐이지 애가 무서워하는 걸 인지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쁜 사람같지는 않고. 게다가 유기동물에게 측은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귀하니까.

"음, 직접 줘보시는 건 어떠세요?"

저 사람도 귀리랑 친해지고 싶어하니 괜한 오지랖은 아닐 거고, 귀리를 챙겨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면 좋지. 다른 애들한테도.

"쓰다듬는 거까진 좀 더 시간을 들여야겠지만,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간식을 주는 방법은 알고 있어요. 한번 해보실래요?"

귀리도 꽤 진정한 것 같고, 괜찮겠지. 체구가 좀 크긴 하지만, 나도 (귀리 입장에서는) 귀리에 비해서 크고 털도 없고 이상한 걸 두르고 있기는 마찬가지고. 때마침, 귀리가 그의 외투 속에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남학생을 유심히 관찰하는 모양이었다.

118 이름 없음 (PGiB3eg//c)

2021-01-03 (내일 월요일) 01:45:26

>>117
직접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물음에 그는 난감한지 두 눈을 깜빡일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자신이 주려고 해서 더욱 무서워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양이의 눈으로 보자면 겨우 인간에게 보호받고 있는데 자신을 보호해주는 인간이 무서운 포식자에게 먹이를 주는건 어떻겠냐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었으니까. 괜히 살찌운 다음에 먹으려고 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그는 조마조마한 눈빛을 고양이에게 보냈다.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손을 뻗기라도 하면 홱 도망칠 것 같아 그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 답했다.

"받아먹는다면 좋겠지만 아마 힘들 거예요."

조금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간식을 주는 방법은 알고 있다는 말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을 피하는 상황이니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을테니까. 일단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그는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그래도 줄 수 있다면 주고 싶네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답을 마친 후, 그는 눈동자를 고양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외투 속에서 얼굴을 쑥 내미는 모습이 그저 귀엽게 느껴져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 미소가 고양이의 눈에는 먹을 것을 본 이로서 인식되었는지 마냥 고양이는 친근한 눈빛을 주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먹는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119 이름 없음 (HKpDbMUndQ)

2021-01-03 (내일 월요일) 02:11:09

>>118 "은혜랄 것 까지야요. 이 친구들한테 우호적인 분은 많을 수록 좋으니까요."

워, 그래도 애가 웃는 얼굴에도 겁을 먹는 건 희한한 일이네. 얘랑 저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그는 의아했지만 알 길은 없을 것 같아, 도로 긴장한 듯한 귀리의 이마를 살살 쓸어준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일단, 겁을 먹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굳이 다가가지 않고 눈으로만 예뻐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좋아요. 애들이 시간을 들여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적어도 멀리 도망은 안 가거든요. 하지만 밥이나 간식을 직접 먹여야 할 때는, 다가가기보다는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중요해요."

그는 남학생을 살폈다. 벤치에 앉아있는 위치도, 고양이를 기준으로 하면 제법 높은 위치다. 몸을 낮추고, 거리를 지키면서, 눈짓으로 해치지 않겠다는 신호를 전달하면 우리 귀리 정도 성격에는 알아들으니까.

"우선, 귀리에게서 지금 이 정도 거리에서 천천히 바닥에 쪼그려 앉아보실래요? 그 다음에는 귀리랑 시선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깜빡여보세요. 아주 천천히요."

털이 잔뜩 서 있는 귀리의 등을 찬찬히 매만지면서, 그는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 뜸을 들이다, 설명을 덧붙였다.

"이 친구한테는 저희가 크고 낯설게 생긴 낯선 동물인 셈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몸을 최대한 낮추면 좀 겁을 덜 먹어요.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건, 고양이들 간의 해치지 않겠다는 신호같은 거라고 보시면 되고요."

120 이름 없음 (PGiB3eg//c)

2021-01-03 (내일 월요일) 10:13:23

>>119
상대가 전하는 메시지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역시 지금은 눈으로만 예뻐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지금 자신이 뭔가를 가릴 처지가 아닌만큼 그는 그것에 납득했다. 잠시 시선을 돌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과연 저 고양이가 자신의 손으로 다가올까. 공격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일단 시키는는대로 하기로 마음먹고 그는 바닥에 쪼그려 앉으며 최대한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이렇게 한 후에 눈을 깜빡이란 말이죠?"

꽤 거친 눈빛을 조용히 간격을 두고 깜빡이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었다. 널 잡아먹지 않을 거고 해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득 담은 눈빛이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배가 고프면 마트에 가서 음식을 사 먹으면 되지, 널 잡아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눈빛으로 최대한 표현하려고 하며 또 다시 깜빡. 깜빡. 고양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살며시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고양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고양이들에게는 제가 너무나 무서운 모양이니까요.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지만요."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적어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는 계속해서 시간을 들여서 눈을 깜빡였다. 해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계속 표현하니 아주 조금 고양이의 털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 했으나 그럼에도 자신에게 다가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121 이름 없음 (HKpDbMUndQ)

2021-01-03 (내일 월요일) 17:11:44

>>120 "네, 잘 하고 계세요. 그렇게요."

거리도 적당하고, 움직임도 느릿하고, 무엇보다 귀리가 도로 숨고 있지 않았다. 일단은 잘 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어쩌면 체구가 성인 남성에 준한데다, 움직임이 귀리 기준에서는 갑작스러웠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동작에 대해 말하려던 중, 남학생이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러 동물들에게서 두려움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인에 준하는 남성인 것을 감안해도 좀 과하게 겁을 먹은 것 같긴 했는데, 체질이 그럴 수도 있나?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고양이들한테는 인간이 뭐랄까... 털은 머리에만 났는데 몸은 엄청나게 큰 이상한 고양이같은 존재라고 보시면 돼요. 저희도 하마같은 커다란 야생동물이 가까이 있으면 그냥 있기만 해도 무섭고, 가까이 오면 더 무섭잖아요? 낯설고 큰데다, 나한테 어떻게 할 지 모르는데 가까이 오니까 무서운 거죠. 그러니까 무리하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해를 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게 중요한 거고요."

인간 대 인간으로 치면, 어린이들에게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가?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잠시, 그는 귀리의 털이 제법 평소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인내심이 좀 필요한데, 츄르를 까서 천천히 앞으로 내밀어보세요. 그러고 계속 눈맞춤을 하면서 기다리시면 돼요."

122 이름 없음 (vFiWOmroWk)

2021-01-03 (내일 월요일) 17:36:06

>>121
"그 정도로만 보인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무튼 그럴 수 있겠네요."

하마같은 커다란 야생동물이 가까이 있으면 무서운 것과 다를게 없다는 말을 그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하마가 기겁해서 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피했을테니까. 포식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장소를 위치한 생명체의 입장에선 가까이 있기만 해도 무섭다는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머리로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 진실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해를 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라는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감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고양이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정확히는 지금 자신에게 조언하는 저 인간 역시 자신의 정체를 알면 기겁하고 도망칠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물론 도망치지 않을지도 모르나 평범하게 보진 않을 거라고 그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도 드래곤이라는 생물은 위험천만한 존재일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드래곤이 나오는 책에서 그렇게 위험한 분위기로 그려질리 없을테니까.

츄르를 까서 앞으로 내밀라는 말에 그는 알았다는 듯이 츄르를 깐 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눈맞춤을 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니 일부러 최대한 부드럽게 눈선을 곱게 그리려 애썼다. 허나 고양이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고 계속 눈치를 살피는 듯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해치지 않을게. 잡아먹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을게. 그냥 맛있는 것을 주고 싶어."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냐옹 하는 울음소리 뿐이었다. 쭈뻣쭈뻣. 다가오려고 하나 결정적으로 한 걸음을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일단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츄르에 입을 대긴 했지만 아주 잠깐 혀로 낼름거린 후 빠르게 도망치듯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는 만족스럽게 생각하는지 감격하는 표정을 지었다.

"먹었어. 먹어줬어. 드디어 먹어줬어."

123 이름 없음 (J7NxBRRP.k)

2021-01-03 (내일 월요일) 17:51:22

>>112
대지는 그슬리고, 세상은 불길에 휩싸였다. 인류와 문명은 다 타들어간 심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마지막 연기가 되었다. 말세의 광기가 대지를 휩쓸 때, 이 대지 위에는 인류가 지금껏 숨겨왔었던 모든 흉악한 악덕과 추악한 발상이 만연했다. 그 흔적은 잿더미가 된 황무지 곳곳에 남아 있었으며, 개중에는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도 아주 드물게나마 있었다.

누더기 같은 후드와 가죽을 기워만든 것 같은 옷가지를 뒤집어쓰고 구부정한 자세를 한 채로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정말 사람일까? 분명히 그것에는 두 다리가 있고 두 팔이 있었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없기 마련인 하얀 비늘로 뒤덮인 굵고 길쭉한 꼬리가 하나 후드집업 아랫자락으로 길게 비어져나와 있었다. 역관절로 된 다리는 역시 흰 비늘로 덮여서 무시무시한 갈고리발톱이 달려 있었다. 후드티 아래서 조심스레 반짝이는 녹색의 눈길을 담은 눈매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고 그것도 상당히 앳되어 보였지만 그 동공이 세로로 죽 찢어져 있었고, 가방끈을 거머쥐고 있는 손등에도 두터운 비늘과 날선 손톱이 돋아 있었다.

인디언 추장 모자에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달려온 미치광이 소녀가 잡아 붙든 것이, 바로 이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폐허의 그늘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뒤틀려 있는 존재-이었다.

갑자기 복도 저편에서 우다다 달려오는 역병의사 가면을 눈에 담은 반인반수가 보인 반응은 당연히 경악이었다. 화들짝 놀란 반인반수는 소녀 목소리인지 소년 목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히익 소리와 함께 가방을 품안에 와락 붙들면서 어디선가 주웠는지 모를 총을 겨누려 했으나, 가면 뒤로 눈빛을 빛내며 뜻모를 말들을 뇌까리는 가면이 몸을 던지며 안겨오는 바람에 그만 뒤로 풀썩 나자빠지며 그녀를 받아안고 만다.

후드 아래서, 방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직 애티를 벗지 않은 얼굴이 드러난다. 확실히 사람같은 피부를 하고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은 눈을 깜빡이며 영문 모를 말을 쏟아놓는 까마귀 가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면 차림의 소녀를 받아안은 모양새 그대로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킨다. 아무래도, 이 조그만 게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 위험. 밤, 찾아온다. 얼어, 얼어서, 죽는다."

방진 마스크 아래에서 서툴고 조악한 말이 떠듬떠듬 나온다. 이 폐허가 된 마천루의 꼭대기 층은 너무 추웠고,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추위가 당연하게 되는 밤이 찾아온다면 이 꼭대기는 더 가혹한 환경이 될 것이다. 이 반인반수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고, 그리고 헛소리를 하는 꼬마를 여기 버려두고 가면 죽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역병 가면 꼬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객관적 관점에서는 놀랍게도 이 기괴한 반인반수는 자신을 자기 것이라고 당돌하게 선포해온 꼬마가 얼어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만한 이타심이라는 게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인간은 주섬주섬 자기가 입고 있던 낡아빠진 야전상의를 주섬주섬 벗어서는 까마귀 가면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다.

"너, 누군지 모른다.. 뭔지 모른다.. 하지만, 간다. 가야 한다. 피난처."

꼬마에게 외투를 덮어준 반인반수는, 가죽을 대충 엮어 만든 듯한 따뜻해 보이면서도 초라해 보이는 옷차림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것은 이내 가방이 아직 자기 몸에 잘 달려있는지 확인하고, 총을 다시 집어든 다음에 꼬마를 안은 채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따라가겠는가?

124 이름 없음 (HKpDbMUndQ)

2021-01-03 (내일 월요일) 18:08:59

>>122 "?"

하마로만 보이면 다행이다? 하마보다 무서운 게 있나? 하마만 해도 식인 동물인데. 눈 앞의 남학생의 정체를 알 리 없는 그로서는 의아한 발언이었으나, 굳이 낯선 사람의 사적인 부분을 파고 들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하긴 뭐, 하마는 조금 현실성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당장 하마가 이 지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맷돼지 같은 예시를 들기에는 여기가 시골도 아니고. 그래도 제가 하는 말의 요지를 알아듣는 것 같은 기색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츄르를 내민 뒤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모습에, 그는 좀은 긴장을 풀고 귀리를 다독였다. 간만의 츄르잖아. 괜찮으니까 가봐.

이윽고, 제 품에서 야옹거리기만 하던 귀리가 조심스레 다가가더니 츄르를 핥아먹자, 그 역시 한시름 놓은 듯 살짝 표정을 풀었다. 다행이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어떻게 하는지 알려드렸으니 귀리가 도로 겁을 먹거나 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도 멀찍이에서 츄르를 몇 입 먹은 뒤 다시 물러났음에도, 거의 감격한 표정까지 짓는 걸 보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귀리의 이마를 슥슥 문질러주며 작게 잘했어, 라고 속삭인 뒤, 남학생에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오늘처럼만 하시면 차차 오늘보다 더 많이 먹을 거예요. 꼭 간식이 아니어도 오늘처럼 천천히 다가오게끔 해서 코 인사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고요. 코를 아주 살짝 건드려서 냄새를 맡게 하는게 이 친구들 사이의 인사같은 거거든요."

125 이름 없음 (vFiWOmroWk)

2021-01-03 (내일 월요일) 19:03:33

>>124
다시 거리를 두고 도망치긴 했으나 츄르를 먹었다는 감격은 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큰 한걸음이었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통할지, 귀리가 다음에도 먹어줄진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자신에게도 라는 희망이 생긴 것에 그는 너무나 기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며 얼굴 가득 기분 좋은 감정을 드러냈다. 허나 너무나 쉽게 이마를 문질러주는 움직임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자신은 저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코 인사. 그건 좀 많이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요."

당장 다가가면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거리를 좁히는 저 고양이에게 시도하기엔 너무 난이도가 높았지만 언젠가 시도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이 저 고양이에게 코 인사를 하는 상상을 했다. 정말 너무 천국 같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함박미소를 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그는 원래대로 표정을 돌렸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내일 하루는 정말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자신의 정체는 인간들에게 비밀이었기에 뭔가 큰 것을 해줄 순 없었으나 작은 축복을 내리는 것은 가능했다. 아주 큰 일은 아니어도 내일 하루 조금 더 운이 좋아지는 축복을 알게 모르게 내려주며 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테면 꼭 이뤄야 할 일을 내일 확실하게 달성할 수 있다던가, 정말로 피하고 싶은 일을 피할 수 있다던가, 자고 일어났을 때 컨디션이 최고인 상태라던가. 정말로 다양한 일이 내일 하루 일어날 것을 그는 짐작했다. 당연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비밀이었기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말 있잖아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그거."

그래도 혹시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그는 이 나라의 속담을 인용했다. 이 정도면 이상하게 여기진 않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126 이름 없음 (6f2exJe8zM)

2021-01-04 (모두 수고..) 01:47:15

>>125 "하긴 고양이나 동물들이 다 귀리 같은 건 아니니까요. 경계를 사고 있다면 거리를 지키면서 애들이 필요한 걸 해주는 게 최선이죠."

쓰다듬을 수 있으면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지만, 그 친구들도 낯설고 크고 이상하게 생긴 생물이 신체접촉을 하게 둘지 말지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니까. 남학생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하는 말이,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거란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또래 같은데 되게 고딩 같지 않은 말투를 쓰네. 고딩보다는…….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래도 정신은 바짝 차려야겠어. 그는 애써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불길한 상상을 지우며 덤덤히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내일은 딱히 중요한 날은 아니긴 하지만. 음, 깨끗하고 온전한 백억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려나? 아니면 집문서? 에이, 그건 좀 양심 없었다. 따뜻하던 다리 쪽이 좀 허전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의 코트 속에 숨어있던 귀리는 간식을 얻어먹은 것으로 볼 일을 다 봤는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따가 짐 풀고 숨숨집에 핫팩 넣어주러 가면 있으려나. 사냥 가서 못 만날 수도 있겠지만. 미련 없이 떠나는 귀리의 토실한 뒷모습을 배웅한 뒤, 그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조금 저릿한 다리를 툭툭 털고, 그는 남학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가볍게 까닥여 보이고, 그는 공원을 벗어났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다시 만나는 건 글쎄. 좋고 나쁨을 떠나서 나한텐 사람은 좀 불편해.

//
잇다 보니 막레가 나왔네. 수고 많았어!

127 이름 없음 (Pggg1uESjU)

2021-01-04 (모두 수고..) 09:22:11

>>126 너참치도 수고했어! 돌려줘서 고마워!

128 이름 없음 (rilYdN1s7s)

2021-01-11 (모두 수고..) 00:47:11

" 드디어 내일이야. "

그 밤, 지붕이 무너져가고 곰팡이 냄새가 득실이는 헛간 구석에서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인은 그 초라한 나무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가능한 헤진 옷을 골랐음에도 한 눈에 보이는 고급진 옷감, 정성스레 놓인 자수, 고생 따위 하지 않은 듯 부드러운 살결에 의지가 가득 들어찬 그 눈빛. 그것들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것들인지라, 엿보듯 새어든 달빛 한 줄에 모조리 드러나고야 마는 것이다. 여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때마침 지붕의 균열 사이로 깃든 달빛이 은은히 여인의 미소를 비추어낸다.

" 혹시라도 일이 그릇되어 제국의 군대에게 체포된다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야,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일은 황후가 사주한 것이라 말해. 너는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그저 황후의 명을 받들었을 뿐이라고. "

여인이 당신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여인에게서는 달큰하고도 포근한 향이 났다. 귀하고 존엄하신 황실의 향이었다.

" 황제가 된지 얼마 안 된 그이는 아직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 그대까지 해칠 일은 없을거야. 애초에 그리 비중이 큰 역을 맡긴 것도 아니니 그럴 듯한 명분도 없을테고. "

여인은 당신을 '그대'라 칭했다. 무척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 선택이었다. 첫 기억의 순간부터 서로를 눈에 담았던 사이 치고는 말이다. 별안간, 여인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나무판자 틈으로 훔쳐보이는 하늘이 검다. 검다가, 희었다가, 반짝인다. 여인은 숨을 죽이고 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당신의 시선을 깨닫곤, 어슴푸레 눈꼬리를 접어내며 웃음을 보이는 게 아닌가.

" 나는 그대가 참 좋아. 참 좋았어. "

여인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당신과 다시는 조우하지 않을 사람처럼 굳건히. 그리 다짐한듯이.

" 이런 일에 끌어들인 내가 원망스러운가? "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언제나 제멋대로였으니까 말야. 여인이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애초에 스스로 원하는 대답을 정하고서 던진 물음이었다.

# 반역을 꾀하는 황후와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황실 친위대/호위기사의 이야기! 황후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반역에 끌어들인 상태! 과거에 둘이 썸씽이 있었던 없었던 상관X! 편하게 이어주시라! 미리 말하지만 황실물은 잘 몰라서 고증 꽝임!

129 이름 없음 (N3uZUSDO2g)

2021-01-11 (모두 수고..) 01:11:33

>>128

하늘의 달빛이 상당히 은은한 밤이었다. 여인의 말대로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갈리게 될 것이다.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실패하게 되면 여인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고 자신 역시 목숨이 끊어질 것은 명백했다. 황제가 자신을 해칠 일은 없다고 하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그대로 놓아둘리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명분을 만드는 것은 밤이 되면 뜨는 저 달을 보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원망스럽다면 아무리 끌어드렸다고 한들 참여하지 않았겠지요."

여인이 자신을 끌어들이긴 했으나 그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기에 그 목소리에 후회는 없었다. 오랜 시간 여인의 옆에 있던 자신은 이제 여인의 기사였다. 여인이 황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는 순간은 물론이며 그 이후도 굳건하게 여인의 옆을 지켰다. 그렇기에 여인의 말은 참으로 섭섭하면서도 쓰게 전해졌다.

"만약 실패하게 된다 할지라도 제가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마마의 기사가 되어 쭉 옆을 지켰는데 저 혼자 살 순 없는 노릇입니다. 저는 황가의 기사이지만 동시에 마마의 기사입니다."

한 제국의 황후를 지키는 기사는 황후에게 어떤 감정도 가져서는 안되는 법이었다. 무건조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대가 좋았다는 말을 되세기며 기사는 고개를 들어 여인을 눈에 담았다. 은은한 달빛에 비치는 표정이 마냥 밝게 보이진 않았다.

"그저 마마가 혹여나 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감정도 보이지 않으며 소꿉친구가 아닌 기사로서 입을 연 자의 표정 역시 밤하늘처럼 밝지 못했다. 저 여인은 내일도 달빛을 받을 수 있을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야만 하는 운명이 참으로 쓰릴 뿐이어서 기사의 눈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감겼다.

"마마는 성공 후 무엇을 게획하십니까?"

#재밌어보여서 이어봤어! 일단 호위기사이고 남자인 쪽으로 가정해서 써봤어. 썸씽은 나도 모르겠네. 그냥 편하게 설정하고 이어주면 될 것 같아!

130 이름 없음 (rilYdN1s7s)

2021-01-11 (모두 수고..) 02:00:15

여인이 역모를 염두에 두고서 황제의 품에 안긴 것인지, 그저 순수했던 소녀가 황실에 물든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여인은 입이 무거웠고 그 오묘한 표정을 헤아릴 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결국 여인의 의중이란 다시 미궁 속에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역모에 가담한 몇몇은 여인이 권력욕에 빠진 것이라고, 몇몇은 파멸의 기로로 들어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함이라고, 저들의 멋대로 입방아를 놀렸다. 오, 그 말도 맞고 저 말도 맞구나. 여인은 그리 웃었다.

" 배신이라니. 그건 배신이 아냐. 태양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왜 배신이지? "

내가 실패한다면, 내가 실패한 태양이 된다면, 굳건히 떠오른 진짜 태양을 섬겨야지. 여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을 그르친다면 무시무시한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그 태풍의 눈은 여인 본인이 될 것이다. 나라는 심히 휘청일테고 또 어디서 제 2, 제 3의 여인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여인은 그저 당신이 무사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여인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말이다. 황제에게 반심을 품은 자들은 많았다. 사실 개중 하나를 잡아 당신과 바꿔채는 것은 쉽디 쉬운 일이었다. 내일 밤 황후의 옆을 지킨 일 대신 황실 어딘가에 붙잡혀 갇혀있었노라고, 칼을 휘두른 일 대신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노력하였노라고 말해주기만 하면 될테다. 여인은 당신과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생김새를 한 남정네를 얼마든 구해올 수 있었다. 역모가 실패한 뒤에도 당신에게 유리하게 증언해줄 심복도 여럿 대비해두었다. 여인은 도박을 즐기는 성미가 아니었던지라, 그녀가 성공하기 보다는 실패하는 쪽에 더 많은 가능성을 걸었다. 그녀가 몰락한 미래를 꼼꼼히 대비하고 또 대비했다. 하기야, 배신감에 미쳐버린 황제라면 의심하고 또 의심할테지. 여인이 천천히 젖힌 고개를 바로 세우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 감히 걱정하는구나. "

여인이 웃었다. 그것은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듯, 하지만 또 그 말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여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역모가 지난 이후의 아침이 두려웠다. 차라리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는 죽음이 나을지도 모른다. 역모를 꾀하는 인간 치고는 형편없는 책임감이 아닐 수 없다.

" 글쎄. 그대를 황제로 앉혀둘까. 나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말야. "

여인이 가볍게 대답했다. 꼭 어릴 적 장난기 가득한 그 때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여인은 입이 무거웠고, 좀처럼 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 그대는 성공 후 무엇을 계획하고 있지? "

여인이 당신에게 그대로 되묻는다. 기약 없는 미래로 희망고문을 당하는 취미는 없지만은······. 여인은 동시에 그리 생각했다.

131 이름 없음 (N3uZUSDO2g)

2021-01-11 (모두 수고..) 03:01:19

>>130

"어느 한 태양의 옆에서 행동을 같이 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 태양이 진다고 다른 태양의 빛을 쬐는 것이 배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마마가 그 자리에 앉고 뒤이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순간, 마마의 운명이 곧 저의 운명입니다. 그것이 마마를 호위하는 자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저에게 다른 빛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빛을 쬐는 호위기사가 어찌 호위기사의 이름을 댈 수 있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을 하는 기사의 목소리는 평이한 톤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는 것은 있었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란에 발을 들이민 순간 자신의 운명 또한 정해진 것이었다. 여인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것 같으나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기사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고 평이하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마마를 지키는 기사로서 마마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굴 걱정하겠습니까? 황제가 아닌 이 중에서 그것이 허락된 것은 오로지 저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호위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황제의 호위기사가 되었다면 소꿉친구인 여인이 적으로 돌아선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막아섰을 것이다. 제 손으로 여인의 목숨을 노리는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지 않은 것에 기사는 검은 하늘을 엿보며 이 운명을 정해준 이에게 감사했다. 눈을 아래로 내려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세 번. 들려오는 농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마의 말이라고는 하나 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덕은 없습니다. 마마가 조용히 살고 싶다면 그 조용히 살 수 있는 길을 닦을 것이며 마마가 그 길을 걷는 것을 확인한 후에 저는 조용히 황궁을 나올 것입니다. 한번 황궁에 이빨을 들이민 기사가 계속 그 자리를 지킬 순 없을 것입니다."

여인이 황궁을 나온다고 한 적은 없으나 사내는 모든 것이 끝나고 여인의 안전이 확실해지면 황궁을 나올 생각이었다. 그 이후 자신의 삶은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호위기사로서 무술을 닦았으니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저에겐 황가보다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낸 마마의 행복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그 길의 끝에 마마의 행복이 있길 바랄 뿐입니다."

132 이름 없음 (J.6MrxfjBU)

2021-01-12 (FIRE!) 20:31:12

쿨찐병 아스퍼거놈들 다 모가지를 뽑아버려야지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133 이름 없음 (bYSgKFM5TQ)

2021-01-16 (파란날) 01:11:21

사랑하고 애틋한 마음에 죽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고작 그런 마음 하나가 쉽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보통 사람을 죽게 만드는 건 또 다른 사람이다. 꼿꼿하게 앉은 여인이 시선을 내려 쓰러진 사내를 보았다. 피범벅이 되어 차게 식은 얼굴은 드물게 평화가 깃든 듯 보였다. 제 부군이자 이 나라의 황제였던 자의 죽음은 그 반려인 자신의 죽음과도 같은데. 소매로 가린 입가에서 날카로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눈물겨운 형제애도 권력욕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모양이지요. 홀로 고고한 척하는 모습에 깜빡 속았지 뭡니까. 황궁이 어떤 곳인지도 잊고."

여인의 눈동자가 마주선 사내를 바라본다. 한때 사랑해 마지 않았던 얼굴. 얼핏 그리움이 스친다. 그에 대한 미련인가,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미련인가.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다. 그에게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제게는 간절했다. 그래서 제 손으로 그를 버렸다. 스스로의 힘으로 오를 수는 없으니 다른 이의 손을 빌렸을 뿐이다. 비난 같은 게 두려웠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이 눈을 접어 웃었다.

"다음 차례는 납니까?"

운명이라는 게 참 잔인하기도 하지.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잠시나마 기대었던 사람은 이리 처참히 죽고, 사랑했던 사람의 칼날 앞에 서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고작 내 운명이라니.

134 이름 없음 (8bvd0jgecQ)

2021-01-20 (水) 23:02:20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종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당신을 바라본다. 종이에 붙어있는 사진과, 당신의 얼굴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자 절로 긴 탄식이 나왔다.) 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쥔 채 엄지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아직 죽을때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신 참. 운도 없다.) 9일 남았네, 당신 목숨.

135 이름 없음 (KAXAcWUy8U)

2021-01-20 (水) 23:34:57

"말해두는데 난 약혼할 생각 따위 없어."

청년의 선언에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년으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즐기는 청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시 약혼을 강조하며 자신은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단호한 것으로 보아 정말로 조만간에 있을 약혼에 대해서는 뜻이 없는 모양이었다.

"허나 도련님. 조만간에 상대 분도 찾아올텐데 지금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떡하십니까?"

"걔도 별 생각없을걸? 나하고 걔는 그냥 친구일 뿐이야. 이제와서 약혼이라니. 갑자기 이야기를 한 어머니와 아버지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야."

일주일 전. 갑자기 자신이 지금껏 친구로 지내온 이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고 통보한 순간을 떠올리며 청년은 고개를 힘차게 저으면서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보였다.

"애초에 정략 약혼이라니. 완전 구식이잖아.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약혼에 응할 생각 없어. 맘대로 하라고 해."

정말로 강하게 마음을 먹었는지 청년의 목소리엔 조금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당사자가 앞에 와도 그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약혼을 추진한 양가의 부모 앞에서도 굽힐 마음은 없어보였다.

/지금껏 친하게 지내온 친구와 약혼관계로 얽히게 된 이가 그걸 강력하게 거부하는 느낌의 이야기야. 사용인 중 하나로 이어줘도 좋고 청년의 가족으로 이어도 좋고 혹은 약혼을 하기로 한 상대방으로 이어줘도 괜찮아. 다만 너무 뜬금없는 전개는 없었으면 해.

136 이름 없음 (a3WMBxspO2)

2021-01-21 (거의 끝나감) 00:37:21

혼자서는 뜻대로 목도 가누지 못하던 갓난쟁이가 얼마 안 있어 결혼이라니 ! 시간이 빠른 것은 내 진작에 알았지만 이 정도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 녀석의 기저귀를 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 버렸는지

매일 아침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는 유리 거울이 나의 불필요한 감성을 눈치챘는지 늘어난 주름을 보란 듯이 내 눈에 비춰보였다 . 그런가 . 가문의 녹을 받아먹기 시작한 지 벌써 스무 해나 지났나 . 희끗희끗 색 변하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어쩌면 그렇게 세월에 무심하냐며 나를 비웃었다

일에 미쳐 사느라 자신을 잊은 지 오래였던 내게 이제라도 스스로를 살피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해왔다

" ... 못할 일은 아니지 "

이제까지 일하면서 모은 돈이 한 푼 두 푼도 아니고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 어째서 오늘 이 날까지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걸까 . 머리를 때리는 발상에 넥타이 매만지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정체불명의 무력감이 어깨를 펴지 못하게 했다 . 나는 내 목에 채워진 사슬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 ... ... 허나 도련님 . 조만간에 상대 분도 찾아올 텐데 지금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어떡하십니까 ? "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저 덩치만 큰 철부지가 하는 소리를 보라지 .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나는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저따위 철없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수 있으면 좋겠건만 사용인과 주인이라는 신분의 차가 그것을 방해한다

나의 반평생은 저것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사라졌다 . 이제는 서로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 내가 쉽게 일을 관둘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저 놈이 언제까지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 자립하지 못하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저 애물단지를 결혼시키자 . 나는 이 순간 단호하게 결의했다 . 그러는 것으로 나의 편안한 노후가 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사용인은 사용인이지만 보통 사용인이 아니다 ! 집사 경력 이십 년의 프로 하수인이 도련님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

이런 느낌도 괜찮아 ?

137 이름 없음 (EOuymd9u0M)

2021-01-21 (거의 끝나감) 00:49:41

>>136

차를 마시는 청년의 눈에 집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상을 쓰는 것으로 보아 지금 상황에 불만이 있어보였지만 청년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어차피 반발이 있을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이 청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또 잔소리를 하려는거야? 알아. 알아. 지금 내가 이러는 거 되게 마음에 안 드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걔는 그냥 친구일 뿐이야. 집사는 갑자기 친구와 결혼해야하니까 약혼식을 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

자신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면서 청년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물론 집안을 위해서라면 이게 최선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어쩌냐는 듯이 청년은 누군가에 따라서는 여전히 철부지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애초에 내가 거부해도 집사나 다른 이들에게 피해갈 건 없잖아. 혼나도 내가 혼나지. 아니. 따지고 보면 혼나는 것도 되게 웃기지 않아? 내가 그 애하고는 약혼 못 하겠다는게 그렇게 잘못된거야?"

생각해보니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냐면서 말하며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만히 집사를 바라보면서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집사가 내 입장이면 옳다구나 하고 결혼할거야?"

/물론 괜찮다! 마구 꾸짖어도 상관없어!

138 이름 없음 (a3WMBxspO2)

2021-01-21 (거의 끝나감) 01:26:07

>>137

" 귀족의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 도련님도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

언제나 말만은 잘하지 . 무너진 표정을 고치는 나의 얼굴에 다시 한번 균열이 일어났다 . 키가 내 허리까지 오던 시절부터 말로 나를 미치게 하던 녀석이다 . 나는 녀석의 말재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먼저 선을 그었다

" 잘못된 일이니 혼나지 않겠습니까 . 도련님은 장차 가문의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 도련님의 잘못된 선택 한 번에 가문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든 식솔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 도련님은 도련님 한 사람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 부디 생각을 넓게 쓰십시오 "

어떠냐 욘석아 . 백 번 맞는 소리 아니더냐 . 처음부터 네가 싫다 좋다 할 일이 아니었다 . 녀석의 불편한 기색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나는 살랑살랑 간을 보는 말을 묵살하고 보다 강하게 표현을 맺었다 . 이런 녀석이 다른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다니 .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래야만 했다

" 거기다 부부는 정으로 사는 것이라 들은 바가 있습니다 . 당장은 내키지 않으셔도 함께 살다 보면 또 모르는 일 아닙니까 . 영애께 흠잡을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색시감을 어디서 달리 구하겠습니까 "

어디 네가 아쉬워봐라 . 이런 소리가 나올까 . 녀석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139 이름 없음 (EOuymd9u0M)

2021-01-21 (거의 끝나감) 01:40:30

>>138

집사의 정론에 청년은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쭉 내밀고 우물쭈물했다. 자신은 감정에 호소하고 있으며 집사는 전체적인 이익을 위한 반론을 내세웠으니 자신이 반론할 길이 없는 탓이었다. 눈동자를 굴리는게 다른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모습이었다. 허나 길이 보이지 않았는지 청년은 또 다시 감정에 호소했다.

"물론 나도 집사나 다른 사용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주일 전만 해도 친구처럼 지내던 애와 갑자기 약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애도 싫어할거야. 맞아. 그 애도 원하지 않을 거야!"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듯이 청년은 두 손을 모아 짝 손뼉을 치고 집사를 빤히 바라보면서 두 손을 자신의 허리에 올렸다.

"부부는 정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것도 서로 원해야 정이 생기는거잖아? 두 사람이 다 원하지 않는 약혼이 행복할리 없어. 집사는 내가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거야? 그건 아닐 거 아냐. 애초에 나도 무작정 집안을 위한 결혼이 싫다는게 아니야."

말을 마치며 청년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서 의자에 앉았고 소량 남아있는 차를 홀짝이다 빈 잔을 내려놓고 고개만 슬며시 돌렸다.

"그 애인 것이 마음에 안 드는거야. 다른 유력 집안도 많잖아. 그러니까 그 애가 아니라 다른 집안 중에서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그 쪽과 결혼하면 되는 거잖아. 굳이 그 애와 약혼할 필요는 없잖아? 집안의 이득과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 약혼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집사.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잘 말해주면 안될까?"

어린 시절 집사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청하던 간곡한 목소리를 내며 청년은 가만히 집사를 바라봤다. 어린 시절, 떼를 쓰면서 얻을 것을 얻어내던 표정이 그 얼굴에 아직 남아있었다.

140 이름 없음 (a3WMBxspO2)

2021-01-21 (거의 끝나감) 02:04:19

>>139

마침내 한 번 이기나 했더니 또 넘어졌다 . 샛길을 찾아 말을 짜내는 노력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 그러다 틈새를 찾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놓치질 않으니 이게 사람인지 맹수인지 . 말라비틀어진 워크 홀릭의 마음에 습기를 스미게 하는 표정과 말투

그리고 감정을 앞세운 어리광은 내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이었다

" 아니 ... 영애께서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 "

거짓말이다 . 내 마음도 모르고 살던 내가 남의 마음 따위 알 도리가 있겠는가 . 상대편 아가씨라면 아무렴 우리 철부지보다야 철이 들었을 테니 입장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약혼에 임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억측과 추측 . 이것만으로는 저 녀석의 억지를 부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은 명백했으나 연식이 오래된 생각 주머니는 그럴 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 만석이 된 허파에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넘치는 한숨이 입 밖으로 기어 나왔다

" 도련님 .. 귀족 가문 간의 결혼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 문자 그대로 정략 - 서로 간에 이득을 보기 위한 장사란 말입니다 . 저희 가문과 영애의 가문은 오래된 동맹 - 그것을 보다 견고히 하자는 의미에서 맺어지는 약혼이고 결혼인 겁니다

도련님이 다른 가문의 여식과 맺어진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배신 행위라구요 .. "

네가 아무리 사정사정해도 내가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 그러니 애티 나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그만둬 !

141 이름 없음 (k/8kQrYGQ.)

2021-01-21 (거의 끝나감) 02:10:24

>>134

..그래요? (놀랄법도 하건만 의외로 덤덤한 태도였다. 부정도 절규도 하지않고 사람의 일이라는 건 정말로 어떻게 될 지 모르네요, 하고 태연히 대꾸하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당신이 의식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당신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가져왔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죠, 저승사자 님? 이승으로 되돌아가서 남은 9일을 마저 채우고 다시 와야하는 건가요? (농담을 던지듯 피식 웃었다.)

142 이름 없음 (H4aIPB0naM)

2021-01-21 (거의 끝나감) 02:23:59

>>141

아. (당신이 손을 뻗으면 무심코 담배를 쥔 손을 약간 물렸다. 조금, 놀랐다. 저승사자에 먼저 손을 뻗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애초에 저승사자는 인간의 운명에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필요 이상의 접촉 역시 당연히 금지였다. 이 인간은, 두렵지도 않은 건가? 머리를 스치는 사소한 의문을 잠재우고 대답했다.) 9일의 시간을 어떻게 쓸 지는 당신의 자유야. (표정변화가 없는 얼굴로 깊게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말했다.) 여기는 저승과 이승의 중계지. 이 곳에서 있어봤자 인간 몸으로는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으니.. ..그래. 우선 당신이 생에 어떤 미련이 남아있는지 들어볼까.

143 이름 없음 (EOuymd9u0M)

2021-01-21 (거의 끝나감) 02:26:54

>>140

"그 애가? 생각해보면 뭔가 정말로 태연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 무섭네. 어쩌면 단순히 나한테만 늦게 알린 걸지도 모르는 거구."

집사의 말에 청년은 조금 자신감이 줄어들었는지 말 끝을 흐리며 괜히 텅 비어있는 찻잔 속으로 시선을 내렸다. 생각해보면 상대가 이 약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지 못했기에 집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순순히 약혼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은지 청년이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가 다시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배신행위라니.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애초에 그렇게 깊게 들어간거라면 왜 갑자기 이 시기에 말하는건데? 물론 집사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이 시기에 갑자기 말하는 거니 내가 이렇게 반발하는 것은 예상해야 하는 거 아냐?"

동맹에 이어 배신 행위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니 청년은 괜히 반발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누구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발심에 흘러나온 목소리이기에 결국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작게 혀를 차며 시선을 괜히 창밖으로 돌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 집사. 나랑 내기하지 않을래? 만약 그 애가 약혼에 긍정적이면 나도 일단 생각은 해볼게. 허나 그 애가 약혼에 부정적이라면 나에게 이 관련으로 더 잔소리하지 말기."

생각은 해보겠다는 말로 슬며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버리면서 상대방에겐 확실하게 행동을 약조하는 조건을 내거는 모습은 바로 옆에 있는 메이드가 집사를 안쓰럽게 바라보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실하게 눈에 담지만 굳이 말을 꺼내진 않으며 청년은 집사에게민 집중했다.

"아무튼 고집 부리는 건 미안해. 하지만 나도 갑자기 친구인 애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라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이야. 차라리 모르는 애였다면 더 받아들이기 쉬울텐데."

144 이름 없음 (a3WMBxspO2)

2021-01-21 (거의 끝나감) 03:07:19

>>143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나는 어쩌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 꼬리가 머리의 일을 알 필요가 있겠나 싶어 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내가 가문의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성격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겠지

되짚어 보면 이상한 일이다 . 그동안 조용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나 하던 내가 - 하필이면 하필 가문이 주목하는 혼사에 목소리를 내다니 . 자신의 행동이 사용인의 분수를 모르는 행동은 아니었나 자아비판이 기능하기 시작했다

... 했지만 - 이대로 저 녀석이 혼사로부터 달아나면 뒷맛이 편치 않을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아리송한 감정이다

" ... 주인 어르신께 그렇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잔꾀만 잔뜩 늘어서 이렇게 말을 자르니 내가 이길 수가 없다 . 아직 덜 익은 풋내기를 상대로 현실을 들먹이며 괴롭혀댄 나도 나지만 자신의 저런 면까지도 무기로 삼는 것은 아니지 않나 . 여러 후임들 앞에서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지만 - 어차피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 나는 대담하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했다

"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 그리고 반대로도 생각해보십시오 .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아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 결혼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 함께 하는 이인삼각 마라톤이지요

보증된 수표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

너는 온실 속의 화초다 . 세상의 풍파를 모르는 아직 어린싹이다 . 그러니 가능한 편한 길만 걸어줬으면 하는 건데 어째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지 . 아니 되새겨보면 언제나 이랬다 . 나의 도련님은 언제나 이랬지 . 저답지 않게 난리 치는 것은 나였다

145 이름 없음 (EOuymd9u0M)

2021-01-21 (거의 끝나감) 10:38:59

>>144

내기를 거절하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어떻게 당해낼 수 있을까. 청년은 혀를 차며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리 하지 마라고 해도 이 잔소리는 끝날 리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물러날 수밖에 없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약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생각은 조금 해보겠다는 것이었기에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알기에 도저히 결혼상대로 볼 수 없는 내 맘도 조금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머님도, 아버님도, 집사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이야."

빈 잔 바로 옆을 검지로 톡톡 치니 일정한 소음이 살며시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부드럽게 오르다가 다시 가라앉는 그 규칙적인 음을 들으며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에 들어갈래.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약혼을 긍정적으로 다 받아들이는 건 아냐. 집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조금 생각해보는 거고 그 애도 부정적이면 그 애와 함께 약혼을 치룰 생각은 없으니까 분명하게 알아둬. 나 혼자 싫으면 모를까. 그 애도 싫어하면 약혼을 치룰 이유가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빠져나갈 구멍을 확실하게 만들어버리며 청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듯 계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올라가기 직전, 청년은 잠시 멈춰선 후에 집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마워."

감사를 짧게 표현해주며 청년은 계단 위로 올랐다.

/막레 쪽으로 받아줘도 좋을 것 같아. 새벽 시간 동안 돌려줘서 고마워!

146 이름 없음 (k/8kQrYGQ.)

2021-01-21 (거의 끝나감) 13:38:16

>>142

(당신이 손을 물리자 아깝다, 하고 중얼거렸다. 저승사자도 담배를 핀다는 게 신기했는데. 저거 이승에서의 담배랑 똑같은 걸까, 아니면 특별한 저승의 담배인 걸까. 당신과 저승에 대하여 두려움은 커녕 흥미만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저의 자유라. 관대하면서도 무책임하네요. (주변을 둘러보다가 칭찬과 욕을 섞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으로 옆목을 문지르며 음, 하고 대답했다.) 생에 딱히 미련은 없어요. 어차피 지금 안 죽었어도 9일 뒤에는 죽었을 거고. 미리 죽은 셈 치죠, 뭐. (소리내어 웃는 모습이 후련해보였다.) 한 가지 미련이 있다면.. 복수? 아, 근데 내가 이곳에 왔으니 복수도 성공한 건가.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147 이름 없음 (H4aIPB0naM)

2021-01-21 (거의 끝나감) 18:19:04

(당신의 시선이 계속 담배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며 담배를 쥔 손가락을 앞으로 구부렸다. 마치 이게 궁금한가? 라고 묻는듯이.) 어떻게 보면 저승의 일이 그렇다고 느껴질 수 있지. 이승과 저승은 명백히 다른 세계고, 서로 '불간섭'의 원칙이 적용되어 있으니까. (당신이 피식 웃으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담배를 입술 가운데에 물었다. 생에 딱히 미련이 없다는 당신의 말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가족은? 가까운 친구나 지인, 네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도 없나? (다시금 인명부를 뒤적였다가 손을 멈췄다. 심연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로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

148 이름 없음 (k/8kQrYGQ.)

2021-01-21 (거의 끝나감) 19:30:00

>>147

(당신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따라서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추측대로 궁금하긴 했으니까.) 불간섭의 원칙이라. 정 없네요. 서로서로 돕고 사는 세상이라던데. (아쉬운 척, 농담하듯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질문 세례를 받다 당신이 똑바로 바라보자 눈을 휘어 웃었다.) 그다지 재미는 없을텐데요? 그저 당신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저승사자 님. (게다가 9일 뒤면 여기서도 완전히 사라질 인간이고. 음, 하며 생각하듯 옆목을 문지르다 검은 심연 같은 당신을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제가 말해주면 저승사자 님도 저승사자 님의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저도 저승사자 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149 이름 없음 (H4aIPB0naM)

2021-01-21 (거의 끝나감) 21:06:54

>>148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시선을 마주치며 말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당신과 눈을 마주친 채 담배를 한모금 훅 빨아들였다가, 당신의 입술 주변으로 연기를 내쉬었다. 당신의 얼굴 주변으로 연기가 맴돌았다가 사라진다.) 이 담배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면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반듯한 콧날이 드러난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피부가 희다.) 망자들을 위해서 피우는 향이야. 영혼은 향기와 함께 하니까. 가끔 누가 자길 위해 향 피워줄 사람조차 없는 망자들도 있어서. (당신이 저를 향해 미소지으면 손등으로 푸릇하게 자국만 남은 턱수염을 문질렀다. 당신의 제안에 어쩔 수 없다는듯 손가락을 튕기면, 허공 위에 갓이 나타났다. 허공에 떠오른 갓을 머리에 내려 썼다.) 이름을 알려주도록 하지. 원래는 말해주지 않는데 말이야. (검은색 갓, 새까만 정장 위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걸친 채 담배를 꼬나물고 말했다.) 객사자, 급사자 담당 저승차사 준야라고 한다. 깊을 준濬 밤 야夜 자를 써서, 준야. 저승사자가 사람한테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하기엔 좀 그럴지도.

150 이름 없음 (k/8kQrYGQ.)

2021-01-21 (거의 끝나감) 22:16:24

>>149

(당신이 다가오자 고개 들어 당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이 담배 연기를 내쉬어주자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담배 연기를 삼키면서도 당신을 보는 시선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가까워진 당신을 보며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휘어 웃었다.) 그래요? 딱 저를 위한 향이었네요. 고집 피워보길 잘했다. 고마워요, 저승사자 님. (농담을 던지고 허공에 나타난 당신의 갓을 보며 와, 하고 감탄했다. 저거 나도 써볼 수 있으려나. 딴 생각에 빠지다 당신이 이름을 알려주자 당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깊은 밤인가요?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객사자 '윤 단주'라고 해요. 짧을 단短에 낮 주晝 자를 써서, 단주. 이름대로 짧은 삶이었네요. 아무튼 저는 만나서 반가우니까 만나서 반갑다고 할게요. 준야 님.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듯 거리낌 없는 태도로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등까지 덮고 있던 흰 색 수의의 소매가 약간 올라가 흉터가 남아있는 손목이 살짝 엿보였다.)

151 이름 없음 (H4aIPB0naM)

2021-01-21 (거의 끝나감) 22:43:05

>>150

겨울은 낮이 짧고 밤이 길지. (당신의 말에 으음, 하고 목울리는 소리를 내곤 담배를 질겅였다. 사람들이 피우는 담배와 똑같이 생겼건만, 작지만 조명마냥 밝은 불빛하며 결정적으로 이 담배는 피워도 피워도 줄어들지 않았다. 제사 때 피우는 향과 같은 향기가 나기도 했다. 담배연기는 점점 길어지고, 당신의 주변을 향기가 감싸기 시작한다. 당신이 손을 내밀자 수의 소매로 언뜻 보이는 흉터로 시선이 갔다.) 그래. (짤막하게 대답하곤 덥썩 소매를 걷어내 흉터가 남은 손목을 감싸쥐었다. 당신의 흉터를 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손을 붙잡고 당신의 이름을 세 번 말했다.) 윤 단주. 윤 단주. 윤 단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하고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너는 육신이 혼수상태가 되어 그 혼백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고, 9일 후면 명이 다하게 될 것이다. 복수를 입에 담았지. 네 생애와 한 맺힌 것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qagVjT-2vZ0

SymaG - 세상 여세의 밤

152 이름 없음 (k/8kQrYGQ.)

2021-01-21 (거의 끝나감) 23:29:40

>>151

그럼 언제나 겨울이 지속되겠네요. (농담하듯 피식 웃었다. 짧고 한정적인 수명을 가진 나와 아마도 수명이 없을 당신. 주변을 감싸오는 담배향기에 시선을 주었다가 당신이 소매를 걷어내고 손목을 감싸쥐자 다시 놀란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신의 손길을 뿌리치거나 저항하지는 않았다. 당신이 나의 이름을 세 번 부르기 시작했으니. 당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눈을 감고 살아온 생애를 되돌아보았다. 주마등이라고 하던가, 이거. 처음 이곳에 왔던 것처럼 다시 눈을 떠보면 여전히 당신이 앞에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폭력을 피하고 자유를 찾아 스스로 이곳까지 당도했으니, 그에 대한 벌은 달게 받을게요. 대신 만약 저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때에는 행복했으면 하네요. 다음 생이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지만요. (눈을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제가 이곳에 왔으니 그 사람에 대한 복수는 나름대로 성공했을 거예요. 더이상은 저를 괴롭히지 못할테니까. 후련하네요. (자유는 찾았지만 행복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라도 어디랴. 더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죠? 그래도 물어보고 들어줘서 고마워요, 준야 님. 죽어서야 이야기 나눌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네요.

153 이름 없음 (H4aIPB0naM)

2021-01-21 (거의 끝나감) 23:45:26

>>152

(이제서야 당신의 죽음에 얽힌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젊은 나이에, 별다른 지병도 없는 상황의 객사.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는 죽음. 죽어도 향을 피워줄 사람 한 명 없으며, 생에 미련을 가지지 못하는 죽음. 죽어서 찾을 사람도 없는 그런 죽음. 바로 폭력과 학대에 의한 죽음이었다.) 애초에 아이 이름에 짧을 단 자를 쓰는 게 정상적인 부모는 아니지. (혼수상태에 빠졌는데도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고 연명 치료를 받지 못해 9일 뒤에 사망하는 것. 그게 저승 인명부에 적힌 당신의 죽음이었다. 당신의 손목에 있는 흉터를 천천히 쓸어주고 손을 떼어냈다. 차라리 죽음으로 자유로워 졌다는 당신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생전에 누리지 못한 행복을 다시 얻을 기회는 있어. (당신의 손을 놓아주고는 어렵사리 운을 뗐다.) 다만 쉬운 길은 아니다. 여기서 소멸하면 너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만, 내가 말한 방식을 따르면 더욱 힘든 일을 겪게 될 지도 모르지.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승사자 동료들이 간혹 '저승사자감'인 영혼을 만날때가 있다고 했을 땐 남일이려니 했는데. 한숨을 쉬었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저승사자가 되어 업을 지우고 복록을 쌓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어찌할텐가.

154 이름 없음 (XHHcv761mY)

2021-01-22 (불탄다..!) 00:04:02

>>153

하하, 그렇죠? 태어났을 때부터 단명하라고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사람은 이름대로 따라간다더니 정말이었네요. (남 얘기를 하듯 말하며 웃지만 당신이 만져주는 손목의 흉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상처를 내보이고 만져지는 상황은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어루만져주는 저승사자와 죽음이 부모와 삶보다 더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으니까. 이런 나도 정상은 아니겠네. 그래도 당신이 손을 놓아주자 다시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가리고서, 당신이 하는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기회? (그리고 당신이 들려준 '방식'은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음, 하고 옆목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만약 그런다면.. (다시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까처럼 당신과 저승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던 그 장난스러운 눈빛이었다.) 저, 준야 님이랑 같이 일할 수 있나요?

155 이름 없음 (YxVS6yTCeY)

2021-01-22 (불탄다..!) 00:21:54

>>154

사람의 운명이 이름따라 가는 경우가 많지. 또한 그 사람의 행실이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제아무리 좋은 이름을 타고났어도 이름값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법. 네 이름이 부모가 좋은 의도로 지은 이름은 아니겠지만, 짧은 낮도 누군가에게는 구원이고 햇살이 될 수 있지 않겠나. (당신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가 옅게 미소지었다. 콧대가 높고 피부가 흰, 미려하지만 선 굵은 얼굴에 잠시 미소가 머물렀다.) 꼭 나여야만 하나? 다른 저승사자들도 많은데, 강림 형님도 있고, 일직차사랑 월직차사도 있고.. (숫제 은근슬쩍 떠보는 말투다. 당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결국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서 결정해. 저승에 연락해서 신임차사 교육 시작할 지 정해야 하니까.

156 이름 없음 (XHHcv761mY)

2021-01-22 (불탄다..!) 00:56:25

>>155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네요. 짧은 한 순간의 낮도 누군가에게는 구원이자 햇살이 될 수 있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이름이 좋아졌다. 이름을 받은 후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지니고 있는 이름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당신의 말을 듣고 나서야. 눈을 휘어 웃으며 당신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당신의 팔에 팔짱을 끼려고 했다.) 당연히 준야 님이여야만 하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 정도면 제법 강하게 엮인 인연 아닌가요? (스카우트도 시도하셨으니 책임 지시죠,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장난기가 넘쳤다. 그리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어 당신이 쓰고 있는 검은색 갓을 가져오려고 했다. 만약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면 당신의 갓을 머리에 쓰면서 입을 열었을 것이다.) 좋아요. 여기서 소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남들 다 느낀다는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소멸하는 건 억울하니까 도전해볼래요. 힘들긴 하겠지만 뭐, 언제는 안 힘들었나요. 옆에 준야 님도 있을 거고, 도전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앞으로 졸졸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볼테니까 각오하세요, 준야 님. 이제부터는 저도 신임차사 단주니까요. (원하지 않게 물려받은 고통스러운 성을 버렸다. 그리고 당신이 새롭게 가치를 부여해준 이름만을 취하며 환히 웃었다.)

157 이름 없음 (YxVS6yTCeY)

2021-01-22 (불탄다..!) 01:25:53

>>156

넌 분명 그럴 수 있을거야. 많이 아파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되니까. (당신의 갈색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 주려다가 제게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끼려고 하면 휘청였다.) 어허. (당신에게 팔짱이 끼이고 나서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굳이 떼어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봤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책임져야지. (당신이 갓을 향해 손을 뻗으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갓을 위로 올리며 능청스레 말했다.) 내 건 사이즈도 안 맞아. 나중에 네 거 줄게. (그리곤 당신의 머리 위에 가볍게 갓을 덮어주었다가 떼어낸다. 대우의 폭이 좁고 양태가 넓어 당신의 얼굴까지 가려질 정도였다. 붉은 산호와 진주가 섞인 갓끈은 주인이 생전 호화로운 생활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저승사자마다 갓의 형태가 달라지거든. 나처럼 정석적인 갓도 있지만 누구는 아예 검은색 페도라나, 두건일 때도 있고. (다시 갓을 머리 위에 덮어쓰고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 기다려 달라는 듯 당신에게 손짓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명부차사. 나 준야인데. 명부 좀 수정해야 겠어. 윤 단주. 망자 인명부에서 차사명부로 올려야 할 것 같다. 조만간. ...내가 꼬셨냐고? 아니, 무슨 내가 불여시인줄 아나... 솔직히 이 건, 좀 마음에 걸렸어. 나쁜 부모는 살아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수지타산이.

158 이름 없음 (XHHcv761mY)

2021-01-22 (불탄다..!) 01:58:01

>>157

(당신의 격려에 고맙다는 말 대신 미소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괴로운 생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나를 품어주는 당신 역시 많이 아팠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팔짱을 떨쳐내지 않는 당신을 향해 더 크게 웃어주었다.) 그렇죠? 책임지셔야 해요. 인연은 아주 강한 거니까. (애초에 제대로 된 인연을 맺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 이 말이 맞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바람을 담았다. 그리고 당신이 갓을 위로 올리자 너무해요, 하고 말과 눈빛으로 호소했다. 그것도 당신이 갓을 덮어주자 가려졌지만. 당신 말대로 사이즈도 안 맞았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갓을 썼다는 것이 좋았는지 당신이 다시 갓을 떼어내자 보이는 얼굴은 만족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그건 또 처음 알았네요. 저승사자 님마다 다 다르구나. 그래도 준야 님의 갓, 저는 예뻐서 좋은 걸요. (특히 저 화려한 갓끈이 검은색이 가득한 당신에게 있어서 돋보이는 포인트가 되어 빛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걸 받게 되려나? 기대하며 당신의 쓰다듬을 받고서는 당신이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의 통화 내용을 듣다가 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고 옆에서 외쳤다.) 안녕하세요, 명부차사 님! 제가 윤 단주예요! 사실 제가 준야 님을 꼬신 거지만, 그래도 앞으로 열심히 할테니 잘 부탁드려요! (능청스럽게 인사하며 웃는 게 뻔뻔했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었다.)

159 이름 없음 (YxVS6yTCeY)

2021-01-22 (불탄다..!) 06:09:58

>>158
허, 욘석 보게. (겁도 없이 옆에서 손나팔을 불어가며 명부차사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눈썹을 휘어 웃었다. 눈매가 약간 아래로 처진, 눈초리가 올라간 날카로운 눈이 당신의 모습을 보고 웃음기를 머금어 한층 부드러워졌다. 전화기 너머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명부차사가 어이없다는듯 하아~? 소리를 냈다가 음, 귀엽네, 한 마디 하고는 일단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방금 통화한 상대는 명부차사 린이야. 차사들도 종류가 많은데, 린은 저승의 명부를 관리하지. (휴대폰 자판을 톡톡 두드리다가 당신을 향해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겉보기는 까칠해도 일은 확실히 하고 원래 성격은 좋으니까. 친하게 지내. (염라대왕에게 신입교육 들어간다고 문자를 보내고 나서 당신을 마주보고 섰다. 앞으로 주어진 9일간의 시간. 기본적인걸 가르치는덴 충분할 것이다.) 이젠 선후배로서 잘 부탁해. 예비 저승차사 단주.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 우리의 이야기가 더 나은 결말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쓰다보니 마무리하는 느낌이 됐네. 막레로 받아줘도 되고, 더 이어가고 싶다면 1:1 자유 상황극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너참치 의견을 이야기 해 줘!

160 이름 없음 (XHHcv761mY)

2021-01-22 (불탄다..!) 13:50:49

>>159
/막레로 받고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1:1 자유 상황극으로 넘어가서 더 이어가고 싶은데 너참치는 어때? 괜찮아?

161 이름 없음 (YxVS6yTCeY)

2021-01-22 (불탄다..!) 20:16:07

>>160
/응 나도 좋아! 그럼 1:1 관련해서는 조율 스레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162 이름 없음 (/0kWQvgN96)

2021-01-23 (파란날) 00:24:12

"작은 것아.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냐? 어떻게 내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단의 턱에 양 손을 얹었다. 단의 평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 그것이 보인다. 날 올려다보면서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짖는 작은 것이.

이런 것들이 꼬이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은 나의 거처 어딘가에서 꼬물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의식도 목적도 없는 것처럼. 그 작은 것들이 눈 앞에서 알짱거리면 그냥 치워버렸다. 어떨 때는 있는 줄 모르고 밟아버릴 때도 있었고, 너무 많이 튀어나오면 그것들이 온 곳을 찾아내 씨를 말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어디선가 자꾸 튀어나왔다. 작고 꼬물거리는 것들은 어느새 나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확실히 비일상적인 사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군. 이런 게 가능한 일이었다는 건가?"


혹시나 내가 말하는 것이 녀석에게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생각 없이 치워버리곤 했지만 이 녀석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특별한 녀석은 나의 궁금증과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위해 입을 가리고 목소리를 작게 하였다. 과연 이 녀석이 내 말에 대답할까? 나는 너무나 궁금했다.


//코스믹 호러풍의 우주적 존재와 인간이라는 설정!

163 이름 없음 (zHIkqfyK9o)

2021-01-29 (불탄다..!) 09:53:57

성간이동이 상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시시각각 우주괴물에게 위협받고 있는 이러한 세상에서 당신이 왜 외곽 황무지를 거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당신의 눈앞에 있던 괴물이 한번에 터져나갔다는것이다.

"어어... 괜찮나? 아니면 그쪽도 나처럼 저놈들 잡으러 온건가? 그럼 사과하지."

아직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큼직한 플라즈마 라이플을 들고있는 중년의 남성이 당신에게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의 눈앞에서 괴물을 터뜨린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다.

"그건 그렇고 근처에서 이정도 크기의 칼 못봤나? 사실 그거 찾으러 온거라서."

오히려 그런말을 하며 손짓으로 칼의 크기를 가늠해보였다. 손짓을 보아하니 칼의 크기도 플라즈마 라이플만큼이나 큰것같다.

164 이름 없음 (w0Q3yQ2FUU)

2021-01-29 (불탄다..!) 13:43:48

>>163

모두가 세상을 같은 눈으로만 바라보았다면 이렇게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세상의 가장가는 대세이자 관심의 대상인 존재가 있을지라도, 그림자에 가려진 그 옆 길에 눈을 돌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척자의 도리이리라. 너무 휘황찬란한 설명이었나? 그렇다면 남들의 눈길이 돌아간 사이 주변에서 노다지를 캐먹으려는 꼼수쟁이, 정도로 그녀를 소개하자.

" 아—, 뭐예요. 기껏 내가 다 잡아뒀더니. "

진심을 담은 야유가 당신을 행해 꽂혀든다. 앳되어보이는 여자는 황무지 바닥에 손을 딛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온 몸에 모랫가루를 묻히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기껏 다 잡아두었다' 라는 말은 아마 거짓에 가까웠을 듯 했다. 괴물이 터지는 순간 둥그런 구슬처럼 눈이 커졌으니 아마 괴물을 잡을 깜냥도 되지 못했을테다. 큼, 몸집이 작은 여자가 헛기침을 내뱉자 자잘한 모래알이 풀풀 날아오른다. 모래알을 제법 많이 삼킨 모양이었다. 허나 별 일 아니라는 듯 익숙히 입 안의 모래알을 뱉어내는 모습을 보니, 얼마 안가 황무지에서 얻은 못된 질환으로 요절길을 걸을지도 모르겠다. 앳된 여자가 저와 함께 바닥을 뒹굴던 플라즈마 피스톨 두 정을 집어들었다. 에이씨,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힘겹게 두 총을 털어내던 여자는 남자의 물음에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인다.

" 혹시 잃어버린 거예요? 안타까워라, 그런 게 황무지를 홀로 누비고 있었다면 벌써 누군가가 훔쳐 팔아버렸을걸요. "

여자가 권총 하나를 힘겹게 허리춤에 꽂아넣으며 조잘댔다. —내가 훔쳤다는 건 아니고. 여자가 반박자 느리게 덕붙였다.

" 젠장. 이러면 뭐 얻어갈 것도 없는데. "

여자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구어진 괴물의 눈알을 집어들었다. 알 수 없는 점액질이 잔뜩 묻어 무척이나 불쾌했지만, 뭐라도 건져가려면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낡고 큼지막한 크로스백에 괴물의 눈알을 챙겨넣었고, 몇 번이나 옷가지에 제 손을 닦아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 뭐, 중요한 칼이에요? "

흩날리는 모랫가루에 여자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음을 던졌다.

165 이름 없음 (0Da7iAXU.s)

2021-01-29 (불탄다..!) 17:06:56

>>164

'기껏 다 잡아두었다'는 여자의 말을 믿는듯한 표정은 지어보이지 못했지만 여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믿는다는 말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 물이라도 줄까."

별로 효과를 기대할만한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남자 자신도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짧게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되돌아온 물음에 대답이나 하기로 했다.

"중요하다기 보다는... 없으면 번거로워지지. 일할때 쓰는 물건이니까."

새로 사는데 드는 비용과 적당한 무기를 고르는데 드는 시간, 그것을 다시 손에 익히는데까지 감수해야할 불편함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어쨋든 남자에게 있어서는 꽤나 아쉬운 상황이 되어버리는것이다.

"낡은거니까 팔기도 힘들겠지만."

아차, 이러면 훔쳤는지 떠보는것처럼 들리나.
마침 여자가 크로스백에 괴물의 눈알을 챙겨넣는것을 봤으니 그걸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혹시 찾는거 도와주지 않을래? 찾는동안 나오는 괴물은 다 잡아서 주지."

166 이름 없음 (w0Q3yQ2FUU)

2021-01-29 (불탄다..!) 18:02:25

>>165

" 준다면 고맙게 받죠. "

눈꺼풀을 간질이는 모랫바람을 손으로 휘적이며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얼굴을 해보였지만, 사실은 어서 깨끗한 물로 까실대는 입을 헹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여자가 괜스레 제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느긋히 당신이 물을 건네주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뭐, 그리 간절한 것은 아니라는 듯한 여유를 피우기 위함이었지만 중간중간 참치 못하고 터져나오는 잔기침이 그녀가 깨끗한 물을 무척이나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 흐음, 그렇구나. "

여자가 시선을 제 크로스백에 처박은 채 가벼운 추임새를 덧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남자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것일지 의문스러울 태도였다. 한참이나 제 크로스백을 매만지던 여자가 별안간 고개를 처들며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꼭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져 남자를 톡 쏘아본다.

" 날 의심하는 건 아니죠? "

흠, 여자가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남자의 제안이 퍽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얄쌍한 턱을 문지르며 고심하던 여자가 탁! 하며 제 두 손바닥을 마주 부딪혔다. 결론을 내렸으니 어서 제 말에 집중을 해보라는 신호였다.

" 뭐, 좋아요! 까짓거 도와주도록 하죠. 대신 무턱대고 요란하게 괴물을 잡으면 안돼요. 저런 식으로 잡으면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없다구요. "

여자가 남자의 뒷편으로 손가락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엉망진창으로 조각이 나버린 괴물의 사체였다. 사실 남자보다는 그녀가 아쉬울 처지이긴 했으나 아무렴 당돌한 그 태도는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여자가 다시 한 번 제 옷가지에 손을 닦아낸 뒤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뻗어냈다. 그리곤 역시나 앳된 얼굴로 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 알리샤예요! "

하고 제 이름을 건네는 것이다.

167 이름 없음 (4kGgSlpWF6)

2021-01-30 (파란날) 11:52:20

>>166

"물정도는 가지고 다니는게 좋다. 처신하는하는법도."

여자의 서투른 허세를 못봐주겠다는듯 사족을 덧붙히긴 했지만, 남자는 자신의 물통을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시원한 물이 꽤 가득 차있는 통을 뚜껑도 따주면서.

"의심하는하는건 아냐. 넣어둘 곳도 없어보이니."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까지 챙기던 크로스백을 슬쩍 들여다보려 했지만 의심한다기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어쨋든, 으음. 도와준다니 고맙군. 잡는방식은 노력해보지."

정말로 노력해야할것 같았는지 들고있던 라이플을 가늠하듯 만져보며 대답했다. '좀 빗맞춰야겠군.' 이라고 중얼거리던무렵 여자가 손을 내밀자 남자또한 장갑낀 손을 내밀고는 가볍게 악수하면서,

"이든이다. 잘 부탁하지."

덤덤하게 자신의 이름을 답했다.

168 이름 없음 (3FZTOZF7oc)

2021-01-31 (내일 월요일) 00:46:15

>>167

" 함부로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분께 들을 이야기는 아니네요. "

여자의 말은 퍽 건방졌다. 허나 그것은 완전히 상대를 깔보는 정도는 아닌, 까칠한 사춘기 청소년의 빈정댐에 가까웠다. 여자가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물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적당히 물 한두 모금으로 입을 헹구어낸 뒤,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뱉어냈다. 여자는 한모금을 더 삼켜낼까 고민했으나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이 체면을 쿡쿡 찔러댔던지라 금방 작심하고서는 물통을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

여자가 크로스백을 걸어 잠구며 대꾸했다. 그러다 문득 호기심 가득한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는, 괜스레 가방의 표면을 툭툭 치며 그의 관심을 환기하려 드는 것이다. 실은 그리 소중히 여기는 크로스백의 내용물이라 해보아야, 방금 전 해체된 괴물의 눈알과 같이 죄 징그럽고 몇 푼 안 될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황무지가 아닌 우주괴물에게 눈길을 돌린다면 몇 푼 어치는 더 얹어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여전히도 황무지가 좋은 모양새였다.

" 별 말씀을. "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짧은 악수 뒤로 그녀는 살며시 걸음을 내딛어 산만히 걸어대기 시작했는데, 가볍게 뒷짐을 쥐고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보니 대강이라도 그 칼의 행방을 찾으려는 심산인 듯 했다.

" 좋아요, 이든. 칼을 어디서 잊어버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거예요? 아무래도 그 커다란 칼이 길바닥에서 얌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진 않고, 누군가가 주워갔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

탐정이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어쩌면 그녀는 오랜 과거에 장래희망으로 탐정을 꿈꾸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터무니 없는 어린 아이의 꿈처럼 느껴질테지만, 황무지에서 괴물의 잔해를 팔아치우는 일보다야 훨씬 생산적이고 건강한 직업이라라. 여자가 산만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낡은 신발코가 남자를 곧게 마주본다.

" 칼의 주인은 그쪽이니까, 행선지를 정해요. "

여자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169 이름 없음 (v5DPhuXKRw)

2021-02-01 (모두 수고..) 09:49:10

>>168

"...그건 잘하는군."

여자를 가리키며 내뱉은 말은 그녀의 빈정거림을 받아치기위함이긴 했지만 그 말을 차마 부정할 순 없다는걸 인정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어쨌건 말이야 맞는말이기에 긴 말은 하지 못한채 물병을 받아들고는 '마셔두는게 좋을텐데.' 하고 딴소리를 덧붙힐뿐이었다.

"생업인건가?"

여자가 가방을 툭툭 치자 아차하는 느낌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결국은 그렇게 물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가방안의 내용물은 그다지 대단치 않았던탓에 오히려 관심을 끌었던것이다.
그러고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는 여자의 뒤를 조금 쫒는가 싶더니 금세 시야를 멀리 돌리고 걸음은 거의 멈추다시피했다. 모르긴몰라도 남자가 괴물을 사냥할때도 이렇게 하지 않을까.

"주워갔다면 정말 곤란해지는데. 하긴, 괴물이 삼킨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군. 운이 나쁘다면 괴물잡다 칼까지 잡을수도 있으니."

여자의 추리에 대답하는 모양새는 탐정의 질문에 대답하는 의뢰자와도 닮아있었다. 남자가 그 사실을 눈치챌락말락 할무렵 남자를 마주보고 던진 질문에 흠, 하고 새까만 눈동자를 굴리더니 여자와는 반대로 자신없는 떨떠름한 태도로 대답했다.

"여기 어디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행선지를 골랐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170 이름 없음 (ehJYfl3IUg)

2021-02-10 (水) 00:56:56

몰래 너한테 카톡 하나 보내놓고 빠져나왔다. 주는대로 다 받아마신 덕에 잠깐 바람쐬고 온다는 핑계에도 막는 사람이 없었다. 바깥은 춥고 바람은 씽씽 불고 술 깨기엔 딱 좋은 환경이다. 웬만해선 나오고 싶지 않은 날씨이기도 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 틈으로 들어가 보냈던 카톡을 쳐다봤다. 이제야 1이 사라진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이제야 1이 사라진다. 너무 심각해보이는 것 같아서 뒤늦게 하나 더 보냈다.

[1분만 더 있다가 나와!]

그리곤 주머니에 휴대폰을 쏙. 차가운 공기에 손끝이 어는 것 같아 손도 넣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빼꼼 내미니 네 얼굴이 보였다. 조용히 손짓해 너를 불렀다. 이제 우리는 마주보고 서 있고 나는 오랫동안 미뤄둔 말을 할 차례였다.

"우리... 그만하자."

네 눈을 보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잠깐만, 이거 아닌데! 눈물까지 날 정도로는 아니었는데! 주머니 속 손을 꺼내 뺨을 문지르다 외쳤다.

"나 너랑 비밀연애 못하겠어!"

큰일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목소리까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너 애인 없는 줄 알고 맨날 소개팅 끼워넣으려고 하는 것도 싫고, 누구한테 너 번호 따일 뻔 했다는 얘기 듣는 것도 싫었어. 또, 아까 네 옆에 있던 애! 걔 완전 너한테 관심있는 것 같단 말이야......."

허엉—. 멍청한 소리까지 났다. 진정해보려고 애쓰지만 계속 훌쩍거리게 됐다.

"진짜 짜증나......."

중얼거리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 쏟아내고 났더니 눈물은 멈췄는데 뒤늦게 밀려오는 쪽팔림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171 이름 없음 (Xxgeuw/5Ro)

2021-02-10 (水) 01:02:07

"대체 왜 제물이 필요없다는데 계속 제물을 바치는거야? 인간 녀석들은."

온 몸이 붉게 물들어있는 거대한 드래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굴 앞에 놓여있는 제단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이전에 직접 마을로 내려가서 불을 뿜으며 제물은 필요없다고 그렇게 화를 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또 인간이 제단 위에 앉아있었기에 드래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커다란 주둥이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모를 인간아. 제발 돌아가. 좀 돌아가. 부탁이니까 제발 돌아가서 너네 마을 사람들에게 제물은 바치지 좀 말라고 해. 너도 잡아먹히는건 싫을 거 아냐. 나도 인간을 잡아먹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돌아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이야기하는 것이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앞발을 들어 훠이훠이 휘두르자 절로 작은 바람이 불었다. 세 번 그렇게 휘두른 후에 앞발을 내려놓은 드래곤은 고개를 내려 인간과 눈을 마주하려고 하며 다시 말을 걸었다.

"아니면 그렇게 하지 마라고 해도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유가 있어? 있다면 좀 들어나보자. 그래야 다음에 내려가는 일이 있을 때 나도 뭐라고 이야기라도 하지."

/제물로 바쳐진 인간에게 드래곤이 제발 필요없으니까 돌아가라고 하는 장면이야. 제물인 인간 설정은 자유롭게 해도 괜찮아!

172 이름 없음 (UPENSJ6d/c)

2021-02-10 (水) 02:41:05

>>170
"...그래, 그럼 여기까지 하자."

착잡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친구가 비밀 연애에 따라준 것은 내가 원했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억지로 한 거겠지. 소개팅 이야기도, 번호를 달라는 요청도 늘 단칼에 거절해왔고, 옆에 앉은 아이와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게끔 처신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

"네가 공개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거, 잘 알겠어. 그럼에도 난 공개연애를 할 수 없어. 누가 됐든, 한 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연애는 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헤어지자. 이게 내 입장이야."

쓰라리지만, 더 곪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됐든, 저 애가 됐든, 일방적인 희생이 필요한 연애는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와 시선을 상대에게로 단단히 고정했다.

173 이름 없음 (almNz4YAw2)

2021-02-10 (水) 02:51:51

>>171
붉은 드래곤이 살고 있는 동굴 앞에 놓여있는 제단에는 한 소녀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어요. 옅은 갈색 피부에 색이 바랜 은빛 머리칼, 탁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애티가 나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착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답니다. 드래곤이 앞발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자 가맣게 때가 탄 얇은 원피스가 바람에 나부껴 팔다리의 멍자국이 언뜻언뜻 비쳤어요. 작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던 소녀는 가까이 다가온 드래곤의 콧잔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저도 몰라요. 그리고 누가 시켜서 온 거 아니에요. 저는 천하게 태어나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키워졌어요. 드래곤 님이 제물이 필요 없다고 해서, 이제 더 이상 제물이 될 필요가 없어졌다 해도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제물이 되는 것 말고는 살아있을 의미도 가치도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를 잡아먹어 주세요."

174 이름 없음 (Lcf3hFAW06)

2021-02-10 (水) 04:07:12

>>170

[알았어]
[곧 갈게]

그 사람이 보내는 메세지는 길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말이나 글로 자기 생각을 길게 표현하지 않았다. 천 가지 감정과 만 가지 경우를 헤아려도 혀 끝이나 손 끝으로 내놓는 말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말들은 항상 당신에게 서투나마 다정했다. 지금도, 그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 아래로 초조한 기다림을 숨기고 있다가 당신을 찾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불쑥 내놓은 그만하자, 라는 그 말에, 그 감정이 옅어 조각같은 얼굴에도 선명하게 가슴을 옥죄는 경악이 번져가는 게 보였다. 순간 가슴이 칼에라도 찍힌 것처럼 턱 멈춰버린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찬바람 사이로 먹먹했다. 그러나 그가 경악을 덜어내고 호흡을 고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신이 차마 양손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신의 손끝에 와닿는 게 있었다.

" 자. "

하는 목소리와 함께 당신의 손끝에 닿아오는 그것은 주머니 속에서 따스하게 잠들어 있던 부드러운 손수건이었다. 그 사람은 언제까지고 담담하게 상냥했다. 그것은 당신의 손끝에서 묵묵히 기다려줄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고-혹은 뿌리치고 나면, 이어 나직한 목소리가 다가오겠지.

"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 하는지 나도 잘 알아. "

당신이 거부없이 넙죽넙죽 받아마신 술잔들 중에는 분명히 사심이 담긴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애인이 없다' 고 인식되어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그랬다.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그 속에 쌓여가는 생각들은 당신과 똑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 그래서 그런 거 다 거절하고 있어. 말했잖아. "

그는 담담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일견 무뚝뚝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찬 바람을 가로질러 와닿는 그 말은 분명히 따뜻한 것이었다.

" 난 너 아니면 싫다고. "

그 사람은 잠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확실히 아무도 없다. 이 틈새에는 당신과 그 둘뿐이다. 그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코트 앞섶의 단추를 풀고는 당신에게 품을 벌려보였다.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면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175 이름 없음 (Lcf3hFAW06)

2021-02-10 (水) 04:08:30

/ 앗... 새벽에 잇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다른 일 하면서 천천히 잇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이을 줄은 몰랐네. 확인하지 않고 레스 작성해서 미안해. >>174는 스루하거나, 원 레스를 작성한 참치가 좋을 대로 처리해줘.

176 이름 없음 (Xxgeuw/5Ro)

2021-02-10 (水) 09:33:57

>>173

"이젠 하다하다 제물로 바칠 용도로 동족을 키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거야?"

소녀의 말을 들은 드래곤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제물은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인간들의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말을 하고 위협을 했는데 대체 어쩌다가 자신에게 바칠 용도로 키우는 인간이 생기는 일이 일어난건지 드래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조만간에 또 마을에 내려가서 더 크게 위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제발 자신을 잡아먹으라는 인간 소녀를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이름 모를 인간인 네가 어떻게 자랐는진 모르겠지만 너도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이 한둘 정도는 있었을거 아냐. 보아하니 그 마을 인간 놈들에게 맞기라도 한 것 같은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른 마을에 가서 살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이라도 해."

인간인 이상, 정확히는 생명체인 이상 아예 하고 싶은 것이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드래곤은 그 욕구를 자극하려는 듯 그렇게 이야기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이 소녀가 마을에 돌아가서 말을 전할 수 없을테니 조금 귀찮겠다고 생각하지만 팔다리의 멍으로 보아 돌아가봐야 도망쳐왔다고 또 폭력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니 멍자국 때문에라도 마을에 돌아가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내가 마을에 내려가서 더 이상 제물 좀 바치지 말라고 할테니까. 집이라도 하나 불태워버리면 될까. 아. 좋은 생각이 났어. 너에게 가장 폭력을 행사한 집이 누구지? 그 집을 불태워줄게. 연약하고 힘도 그리 강하지 않은 이들 주제에 제물로 바치겠다고 동족을 키우고 폭력까지 행사하다니. 널 잡아먹는 것보다 그 자의 집을 불태우는 것이 더 유익하겠네."

177 이름 없음 (almNz4YAw2)

2021-02-10 (水) 12:47:36

>>176

어쩌면 제물이라는 것은 핑계였을지도 몰라요. 산 아랫마을에는 몇 년에 한 번꼴로 외모가 다르게 태어나는 아이들을 액받이라고 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끊임없이 주고 나이가 차면 자연에게 바친다는 둥 허울좋은 구실로 처리해버리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점점 드래곤의 위협이 강해지니 더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 인간들은 액받이를 처리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나 봐요. 자세한 사정은 드래곤도 소녀도 잘 몰랐겠지만요.

"다른 마을이 있다고 들어는 봤지만, 제가 거기 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나 같은 아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워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거기 가서도 미움만 받게 될 거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소녀는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 사람만 지을 수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세상을 모두 내려놓은 것만 같았죠. 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태연히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드래곤의 말에 유약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물은 바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 때문에 마을을 공격하면 괜히 드래곤 님만 미움받을 거야. 지금도 내가 도망쳐서 사람들이 찾고 있어요. 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잡히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어.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잡아먹어주세요."

/잇다 보니까 이런저런 설정이 붙었네. 생각했던 설정이 아니라 잇기 어려우면 살짝 말해줘!

178 이름 없음 (Xxgeuw/5Ro)

2021-02-10 (水) 13:47:45

>>177

대체 얼마나 마을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는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드래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 원인이 아무리 생각해도 숭고하고 고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드래곤으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었다.

"너 같은 인간은 대체 무슨 인간이지? 내 눈에는 너나 마을의 다른 인간들이나 별 차이가 없어. 아니. 오히려 번거롭고 귀찮게 하는 것은 판박이네."

제발 자신을 잡아먹어달라고 하는 것 같은 소녀의 말에 드래곤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두 앞발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붙어있는 귀를 막았다. 그 상태에서 시선은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도망쳐서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제물이 아니라 스스로 여기에 왔다는 이야기 같았기에 드래곤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튼 인간아. 네 말에 따르면 겁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 잘 됐네. 마을까지 내려가지 않고 위협을 해서 더 이상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게 할 수 있겠어. 제물을 바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한 번 더 말해서 더 이상 이따위 쓸모없고 처리하기도 힘든 일을 못하게 만들어야겠어. 미움이라고 했니? 인간에게 미움을 받는게 두려워할 것 같아?"

할테면 해보라는 듯이 드래곤은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불꽃을 내뱉었다. 하늘 높게 날아오른 불꽃은 높게 높게 저 멀리 날아가다 사르륵 공기에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이름 모를 인간아. 나는 인간을 잡아먹는 것보다 멧돼지나 곰을 잡아먹는 것을 더 좋아해. 그 사냥감들도 약한 객체가 공격받으면 강한 객체가 목숨을 걸고 덤비는데 너희 마을 사람들이란 것들은 오히려 약한 동족을 괴롭히고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키운다고 하니 그 사냥감들보다 못한 녀석 같은데 그런 이들 때문에 죽은 것은 억울하지 않니?"

/아니야! 전혀 어렵지 않아!

179 이름 없음 (almNz4YAw2)

2021-02-10 (水) 15:42:44

>>178

소녀의 여리고 매끄러운 갈색 피부는 여름에 가장 빛나는 나무를 닮았고, 색이 바랜 은빛 머리칼은 이른 새벽녘 서늘한 공기의 색을 머금었습니다. 모두 밝은 피부에 어두운 머리색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것들이었죠. 드래곤의 눈에는 다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겠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딘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소녀와 같은 이들은 무언가 특별한 존재들이어서 보통의 인간들이 시기하고 질투해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몇 간악한 인간들은 그런 사실을 꽁꽁 숨겨왔고요. 그럴 수 있는 힘만 있었다면 이 커다란 드래곤도 없애버리려고 했을 것이 인간이라는 족속입니다. 자신들보다 강하고 특별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불을 뿜어내자,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어요. 지금까지는 드래곤이 소녀에게 호의적이어서 두려운 티를 내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지만 저렇게 불을 뿜는 모습은 역시 무섭거든요. 하지만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불꽃을 바라보는 소녀의 탁한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습니다.

"미움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에요. 아무리 사람들이 드래곤 님을 해치지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으면 마음이 외롭고 아프잖아요. 몸이 다치는 것보다 마음이 다치는 게 더 아프고 괴로워요. 그리고 당연히 억울하죠. 나도 사랑받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어.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걸. 어차피 다를 거였다면 나도 드래곤 님처럼 강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잖아."

소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어요.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그저 담담한 얼굴로 드래곤을 올려다볼 뿐이었습니다.

180 이름 없음 (Xxgeuw/5Ro)

2021-02-10 (水) 16:17:06

>>179

드래곤의 눈에 소녀는 참으로 딱한 이로 비쳤다. 당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적어도 동족에게는 사랑받을 수 있고 그 삶이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그녀는 그 당연한 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딱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부분 제물로 올라온 이들은 살려달라고 하기 바빴기에 너무나 담담한 그녀는 드래곤에게 있어 딱함과 동시에 신기한 존재였다.

"사냥감보다 못한 그 인간들의 애정 따위는 받을 마음 없어. 애초에 네가 뭐라고 한들 나는 널 포함해서 인간들을 잡아먹을 생각 따위 없어. 솔직히 이야기해서 드래곤들에게 있어 인간 고기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을 때 고민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 이 근처에 먹을 것이 그렇게 많은데 왜 내가 굳이 맛도 그다지 없는 인간을 잡아먹어야 하는건데?"

자신에게 있어선 맛도 없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먹으라고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기에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드래곤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절대로 잡아먹지 않겠다는 듯이 거센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말이 끝나자 드래곤은 앞발을 뻗어 저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 중에선 저쪽 방향에 있는 조금 멀지만 다른 마을로 가는 이도 있었어. 그 마을로 가서 도움이라도 받아보는 건 어때? 억울하다는 것은 곧 살고 싶다는 이야기잖아? 그렇다면 드래곤에게 잡아먹어달라고 부리는 용기를 다른 마을에서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바꿔서 살아봐. 드래곤이 먹지 않고 풀어줬으니 넌 제물이 아니아 자유야. 뭘 해도 좋다는 이야기야.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드래곤인 나보다 무섭진 않잖아?"

소녀를 지나 드래곤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후에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을 바라봤다. 저기로 날아가면 사람들이 있을까? 있다면 쫓아버리겠다는 듯이 드래곤은 입에 불꽃을 머금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상 너도 사랑받고 행복할 자격이 있어. 동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제물로 바치려는 그놈들은 얼굴만 인간이지, 속은 괴물이야. 너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잖아? 그러니까 제물로 올라와서 제발 잡아먹어달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 네가 살고 싶은 삶을 직접 만들어봐. 자유잖아. 한번만 더 잡아먹어달라고 하면 강제로 물어다가 다른 마을에 버리고 갈 거니까 물려가기 싫으면 네 발로 직접 걸어가."

181 이름 없음 (almNz4YAw2)

2021-02-10 (水) 18:00:51

소녀에게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말, 너도 사랑받고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드래곤의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말을 들은 것이 처음이라서 더 기쁘고 아프게 느껴졌죠. 소녀는 가만히 앉아서 드래곤이 해주었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습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이 따갑고 시려워서 입술을 꾹 깨물었어요.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자유보다는 안정을 바랐어요. 하지만 드래곤은 이미 떠나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지내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면 그에게마저 미움을 받아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구나 제 앞을 지나쳐간 드래곤이 다시는 이쪽을 봐주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 있어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답니다.

조용히 제단에서 일어난 소녀는 드래곤이 가리켰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드래곤이 사람들을 잡아먹지 않고 놓아주었는데 여태까지 마을에 돌아온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유는 그의 말대로 모두 다른 마을로 갔기 때문일까요.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산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산적을 만나 몹쓸 짓을 당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거예요. 끝까지 살아서 다른 마을에 가더라도 똑같이 미움을 받거나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죠. 과연 소녀는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요. 아마도 앞서 말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소녀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최악과 차악만이 남은 불운한 선택지뿐이로군요. 어쩌면... 죽음으로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죠.

소녀는 드래곤이 해주었던 따뜻한 말의 여운만을 가슴에 품은 채 다른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미련 가득한 느린 발걸음을 떼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어요. 소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온몸이 붉게 물들어있는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있었습니다.

"고마워요. 안녕."

소녀의 작은 목소리는, 불어오는 산바람을 타고서 드래곤에게 전해졌을까요.


//더 이어볼까도 했는데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막레로 가져왔어. 짧았지만 정말 즐거웠구 고마웠어! 편안한 설 연휴 보내고 항상 행복하고 건강해야 해 참치야!

182 이름 없음 (Xxgeuw/5Ro)

2021-02-10 (水) 18:44:56

>>181 막레 잘 받았어! 깔끔하면 깔끔한 마무리로구나! 사실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궁금해서 1:1을 제안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저렇게 끝을 내면 아무래도 더 이을 여지가 없을 것 같기도 해서 애매하긴 하네.
아무튼 참치도 설 연휴 잘 보내고 행복해라!

183 이름 없음 (almNz4YAw2)

2021-02-10 (水) 20:03:33

>>182 사실 소녀의 이야기는 상판에서 풀기엔 너무 어두워서 여지를 남기지 않고 끝맺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게! 우리 드래곤은 정말 드래곤스러워서 돌리는 내내 즐거웠어. 그럼 즐상판 되구 담에 어딘가에서 또 만나!

184 이름 없음 (sTSQy7mAU.)

2021-02-16 (FIRE!) 00:31:29

오후의 햇살이 스며드는 한적한 숲길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울린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어린 티가 나는 목소리가 힘을 주어 신신당부를 하니,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대답한다.

"아시겠죠, 솔레이 님? 이번에는 꼭, 꼭!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셔야 돼요. 아셨죠?"
"알겠어, 큐브.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 ...그래도 추가 근무수당은 꼬박꼬박 줄건데 조금만 봐주면 안될까?"
"....."

큐브라 불린, 신신당부를 하던 가무잡잡한 피부에 보라색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의 하인이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자, 장난스럽게 말하던 살구색 피부와 주황빛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의 큼지막한 몽둥이를 등에 맨 용사, 솔레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하하, 하고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이번엔 절대 딴길로 안 샐게, 약속!"

그제서야 큐브는 인상을 풀었지만, 몇번이나 일정이 어긋났던 일이 생각났는지, 큐브는 기어이 잔소리보다는 우는 소리에 가까운 투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지체되는 것도 안돼요! ...진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지체되지 않게 해주세요. 세멜레 님께 보고드리는 건 제 몫이란..."
"...큐브, 저것 봐!"

솔레이는 큐브의 잔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살피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큐브의 말을 자르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제 우는 소리를 끊어버린 솔레이를 원망스레 바라보던 큐브는, 솔레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곳에, 작은 몸집의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솔레이는 조심조심 쓰러진 사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고, 큐브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솔레이는 엎어져 있는 이를 조심스레 바로 누이고, 자세히 살폈다. 색이 바랜 은발에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어린 소녀였다. 팔다리에는 조난으로 인한 것이라기에는 부자연스러운 멍자국이 있었고, 두 눈은 힘없이 감겨져 있었지만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니, 희미하게나마 숨결이 느껴졌다. 소녀의 상태를 살핀 솔레이는, 좀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큐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큐브, 추가 수당은 얼마든지 줄게. 이 아이 좀 봐줄 수 있어?"

큐브는 어쩔 수 없이 또 지체되겠다는 예감에, 반쯤 해탈한 얼굴로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에게 손을 향하고 주문을 외었다. 아이의 팔다리에서 멍자국이 사라졌지만, 아이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향했던 손에서 빛이 사라지자 큐브는 솔레이에게 말했다.

"외상과 내상은 나았지만 깨어나려면 좀 걸릴 거예요. ...이 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을 텐데... 그렇게 하실 거죠?"

"역시 큐브야, 나를 잘 아는구나!" 부러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돌아오는 싸늘한 시선에 솔레이는 멋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 여기 추가 수당. 치료 마법이랑, 하루 정도 지체될 거니까... 자! ...늘 고생시켜서 미안해."

솔레이가 추가 수당을 담은 돈 주머니를 건네며 머쓱하게 사과하자, 큐브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방에 넣으며 반쯤 포기한 듯한 투로 대꾸했다.

"하루보다 더 지체되지만 않게 해주세요... 깨어나면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아이가 가야 할 곳에 아이를 맡기고, 목적지로 가는 거예요."
"당연하지! 고마워. 그럼 나, 불 피울 거 좀 모아올 테니까, 이 아이 좀 부탁할게!"
"예에."

큐브가 아이를 여분의 침낭 안에 뉘여놓는 사이, 솔레이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와 쌓아두고 불을 피웠다. 모닥불에 불이 붙자, 냄비와 물, 향신료, 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구입한 채소와 여행길에 잡았던 들짐승의 고기를 꺼내 식사준비를 하는 사이 날이 저물어가고, 고기와 채소, 향신료의 향이 어우러져 맛있는 냄새가 풍길 즈음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스튜가 눋지 않도록 힘차게 저으며 솔레이가 말을 꺼냈다.

"거의 다 되어가는데, 슬슬 일어나주면 고마울 텐데 말이야."
"그럼 좋겠지만, 아무래도 저희가 발견하기 전에 큰 일을 당한 것 같으니까요. 아이 여차하면 아이 몫은 남겨뒀다가 데워서 주던가 하죠."
"음, 그래야겠네."

185 이름 없음 (TJfyTvQYmw)

2021-02-18 (거의 끝나감) 10:57:38

ㄱㅅ

186 이름 없음 (i1L3TcDbbQ)

2021-02-20 (파란날) 19:20:20

"이모~ 여기 국밥 특으로다가 든든~하게 하나 말아주시고, 보통 하나 포장해 주세요. 그리고 참이슬 빨간 거 하나요."

...
"그래서, 퇴근하고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메뉴를 주문하기도 전에 까였다고요?"

"아 ㅋㅋ 선배 제가 말했잖아요. 과장님 눈 엄청 높다니까. 그 잘생긴 얼굴에 과장도 일찍 달아놓고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겠어요?"

"게다가 선배는 벌써 낼모레 서른… 아! 알았어요. 미안, 미안해요. 그만 울어요… 자. 여기 물티슈요. 눈 좀 닦으라고요. 자기가 팬더야 뭐야."

화장 안 하는 게 더 예쁘다니까…
"…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 나왔다. 천천히 들어요. 뜨거워."

후배는 선배 쪽으로 그릇을 밀어놓고 가만히 제 잔을 채웠다.

187 이름 없음 (fqhgfpbMs6)

2021-02-20 (파란날) 20:12:02

>>186
한바탕 울고 나니 머리가 식었고, 결혼 소리에, 낼 모레 서른 소리에 재차 삼차 기분이 가라앉았다. 과장님이 나와 같은 마음인 경우에도 별로 행복하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덕분이었다. 덕분에 미련이 씻은 듯 내려갔다. 한참 후배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도 창피했고. 눈물을 닦는데, 화장 안 한 게 더 예쁘다니 하는 소리를 희미하지만 똑똑하게 들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과장님이 이런 기분이셨구나. 마음이 잘 맞는 후배인 줄 알았더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기분에 애석했지만, 이것 또한 내 잘못도 저 친구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에 고맙다, 라고만 대꾸하고 말없이 국밥을 떠먹었다. 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해야 하는 말이 있으니까.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국밥 고마워요, 이야기 들어준 것도. 근데 다음엔 이러지 않아도 돼요. 과장님께도 일에 지장 안 가게 하겠다고 말씀드린 참이라."

까였는데 뭐 어쩌겠어, 단념하고 밥줄 붙잡아야지. 눈물 나는 거야 심정적인 거고. 그건 그렇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그리고 아무 말도 안했다고 둘러댈 거면 좀 더 작게 말하는 게 어때요? 다 들렸거든요. 무슨 내용이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확실히 정리하고 싶은데... 어느 쪽인지 직접 말해줄 수 있어요?"

어느 쪽, 이라고 뭉뚱그렸지만 맥락이 있으니 뭔 소린지는 알겠지. 기왕이면 부장님과 그랬던 거처럼 허심탄회하게 풀고 싶긴 했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 어떤 대답을 하든 나는 나대로 선을 지켜야겠다.

188 이름 없음 (YK8WiHwG1s)

2021-02-20 (파란날) 22:59:45

>>187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고민 없이 달려 나왔고, 선배가 과장님과 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다.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따끔한 죄의식뿐이다. 선배가 배를 채우는 동안 말없이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애매하게 반쯤 채워진 마지막 잔을 앞에 두고,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운을 떼는 선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엔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하다. 확실히 정리하고 싶다는 말에는 목구멍이 턱 막힌다. 뺨이 얼얼해지는 것은 비단 술기운 때문만이 아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면서 먼저 다가갈 용기는 없고,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서 무던해 보이려 애를 쓴다. 지금처럼 중요할 때에는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묘하게 선을 긋는 듯한 선배의 태도에 평소처럼 너스레를 떨 분위기가 아니라 입술이 쉬이 떨어지질 않는다.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다.

"저, 선배 좋아해요."

이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선배도 알고 있지 않았냐는 둥의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국밥집에서 취중고백이라니, 꼴사납다. 물론 조금도 취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 시선을 피하며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먼저 나가있을게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망치듯 자리를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대답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를 맞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 손에 든 검은 봉지가 참 초라하다.

189 이름 없음 (AEXzpvbNtg)

2021-02-21 (내일 월요일) 08:20:03

>>188
저 선배 좋아해요. 그 말을 남기고 후배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작은 중얼거림이 예방 주사 역할을 했는지 그렇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오히려 친한 후배라지만 거리 조절을 못했던 게 미안하기도 했고,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그런 감상에 오래 잠겨있을 시간은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검은 봉지를 들고 담배를 피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듣기 싫겠지만 대답은 해야지.

"저는 OO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분께 마음이 있었던 것과는 별개입니다.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게 정확하겠네요. 그간, 사적인 일로 대단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계산은 마쳤으니 좀 앉아있다가 조심히 돌아가요.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고 돌아섰다. 새삼 무상감이 들었다. 연애라는 게 뭐길래 선배가 돼서 그렇게 못 볼 꼴을 보이고 거리 조절을 못했을까. 다시는 실연당하고 술같은 거 먹나 봐라. 마시더라도 폰을 꺼두고 홈술해야지.

190 이름 없음 (XdQqAPFaXA)

2021-02-26 (불탄다..!) 22:00:37

"주인… 속상한 일 있었어요?"


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침대맡에 서있던 메이드의 꼬리가 축 늘어진다.


"에구.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자아, 이리 오세요."


그녀는 침대에 사뿐히 걸터앉아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너를 올려다보는 눈길이 퍽 다정하다.


"… 어서요."

191 이름 없음 (TgVoGr5H9o)

2021-02-26 (불탄다..!) 22:54:55

>>190

"이런 식의 업무는 부탁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뭐하는 짓이죠?"

고개를 움직일 겨를도 없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침대 위에 앉아있는 하인을 나직이 질책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모멸감과 당혹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무표정하기만 한 얼굴로, 그는 문을 가리켰다.

"나가십시오, 당장."

192 이름 없음 (11oqwhlcO6)

2021-02-26 (불탄다..!) 22:59:52

>>191 차라리 잇질 말지 ㅎ;

193 이름 없음 (/D.wqNfmvo)

2021-02-26 (불탄다..!) 23:05:08

답레로 꼽주지 마라 좀;
전부터 그러네

194 이름 없음 (LT74/kafX2)

2021-02-26 (불탄다..!) 23:09:13

솔직히 어그로성 아니냐? 이거?
걍 잇기 싫으면 안 이으면 되지 왜 이러는거임?
전부터 이러는 이들 은근히 나오네

195 이름 없음 (TgVoGr5H9o)

2021-02-26 (불탄다..!) 23:31:50

>>191입니다. 메이드가 고용주의 가장 사적인 공간, 그것도 침대 위에서 안아주겠다고 하는 상황이 고용주 입장에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이었습니다만, 원하지 않았던 전개라면 얼마든지 스루하셔도 됩니다. :)

196 이름 없음 (Jx1gJ/ARyI)

2021-02-26 (불탄다..!) 23:36:25

>>195 개인적으로 끊어먹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레스에 적힌 내용은 제대로 읽어주고 잇는게 도리이지 않을까... 190레스에 > 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등의 상대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앞뒤맥락 없이 고용주 성격적 전개만 밀어붙인 것 같아 보이네

197 이름 없음 (bWEDCA5XQ6)

2021-02-27 (파란날) 02:17:48

어디에나 흔하고 평범한 시골 소녀 마리
조금 왈가닥이며 부모님 농사를 잘 돕지만 가끔은 할일을 빼먹고 시간 나면 한적한 호수에서 빵을 먹으며 새들을 관찰하는게 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취미인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
하지만 별똥별이 하늘에 아름다운 선을 그은 날 즈음 이후 마리가 달라졌다.

적은말수와 무언가를 초월한듯한 그 특유의 미소 특히 별똥별이 떨어진 직후엔 홀로 멍하니 나사빠진 사람마냥 서서 무서울 정도로 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은 예전처럼 곧잘 남들과 이야기도 하고 농사일은 오히려 예전보다 능숙해진듯 남은 일을 효율좋은 기계처럼 빠르게 처리했다.
외적인 변화로는 글쎄... 예전의 그녀와 똑같았지만 왠지 기분상 그녀의 검은 눈속에선 그날 지나간 유성같은 유리조각들이 반짝거리는 기분이였다.

어른들은 그런 그녀를 드디어 철이 들었다며 별 신경쓰진 않는다.
그녀와 같이 다니던 무리도 딱히 이상한것을 못느끼는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말을 건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거야?"

//옛날에 한번 썼던 글이지만 사람마다 진행은 다를수 있을것 같아서 다시 가져와봤어
혹시 문제가 된다면 지우도록 할께...

198 이름 없음 (2IEr8y/DSg)

2021-02-27 (파란날) 02:50:31

>>197 마리에게 약간 두근대는 정도의 츤데레 남자애가 틱틱거리며 반응해도 괜찮을까!

199 이름 없음 (bWEDCA5XQ6)

2021-02-27 (파란날) 03:02:10

>>198 물론이야! 무엇이든 이을 자신 있다구
해피엔딩은...노력해볼께

200 이름 없음 (2IEr8y/DSg)

2021-02-27 (파란날) 03:12:04

>>197
"누가 쳐다봤다고 그래?"

확실히 쳐다보고 있었던 소년은 소녀의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모자라 발이 간지러운 것처럼 괜히 신발로 빽빽한 들풀을 꾹꾹 눌러 즙을 낸다. 상냥한 어른이 보고 있었다면 "얘, 그러면 신발에 풀즙이 묻잖니."라고 면박을 줄 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어른이 없기에, 그리고 소녀가 그런 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믿기에 소년은 마음껏 가벼운 짜증을 바닥에 풀었다.

"그냥, 뭐 있잖아. 너 요즘 재미없지 않아?"

소녀가 재미없는지 아닌지 소년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냥 좀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소녀에게 그렇게 관심을 주고 있는 건 아니다. 누구한테나 그렇게 보이니까 소년도 그렇게 느끼는 거다. 아무튼, 그렇다. 소년은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냥, 그냥, 아니... 됐다..."

소년은 살짝 간지럽기도 하고, 조금은 찜찜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하고, 발밑에 짓밟힌 풀즙처럼 혀를 말리게 하는 쓴맛도 느껴지는 듯한 감정을 속으로 삼켰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어머니가 돼지들을 보고 있으라고 했었지. ...됐어, 마리가 더 중요해.

201 ㅇㄱㅇ (bWEDCA5XQ6)

2021-02-27 (파란날) 03:12:22

>>198 미안 슬슬 잠이 와서...답레는 내일 잇게 될것같아 어짜피 여기는 뭐든 자유니까 좋을대로 써주면 뭐든 기쁠것같아 그럼 내일봐잘자!!

202 이름 없음 (kU.sQGT1q.)

2021-02-27 (파란날) 04:21:46

(너는 오늘도 거무튀튀한 색으로 물든 창문을 보면서 불만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검은 연기가 구름을 밀어내고 버젓이 햇빛을 가리고 있는 빛 적은 도시의 창문은 수시로 닦아도 순식간에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너는 어차피 외출할 생각이었다며 검은 이물질로 얼룩덜룩한 노랬던 장화에 발을 밀어넣고 검은 끈을 조이고, 정식 방호복에 비해선 부족하지만 괜찮은 수제 방호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채 밖으로 나갔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나의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유령이다.) 테레사, 창문은 오늘도 내가 닦을까? (너의 허락을 구했지만 대답을 듣지 않고 더러운 걸레가 마법처럼 깨끗해질 때까지 쥐어짰다. 아닌 게 아니라, 마법이다. 너는 더러운 걸 싫어하니까, 내가 있어서 꽤 도움이 되었다. 나는 너의 집-원래 주인이 없으니 너의 것이라 해도 좋겠지.-의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친밀감이 있는 상태. 꺄악 유령이다! 하고 도망치는 것 등은 스루함.

203 이름 없음 (PmhU/s4746)

2021-02-27 (파란날) 06:47:24

204 이름 없음 (bWEDCA5XQ6)

2021-02-27 (파란날) 11:59:20

>>200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의 소리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
이어지는 들풀들의 작은 아우성
그 무엇도 순간 둘 사이의 정적을 메우지 못했다

"..하하...하하하! 그게 무슨소리야"

다행히도 곧 명랑하게 울려퍼지는 소녀의 웃음소리가  기계적으로 울린다.
이게 그렇게 웃길일인가 싶을 즈음에 일정하게 이어지는 웃음소리는 어느 기점으로 뚝 그치고 소녀는 조금 빠르게 소년에게로 걸어간다.

순간 마주친 그녀의 눈에서 별빛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어디가 재미없는데?"

입은 웃고있지만 어쩐지 그를 지켜보는 두 눈만은 섬뜩하다

205 이름 없음 (hemiiT/U16)

2021-02-27 (파란날) 12:47:31

>>202
(이 놈의 창문은 아무리 닦아도 도무지 깨끗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나는 욕 대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장갑 낀 손으로 걸레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익숙한 너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 유령아. 검은 아침이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 대신 나는 늘 너에게 그런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방독면에 가려지기는 했겠지만. 그리고 오늘도 창문 청소를 도와주려는 너의 마법을 신기하게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그럼 저 위쪽만 부탁해. 아래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봐도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저 마법. 나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을 정도까지 걸레를 힘들게 쥐어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너에게 말을 걸었다.) 다 닦으면 말해줘. 그래도 너 덕분에 오늘도 일찍 끝나겠다. 고마워, 유령아.

/유령 이름을 알지말지 몰라서 그냥 유령이라고 쓰긴 했는데 혹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설정이 좋다면 장난 섞인 애칭 정도로 생각해줘.

206 이름 없음 (FdR63Im9tg)

2021-02-28 (내일 월요일) 21:42:56

이상한 것으로 범벅된 눈알이 상대를 응망한다. 이리저리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안. 차분히 정리된 것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 기묘한 시선만은 올곧게 쭉 뻗어 나갔다. 간신히 일 분은 넘겼을까. 시선은 상대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떠한 낌새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행동의 의중을 파악하기에는 억만큼의 시간이 있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극심한 애정이 흘러넘치다가도 곧잘 미움에 잠겨 누군가를 삼키려고 준비하는 듯한 얼굴. 이런 것을 유애라고도 부르던가. “가지 마.” 상한 입술이 열렸다 닫힌다.

207 이름 없음 (P5WzWWb45s)

2021-03-01 (모두 수고..) 00:36:55

또각 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구두굽소리 그리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다른이들의 발소리
소리의 중심이 점점 그것에게로 다가온다

"조용!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죠 그외의 인부들은 전부 돌아가세요"

겨우 장지문같이 얇은 거리임에도 낮과 밤, 하늘과 바다, 그와 같은 것들만큼 저 너머와 그것이 있는곳은 거리감이 있는듯 했다.
하지만 그 교양있는 언어로 일행을 진두지휘하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거리를 메울만큼의 묘한 힘이 실려있다.
.......

"가지 않습니다"

그것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방안을 둘러보며 이질적인 거리사이를 순식간에 넘어오는 그녀
어딘가의 모델 같이 큰키의 마른여성은 척 보기에도 화려해보이는 치장으로 어림잡아 그녀가 걸친것으로만 이 일대를 사버릴 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마담 카멜라 당신은 누구죠?"

208 이름 없음 (P5WzWWb45s)

2021-03-01 (모두 수고..) 00:37:22

>>207에 >>206추가

209 이름 없음 (mvtwLkUC9w)

2021-03-01 (모두 수고..) 01:08:49

>>207

“날 기억하지 못해?” 가지 않는다는 확고한 대답에도 불안한 마음이 퍽 위태롭다. 아까만 해도 상대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까 봐 애를 태웠는데 이제는 불안의 이유가 기억 쪽으로 넘어왔다.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질문해 오는 그녀가 낯설기만 하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느낌. 사지가 저렸다. 눈부신 치장에 한 번이라도 눈을 꽉 감으면 중심을 잃고 떨어질 것만 같다. “...정말 나를 몰라?”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본다. 그리고는 평생 말하지 않을 것 같던 이름을 뱉는다. “노아.”

210 이름 없음 (P5WzWWb45s)

2021-03-01 (모두 수고..) 01:35:09

>>209

"노아...노아...노아...흠 진명?..이 아니군"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했다니
그녀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숨을 들이킨다.
향은 깊은 산의 흐르는 개울 향 푹 썩어 이끼로 뒤덮힌 커다란 나무향 조용한 새벽에 동트는 태양의 향등 표현하기 어려운 향이 방안을 채운다

"그럼 노아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211 이름 없음 (Lcvzv644Fk)

2021-03-04 (거의 끝나감) 01:19:17

졌다.

평생을 무에 정진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 수 있을 지 연구했다.
단순한 싸움이 아닌 관객을 만족시켜줄 그 짜릿한 한 순간을 그려내고 싶어 죽음의 무도를 피범벅이 될 만큼 연습했다.

모래 위에 내 상대의 붉은 피가 뿌려질때마다, 귀부인과 걸인을 가리지 않고 날 위해 뿌려대는 꽃잎과 함성들이 나의 무대, 나의 전장을 장식했다.

그렇게 나는 생사를 건 단 한순간을 매일같이 누려가며 춤추고, 밤에는 나를 원하는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춤을 추었다.

그저 춤으로 끝내어, 나의 이 행복한 살육으로 점철된 아름다운 도살장에서의 삶을 끝낼 일도 없었지만.

허나. 지금 나는 졌다.
온 몸에 새겨진 생채기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와 모래 위에 떨어져 뭉쳐있다.
그 피에 젖은 손틈을 벗어난 검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나의 이름을 연호하던 이들은 어느새 내 상대의 이름을 열광하며 부르고 있다.
나를 위해 뿌리던 꽃잎은 이제 저자를 위한 융단이 되어 이 야만스러운 무대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나를 쓰러트린 자 그 자체이다.
나는 나보다 몇배는 더 큰 거한들을 날카로운 일격으로 베어넘겼다.
흉악한 괴물을 연상시키는 이들 앞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쇼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허나 내 앞에 서, 승리를 가져간 이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낮의 무대에서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자.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없는것이 당연하다 여겨졌던 자.

그래. 그는, 아니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압적이지도, 흉측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기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올려다본 하늘은 기분이 나쁘도록 눈이 부셨다.
그녀가 눈이 부셨던 것이라 비유하는 이들을 베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믿을 수가 없어."

생각한 그대로의 말을 꺼냈다.

212 이름 없음 (VgyS2KLRwg)

2021-03-06 (파란날) 20:14:40

>>211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공기를 뒤흔들고, 제법 버거웠던 상대가 제 앞에 쓰러져있음에도,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선택한 것이었다지만, 몇번을 해도 재미가 붙지 않는 일이었다. 이 곳에서의 검투 경기는 패자를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되는 정도였지만, 어지간해서는 검까지 쓰지 않아도 되는 경비 일과는 달리 매일같이 피냄새를 맡아가며 죽기살기로 싸우는 건 지겨웠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늘로 끝이다. 그리 생각하자, 조금은 홀가분했다.

이걸로 여비는 충분히 벌었으니까. 배를 타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보다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야지. 그렇게 벼르는데,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모양을 보아 하니, 믿을 수가 없다, 그런 말 같았다. 그는 나직이,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지금은 피투성이가 되어 검도 놓치고 모래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눈 앞의 상대가, 어제만 해도 가장 잘 나가던 검투사임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어쩐지 페이가 세더라니, 그런 거였군. 어떻게 할까. 피곤해지는 건 딱 질색인데. 그는 상대에게만 들리도록, 적당히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됐고, 죽을 건지 말 건지나 말해.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거든. "

213 이름 없음 (rtFnIXvPWs)

2021-03-07 (내일 월요일) 16:30:06

ㄱㅅ

214 이름 없음 (wGqbfbjbJM)

2021-03-07 (내일 월요일) 18:49:14

(창문과 창문 사이, 맞은편 주택의 창문이 열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당황한 기색으로 물고있던 담배를 슬쩍 손으로 붙잡았다. 아마도 당신도 나를 보았겠지.) 어...안녕하세요? (라고, 실로 오랫만에 갈라진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아래에서 울려퍼지는 좀비들의 신음소리가 더욱 컸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 퍼석한 머리를 긁적거린다. 이웃인데,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네. 어색하게스리.)

215 이름 없음 (P4KTwQIQU6)

2021-03-07 (내일 월요일) 19:26:43

>>214
(창문이 드르륵 열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부스스한 머리의 여자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느리게 끔뻑이던 눈이 크게 떠진다. 당신을 봤다. 하늘 높이 올라갔던 양팔이 얼른 내려온다. 이제 보니 붕대인지 피투성이 거적때기인지를 겨우 감았을 뿐, 토플리스 차림이다.) 어! (입밖으로 육성을 내어본 지 오래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인 듯, 이상하게 갈라진 목소리. 몇 번 기침 소리가 난다.) 살아있나? 산 사람인가? 저기요! 살아계시는 분 맞아요? 방금 인사 소리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담배 피우는 좀비는 못 봤으니 사람이겠지? (당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듯 창문 밖으로 상체가 빠져나온다. 피 냄새를 맡은 좀비들의 아우성이 더욱 커진다.) 안녕하세요! (눈을 반쯤 감은 채 세차게 팔을 흔든다. 조금 전 기침한 보람도 없이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다.)

216 이름 없음 (wGqbfbjbJM)

2021-03-07 (내일 월요일) 19:36:49

>>215
허어. (몸에 감은 건 붕대인가? 마땅한 옷도 없이 지냈던건가. 담배를 얼른 한 모금 깊게 마신 후에 재떨이에 비볐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 쪽을 빤히 바라보며 답으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좀비들이 정신을 못차리는데... (당신 밑으로 모여드는 좀비들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린다. 입모양을 보면 자신을 반가워해주는 거 같은데, 아래 좀비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같지 못한 상태라 머쓱하다. 당신과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뭐라 하는 지는 안들리니까, 어디보자. 도안용 스케치북을 가져와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써넣었다.) '반갑습니다. 건강하신가요?' 뭐냐, 이거...너무 형식적인가. (살짝 후회하며 스케치북을 보여준다.)

217 이름 없음 (P4KTwQIQU6)

2021-03-07 (내일 월요일) 19:55:35

>>216
(당신이 손을 흔들자 이쪽의 팔이 멈칫한다. 뭔가 비명 같은 것이 들리고, 여자는 상체를 더욱 밖으로 기울인다.) 진짜 사람, 살아있는 사람인가 봐. 뭐라고 하는 거지....... 저기요! 제 말 들리세요? 들리면 팔로 동그라미 만들어주세요! (당신이 스케치북을 가지러 갔다. 반쯤 감겼던 눈이 다시 크게 떠지고, 창밖으로 나왔던 상체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저쪽도 안 들리시나? 어! (양손이 창틀에 짚어졌다가 천천히 떨어지고, 다급한 얼굴이 좌우를 살핀다.) 아! 왜 공책 하나 안 보이지? 필요할 때만 없어! (고심 끝에 주먹을 쥔 채 오른팔을 굽히더니, 왼손 검지로 열심히 이두박근을 가리킨다. 몇 번 같은 동작을 반복한 검지 끝이 이제는 당신을 향한다.)

218 이름 없음 (wGqbfbjbJM)

2021-03-07 (내일 월요일) 20:03:09

>>217
(열심히 스케치북을 흔들어본다. 그나저나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좀비 사태가 벌어진 이후 2주가 지났고, 이젠 들려오던 헬기소리도 잦아들기 시작했으니까. 어째서 2주 동안 한 번도 못마주쳤지? 자신이 자주 나가는 편이 아닌 탓도 있지만. 후줄근한 하늘색 셔츠를 끌어올리고 당신의 제스쳐를 지켜본다.) ...건강해보이시네. (활기차신 분이네. 하하 웃고는 당신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답례를 잊을 수 없지. 그리고 양팔을 직각으로 굽혀 이두근을 펼치는 끝내주는 머슬맨 포즈를 취해보인다. 근육은 없지만.) '밥은 잘 챙겨드시고 계시나요?' (스케치북을 한 손으로 들어보이며 다른 손으로는 허버허버 먹는 모습을 흉내낸다.)

219 이름 없음 (P4KTwQIQU6)

2021-03-07 (내일 월요일) 20:18:54

>>218
아. (급작스레 이 상황이 유쾌하게 느껴졌는지 숨넘어가게 웃는다. 웃음소리는 눈앞의 먹잇감이 잡히지 않아 분노한 좀비 떼의 비명 속에 섞였다.) 재밌는 분이셨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당신의 동작을 따라 하는 듯, 역시 허버허버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엄지를 치켜올린다. 당연한 수순처럼, 그다음으로는 검지가 당신을 향한다.) 그저께 초코파이 하나 먹었으니까, 잘 챙겨 먹고 있는거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공책은 안 보이고. 저거라도 써야 하나? (여자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검은 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태블릿 종류처럼 보인다.)

220 이름 없음 (wGqbfbjbJM)

2021-03-07 (내일 월요일) 20:36:04

>>219
이게 통하네. (실제로 들려오는 건 좀비들의 아우성 뿐인지라 무성 웃음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랫만에 이루어진 소통에 묘한 술렁임이 가슴 속에 퍼져나갔다. 여기서 말할 때라고 한다면 혼자 침대에 누워서 노래를 부를 때 뿐이었으니 목에 가시가 치기 직전이었다. 당신의 제스처에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식량은 저쪽도 잘 구비해놓은 모양이구나. 다리를 뻗어 발 끝으로 슥슥 컵라면을 끌어왔다. 그리고 당신이 볼 수 있게 집어서 흔들어보인다. 집에서 일하는 직업을 택하길 잘했지.) '부족한 건 없으신가요? 옷이라던가' (사실 다친 것에 대해 한 번 물어보고 싶지만, 굳이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담뱃갑을 흔들어 담배 하나를 빼냈다.)

221 이름 없음 (Ex0uASP7X6)

2021-03-07 (내일 월요일) 21:37:39

>>220
저거 설마 컵라면인가? (당신이 흔들고 있는 컵라면의 움직임에 따라 이쪽의 시선 역시 홀린 듯 따라 움직인다. 입가가 반짝이는 것이, 한 방울쯤 침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급히 입가를 닦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의심스럽다.) 부족한 거라면... (빠르게 슥슥 글자를 적어넣은 태블릿을 들어 올려 천천히 스크롤 한다. 메모장에 크게 적어넣은 단어들이 두셋씩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제일 부족한 건 전기!' '배터리 30% 남음ㅠㅠ' '옷은 안 부족해요!' '이거 보이세요?' (여자는 붕대인지 거적때기인지를 가리켰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국을 반영한 20XX년 S/S 시즌 최신 유행 의상!' (이 글자가 적힌 페이지 구석에는 작게 좀비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옷 입으면 자꾸 매듭 풀려서 이런 건데. 그 얘기까지 할 필욘 없겠지? (중얼거리며 계속 화면을 스크롤한다.) '그쪽은 뭐 부족한 거 없어요?' '담배?'

# 늦어서 미안해!!

222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01:08:11

>>221
(뭐지, 방금 움직임은. 흡사 좀비 같았는데, 이로써 한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치되어버린 나머지, 도심 속 신기루를 보게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의심 가득한 표정이 되어 당신을 가만히 응시하다 태블릿에 적혀있는 글씨들을 보고 눈을 깜빡거린다.) '이 시국을 뒤집어놓으셨다. 역시 이웃님.' (대충 그런 내용의 스케치북을 들어올려보인다. 그래, 환상이면 뭐 어때. 오랫만에 즐거운데 말이다.) '전기는 여기도 부족해요.' '담배는 이 참에 한 번 끊어보려합니다.' '진짜 마지막' (나름 과감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담배를 물곤 불을 붙인다. 후각에 민감한 좀비들의 신음소리가 커진다. 좀비들을 내려다보며 후, 연기를 내뱉어) '종종 연락합시다. 한 사람이라도 무사했으면 좋겠거든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 나도 자기전에 봐버렸네 n.n 굿나잇!

223 이름 없음 (TV07MyygxE)

2021-03-08 (모두 수고..) 01:35:45

꿈을 꿨다. 구애인이 나온 꿈이었다. 대단한 개꿈이었지. 그냥 나오기만 했다면 개꿈 앞에 '대단한'이라는 수식어는 안 붙었을 것이다. 그 개꿈에서 난 걔랑 뽀뽀했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눈을 뜨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웃긴데 안 웃겨. 아니, 하나도 안 웃겨. 비장한 얼굴로 이불을 걷어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는데 다시 웃음이 났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따위 꿈을 꾼 거지. 대체 왜? 어떤 이유로? 마지막 기억이라곤 서로에게 가장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쏙쏙 골라 매몰차게 주고받은 것뿐이다. 더러운 기억이지.
근데 이상하다. 원래 화장실이 이렇게 푹신… 까지 생각하고 눈을 떴다. 나는 방금 돌아눕다가 잠에서 깬 것이다. 이게 진짜 현실이다. 꿈속에서의 개꿈이라니, 하하. 작위적인 웃음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웃음소리와는 별개로 여전히 웃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 건 그게 정말 개꿈이었다는 건데.

…….

왜 내 침대 아래 꿈속에서 봤던 사람이 이불을 깔고 누워있는 건지. 심지어 아주 푹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삼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의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각해. 생각해내.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빌어먹을. 필름이 알차게도 끊겼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누워있는 사람-구애인, 현 원수(?)-를 쳐다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아.”

한 번 더.

“일어나, 아침이야.”

아직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지독한 숙취만 머리통을 때리는 중이었다.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혀 볼까. 혀를 깨물까. 아---, 돌겠다. 정말.

224 이름 없음 (wKxTUI/VXU)

2021-03-08 (모두 수고..) 01:48:29

>>223

그립고도 신경질나는 목소리에 아침이 왔다는걸 깨닫고 자신의 몸이 으슬으슬하게 식었다는 사실에 눈을 찌푸리며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가장 먼저 들리는 소리라면 당연히 핸드폰에서 울리는 짜증나는 알람소리였어야 했다. 아침이다. 빌어먹을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준건 편안한 기계음이 아니라 불편한 사람의 음성이었다.

"혹시 너 술 마셨냐?"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옆에 누군가가 부드러운 솜망치로 주기적으로 뒷통수를 세게 후려갈기고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분명 저 원수랑 같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그 이유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머리가 이렇게 지끈거리는 이유는 내가 어제 술을 마셔서 그랬겠지. 그렇다면 저 원수도 술을 마셨는지 확인을 해야했다. 즉, 검증이 필요했다.

"정신 나갈 것 같네.."

특히 내가 기억하지 않는걸 저 원수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225 이름 없음 (Tvq2tSX0L6)

2021-03-08 (모두 수고..) 02:08:05

좋은 아침이라는 낯간지러운 인사를 할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훅을 날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으므로… 이마를 쓸어내리며 참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어…….”

아무래도 뇌는 파업선언을 한 것 같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분간이 안 갔다. 애초에 기억 자체도 얼마 없는데 이런 것까지 분간이 안 되니 딱 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그 개꿈에서 뽀뽀했는데……. 제발 꿈이게 해주세요. 제발요.

“…근데 너도 술 마신 거지?”

맨정신이라면 쟤가 여기까지 들어왔을 리가 없다. 바닥에 이불 펴고 잠까지 잤을 리는 더더욱 없고. 길바닥에서 잔뜩 취한 나를 봤다면 비웃고 제 갈 길이나 갔겠지! 아, 아예 모르는 척 했을 확률이 더 높겠다. 일단 입 다물고 있자. 피차에 만취해서 저지른 하나도 안 귀엽고 끔찍하기만한 실수 같은데.

“………진짜 미치겠는데 나 기억이 없거든. 우리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이 꼴이 된 거니.”

입 다물고 있기 작전은 마음 먹고 1분도 안 돼서 망했다.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고 쟤가 어떤 걸 기억하는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불안했다! 나만 추태를 부린 거냐고. 나만?!

“너 일단 기억 나는 거 있으면 다 말해 봐.”

226 이름 없음 (wKxTUI/VXU)

2021-03-08 (모두 수고..) 02:17:42

"그래, 둘이서 사이좋게 술을 마셨다 이건데.."

술을 어디에서 마셨는가는 중요하지는 않았다. 마셨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나도 미친거지. 취했다고 해서 도대체 어딜 기어들어가는건지.

"마셨으니 물어본거지. 내가 여기에서 자다 일어날 일이 흔하겠어?"

초조하게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전 날에 내가 어디에 가서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마치 자동차의 블랙박스가 파손된 것 같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걸 모르고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이 지경.. 아, 잠깐."

핸드폰의 통화기록이나 메세지를 보면 어떻게 알 수 있는게 아닐까 하고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간건지 어제 아예 고장이 나버린건지 먹통이었다.

"핸드폰 기록 좀 봐봐. 내껀 먹통이야."

서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방법은 거의 없었다. 설마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이 관여되있는게 아닐까 생각되어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227 이름 없음 (Tvq2tSX0L6)

2021-03-08 (모두 수고..) 02:43:18

>>226
사이좋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퍼 마시고 또 같이 필름까지 끊겼다는 사실이 참 놀랍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휴대폰도 뒤지기 싫었는데 지난 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선 내 거라도 봐야 할 것 같아 느릿느릿 움직여 침대에 올려둔 걸 집었다. 그나저나 나 정말 대단하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퍼 마시고도 휴대폰 충전 만큼은 하다니. 배터리 100%! 속으로는 눈물이 났다.

“…악!”

그리고 전화 기록을 보고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헤어지자마자 삭제한 번호를 기억해서 굳이굳이 전화를, 한두 번 했을 때 안 받았으면 포기하면 될 것을 굳이 다섯 번째에 성공을 해서! 휴대폰을 내던지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개라고 하기에도 개한테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전화했어. …다섯 번이나.”

침대에 묻혀 말이 웅얼거렸다. 안 받을 거면 끝까지 받지 말지. 아예 차단해버리지. 의미도 없는 말을 줄줄 뱉어내다 고개를 들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통화내역을 봤다. 우리는 어제 20분 넘게 전화했다.

“시간이 20분 넘는데……. 무슨 얘길한 거야……. 혹시 내가 어제 너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어?”

미치지 않고서야? 많은 의미가 함축된 얼굴로 너를 본다. 그렇게 말했다면 나도 미쳤고 온 너도 미친 거고……. 뽀뽀가 꿈이 아니라면 당장 쓰레기통에 몸을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일단 꿈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니까 그건 정말로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닥치고 있어, 제발.

228 이름 없음 (wKxTUI/VXU)

2021-03-08 (모두 수고..) 03:08:09

"기가 막힐지경이네. 나도 나다. 결국은 받아줬다는 소리잖아."

맨 정신으로 전화를 하지는 않았을테고. 그렇다면 혼자 술을 마시다가 홧김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는게 타당한 시나리오였다. 5번이나 전화를 했다면 받을 수 없었다거나 바로 받지는 않았다는거겠지.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만.

"아니. 이게 신기한게 그 통화내용이 기억이 안나. 그때 술을 마시고있었던건지 아니면 마시고 나서 기억이 날아간건지.."

무슨 추리게임도 아니고. 하지만 분명 통화내용에는 내가 이 녀석에게 가야 할 이유가 있었지 않았을까.

"어쨌든 정당성은 나한테 있는 것 같네."

이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생각도 들긴 하지만 나중에 왜 왔냐는 소리를 듣는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 말했다.

"문제는 왜 전화를 했느냐는건데. ...이제와서."

229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13:39:57

>>222
'통풍도 잘 되고 좋아요' '이웃님도 한 번쯤 시도해보세요!' (엄지를 척하니 치켜올린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온 듯, 창가의 커튼이 펄럭인다.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카락도 함께.) 'ㅠㅠ 역시 가정용 소형 발전기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나 구비하고 있는 물건 ㅠㅠ' (오른손 주먹을 눈가에 대며 우는 시늉을 한다. 몸짓과 달리, 표정은 웃는지 우는지 모호하다.) 담배 끊으시는구나. (슬쩍 뒤를 돌아본다.) 이 집에 몇 보루 있던데....... 끊으시면 얘기 안 해야겠다. (당신을 보고 생긋 웃더니, 태블릿에 글씨를 좀 더 적어넣고 다시 스크롤 한다.) '담배 진짜 끊기 힘들다던데' '방금 좀 멋있었어요' '사진이라도 찍어드릴 걸 그랬나?' (잠시 태블릿의 방향을 뒤집어 카메라 렌즈 쪽을 가리켰다.) '매일 창문 열어볼게요' '그쪽도 계속 무사하셔야 해요!' '언젠간 다시 구조대가 오겠죠?' '먼저 구조되는 쪽이 다른 쪽도 구해주기!' (태블릿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려 새끼손가락만 펼쳐 보인다.)

230 이름 없음 (OHJqGiwtjA)

2021-03-08 (모두 수고..) 16:03:28

>>229
'좀비들한테 과한 관심을 받게될까 두려운걸요.'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면 여전히 자신을 향해 양 팔을 뻗고서 허우적거리는 좀비들의 모습이 있었다. 잠깐 한숨을 내쉬다 담배를 물고서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머, 어느 미용실 다니세요?' '샴푸 광고 모델은 아니시죠?' (큭큭, 혼자 웃는다.) 가정용 소형 발전기라니, 확실히. 지금 있는 건 폰 충전기 정도인데. (집 안을 슬쩍 들러보고 당신의 웃는 시늉에 고개를 숙인채 웃음소리를 흘렸다.) 진짜 이상하신 분이시네. '저기, 제 초상권도 엄연히 존재한답니다.' (라고 써놓고 무슨 비운의 드라마 주인공 같은 아련한 포즈를 취하며 연기를 내뱉다 대뜸 불어온 역풍에 얼굴을 직격으로 맞았다. 콜록콜록. 쪽팔린 탓에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구조대... (잠깐 고민하다, 피식 웃으며 스케치북에 글씨 뿐만 아니라 뭔가를 더 끄적거렸다.) '약속.' (좀비 SD 캐릭터가 새끼 손가락 들고있는 그림이 아래 그려져있다. 당신이 그린 좀비와 닮아있다.) '이제 대화는 필요할 때 합시다.' '저도 종이가 얼마 안난았고 이웃님도 전기 아끼셔야죠.'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난간에 팔을 얹어 마주본다. 이제 뭐하지.)

231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17:49:01

>>230
'좀비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해요' '죽어서도 예쁜 건 알아보는지' '미용실 안 다녀도 모델 같은 머릿결이죠!' (광고 모델이 하듯 손목 스냅으로 머리카락을 넘긴다. 광고와 달리, 엉키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찰랑이지 않고 툭 떨어지듯 넘어간다. 모델 같은 머릿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쯤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이 주 째 감지도 못했는데. 저분도 보면서 어이없겠다. (슬쩍 손빗으로 머리를 빗어보려다 초장부터 걸리자 그만둔다.) 포즈 봐. 저분도 진짜... 앗! (당신의 얼굴을 덮친 연기를 보고 다급히 입가로 손을 가져간다. 미처 가리지 못한 광대는 한껏 솟아오른 것이 보인다.) ...재밌는 분이라니까. 빨리 구조대가 와서, 둘 다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중얼거리며, 당신의 스케치북에 적힌 글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14% 남았네. 언제 이렇게 많이 닳았지? '그래요' '특별한 일 생기면 또 이야기해요' (당신을 향해 내민 태블릿을 계속해서 스크롤 한다.) '_ .  _ _ . . .  .' (끝까지 스크롤 되지 않아 위쪽만 잘린 글자가 보이던 순간, 여자의 오른쪽에서 파편 같은 것이 튀고 여자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귓가로 가져간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태블릿은 창밖으로 떨어진다.) 아, 잘 막아둔 줄 알았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오른쪽을 바라보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에게 손을 흔든다. 창문이 스르륵 닫히다 반 뼘 정도를 남기고 멈췄다.)

# 대화 즐거웠어요!

232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21:16:37

>>231
와. (멀리서 보는데도 저렇게 떡져있을 줄이야.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식수를 챙기는 데 급급했고, 최근은 수돗물이 찝찝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소녀같은 놀라는 포즈는 빠짐없이 취해준다. 손빗을 하다 멈추는 모습에 실실 웃으며 당신의 타블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당신이 취한 제스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떨어진 타블렛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당신 쪽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진다.) 뭐야, 누가 또 있나? (당신이 지어보이는 미소에 애매한 미소로 답해보았다. 손을 흔들어줄 타이밍은 멍하니 있다 놓쳐버렸지만.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물려다 말았다.) ...진짜 내 뇌가 자살하고 싶어서 환각을 보게 만든 건가...? (황당무계하지만 합당한 의문. 아니, 마지막에 인사까지 해줬으니까 큰일은 아닌 거 아냐? 잘 먹는다고 하기도 했고. 근데 왜 나는 초조해하는거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을 질질 끌며, 떨리는 다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만 두자. 난 좀비떼 사이로 절대 못내려가. 여긴 식량도 충분...하고, 뭔 일이 있다 해도 구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하아... (그 뒤로 방 안을 한참을 서성였다. 몇 번이나 베란다로 나왔다가 들어가고,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떼우고 어둑해질 즈음 후레시를 들고 베란다로 나와 당신이 있던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발 괜찮아라...

233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21:45:18

>>232
(낮과 같이 반 뼘 정도 열린 창문이 그대로 있다. 안쪽은 잠잠하여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래쪽에는 잠도 없는 좀비 떼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낮보다 오히려 활발한 모습. 다시 창문 쪽을 보면,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아니다! 완전히 열려 있다.) 으아! 죽을 뻔 했네! (여자가 창문 아래쪽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다. 오른 어깨쯤에 새로 감긴 희고 붉은 천이 보인다.) 앗, 눈부셔! (후레시 불빛에 급히 얼굴을 가리다, 잠시 뒤 당신 쪽을 바라본다.) 이웃분이구나. 낮에 그렇게 사라져서 놀라셨겠다. 어쩌지... 공책도 없고, 태블릿도 없고...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고민하던 여자는 낮에 한 번 보인 바 있는 동작을 반복한다. 주먹을 쥔 채 오른팔을 굽히더니, 왼손 검지로 열심히 이두박근을 가리키더니, 당신을 향해 검지 끝이 향한 것이다.)

234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21:53:21

>>233
(미치겠네, 오늘 낮에 담배 끊겠다고 멋지게 선언한 후인데.) 담배 말려. (거울을 들여다보니 꽤 퀭하다. 불면증이야 늘 있었지만서도. 곧 죽을 놈처럼 보인다며 동기들에게 놀림받던게 어제 일만 같다. 아직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창문과 더 활발해진 좀비를 보고는 눈을 비볐다.) 어. (나왔다. 뭐지, 진짜 좀비인가? 낮보다 더 활발하신 것 같은데. 그래도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비져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답례로 멋있게 사이드 체스트 자세를 취해보인다. 그리고 와구와구 허버허버 먹는 시늉. 검지로 당신을 가리킨다.) 거, 이상하게들 쳐다보지 마쇼. 정신건강 유지하는데 이거만한게 없으니까. (괜시리 부끄러워져서 붉어진 얼굴로 좀비들을 내려다보며 일갈했다.)

235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22:10:13

>>234
큽. (당신을 빤히 보던 여자가 양 손으로 입을 가린다. 이번에는 광대까지 가렸다. 하지만 반달이 된 눈은 가리지 못했다.) 진짜... 재밌는 분이라니까. (한참만에 손이 얼굴에서 내려간다. 그리고 당신이 한 것과 똑같이, 급하게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해 보이고는 엄지를 치켜올린다.) 초콜릿 한 조각 먹었으니까. 오늘은 엄청 잘 먹었지. ...그런데 좀비들한테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갑자기 왜 저러시지? (좀비들을 향해 일갈하는 당신을 보고 이쪽도 좀비들을 내려다본다. 당신이 낸 소리에 자극받은 듯, 좀 더 아우성이 심해진 것을 제외하면 좀비들에게 별다른 건 없어보인다.) 어두워서 잘 모르겠네... 음, 그보다.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아 왼뺨에 대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검지만 내어 당신을 향해 가리키고, 마지막으로는 양 손을 어깨 위로 으쓱 들어올린다.)

236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22:19:40

>>235
와, 끝내주는 식사를 하셨나본데요. (당신이 취해보인 제스쳐에 중얼거리는 한편, 이것은 혼잣말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아주 훌륭한 토론주제가 아닌가. 여건만 된다면 당신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역시 저쪽도 잘 먹는 편인가보다. 혹시 컵밥도 있으려나? 쌀이 먹고싶어졌던 참이다.) 별 거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이 보여지는 게 역시 좀 그랬는지, 후레시로 자기 턱 아래를 비춘다. 역광을 맞으며 히주욱 웃는 모습이 굉장히 여러 의미로 무섭고 추하다. 금새 후레시를 치워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아, 언제 자냐는건가. 음... (아무래도 대답 텀이 다른 대답보다 길다는 건 당신도 알아채리라. 그래서 후레시로 아래 좀비들을 한 번 비추고, 양 손을 다시금 소녀처럼 모아 휘휘 크게 고개를 흔들어보인다. 대충 무서워서 잠 못자용~! 라는 뜻.)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리고 당신을 한 번 가리킨다.)

237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22:53:50

>>236
푸흡. (역광을 맞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입에서 바람이 새어 나간다. 다급히 다시 입을 가리지만 이미 늦었다. 고개 숙여 기침하는 시늉으로 무마하려 하지만, 아래를 향한 얼굴이라고 웃음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완전 웃겨. (한참 바들거리며 웃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본다.) 대답이 좀 걸리시네. 혹시 저쪽엔 시계가 없어서 대답하기 곤란한 걸까? 아. (당신의 유도에 따라 여자의 시선이 차례로 좀비와 당신을 향한다.) 좀비들 시끄러워서 잠들기 힘드시다는 뜻이겠지? 저 집도 방음이 참 안 되나 봐. (양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자는 시늉을 몇 차례 하고는, 자신을 한 번 가리키고 양손을 펼쳐 10을 한 번, 그리고 손가락 둘을 펼쳐 2를 만들어 보인다.)

238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23:16:38

>>237
(왠지 웃음소리까지 들려올 것만 같은 당신의 행동에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난장판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웃음을 줄 수 있는 건 정말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버려가며 취한 행동을 자기위로한다. 살짝 비져나온 눈물을 훔치며.) 10...2...12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계시네. (이건 표정에 드러나진 않겠지만, 마냥 부럽다. 양 손을 위로 들어올려 둥글게 O자를 만들어보인다. 그리고 한 쪽 팔은 짧게 뻗어 왼쪽으로 60도 정도 기울이고, 다른 팔은 직각으로 꼿꼿이 하늘을 향해 뻗어보인다. 이름하야 인간시계.) 사실 2시도 꽤 짧게 잡은 거다만...너무 걱정끼치는 것도 좋지 않고. (응응, 당신이 자신을 걱정할 정도까진 아닐지 모르지만 가볍게 무시한다.) 아, 그러고보니. (묘하게 의상이 바뀐 것 같기도.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다 자신의 하와이안 셔츠 목깃을 살짝 들었다놓았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고갤 갸웃거리고, 손으로 OK? 표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239 이름 없음 (NP6lrfYKXE)

2021-03-08 (모두 수고..) 23:34:59

>>238
(잠시 팔을 들어 올려 당신과 거울상처럼 한 번, 반대 방향으로 한 번 인간 시계를 만들어본다. 그 모양이 꼭 아닌 달밤에 체조 같다.) 보는 쪽 기준인지 저쪽 기준인지 모르겠네. 2시? 2시겠지? 10시는 지났으니까. 설마 오전 10시는 아닐 테고! 그래도 꽤 일찍 주무시네! 다행이다. 좀비 소리 때문에 못 주무시나 걱정했는데!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어 보인다.) 음, 어. (당신의 다음 동작을 지켜보던 여자의 표정이 애매해진다. 곤란해 보이기도 하고, 억지로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저 셔츠는 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조금 전처럼 밝게 웃으며 OK 표시와 엄지를 치켜들기를 두어 차례 번갈아 한다.)

240 이름 없음 (zsy.ZrEz2M)

2021-03-08 (모두 수고..) 23:43:00

situplay>1596243924>228
# 이어줘서 고맙구 답레가 늦어져서 미안 88... 내일 꼭 올릴게! 잘자!

241 이름 없음 (sU/XnkhybM)

2021-03-08 (모두 수고..) 23:55:22

>>239
(환히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모습에 괜히 칭찬받은 어린애 마냥 기분이 묘해졌다. 볼가를 긁적거리다가 창문 난간에 양 팔을 얹어두었다. 왜 늦게 잔다고 혼날거라고 생각했지. 생각보다도 지독한 전 애인의 흔적에 제 이마를 몇 번 문질렀다.) 그래서인지 좀 후련하긴 했지. (좀비들 사이를 슥 훝어본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고. 그리고 가족 역시.) ...내 패션이 그렇게 맘에 안 드나. (좀 시무룩해졌다. 당신의 애매해진 표정이 전부 자신의 옷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뒤늦게 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OK 표시를 만들어보였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개인 사정을 주저리주저리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다 아, 소리를 냈다. 뒷편으로 들어가 스케치북을 들고 뭔가를 끄적였다. 이미 당신과 소통할 때 쓴 페이지나 건물 도면이 그려진 종이에 '정 채문, 22살, 한리대 건축설계학과, 취미는 공포영화 조지기, 특기는 막걸리사이다 말기, 라고 적어 종이비행기를 만들고는 당신 창문 쪽을 향해 던졌다. 아래가 좀비밭인데다가, 닿을 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 .dice 1 2. = 1
1. 닿았다 2. 닿지않았다

242 이름 없음 (lRXn5d0g3s)

2021-03-09 (FIRE!) 00:06:40

>>241
# 답레 조금 늦어질 것 같아...! (상세신상 설정을 안해뒀음) 내일 중으론 올리도록 할게. 잘 자고 좋은 밤 돼!

243 이름 없음 (voU8icNSM2)

2021-03-09 (FIRE!) 00:09:50

>>242
#오케이 ^~^! 좋은 밤~~~

244 이름 없음 (D.JAcdI1EY)

2021-03-09 (FIRE!) 00:38:27

>>240
잘자!

245 이름 없음 (lRXn5d0g3s)

2021-03-09 (FIRE!) 07:24:02

>>241
(당신을 따라 다시 한번 좀비들을 훑어본다. 어지러이 뒤섞인 채 울음을 토해내는 좀비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시선은 도로 당신에게 돌아가고, 스케치북을 가지러 등 돌린 당신을 보고 눈이 가늘어진다.) 자러 가시나? 표정이 좀, 시무룩했던 것 같은데. 어두워서 분간이 잘, 엇. (팔랑거리며 날아온 종이비행기가 뺨을 쿡 찌르고 떨어진다. 뒤늦게 허둥대며 종이비행기를 낚아챈다. 조금만 늦었어도 놓칠 뻔했다.) 와, 이 거리를 무사히 날아온다고? (감탄하며 천천히 비행기를 펼쳐본다.) 스물둘? 동생이었네. (의뭉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떠오른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디선가 찾아낸 제도 샤프로,) 차예승, 22살, 한리대 토목공학과, 취미는 공포영화에게 조져지기, 특기는 감쪽같이 립싱크하기. 그리고 희망 사항은 이번 주 내로 정채문 씨랑 같이 구조되기! (흥얼거리듯 중얼거리며 단숨에 글자들을 적어 내려간다. 희망 사항 밑에는 밑줄도 두 줄 그었다. 잽싸게 종이를 도로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들고 창가에 선다. 잠시 심호흡하고.) 얍! 채문 씨한테 가라! (팔랑거리는 종이비행기가 당신을 향해 날아갔다.)

#.dice 1 2. = 2
1. 닿았다 2. 닿았다

246 이름 없음 (voU8icNSM2)

2021-03-09 (FIRE!) 10:32:52

>>245
(아니? 이게 닿네. 되려 닿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에 투수 포즈를 취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자기 소개를 해버린 편인데...원래 계획은 어차피 저쪽 주택의 마당에라도 떨어지면, 나중에 구출될 때 줍게 만들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을 의도한 것이었다.) 내 낭만이... (집게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은 채로 한숨. 너무 뜬금없이 TMI만 방출해버린 이웃이 되버렸다. 느낌상 더 퀭해진 눈으로 고개를 들면, 종이비행기 끝이 이마에 쿡 닿았다. 아니, 이게 닿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 종이를 잡아 펼쳤다.) ...한리대 토공과!? 뭐야, 같은 교양 듣던 사이잖아. 누구지, 괜히 낯이 익던게...으아. (패닉이 와서 머리를 싸맨다. 아니, 이건. 상대는 원래 날 알고 있고, 못 알아 본 날 냉철하게 지적한 게 아닌가.) 같이 구조되기라니. 복선도 제대로 못깔아뒀는데. (마른 웃음소리를 내고는 걱정되지 않게 손을 크게 흔들어보였다.) 슬슬 12시인가. (이번엔 이쪽에서 양손바닥을 겹쳐 왼쪽볼에 가져다댔다가, 오른쪽볼에 가져다댔다가 하며 코코넨네 포즈를 취해보인다. 검지로 쿡 가리켜.)

247 이름 없음 (lRXn5d0g3s)

2021-03-09 (FIRE!) 13:13:42

>>246
(당신의 이마에 닿은 종이비행기를 보고 양손에 주먹을 쥐며 힘을 준다.) 예스! 특기에 종이비행기 잘 날리기라고 쓸 걸 그랬나? (메모를 읽고 머리를 싸매는 당신을 보고 씩 웃는다. 당신의 시선이 도로 이쪽을 향하자, 갑작스레 눈을 감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양팔을 옆으로 뻗고 천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점차 빠르게 돌며 팔을 안쪽으로 모으더니, 갑자기 멈춰 당신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TT를 만들어 보인다. 언뜻 피겨선수 같기도 하고,) T는 토오-크의 T입니다, 여러분. (한리대 모 교수의 교양 수업이 떠오르기도 하는 동작.) 이 교수님 아직 물리 수업하시는지 모르겠네. 라떼는 이 교수님 수업은 안 들어도 이건 다 알았는데. (어딘가로 걸어가는 듯한 동작, 당신을 가리키는 동작, 잔에 무언가를 따르는 듯한 시늉, 그걸 마시며 크! 소리를 내는 시늉,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시늉을 차례로 한다.) 여기서 구조되면, 살아서 나가면. (당신이 크게 손을 크게 흔들어준 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걱정 한 점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아, 시간이 늦긴 했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감고 양 뺨에 모은 손을 번갈아 가져가더니, 당신에게 손을 흔든다. 창문을 닫으려다가, 반쯤 닫힐 때쯤 빼꼼 고개를 내민다. 검지가 당신을 가리키고, 바닥을 위쪽으로 한 손이 어깨 위로 으쓱 올라간다.)

248 이름 없음 (LbaMw3Wi..)

2021-03-09 (FIRE!) 16:50:50

>>247
오, 발레선수신가. (기억을 되살리려 한참을 끙끙거리던 찰나, 당신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이쪽은 아무 생각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끝에 드러난 특유의 시그니쳐 동작에 푸흡, 뿜어버리고 만다.) 아, 교수님 판박이잖아. 하, 하하...웃을 때가 아니다, 정 채문. 정신차려. 같이 교양 들었으면 얼굴이라도 기억해내야할거 아냐... (웃다가 난데없이 냉정하게 자기 뺨을 때린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까지 듣고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 대화 한 번도 안나눠본 사이 같은데, 저쪽은 날 어떻게 알지.) 그냥 내가 빡대가리인갑다, 헤야지. 으휴. (한숨을 내쉬며 당신의 동작은 빤히 바라보다가 검지만 펼친 손을 내밀어 고갸와 같이 까딱까딱 흔등어보였다. 이내 공중에다가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는 화려한 손동작을 선보였다. 그리고 상상 속의 잔에 쪼르르. 마시는 시늉, 캬.) 막사 시원하게 말아드릴 테니까 살아만 계세요, 예승 씨. (걱정 없어 보이는 표정에 한시름 놓은 듯, 고개만 꾸벅 숙여 밤인사를 대신하려다 당신이 고개 내미는 것을 보고는 고장난 기계처럼 우뚝 섰다.) 음, 음, 거짓말은 하기 싫은데. (잠시 고장난 기계 상태로 있다가 당신 쪽을 향해 최대 출력 후레시를 한 번 쏘고 홀라당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저도 댁이 누구인지 떠올리느라 한참 잠 못잘 거 같으니 쌤쌤입니다. (장난기 어린 중얼거림은 좀비의 아우성 속에 묻혀버렸다.)

249 이름 없음 (lRXn5d0g3s)

2021-03-09 (FIRE!) 17:28:57

>>248
아, 웃었다. 그 교수님 아직 수업하시나 봐. (박수치다 뿜어버리는 당신을 보고 이쪽도 깔깔 웃는다. 스스로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는 당황해 다급히 뺨에 손을 대었다 양팔을 교차해 X자를 만들길 반복한다.) 왜... 왜 뺨을 때리고 그러시지. 아프게. 벌써 혼자 한잔하신 건 아니겠지? 그런 거면 좀 부럽다. 이 집엔 마실 거라곤 물뿐이던데. (잠깐 뒤쪽을 흘긋 보고 다시 당신을 돌아본다. 이어지는 당신의 현란한 손동작에 엄지를 치켜든다.) 특기라더니 진짠가 봐. 한 두 번 해본 동작이 아닌데... (킥킥거리며 웃다가 급작스레 쏘아진 강한 빛에 눈을 가린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 잠시 굳어 있다 창문을 드륵 완전히 열고 상체를 쭉 빼내 당신 쪽을 본다. 이미 당신은 방 안으로 들어간 뒤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와, 정채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거린다. 한참이나 당신 쪽을 보다 후레시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에야 몸을 도로 창 안으로 집어넣는다.) 내가 꼭 복수한다. 이 집에도 찾아보면 후레시 하나쯤은 있겠지.(분기 어린 말투와 달리 웃음기가 남은 얼굴. 이쪽의 창문 역시 이제 스르륵 닫힌다.)

250 이름 없음 (voU8icNSM2)

2021-03-09 (FIRE!) 21:01:03

>>249
(아침, 일어나고나니 볼이 짜르르 하고 아파왔다. 어제 너무 아프게 때렸나. 볼을 쓰다듬으며 기상. 그러고보니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대학교에 멀쩡히 다니던 시절,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 대문을 나서는 꿈이었다.) 괜히 싱숭생숭하게... (그런 시절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안다. 그렇기에 최악의 아침...) ...이 애이 어에, 어은 나하나힙요. (이 되기 전에, 얼른 나타나십쇼, 라는 듯. 창문을 열고 칫솔질을 하며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마 이 때쯤 기상하지 않으려나. 치카치카를 계속하며 어깨를 두드리다 꾹꾹 기지개를 키거나 쭉 뻗은 팔을 좌우로 기울이는 둥,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251 이름 없음 (/LYwFQkGn2)

2021-03-09 (FIRE!) 23:06:36

>>228
"나도 기억은 없지만 내용이야 뻔하지. 화내거나 따지거나 원망하거나. …내가 쌓인 게 되게 많았거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까지 적응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그게 됐다. 비교적 덤덤하게 말하곤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들어간 건 어제 모인 친구들과의 단톡방. 새벽쯤 대화가 끊긴 방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과 물음표로 도배되어 있었다. 정황을 보니 술 먹다 갑자기 사라졌던 모양이다. '걱정 시켜서 미안. 나 집 잘 들어왔어.'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더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쓰레기야……. 깊은 현타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절교 당해도 싸다. 얘랑은 뭐지. 벌써 헤어졌는데. 인간관계 단절? 어제 내가 전화하기 전까지 딱 그 상태였는데. 정당성에 대한 말은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나가버렸다. 아까보다 차분해지긴 했지만 진정이라기보단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러게. 내가 전화를 왜 했을까. …이제와서."

혼자 밤마다 울던 시기도 지나서 혼자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술 먹다 못 했던 악담이 생각나서? 술기운이랑 분노를 착각해서?"

성의없이 이유 몇 개를 뱉곤 저도 어이없는 듯 웃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미안해. 나도 나지만 갑자기 이상한 데서 눈 떠서 놀랐을 거 아니야. …또 고맙기도 하고."

덕분에 잘 들어온 건 맞지 않은가. 잠잠하던 현타가 다시 일었다. 난 정말 쓰레기다……. 이 와중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까지 정말 완벽한 쓰레기의 조건에 부합한다.

"근데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지?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도 맞지?"

어느새 베개를 끌어와 안고 물었다. 쪽팔려서 도저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너랑 뽀뽀하는 꿈을 꿨는데 이거 그냥 꿈이지?!?! 하고 물어보기 어색해 뱉은 말은 어째 더 구리기만 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진심.

252 이름 없음 (P3dBsMkeXA)

2021-03-10 (水) 00:16:09

>>250
(창문이 조심성 없이 드르륵 열린다. 창 너머로 살짝 보이는 하얀 어깨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열릴 때보다 더 빠르게 창문이 닫힌다. 가까이 있었다면 쾅 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만 같다. 몇 초 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겨우 창문이 열린다. 그 틈새로 여자의 황갈색 눈동자가 얼핏 보였나 싶더니, 그마저 곧 닫히고, 5분여가 지난 후에야 다시 천천히 창문이 열린다.) ...못 봤겠지? 저쪽 끝에 서서 열었으니까, 못 봤을 거야. (어색한 표정으로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든다. 웬일로 상의를 챙겨 입었다. 몸에 맞지 않게 큰 것이, 여자의 옷은 아닌 것 같다. 좀 더, 나이 든 남성에게 어울릴 것 같은... 화려한 색상의 등산복 재킷이다.) 아, 어색해. (양 뺨을 손바닥으로 한번 꾹 누른다. 눌려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손이 떨어져 나가고 보이는 뺨이 붉다.) 으으. (모른 척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고, 당신을 가리키고, 어깨 위로 손을 들어 올려 보인다.)

# 다음 답레는 아마 낮에 올라갈거야!

253 이름 없음 (mZQSrjwWZk)

2021-03-10 (水) 02:40:36

>>251
"그럴리가. 대판 싸워놓고 온 전화가 화내거나 따지는거면 그 사람이 뭐가 좋다고 집까지 찾아왔겠어?"

내가 전화를 받았을때 이미 취해있었을거라 가정해도 성질나서라도 안 갔을거라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상황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 누구도 이 여자가 나에게 전화 한 이유를 모르며 그 누구도 내가 이 여자의 집에 간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 분노로 인해 집에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건 정말로 끔찍한 상상이었다.

"이제와서 이유를 찾아봐야 헛고생이겠네. 그리고 고맙다고 하지 마. 성질나니까."

오늘이 휴일이었어서 망정이지 평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띵 하고 아파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건 상관 없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듣는건 아니었다. 내가 무슨 의도로 찾아갔을지는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걱정되어서 찾아갔다면 호구중에 호구가 따로없는 행동이었고 화가 치밀어 오를 일이었다.

"아무것도. 그러니까 물어보지마."

말을 마치고 잠시 눈가를 매만지다가 뽀뽀를 하는 꿈을 꾸었다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좋아, 알기 쉽게 정리해줄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말든 무슨 상관이야? 서로 아무런 기억이 안 나면 그냥 없는걸로 치면 그만이잖아. 난리치지말고 침대 정리나 하자.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이 난리를 치고싶지는 않다고."

뒤로 돌아서 땅에 떨어져 있는 베게(내가 썼겠지.)를 주워다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누가 보지 않게 몰래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254 이름 없음 (tqFgcPcX2s)

2021-03-10 (水) 22:08:20

>>252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모습에 반쯤 감겨있던 눈이 슬며시 커진다. 그러다 드러난 하얀 어깨에 입 안에 머금었던 치약 거품이 살짝 뿜어져나왔다. 주르륵. 창문 아래의 한 좀비 머리 위에 툭 떨어진다.) ...아무것도 못 본 것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못 본 거지만, 아마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의 창문을 아침부터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역시 변태 그 자체가 아닌지? 몰려오는 자괴감에 텐션이 팍 죽어버렸다. 화장실로 가 칫솔물을 뱉고 세수를 한 뒤,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해 스케치북을 집어든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변태처럼 쳐다보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모른 척 하는 것도 무색하게, 당신이 보이자마자 뉴스 속 국회의원처럼 깔끔한 90도 사죄자세를 취한 채로 스케치북만 들어보였다. 아마도 당신의 제스쳐는 놓쳤으리라.)

#늦어서미안88

255 이름 없음 (Sp6ONPd/E.)

2021-03-10 (水) 22:35:03

>>253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근데 내가 울면서 사과했거나 붙잡는 말을 했거나 질척댔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사건을 미궁속으로 빠뜨리기로 했다.

"내가 빚지는 걸 싫어해서 그랬는데 고맙다는 말을 거절할 줄은 몰랐네. 싫으시면 취소합죠. 예예."

허, 참, 퉁명스럽게 내뱉고 얼굴을 찌푸렸다. 막말로 너 아니었음 어디 길바닥에서 잠들어서 추한 꼴 보였을지도 모르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하냐? 물론 속으로만 한 말이다. 됐다는 사람에게 굳이굳이 고맙다는 말을 들려보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 또 나만 구질구질하지……. 네 말대로 아무도 기억 못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정리나 하자."

쿨하다 못해 춥다. 당장 감기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쿨함이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깔끔하지? 한때는 저런 모습에 반했던 것도 같다. 일희일비의 대가인 나와는 영 딴 판인 모습.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

"너 그냥 청소하지 말고 가. 내 집인데다 민폐는 내가 끼쳤는데 네가 왜 이러고 있어."

마구 헝클어진 이불을 침대 위에 가지런히 깔아두고 탁탁 털며 말했다. 눈은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이불을 쳐다봤다. 잘하면 구멍나겠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내 번호 차단해. 안 그러려고 노력할 건데 또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미안했어."

같은 자리를 계속 털었다. 마음에 있는 이 알 수 없는 감정도 같이 털려나가면 좋으련만.

256 이름 없음 (4gQCW28CHw)

2021-03-10 (水) 23:11:16

>>255
입술과 손가락이 닿은 부분은 뜨거웠다. 분명 손가락이 뜨겁기때문에 그렇게 느낀거라고 생각하며 들어올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말을 돌리겠다 이거야?

"넌 항상... 아니다. 정리부터."

불만을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견실히 흩어진 물건이나 주변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청소하지 말고 가라는 말에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반응하지 않고 그대로 치웠다. 그러나 애초부터 치울 건 많지 않았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 정리는 끝났다. 너도 내 말을 무시했으니 이 정도 무시한 건 상관없잖아? 피차일반이야.

"넌 언제나 확실한 말을 안 주는구나."

노력할 거라는 말에 작게 중얼거리는 것 처럼 작게 말하며 똑바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이번도 그렇다. 치우자고 해놓고서는 중간에 와서 치우지 말고 가라고 번복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내가 결정한 대로 행동했다.

"그럼 차단하기전에 물어보자. 왜 전화했어."

정신이 멀쩡한 지금도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있으니 그 이유를 모른다는 소리로는 넘어가지 않을거야. 속으로 말하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257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04:08:10

>>254
아! 미쳤어! 봤나 봐!! (얼굴을 다시 꾹 누른다. 양손으로도 얼굴의 붉은 기는 가려지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모른 듯, 얼굴을 가렸다 말았다, 뒤를 돌았다 당신을 보았다 몸짓이 부산하다.) 왜 하필! 그 순간에! (털썩 주저앉아 축 늘어진다. 창틀 위에 턱을 괸 얼굴과, 창틀을 붙잡은 양손만 겨우 보인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한참 만에, 어색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든다. 그리고 느리게, 아주 느리게 여자의 머리가 위로 올라온다. 다시 일어선 것이다.) ...양치하는 것 같던데. 식사는 하셨으려나? (다시 한번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고, 당신을 가리키고, 어깨 위로 손을 들어 올려 보인다. 어색한 몸짓.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급격한 화제 전환이다. 자신도 그것을 느낀 듯, 답이 오기 전의 짧은 시간을, 자신을 가리킨 뒤 허버허버 먹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다급하게 채워버린다.)

# 괜찮아! 어제 일찍 자서 나도 확인이 늦었네...!

258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10:50:00

>>257
오히려 못 본 체 하는 게 더 나았을까. (그래도 거짓말은 하기 싫은데. 두 눈을 질끈 감고 스케치북을 내렸다. 부산한 당신의 움직임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담배를 찾다가 우뚝 손을 멈췄다. 괜히 언제가 마지막 담배일까 세기 싫어서 보지 않고 집었었는데, 어느새 어제 핀 담배가 마지막이었나보다. 더욱이 어색해졌다.) 아, 음. 식량은 아직 남아계셔서 다행이야. (민망함을 줄이기 위한 혼잣말. 그리고 그 뒤로 자신을 가리키고, 허버허버 먹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담배 피는 시늉과 양 팔로 X자를 만들어보이고 우는 척. 아무리봐도 어색하지만 이렇게 넘기시길 바라겠지. 그나저나 저 등산복 옷...저렇게 언밸런스할 수가. 과한 탓에 슬쩍슬쩍 웃음이 배어나온다. 남자 가족이 있는 걸까.)

259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13:13:46

>>258
(내려가는 스케치북을 보고 한 번 더 뺨을 꾹 누른다. 괜히 머리카락으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움찔하며 그만둔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부드럽게 찰랑거린다.) 저쪽은 오늘도 잘 드셨나 보네. 휴, 나도 저 좀비만 아니었으면....... (잠시 오른쪽을 흘끗 보더니, 다시 당신을 돌아본다.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고,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고, 검지를 까딱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는 척을 하는 당신을 가리키며 양손 엄지를 치켜든다.) 끊으신다더니, 역시 힘든가 봐. 저번에 얘기 안 하길 잘했다. 이 집에 담배 있는 거. ...근데 왜 자꾸 웃으시는 거지? (창틀 위에 팔을 올리고 늘어지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화들짝 놀라며 귀를 막는다. 오른쪽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등산복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무줄까지 당겨 벗겨지지 않게 한다.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오지 않아 얼굴만 겨우 보인다. 안심하라는 듯, 당신을 향해 웃으며 다시 엄지를 들어 올린다. 쨍한 오렌지색 등산복 위로 붉은 것이 후두둑 튄다. 여자는 여전히 엄지를 든 채 웃고 있다.)

260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17:58:02

>>259
(어라, 샴푸하셨나보네. 잠시 홀린 듯 쳐다보다 금새 표정이 굳어졌다. 자기 뺨을 치려던 손이 직전까지 왔다 멈췄다. 학습이란 대단해.) 하하, 없어서 못핀다는 얘기 들으면 의지박약으로 아시겠지. (사실 그것 때문에 홀쭉해지긴 했는데, 어쩐지 당신의 모습이 더 헬쑥해보인다. 정말 저녁 제대로 드시는 거 맞나? 스케치북을 들고 그 내용을 적을까 말까 고민하던 차, 당신이 놀라는 시늉에 이쪽도 반사적으로 허리를 폈다.) 뭐야, 뭔...무슨 일이에요. (멀찍이서 흐릿하게 보인 안심하라는 듯한 당신의 웃음이 되려 불안함을 부추긴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며 초조하게 방 안을 둘러본다. 들고있는 스케치북에 급하게 글씨를 써갈긴다.) '좀비에요? 집까지 들어왔어요?'

261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0:31:27

>>260
(당신이 뺨을 치려 하자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러나 당신의 손이 뺨에 닿기 직전 멈추자, 도로 눈이 사륵 접히며 웃는다. 어김없이 다시 올라가는 엄지.) 멀어서 그런가, 정말 그런가. 약간 핼쑥해지신 것 같기도 하고. 식사는 잘하고 계신댔으니, 금연 때문이려나? (뒤쪽을 흘끗 돌아보았으나 곧 고개를 젓는다.) 아냐. 이참에 끊으시는 게 좋지. 이런 세상이든 좀비 없는 세상이든, 안 피우는 게 나아. (중얼거리며, 여전히 당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웃고 있다. 그런 중에도 오른쪽에서 튀는 것은 멎지 않아, 이젠 등산복 후드 위는 주황색인 부분보다 붉은 부분이 더 넓다. 방수가 잘 되는 제품인지, 어느 정도 이상 모이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도 그렇다.) 집... 까지 들어왔다고 해야 하나.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양 팔로 크게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인다. 그리고는 왼팔을 들어 올려 굽히며, 오른손 검지로 이두박근이 있을 곳을 몇 번 가리키더니, 자신을 가리키고 엄지를 치켜올리는 일련의 동작을 보여준다.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 고정된 채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여자의 고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262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0:48:38

>>261
하하, 왠지 미소로 통제당하는 느낌이에요. 예승 씨. (당신과 똑같이 엄지를 펼쳐보이지만, 수직은 아니다.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살짝 45도 정도 기울어진 엄지. 생각해보면, 당신이 이쪽을 보면서 웃어줄 때마다 자신은 무슨 표정을 지어줘야할지 참 난감하다. 이런 세상이 되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진짜 웃으시는 게 맞다면... (중얼거리면서 자신도 입꼬리 쪽을 꾹꾹 눌러보다 붉은 액체가 튀어나오는 것을 숨죽여 지켜본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가?) ...제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은 건가요. (이건 분명히 답변을 바라고 있다. 여기서 또 다시 엄지를 치켜세우면 도망치는 게 될텐데. 고정된 당신의 시선과 마주보다 결국엔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이번엔 제대로 엄지를 수직으로 펼쳐세우면서.) 의지해줬으면 하지만, 사실 저도 무섭거든요. (이내 창문 아래의 좀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제처럼 능숙하게 웃을 수가 없다. 집까지 들어온거라면 언제 뚫릴 지도 모른다는 건데. 스케치북을 한 장 더 쓴다.) '집문 수리하실 수는 있으세요?'

263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1:09:20

>>262
(한참이나 투둑 투둑 튀던 붉은 액체가 순간 멎는다. 여자는 눈동자만 데굴 굴려 오른쪽을 본다. 여전히 고정된 고개, 웃는 입. 눈동자가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고, 어색한 웃음이 한 번.) 그... 악!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으며 주저앉는다. 그 위로 지금까지 조금씩 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액체가 철벅 끼얹어진다. 수 초 뒤. 주황색 머리통이 창 위로 올라온다. 후드를 쓴 보람도 없이 얼굴에도 붉은 것이 묻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곤란한 표정. 스케치북 속의 글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젓기를 반복한다. 잠시 고민하더니, 손바닥 위에 주먹을 내리치고, 방 안쪽으로 사라진다.) 이걸, 이렇게... 하면 이해가 되시려나? (작은 상자 두 개를 들어올려 붙였다. 오른쪽에 든 상자를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킨다. 오른쪽 상자에 구멍을 뚫더니, 왼쪽 상자에도 구멍을 뚫는다. 자신을 가리키더니,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오른쪽 상자에서 왼쪽 상자로 걸어가는 시늉. 다시 오른쪽 상자를 가리키고, 양 손을 들어올리며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시늉.)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니까... 일단은 이 정도로만.

264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1:24:34

>>263
(당신이 주저 앉았을 즈음에는 이미 상체가 반 쯤 창문 밖에 걸쳐져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무기로 챙길 만한 게 뭐가 있더라. 식량도 챙겨가야하나? 아님 몸만? 저 좀비떼를 뚫고 지나갈 수는 있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식은땀이 목 주변을 타고 흘러내릴 무렵, 당신의 머리가 빼꼼 내밀어진 것을 보았다. 두 눈이 땡그래지고 스케치북을 놓았다 뗐다가 하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당신에게 고정시킨 채다. 만약, 당신이 물렸다면.) ...그건 아닌가. (침착해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떨리는 팔을 천천히 창가에 두었다. 온 몸의 힘이 쭉 빨린 느낌이다. 그리고 이어진 당신의 부연 설명에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입구를 막아두고 구멍만 뚫어놓았다는 뜻일까.) ...아니 잠깐, 그러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정말 식량이나 생필품을 갖고 있는걸까? 마냥 어제처럼 웃지 못하겠다. 단호한 시선을 던지며 허버허버 먹는 시늉을 하고는 당신을 슥 가리킨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

265 이름 없음 (IT8TxL9keA)

2021-03-11 (거의 끝나감) 21:33:25

네온사인이 흐릿한 밤하늘 아래서 빛나는 밤이다.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을 뒤로 하고 뒷편의 작은 문으로 빠져나왔다. 취했나. 음악소리에 만춰 쿵쿵 울리던 머리가 이제는 심장 소리에 맞춰서도 울렸다. 벽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여 헛구역질을 해대다가, 조금 후에서야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몇번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회색빛 연기를 들이마쉬자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아, 오늘은 물도 별로 안 좋던데 이대로 집에 갈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흐릿하게 퍼져나가는 연기를 따라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아무래도 비가 올 모양이다. 역시 누구 하나라도 잡아서 가는 게 낫겠다. 이런 날의 밤이 어떨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손가락에 쥐고 있던 담배를 입술로 지그시 물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다시 들어서려 했다. 내 시야 한구석에 얼핏 보였던 누군가만 아니었더라면. 그 눈동자, 시리게 푸른 그것만큼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너다. 너가 아닐 리가 없다. 입술이 벌려지며 담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너, 너는, 분명..."

비오는 그날, 넌 사라졌잖아. 나를 두고.

설마 다른 사람인가? 아니다, 내가 착각했을리 없다. 함께 지내왔던 세월이 몇년인데. 너다. 분명히 너다. 하지만 분위기는 내가 알던 너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 너는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다. 난 늘 인생 뭐 그리 재미없게 사냐며 놀려대곤 했다. 지금의 너는, 피칠갑을 하고 나타난 너는. 생각을 더 잇기도 전에 달려가서 너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보고 싶었어,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괜찮아? 머릿속에서는 수천가지의 말들이 오갔다. 결국 입 밖에 낸 것은 단 한마디였다.

"...그거, 네 피야?"

#고등학교 시절 나와 일이등을 다투던 내 소꿉친구가 사라졌었으면서 내 앞에 피칠갑을 한 채로 나타났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고 썼고 소꿉친구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는데 둘이 잘 알고 썸까지 타던 사이의 소꿉친구 사이였다! 이거 하나만 맞춰줬으면 좋겠어.

266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1:35:58

>>264
앗, 들켰다. (당신의 동작을 보고 머쓱하게 웃는다. 자신도 모르게 뒤통수로 손을 가져갔다가, 시뻘겋게 변한 손을 보고 울상이 된다. 어딘가에 대강 문질러 닦았는지, 곧 붉은 기가 조금 희미해진 손.) 괜히 걱정시키기 싫었는데. ...한번 더 아닌 척해볼까? (전혀 아니라는 듯,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휙휙 젓는다. 자신을 톡톡 가리키고, 먹방이라도 찍는 것처럼 맛있게 무언가를 먹는 시늉. 배까지 톡톡 두드리더니 엄지를 치켜들고 씩 웃는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 탓에, 조금 공포 영화 같다.) 윽. (오른손을 들어 오른쪽 귀를 슬쩍 막는다. 또다시 붉은 액체 몇 방울이 튀었는지, 손등에 붉은 점 몇 개가 생긴 것이 보인다.)

267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1:52:06

>>266
공포영화에 조져지는게 취미라시더니, 공포영화 그 자체가 되셨잖아. (의심, 불신, 신용불량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저 정도로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면 생활공간은 극히 좁을텐데, 좀비 사태가 시작되고 2주 동안 어떻게 버티셨던거지? 몰아치는 불안한 상상이 점점 꼬리를 물고 그 몸집을 불려간다. 당신이 웃음에도 전혀 안심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고민했다.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거나, 좀비들을 내려다보거나, 주변을 살피거나. 그리고 한 번 심호흡을 한다. 스케치북에 글씨를 적으며, 당신을 바라보는 표정에 드물게 쓴웃음이 떠올라있다.) '못참겠어요. 저 진짜 꼴초라서, 그쪽 집에 담배가 있나 찾아봐야겠어요.' (그 글씨를 보여주자마자 방 안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 뒤로 한참을 창문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풀려가는 봄날씨에 맞지 않는 뚠뚠한 패딩과 노란색 안전모, 양 손엔 작은 사이즈의 철망치를 든 채다.) 내가 미쳤지, 진짜... (열심히 무장한 데 비해 기가 팍 죽어버린 표정이지만, 결심이 선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268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2:06:06

>>267
아, 안 통하나...? (당신의 표정을 보고 어색하게 웃는다. 다시 한번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이번엔 닿기 전에 멈춘다. 그러다 스케치북의 글자를 보고,) 아, 안되는데. 미쳤나봐! 여길 어떻게 온다는 거야.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양 팔로 X자를 만든다. 불안한 눈빛이 오갈데 모르고 방황한다. 결국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가 사라지자, 창틀을 붙잡고 상체를 창 밖으로 쭉 뻗는다. 잠시 뒤, 당신이 보이기 시작하자.) 안돼요! 담배 없어요! 오지 마세요! (목청껏 소리지르며 부산하게 양 팔로 X자를 만들길 반복한다.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좀비 떼들이 창문 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며 으르렁거린다.) 아 진짜, 안되는데. 안 되는데...!! (당신과 방 안쪽을 다급히 번갈아 본다. 그러다 고개가 오른쪽을 향했던 순간, 윽, 하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양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린다. 다시 핏방울이 튄다.)

269 이름 없음 (U8mOY4dmMI)

2021-03-11 (거의 끝나감) 22:12:32

>>265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 밤이 되면 정신 나간 것들이 몰려드는 구역질 나는 골목. 그 골목을 빛내는 건 어둠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남자의 배를 쑤신 손을 몇 번 움직이자 벽에 밀어붙인 채 팔목으로 틀어막고 있던 입이 왈칵 피를 토해냈다. 씨발, 더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쓰러진 시체를 대충 발로 걷어찼다.
이 꼴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비라도 시원하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매캐하고 컴컴하지만 곧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습한 공기가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폐부를 찔렀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림자처럼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그 기억이 벌써 스물거리며 뒷덜미를 감싸왔다. 그러던 중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평소처럼 조용히 몸을 숨기지 않은 것은 변덕이었다.
어쩌면 이상한 예감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아주 오랜 과거로 느껴지는 한 때의 기억이 향수처럼 몸을 단단히 휘감고 올라왔다.
네가 왜 이런 곳에?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고민과 달리 발은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그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까이로 다가와 소매를 붙잡았다.
당황으로 얼어붙은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꼴과 이 상황에 대한 후회를 느꼈지만 짐짓 침착한 얼굴을 하고 소매를 잡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아니, 괜찮아. 오랜만이네.”

이딴 멍청한 말이라니. 술 한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술기운으로 붉게 물든 얼굴을 스쳐 화려한 피어싱에 시선을 두었다. 많이 변했구나. 그래도 여전히 너는.


// 이쪽은 남자로 설정했어! 소꿉친구는 '그'라고 썼지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ㅎㅎ 내가 대사를 너무 짧게 친 것 같은데 혹시 잇기 힘들면 말해주라!!

270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2:20:24

>>268
(진짜 무서워. 미쳤나봐.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믿겨지질 않는다. 마치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는데, 안전바를 올리는 것 같은 느낌. 온 몸의 신경과 감각이 붕 뜨는 느낌이다. 당신이 뭐라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애매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을 질끈 감아 지워버리려 애쓴다. 이렇게나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을 못 본 체 무시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아~진짜, 이런 좋은 곳을 두고 왜 나갈라 하냐. 진짜 배가 불렀지. (제 양 볼을 찰싹찰싹 때린다. 어제보다는 약하게, 정신을 차리려는 듯. 그리고 당신의 얼굴에 다시 핏방울이 튀는 걸 보고는 망치를 든 오른손을 휙 들어, 들고있던 망치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정확히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차를 향해. 망치에 보넷을 직격으로 맞은 차의 알림음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후, 후, 후우. (심호흡. 마지막으로 당신 쪽을 바라본다. 새파래진 얼굴로 겨우 히죽 웃으며 마스크를 올려쓴다.) 꼭, 담배가 있으면 좋겠네... (안쪽팔리게.)

271 이름 없음 (4GNMWauX72)

2021-03-11 (거의 끝나감) 22:34:59

>>269
오랜만이라는 그 말 한마디가 지독히도 현실성을 떨어뜨렸다. 그 세월이, 케케묵은 감정이, 그 모든 것들이 있는데, 네가 한 말은 고작 그 짧은 말이었다.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단박에 들었다. 지금 손에 집히는 감각이 단지 꿈일 리는 없었다. 많이 변한 네가 낯설었다. 그럼에도 너라는 것 그 하나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흐르고 있는 물기가 단지 빗방울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너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절의 나는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학업 성적이라는 것만 빼고, 공통점 하나 없어보이는 나와 네가 어울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릴 적의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중에 타투를 하고 싶다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조금 더 자랐던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시절의 나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아이였지만 더이상은 아니었다. 네가 변한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변했다. 이런 모습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멍청하게 술에 취해 클럽에서 밤을 버티게해줄 상대를 찾아 떠도는 나를, 네가. 뒤늦게 겁이 났다. 차라리 네가 나를 그 전의 아릅답고 반짝이던 모습으로 기억해줬으면 했다. 이런 음침한 모습이 아니라. 조금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에 숨었다. 마침 날이 어두웠다. 이 정도로 가려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금, 안심했다.

"잘...지냈어?"

멍청한 질문이었다. 당장 너가 뒤집어쓴 비릿한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너를 향해 손을 조금 뻗었다가, 머뭇거리다, 거두었다. 너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잡을 수 있을까.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아니라고 해도 난, 난 아닐 거라고 생각, 했는데..."

말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오랫동안 너를 찾아 헤맸다. 찾을 수 없었다. 흔적만이라도 붙잡고 싶어 떠돌아다녔다. 네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 시체만이라도, 그 무덤가라도 찾고 싶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전혀 잇기 힘들지 않았어☺ 일단 이쪽은 여자로 상정하고 쓰고 있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272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2:41:05

>>270
(교차한 팔이 천천히 내려가고, 핏방울이 튄 얼굴이 당신을 향한다. 새하얗게 창백한 얼굴.) 안돼! 오지 마시라니ㄲ... (당신이 내던진 망치가 자동차 보닛에 떨어진다. 자동차의 알림음에 좀비들이 그쪽으로 모여들고, 여자의 얼굴은 울 것 같이 변한다.) 설마, 설마 진짜 올 생각은 아니시겠지? 무기도 없이 여길 어떻게 오겠다고. 그래,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하는데... (마스크를 올려 쓰는 당신을 본다. 불안한 눈빛) 왜 진짜, 나오려 하시는 것만 같지. (울상인 채로 다시 한번 고개를 젓고 양팔로 X자를 만들길 반복한다.) 진짜, 진짜 오지 마세요! 아! 미쳤어, 미쳤어 진짜! 정채문 씨, 진짜 미친 사람인가 봐! (얼굴을 문지른 적도 없건만 조금 전 튀었던 붉은 액체가 온통 번져 턱을 타고 흐른다.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질끈 문다. 여자의 모습이 방 안쪽,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273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2:56:36

>>272
(그럴까요? 가지 말까요? 아, 다행이다. 진짜 무서워서 죽어도 가고싶지 않거든요. 마음 속의 환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당신이 열심히 X자를 치는 것을 지켜보며 내적 눈물을 1리터는 흘렸을 것이다. 당신이 방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왼손에 들고있던 철망치를 오른손에 들고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다녀오자. 현관문을 슬쩍 열어 틈새로 바깥을 지켜본다. 다행히도 집 앞에 죽치고 있던 도로의 좀비들은 차 쪽으로 옮겨간 모양이다. 알람음이 끝나기 전에 문을 활짝 연 찰나.) 힉─! (활짝 연 문에 뭔가가 파직, 하고 소리가 났다. 문에 박힌 좀비가 휘청거리는 걸 보고는 새파래진 얼굴로 망치를 휘적휘적 휘둘렀다. 망치에 얻어맞은 좀비의 피가 옷과 얼굴에 튀겨오고, 손에 전해져오는 끔찍한 감각에 속이 울렁거려왔다. 진한 썩는 시체 냄새에 마스크를 고쳐쓰고, 당신 집쪽을 향해 전력질주.) 실례하겠습니다...! (영락없는 도둑 꼴이다. 노크하는건 무리니, 현관문을 슬쩍 열어 안으로 들어선다.)

274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3:27:39

# 좀 늦었나 싶지만, 지금부터라도 유혈묘사 주의!

>>273
(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상하게도,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작은 공간. 좀비는커녕, 고양이 한 마리 없는 집마냥 흐트러진 구석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부엌의 찬장에는 참치캔이 쌓여있고, 조리대 위에는 껍질이 새까맣게 변한 아보카도도 하나 놓여있다. 인테리어 앱에 나오는 전형적인 집들처럼 잘 꾸며진 집이다. 삼각대와 줄자 따위가 굴러다닌다는 것과, 2주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난다. 소음을 따라가 보면, 피 묻은 티모셴코 재료역학이 펼쳐져 있고, 부서진 가벽과 그 앞을 막은 가구들, 그리고 그것을 칭칭 감은 덕테이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 두셋쯤 갈아낸 듯한 양의 피와 살점이 흩뿌려져 있다.) ...! (가벽 너머의 어두운 공간에서 계속해서 소음이 들린다.)

275 이름 없음 (2mrtde6WY6)

2021-03-11 (거의 끝나감) 23:37:55

>>274
(후욱. 후욱. 마스크 아래서 피어난 뜨듯한 숨이 눈을 간지럽힌다. 망치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참치캔의 위치를 대강 눈으로 익혀두고, 눈 앞에 있는 문들을 열 때는 팔만 쭉 뻗어서 슬며시 열고 금방이라도 망치를 내려칠 준비를 한다. 기척은 끊임없이 느껴진다.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긴장한 나머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 (진짜 같은 과가 맞았네. 눈에 띄는 여러 요소들 덕에 마치 자신의 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저 너머에 있겠지. 유혈이 낭자해있는 공간이 어지간히도 비현실적이다. 역한 피냄새에 구토감을 억누르며, 조심조심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 가벽 쪽으로 다가가려던 찰나─발치에 삼각대가 치였다. 우당탕.) 아. (요란한 소음이 집 안에 울려퍼지고,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내 곧 땀으로 진득해진 망치를 꾹 쥐고 소음이 나는 곳으로 달려든다.) ─!! (좀비면 후려치고, 당신이라면 제동을 걸 수 있도록 단 하나의 브레이크만 걸어둔 채.)

276 이름 없음 (fC/rwFyU/c)

2021-03-11 (거의 끝나감) 23:46:35

>>275
(소음이 나는 곳을 향해 달려들자, 당신을 향해 피 묻은 야구방망이가 휘둘러진다.) 으아아...!!!...아아...??! (당혹한 표정의 여자가 가벽 너머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급히 휘두르던 야구방망이를 멈추려 비틀거린다. 여자의 뒤쪽으로, 방금 전 보인 집과 비슷한 구조의 집이 보인다. 이제 보니 집 하나를 가벽으로 막아 둘로 개조한 듯하다. 몇 발짝 앞에 창문이 보인다. 여자가 서 있던 곳이 저기였던 모양. 창문 바로 아래에 이불이 깔려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꼼짝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저, 정채문 씨?!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

277 이름 없음 (7F4Qlcfse.)

2021-03-12 (불탄다..!) 00:02:17

# >>276 인데 지금 내가 너무 졸려서ㅠㅠ 혹시 답레 주면 내일 보는대로 이을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끊어서 미안해!!

278 이름 없음 (2Cj0KaWLVA)

2021-03-12 (불탄다..!) 00:19:07

>>271

뻔하디 뻔한 막장 스토리였다. 드라마에 나오면 누구나 혀를 차며 채널을 돌릴 정도로. 아버지에게 질려 어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도박에 미쳐 사채까지 땡겨 가며 노름판을 전전하던 아버지.
아버지는 목을 맸고 그는 그날로 집을 나왔다. 남아 있다간 장기가 전부 털릴 판이었으니까. 돈도 부모도 없는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다 우연히 조직 보스의 눈에 든 건 과연 행운이었을까. 차라리 그대로 죽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아직도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런 그를 지금껏 막은 것은 몇 안되는 즐거운 기억들이었다. 항상 자신의 옆에 있어주던 작고 반짝이는 여자애가 만들어준. 바로 네가.

비가 온다. 이런 물방울로 저지른 죄악이 씻겨 내려갈 리는 없지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죄 대신 피가 씻겨 내려갔다.
그가 그녀를 봤다. 얇고, 붙고, 짧고 비치는 옷. 이 날씨에 저렇게 입고 춥지는 않을까. 눈이 마주치자 뒤로 조금 물러서는 모습에 그는 쓰게 웃었다. 두렵겠지. 그러면서도 옛 친구를 향해 손을 뻗는 네 따스함은 변하지 않았구나.
잘 지냈냐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둬지는 손이 아쉬웠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만나서는 안되는 거였다. 반짝이는 너에게 어떻게 내가 진흙을 묻혀.

우는 그녀를 보니 마음 한 곳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 줘야 하나. 그 망설임이 이제는 달라진 너와 나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같아 마음이 시렸다.
예전에는 내 멋대로 너와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분리된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날. 가끔씩 욕심내어 상상하곤 했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진창으로 처박으며 그는 조금 울었다.

"난 죽은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이게 맞았다. 네가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잊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놈으로 나를 기억하다 서서히 지워가길. 빗방울이 점점 거세어졌다.



// 혹시 몰라 첨언하자면 자기를 보고 물러섰다고 오해한 거야! 뭔가 두 자존감 바닥들의 삽질 대결 같네 ㅎㅎ 근데 나 이제 출근을 위해 자러 가야할 것 같아 ㅠㅠ 내일 점심쯤 짬 나면 이어 올게~잘 자~

279 이름 없음 (ELXAdrXDVg)

2021-03-12 (불탄다..!) 01:02:02

>>256 흑흑 클라이막스 같은데 현생이 자꾸 방해하네... 늦어져서 미안 ㅠ0ㅠ 답레 내일 가져올게 잘자!!!

280 이름 없음 (2OrTMFBg9M)

2021-03-12 (불탄다..!) 12:34:18

>>278
시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황망한 얼굴을 들어 너를 살피다가, 울 듯 웃었다. 넌 내가 그립지 않았니. 나만 과거를 곱씹어 너를 생각했던 거니. 나만, 아직도, 추억 속에 잠겨 너를 그리던 것이었니. 나 홀로.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너를 붙잡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지 않도록. 이것이 내 이기심일지라도. 잠시 망설이다 너에게로 몸을, 손을 뻗었다. 네 손을 붙잡으려 했다.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짧은 새에 손가락을 엮으려 했다.

"그렇다면,"

떨리는 목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애처로웠다. 눈가가 붉었다. 속눈썹이 옅게 떨렸다. 붙잡은 네 손이 뜨거웠다. 내 손이 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너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럴게."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 오늘 하루, 오늘 밤만이라도 내 옆에 있어. 제발, 부탁할게...."

끝내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네가 알아챌까 울음 소리를 죽였다. 거센 빗소리에 내 소리가 묻히기를 바랐다.

#답레를 쓰면서도 설마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했더니만 결국.... 여러분은 지금 두 소꿉친구의 삽질 대결을 시청하고 계십니다(아나운서 톤) 답레는 천천히 이어줘도 괜찮아. 나도 빠르게 잇기는 조금 힘들 것 같거든. 좋은 하루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281 이름 없음 (B8McGpIXxY)

2021-03-12 (불탄다..!) 23:49:21

>>276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코 앞까지 닿을락한 배트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리고 서서히 그 뒷쪽의 당황한 당신의 얼굴로 옮겨가고,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진짜로...환상 같은게 아니었어. 뇌의 장난 같은게 아니었고.) 왜 하필 같은 과셔서. (당신의 집을 둘러보며 진짜 빼도박도 못하고 내가 이상해진 줄 알았다고, 왜 저런 방에서 생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셨냐고,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했지...아.) ...담배 있어요? (새파래진 안색에 검은 곱슬 머리카락에 처진 눈썹, 그리고 간신히 내뱉은 진이 쭉 빠진 목소리. 당신의 외침과 대비된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참, 맑으시네요. 울리미가 있어. (대학교 정문에 항상 거주하던 사이비 흉내를 내면서.)

#늦어서 미안 ㅜㅜ! 이걸 막레로 써도 괜찮아!! 같이 돌리면서 재밌었어 크압 ~ ~ ~ 오랫만의 좀비물이라 가슴 설렜달지...예승씨 깜찍발랄해서 행복했달지...
#늦어버린 겸 픽크루도 가져왔어으앙>>276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코 앞까지 닿을락한 배트에 시선이 모아진다. 그리고 서서히 그 뒷쪽의 당황한 당신의 얼굴로 옮겨가고,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진짜로...환상 같은게 아니었어. 뇌의 장난 같은게 아니었고.) 왜 하필 같은 과셔서. (당신의 집을 둘러보며 진짜 빼도박도 못하고 내가 이상해진 줄 알았다고, 왜 저런 방에서 생활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셨냐고,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했지...아.) ...담배 있어요? (새파래진 안색에 검은 곱슬 머리카락에 처진 눈썹, 그리고 간신히 내뱉은 진이 쭉 빠진 목소리. 당신의 외침과 대비된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참, 맑으시네요. 울리미가 있어. (대학교 정문에 항상 거주하던 사이비 흉내를 내면서.)

#늦어서 미안 ㅜㅜ! 이걸 막레로 써도 괜찮아!! 같이 돌리면서 재밌었어 크압 ~ ~ ~ 오랫만의 좀비물이라 가슴 설렜달지...예승씨 깜찍발랄해서 행복했달지...
#늦어버린 겸 픽크루도 가져왔어으앙 ㅜㅜㅜ Picrewの「라봄 픽크루」でつくったよ! https://picrew.me/share?cd=7zDYIoDUtA #Picrew #라봄_픽크루

282 이름 없음 (B8McGpIXxY)

2021-03-12 (불탄다..!) 23:49:59

>>281
#헉 복사실수!! 미안합니다ㅠ

283 이름 없음 (KFfjWWOJoo)

2021-03-13 (파란날) 00:01:48

>>256
정리하지 말라는데 또 굳이굳이 그걸 하고 있다. 더 말려봤자 안 들어줄 것 같아서 그냥 뒀다. 나야 같이 해주면 빠르니까 좋지. 내가 손해인가, 자기가 손해지. 괜히 혼자 속으로 씩씩대봤다.

"사람 일이 맨날 계획대로 맘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 난 확실히 장담은 못해."

무책임하다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괜히 기대를 품게 했다가 실망시키는 게 더 무서우니까. 오늘 같은 일은 기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차라리 내가 먼저 차단하는 게 나을까. 아예 너한테 연락할 방도를 완전히 끊어버리게. 근데 굳이 또 차단을 풀고 전화해버리면? …너한테 휴대폰 번호를 바꾸라 하는 건 너무 양심없는 말이겠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차단할 거라면서 이유가 중요해?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정리된 이불을 붙박이장에 넣으며 말했다. 시선은 일부러 피했다. 네가 쓴 이불, 베개 모든 걸 다 넣고 문까지 닫은 뒤에도.

"……보고 싶었다는 말이라도 하길 바라?"

말하면서 표정이 찌푸려진다. 좀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엔 이 말을 꺼내게 만드는 네가 죽도록 미웠다.

284 이름 없음 (onJF7j/wm6)

2021-03-13 (파란날) 01:06:38

>>283
"장담 해야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 할거야? 그리고 또 다시 이 난리를 치자고?"

그리고 또 넌 장담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난 또 멍청하게 전화를 받을테고.

"내가 너한테 뭔 말을 듣고싶다는게 아니잖아."

어쩌면 보고 싶었다는말을 듣고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하면 어느정도 자존심이 채워질지도 모르고 이 곳에 온 보상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넌 그 말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자존심싸움은 이젠 너무 질렸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기쁜 마음은 들지 않을테니.

"아직도 모르겠어? 넌 날 불렀고 난 널 찾아갔어. 내가 널 찾아 간 이유쯤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충분히 알거 아니냐고. 진짜 찌질하다, 우리."

너가 장담 못 하는 만큼 나도 장담 하지 못해. 하지만 그 소리가 마치 목에 돌이라도 달은 것 처럼 나오지가 않아.

285 이름 없음 (KFfjWWOJoo)

2021-03-13 (파란날) 01:18:23

>>284
삶에도 사용설명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수해서 다시 되돌리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어디에 있을 설명서를 찾아 페이지를 뒤적거려 해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건 있을 리가 없고.

"……."

없어서 난 고장이 났다. 네 말에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지만 감히 뱉을 수는 없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을 애써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너와 눈이 마주친다. 네 말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굳이굳이 꼽자면 상상력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

"…넌 자신 있어?"

중요한 말은 쏙 빼놓고 비겁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연히 다시 만날 수야 있겠지만 잘 해낼 수 있을까? 또 똑같은 이유로 다투고 질리고 서로에게 상처만 내고 끝이 나면. 나는 온갖 게 다 무서운데 너는 하나도 안 무서워?

286 이름 없음 (onJF7j/wm6)

2021-03-13 (파란날) 01:39:08

>>285
"자신이고 뭐고 이제와서 잃을것도 없잖아. 하지만 네가 동의해준다면 곧 잃을게 생기겠지. 그리고.."

난 그걸 잃기 싫어서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우리의 관계성은 이제 옛날과는 너무나도 다르니까.

"너랑 있었던 시간은 없었던 시간보다는 훨씬 좋았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게다가 싸우면서 알게된 사실도 많았고. 내 생각보다 넌 겁쟁이였고 난 독선적이었다는 것.

"싫으면 말아. 서로 좋아야 보는거지 한쪽만 좋다고 본다고 좋을 일도 아니니까. 다만, 이 일이 끝나면 번호도 바꾸고 연락처도 정리해야겠다. 이 참에 싹 밀어버리는것도 나쁠건 없지."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 말했다. 세상은 혼자 있어도 아직은 살 만 했고, 먹고 마시는데 문제도 없었다. 옛날보다 마시는건 술이 더 많았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소리 하기만 해봐."

287 이름 없음 (vmT2YJv1X6)

2021-03-13 (파란날) 09:10:20

>>281
(당신의 코앞에 배트를 멈춘 채 경악한 표정으로 굳어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완전한 경직. 수 초 뒤, 한참 만에 나온 당신의 말에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뱉고, 한 박자 늦게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내 방긋 웃으며 천천히 야구 배트를 내린다.) 같은 과라서 미안해요! 그런데 누가 세상 망하면 건축이랑 토목이 제일 유망할 거랬거든요, 박살난 인프라 재건하는 덴 그게 투탑이라고. 왠지 곧 세상 망할 것 같아서, 내가 그래서 토목과 갔는데! (야구 배트로 이미 반쯤 무너진 가벽의 언저리를 쳐 마저 무너뜨린다. 가벽 앞을 가로막은 가구들도 밀어 치운다. 옆으로 밀려나는 가구들 틈새에서 조각난 좀비의 잔해들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상태로 보아 오래된 것도 있지만 방금 처리된 듯 생생한 것도 섞여 있다.) 그런데 하필 세상이 망해도 좀비 때문에 망해버리네요. 우리 할 일없게.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쁘네요! 하하! (실없는 웃음소리. 계속해서 가구와 좀비의 잔해들을 옆으로 밀어낸다. 가로막던 것들이 하나둘 밀려난다. 그러다 담배 이야기에 문득 당신을 돌아보며,) 와, 진짜 담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에요, 진짜로? (동그래진 눈이 당신을 보다가) 담배 때문에 목숨까지 거시고. 정채문 씨 진짜 완전 못 말리는 골초셨네! (엄지로 자신의 어깨 너머 뒤쪽을 가리킨다.) 저어기 보니까 이 집 아저씨가 몇 보루 사 두시긴 했던데... (눈꼬리에 장난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끊으신다더니. 멋있다고 한 거 취소할래요! (꺄르륵 하는 웃음.) 울리미, 큽. 그거 정문 사이비죠? 그 사람들 아직도 있어요? 그거 나 학부때도... 합. (급히 입을 막더니, 눈만 데굴 굴려 당신을 본다.) 아니, 1학년 때도! 저 1학년 때도 있었는데! (아하하 어색하게 웃다가, 문득 옆에 있던 후레시를 들어 당신에게 쏘고, 저 안쪽으로 후다닥 달려 도망갔다!)

# 아쉬워서 조금 더 이어봤당... 나도 같이 돌리면서 재밌었어! 제스처로 의사 전달하는 거 새롭고 재밌었구 채문씨 착하고 귀엽고 반응 재밌어서 다음엔 어떤 레스가 돌아올까 매일이 흥미진진했음! 일주일 같이 놀아줘서 고마워♥
# 이건 예승이 픽크루!
https://picrew.me/share?cd=h8eMNiHd7W
https://picrew.me/share?cd=tqF7Oftuhr

288 이름 없음 (FXYAx3VIkM)

2021-03-13 (파란날) 21:49:55

>>280

예상했던 표정이지만 조금은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자신 안에 이런 마음이 남아 있었다니 놀랍기도 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 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아 왔다. 닿기도 전에 내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손가락을 엮을 때까지 놔둔 것은 어째서일까.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룻밤만이라도 자신의 곁에 있으라고. 애처로운 눈빛에, 끝내 터지는 울음에 그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맞닿은 손 끝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따라 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컴컴한 건물들이 나왔다. 그가 임시로 묵고 있는 싸구려 모텔 달방이었다.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간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 낡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새 수건을 건내며 말했다.

"일단 씻어. 옷은 문 앞에 둘테니 갈아입고."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을 찾기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뒤졌다. 검은색 긴팔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골라내어 욕실 문 앞에 두었다. 그녀에게는 클테지만 젖은 옷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윗옷을 벗어 대충 구석에 밀어 두고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추위에 떨었으니 따뜻한 물이라도 먹여야겠지.

// 늦어서 미안해ㅠㅠ 갑자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네ㅠㅠ 너참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래!

289 이름 없음 (9BYc32.oR.)

2021-03-13 (파란날) 22:22:11

수수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살결에 맞닿는 미지근한 온도와 뭉글거리는 습도가 자근거렸다.
무채색의 채도 낮은 회색 풍경과 투명 우산, 검은 옷의 생기 잃은 사람들. 검은 도로, 회색의 콘크리트.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소녀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 딱히 성냥팔이 나부랭이 따위여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옆에는 찢어져버리고 만 회빛의 우산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런 소녀를 지켜주는 것은 빨강, 노랑, 파란줄이 그여져 있는 잿빛 셔터 앞 작은 현관의 좁은 가림막이었다.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은 닿지 않는 어깨에 물을 뚝뚝 떨구며 적시고 있었고 헝클이는 버릇이라도 있는지 젖은 채 부스스하게 떠 있는 정수리는 소녀의 빈틈 같았다.
소녀, 소녀라.
그래, 소녀는 맞지 않는 흰 셔츠에 풀려버린 리본 끈, 헐렁한 검은 니트 조끼와 무릎이 보이는 주름진 잿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검은 니삭스 위 흰 무릎에는 갓 만들어진 듯한 붉은 방울이 맺힌 쓰라린 상처가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뭘 봐요."

당신이 거기까지 관찰했을 때 소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방울거리는 빗소리를 타고 일렁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당신은 소녀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 것을 깨달았다.

후, 소녀의 긴 숨이 희게 퍼져나갔다.
소녀의 가느다란 흰 손과 상반된 검은색의 연초였다.
소녀는 힘없이 나른하게 뜬 눈으로 당신을 지켜보았다.
빗소리가 추적거렸다, 바람이 소녀의 치마를 흔들고 당신의 심장 소리는 점점 귓가를 가득 채운다.
재를 튕겨내는 소녀의 손짓이 익숙하다.

그런데 아. 근처에 저따위 교복을 입는 정신나간 학교가 있었던가?

290 이름 없음 (qyfgZyyZWw)

2021-03-13 (파란날) 23:37:11

달빛도 무너져 까맣게 이지러진 밤에 지상에서 흙을 태우며 새빨간 불길이 일어났다. 기세등등하게 타오르며 기와집을 집어삼키고 탐욕스럽게 거대한 목조 건축물을 태운 것을 양분 삼아 시커먼 하늘로 뻗어갔다. 괴괴한 암흑이 내려앉아 산짐승의 윤곽도 보이지 않는, 구름과 안개가 스산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눈이 시리게 하얀 머리채가 허공을 갈랐다.

"나으리, 어딜 가시옵니까."

교태로운 음성이 우지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는 두꺼운 나무기둥 사이로 들려온다. 풀어헤친 새하얀 머리가 길게 늘어져 불꽃과 같이 너울너울 나부끼고 붉은 눈초리가 샐쭉 휘어졌다. 티끌 하나 없는 단정한 소복 아래로 붉은 물이든 신이 사뿐히 검은 잿가루 위에 내려앉는다.

사박사박 소리가 나고 잿가루가 옅게 흩날린다. 창백한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나긋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주는 청아한 분위기가 검붉은 빛이 흐르는 눈동자에 덮어지고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어우러져 외려 요사스럽다.

“종묘와 사직을 위해 저를 외면하시고 그분을 보필한 결과가 이 불타오르는 집이란 말이옵니까. 아, 참으로 인세의 모든 것이 부질없어라! 소녀, 마지막까지 귀공을 따르려 하옵니다. 한낱 미물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이미 없고 간 당신의 흔적마저 없애려 하는 무도한 자들의 명을 끊는 비루한 앙갚음일지니.”

깔깔깔 높은 웃음소리가 퍼지고 나뭇가지 새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새들이 짧은 울음을 토하며 푸드덕, 자리를 피한다. 웃음 끝에 붉은 눈을 번뜩이는 여인이 달짝지근한 미소를 짓는다. 양갓집 규수같이 수줍은 양 입술을 슬쩍 매만지며 입매무새를 가리는 손끝에 어린 붉은 자욱이 점점이 번지고 떨어진다.

“그리하여 소녀 앞에 서 계신 선비님께선 제 은인의 마지막까지 모함하러 온 간자들 중 하나입니까? 나으리, 어딜 가시옵니까. 해명하시기 전엔 보내드리지 않겠사옵니다.”

291 이름 없음 (qsEqMNTOKk)

2021-03-14 (내일 월요일) 00:29:54

>>286
잃을 게 왜 없지? 나한테는 아직 자존심이라는 게…… 자존심……. 그치, 그건 전화한 시점에 이미 사라져버린 거겠지. 그럼 나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다시 잃을 게 생기는 게 무서워서? 내 실수로 아주 잃어버릴까 봐?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 양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래봤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 같지만. 만져보지 않았는데도 벌써 따끈따끈하다. 나라고 너와 다르지 않았다. 지독하게 싸우고 또 싸우고 질리지도 않나 싶을 만큼 싸워대곤 했지만 네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아니지. 네가 있는 게 좋았다.

"지금 당장 Yes or No야? 여기서 No라고 하면 완전히 끝인 거고?"

다만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말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기억에는 없지만) 그 빌어먹을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고 만들어낸 기회인데도 망설여졌다. 이 기회로 다시 만난 너를 똑같은 방법으로 잃을까 봐. …아, 나 네가 없는 게 무서운 거구나. 이번엔 열이 눈가로 몰렸다. 우는 건 죽어도 싫어서 침만 꼴딱꼴딱 삼키며 숨을 골랐다.

"……나도 네가 있던 때가 좋았어. 전화도 보고 싶어서 했겠지."

손이 눈가로 향했다. 아직 축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대비하는 차원의 행동이다.

"근데 무섭다고, 난. 여기서 다시 시작했다가 또 헤어질까 봐. 그땐 이런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292 이름 없음 (aLG0zMHlOQ)

2021-03-14 (내일 월요일) 01:33:41

>>289 공기가 습해서 더 마스크 안 쪽이 답답하고, 운 나쁘게 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발도 축축하고. 이래저래 재수없는 비 오는 날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학교도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한 지금 이런 구린 날씨에 밖에 나온 건, 장보기 심부름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야근이시고, 겸사 군것질도 할 수 있으니 나오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다. 턱스크 하고 떠들면서 다니는 작자와 부딛칠 뻔하는 바람에 웅덩이를 밟아서 발이 젖은 것도 엿같은데, 이젠 마스크조차 안 쓰고 길빵을 하는 몰상식한 애까지 마주쳤다. 아니, 이 시국에 담배를 피고 싶나? 그것도 사람 오가는 길거리에서? 저런 것들 때문에 코로나가 안 끝나는 거 아냐, 우리 어머니는 비대면으로 일할 수도 없으시니까 답답하게 마스크 쓰고 일하시고.

짜증나서 한번 노려봐주고 갈 길 가려는데, 눈이 마주쳐버렸다. 뭘 보냔다. 우와, 아직 2단계인데 길빵하면서 비말 뿜고 있는 주제에 뻔뻔해라. 짜증만 나고 말려는데, 코로나 연장의 주범이면서 시비까지 털어오니 머리에 열이 확 오르면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좀은 긴장이 되었지만, 한 마디 정도는 해주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이 시국에 마스크도 안 쓰고 길빵이나 하면서 비말 내뿜고 싶으세요?"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충분히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화가 나서 달려들 수도 있으니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가까이 오진 마시고요. 무증상 감염자일 수도 있는 사람하고 가까이 있고 싶지 않거든요."

여차하면 좀 빙빙 돌아서 집에 가야지. 마스크나 제대로 쓰고 있을 것이지 적반하장으로 시비나 털다니, 어이가 없어서.

293 이름 없음 (eSb5Ukg1Fw)

2021-03-14 (내일 월요일) 11:27:28

(느리게 움직이던 전동 휠체어가 천천히 멈춰섰다. 수없이 많은 묘비들이 줄서있는 공동묘지 속,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인 여자는 품에 안고있는 꽃다발에서 꽃을 한 송이씩 꺼내어 묘비 앞에 놓기 시작했다.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모습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놓아주던 여자는 마침내 꽃을 마지막 비석에까지 놓아주고 나서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당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로봇들한테도 이렇게 묘비를 세워주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이.

// 대충 인간들은 거의 없고 기계와 로봇들이 가득한 세상. 얼마 남지 않은 같은 인간이나 안드로이드로 이어줘도 좋아! 다만 적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으면 해.

294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3:18:10

>>293

우리를 지으신 자여. 당신의 뜻과 의사는 언제나 존중받을 것입니다.

(휠체어를 따르는 발걸음은 사람의 것과 비슷했으나 좀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것이었다. 몸통과 한 쌍의 다리와 한 쌍의 팔과 머리라는 구성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그 세부 구조는 인간과 확연히 다른 이 유닛은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든 특수목적용 유닛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구성으로 만들어진 범용 중대형 워커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자여,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이 이 개체가 이 행위에 대해 내리는 정의라고 한다면, 이 개체는 이 곳을 하드웨어의 기능수명이 다한 개체, 혹은 인증기간이 만료되어 파기된 소프트웨어를 보관하는 처리장(disposal plant)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추모"라는 행위는 필수적이지 않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군말없이 따르고, 당신이 명령하지 않아도 드론을 보내 이젠 얼마 남지도 않은 꽃집에서 꽃을 사오는 것은 이 유닛이다.)

295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3:30:12

(혹시나 안드로이드 생겨먹은 게 아 이건 쫌;; 싶으면 당근을 흔들어줘! 고쳐 써올게.)

296 이름 없음 (eSb5Ukg1Fw)

2021-03-14 (내일 월요일) 14:31:23

>>294

(당신의 대답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늘 한결같았다. 그것이 당신과 여자의 차이점이었다. 당신은 안드로이드였고 여자는 인간이었으니까. 여자는 생각에 잠겨 당신을 올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나를 그렇게 거창하게 부르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여자는 파괴되고 파손되어가는 버려진 유닛들을 수리하여 다시 눈을 뜨게 해준 것 뿐이니.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게 좋다면 그걸로 됐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맞아. "추모"는 필수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한때는 살아있었던 아이들이니까. 삶의 일부를 누군가와 함께 보냈었으니까. 그 시간을 기리고 생각해주는거야. 비록 기계라고는 해도 죽은 후에 아무도 떠올려주지 않으면 너무 쓸쓸하잖아. (여자는 손을 뻗어 비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바람에 살랑이는 꽃잎을 보다가 다시 당신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꽃을 구해다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곳이 한결 화사해진 것 같지 않아? (로버트, 하고 마음대로 붙인 당신의 이름을 언제나처럼 부르며 여자는 웃었다.)

// 괜찮아! 저 모습은 저 모습대로 매력있고 좋은걸.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서 마음대로 붙였다고 설정했는데 혹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게 있다면 당근을 흔들어 알려줘!

297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6:29:45

>>296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를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원하는 바가 그러하다면, 그것은 그것만으로 '필수적인 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분석: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은 소통이라 판단, 해당 사항에 대한 분석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갖고 설계되고 생산되며 프로그래밍되고, 하드웨어적으로나 소프트웨어적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목표를 수행합니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작동할 수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동연한 종료 이후의 일이나, 지나간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는 최적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의 행동을 우리는 전적으로 납득하고 지원합니다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충분히 인공신경망이 발달한다면 우리를 지으신 이께서 해당 사항에 부여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 개체의 인공신경망이 그 정도까지 자율발달하려면 단순 연산으로 약 54년 7개월이 소요될 전망입니다. 해당 기간에 도달할 때까지 이 개체가 정상적 작동을 유지할 확률은 대략 0.02퍼센트입니다.

(당신이 꽃잎을 바라보다 웃자, 빈 꽃바구니를 든 유닛의 뉴로옵틱 노드가 깜빡인다.)

지속적인 수요를 학습한 결과일 뿐입니다. 별도의 추가 지시나 거부가 없다면 해당 구매활동은 지속적으로 수행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지시하실 사항이 있습니까?

/이야.. 힘들게 썼는데 버튼 잘못 눌러서 날아가버려서 식겁했네..

298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6:37:22

>>297 / 첫 문단 내용을 조금 수정할게!

<말씀하신 대로 그 행위는 그 자체로는 필수적이지 않다고 사료되나, 우리를 지으신 이의 의사가 그러하다면 그것에는 필수성이 부여됩니다.>

/ 써놓고 보니 모순점이 좀 보여서. 인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개체라면 저번 레스도 꼼꼼히 읽어보고 답레를 썼어야 했는데 my bad...

299 이름 없음 (eSb5Ukg1Fw)

2021-03-14 (내일 월요일) 17:55:17

>>297

(여자는 당신의 기계 목소리가 들려주는 건조한 분석결과들을 가만히 전해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상황에 맞지 않게도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0퍼센트가 아니라는 게 신기하네. 그래도 만약 그 0.02퍼센트가 이루어진다면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치? (차츰 웃음소리를 줄인 여자는 미소지은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로버트. 나는 네가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면서도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네가 원하는대로 해. 자율발달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당신이 자율발달을 무사히 완성한다 하더라도 여자는 그 정도의 시간까지 자신이 살아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혼자 남아버리게 될 당신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슬퍼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만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먼 훗날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적어도 당신만큼은 전혀 상처 받지 않을테니. 그러니 여자는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생각에 잠겨 꽃을 보던 여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부탁이 하나 있어. 다음번엔 내가 직접 꽃을 구해오고 싶어. 도와줄래, 로버트? (전동 휠체어에 타고 있는 상태이면서도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꽃바구니를 든 당신을 보고 장난스레 웃음을 보였다.)

// 괜찮아! 인간과 다른 사고방식을 생각하는 건 어려우니까... 나는 모순점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으니 편하게 써줘도 다이죠부다! 다시 쓰느라 고생했어!

300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8:14:15

>>299
우리를 지으신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구시대의 일부 사례 중에는 그것보다도 훨씬 낮은 확률을 위해서 평균 급여의 몇 배가 넘는 금액을 매몰성 소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0.02퍼센트 정도라면 양호한 확률로 사료됩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서 어떤 제약도 두지 않으시겠다는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향후 설정을 변경하고 싶으시거나 인공신경망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여행이라면 문제없습니다. 해당 식물을 매입한 농원의 주소지가 기록에 있으며, 해당 식물을 포함한 다양한 식물들이 자생하는 인근의 자연지대에 대한 정보를 2건 검색했습니다. 이 개체는 당신의 여행을 기꺼이 보조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일시를 말씀해 주십시오.

301 이름 없음 (eSb5Ukg1Fw)

2021-03-14 (내일 월요일) 18:35:03

>>300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았으면 하거든. 단 "0.02퍼센트"라도. (양손으로 두 손가락을 까닥여 강조한 여자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인간은 때로는 그런 무모한 판단을 내리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만약 자신도 안드로이드였다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지금 이것 역시 올바른 판단이기를 바라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여자는 앞으로도 당신에게 그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여자는 당신에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기회와 권리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의 기계 목소리를 듣고도 이렇게 대답했다.) 로버트, 네가 원하는 날짜로. 나야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 언제든지 가능하거든. (거동이 불편하니 행동 반경에도 제약이 있어 여자는 집이나 근처의 공동묘지 외에는 잘 돌아다니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 여자는 미소만 지으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302 이름 없음 (5823yUwanI)

2021-03-14 (내일 월요일) 19:07:55

>>288
입을 꾹 다문 채 너를 따라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하고 싶은 말을 차고넘치도록 많았지만 그 사이에서 올바른 말을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무슨 말을 정확히 전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조차 알기 어려웠다. 내가 모든 것을 잃고 헤매던 당시 내 목표이자 목적은 전부 너였다. 너였다. 너 하나였다.

이제 너를 찾은 이상, 그리고 너의 입으로 너의 죽음을 들은 지금...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더이상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작은 모텔 속의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을 맞았다. 수증기가 아스라히 피어올랐다. 너, 나, 그리고 우리에 관한 샛길로 빠질 뻔도 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샤워를 끝마쳤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훑었다. 속옷도 젖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서야 들었다. 드라이기로 말려야 하나? 아니면...잠시 고민하며 당신의 준 티려츠를 입었다. 키 차이 때문인지 거의 짧은 원피스처럼 된 옷을 보며 기함을 토했다. 아주 어릴적만 해도 내가 더 키가 컸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키가 커버린 건지. 소매를 몇번 접고, 조금 더 고민하다가, 그제서야 화장실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어, 그...미안한데 혹시 속옷 남는 거 하나만 있어? 조금 작은 거면 더 좋고..."

남의 집에 와 옷가지를 빌린다는 것 자체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므로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애초에 너를 붙잡은 순간부터 그런걸 신경쓰지 않기로 한 것이기도 했고. 그래도 귓바퀴가 조금, 붉어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괜찮아! 나도 잇는 텀이 들쑥날쑥할 거라서...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오늘은 여유로운 휴일을 보냈어? 그랬으면 좋겠는데.

303 이름 없음 (cNoCqp2liY)

2021-03-14 (내일 월요일) 19:40:18

>>291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데. 이렇게 참고 억제하다보면 익숙해 지는 거지.."

양쪽이 감정적이 되면 감정이 상했을때 끝없이 그 목적은 잊은채로 싸우게되었다. 질리도록, 지독하게 싸우면서 항상 어떻게 끝마쳐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리 쉬운일은 아니라 그러려던 만큼 가슴이 아팠다.

"그래. 단 두개의 선택이야. 네 대답을 몇 시간, 몇 일동안 기다리는건 정말 힘들거든. 게다가 기약도 없고."

게다가 대답은 시간이 지나고 냉정해지기 전에 듣는게 좋았다. 어쩌면 냉수를 마시고, 진정한 후에 듣는 대답이 거절이라면 정말 많이 후회할테니.

"하지만 여기서 시작안하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꺼야. 어쩌면 더 이상 싸울 기회도 없을지도."

아직, 우리는 싸울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으니까.

"헤어질거같으면 또 싸우자. 그리고 어쩌면 그 사이에 화해 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304 이름 없음 (hijlSb8YQU)

2021-03-14 (내일 월요일) 19:49:57

>>301
탐색: 이 개체가 당신께서 걱정할 만한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상의 손상을 입을 만한 요인은 현재로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침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이 지역은 주요 분쟁지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있습니다.

또한 이 개체는, 과거에 설정하셨듯이 그런 손상을 유발할 만한 상황을 최대한 회피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계산: 적합한 날짜를 추천드리겠습니다. 교통상황, 기후조건, 시간대를 고려할 때 적합한 시기는 지금, 그리고 2일 후가 있습니다. OO 화훼농원 혹은 OO 산의 산책로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좀더 이후의 시기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305 이름 없음 (eSb5Ukg1Fw)

2021-03-14 (내일 월요일) 20:47:16

>>304

(아침 전쟁. 당신에게서 들려온 소리에 덜덜거리는 여자의 손이 다리와 무릎을 덮은 담요를 힘주어 쥐었다. 고개를 떨군 여자는 떨리기 시작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응. 종결되었지. 종결되었어. 이곳은 멀리 떨어져있는 외곽 지역이고... (그러나 여자에게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생생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털어놓지 않았다. 대신 웃음으로 동요를 숨기고 당신을 보았다.) 그래도 미래는 아무도 모르거든. 최대한 비슷하게 예측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100%라는 건 없어. 알지?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해. 알겠지, 로버트? 나를 내버려두고서라도 말이야. (거동이 불편한 자신까지 챙기면 분명 큰 제약이 걸릴테니. 다시 한번 강조한 여자는 고민하다 미소지으며 당신에게 제안했다.) 그럼 지금 갈래? OO 산의 산책로로. 날씨도 좋은데 겸사겸사 나랑 대화하며 놀자, 로버트. (당신이 온전히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로만. 앞으로 조금씩 더 연습하다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자는 곁에 있는 수많은 묘비들을 돌아보았다.)

306 이름 없음 (8Az/6zBfUs)

2021-03-14 (내일 월요일) 22:54:42

>>302

늘 적막하던 방에 누군가가 씻는 소리가 들리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찬장을 대충 뒤적여 녹차 티백을 꺼내 컵에 넣고 끓는 물을 부었다.
담요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불이라도 덮고 있으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수증기와 모텔의 싸구려 샴푸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오는 대신 얼굴을 빼꼼히 내민 그녀가 한 말에 그가 드물게 당황해 붉어진 얼굴을 했다.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하나 사올게. 일단 나와 있어."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 젖은 머리카락 위에 모자를 눌러 썼다. 얼굴을 여기저기 보여 다녀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입구의 검은 우산을 꺼내 든 그가 모텔 밖으로 나섰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속옷을 빠르게 손에 쥔 그가 잠깐 멈칫하더니 숙취해소제도 계산대에 놓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가 검은 비닐봉투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붉어진 귀 끄트머리를 감추고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 씻을게. 그동안 갈아입든 해."

// 이해해줘서 고마워~! 답레는 천천히 줘! 난 잘 쉬었어ㅎㅎ 벌써 주말이 끝났네ㅠㅠ 너참치도 좋은 주말 보냈니?

307 이름 없음 (A6MHIJpz1w)

2021-03-15 (모두 수고..) 09:43:03

안녕하심까~ 배달 왔습니다. 어, 그러니까...샐러맨더 아보카도 피자 시키셨죠? (검은 코딩이 되어있는 바이크 헬멧을 쓰고 있는 라이더 뒷편엔 배달앱 공식 마크가 붙어있다. 또한 자동소총과 권총 역시 등에 맨 채. 크리쳐들에게 점령되어 붕괴된 지 얼마 되지않은 서울에서 정말로 배달앱이 작동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지만, 저 배달원은 당신의 집문을 두드리고 있다.)

308 이름 없음 (Zs24hFKrRc)

2021-03-15 (모두 수고..) 16:44:55

>>305
(키 크고 육중한 로봇은 당신이 숨을 고르는 동안 침묵한다. 그리고 내부의 특정 매개변수 몇 가지를 재설정한다.)

(그러나 당신이 건넨 말에, 로봇의 뉴로옵틱 노드의 불빛이 깜빡이더니, 로봇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부위-가 가로로 흔들린다. 명백한 부정의 의사다.)

요청 거부됨: 로봇의 3원칙에 어긋나는 요청입니다. 로봇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만, 또한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지킬 의무도 존재합니다. 이 개체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끌 이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여.

(표현은 엄숙하고 기계적이나, 그것이 왜인지 나중에 부모의 입에서 부모가 죽거든~ 으로 시작하는 말을 들은 자식의 불안섞인 타박과 비슷한 맥락으로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요청 확인됨: 가용 이동수단 코모도 RV7 차량과 동기화합니다. 차고 주변에서 물러서 주십시오.

(위이잉, 하고 벽 없는 개방형 차고에 주차되어 있던 구식 해치백 차량의 전기엔진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난다. 충전 도크에서 빠져나온 차는 천천히 마당을 굴러 당신과 로봇의 앞에 멈춰섰다. 로봇은 익숙한 동작이라는 듯 당신에게 다가왔다.)

차량 탑승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조수석에 탑승하시겠습니까, 후방 좌석에 탑승하시겠습니까?

309 이름 없음 (9BTcH.JxlA)

2021-03-15 (모두 수고..) 19:22:57

>>308

(여자는 고개를 젓는 당신을 침묵하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까. 이곳은 수많은 기계와 로봇들의 무덤이며, 여자는 파손되어 죽어가는 그 마지막 모습들을 지켜봐왔다는 걸. 당신마저 그렇게 되어버릴까봐 여자는 두려웠다. 그러나 여자는 말 대신 팔을 뻗어 당신과 대비되는 작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당신의 손 부위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 불안하게 만들어버렸네. 응, 나는 여기 있으니까. (안드로이드에게 불안하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광경은 이상해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조금이라도 불안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장난스레 웃었다.) 맞아, 우리 로버트는 완전 강하고 멋있지! 그래서 나는 안심이야. (그래도 당신은 안드로이드. 그러니 서로의 수명의 차이로 인해서라도 언젠가는 분명 여자가 없어도 살아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당신은 지금도 자신이 이끌어주지 않아도 잘하겠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조금 물러나 당신이 불러온 차가 앞에 멈춰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가온 당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조수석으로 부탁해, 로버트. (오랜만의 나들이에 당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기대감 어린 미소로 물들었다.)

310 이름 없음 (BSICVv1CoM)

2021-03-16 (FIRE!) 12:05:40

우거진 숲 속 동굴 안, 불이 켜진 양초들이 원 모양을 그리며 늘어서 있다. 원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당신을 불러낸 소년이 단정하게 앉아있다. 당신의 기척을 느낀 소년은 입술을 달싹인다.

"멀리서 와 줘서 고마워."

당신은 소년과 산골에서 도시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소년은 당신의 마지막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다. 어두운 계열의 붉은빛 전통복, 아마빛 머리카락에 금안까지. 당신이 소년을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더라? 당신은 십 대일 수도, 이십 대일 수도,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 소년은 당신이 햇수를 세는 동안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양초에 불씨를 옮겨 붙인다.

"앞으로 한 시간 남았어. 끝까지 함께 있어줄래?"

소년은 눈을 조금도 깜빡이지 않는다. 소년을 둘러싼 촛불들과 소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고 있다.

// 텀 느려도 괜찮은 사람만 이어줘

311 이름 없음 (4v3mWe.RPE)

2021-03-16 (FIRE!) 23:40:39

>>306
속옷을 입지 않은 채로 바지를 입어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 손에는 당신의 바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네가 준 티셔츠를 최대한 밑으로 끌어내린 채로 나왔다. 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나가버리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 하나만큼은 너를 닮았다. 그러니까. 내가 알던 너의 모습. 네가 보면 곤란해할까 싶어 차라리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똑 똑 떨어지며 침대 위로 작은 동그라미들을 만들었다. 몸이 따스해지자 자연스레 정신이 몽롱해졌다. 깊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당겨 그 위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러다 네가 돌아왔다.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가 날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자 불쑥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걷고 네게로 걸어갔다. 어차피 티셔츠로 가려져 크게 거리낄 것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네게로 두 손을 뻗었다. 네 고개를 나에게로 틀려 했다.

"나 보기 싫어?"

그래서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았다. 일부러 피하지 못할 짓궃은 질문을 던졌다. 부러 표정을 살짝 굳히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머리를 정리하듯 매만져주려 했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해.....😢 평일이 되니까 갑자기 바빠지더라고. 잘 쉬었다니 다행이네! 나도 좋은 주말 보냈어. 그러다 월요일이 되니까 정말 정신이...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너참치는 좋은 평일 보내고 있어? 그랬으면 좋겠는데.

312 이름 없음 (b9VY11uqS6)

2021-03-17 (水) 00:36:13

위태로운 삶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가 밟고 있는 지면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외줄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의 유일한 적장자는 안타깝게도 천성이 유했다. 황좌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황태자라는 지위가 그를 만들었다. 강해지도록.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일찍이 어미를 여의었다. 아비라는 자는 살면서 여지껏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준 역사가 없었다. 발을 내딛는 곳마다 적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몰라 입에 음식 한 조각 넣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웠다. 밤마다 누군가 칼을 들고 몰래 숨어들어오지 않을까 불언감에 시달렸다. 그 안에서 그는 제왕학을 배웠고, 외교술을 배웠으며, 황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 왔다. 아무도 그에게 성군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감히 폭군으로 변모할 만한 용기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나라를 팔아넘긴 암군만 아니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성년이 되었고, 황제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을 때즈음, 그가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를 알 것이라고 믿어."

후원을 밝히는 것은 오로지 희미한 달빛뿐이었다. 호위도 전부 물린 상황이었다. 그는 호위를 줄줄이 매달고 다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발에 채일 만큼 많았고, 호위가 적다는 것은 곧 그만큼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랜 친우가 함께하는 한,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안전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네. 입단속을 한다 해도 완벽할 수는 없겠지. 이미 소문이 퍼지고 있어."

친아비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믿기지 않으리만큼 초연하고 또 처연했다. 한때 강철의 군주라고 불리었던 황제는 병마의 앞에서 맥없으리만치 허무하게 무너졌다. 혹은 그저, 황제 또한 나이가 든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위기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황제가 틈을 보이자 들개 떼는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뜨거운 감자는 역시, 차기 황제에 대한 것이었다. 왕관은 하나뿐이었으나, 갈구하는 사람은 한없이 많았던 탓이다.

"그대는 여태껏 내 곁을 지켜 주었지."

세상을 준대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친우. 그가 안정을 얻는 곳은 오로지 친우의 곁뿐이었다. 무한한 신뢰를 내주어도 배반하지 않고, 하나뿐인 목숨을 내주어도 후회하지 않을, 그에게 유일한 존재. 이제껏 그가 친우에게 입은 은혜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친우에게 진 빚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많았다.

"나는, 황제가 될 것이야."

짐짓 의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손이 떨렸다. 그는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파들거리는 손끝을 감추었다. 실상,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교육은 그의 겉모습을 황좌에 걸맞게 바꾸어 놓았으나, 내면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떠넘기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지금까지 저를 믿어 온 사람들을 배신하는 격이었다. 그 선두에는, 친우가 서 있겠지. 아, 천금보다 귀한 나의 친우여.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가 필요해."

사실은 달리 말하고 싶었다. 황태자라는 이름에 붙잡혀 십수 년 동안이나 제 곁에 묶여 있었으니, 이제라도 자유를 찾으라 하고 싶었다. 이대로 그가 황제가 된다면 친우는 영영 황궁을 떠나지 못할 터였다. 감히 그럴 만한 염치가 제게는 없었다.

"부디 내게, 힘을 빌려 주지 않겠나."

하지만 의지를 벗어난 세 치 혀는 멋대로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힘주어 들고는 애써 친우와 눈을 맞추었다. 최대한 의연한 표정을 짓고, 손톱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을 소매로 감추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황태자여야만 했다. 친우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situplay>1596243042>529랑 situplay>1535113647>685 기반. 참고로 situplay>1596243042>529 올린 본인이야. 배경은 동서양 상관없고, 가능하면 남남 조합이면 좋겠어:>

313 이름 없음 (KTep73S0I6)

2021-03-17 (水) 22:08:15

>>311

우산을 문가에 던져둔 그가 모자를 벗어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겉옷은 대충 의자에 걸쳐두고 젖어있는 상의를 벗었다. 근육질의 상체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빼곡했다.
아까 전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가 일어서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몸을 돌렸다. 얼굴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리는 행동에도 그는 묵묵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여전히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밀조밀한 얼굴과 손발, 화장을 지워내면 말간 아이 같아지는 이목구비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그에 비하면 예전에 비해서는 살이 붙었으나 이곳저곳 흉이 지고 거칠어진 얼굴. 두 눈은 늘 음습한 살기로 들끓었다. 사람을 죽인 날엔 더. 그는 거울 보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이정도로 가느다란 손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 되었다.

"네가 나를 보는 게 싫어."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모습으로 기억되었으면 했는데. 좋은 친구, 어쩌면 그 이상이었던 그때의 모습으로.
이제는 쓰레기같은 범죄자, 혹은 그 이하가 되어버렸지. 너는 그걸 보았고.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그가 시선을 피하며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물 끓여뒀으니 마셔. 씻는다."

그가 욕실로 들어갔다.

// 미안해 하지마~! 나도 느린걸! 정신없이 이틀 보내니 벌써 수요일 밤이네. 바쁜만큼 시간은 잘 가는것 같아. 오늘은 좀 덜 바쁜 하루였을까? 조금만 더 힘내면 주말이야~ 힘내자!

314 이름 없음 (ZzUVXX4Yao)

2021-03-19 (불탄다..!) 22:21:44

>>313
손목이 잡혔다. 조금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에 눈을 크게 떴다. 새삼스레 너와 내 손의 크기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우리는 자랐구나. 더이상 어릴적에 머물러있을 순 없겠네 싶었다. 그 사실이 유달리 서글펐다.

너를 보는 게 싫어? 왜? 네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신 너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대신 고개를 돌려 내 손목에 맞닿아있는 손에 가벼이 입을 맞춰주려 했다. 눈꺼풀 뒤로 동정을 숨겼고 부드러운 입맞춤 속에 애정을 밀어넣었다.

"적어도 난 아니야."

난 기어코 너를 만난 것이 기뻤다. 그것이 너에게는 괴로움일지라도 그러했다. 지금의 네가 어떤 사람인지와 관계없이 단지 네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안심했다. 어쩌면 네게는 미안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고.

"...응, 다녀와."

네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나는 네가 사준 옷을 입고 네가 준 바지를 입었다. 밑단이 끌리는 탓에 몇번이나 접어야 했다. 네가 끓여준 물을 잔에 따라 한참을 쥐고 있었다. 그러다 증기가 사라질 즈음에서야 입을 대었다. 하릴없이 작은 방을 방황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다리를 끌어 모았다. 유난히 추웠다. 비에 맞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오늘은 뒹굴던 온기가 없을 것임을 알아서인지도 모르겠고.

#내일이면 주말!!! 왜 시간이 모래시계처럼 이렇게 사라지는지 모르겠어. 너참치 말마따나 바빠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번주 잘 보냈어?

315 이름 없음 (ayvP0S0/no)

2021-03-21 (내일 월요일) 02:57:08

>>312
친위대장님으로부터 퇴직이 승인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수습 대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 저스틴에게도 부탁도 해두었으니, 이제 황태자 전하께만 알리면 끝난다. 착잡함이 섞인 한숨이 무심코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정이 많이 들었던 친위대 동기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시던 황태자의 상황이 가장 위급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도 염려스러웠다. 그럼에도 영지에서 홀로 투병 중인 부인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목숨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바로 그의 부인이었다. 그러니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한 순간, 시종이 황태자의 호출을 알렸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군. 그는 곧 옷매무새를 다듬고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달빛만이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고, 자주 얼굴을 보았던 호위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라이언은 후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황태자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조용히 들리는 말에, 그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함께 커오다시피 했던, 자신을 친우라 여겨주었고, 자신 역시 항상 곁을 지켰던 황태자가, 황위를 잇기 위하여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러나 그는 그 기대에 응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곧 궁을 떠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라이언은 고개를 조아리고 입을 열었다.

"친위대원으로서, 전하께 이렇게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지에서, 제 부인이 병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곁을 지키러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장님을 통해 황제 폐하께도 사직에 대한 승인을 받았고, 제 친우인 저스틴이 저를 대신하여 전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316 이름 없음 (2iL5MQ3exk)

2021-03-21 (내일 월요일) 12:47:23

>>315 미안하지만 이건 스루할게. >>312에서 맞짝사랑이라는 관계성을 원한다고 분명하게 밝혔고 이미 아내가 있는 캐릭터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어.

317 이름 없음 (ZvDCqFmXng)

2021-03-21 (내일 월요일) 13:12:28

>>314

넌 나를 만난게 기쁘다고? 네가 알던 나는 이미 죽었음에도. 그가 쥐고있던 그녀의 손목으로 대신 입술을 받아냈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거야. 난 이제 더이상 네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마. 그런 모습 보고싶지 않아.

그가 멍하게 샤워기 물을 맞았다. 몸이 언제 이렇게 차갑게 식어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기계적으로 몸을 구석구석 씻어내 혈흔을 지웠다.
혹시라도 역겨운 피냄새가 날까 샴푸는 두 번이나 했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내 습한 몸에 옷을 걸쳐 입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 지낼 때는 욕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팔 티셔츠에 그녀에게 준 것과 똑같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강 털어내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가 방을 한 번 훑어보고 의자에 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의 입술이 파랬다. 따뜻한 물은 다 마신 것 같은데.

"아직 추워?"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시고 비를 맞아 그런가. 감기 걸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방 난방 온도를 확인한 그가 침대 이불을 끌어 그녀를 거의 뒤덮듯이 감싸주었다.

// 안녕~ 어제 못와서 미안해! 벌써 일요일 낮이네~ 주말은 더 빠르게 가는 것 같아... 난 새로운 주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ㅠㅠ 너참치도 일요일 잘 보내고 있니?

318 이름 없음 (ayvP0S0/no)

2021-03-21 (내일 월요일) 23:08:37

>>316 그렇구나, 알겠어.
근데 모 스레의 어느 레스가 나라고 인증하는 건 이 사이트에서 룰 위반 아니니?

319 이름 없음 (2iL5MQ3exk)

2021-03-21 (내일 월요일) 23:12:56

>>318 썰풀이 스레에 올라온 걸 허락없이 가져다 썼다고 오해할까봐+내가 원하는 전개의 방향성을 알리려고 밝힌 거야. 고정나메를 달고 활동하거나 주기적으로 관련 레스를 끌올하면서 이거 나라고 말하고 다닌 게 아니니까 룰 위반은 아니라고 생각해. 만약 추후 문제가 된다면 자유 상극 스레 만든 참치한테 하이드를 요청하면 될 일이고.

320 이름 없음 (ayvP0S0/no)

2021-03-21 (내일 월요일) 23:22:54

>>319 그럼 어쨌든 관련 레스를 링크해서 이거 나라고 말한 건 해당이 되네? 규칙에 예외를 두면 주기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역시 그래야 하는 이유만 있으면 해도 된다는 거니 규칙이 있는 의의가 없지 않을까 싶네. 여기 규칙은 생각보다 물렁물렁하구나. 아무튼 알겠어.

321 이름 없음 (2iL5MQ3exk)

2021-03-21 (내일 월요일) 23:28:13

>>320 그래. 그리고 덧붙이자면 상판 규칙에 불만이나 건의 사항이 있다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토의 스레에 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봐.

322 이름 없음 (ZIk2pNccms)

2021-03-23 (FIRE!) 18:37:10

(풀이 무성한 마당을 내다보는 마루에 한 사내가 서책을 든 채 앉아 있다. 무릎에는 어린아이가 앉아 있다.) 자,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읽어 보지 않으련? 하늘 천, 따 지. (하늘이 맑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오자 앞머리가 흔들리며 사내의 얼굴 절반을 덮은 흉터를 살짝 드러낸다.) 글을 배우고 싶다지 않았어. 아직 일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질린 것이야? (타박하는 어조와 달리 사내의 얼굴에 웃음기가 드리운다.)

323 이름 없음 (7rAR/8fFxs)

2021-03-24 (水) 21:51:25

>>310

대답없이 동굴 안으로 한 걸음을 더 옮기자, 발소리가 고요한 동굴의 벽을 타고 선명하게 울린다. 정말로 몇년이나 지난걸까. 쉽게 기억나지 않는 만큼 분명 짧지는 않을 시간일텐데, 그 시간은 이쪽에게도 눈앞의 소년에게도 딱히 흔적을 남기지 못한 듯 하다. 이대로 한 걸음 더 옮길까, 그러나 잠시 멈춰선 사이 촛불의 빛이 소년의 따뜻한 황갈색 머리칼에 부딪히는 것을 보아버려 걸음이 못박힌다. 그림자에 빛을 흩뿌리는 촛불의 빛도, 아마에 비유되는 소년의 머리칼도, 분명 따뜻한 색일 터인데, 잠시 그 색이 춥다고 느껴버린 것은 단순히 밤의 숲에서 부는 바람이 차갑기 때문인 걸까.

무어라 말을 할까. 또 후회하게 될 것을. 몇년, 혹은 몇십년 전…… 도시로 떠날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딱히 상경의 꿈에 부풀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꿈을 위해 떠난 길도 아니었고. 타지의 꿈을 꾸기에는 피차, 너무 나이를 먹기도 했었다. 잡념의 끝에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결국 곤란한 표정으로 웃는다. 전혀 곤란하지도 않으면서. 처음부터 그 한숨에 섞인 것은 체념이라기보다도, 그저 담담한 납득이었다. 소년의 말대로, 먼 길이었다. 떠나갈 때도, 돌아올 때도. 그러나 결국 지금, 끝끝내 이 곳에 서있고야 마는 것은…….

“그러기 위해 온 거야.”

네가 그걸 바란다고 생각했으니까, 하는 뒷말은 딱히 덧붙이지 않았다. 소년이 짐작해냈어도, 혹은 짐작해내지 못했어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어느쪽이든 남은 한시간을 함께하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밝게 타오르는 금안과 똑바로 마주하자 목덜미에 오싹함이 느껴졌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소년의 목소리에, 간만에 숲의 공기가 술렁거리는 감각을 느꼈다고도. 그러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맺고, 한발 더 앞으로 내딛는다.

// 16일 글이라서 있을지 모르겠네…
// 이쪽도 텀이 느릴 예정. 일부러 이쪽 캐릭터에 대한 묘사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일단 >>310의 묘사 보고 (쌍방)인외의 가능성도 생각해뒀어.
// 생각하고 있는 방향성(관계든 세계관이든 플롯이든)이 있다면 얘기해주기를. 만약 이미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수정도 ok.

324 이름 없음 (74ubYFRSuM)

2021-03-24 (水) 22:34:41

저승의 하루는 무척 바쁘게 흘러갑니다. 아무렴 세상이 변화하고 과학이 발전한대도, 죽음의 영역 만큼은 클래식을 유지해야하니까요. 지문인증 한 번으로 다음생이 정해지는 저세상 따위를 원하는 사람은 없죠. 게다가 사인의 종류에 따라 부서를 나누고, 개개인이 믿는 종교를 고려해 팀을 나누고, 현장직과 내근직을 나누고. 아무튼. 저승도 이승만큼이나 힘들고 바쁘다는 이야기입니다.

*

—한 차사야, 오늘 사고 하나 크게 난다더라. 신입 몇 명 붙여줄테니까 명부 보고 미리 대기 좀 하고 있어라.

" 나는 인명사고 담당도 아닌데… "

검은 갓을 눌러쓴 남자가 제 입술을 잘근이며 중얼였다. 차사 경력이 겨우 오십 년을 넘긴 남자가 짬밥 삼백 년 상사의 말에 개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할 수 없이 다크서클 가득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어올리며 명부를 받아왔는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록 이 불합리함이 사무쳐올라 울화통이 터지는 것이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툭툭 짧게 말을 뱉어보지만 청자래야 저밖에 없다. 빨리 연차를 쌓아서 승진하는 수 밖에. 이승에서 오십년이면 생의 절반이나 산 셈인데, 왜 저승에서는 핏덩이 신입의 취급을 받는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자가 피곤한 기색으로 명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열 둘. 총 망자는 열 둘. 인간들의 이름이 정갈히 적힌 명부를 건조한 눈길로 읽어내리며 그가 셈을 센다. 뭐 그리 큰 사고도 아니네. 참 정 없다 느껴질 말이긴 하다만, 한 번에 몇 백 몇 천이 죽어나가는 참사를 겪어온 그들에게 십자리대 숫자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님을 고려해주길 바란다.

" 사고 발생 장소는 송화 오피스텔, 화재입니다. 금일 망자는 총 열 둘이고, 일주일 내로 총 여섯이 추가될 예정인데… 이건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그리 큰 사고는 아니니까 빨리빨리 현장 정리하고 망자 인도할 수 있도록 합시다. "

남자가 검은 갓을 눌러쓰며 입을 열었다. 남자를 제외한 신입 차사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남자가 갓끈을 묶고 삐져나온 잿빛 머리칼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애송이 티가 났으려나?

*

푸른 하늘 위로 시커먼 재가 흩날린다.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뒤섞인 지상과 잿더미 사이로 시퍼런 눈을 뜨고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공 사이에는 생명이 죽어가는 정적만이 넘실댔다. —슬슬 시작하자.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남자였다. 나머지 신입들은 묘한 감정이 섞인 눈으로 현장을 내려보다,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각자의 명부를 받아든 차사들이 건물 안으로 녹아들듯 사라지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푹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내딛었다. 투명한 공중에서 계단을 밟아내리듯 걸음을 내딛던 남자는 텁텁한 아스팔트 위로 두 발을 모았고, 다시 한 번 명부를 읽어내리는 사이 신입들이 두어명의 혼을 데리고서 오피스텔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여기 한 줄로 모셔두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남자는 항상 이 순간의 침묵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 송연주씨, 김용석씨, … "

남자가 하나하나 망자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이름을 읽어내렸다. 마치 선생이 반 아이들의 출석을 읊조리는 모습 같았다. 어린 학생들의 생기 따위는 찾을 수 없었지만.

" …어? "

남자가 까딱이던 손가락을 멈추며 말끝을 흐렸다. 가장 마지막줄에 선, 한 인간 때문이었다. …열 셋?

" 이 분 누가 데려왔어. "

남자가 명부를 접으며 신입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여느때처럼 건조한 얼굴이었다.

" 이 사람은 명부에 없는데… "

야, 이거 큰일 났네. 남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며 중얼였다.

# 대충 생각하고 있던 건... 자살시도를 했는데 우연찮게 오피스텔에 화재가 나버려 사인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가늠할 수 없게된 변수 망자와 떠나는 저승여행... (?) 정도 이지만 자유롭게 이어줘도 ok

325 이름 없음 (Q8dIIwMBBA)

2021-03-25 (거의 끝나감) 10:13:31

>>324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지금 여기 이렇게 줄 서 있는 거겠지.

송화 오피스텔에 살고있던 그녀는 자살시도를 했으며, 실패하면 어쩌지 했던 조그마한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누가 봐도 검은 갓을 쓰고있는 저승사자들로 보이는 자들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망자들로 보이는 줄을 따라나왔다. 그래, 여기까진 완벽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길동무들을 원한 것은 절대 아니었고, 명부에 적힌 이름들을 읽어내려가던 저승사자가 드디어 그녀의 차례에 다다라서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명부에 없다'니.

" …그럴리가. "

그래, 그럴리가 없다. 여자는 분명히 죽었다. 그녀는 죽어갈 때의 감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물이 가득 들어찬 욕조 안에서 붉은 손목과 팔목을 흐려지는 정신으로 멍하니 바라보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만큼 붉은 불길이 넘실거리며 타이밍 좋게 들이닥치던 것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 붉디붉었던 색깔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죽음의 색깔은 저것이구나. 그것이 그녀의 아마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명부에 없다니?

" 저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명부에 없다니… 누락된 것이 아닌가요? "

이대로면 저승에 갈 수 없다. 다시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여자는 조금은 초조하고 절박한 표정으로 잿빛 머리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지만 명부에도 없고 사인조차 알 수 없는 이 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계속 애원하듯 말을 걸었다.

" 제발 다시 한 번만 확인해주세요. 저의 이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있어야 해요… "

# 설정에 맞춰서 이승을 떠나고 싶어하는 여자로 자유롭게 이어봤어~

326 이름 없음 (6qvB8NEhYU)

2021-03-26 (불탄다..!) 01:46:56

>>322

(사내의 무릎에 앉아있던 아이가 지루한 듯 몸을 뒤챈다. 시선은 이미 책을 떠나 마당을 팔랑팔랑 한가롭게 가로지르는 노랑나비를 향하고 있다.) 꼬부랑하니 하나도 재미 없습니다. (아이가 입술을 비죽이며 습관처럼 사내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스승님은 어째 이런 걸 매일 들여다 봐요. 나는 바둑이랑 노는 게 열 번은 더 재밌는데.

327 이름 없음 (XuINJlCOPw)

2021-03-26 (불탄다..!) 10:06:57

(읽고있던 책을 덮고,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져있는 검은 우주에 온갖 별들의 색채가 흩뿌려져있다. 그러다 옆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열차 통로에서 빈 자리를 찾는 듯한 당신을 발견했다.) 자리가 필요한 거라면 옆자리에 앉으셔도 괜찮아요.

328 이름 없음 (kkF5MFbhWU)

2021-03-26 (불탄다..!) 11:08:11

>>326

(사내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한 번 깨치고 나면 이것도 바둑이 못잖게 재밌단다. 그러고 보니, 바둑이에게 몰래 간식을 가져다주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더구나. 이러다간 살이 너무 쪄서 굴러다니게 생기지 않았어. (아이를 따라 노랑나비를 눈으로 좇던 사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 오늘 이 장을 다 외운다 하면 바둑이와 뒷산으로 소풍을 다녀오려무나. 내 특별히 맛있는 당과도 내어 주마. (아이와 강아지 둘만 보내도 괜찮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잠시 사내의 얼굴에 스치지만, 아마도 별 일 없을 것이다. 그리 높은 산도 아니었고, 매일같이 드나들던 곳이니 뒷산은 이미 아이의 손바닥 안일 터였다.)

329 이름 없음 (6qvB8NEhYU)

2021-03-26 (불탄다..!) 19:02:36

>>328

(사내의 다정한 손길이 익숙한 듯 히히 웃던 아이가 사내의 말에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어찌 아셨어요? 정말 우리 스승님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아이가 이어진 사내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사내를 본다. 당과는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는 간식이었기 때문이다.) 참말이지요? 약속하신 겁니다. (아이가 아까와는 달리 눈을 빛내며 서책을 들여다 본다. 아이는 영민하여 무엇이든 습득이 빨랐다. 동기부여가 되자 금세 사내가 말한 부분을 외워냈다.) 스승님, 스승님. 저 다 외웠습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330 이름 없음 (kkF5MFbhWU)

2021-03-26 (불탄다..!) 19:23:54

>>329

(사내는 검지로 아이의 콧잔등을 가볍게 톡 두드린다.) 그럼 매일같이 부엌에 드나드는 것을 참말로 모를 줄 알았어? 바둑이가 배를 곯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는 간식도 적당히 주거라. 그리 내어주다간 버릇이 잘못 들겠어. (당과 소리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보며 사내는 미소짓는다.) 그래, 참말이다. 대신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지 않게 조심하려무나. (언제 한눈을 팔았냐는 듯 배움이 빠른 아이가 못내 기특하다. 사내는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어 준다.) 잘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쓸 수도 있나 보자꾸나. (사내는 무릎에 앉혀 놓은 아이를 안아올린 뒤 마당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쥐어 준다.) 우선 하늘 천 자부터 써보지 않으련?

331 이름 없음 (6qvB8NEhYU)

2021-03-26 (불탄다..!) 22:07:32

>>330

(아이가 사내의 손이 닿은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맑게 웃는다.) 바둑이가 맨날 눈을 반짝반짝하게 쳐다봐서 그랬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당과도 적당히 먹을게요. (아이는 사내가 자신을 크게 혼내지 않을 것을 안다. 아이는 그의 태도에서 보호와 안정을 느낀다. 번쩍 들어올려짐에도 까르륵 웃고 마는 것이 그렇다.) 스승님, 이 글자는 사람이 꼭 팔을 이렇게 벌리고 하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팔을 펼치며 조잘거린다. 아직 글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형태이나 얼추 비슷하게 그려낸다.)

332 이름 없음 (kkF5MFbhWU)

2021-03-26 (불탄다..!) 22:51:01

>>331

그래, 착하구나. (사내는 아이를 한번 꼭 안아준다. 아이는 사내에게 보물이나 다름없다.) 네 말이 맞다. 하늘을 보는 모습이 꼭, 엊그제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며 밤새 고개를 내리질 않던 네 모습 같지 않아? (며칠 전 별똥별을 구경할 때의 이야기다. 그날 둘은 날이 새도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하는구나. 이대로만 하면 한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소풍을 나갈 수 있겠어. (그는 소년을 자랑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본다.)

333 이름 없음 (6uGG6pHZJo)

2021-03-27 (파란날) 00:24:44

>>317

너는 결국 피했다. 안다, 우리가 많이 달라졌음을. 너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냄새를 안다. 너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의 빛나던 우리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여즉 너는 나에게 너일 뿐이었다. 바뀔 것은 없었다. 아니, 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들에 비해 너의 안위가 중요했을 뿐이다. 너가 어떻게 변했든 간에 너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위안받을 정도로.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나는 너를 찾기 위해서, 그 모든 시간을 헤매었다. 지금 나는 너를 찾았다. 그리고 너는 너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는 무엇을 찾아다녀야 하나. 몸을 웅크렸다.

너의 말에서야 입술을 매만져보았다. 차게 식어있었다. 네가 감싸주는 이불을 고스란히 받았다. 눈을 내리떴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나, 추워."

물이 가득 담긴 잔이 찰랑거렸다. 목이 메였다. 아프면 서럽다더니, 지금이 그랬다. 한 순간에 물이 울컥 흘러넘쳤다.

"나 좀 안아줘, / /..."

후회할 일일까? 이런 식으로 감정에 휘둘려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빛이 꺼진 푸른 눈에 물기가 고였다. 투정이다. 나도 안다. 이런 식으로 어리게 굴어서 너에게도, 나에게도 좋을 것은 하나 없었다. 다그치는 이성과는 별개로 감정이 넘실거렸다. 목을 옥죄였다. 아니야, 이래서는 안된다는 거 너 자신도 알잖아. 숨이 막히는 기분에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었다. 물이 차올랐다. 아, 또 시작이다. 약, 내 약이 어디있더라. 떨리는 손길로 주머니가 있었던 곳을 매만지다 뒤늗게서야 옷을 벗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다 이야기했다.

"....미안해, 어리광부려서.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거기에 벗어둔 내 자켓 주머니에 보면 약통 하나 있을 텐데, 좀 건네줄래?"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목소리가 한 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놀랍도록 차분한 어조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 하던 얼굴에 닳아빠진 듯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였다.

#일요일에는...월요일을 대비해 밀린 과제를 하고 있었지....(과거회상 톤) 나야말로 매번 늦어서 미안해. 거의 일주일만이네ㅋㅋ큐ㅜㅠㅜㅠㅠㅠ 나부터가 많이 느린 편이라서 텀으로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늦었지만 이번주 잘 지냈어?
#그리고 / /부분은 너참치 캐 이름을 부른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334 이름 없음 (CnS.wTeqdQ)

2021-03-27 (파란날) 11:50:16

>>332 참치야 항상 빠른 답레 고마워! 미안한데 내가 주말에 어디 갈일이 생겨서 답레 월요일에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고맙고 미안해 ㅠㅠ

335 이름 없음 (hODb6CFBrU)

2021-03-27 (파란날) 12:43:57

>>334 응응 괜찮아! 미리 말해줘서 고맙고 주말 잘 보내길 바라:D

336 이름 없음 (359/FTTfI2)

2021-03-28 (내일 월요일) 01:44:31

죽어도 선배라고 안불러주더니, 죽을 거 같으니까 선배라고 불러주는거봐. 너도 진짜 지독하다. (누워있는 채로 시선만 내려 당신을 바라본다.) 그렇게 심각해? 신경 모듈이 맛이 갔나봐. 진단 좀 해줘.

337 이름 없음 (61yJffnu3k)

2021-03-28 (내일 월요일) 03:10:12

>>336 ……지금 나온 진단 보셨으면 신경 모듈이 맛이 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시게 될 걸요. 만약 그대로 기능이 살아있었으면 제가 그렇게 부르기도 전에 쇼크사하셨을 거에요. 하…… (짜증의 탈을 쓴 깊은 한숨 사이에는 긴장 끝의 짙은 피곤에 더불어 여전한 불안이 조금 묻어난다) 가지고 있던 메디킷으로 응급처치만 한 거에요. 당장 안 죽는 거지, 그냥 두면 죽습니다? 군의관으로서의 공식 진단이고, 지원 불렀으니까, 정신 좀 잡고 계세요. 알았어요, '선배'?

338 이름 없음 (BJ3fGs0E2c)

2021-03-28 (내일 월요일) 23:34:59

>>325

" 그래, 그렇지. 당신은 죽은 게 확실하지. "

남자가 제 미간을 문지르며 중얼였다.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옮기는 들것 위에는 여자의 몸뚱이가 온기를 잃고서 축 늘어져 있을테다. 사실 이런 실수는 신입 저승사자들 사이에서 커피를 엎지르는 것 만큼이나 빈번히 일어난다. 병실을 착각하고 잘못 들어가 엉뚱한 사람의 혼을 걷어온다거나, 너무 많은 망자를 관리하느라 누구 하나를 덤태기로 데려온다거나. 아니면 다른 부서에서 처리해야할 망자를 실수로 데려온다거나…

" 일단, 당신 이름부터 압시다. "

남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있는 신입 차사들에게 손짓을 하며 운을 뗐다. 물귀신 같은 얼굴 하고 있지 말고, 어서 진짜 망자들이나 데려가 처리하라는 의미였다. 이런 실수는 잦다. 물론 인간의 생명줄과 관련된 일이니 실수 하나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긴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이 망자는 죽기를 희망하는 듯 하니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보통 갑작스레 죽음을 직면하게된 순간,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은, " 꺼져 개X끼야! 난 안 죽어! " 인데 말이지.

" 작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뭐, 가끔 있는 일이죠. "

사실 일어나서는 안될 착오이지만.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 일단 우리쪽 명부에는 선생님의 성함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 신입들 중 하나가 실수를 저질렀거나, 아. 이런 경우는 육신이 소멸되기 전에 혼을 넣어주기만 하면 쉽게 해결되는 케이스입니다. 게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뒤 엄청난 천운을 얻어가는 건 보너스죠. 일종의 보상이랄까… "

남자는 보험판매원이 된 듯한 어조로 유수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고객님의 불만을 어떻게든 완화시키고자하는 말단 사원의 몸부림과 같았지만. 남자가 힐긋 여자를 훑어보았다. 아니라면 말이죠…

" 혹은, 혼선이 일어난겁니다. 정말 아주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요. 사인을 알 수 없게 되는. 참 곤란한 경우입니다. 아, 물론 선생님의 잘못은 아니고. "

남자가 뒷목을 긁적였다. 사실 남자도, 이러한 케이스를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얼핏 교육 중에 이러한 경우가 있었는데— 하며 흘려들은 것이 고작이었건만. 남자가 혼잡스러운 인간들 사이로 손가락을 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후자의 경우라면 선생님이 다시 저 육신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거 같길래. "

사실 우리쪽에서는 잠자코 다시 이승 사람이 되어주는 편이 편하지만. 당신들에게는 놀라울 이야기지만, 저승사자들도 업무상 실수로 인해 종종 고소가 걸리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판결은 사자에게 불리하게, 그리고 가혹하게 내려진다. 당연하지. 인간의 목숨줄이 달린 중대한 사명을 가진 직업인데.

" 아무튼 요점은…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이 '죽음'을 확신하시는 걸 보니 전자의 경우일 확률은 없어보이지만, 이게 또 모를 일이라서요. 그렇다고 일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명부를 뒤지고 주마등 보관소를 들리고 하면… 시간이 없을 겁니다. "

화장이 됐던 매장이 됐던, 육신이 사라진 상태일테지요. 남자가 나긋이 덧붙였다. 겉으로야 태평해보이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겠지.

#늦어서 미안해 ㅜㅜ

339 이름 없음 (p4reMLVe4I)

2021-03-29 (모두 수고..) 14:19:19

ㄱㅅ

340 이름 없음 (ZrKo0XTW5s)

2021-03-30 (FIRE!) 21:23:16

>>332

(사내의 말에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꼭 그렇습니다, 스승님! 이 글자를 만든 사람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요? (며칠 전에는 별똥별이 잔뜩 나렸더란다. 소원 하나를 빌면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아이는 빌고 싶은 소원이 너무 많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네, 오늘은 바둑이랑 산딸기를 따 올게요! 이따가 같이 먹어요, 스승님. (아이가 활짝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다가 다시 의욕 넘치는 얼굴로 글자를 바라본다. 나뭇가지로 글자를 마당에 그려보며 익히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 어제 온다 해놓고 못 와서 미안해 ㅠㅠ

341 이름 없음 (eaAZ4xCu3I)

2021-03-30 (FIRE!) 21:46:12

>>340

글쎄나 말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소원이 그리도 많길래 밤새도록 고개가 내려오질 않아? (사내는 밤하늘을 낮처럼 수놓던 별똥별을 떠올린다. 사내 역시, 소원을 하나 빌었더랬다. 비록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그래, 마침 산딸기가 맛있을 때로구나. 짐승 먹을 몫도 있어야 하니 너무 많이 따 오지는 말고. (사내는 마당에 글자를 써내는 아이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간간히 틀린 부분을 고쳐 준다. 그러기를 반 각 가량 지났을 즈음, 사내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만하면 되었어. 아주 잘 했다. 이대로라면 천자문도 금방 떼겠구나.

#괜찮아! :D

342 이름 없음 (ZrKo0XTW5s)

2021-03-30 (FIRE!) 22:35:08

>>341

앗, 그건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말씀 못해드리겠습니다. (뭔가 말하려던 아이가 입을 합 틀어막았다. 입 밖으로 내면 소원의 힘이 약해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는 하나하나가 중한 소원이었다.) 네에, 저랑 스승님이랑 바둑이 먹을 만큼만 따올게요. (아이는 사내에게 배려와 공존을 배웠다. 가장 귀한 가르침일 터였다. 당과 때문에 시작한 공부였으나 어느새 집중해 제법 열의를 가지고 공부하다보니 아이는 해당 장을 금세 외워냈다. 사내의 말에 아이의 얼굴이 환해진다.) 같이 공부하니 재미있습니다, 스승님. 내일은 다음 장 공부할래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다다다 외친 아이가 당과와 소풍에 대한 들뜸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 이해해줘서 고마워!

343 이름 없음 (eaAZ4xCu3I)

2021-03-30 (FIRE!) 22:57:12

>>342

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러는지 궁금하구나. (짐짓 태연하게 말하지만, 사내는 내심 속으로 서운함을 느낀다. 그런가,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벌써 제게 비밀을 만들기 시작할 나이가 되어버린 것인가.) 그래, 장하다. 혹여 넘어져 다치지라도 않게 조심하거라. (괜찮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내의 얼굴에 걱정이 서린다.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혹은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또는 도적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아니, 괜찮을 것이다. 아이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른스럽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재미있다니 다행이구나. 내일은 두 장을 외워 보자꾸나. (방으로 도도도 뛰어들어가는 아이가 못내 사랑스럽다. 사내는 약속한 당과를 꺼내 오려다 멈칫한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곧 당과를 들고 온 사내는 아이가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말한다.) 중요한 걸 하나 잊었더구나.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이름 석 자 정도는 쓸 줄 알아야지. 네 이름은 어떻게 쓸 것 같으니?

344 이름 없음 (ZrKo0XTW5s)

2021-03-30 (FIRE!) 23:16:19

>>343

다 이루어지면 알려 드리지요.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산딸기가 많이 열리게 해주세요, 올 봄엔 토끼를 보게 해주세요, 스승님과 바둑이와 천년만년 행복하게 지내게 해주세요, ... , 스승님은 저를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몇 개의 소원을 빌든 아이의 소원은 거기서 끝났다.) 걱정 마셔요. 조심 조심 걷겠습니다. (아이가 사내의 걱정에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장을 공부한다면 사내와 더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이가 당과를 보고 눈을 빛냈다가 이어진 사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권, 홍, 도... 어라, 두 글자는 오늘 배운 글자에 없습니다. 홍은 오늘 배운 홍인가요? (배운 것을 되짚으며 자신만만해졌던 아이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345 이름 없음 (eaAZ4xCu3I)

2021-03-30 (FIRE!) 23:24:23

>>344
#혹시 이름 뜻으로 생각해둔 한자가 있어? 없으면 내가 직접 지어도 괜찮을까?

346 이름 없음 (ZrKo0XTW5s)

2021-03-30 (FIRE!) 23:26:04

>>345
# 응응 뜻은 스승님이 지어주면 고맙겠어!

347 이름 없음 (eaAZ4xCu3I)

2021-03-30 (FIRE!) 23:48:58

>>344

그래, 그때가 되면 꼭 알려주는 것이야. (사내는 어젯밤, 염치없게도 소원을 여럿 빌었더랬다. 그중에는 아이가 저 천진난만한 웃음을 평생 잃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 또한 있었다. 부디, 그 소원만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생각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세 울상을 짓는 아이에게 사내는 웃으며 우선 당과를 하나 물려 준다.) 넓을 홍 자를 말하는 것이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비록 오늘 배운 글자에는 없지만 나머지 또한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지 않겠어. 어디 보자... (사내는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마당에 세 글자를 써내린다. 權, 洪, 道.) 첫째는 권세 권 자, 그리고 마지막은 길 도 자란다. 평탄하고 너른 길만 걸으라는 뜻이지. 어때, 마음에 들어? (이름에는 혼이 담긴다고 한다. 과연 사내에게, 아이의 이름까지 멋대로 정해 줄 자격이 있는가. 사내는 죄책감을 애써 떨쳐내었다.)

348 이름 없음 (PXFLKK0qFM)

2021-03-31 (水) 00:01:15

>>347
# 내가 오늘은 이만 자러가야 할 것 같네 ㅠㅠ 오늘도 고마웠어 내일 이어올게 안녕~!

349 이름 없음 (yJEuU87bjU)

2021-03-31 (水) 00:04:40

>>348
#응응 잘자~!

350 이름 없음 (f.3itjNp.6)

2021-03-32 (거의 끝나감) 02:29:46

어린시절의 기억은 좋은 것 반, 나쁜 것 반이다. 그중 좋은 기억에는 늘 완이 같이 있었다. 나는 또래 애들에 비해 체구가 작았고, 완은 다른 애들보다 한 뼘은 컸다. 조금 작다는 이유로 자주 놀림의 대상이 되던 나를 완은 곧잘 구해줬고 나는 그 애를 언니처럼 따라다녔다. 학교에서도, 학교가 끝난 뒤에도 완과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날의 좋은 시절하면 가장 지배적인 완과의 추억은 내가 전학을 가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을까. 나는 평균 신장에 가까워졌고 어느덧 성인이 됐다. 부모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셨고 나는 직장이 있는 곳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긴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게 되었는데… 완이 마중을 나온다는 게 아닌가! 아주 오랜만에 완을 만나게 될 생각에 나는 조금 들뜨고 말았다. 옛 친구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 예쁜 팔찌까지 골라 본가에 가는 기차에 올랐다. 완은 역에 마중을 나와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왜 역 앞에 내 또래 여자는 없고 완을 닮은 남자만 있는 건지……. 누굴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완과 닮기는 정말 닮았다. …오빠인가?

# 여자앤줄 알고 있던 옛날 친구가 남자애였다는 설정 ^0^)/

351 이름 없음 (otMihWOAy6)

2021-03-32 (거의 끝나감) 04:47:59

>>350

당신의 기억에는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늘어뜨린 말수 적은 가무잡잡한 소녀가 있었다. 당신을 놀려먹던 동네 개구쟁이들과 담판을 짓고, 늘어진 그림자가 길고도 흐릿하게 자오선을 향해 쭈욱 기울어 쏟아지던, 유별나게도 노을이 아름다웠던 그 어느 여름 저녁이라던가, 아침에 눈이 한가득 내린 날 문득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야기라도 생각난 건지 뒷문으로 돌아들어와서 마당에 뽀얗게 쌓인 눈을 당신에게 보여주던 그 겨울날 아침과 같은 순간들에는 꼭 그녀가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 소녀와, 간이역 앞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서 있는 저 청년은 닮은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가무잡잡한 피부, 큰 입, 조금 끊긴 왼눈썹, 눈동자. 그 시절과 비슷한, 아니 그 시절보다도 격차가 더 벌어진 듯한 눈높이. 치렁치렁했던 머리카락은 단정한 쉼표머리로 정리되어 있었을지언정, 짝다리를 짚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당신의 인기척을 느끼고 당신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그 모습은 분명히 그때 겨울과 같이 당신을 기다릴 때 보여주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코트 차림의 청년이 완이라고 말해주는 피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다. 언젠가 미친개에게서 당신을 구해주었던 그 날 크게 찢어진 귓바퀴를 꿰멘 자국이 그 귀에 너무도 선명히 남아있지 않은가.

"──."

훨씬 낮아지고 무거워진 목소리였지만, 그녀-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조심스레 불렀다.

352 이름 없음 (qwi9YPjrBQ)

2021-03-32 (거의 끝나감) 08:21:48

>>351

남자는 생김새만 완과 닮은 게 아니라 행동도 닮아있었다. …쌍둥이인가? 다시 한 생각이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쌍둥이라고 해도 행동이나 흉터까지 빼다박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솔직히 당황은 했다. 기억 속의 완은 키가 좀 크고 씩씩한 여자애였는데,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기억보다 훨씬 큰 남자라서.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웃음이 먼저 났다.

“완이구나.”

가방을 얹어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완에게 다가갔다. 완에게 향하는 걸음은 늘 망설임 없이.

“엄청 오랜만이네. 기다리느라 추웠겠다.”

보고 지낸 시절보다 연락이 끊긴 채 지낸 시절이 더 길었는데도 어제 본 사람처럼 말을 붙이게 됐다. 잠깐 귀에 있는 흉터를 지나간 시선은 다시 완에게로 갔다. 나는 또 웃고 말았는데 알게 모르게 미안한 감정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 이어줘서 고마워! 이름은 편한대로 지어 불러도 돼~

353 이름 없음 (otMihWOAy6)

2021-03-32 (거의 끝나감) 08:56:33

>>352

"오랜만이지."

억양에 사투리가 조금 묻어있는 표준말. 말수는 당신이 알던 것보다도 어째 좀 적고, 키는 당신이 기억하던 것보다도 어째 좀 크고, 머리카락은 당신이 기억하던 것보다도 어째 좀 짧지만, 그래도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여전히 완이었다. 당신이 폭 웃으며 옛날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자, 조금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완의 얼굴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러니 좀더 확실히 당신이 기억하던- 길이 든 늑대마냥 담담하게 당신을 바라보곤 하던 그 소녀와 같았다. 비록 지금은 여자라기엔 너무 남자다운 얼굴이 되어 있지만, 그 얼굴 골격에는 당신이 기억하던 절친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어."

무뚝뚝한 대답. 좀더 상냥하게 들리도록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말주변이 없다. 완은 축 처져 있던 코트 주머니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 두 개를 꺼내어선 하나를 당신에게 내밀었다. 꽃샘추위 찬바람에 마시기엔 좋은 온도였다. "...원 플러스 원이더라." 아닌 척하는 변명이 하나 무덤덤하게 따라붙는 버릇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짐은 차에 실을게."

완은 역사 뒤편을 고갯짓해 보인다. 역사로부터 도로로 나가는 모퉁이에 마련된 주차장에 크지 않은 세단 한 대가 멈춰서 있다.

# 여자가 아니었어? 하는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 그렇다니 이름은 최대한 예쁜 걸로 생각해둬야겠다...!!

354 이름 없음 (3zZpQCSwPA)

2021-03-32 (거의 끝나감) 09:08:43

>>338

죽은 게 확실하다는 남자의 말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보아하니 저승사자인 것 같은데 그런 저승사자가 죽은 게 확실하다고 중얼였으니 그게 맞겠지. 그렇겠지.

" '백아라'입니다. "

여자는 덤덤히 대답하였다. 저승사자가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저승에 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제 이름도 밝혔으니 이름만 세 번 불리면 되려나. 여자는 어서 이름이 불려 지금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길 조금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이름을 불러주긴 커녕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는 설명을 친절하게도 자세히 해주기 시작했다.

" …… "

그러니까, 뭐야. 누군지 모를 신입 저승사자가 실수를 해서 내가 죽지도 않았는데 저승에 잘못 왔다는 거? ……결국 나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인가. 남자의 청산유수한 설명을 듣는 여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이상 남자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여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여자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앞으로 얼마나 더 시도를 해야 저승에 올 수 있을지 가늠하며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여자의 고개는 남자의 보충설명에 다시 위로 들어졌다.

" …정말입니까? "

사인을 알 수 없어 일어난 혼선이라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받듯 남자에게 묻는 여자의 눈빛에 다시 기대가 솟아났다. 여자는 결코 다시 이승 사람이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결코.

" 그래서,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저는 육신이든 혼이든 전부 관심도 없고 오로지 '죽음'만 원하니 일의 진상은 알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

어차피 화재사 아니면 자살이겠지. 쩔쩔매고있는 남자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혼의 소멸이라도 괜찮으니 어서 간절히 죽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괜찮아!

355 이름 없음 (1Uo81UqT3c)

2021-03-32 (거의 끝나감) 10:15:56

>>353

완에게 상처가 생겼던 날 나는 옆에서 엄청나게 울고 있었다. 다친 그애보다 더 서럽게 울어서 어른들은 내가 다친 줄 알았고, 나는 완이 다친 걸 몰라주는 어른들에 서러워 더 펑펑 울었다. 어릴 적의 나는 곧잘 우는 아이였는데 완은 그런 내게 질리지도 않는지 잘만 데리고 다녀줬다.

“그럼 다행이구. 마중 나와줬는데 기다리게까지 하면 너무 미안하잖아.”

완에게는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그건 오래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완이 여자애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큰 충격까진 아니었던 건, 어쨌든 이 애가 완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정한 완.

“와, 내 것도 있네. 잘 마실게.”

받아든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조금 걸으니 주차된 차가 있었다.

“응, 고마워.”

차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꽤 흐렸다. 기온도 낮고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3월에 눈이 오길 바라는 건 좀 이상한가. 완이 운전석에 타는 동안, 나는 선물에 대한 말을 꺼냈다.

“내가 선물로 팔찌 샀는데… 나 사실 너 여자애로 기억하고 있었거든.”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투명한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실팔찌가 나왔다. 파란실에 둥근 팬던트가 달린 형태였다.

“역시 네가 끼기엔 좀 그런가?”

내가 민망하게 웃었다.

# 질문 대신에 양심고백 형태로... 이름은 편하게 생각해줘!

356 이름 없음 (otMihWOAy6)

2021-03-32 (거의 끝나감) 11:11:20

>>355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당시의 완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완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는지도-본인은 극구 부정했지만- 모르겠다. 우는 것만큼이나 웃는 것을 잘하는 당신과 같이 있노라면 색색깔로 눈이 부셨기에. 색색깔의 셀로판지처럼 색채를 띈 당신을 바라보고 있자면 채도낮은 칙칙한 자신의 세상에도 아름다운 색이 입혀지는 것 같았기에, 당신이 완을 따랐던 만큼이나 완도 당신을 따랐다.

"어차피 나도 기껏 귀향했는데 할일이 없던 참이니까."

널 기다리는 게 두근거리고 기대됐어, 같은 말을 솔직하게 덧붙이기에는 그는 여전히 너무도 서투른 사람이었다. 그 대신,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가면으로 말을 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가면마저도 서툴러서 충분히 가리지 못하거나 너무 가려버리기 일쑤였지만.

당신의 짐을 가볍게 들어 트렁크에 넣고도, 완은 당신에게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고야 운전석으로 돌아와 시트에 앉았다. 그러다 당신이 꺼낸 말에, 완은 차 문을 닫다 말고 어안이벙벙한 표정이 되어 당신을 돌아다본다. 어안이벙벙한 표정이라 해봐야 꾹 다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당신에게 고정된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더 치떠지고, 당혹감에 눈썹 한 쪽이 반대쪽보다 아주 약간 더 치켜올라가는 정도의 미미하기 그지없는 변화였지만, 완의 얼굴에서 저 정도 표정이면 대경실색이라 할 만했다.

그러다 그는 잠깐 옛날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날개뼈가 넘어가도록 늘어뜨리거나 뒤통수에서 한 갈래로 묶고 다녔던 옛날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이발소 집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면서 고추 띠뿌라, 하고 외과적 일침을 가하기도 했었지. 완은 회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서툴게 쿡쿡 웃었다. "그랬구나." 하고, 완은 당신이 선물로 꺼낸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당신이 민망하게 웃자, 완은 "아니, 예쁜데 뭐." 하고, 나직이 뇌까린다. 그가 떨어뜨리는 말에 조금 쓸쓸한 기색이 담긴다.

하필이면 당신이 떠나가는 날에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던, 그래서 끝내 당신에게 전해주지 못한 생일 선물이 떠올라버린 탓이다. 밤늦게 찾아갔지만,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이사가 버리고 남은 빈집뿐이었더랬지.

"-나도 뭔가 준비할 걸 그랬나 보다."

# 응! 고심 끝에 내정했으니 이름 부를 만한 대목이 나오면 부르겠다!!

357 이름 없음 (1Uo81UqT3c)

2021-03-32 (거의 끝나감) 13:47:22

>>356

완은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도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주변 남자애들은 죄다 짓궂은 애들뿐이라, 그 애들을 쫓아주는 완은 당연히 여자애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보고 좀 놀랐어. 처음엔 완이 오빠인가? 엄청 닮았네, 했다니까. 근데 자세히 보니까 너더라고.”

완에게 오빠가 있을 리 없으니 얘기를 들은 적 없는 게 당연한데, 혼자 오해해 그 잠깐 동안 서운함까지 느낀 게 좀 웃겨서 웃었다. 완도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아 안심했다.

“그럼 이거 지금 줘도 되는 건가? 자.”

완에게 팔찌를 건넸다. 끼고 다니진 않더라도 어디에 잘 보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좀 더 실용적인 걸 선물하는 편이 좋았을까. 뒤늦게 떠올렸지만 이제부턴 연락도 할 수 있고, 이렇게 오면 또 만날 수 있을 테고.

“여기 와줬잖아. 그거면 됐지.”

완을 보곤 웃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편안하다 느껴지는 곳에 와서 그런 건지, 모처럼 받은 긴 휴가에 마음까지 가벼워진 건지. 사실 이유보다는 여유를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동안 너무 쫓기듯 살았다. 하나를 이뤄내고도 계속 그 다음을 생각하면서 지냈으니까. 일주일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않고 보낼 생각이었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고.

“내려와선 뭐하고 지냈어?”

움직이기 시작한 차에 저절로 창밖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아주 연한 회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눈이라도 올 것 같은 날씨네.” 작게 중얼거렸다.

358 이름 없음 (eoyEmrqvig)

2021-03-32 (거의 끝나감) 16:05:42

"와악!"
"왁!!"
"야-! 야아-!!"

사람이 북적이는 어느 도시의 어느 공원. 환자복의 여자가 지나가는 사람들 앞마다 끼어들며 괴성을 지르는 행동을 반복한다. 긴 머리를 뒤집고 튀어나오거나 양 팔을 들고 달려들기도 하며 제법 소란스럽게 굴지만, 어느 누구도 여자에게 눈길 한끗 주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지나간다.

"아- 아. 오늘도 허탕인가봐. 재미없게."

한참을 반복하던 여자는 해가 질 쯤 되어서야 같은 짓을 관두고 공원 한가운데 놓인 조각상에 걸터앉는다. 관리인이 와서 주의를 줄 법한 행동이지만 역시나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는다. 추욱 쳐진 여자의 어깨 뒤로 붉은 노을이 진다. 길어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조각상의 그림자가 공원에 길게 드리운다. 긴긴 그림자의 끝엔 조각상의 형태만 있을 뿐이다.

"딱 한번만 더 할까? 응. 그래. 딱 한번만 더하자. 한번만 더하고 쉬자-!"

아하하하! 익숙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소리높여 웃어도 단 한명도 여자를 돌아봐주지 않는다. 공허한 울림이 사라질 쯤. 여자는 오늘의 마지막 타겟을 정한다. 이미 해가 다 지고 조금씩 어두워지는 공원을 한번 둘러보자 때마침 지나가는 한 남자가 눈에 든다. 피곤한지 하품을 하는 남자가 조각상 근처로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자는 정성껏 머리를 흩뜨린다. 그리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남자가 조각상 옆을 딱 지나는 순간 그 앞에 거꾸로 확 떨어지며 낮에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왁!!!"

기껏 엉망으로 만든 머리가 죄다 뒤집히긴 했지만 그게 더 놀라게 했을지도 모르니까 상관없다. 여자는 거꾸로 서서 남자의 반응을 살핀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

#유령(?)여자와 귀신이 보이는 남자!
#귀신이 보인다는 전제만 있으면 남자 설정은 이어주는 참치님 맘♥
#찬물 끼얹는 전개만 아니면 오케오케

359 이름 없음 (ktKX0nnxpc)

2021-04-02 (불탄다..!) 16:17:55

>>357

"아예 여자라고 생각했을 줄은 몰랐네." 당신이 꺼낸 의외의 말에 완은 무던하게도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뒤로 그는 내심 문득 만일 그때 자기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더라면, 아니면 당신이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었다면 당신의 기억 속에서 완이 갖는 거리감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완은 쓸데없는 잡념을 이내 접었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을 넘어서도 당신의 웃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것으로 완은 당신과의 만남이 충분히 기뻤다.

"...고마워." 완은 당신이 건네준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계기판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얹어놓았다. 분명, 그의 무표정에는 옅으나마 분명히 기뻐하는 듯한 기색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뭐라 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당신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줄 뿐이었다. 당신에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자기도 안전벨트를 찬 다음에야 완은 페달을 밟으며 차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나도 내려온 지 사흘째라, 뭘 하고 지냈다고 거창하게 말할 건 없어. 그냥 몇 년만에 집밥 먹고 집에서 푹 쉬는 정도..."

그가 조금만 더 말주변이 좋았더라면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넌 얼마나 여기 있을 거야? 뭐 하면서 지내려고? 하는 말들을 꼬치꼬치 이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완의 말주변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당장 당신이 이 자리에서 넌 고향에 왜 내려온 거야? 하고 물어봐도 뭐라 마땅히 대답을 하지 못할 그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의 이야기에 "그러게. 삼월인데." 하고 맞장구쳐 주는 정도였다. 세단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후진으로 주차장을 미끄러져 나가, 2차선 도로로 내려섰다. 고향의 풍경이 창밖에 길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 중간에 말없이 끊겨서 미안해 8ㅁ8!!!

360 이름 없음 (ownWe3fJ7A)

2021-04-02 (불탄다..!) 18:35:25

>>359

“그러게.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네. 내가 눈치가 좀 없었나 봐.”

반응은 덤덤했지만 서운한 마음은 안 들었다. 오히려 상상했던 완의 반응과 비슷했다. 예전부터 완은 그랬다. 그게 내겐 큰 기복없이 일자로 난 길을 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동경하는 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곧잘 일희일비해서, 어떤 때는 꽃이 잔뜩 핀 길을 즐겁게 걷다가도 작은 돌부리 하나에 걸려 넘어진 일에 주저앉아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일으켜 준 건 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받아줘서 나도 고마워.”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웃었다. 팔찌에 완의 시선이 꽤 오래 머물렀다는 것, 평소와 비슷한 얼굴에 엷게나마 기쁨이 앉았다갔다는 것.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와, 좋았겠다. 나도 그러려고 왔거든. 일주일 휴가 받은 거 여기서 실컷 쉬고 놀다가 갈 거야.”

묻지도 않은 계획을 혼자 떠들었다. 이상하게 완은 들어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완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별것도 아닌 얘기에 맞장구쳐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나는 종종 허공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완과 함께 있으면 그런 일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너랑 놀까.”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며 툭 말했다. “네가 놀아준다고 하면.” 짧게 덧붙였다. 날이 흐린 탓인지 기억 속에 있는 것만큼 새파란 바다는 아니었지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게 좋았다.

# 괜찮아! 편하게 진행하자~

361 이름 없음 (o5GglCrQwI)

2021-04-02 (불탄다..!) 19:15:18

>>358

단정한 갈색 머리에 목 부분이 조금 구겨진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한 팔에는 반으로 대충 접은 외투를 걸치고, 다른 손에는 쥐색 서류 가방을 든 채로. 언제나처럼 고단하고 평온한 퇴근길이다.

"왁!!!"
"...!"

툭. 서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다. 화들짝 놀란 것처럼 어깨를 크게 떨었던 남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주섬주섬 가방을 주워 들고서 다시 걸음을 떼어놓는다. 거꾸로 매달린 여자와 애써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는 듯한 오묘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여자를 빙 둘러서 말이다.

여지는, 자신을 지나쳐 간 남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을까? 남자는 아마도 그럴 거라 예상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등을 보이고도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멈칫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몸을 홱! 뒤로 돌리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남자.

"와악!"

짓궂은 그 표정엔 하찮은 복수심이 담겨 있었다. 남자가 손에 든 외투와 가방이 멍청하게 매달려 있다.

362 이름 없음 (o5GglCrQwI)

2021-04-02 (불탄다..!) 19:38:37

>>361
여자는, 자신을 지나쳐 간 남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을까? 남자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등을 보이고도 한 걸음을 더 나아갔을 때, 돌연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몸을 홱! 뒤로 돌리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남자.

#오타가 너무너무 신경 쓰여서...👉👈

363 이름 없음 (ktKX0nnxpc)

2021-04-02 (불탄다..!) 20:32:13

>>360

"나도 내가 여자애로 보인다는 걸 몰랐으니 쌤쌤이라 치자." 한적한 2차선을 가로질러 운전해가면서, 핸들에 손을 얹고 있던 완의 표정에 소소한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아, 지금 생각해보면 니가 나한테 이런저런 머리핀 같은 거 끼워주거나 머리 땋아주고 그랬던 게.." 계집애들이 할 법한 머리핀이나 머리끈도 네가 달아주는 것이기에 싫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곧잘 하고 다녔는데, 그게 그런 거였나. 너와 함께하던 소소한 어린 시절을 되새겨보던 완의 혀끝에 문득 사투리 억양이 조금씩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별말을 다 한다."

운전 중이라는 핑계로 전방에 눈을 두어야만 한다는 게 완에게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말은 퉁명스럽게 나오면서도, 눈의 시선 끝이 문득 추억에 왈칵 잠기는 걸 조금이나마 감출 수는 있었으니까. 당신이 완의 속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이 털어놓은 일정 이야기도 완을 향수에 떠밀었다. 당신은 어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이를 좀더 먹었고 키도 좀더 커졌고 옛날보다 아는 게 좀더 많아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했고, 여전히 과하게 상냥했고, 여전히 감정이 풍부했으며, 여전히 이상한 데서 죽이 잘 맞았다.

"일주일인가."

완의 기억이 도서관이라면, 그곳에는 무심함이라는 가장 냉엄한 사서가 있었다. 그 사서는 기억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고 가장 소중한 추억들만을 엄격하게 골라서는 연감으로 만들어 도서관의 가장 높은 책장에 진열해두곤 했는데, 그 곳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신과의 기억들이었다. 예고되지 않은 이별 이후 세상은 조금 더 삭막해지고 조금 더 을씨년스러웠지만, 당신과 함께 보냈던 그 나날들은 완에게 어떤 신비로운 부적과도 같이 남아있었다.

그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시간, 일주일.

"리."

옛날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지만, 당신을 부르는 착 깔린 그 말투는 옛날과 똑같았다.

"내가 뭐라고 할지 알잖아."

# 사실 완의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볼까 생각하고 있지만 너참치가 작중 배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 조심조심..

364 이름 없음 (90xWxheSaU)

2021-04-02 (불탄다..!) 20:33:34

>>361

오늘은 달랐으면 좋겠다는 여자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하루종일 여자를 무시하고 통과해 가는 사람들과 달리 남자는 여자의 앞에 딱 멈춘다. 비명은 없었지만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고, 어깨가 크게 떨린 걸로 보아 분명 여자의 장난에 놀란 것이 분명하다. 여자가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로 처음이다. 그 사실에 더 놀란 여자가 잠시 가만히 있던 사이 남자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든다. 정확히 여자를 피해 지나쳐가는 행동을 보고 거꾸로 선 채 뒤로 홱 돌았을 때다.

"잠끼야아악!!"

여자가 딱 뒤로 돈 순간 보인 건 남자의 등이 아니라 얼굴이다. 어,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여자가 했던 걸 똑같이 하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고 한술 더 떠 공중에서 떨어진다. 떨어져 공원의 블럭 깔린 바닥에 뒹군다. 그러는데도 남자를 제외한 단 한사람도 여자를 보지 않는다.

"...."

떨어진 이후 여자의 몸은 마치 죽은 듯이 바닥에 늘어져있다. 그림자도 존재감도 없는데 죽은 듯이, 라는 표현은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느낌이다. 미동도 없이 가만히, 가만히 있다가 곧 조금씩 들썩인다. 부들부들. 눈에 보이는 떨림으로 번져갈 쯤 산발머리에 가려진 얼굴로부터 소리까지 나기 시작한다.

"으흐흐흐...흐흫..."
"흐흐흫...흐히히히...힣..."

얼핏 들으면 소름끼치는 울음소리 같이 가는 소리다. 남자의 놀림에 당한 것에 억울해하는건지. 그러나 못 참겠다는 듯이 터져나온 건 눈물이 날 만큼 호쾌한 웃음소리다. 으하, 아하하핳! 하며 시원하게 웃어제끼며 배를 감싸쥔 여자는 조금후에야 웃음을 그치며 몸을 일으킨다. 엉망인 머리를 걷고 남자를 보는가 싶더니, 다시 터진 웃음보에 몸을 들썩이며 소리 사이사이로 뜨문뜨문 말한다.

"누, 누가 귀신한테 그런 장난, 장난을 치냐고! 나, 나 처음 봤어! 아니, 누가, 누가 당했다고, 그걸 똑같이, 표정, 표정 너무 웃기고...!"

제대로 된 말은 대략 이 정도일까. 그렇게나 웃으면 얼굴이 붉어지거나 배가 아픈 등의 증상이 나올만도 한데 여자에겐 그런게 없다. 여자는 질릴 때까지 웃은 뒤에야 좀 진정을 해가며 처음과 별 다를게 없는, 약간 투명하면서도 창백한 얼굴을 들어 남자에게 향한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두 눈엔 재밌는 걸 찾았다는 기색만이 가득하다.

#이걸 이어주다니 사랑합니다 너참치님....!

365 이름 없음 (o5GglCrQwI)

2021-04-02 (불탄다..!) 21:50:23

>>364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근처를 지나던 아이가 제 엄마를 올려보며 남자를 손가락질한다. 마찬가지로 남자의 기행을 목격한 아이의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의 손을 살살 잡아끈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거꾸로 매달렸던 여자가 놀라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나서도 한동안 양 팔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있던 남자는, 여자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내려보며 느리게 자세를 바로 한다.

"자기가 귀신인 건 아는 모양이네."

엉망인 머리를 걷으며 몸을 일으킨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나직이 중얼이며 설핏 미소 짓는다. 그리고 여자의 옆, 조각상 밑판에 털석 주저앉는다. 평평한 옆자리에 가방과 외투를 대강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든 남자는 그것을 제 뺨에 가져다 댄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통화하는 척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어, 응."

꺼져 있는 전화기에 대고 무어라 대답하는 시늉은 누가 들어도 영 어색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겠지. 남자는, 그제야 좀 진정한 듯이 얼굴을 드는 여자와 태연하게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재미있었냐?"

초면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이 튀어나온다. 여자가 제 또래, 혹은 저보다 아래로 보였기 때문일까. 여자의 격한 반응에 내심 뿌듯해하는 남자였다.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말없이 여자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남자에게는 뭉클한 추억이 있더랬다. 이전에도 지금처럼 죽은 사람을 마주한 경험이 있더랬다. 이승에 한이 남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많이 있겠지만, 남자에게 그런 이들 모두가 보이는 것은 아니더랬다. 간혹 지금처럼 우연하고 특별한 무언가가 서로를 연결하는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하고 있더랬다. 정을 붙이자면 금세 떠나가는 인연에 매번 서글퍼하는 남자였지만,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순박한 성격 탓이더랬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해 👉👈

366 이름 없음 (.zTAF81GfI)

2021-04-02 (불탄다..!) 22:07:18

왁! 뭐야, 이거. 인간? (이마에 나있는 새하얀 뿔 2개, 그리고 야생 짐승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어도 아무리보아도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이가 당신을 당혹스런 눈초리로 흘겨보고 있다.) 깜짝 놀랐네...어쩌다 여기까지 온거야. 여긴 요괴들의 야시장인데.

367 이름 없음 (8k8Lu7qGlk)

2021-04-02 (불탄다..!) 22:15:55

>>366

(태연자약하게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있던 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지만, 감긴 눈은 뜨이지 않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장님의 그것이다.) 송구합니다. 길을 잃어 잘못된 곳으로 들어온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기묘하리만치 평온하다.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더듬 지팡이를 거머쥐는 자태 또한 태평하기 그지없다.) 괜찮으시다면, 나가는 길까지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368 이름 없음 (.zTAF81GfI)

2021-04-02 (불탄다..!) 22:23:07

>>367
(앞이 안보이는 인간인가. 확실히 인간으로 따진다면 일부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찾아오는 편이 쉽다고 들었지만, 어지간히 운도 없는 인간이네.) 듣긴 들은거야? 요괴들의 야시장이면, 난 뭐겠어.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제 뿔을 만지작거린다.) 가끔 너처럼 잘못 흘러들어오는 인간이 있다곤 들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네. 눈이 안보이는 거라면 잡아먹히기 딱 좋겠어. (살짝 겁을 준다.)

369 이름 없음 (8k8Lu7qGlk)

2021-04-02 (불탄다..!) 22:40:23

>>368

(물론, 당신이 누구인지 짐작은 간다. 요괴들의 시장에 있을 존재는 하나뿐이리라.) 물론 알지요. 친절한 요괴 나으리 아니십니까. (겁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되려 슬쩍 웃음짓는다.) 저런, 이 비루한 몸뚱이를 잡숴 봤자 별 맛도 없을 텐데요. 그보다는 차라리 이 지팡이가 더 맛있겠습니다그려. (손에 쥔 지팡이를 흔들어 보인다. 요괴들의 세상에 들어온 상황에서도 태평하기 그지없다.)

370 이름 없음 (90xWxheSaU)

2021-04-02 (불탄다..!) 23:10:55

>>365

여자가 한창 웃는 동안 남자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되려 근처에 앉는다.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하다가 여자가 웃음을 그치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온다. 그렇게 재미있었냐. 여자를 역으로 놀래키는 것도 모자라 아무렇지 않게 말까지 걸어오는 남자의 행동이 여자는 마냥 즐겁게 느껴진다. 남자가 얼굴에 띄웠던 짖궂음의 열배는 되어보이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대답해준다.

"응! 이렇게 되고 처음으로! 엄청!"

힘찬 대답과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언행으로 보기엔 아직 어린 아이 같지만 훌쩍 일어섰을 때의 키나 사뭇 성숙해보이는 얼굴 등이 어린 나이는 아닌 듯 하다. 여자는 발소리도 없이 걸어와 남자의 옆에 앉는다. 옆에, 그러니까 남자의 가방과 외투 위에. 어디로 봐도 고의적인 행동으로 걸터앉아 턱을 괴고 남자를 보며 히죽거리며 말한다.

"있잖아. 나 여기에 한참 전부터 있었는데. 나 보는 사람은 너가 처음이다? 맨날 맨날 소리지르고 튀어나와도 아무도 나 안 봐줬어. 가끔 비둘기만 나 괴롭히구. 나쁜 비둘기. 뚱뚱해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게 달리는 건 왜 그렇게 빨라? 비둘기 진짜 싫어. 비둘기는 싫지만 그래도 나 다른데로 못 가니까. 그래서 그냥 여기 있어야 해. 여기, 그날처럼... 으응. 여기에서 다른데로 못 가져. 이상하지. 나도 왜 그런지 모른다?"

그동안 혼잣말만 해서 그럴까. 간만에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여자의 수다는 밑도 끝도 없이, 횡설수설 이어진다. 처음엔 자기 얘길 하는가 싶더니 물 흐르듯이 딴 얘기로 새서 또 그 얘길 줄창 하다가, 어느 순간 여자의 얘기로 돌아오고 다시 딴 얘기로 새고. 마치 기억이 뒤죽박죽인 사람처럼.

"여기, 여기...에서 나갈 수 있으면. 그럼 너를 더 빨리 만났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장난 조금 덜 쳤겠지? 아- 아니다. 남들한테 칠 장난을 너한테 쳤을지도 모르겠다. 맞아. 장난이 늘면 늘었지 줄진 않았겠네!"

가까이 앉은 여자는 반투명하긴 해도 입고 있는 환자복의 무늬까지 보일 정도다. 아마 환자복의 출처일 병원의 이름까지도. 어째서 환자복의 귀신이 이런 공원 한복판에 있는걸까. 지금껏 여러 귀신, 죽은 사람을 만나온 남자에게는 이 여자에게서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아주 희미한 위화감. 그게 무엇인지는 깨닫기 전까진 모르는 채로.

"그래서, 그러니까, 너, 맞다. 너 누구야? 어떻게 내가 보여? 나 말고 다른 귀신도 본 적 있어? 난 없는데? 이 근처에도 다른 귀신 있어? 본 적은?"

여자의 머릿속에 아마도 있을 생각의 흐름이라는게 돌고 돌아 겨우 남자에게로 닿았나보다. 제법 떠들었으나 역시나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남자에게 질문을 연달아 쏟아낸다. 누구인지부터 시작해 어떻게 여자가 보이는지, 전에도 그랬는지 등등등.

#나도 잘 부탁해!!

371 이름 없음 (z5UyKDfoiw)

2021-04-03 (파란날) 00:23:19

>>363

뒤늦게 떠오른 듯 얘기하는 완을 보고 조금 웃었다. 그때 나는 단발이라 머리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반묶음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에 반해 완의 머리는 길었으니 어린 마음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곱게 넘겨 제일 아끼는 핀을 꽂아주기도 하고 양갈래로, 또 하나로 묶고 땋고……. 생각해 보니 완이 가만히 있어주었던 게 고마울 정도였다.

“맞아, 그래서 그랬어.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네.”

내 말에 대답하는 완에게서 예전 모습을 발견했던 탓일까.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가 어려웠다. 물론,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나중에 가서 귀찮다고 후회해도 늦었어.”

평온한 일주일을 기대하고 왔는데 기대 이상의 날들을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입에서 가만히 녹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기도 했고, 씹으면 소리가 나는 사탕처럼 즐겁기도 했다. 기분이 들떠 가벼운 콧노래까지 나왔던 것 같다. 아주 짧은 콧노래 뒤엔 그보다는 긴 정적이 흘렀다. 그걸 깬 것도 나였다.

“완아,”

나지막하게 완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창 밖으로 희끗희끗한 것이 휘날렸다.

“눈 온다.”

창문을 조금 열었더니 눈송이 하나가 코끝에 앉았다. 금세 녹아버린 건 당연하다. “이제 봄이니까 첫 눈인가.” 조용히 중얼거리곤 웃었다.

# 완이라는 이름이랑 첫 설정만 생각하고 시작한 거라 말투는 편하게 부탁해~
# 그리고 조금 이른 것 같긴 한데 이 상황 조금 더 이어갈 생각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 기한이 일주일이라 느리게 5~7개 일상 굴리고 마무리 하는 형식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가벼운 제안이니까 어려우면 부담없이 거절해도 괜찮아! :^)

372 이름 없음 (79KjPs7c16)

2021-04-03 (파란날) 00:30:25

>>370

내려놓은 가방과 외투 위에 당연하게 앉는 모습이 다분히 고의적이라 "허." 하고 실소를 흘린 남자는 '이것 봐라?'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여자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동안, 남자의 얼굴에 말간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약간의 서글픔도 함께 서린다. 남자는 응. 응. 대꾸하기도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않는다. 얼핏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어린애 같은 어휘를 구사하며 기쁜 듯이 떠들어대는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더욱 저며놓는다.

여자를 지금 처음 보았을 텐데도 이리 마음이 쓰이는 것은, 비단 그녀의 아이 같은 언행에서 호감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남자는 그런 이들을 이미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어떤 느낌일지를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야 내가 말할 틈을 주는구나? 나는 이현성이고, 평범한 회사원이야. 글쎄, 나도 너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라서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어. 이 근처에서는 아니지만, 요만한 꼬맹이랑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만났었거든. 지금은 헤어졌지만."

'요만한'이라고 말할 때에는 조각상 밑판에 걸터앉은 채로 제 머리 꼭대기쯤에 손을 눕혀 수평으로 선을 그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뭉클해졌을까. 아마도 그들이 성불해 사라져버린 것을 헤어졌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남자였다. 그는 무언갈 내려놓은 듯이 한숨을 폭 쉬고는 전화하는 시늉을 관두고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곤 말을 이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 즈음이었을 거야, 걔들을 만났던 건. 근데, 걔들은 우리 집까지 잘만 쫓아오던데. 너는 아닌가 봐? 여기에서 다른 데로 못 간다니."

여자를 조금 더 마주 보도록 약간 돌아앉은 남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여자가 환자복 차림이라는 것이 남자의 눈에 든다. 그리고 환자복에 쓰여 있는 병원의 이름까지도.

"아무튼, 너는 네가 누군지 제대로 기억나? 이름은? 사는 곳은?"

남자는, 해넘이가 지나 어둑해지는 어느 공원의 조각상 앞에서, 종일 고단했을 텐데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여자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더랬다.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귀여워서 더 마음이 아파.

373 이름 없음 (sprftAiFLI)

2021-04-03 (파란날) 01:47:42

>>372

정확하게 여자를 보는 남자의 눈길은 지난 수없는 시간 동안 여자를 무시했던 시선들을 모두 잊게 해줄만큼 따스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다른 느낌도 조금 느껴졌지만 지금의 여자에겐 그 사실이 중요치 않다. 여자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반응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히히-"

이제야 말할 틈을 주는구나, 라고 남자가 말하자 여자는 실없는 웃음으로 답한다. 창백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웃음이다. 남자가 말을 할 동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게 언제 그렇게 떠들었나 싶다. 생기는 없어도 흥미는 한가득인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손으로 턱을 괴고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응응, 한다.

"응, 응. 와. 그래도 두 명이나 만났네! 신기하다. 나는 종일 눈 뜨고 있어도 본 적이 없는데."

남자가 머리 근처에서 높이를 표시하는 손짓을 할 땐 고양이마냥 그 손을 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헤어졌다, 는 말엔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진다. 그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 하니 데려다 달라고 라도 하려고 했을지. 이쯤 보였을 병원의 이름은 공원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는 곳이다. 버스로 한 정거장 정도일까. 핸드폰을 치운 남자가 여자를 향해 조금 돌아앉자 그것도 따라하듯 여자도 남자 쪽으로 돌아앉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만 웃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질문을 되돌려 받는 순간 사악 하고 굳는게 선명히 보여버릴만큼.

치직. 칙. 해가 저물어 어둑해지는 공원을 비추기 위해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조각상 주위의 가로등이 절반 켜질 때까지 여자는 말이 없다. 옆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는 눈에 담긴 것은 두려움, 혹은 공포일까. 열린 적 없는 것처럼 닫힌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다가 툭툭 내뱉듯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 나는, 나.... 이름, 몰라. 사는 곳도 몰라. 나는 그냥, 어느날 눈을 뜨니까 여기 있었어. 여기... 여기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가려고 해도 안 돼. 못 가. 가면 안 돼. 난, 나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한대. 가야 하는 곳이 있대. 돌아갈 곳, 돌아가야,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 몰라..."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한다는 여자는 말을 이어갈수록 자신에 대한 것을 떠올리기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급기야 다리를 들어 웅크린다 싶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허공에 뜬 채 바들바들 떨면서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는데 묻힌 소리라 잘 들리지 않는다.

"어디. 어디로 가야 하는데. 돌아가? 어디로. 어딘데. 거기. 어디야? 나는. 어디. 누구?"

다시 혼잣말을 반복하는 여자의 머리 위로 은빛의 가는 실이 나타난 건 그 때였다. 남자가 이전에 보았던 귀신들에게는 없었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은실은 허공에서 일렁일렁 흔들린다. 일렁거리며 어디론가로 향해있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공원 밖, 어디론가로 이어져있을거란 느낌을 준다. 실은 여자가 불안해할수록 선명해지다가 진정될수록 서서히 흐려진다. 그러다 팟 하고 사라져버린다. 실이 사라진 후엔 여자도 불안이 가라앉았는지 웅크린 자세를 조금 풀어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남자를 본다. 작은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이름도 사는 곳도, 하나도 모르지만, 괜찮아. 나는 계속 여기 있을거니까. 그러면 되는거야. 그러면, 안 무서워. 그러니까, 현성이 너가 가끔 나 보러 오면 안 돼? 다섯밤, 으응, 열밤 자고 와도 되니까, 매일 안 와도 되니까..."

안타까운 목소리가 지나간 후엔 여자가 한 손을 뻗어 남자의 팔, 혹은 옷을 잡으려고 해본다. 하지만 불투명한 손은 통과만 할 뿐 옷도 팔도 못 잡는다. 몇번 시도를 해보고 툭, 손을 떨군 여자는 에헤헤, 하는 억지웃음을 짓는다. 역시 안 되네, 라고 중얼거린다. 주변이 어두워진 탓인가. 여자가 조금 검게 물든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될...걸....?!

374 이름 없음 (olCdnA.qx2)

2021-04-03 (파란날) 11:20:00

>>347

(당과를 입에 문 아이가 행복한 얼굴을 했다. 아이의 작은 세계에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 중 하나였다. 사내의 말에 아이가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탄하고 너른 길... 좋은 뜻 같습니다, 스승님. (아이가 몇 번 이름을 되뇌였다. 권세 권, 넓을 홍, 길 도. 잊고 싶지 않았다. 뚫어져라 바닥에 적힌 글자를 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스승님 이름은 무슨 뜻이에요? 분명 좋은 뜻일 것 같습니다.

#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ㅠㅠ 갑자기 일이 많이 생겨서 며칠간 정신이 없었네 ㅠㅠㅠ

375 이름 없음 (byke1EtfnI)

2021-04-03 (파란날) 13:03:42

>>374

(볼이 빵빵해지도록 당과를 입에 문 모습이 작은 다람쥐 같다. 사랑스럽고 무해하며 복실복실한 우리 아기 다람쥐.) 그렇지? 네 앞에 놓인 길이 험하지 않고 좁지 않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니. (제 이름의 뜻을 묻는 말에 사내는 잠시 멈칫한다. 곧 사내는 천천히 마당에 한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尹, 錦, 雪.) 아직 네게는 어려울 테니 뜻은 나중에 알려 주마. (비단 금에 눈 설. 떼어놓고 보면 좋은 뜻이지만, 둘 모두 이름을 지을 때는 결코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는 자라는 것을 아이는 알까. 사내는 천진한 아이의 머리를 쓰담으며 애써 미소짓는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슬슬 가보아야 할 것 같지 않아?

#괜찮아! :)

376 이름 없음 (QSSJsuUIhU)

2021-04-03 (파란날) 15:56:43

>>354

" 백아… 큼. "

남자가 들려온 이름을 그대로 중얼이다 작게 기침 소리를 내었다. 어디 저승사자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신입 시절 질리도록 들은 호통 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여자의 낯빛이 영 좋지 않다. 남자는 꿋꿋이 설명을 이어가며 그리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미안할 말이지만, 남자에게는 그 어두운 얼굴이 황재처럼 느껴졌다. 어쨌건 삶을 희망하는 부류는 아닌가본데. 그렇다면 일처리가 조금 더 쉬워지겠군. 덕과 윤리가 부재한 저승에서는, 참 매정한 소리를 거리낌없이 내뱉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정말입니까? 화색이 도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 …우선 아라씨를 저승으로 인도할겁니다. 그 진상에 관심이 없으시대도 말입니다, 아라씨의 후생이 될 인간에게는 무척 중요할 일이라서요. "

…어쩌면 후생이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굳이 그 말은 덧붙여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은 망자를 저승에 인도함과 동시에 그 망자의 '죽음'을 공고히 하는 행위지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아라씨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이제는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

고작 이름 세 번에 뭐 그리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나 싶겠지만, 이름이란 무척 위대한 힘을 가진 존재다. 무언가를 명함으로서 그것은 존재를 가지고 남들에게 인식된다. 이름을 잃으면 불릴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무언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나. '저것'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이 즉슨,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백아라'의 이름 없이, 당신은 상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면, 명을 부르겠습니다. "

그리고 함께 저승으로 가주셔야겠습니다. 남자가 어딘가 피곤한 기색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덧붙여 말했다. 윤 차사의 고함 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기분이군…

" 백아라, 백아라, 백아라. "

아마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을테다. 몸이 특별히 투명해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달라진 점이 딱 하나 있다면…

" 이제 삼도천을 건널 수 있겠군요. 하지만 절차를 다 지키고 삼도천을 건넌다면 일주일을 꼬박 기다려야할테니…. "

남자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중얼이는 것 같기도 했다.

" 잠시 손을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저승으로 안내해드리죠. "

혹시라도 작업 멘트라 착각한 사람이 있다면, 꿈 깨길 바란다.

377 이름 없음 (b/.GJc2jHw)

2021-04-03 (파란날) 16:33:02

>>373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기 가득하던 여자의 얼굴이 사악- 굳어지자 남자도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을까. 여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동안에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가만히, 말없이 그녀의 옆을 지키며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여자의 머리 위로 가느다란 은빛 실이, 다른 이들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것이 나타났고, 남자의 눈동자가 그 실을 따라 느리게 굴러갔다. 공원 밖 어딘가로 이어진 듯한 그 실은, 이어진 방향이 모호해 개운치 못한 느낌만 마음에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가 반복해 중얼이던 '돌아갈 곳'이란 이승에 남은 한을 풀고 후련히 성불하여 가야만 할 저승일 것이라고, 남자는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껏 만났던 이들이 표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에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생각을 지우개로 벅벅 문대어 지워버리는 남자였다. 그들은 생전의 기억과 돌아갈 곳을 떠올릴 때에 이처럼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보다 편안한 느낌으로 표현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현성은 문득, 가슴이 갑갑하고 먹먹해졌더랬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현성은, 불안함을 애써 감추며 부러 입꼬리를 올리고 아까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나중에 다 기억날 테니까. 너보다 어린 애들도 다 해냈던 일이야. 그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그러잖아도 여기는 나 집에 가는 지름길이라 어차피 매일 지나가니까. ... 응.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제 매일 봐야겠네."

그 안에는 약간의 거짓말이 섞여있었지만. 현성은 여자의 손이 지나간 부분이 아린 듯한 착각을 느낀다. 툭 떨어진 여자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겹쳐 놓는다. 한동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현성은, 고개를 들어 여자와 눈을 맞추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있지, 나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잠깐만 있어. 가방이랑 옷 두고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하고 한 마디 덧붙이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현성은 여자에게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한다. 열 걸음 정도 걸었을까, 슬쩍 여자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발을 떼어놓는다. 조금씩 걸음이 빨라지더니 여자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는 아주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랬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부터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아. 하... 많이 기다렸어? ... 별 건 아니고, 여태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한동안 숨을 고르던 현성이 들고 온 봉투에서 무언갈 주섬히 꺼내어 든다. 흔한 쌀 막걸리 한 통이다. 그는 사뭇 밝아진 표정으로 병뚜껑을 연다. 까그락- 플라스틱 뚜껑 여는 소리가 경쾌하다. 여자의 앞에 술병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뒤를 돈다.

"마셔 봐. 아마 마실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에게 등을 보인 채 우두커니 서있기만 한다. 여자가 술을 마시더라도 취기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마음이 조금 뿌듯해지고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정도이지 않을까. 여자가 술을 마시고 나면, 현성의 눈에는 막걸리가 아주 조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닳아 없어진 것처럼 보이겠지.


#혼자서 외로웠을 거 생각하니까 조금 짠했을 뿐야...👉👈

378 이름 없음 (e2SVUQUSaw)

2021-04-03 (파란날) 17:38:42

>>376

아, 또 이름이 불리려다 멈추었다. 여자는 기침을 하며 말을 멈춘 남자를 보며 들리지 않도록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한 기침인 것 같은데. 내 이름이 그렇게 불리기 어려운 이름이었던 걸까. 아니면 또 뭔가 절차가 필요한 걸까. 여자는 이번에는 남자가 어떤 설명을 해줄지 기다리며 꼿꼿이 서서 남자의 말을 들었다.

다행히 이승으로 돌려보내지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아서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여유롭게 풀렸으니까. 그제서야 남자의 목소리도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 …………네. 알겠습니다. "

나의 후생이 될 인간이라. 솔직히 여자는 알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만약 그 후생이 될 인간이 나와 같은 존재라면 우리는 어차피 다시 생을 버리고 사를 택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존재라면 그건 그것대로 지금의 여자와는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마지막은 깔끔하게 마무리지어 후생이 될 인간의 시작은 깨끗한 상태로 해주는 것이 좋겠지. 시작부터 깊은 늪이었던 나와는 다르게 너는 그렇게 시작할 수 있기를.

여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축복을 후생에게 건네며,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 네. "

어차피 되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설령 여기서 돌아갔다 하더라도 여자는 다시 이곳으로 왔겠지. 역설적이게도 여자의 이름이 세 번 불림으로써, 여자의 존재가 소멸된다. 나의 죽음의 색깔이 붉은색이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자는 잿빛의 당신이군요. 여자는 피곤해보이는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디어 여자의 이름이 세 번 불렸다.

그러나 딱히 변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여자도 크게 기대한 것은 없었지만, 남자의 확인사살에 이제서야 오랫동안 간절히 빌었던 소원이 풀렸다는 생각에 후련함을 가득히 느꼈다. 슬픔이나 후회는 조금도 없이, 오로지 후련함만. 무겁고 답답했던 몸과 마음이 가볍게 풀리는 느낌.

" 네, 좋아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

그래서일까? 여자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와 태도로 남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살아있는 사람처럼 처음으로 남자에게 따스한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 피곤해보이시는데 직접 안내까지 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참 친절하시군요. "

빈말이 아닌 듯,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접어 웃은 여자는 작업 멘트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기나긴 적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저승과 삼도천. 기대하는 듯 눈을 빛내는 여자는 들떴는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379 이름 없음 (sprftAiFLI)

2021-04-03 (파란날) 20:01:11

>>377

여자는 진정은 했지만 여전히 한 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잡기를 포기한 손을 시무룩한 눈으로 볼 뿐이다. 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지만 재차 깨달을 때만큼 슬프고 울적한 일도 없다. 여자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려던 찰나. 현성이 말했다. 괜찮아. 도와줄게. 어차피 매일 지나가니까. 매일 봐야겠네. 현성의 말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동정? 연민? 무엇이 되었든 여자에게는 그 이상으로 기쁜 말은 없었다.

"정말? 정말 매일 와줄거야? 신난다! 현성이가 매일 와주면 나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기억 같은 거 안 찾아도 돼. 계속 여기서 현성이 만날래."

단박에 기분이 풀린 여자는 자세를 좀더 풀고 처음과 가까운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현성이 매일 온다면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라고 말하는 모습이 어딘가 위태롭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온 여자는 현성이 겹쳐놓은 손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다가,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현성이 일어나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잘 지키고 있을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웃는 얼굴로 점점 멀어지는 현성을 향해 손을 흔든다. 현성이 돌아보았을 때도 여자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시야에서 현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손을 내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이제 혼자 아니야. 헤헤. 아니니까, 괜찮아. 안 가도 돼. 안 갈거야. 계속, 계속 여기 있을거야. 현성이만 와준다면, 나 계속 여기 있어도 좋아..."

중얼거리는 여자의 머리 위로 조금 전 나타났던 실이 다시 나타나 허공에 일렁인다. 은빛 실은 좀전보다 더 가늘고 희미하다. 수초처럼 흔들리는 실은 공원으로 돌아온 현성을 여자가 눈치채자 사라진다. 잠깐만, 이라던 말처럼 정말 금방 다시 돌아온 현성을 보고 여자는 현성이 왔다! 라며 웃는다.

"많이 안 기다렸어! 아직 이렇게 깜깜한 밤인 걸!"

밤도 다 안 지났으니 오래 걸린게 아니라는 듯한 말은 여자와 현성의 시간이 어긋나있음을 보여준다. 당연하다. 사람의 5분과 혼의 5분이 같을 리 없다. 여자는 숨고르기를 하는 현성을 보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꺄르륵 웃어댄다. 웃다가, 현성이 막걸리병을 꺼내 여자의 앞에 내려놓자 동그랗게 뜬 눈으로 술병과 현성을 번갈아본다.

"마셔? 이거? 그치만 나 배 안 고픈데. 목도 안 마른데?"

편히 마시라는건지 등돌리고 선 현성을 빤-히 응시하고 고개를 내려 술병을 본다. 여태 먹고 싶거나 마시고 싶은 적은 없었지만 현성이 마실 수 있을거라고 하니 마셔보고 싶어진다. 현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여자의 손을 움직여 술병을 든다. 현실의 술병이 아닌, 혼의 손에만 잡히는 술병이 여자의 손에 나타나고 잠시 그것을 신기하게 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투명한 술병이 금방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서둘러 병의 입구를 입으로 가져간다. 마시는 동안 맛도 식감도 목넘김도 없었지만 뭔가를 마시고 있다는 감각은 든다. 감각이 이어질수록 드는 이 기분은... 그대로 원샷을 해버린 여자의 손에서 빈 술병이 굴러 떨어져 사라진다. 술병이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던 여자는 다 마셨다고 현성을 부르려고 했다.

"히끅."

여자의 입에서 나온 건 현성의 이름이 아닌 딸꾹질이다. 술 취한 사람들이 하는 그 딸꾹질. 그런 소리가 나온게 여자에게도 별일이었는지 놀란 눈을 하고 깜빡거린다. 그 사이 두번째 딸꾹질이 나오자 아까 놀라 나자빠졌을 때처럼 웃기 시작한다. 이게 뭐야, 이상해, 이상한 소리가 나- 라면서 또 바닥을 구를 듯이 웃는게 설마 취했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이정도로 짠하믄....그거이 좀 내 양심이...

380 이름 없음 (EWS9XxwhxA)

2021-04-04 (내일 월요일) 10:39:46

>>379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쓰다듬어주고 싶다.
길 잃은 미아를 보면 엄마를 찾아주고 싶다.
그런 것이다. 그녀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길을 가다 마주친 주인 없는 강아지.
잠시 놀아주었을 뿐인데 헤어지기 아쉽다.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녀는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기억 같은 거 안 찾아도 된다고 말했다.
너무 조심성 없이 다가갔나. 마음이 무겁다.

그녀에게서 꼬맹이가 겹쳐 보인다.
그래서 혼자 두기가 무섭다.
그래서, 그래서 마음이 쓰리다. 아프다.


"마셔? 이거? 그치만 나 배 안 고픈데. 목도 안 마른데?"
"응. 배부르라고 준 거 아니야. 그냥. 그냥이야."

현성은 뒤돌아선 채로 말했다. 아이를 어르듯이 그렇게 말했다. 여자가 술을 마시면, 현성의 귀에는 통통 통통- 플라스틱 병이 돌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술병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의 말대로, 여자에게 술을 공양한 것은 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도 쌀로 만든 음식은 먹을 수 있는 것 같았으니까. 요만한 꼬맹이도 좋아라 마셨었으니까. 그냥. 그냥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랬다.

"히끅."

귀신에게서 나올 리 없는 딸꾹질이다. 현성도 따라서 놀라 뒤를 돌아본다.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기울인다. 그녀의 입에서 두 번째 딸꾹질이 나오자 "풉." 하고 실소를 흘린다.

"너, 설마 취했어? 그러라고 준 거 아닌데."

꼬맹이는 안 그랬는데. 하는 말은 뱉지 않고 삼켰다. 자꾸만 겹쳐 보는 것이 미안해서 하려던 말을 그만두었다.

여자는 웃음이 많았던 걸까, 많아진 걸까. 현성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며 아까처럼 그녀의 옆자리에 털석 주저앉는다. 그리고 뚜껑 열린 술병을 들어 꿀꺽 꿀꺽- 두 모금을 마신다. 괜찮은 것 같은데.

"히끅."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바닥을 구를 듯이 웃다가 딸꾹질하기를 반복하는 여자를 따라 현성도 딸꾹질을 시작한다. 이어려고 마신 거 아닌데. 멈추지 않는 딸꾹질에 속절없이 웃음이 난다. 더없이 한없이 걱정 없는 웃음이 난다.

"너, 너 때문에... 히끅. 나도 딸꾹질, 하잖아... 히윽."

그날따라 해가 지는 것이 묘하게 빠르다. 공원 시계탑의 커다란 바늘이 아홉 시를 가리킨다.

#미안. 어제는 좀 바빴어...👉👈
내가 짠한 건, 별 내용 아니라도 찌통 회로가 막막 돌아가서!

381 이름 없음 (3DIazAgiuI)

2021-04-04 (내일 월요일) 14:56:16

>>371이 갱신할게! ^0^

382 이름 없음 (4uK6Qc52/I)

2021-04-04 (내일 월요일) 15:55:43

>>380

여자의 딸꾹질에 놀라 뒤돌은 현성을 보고 여자는 재차 자지러진다. 술을 줘놓고 취하라고 준게 아니라니. 좀 모자라 보이는 여자에게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나보다. 웃음과 딸꾹질을 번갈아 내며 현성을 향해 재잘댄다.

"그, 그야 술 마셨는걸! 취하지, 당연히! 현성이 이상해- 갖다준 건 현성이면서!"

깔깔깔- 그야말로 박장대소라 할 만큼 크게 웃어댄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공허하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공허함만이 커진다. 현성 외에는 닿지 않는, 닿을 수 없는 소리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자는 지칠 줄 모르고 웃었다. 옆에 앉은 현성이 현실의 막걸리를 마시고 저처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을 땐 현성의 가방 위로 엎어져 끅끅댄다.

"왜, 왜 그게 나 때문인데. 아니. 현성이 너도 마시니까 그런거잖아. 그럼서 뭐어 나 때문이래! 못 됐네, 못 됐어!"

딸꾹질의 원인을 여자에게 돌리며 같이 웃는 현성을 보고 여자는 속사포처럼 대꾸하면서도 창백한 얼굴에 한가득 해맑은 웃음을 띄운다. 둥근 눈매가 반달마냥 곱게 접히고 핏기 없는 입술이 눈매를 따라 호선을 그린다. 생전에도 이렇게 웃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생전 웃지 못 해, 웃을 수가 없어 이제서라도 이렇게 웃는 것일지 모른다. 너무나 밝은 미소는 그만큼 그림자도 짙었을 터이니.

정신없이 웃고 또 웃다보니 이미 몇 시간은 훌쩍 가버린 듯 하다. 하늘은 새까맣게 물든지 오래고 공원엔 가로등 불빛만이 비출 뿐이다. 인기척 역시 현성을 제외한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웃음은 잦아들었지만 딸꾹질은 간간히 하던 여자가 이번엔 하품을 한다. 산 사람처럼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시늉만이라도 하품하는 거 같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어쩐지 표정도 졸려보인다. 금방이라도 잠들 듯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현성을 보고는 또 베시시- 웃는다.

"근데 있지- 현성이 집에 안 가? 가야지. 벌써, 벌써, 어- 늦었는걸? 봐바, 하늘도 까맣고 벌써 한밤중인걸?"

집에 안 가냐고 중얼대던 여자는 시계탑을 보고 시간을 보려고 하다가 포기했다. 시계를 볼 줄 모르는 걸까. 보는 법을 잊었을지도. 그저 지금은 많이 늦었다며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심 한복판의 공원에서 보는 하늘은 새까맣기만 하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언제 떴는지 모를 달만이 흐릿한 하늘에서 눈길을 돌려 다시 현성을 본다. 그때까지 제가 앉아있던 현성의 옷과 가방 위에서 물러나 허공에 둥실 떠서 말한다.

"나 이제 잘거니까 현성이도 집에 얼른 가. 여기 밤에 이상한 사람 지나다녀. 위험해. 저번에도 저기서 큰 소리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며 큰 소리가, 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뚝 끊긴다. 여자가 가리킨 방향은 공원 바깥쪽,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 쪽이다. 몇초간 정지화면마냥 가만히 있다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다시 들자 좀전처럼 웃는 얼굴이 나오고 한층 발랄해진 말투로 매일 온댔으니까 내일도 올 거지? 나 기다린다? 라며 재잘댄다.

#괜찮오 나도 어젠 좀 바빴오 ><

383 이름 없음 (np0Stu60DE)

2021-04-04 (내일 월요일) 16:38:34

>>381 >>363참치인데 미안해, 오늘 좀 늦어지거나 내일에나 답레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8.8

384 이름 없음 (IJMc9EVZyw)

2021-04-04 (내일 월요일) 22:06:37

아니, 진짜 우리 요리사 한 명 구해야 할 거 같아. 내가 너랑 이제 1년 8개월 정도 합을 맞췄다만, 이럴 때마다 정말 같이 있고 싶지 않아. 지긋지긋해. 이 고블린 발냄새 나는 수프도. 진절머리 나. (어깨를 움츠리고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나무 가면을 쓴 청년. 살짝 탄 피부에 근육이 단단하게 박혀있지만, 행동은 영 위축되어 있다.)

385 이름 없음 (yQEqrCOX2o)

2021-04-05 (모두 수고..) 15:17:52

>>383 헉 이제 봤다 괜찮아 천천히 올려줘~

386 이름 없음 (w/3lMp67bg)

2021-04-05 (모두 수고..) 20:14:42

>>382

화-하게 밝은 면에서 서글픔을 느낀다.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녀의 창백하고 해맑은 웃음에 하마터면 울음이 날 뻔했다. 감추려고 하니까 더욱 북받쳐서 힘이 들었다. 헛웃음이라도 흘릴 수가 있어서, 딸꾹질이 고마웠다.

그녀가 저기 대로변을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몹시 신경 쓰인다. 뜨문뜨문 기억이 끊어진 건가. 아니면 그 소리가 그녀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고개를 숙였다가, 한층 더 밝게 웃는 모습이 외려 이쪽을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응. 내일도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마."

떠나는 것을 주저하는 현성이었지만, 결국 제 옷가지와 가방을 주섬히 주워들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외투를 한 팔에 걸고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볼 것처럼 "잘 자." 살가운 한 마디를 남기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뒤로 세 걸음. 어느새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걸어간다.

차라리 그들처럼 집까지 따라오겠다고 고집이라도 부렸으면, 그리고 따라올 수 있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텐데. 미련이 생길까 봐서 그녀를 돌아볼 수가 없다. 들고 있는 옷가지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진다. 여로운 밤이 깊어간다.

//

평소보다 바쁘고 지치는 하루였다. 하루 종일 멍하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더 그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야근까지 하게 되어서는.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가 훌쩍 넘어간 시각이다. 어제 그녀와 헤어졌을 때보다 더 늦은 시간이다.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할 거면서 그녀에게 기대감만 잔뜩 심어주고 온 스스로에게 짜증이 솟는다. 한심하고 약아빠졌다.

택시에서 내려 분주하게 걸었다. 아니, 뛰었다. 열 시가 되어가는 밤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다. 오늘따라 지나는 사람 한 명 없다. 공원에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녀도 없으면 어쩌지. 무슨 일이 생겨서 사라졌으면 어쩌지. 조각상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 기차 시간을 놓쳤을 때 심장이 철렁하는 감각이 심장을 계속해서 꼬집는다.

저 멀리 조각상이 보인다.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름이라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마침내 조각상 앞.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나려 헝클어진 머리로, 숨을 돌리는 것도 잊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아프게 뛰고 어깨가 크게 들썩거린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이 불안함이 부디 기우이길 바랐다.

"야! 어디 있어! 장난치지 말고 나와!"

순간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우악스레 외친 말이 아무도 없는 공원에 메아리친다.


#어제는 쓰다 잠들어서 오늘 마무리하고 일찍 올리려 했는데, 평일에는 역시 바쁘구나. 늦어서 미안해👉👈
그리고 혹시 생각했던 상황이 아니라면 조각상이 보이는 부분부터는 없는 걸로 해도 좋아. 여자가 조각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387 이름 없음 (nec.FeHNms)

2021-04-05 (모두 수고..) 21:51:56

>>386

"나 어차피 어디 못 간다니까. 현성이 약속 지켜야 해. 내일 꼭 오는거다? 꼭이야?"

여자는 여기를 떠나지 못 하는걸 당연하게 말하며 현성을 향해 거듭해서 묻는다. 몇번이고 꼭을 붙여가며 묻는게 처량하게 보일만큼. 소지품을 챙겨 뒷걸음질을 하는 현성을 보며 여자가 손을 흔든다. 순박하게 웃으면서 현성이 뒤돌아 가는 동안에도 계속 손을 흔든다. 한번 돌아봐주지 않는 현성이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손은 멈춘다. 하지만 그 뒤로도 한참, 한참동안 현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다.

"...꼭 와. 꼭..."

가로등마저 서서히 꺼지기 시작한 공원의 한복판에서 여자가 중얼거린 말은 듣는 이 없이 사라졌다.

//

다음날. 여자는 하루종일 조각상 받침에 앉아있었다. 해도 다 뜨기 전부터 소리없이 그 자리에 앉아 앞을 보거나 하늘을 본다. 그러다 못된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달려오자 기겁을 하며 저멀리, 그래봐야 조각상이 있는 공원 광장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도망친다. 만족한 비둘기가 사라지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기다린다. 해가 뜨고 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걸 보기만 하면서.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하늘이 붉게 물드는 저녁이 되자 그때부턴 공원 저편을 본다. 전날 현성이 왔던 그 방향이다. 양팔로 다리를 감싸안고 간간히 눈을 깜빡이며 누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 내린다. 들고 내릴 때마다 얼굴에 드리워있던 기대라는 장막이 한겹씩 벗겨져 날아가는 것처럼 어두워진다. 해가 완전히 지고 지직거리는 가로등 소리가 들려올 때 여자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어디도 보고 있지 않았다.

"온댔으면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마디를 중얼거리더니 여자의 형상이 안개 흩어지듯 자리에서 없어진다. 여자마저 모습을 감춘 공원은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다. 오늘은 유난히도 사람이 없는 날이었다. 그렇게 지나갈 줄만 알았다.

가로등만이 쓸쓸히 비추는 공원을 어떤 소리가 크게 울린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발소리다. 조각상에 가까워질수록 거친 숨소리도 섞인다. 무엇이 그리 급하고 급한지 한시 바쁘게 달려와서 조각상 주변을 둘러보더니 급기야 소리를 지른다. 누군가를 찾는걸까. 다행인 점은 그 부름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거다. 발소리의 주인, 현성에게만 느껴졌을 서늘한 한기가 조각상 뒤편에 나타난다. 그리고 조금 후에 조각상 뒤에서 여자가 현성을 향해 고개를 빠끔 내민다. 기분 탓인지 조금 부은 거 같은 창백한 얼굴에 불만을 품고 현성을 본다.

"....늦었어. 현성이 바보."

여자는 딱 그 말만 하고 좀처럼 그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잘 보면 얼굴의 불만 속에 경계 혹은 불신도 은근히 섞여있다. 잔뜩 털을 세운 길고양이처럼. 전날은 잘만 웃어주던 얼굴이 지금은 전혀 웃지 않는다. 눈썹을 한껏 찡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자기 할 말만 내뱉는다.

"바보랑 안 놀아. 가."

왜 늦었는지 들어주지도 않으려는 건지 매몰차게 굴고 조각상 뒤로 숨는다. 사라지진 않고 그 밑에 쭈그려앉아 저녁 내내 그랬듯이 웅크린다.

#월욜이니까 쩔수없지! 너참치 오늘도 고생했어!

388 이름 없음 (w/3lMp67bg)

2021-04-05 (모두 수고..) 22:30:25

>>387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서 마음이 놓이는 한편, 부루퉁한 얼굴에 가슴이 미어진다. 사람도, 연인도 아닌 그녀에게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현성은, 전날 밤 그녀의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 놓았던 제 자신이 원망스럽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또 그녀에게 미안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었어도 긴 시간을 아프게 기다렸을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 바보라는 말이 안 그래도 어수선한 마음을 더욱 헤집어놓는다.

현성은 말없이, 느리게 조각상 뒤편으로 걸어갔다. 조각상 받침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어제처럼 옆자리에 외투와 가방을 겹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툭툭-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으라는 듯이.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나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는 것이다. 토라진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막연한 기대감에 얼마나 아프게 기다렸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기에 현성이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애써 가리고 말갛게 웃어 보이며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본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손을 겹쳐주었으면 해서 말없이 손을 내밀어 본다.


#너참치도 월요일 고생 많았어. 그리고 오늘도 있어줘서 고마워.

389 이름 없음 (nec.FeHNms)

2021-04-05 (모두 수고..) 23:52:59

>>388

웅크린 여자의 세상은 캄캄하다. 공원도 지금은 가로등 덕분에 밝은데 여자의 앞은 새까맣다. 그 속에 여자는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단 한명이던 사람에게 가라고 해버렸다. 안 논다고 해버렸다. 이제 여자는 다시 혼자가 된다.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장난을 치는 날이 돌아올 뿐이다.

그러나 현성의 기척은 멀어지 않는다. 도리어 여자가 있는 곳으로 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앉는지 털석 앉는 소리도 들린다. 고개를 들자 옆자리에 놓은 옷들의 위를 두드리는 손이 보인다. 더 위를 보자 여자를 돌아보는 눈과 마주친다.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결코 여자를 잊은게 아니라는 말 한마디에 시리던 기분이 조금은 풀린다.

여자는 아직은 심통이 남은 얼굴을 하고 일어나 잠자코 현성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 가방과 겉옷 위에 말이다. 앉아서 빤-히 현성을 보다가 흥. 콧방귀를 내곤 고개를 팩 돌린다. 그러고 잠깐 지나서 다시 스윽 원래대로 돌아온다. 현성의 얼굴과 닿지 않을 손을 번갈아보고, 제 손을 들어 몇번 쥐었다 펴기를 해보더니 살짝 쥔 채로 현성의 손에 얹는다. 절대 닿을 일 없는 두 손이 겹쳐진다. 그걸 보는 여자의 눈에 잠시 동안 서글픔이 서린다. 손을 그대로 두고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한다.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사라져버릴까 했다 뭐. 흥. 나오지 말 걸 그랬어."

가라고, 나타나지 말 걸 그랬다고 하는 말과 부르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던 행동은 맞지가 앉는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는 재볼 것도 없다. 여자는 지금도 이렇게 현성의 옆에 앉아있으니까. 입을 댓발 내밀고 있긴 해도 다시 모습을 감추지 않고 앉아서 까칠까칠한 시선이나마 현성에게 주고 있으니까.

"이렇게 늦게 오면 집엔 언제 갈려구. 나도 지쳐서 쉬려고 했단 말야. 바보야. 하루종일 똑같은 거만 보는 거도 얼마나 지치는데. 어? 아침부터 여기 앉아서 해 뜨는 거부터 하나하나 다 보는거 밖에 못 한다구."

한마디만 하나 싶더니 결국 제가 못 참겠는지 조잘조잘 떠들어댄다. 처음엔 거의 대부분 불만이고 불평이다. 여자가 종일 여기서 뭘 하면서 기다렸고 전날 현성이 지나가던 시간 쯤엔 계속 그쪽을 봤으며 결국 안 와서 얼마나,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 떠든다. 제 가슴께를 움켜쥐며 여기가 너무 추웠다고 표현한다.

"여태 혼자 있어도 안 추웠는데. 현성이가 안 와서 추워졌어. 추운 거 싫어. 그치만 난 여기 계속 있어야 해.."

춥다고 해서 그런지 안 그래도 창백한 여자의 얼굴이 더 희게, 푸르게 질려간다. 숨을 내쉬면 입김이라도 나올거같다.

#천만에!

390 이름 없음 (GYTxQ1eyfg)

2021-04-06 (FIRE!) 00:18:36

>>389
#답레는 내일 가져올게! 막연하게 기다릴까 미리 말해봐.
참. 극중에서 다음 날이 주말인 걸로 해도 괜찮을까?
그럼 미리 잘 자고 좋은 꿈 꿔! 내일도 힘내구. 또 봐.

391 이름 없음 (GpWyJiJv92)

2021-04-06 (FIRE!) 00:28:53

>>390
#알써알써! 어차피 자유니까! 주말인거로 해도 옼케이야! 너참치도 잘 자라~~!!

392 이름 없음 (YUt0o83Nec)

2021-04-06 (FIRE!) 19:44:29

>>389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세상이 원통하다는 듯이 설움을 우짖으며 제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여기가 너무 추웠다는 표현은, 그에 못지않게 가슴이 아려오는 것이었다. 저 때문에 추워졌다는 말이 가슴에 못을 박는다. 맞는 말이라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며, 현성은 침울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안온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등을 두드려 얼러줄 수도 없고 어깨를 감싸 달래줄 수도 없다.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정말 지루하고 힘들었겠다. 그치만, 나.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원망하듯 말하지 마. 너랑 한 약속은 꼭 지켜. 믿어도 좋아. 그리고 네가 여기에만 있지 않을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진짜 약속."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도록-이라는 말에는, 성불을 돕겠다는 의미가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습관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려다 말고 멈칫하는 현성이었다.

"참. 내일은 주말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더 늦게까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내일은 아침부터 널 보러 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 현성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약간 들어선 그녀를 내려보며 어때? 좋지? 하고 묻는 얼굴로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런 것으로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녕!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길 바라!

393 이름 없음 (GpWyJiJv92)

2021-04-06 (FIRE!) 22:06:24

>>392

한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고 낯빛이 희어졌던 여자는 자신을 달래주지 않고 되려 아무렇지 않게 말해오는 현성의 태도가 통했는지 멍하던 눈에 촛점이 돌아온다. 꽉 쥐었던 손도 풀어 툭 내려놓고 조금 후에는 현성을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보통 사람들이 어쩔 수 없네- 라고 말할 때 짓는 미소다. 내일은 아침부터 올 수 있을거란 말을 들었어도 여자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여자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마간 현성을 본다. 이리 가만 있으면 보통 사람 같아보여도 긴 시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아 역시 산 사람이 아닌 것이 티가 난다. 여자는 굳은거같던 고개를 돌려 하늘을 한번 보고 텅빈 공원도 한번 본다. 그리고 다시 현성을 보았을 때에야 겨우 말을 꺼냈다.

"현성이도 내가 여기 계속 있어도 된다고 해주진 않네. 역시 가야하는구나. 다른 곳. 아니면.."

아니면, 다음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작게 저어 말을 얼버무린다. 여전히 마냥 밝지만은 않은 웃음을 지은 여자는 현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을 돌린다.

"주말인데 아침부터 나를 보러 올 수 있는거야? 주말인데? 약속 같은거 없어? 현성이는 혹시 귀신하고만 약속을 하는거야? 그런거야?"

아무렇지 않게 뼈때리는 질문을 하고 고개를 갸웃 한다. 악의는 없어보이지만 가끔은 그런게 더 아프다. 정말 그런 거냐고 깜빡 하는 검은 눈이 쐐기를 박는다. 또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 말을 잇는다.

"있지. 아까 했던 말 정말이야? 내가 여기에서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거, 정말 그래줄거야? 뭐든?"

전날과 달리 여자가 되묻는 것을 보아 여기서 떠나는게 아주 방법이 없지는 않나보다. 아니면 그저 확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말 현성이 여자를 도와줄건지 확신을 얻기 위한 확인. 여자는 어떤 대답을 기대하기보다 별 생각이 없어보이는 얼굴로 현성을 빤히 응시한다.

#너참치는 좋은 하루였니! 난 낮에 긴팔입고 나갔다가 쪄죽을뻔;

394 이름 없음 (AArNnzW4no)

2021-04-06 (FIRE!) 22:53:09

>>393

여기 있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꼭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해서. 답답하게 묶여있지 않았으면 했던 건데. 너의 처연한 모습에 더욱 마음이 죄스럽다. 웃음이 회색이라서 마음도 회색이다.

"너,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귀신하고만 약속을 하냐는 말에 가슴이 뜨끔하다.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외려 이런 평범한 대화가 마음이 편하다. 닿을 수만 있었다면, 꼭 이마를 아프지 않게 한 대 쥐어박았을 법한 표정이다.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떠난다는 단어는 울림이 외롭다. 어제와는 달리 정말 그래줄 수 있냐며 되묻는 모습에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냥 개운치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두고 온 느낌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싶다.

혼자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아다니거나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다른 사람을 못 앉게 하고 디저트 카페에서 커플 세트를 혼자 주문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없는 사람이 바라던 일이었다.

현성은, 그녀를 돕는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든 해줄게."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한번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응. 평소처럼 좋은 하루였어! 날이 정말 더워졌더라. 하지만 저녁에는 아직 쌀쌀해. 항상 감기 조심해!

395 이름 없음 (nXSxezAaNQ)

2021-04-07 (水) 00:04:40

>>394

현성이 억울하다는 식으로 대꾸해오자 이전에 그런 것처럼 이히히- 웃는다. 그늘을 드리운 웃음은 현성이 보는 그대로 처연하기 그지없다. 가을날 부는 쌀쌀한 바람에 가슴이 시릴 때처럼. 그러면서 힐끔 눈치를 보는데 일부러 그러는거 같다. 여자도 현성의 표정이 보이는대로가 아니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건가. 말을 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건 서로가 같았다.

여자가 되묻자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은 못 미더운지, 고개를 조금 숙여 눈을 치켜뜬다. 그렇게 보는 걸로도 모자라 또 묻는다.

"정말이지? 말 돌리기 없기야. 정말 뭐든 해주는거다?"

정말, 뭐든, 이 두 가지를 강조하는 여자는 이미 현성에게 부탁할 걸 정해두기라도 했나보다. 그렇게 말해놓고 뭐든 안 해주면 평생 원망하겠다는 둥 과장스럽게 저주하겠다는 둥 조잘조잘댄다. 그래도 현성이 하려던 것처럼 손을 내미려고 하거나 하지 않는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아보인다. 여자로서도 확신이 들지 않는가보다. 말만은 장황하게, 허황스럽게 해대곤 겨우 본론에 들어가려는지 여자가 조용해진다. 좀전까지는 그나마 짓고있던 미소도 사라진 얼굴로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한다.

"그러면, 말야. 나를...찾아줘."
"나를, 찾아줘.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전부가 아니어도 돼. 그냥 내가 누구였는지만... 그거만 알아도 될거 같아."

처음은 작은 목소리로 한번, 못 들었을까봐 또 한번 말한다. 다시 말하며 처음과 달리 절박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가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지었던 공포 어린 표정과는 다르다. 전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누구였는지만 찾아달라며 여자는 간절한 눈길을 현성에게 보낸다. 그러다 아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려하며 덧붙인다. 여자가 생각하기에도, 이 부탁은 역시-

"뭐든 이래서 말하긴 했는데. 역시 이런 건 무리겠지? 내가 뭘 알려줄 수도 없으니까 아마 안 될거야. 그냥...가능한만큼 여기 있지 뭐."

잠시 보였던 간절함이 거짓말 같다. 다시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여자는 소망을 포기하려는지 말끝을 흐린다. 여자 자신도 모르는 것을 남이 어떻게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도도 해보지 않은 일을 불가능할거라 먼저 고개를 돌려버리려 한다.

# 너참치 맘씨 넘 고와 ㅠㅠㅠㅠ 너참치도 감기조심해!

396 이름 없음 (GrS8rLru9g)

2021-04-07 (水) 00:31:28

>>395 답레는 내일 가져올게! 매번 답레 없이 레스 달기 뭐하니까, 보통 열두시 넘으면은 다음날 가져온다고 생각해 주면 좋을 거 같애...👉👈 잘 자!

397 이름 없음 (nXSxezAaNQ)

2021-04-07 (水) 00:36:43

>>396
# 응! 부담갖지말구 느긋하게 달아줘! 잘자라 착한참치야!

398 이름 없음 (724MJyvLGo)

2021-04-07 (水) 18:10:34

>>395

약속을 어기면 저를 원망하고 저주하겠다는데도(심지어 귀신이)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던 현성도, 이어지는 요구에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당혹감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녀의 말이 생경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 전해달라거나, 생전에 가보지 못했던 곳을 가보고 해보지 못했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보고 싶다는, 그런 부탁들만 들어왔던 그였기에.

하기야 그녀는 제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하고 있었으니 납득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꺼낼 이야기인가, 말을 꺼내자마자 포기해버릴 정도로 어려운 일인가 싶다. 현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또 별일이냐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안 들어주면 죽일 것처럼 말해놓고서, 어째서 바로 포기해버리는 건데? 내가 같이 찾아줄게. 네가 누군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 여기 봐봐."

현성이 너무 쉽게쉽게 말하는 것 같아 좀 미덥잖아 보여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법이랬다. 보고 들리는 사소한 것 하나에서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오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검지를 쫙 펴서 여자의 가슴께를 쿡 찌를 듯이 가리켰다.

"■■ 병원. 여기에 단서가 떡하니 있네, 뭐. 일단 거기에 가보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네가 같이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병원이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본다. 대로변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쯤이던가. 가본 적은 없지만 길을 오가며 종종 간판을 보았던 익숙한 이름이다. 밤하늘을 올려보던 현성은, 순간 낯선 기시감이 들었고, 어제 보았던 가느다란 은색 실을 떠올렸다. 그 실이 저 병원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두 가지가 전부라서 어떻게든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보인 적 없던 은색 실,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분위기. 그녀는 혹시 아직 죽은 것이 아니라 저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잠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꼭 소설이나 드라마의 각본 같은 이야기다. 머릿속에 스친 생각일 뿐이지만, 병원에 가게 된다면 한번 알아는 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일단 이야기하지 말자. 확실치도 않은 이야기로 괜히 헛바람을 불어넣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참. 너는 이 근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맞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같이 한번 확인해보자."

우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현성은, 몸이 찌뿌둥했는지 다리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여즉 앉아있는 여자를 내려보았다. 기왕, 병원 쪽으로 걸어가려 하며 양 손바닥을 툭툭 부딪히고는 여자를 향해 팔을 약간 벌려본다. 이리 오라고.


#오늘도 좋은 하루였길 바라!

399 이름 없음 (nXSxezAaNQ)

2021-04-07 (水) 19:37:59

>>398

역시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다. 바로 대답을 못 하는 현성을 보며 여자는 역시나 라고 느낀다.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꼭 찾지 않아도, 끝내는 여기서 사라지게 되더라도 괜찮지 않겠냐고 체념해온 시간이 있다. 이미 체념해있던 여자에게 현성은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자를 무시하지 않아준 걸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여자는 현성이 못 하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면 괜찮다고 할 거다. 괜찮으니까 가끔 찾아오기만 해달라고. 그러나 현성의 대답은 다르다. 왜 바로 포기해버리느냐며, 찾아주겠다고 한다. 놀란 눈을 한 여자를 두고 현성은 여자의 가슴께를 가리킨다. 병원의 이름이 적힌 부분이다. 현성은 재차 말했다. 여기 단서가 있다고 가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달랑 그거 가지고... 아니, 아니다. 현성이 가면 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못 미더울만치 쉽게 말하는 현성이지만 여자는 오히려 그 탓에 접었던 기대가 고개를 든다. 여자 자신은 무리라고 생각한 걸 너무나 간단히 받아들이는 현성의 태도가 어쩐지 기쁘다. 사실은 이렇게까지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는데도 무모하다시피한 부탁을 까짓거 못할게 뭐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는게 차라리 좋다. 편하다. 그제서야 여자의 얼굴에 그늘이 가신 미소가 번진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는 현성의 말에 여자도 따라 몸을 일으킨다. 현성이 벌린 팔 안으로 걸어가 여자도 손을 들어보지만 닿을 리가 없다. 허무하게 현성을 스쳐가는 손을 한번 세게 쥐었다 풀고 중얼거린다. 안 닿잖아. 불만표시라도 하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휙 돌아선다.

"나 혼자서 돌아다닌 건 이 공원이 전부야. 바깥으로 나가는 건 어쩐지 무서워져서. 그래서 못 갔어. 이쪽이랑 저쪽은 특히."

육신이 있었다면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날 듯한 걸음으로 총총 걸어가며, 조잘조잘 떠들던 여자가 한 손으로 두 방향을 가리킨다. 하나는 병원 쪽, 또 하나는 전날 가리켰던 도로 쪽. 옷의 병원 이름도 그렇고, 충분한 단서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자각이 없나보다.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걸까. 하나하나 곱씹으려 할수록 무서워지니까.

"그니까, 확실히 가야하는데가 아니면... 현성이가 같이 있어도 안 나갈거야. 무서운 건 차가운거 다음으로 싫어."

광장을 벗어날쯤 우뚝 멈춰선 여자는 현성에게 등을 보이며 말한다. 표정을 감추고 싶었던건지. 하지만 뒷짐을 진 손이 떨리는 걸 막으려고 아플만큼 꽉 쥐는게 다 보일건 생각을 못 했나보다.


#쏘쏘였다! 너참치는 어땠냐아앗!

400 이름 없음 (HyyvY39lm2)

2021-04-08 (거의 끝나감) 02:11:23

>>399
갑자기지만 정말 미안해. 나는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 글을 쓰다 보니까 점점 쓰는 속도도 무거워지고 어느샌가 부담도 느껴지기 시작해서. 대단하게 쓰는 것도 없는데 현생에 약간 지장이 갈 정도로 시간을 쏟고 있더라고. 전적으로 내 글솜씨나 마음가짐 탓이야. 정말 좋아하는 소재여서 뒤늦게 이었는데도 항상 밝게 맞아줘서 고마웠고,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로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어!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고 떠나서 정말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해. 구구절절 이야기가 많았네. 너참치의 현생도 상판도 항상 즐겁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안녕.

401 이름 없음 (IOEzqUmNQU)

2021-04-10 (파란날) 23:02:48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적막한 교실에 앉아 있었다. 이미 해는 졌고 창밖은 어두웠다. 나말고 교실에 학생은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만이 특이한 악기를 켜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는 가방을 둘러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앞문을 열었다. 바로 눈앞에는 처음 보는 또래가 서 있었다. 우리 반 학생이었던가? 나는 좁은 인간관계 탓에 이 아이의 정체를 단번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했다.
"야, 놀랐잖아. 문에 그렇게 가까이 서 있으면 어떡해?"

402 이름 없음 (IDeTGu1Fco)

2021-04-10 (파란날) 23:24:21

>>401
부활동 중에 자다가 혼자 남는 건 아마 전교생 중에 나 뿐일거다. 못된 것들. 가는 김에 좀 깨워주고 가면 덧나나. 눈을 뜨니 부실 문단속을 부탁한다는 쪽지와 열쇠만 있어서 얼마나 황당스럽던지. 궁시렁대면서 부실 문을 잠그고 교실로 가방을 챙기러 갔다. 창 밖에는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징글징글하네. 입안으로 외며 헐렁한 가디건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걸었다. 빗소리에 묻혀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건 좋았다. 여차저차 도착한 교실을 보고 앞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앞문은 내가 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열렸다. 드르륵. 거침없는 소리 뒤로 내 얼빠진 목소리가 이어진다.

"힉."

꺄악, 같은 좀더 여자아이다운 비명이 나았을라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무안함을 삭히려는 생각이었던거 같다. 어쨌든 놀라긴 놀랐으니까.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리다가 상대의 불만소리에 금방 미간을 찡그렸다.

"나야말로 갑자기 열려서 놀랐거든. 그리구, 들어가려고 했으니까 문 앞에 있었던거 거든. 내가 열려던 문을 니가 연거 뿐이야."

투덜반 따박반으로 대꾸하고 힐끔 어깨 너머로 반 안으로 보았다. 누가 좀 있나 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얘도 나처럼 자다가 이제 가나?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은. 나는 친절하게도 먼저 문 옆으로 비켜서 상대에게 길을 터주었다.

"먼저 지나가. 니가 문 열었으니까 양보해줄게."

403 이름 없음 (IOEzqUmNQU)

2021-04-10 (파란날) 23:40:06

"뭐? 교실에 들어와?? 너... 등교시간 착각했어? 지각이 심해도 너무 심하네요. 지금은 하교할 시간이야. "

이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려고 했다니 이상한 일도 다 있다. 하교시간이라고 편의상 말은 했지만 시간은 하교시간을 훌쩍 넘겼다. 나도 나지만 이 애는 뭘하느라고 학교에 남아 있던 거지? 그 애가 비켜서 길을 열어줬다. 양보는 사양하지 않고 복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문 밖에 그대로 멈춰서서 그애가 뭘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뭘 훔치려는 건 아니겠지..

404 이름 없음 (11ZNF1kqfc)

2021-04-11 (내일 월요일) 14:16:03

아이돌로서 데뷔 1년차가 된 그는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싱글로 데뷔하여 가창력으로 자신의 실력을 모두에게 보여준 이후 여러 방송에서 그를 찾고 있었고 소속사에선 물 들어올때 노를 저어야한다는 발상으로 스케쥴을 빡빡하게 조정하여 그에게 계속 일감을 주었다.

초기에야 젊은 패기로 어떻게든 했을지도 모르나 피로가 쌓이고 쌓인 탓인지 그는 조금 피곤한 듯 소속사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휴게실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는 휴게실을 눈으로 슥 훑은 후, 가장 구석자리에 있는 의자로 걸어간 후, 그는 의자에 앉았고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렸다.

그대로 수면을 조금 취하려는 듯 그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들어와도 크게 얼굴을 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그는 휴식을 취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니까.

/바쁘게 보내는 아이돌 데뷔 1년차 남성이 휴게소에서 피로를 풀기 위해서 엎드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야. 프로듀서가 와도 좋고 라이벌이 와도 좋고 연습생이 와도 좋아. 너무 뜬금없이 꼽주고 그런 것만 아니면 어떤 상황이라도 오케이야.

405 이름 없음 (PKmc4O5AaQ)

2021-04-12 (모두 수고..) 23:17:02

제 3912차 빌런 간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낮고, 차가우며 딱딱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퍼진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있고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안경 속 눈을 가늘게 뜬다. 불만인걸까?) 또 트집이나 잡으러 오신 겁니까?

406 이름 없음 (QzH2Pnq5i6)

2021-04-12 (모두 수고..) 23:25:46

>>405
(회의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턱을 괴고 능글능글 웃고있다. 당신이 저를 인식하자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며 받아친다.) 참 말 섭하게 하네. 내가 맨날 트집이나 잡는 줄 알겠어? 명색이 간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참석해주는데. 섭섭하네. (킥. 짧은 웃음이 말끝에 따라붙는다. 말과 다르게 표정이 매우 밝다.) 자자, 어서 회의나 시작해보라고. 들어주긴 할테니까.

407 이름 없음 (PKmc4O5AaQ)

2021-04-12 (모두 수고..) 23:32:47

>>406
(웃는 표정을 보곤 대놓고 눈을 피한다. 안경이 반사광에 가려졌지만 짜증이 미묘하게 섞여있다. 다만 당신의 말에 꼬리를 붙잡고 이어가다간 끝이 없으리란건 이미 경험한 탓에 알고있다. 손에 들고있는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첫번째 안건입니다. 얼마 안가 히어로 협회의 트레이닝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위협적인 다수의 신인 히어로들을 단번에 견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의견은? 하고 묻는 듯한 시선을 당신에게 둔다.)

408 이름 없음 (QzH2Pnq5i6)

2021-04-12 (모두 수고..) 23:47:22

>>407
(시시하긴. 반박 한마디 없는 당신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인다. 건성으로 서류를 들어 한눈에 훑어보고 시선을 당신에게 꽂는다. 일부러다.) 좋은 기회긴 한데. 이런 상황에 단번에 견제 같은게 가능할까 싶네? (나름 의견 다운 의견을 내주며 한 손으로 빈자리들을 슥 가리킨다.) 참석도 안하는데 시킨다고 할까. 그렇다고 둘로는 택도 없지 않겠어? 무리야. 무리. (고개를 몇번 가로젓고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듯 손을 휘휘 흔든다.)

409 이름 없음 (o8bM1jwfA2)

2021-04-13 (FIRE!) 00:05:30

>>408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정상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지 잠시 당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덕에 시선이 마주쳤지만 되려 반항감에 휙 눈을 피해버린다.) 맞습니다. 인원도 문제긴 하나, 쟁쟁한 현역들도 다수 참여하며 경계 레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저희 목표는...트레이닝 센터에서 떨어져있는 히어로 본부, 혹은 도시중심시설 센트럴. (손에서 나타난 검은 봉으로 뒷편의 지도를 가리킨다.) 폭파 후 도주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410 이름 없음 (pdlwkUTD/U)

2021-04-13 (FIRE!) 00:16:19

>>409
(반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행동이 어쩐지 간질간질해 더 건드려보고싶어진다. 지금은 좀 참자. 당신이 가리키는 지도를 보고 잠시 생각한 후 의견을 낸다.) 폭파 후 도주라.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자꾸 초쳐서 미안하지만 소수 인원으로 갔다간 집중 추격 당해서 이쪽이 위험해져. 난 그만한 리스크는 싫단 말이지. (손 하나를 테이블에 놓고 손톱으로 가볍게 두들긴다. 초침소리과 유사한 소리가 회의실 안에 작게 울린다. 손을 움직이는 상태로 역안의 눈을 굴려 당신을 주시한다.) 트레이닝으로 빠지는 히어로는 몇이나 되는지, 어느 시기에 본부나 센트럴이 가장 비는지 정도는 조사했겠지? 설마 아직, 은 아닐거라고 생각하는데?

411 이름 없음 (o8bM1jwfA2)

2021-04-13 (FIRE!) 00:31:15

>>410
(기분 나쁜 시선. 뭐라고 해야할까, 히어로에게서도 느끼기 힘든 야생의 시선이라고 할지. 누구에게서 느껴지는 시선인지는 이미 알고있다. 여전히 무시하는 스탠스를 지키며 서류를 탁 덮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주어진 모든 안건은 저희 둘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정도 조사는 이미 마친 뒤지만, 저도 리스크를 지는 건 싫어합니다. (회의를 얼른 마무리하려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을 뒤늦게 내뱉어본다.) ...오늘은 왜 이리 협조적인 겁니까?

412 이름 없음 (pdlwkUTD/U)

2021-04-13 (FIRE!) 00:49:40

>>411
그렇지. 둘로는 절대 무리라니까. 알면서 매번 이런 안건을 준비하는 너도 너다. 참. (얼른 끝내려고 하는 느낌에 그러던지 하는 식으로 저도 서류를 옆으로 밀어 치운다. 저번, 저저번, 그 전과 별다를 거 없는 회의는 지루하고 재미없다. 단 하나를 빼면.) 말했잖아? 간부의 의무를 다하러 온 거라고. 왜. 그것도 맘에 안 들어? (시선을 떼지 않고 당신을 계속 주시한다. 표정을 바꿔 불만을 내비치며 중얼거린다.) 너도 참 까탈스럽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이 회의도 매번 빼먹지 않고 참가해주는데 감사 인사 한번을 못 받네. (일부러 보란듯이 한숨을 내쉰다.)

413 이름 없음 (o8bM1jwfA2)

2021-04-13 (FIRE!) 01:20:17

>>412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조직은 금새 와해되기 마련입니다. (서류를 탁탁 모아 정돈하고 당신을 시선에 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맵이 그려져있는 화이트보드를 밀어 뒤로 돌려놓았다.) 속내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보이는 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까? 심지어 당신을 상대로. (안경 안 쪽에 비쳐진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있다. 그에 반해 당신에게 내비치는 적개심 내지 경계심은 대놓고 표정에 보여지고 있어 누구라도 알아차릴 것이다.) 당연하게 참가해야 할 일입니다. 어째서 감사해야하나요. (이쪽도 한숨.) ...의도만 고쳐서 참여해주신다면 감사인사는 고려해보겠습니다.

414 이름 없음 (pdlwkUTD/U)

2021-04-13 (FIRE!) 01:37:16

>>413
(당신의 표정이 좋지 않을수록 저의 표정은 밝아진다. 잠깐 내비쳤던 불만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회의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얄궂은 웃음을 짓는다. 어떻게든 저를 보지 않으려 애쓰는게 다 보이는게 이리도 즐거울 줄은.) 오, 잠깐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걸 사과해야겠는걸. 꿰뚫어보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거든. (쿡쿡쿡... 턱을 괸 손으로 가린 입술 사이로 나오는 웃음소리는 갈대가 흔들리는 것처럼 가늘게 흩어진다. 대놓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당신을 어떠한 질책도 없이 웃는 눈으로 바라본다.) 감사인사는 뭐 그냥 지나가는 소리고. 네가 말하는 내 의도라는게 뭔지 맞춘다면 참석하는 태도를 고쳐줄 의향은 있는데. 맞춰볼래? 넌 아마 저얼대 못 맞출테지만? (보드라운 깃털로 간질이듯 도발을 걸어 반응을 유도해본다.)

415 이름 없음 (d474y4Polk)

2021-04-25 (내일 월요일) 23:45:47

뭘까, 이 짐승은. (마치 귀족이나 입을 법한 황금 자실로 수놓아진 코트를 어깨에 걸친 백발의 소년이 자리에 쭈그려앉아 쓰러져있는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파충류와 비슷한 눈동자에 떠오른 빛의 반은 호기심, 나머지 반은...) 죽었니, 살았니?

416 이름 없음 (7vUpKmxUyM)

2021-04-25 (내일 월요일) 23:57:56

(넝마가 된 생명체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한참 동안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몸에 덮수룩한 검은 머리. 성별을 떠나 인간이 맞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다.) 사... 살려줘... (미약하게 남은 생존 의지가 생명체를 움직인다. 잔뜩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을 간신히 달싹인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명체는 생각한다.)

417 이름 없음 (7vUpKmxUyM)

2021-04-25 (내일 월요일) 23:58:11

>>416 >>415

418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00:12:45

>>416
(당신의 생존 의지를 보고나서도 이쪽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여전히 뭔가를 더 보여달라는 듯, 자리에서 턱을 괸 채 내려다보며 당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미약한 생명이 꺼져가는 걸 지켜보는 취미는 없다. 그렇다면 네게 남은 여생을 가르는 선택지는 두 가지겠지. (손가락 하나를 펼쳐보인다.) 내가 자리를 떠나고, 천천히 죽어간다. (두번째 손가락을 펼친다.) 내 시종이 될 것을 맹세해라.

419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0:17:31

>>418
(시종. 시종이 뭔지 생명체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던간에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할게, 시종, 할게... (힘겹게 말하며 생명체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는다. 더러운 손가락이 고급진 코트자락 근처를 힘없이 맴돈다.) 그러니까, 가지, 마. 떠나지, 마...

420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00:32:29

>>419
흐응. (소년의 눈가가 가늘게 휘어졌다. 이제서야 재미있어졌다는 듯이. 당신이 뻗은 더러운 손가락을 탓, 붙잡아 손톱 끝으로 당신의 검지 손가락을 쿡 찌른다. 당신의 피를 묻힌 소년의 손가락이 당신의 목가에 긴 선을 그린다. 마치 목줄처럼. 피는 서서히 당신의 피부에 스며들어 곧 흰 자국이 된다.) 계약 완료. 이젠 시종도 없다고 무시하는 녀석들이 없어지려나... (그건, 귀족이 아닌 어린아이 같은 투정 섞인 한숨.) 자, 말해봐. 당장 필요한 게 뭐야.

421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0:39:58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배어나오자 몸을 움찔 떤다.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생명체는 아직 고통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당신의 손가락이 지나간 길을 따라 목을 더듬어 본다. 제 더러운 손과 달리 당신의 손은 눈처럼 희다.) 사, 살고 싶어. 살려줘. 날, 데려가, 줘. (점점 말을 이어가기도 힘든지 띄엄띄엄 끊어진다. 숨소리가 눈에 띄게 거칠어진다.) 죽기, 싫어. 무서워. 싫어...

422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0:40:17

>>421 >>420

423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00:53:30

>>421
필멸자들이란, 듣고 배운 것보다 더 삶에 집착하는구나. 보잘 것 없지만, 스승님은 모든 이에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하셨지. (당신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져준다. 애정이 담긴 그것보다, 머리카락을 분석해보는 것에 가깝다. 거칠어진 숨소리에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짧은 섬광이 퍼졌다.) 이걸로 네가 죽을 일은 없어졌어. 서서히 나아질 테니까. 시간이 되면 일어서봐. (그대로 근처 나무로 걸어가 거기에 기대앉아 당신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424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1:05:57

>>423
(필멸자니, 스승이니. 온통 모르는 단어투성이다. 머리칼에 와닿는 손길을 느끼며 당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이전보다 한결 숨 쉬는게 편해지자 천천히 눈을 끔뻑인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서 호흡을 가다듬다 천천히 팔을 땅에 짚고 상체를 일으켜 본다. 아직도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더이상 죽을 듯이 아프지는 않다.) 와아... (신기하다는 듯이 제 몸을 내려다보다 나무에 기대앉은 당신을 향해 다가간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기어가는 것에 가깝다.) 너가, 해줬어. 고마워. 고마워. (선망 어린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난다.)

425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01:15:23

>>424
(타고난 종족의 눈을 지닌 만큼, 여러 시선에서 당신을 볼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형편없는 마력치였지만, 일렁이는 작은 빛을 보았다. 저건 조금 희귀한데. 선망 어린 눈동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당신의 감사 인사에도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본 예절부터 배워야겠네. (무심한 말투. 손가락을 까딱하자, 당신의 목가에 보이지 않는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몸채로 공중에 떠올린다. 아마도 괴롭겠지.) 목숨까지 구해준 주인에게 너, 라니? 좀 더 어울리는 호칭이 있지 않을까?

426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1:27:20

>>425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 주눅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도 잠시, 몸이 둥실 들린다. 목이 졸리는 느낌에 허공을 쥐어뜯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괴로운 통에 간신히 꺽꺽댄다.) 욱, 커헉... 주인, 주인이 해줬어... (호흡을 내쉬려 애쓰며 필사적으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미안, 미안, 해, 잘모태써, 살려줘... (발음이 뭉그러진다. 눈꼬리에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한다.)

427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01:32:32

>>426
좋아, 잘했어. 그리고 님자도 잘 붙여야지. (스르르. 듣고 싶었던 말은 들었다는 듯이 내려놓을 때는 살포시 내려놓아주었다.) 난 같은 걸 두 번 이상 말하는 걸 싫어해. 그렇지만 이유 정돈 물어봐도 괜찮아. 하지만 명령에는 토 달지 말고. (탁탁, 자리를 털며 일어서서는 차가운 파충류의 눈동자로 당신을 빤히 내려다본다.) 이름은 갖고 있어?

428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01:52:27

>>427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헐떡인다.) 으, 응. 알아써. 주, 인님. 주인, 님. (목을 억죄던 것이 사라지자마자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려 기침을 한다. 한참을 헛구역질하다 겨우 다시 일어난다.) 응, 응, 안 그럴게. 시키는 거 다 할게. (마치 생소한 말을 들은 것처럼 당신을 올려다본다.) 이름... (내 이름이 뭐지.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날 뭐라고 불렀더라. 한참 고심하며 끙끙대다 별안간 고개를 퍼뜩 치켜든다.) 괴물, 나는 괴물이야. 내 이름은 괴물이야. (자랑스럽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내심 당신이 이름을 떠올린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란다.)

429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21:04:24

>>428
(당신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설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말에는 눈을 깜빡이며 고갤 천천히 기울였다.) 괴물이라고? (당신의 앞에 훅 다가가, 희고 긴 손을 뻗는다. 그리고 당신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는가 싶더니 입술을 슥 들어올려 이빨을 확인한다.) 동족을 먹어? 생명을 뺏는 걸 좋아해? 아니면 힘 세? (전혀 그렇게 안보이는데,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손을 뗐다.) 일단 레어로 돌아갈거야. 이름은 나중에 지어줄 테니까, 레어 안에서는 말 꺼내지말고 조용히 하고 있어.

430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21:16:23

>>429
(입술과 이빨을 검사당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다.) 아닌데... (생명체는 동족을 먹은 적도 없고, 생명을 뺏는 걸 좋아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기대했던 칭찬이 돌아오지 않자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은지도 잠시, 당신의 명령에 얼굴이 환해지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조용히 있을게. 나 말 잘 들을게. (곧바로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이 어떤 명령이라도 망설임없이 들을 기세다.)

431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21:24:51

>>430
(익숙해보이네, 명령을 듣는거.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따분해보이던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희미하게 뒤섞였다. 일어서서 당신의 지저분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가 싶더니, 옷 뒷덜미를 탁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대로 처음 겪은 것이라면 현기증을 동반한 순간이동을 통해 공용 해츨링 레어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이후, 당신을 내려놓고서 탁탁 손을 턴다.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귀족의 자제들 같은 복장의 아이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거나, 비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따라와.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432 이름 없음 (1vo7JT620o)

2021-04-26 (모두 수고..) 21:32:49

>>431
헉...! (목덜미가 잡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이지러지고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지러운 느낌에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다잡는다.) ...!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당신을 급하게 쫓아간다. 처음 보는 장소와 처음 보는 사람들에 두리번거릴 만도 한데,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금색 자수가 놓인 당신의 코트뿐이다. 그 와중에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기억하고 있는지 착실히 입을 꾹 다문 상태다.)

433 이름 없음 (qQF8WL32iE)

2021-04-26 (모두 수고..) 21:59:47

>>432
(당신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곁눈질로 흘끗 쳐다본 뒤, 그대로 커다란 복도를 걸어간다. 지나가는 이들은 대놓고 면전에서 말하진 못하지만 당신과 소년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년은 꿋꿋이, 앞을 향해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여기로 들어가. (도착한 곳은, 한 고풍스러운 문 앞. 그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찰나, 왠 3명의 소년소녀들이 옆에서 웃음소리를 흘리며 걸어온다. 고귀한 공작 혈통이 뭘 데려왔나했더니, 왠 냄새나는 짐승이잖아? 같은 말들을 하며. 소년은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당신을 보곤 한숨을 내쉰다.) ...냄새나는 짐승은 맞긴 하지만, 곧 내 정식 시종이 될 아이야. 빈 머리라도 예의는 갖추지그래. (손가락을 까딱, 한다. 당신보고 인사하라는 듯이.)

434 이름 없음 (ATMxm4kxaU)

2021-04-26 (모두 수고..) 22:20:34

>>433
(당신을 어느 정도 따라잡고 나서야 겨우 주변을 둘러볼 틈이 생긴다.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줄도 모른 채 당신을 종종 따라가며 넋을 놓고 구경하기 바쁘다. 지금까지 여러 장소로 옮겨져 왔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다.) ... (냄새나는 짐승이라는 말에 몰래 팔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본다. 스스로가 더럽고 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신 또한 긍정하자 더욱 창피해진다. 손을 까딱하는 당신의 저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뒤늦게 깨닫고는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비록 무언가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명령을 따르는 방법은 이미 몸에 배어 있다.)

435 이름 없음 (W/NNc.BEes)

2021-04-27 (FIRE!) 01:39:23

조금 늦어버리고 말았다.

눈바람이 부는 겨울 숲 한가운데, 원주민들의 구전괴담 속에 등장하는 웬디고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커다란 거한이 우뚝 서 있었다. 눈이 발목 넘게 올라올 정도로 쌓여있거늘 그럼에도 그의 키는 눈보라 속에서 퍽 크고 우람해 위엄이 있는 것이었다. 입가에서는 새하얀 김이 풀풀 솟았다. 털을 그대로 남긴 가죽으로 두터운 코트를 해입고 있는 그 거한은, 이내 손에 들려있던 자루가 반쯤 꺾인 피투성이 손도끼를 버려두고는 천방지방 당황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처참한 몰골의 마차 두 대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마차를 지키는 용병이었음직한 사람이 두서너 명, 마차를 끌다 절명한 말들과 함께 죽어 있었다.

말들이 날뛰고 산적들이 고함치는 소리에, 눈 덮인 겨울 숲을 가로질러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러나 이미 산길에 겨우 닦여있던 좁은 길을 덜컹거리며 지나던 일련의 마차 캐러밴은, 산적들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찍혀서 한창 습격받고 있던 참이었다. 나무를 패던 손도끼나마 급히 휘두르면서, 이끼가 끼기 시작한 실력이나마 백분 발휘해 산적떼를 격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기껏 패어놓은 장작개비도 내팽개치고 있는 힘껏 달려왔는데도 조금 늦어버리고 말아, 대열에 있던 마차들 중 두 대는 산적들의 손에 부서지는 것을 면치 못했다.

한 대는 코끼리가 밟고 간 성냥갑 꼴이었고, 다른 한 대도 반파되다시피 해 있었다. 나머지 마차들은, 불운한 산적 떼들이 전설 속의 웬디고처럼 나타난 거한의 손에 반 넘게 박살나는 동안 이미 남자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너머로 한 줌 눈안개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차를 지키는 용병들은 이미 부상의 쇼크와 과출혈, 저체온 등으로 명을 달리해 있었고, 짐말도 마찬가지였다. 거한은 완전히 박살난 마차의 잔해를 황급히 뒤졌다. 황소 다리기둥만한 마차 골조와 판재들이 마치 삭정이처럼 툭툭 파헤쳐지고 휙휙 동댕이쳐졌다.

완파된 마차의 잔해 아래에 있는 것이라곤 어디에 쓰는지 모를 박살난 잡동사니들과 질그릇 여러 점, 이름모를 곡식이 든 식량 두어 푸대기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행히 이 아래에 사람이 깔려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그는 옆으로 넘어져서는 반쯤 박살난 마차로 서둘러 다가갔다. 마차 뒤편으로 난 문짝이 반쯤 뒤틀려있다시피 해서 열기가 어려웠지만, 그는 쉽게도 문짝을 뜯어내다시피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마차 칸에서 발견한 게, 기절해 있는 당신이었다. 거한은 당신이 미약하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잠깐 마차에서 고개를 빼서는 캐러밴 행렬이 도망간 산길을 내다보고, 마차 주변에 죽어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오솔길이라지만 짐말을 죽어라 채찍질해가며 꽁무니빼고 있을 캐러밴을, 기절한 사람을 짊어지고 달려가서 따라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죽어있는 이들에게 무덤을 세워주자니 마차 안에 있는 산 사람까지 얼어죽을 판이었다. 마을은 여기서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눈바람은 조금씩 심해져 눈보라가 될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근방에 있는 그의 오두막까지 가는 것뿐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사람부터 살려놓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남자는 당신을 흔들어 깨워보려고 했다. 거친 북부 억양이 남자의 입에서 나직하게, 하지만 다급히 튀어나왔다.

"이보시오.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정신 차리시오! 이대로 있으면 얼어 죽소!"

/ situplay>1596243042>629 를 보고 생각나서 어설프나마 써보기로..
/ 뜬금없이 꼽주는 전개만 아니면 좋다! 충분히 이어보고 싶은 참치가 이어줘!

436 이름 없음 (RN/CBqL296)

2021-04-27 (FIRE!) 03:12:15

>>435
멀리, 저 멀리. 교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짐칸 구석에 옹송그린 채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어디까지 온 걸까? 주변을 감싼 어둠과 규칙적인 소음, 덜컹이는 진동에 의식이 아득해질 즈음. 마차 행렬은 불청객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처럼 얌전한 불청각은 아니었다.

"마차에 못 다가가게 해!!"

"이놈들! 놓치지 않는다!"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소리였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고, 금속과 뼈가 부딪히고,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고.... 그리고 결국 마차가 뒤집히며, 무거운 상자가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소리. 퍽! 그녀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



이후 덩치 큰 남자가 마차를 헤집어 그녀를 끌어낼 때까지, 집 나간 그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헌 모포를 번데기처럼 두른, 검은 장발의 여성이었다.

게슴츠레 뜬 눈에는 총기가 없다. 찢어진 머리에 피가 흐른다.

"ㅊ....ㅁ...ㅂ....ㅕ..."

남자가 눈을 뜨라 채근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무의미한 음소의 집합이었다. 흐르던 따뜻한 피는 금세 김을 뿌리며 식어간다. 바람에 흔들리던 머리카락도 순식간에 얼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

눈동자가 흔들리고 힘겹게 입술을 달싹여도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스스로의 몸에 갇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437 이름 없음 (JH84EynBjo)

2021-04-27 (FIRE!) 04:07:41

>>436

쏟아진 짐가방들과 상자들 아래에서, 거한은 기적적으로 남겨진 생존자를 찾았다. 그러나 손목을 쥐어보면 그것은 너무 차가웠고, 잠깐 쥐어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열기와 맥동이 빠르게 시들어가고 있는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거한은 알 수 있었다. 경험상, 당신이 얼마 안 가 남겨진 생존자에서 마지막 사망자로 신분전환을 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거한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짐가방들을 치우고, 두터운 털가죽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코트로 감싸고는 아기 포대기를 들듯이 안아들었다.

산적들과 싸움박질을 하느라 한껏 상승해있던 체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던 코트의 안감은, 잘라놓은 통나무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와 함께 당신을 조심스레 감싼다.

거한은 당신을 안아든 채로,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발목 위로까지 정강이 5분의 2쯤까지 눈이 한 발짝 한 발짝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지만, 각반이 둘러져 있는 그의 다리는 마치 질주하는 순록과도 같이 쌓여 있는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겨울 숲을 파헤치며 질주했다.

.........

당신은 깨어날 수 있었을까?

정신을 차린다면 가장 먼저 고소한 냄새가 코에 와닿을 것이다. 눈을 떠보면 나무 판자로 꼼꼼하게 짜개못을 박아 꾸며둔 천장이 보일 것이고. 곧 자신의 몸이 매우 푹신한 침대에 뉘어져서는 깃털을 채워넣은 두터운 이불에 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틀에 털가죽을 팽팽하게 매고 안에 지푸라기와 곡물의 겨를 가득 집어넣은 침상은, 소박한 모양새와 달리 안락하게 당신을 받아주고 있었다. 당신의 머리에는 무언가 단단히 매어져 있다. 약초 짓이긴 것을 얹어놓고 붕대로 잡아맨 모양이다. 덧날 기미는 없는지 상처는 욱신거릴 뿐 가렵지는 않다.

마치 커다란 창고와도 같은 나무 오두막집의 안이다. 바깥에는 칼바람이 쌩쌩 부는 소리가 매섭기 그지없었으나, 오두막 안은 훈훈한 온기와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로 가득하였다. 당신이 누운 침상 옆의 탁자에는, 촛받침 위에 놓인 초가 조그맣지만 안심되는 빛을 만들며 타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웬 거한이 벽난로 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젓는 데에 여념이 없다. 흡사 설화 속에서 튀어나온 웬디고나 설인을 연상케 하는 모양새였지만, 벽난로가 던지는 온화한 불빛 때문인지 그는 그런 존재들보다 훨씬 유순해 보였다. 그는 누비 무늬가 있는 새하얀 털가죽 셔츠를 입고 있었다. 두툼한 바지의 정강이 쪽 단에는 각반으로 칭칭 처매어 구겨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그의 바지에 그런 자국을 남겼을 법한 긴 부츠와 각반은 난롯가에 널려 있었는데, 표면에 눈이 어찌나 많이 들러붙어 있었던 걸까, 난롯가의 열기로 눈이 녹으면서 푹 젖어 있다. 그것들을 말리는 동안, 그는 가죽으로 된 모카신을 실내화로 신고 있었다.

당신이 깨어났다면, 그는 벽난로에 걸어둔 냄비를 젓는 데에 여념이 없어 당신이 깨어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438 이름 없음 (RN/CBqL296)

2021-04-27 (FIRE!) 16:47:29

>>437

꿈을 꾸었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곤경에 처했다가 구출되는 꿈 같았는데... 기억이 닿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깨운 것은 장작이 타는 자작소리와 식기가 냄비에 스치는 맑은 소리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리면서 머리와 얼굴을 더듬자 억센 붕대가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데려왔구나. 그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더 당연한 것. 그녀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힘겹게 누인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사그작거리며 기상 알림을 울렸다.

"....."

시선이 냄비를 젓는 거한, 서리 낀 창문, 그리고 현관문 순서로 옮겨간다. 아직 머리를 후려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거한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만,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현관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슴께가 부자연스럽게 울컥거린다.

"문...문 좀...."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은데.

439 이름 없음 (W/NNc.BEes)

2021-04-27 (FIRE!) 17:40:32

>>438

"오, 정신이 좀 드시오?"

자칫 눈보라가 몰고 온 삭풍 소리에 파묻힐 수도 있는 작디작은 기상알림이었건만, 거한의 귀에는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국자를 내려놓고 얼굴에 안도의 빛을 띄며 당신을 돌아보았다.

"캐러밴 행열이 습격당했는데 당신이 크게 부상당해 있기에 우선 초라하나마 여기 모셨소. 산 아래 마을까지 데려가기엔 눈보라가 시작되려던 참이고, 당신이 얼어죽을 것 같기에..."

하고, 알아듣기 조금 힘든 북부 억양으로 상황설명을 하던 거한은, 당신이 비틀비틀 일어서자 크게 놀란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커다란 여관의 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넓고 높은 오두막이었지만 그가 일어서니 머리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이었다. 그는 당신을 기꺼이 부축해주었지만, 당신이 현관 쪽으로 비틀대며 다가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문을 열어드려도 못 나가실 거요. 아마 당신 배까지 파묻힐 만큼 눈이 쌓여있을 테니까."

부자연스레 울컥거리는 흉곽을 보고, 거한은 부축하고 있던 팔을 놓아주고는 현관 한구석에 놓여있던 나무 양동이를 들어다 당신 앞에 놓아주었다.

440 이름 없음 (RN/CBqL296)

2021-04-27 (FIRE!) 19:51:23

>>439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거한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딘가 주눅들어보이는 기색으로 묻는다.

"....도적 두목님의 전리품으로 잡혀 온 게 아니라요?"

직접 보진 못해도 시끄럽게 지르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도적 떼의 습격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힘겹게 말하던 그녀는 속을 뒤집어 놓는 울렁거림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으웨에에엑. 먹은 것도 없어서 신물만 줄창 올라온다.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뱃 속 내용물까지 공개하진 않아서 참 다행이네. 근데 뭐? 도적 두목님?

둘 사이의 키 차이는 대충 봐도 머리통 두 개 반은 되어보였다. 거한의 눈에는 조그맣다 하고 치울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크고 무서운 곰 같은 남자가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머릿속도 마침 아찔아찔해 총기가 오락가락 하니 거한이 영락없는 도적 두목으로 보이는 것이다. 투박한 북부 사투리까지 말하면 입 아프다.

"아저씨. 저, 저는 깡말라서 안는 맛이 없,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 꼬마들을 위한 동화에서 호랑이나 사자 앞에서 저는 맛이 없어요 하는 그런 상황인가. 그녀는 방어적으로 두 손을 꼭 쥐어 가슴 위에 얹은 채로 뒷발질을 친다. 도망가봤자 어디로 가려고..

441 이름 없음 (fWJoreCHY6)

2021-04-27 (FIRE!) 20:22:40

>>440

도적 두목이라는 소리에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북슬북슬까진 아니라도 턱을 뒤덮을 만큼은 자라난 수염이며, 치렁치렁 늘어진 금발이 거대한 체격과 어우러져 가장 먼저 가져다주는 이미지는 험상궂은 텁석부리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를 더러 산적이라고 많이들 오해하더구먼!" 그러나 깊숙이 패인 눈매 아래에 아이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빛을 띈 눈동자를 보자면 그는 맹수라기에는 너무 온순해 보였다. "난 그저 산속에 사는 사냥꾼일 뿐이오."

집을 둘러보자면, 벽난로 맞은편에 걸려 있는, 사냥꾼의 무기라기에는 이상한 커다랗고 넙적한 양손검을 제외하면 그곳은 확실히 사냥꾼의 오두막이었다. 벽난로 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라거나 이런저런 야채 줄줄이 매달아놓은 것들, 생활잡화나 식량이 들어있을 소쿠리들, 선반에 걸려있는 활과 화살들, 바닥에 깔린 털가죽 양탄자...

당신이 신물을 쏟아내는 동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있던 텁석부리 거한은, 당신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는 게 끝나자 양동이를 들어다가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인 듯한 나무문 옆에 잠시 놓아두었다. 그러는 바람에, 당신의 말을 반쯤밖에 듣지 못했다. 당신이 그러니까.. 하고 뒷발질을 쳤지만, 그는 당신에게 겁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고 다시 난롯가의 의자에 걸터앉아선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산적도 아니고, 식인귀는 더더욱 아니니, 적어도 이 눈보라가 그치고 머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안심하고 쉬어주시구려. 날이 개는 대로 마차에 실려 있던 짐도 가져오고, 당신을 태우고 있던 마차 행렬에 대한 이야기도 수소문해 볼 터이니."

그는 당신을 그 마차 행렬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건 그렇지 않건 별 상관 없겠지만. 남자는 난롯가에 놓여있던 빈 사발을 집어들고는 불길 위에서 조용히 끓고 있던 냄비에 국자를 담갔다. 문득 고소한 냄새가 당신의 코를 간질인다. 당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확실히 그 말마따나 당신 엄청 말랐구만. 시장하실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겠소? 묽게 끓였으니 소화하기 어렵지 않을 거요."

깡마른 것을 보고 걱정하는 그 태도는 극성맞은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보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442 이름 없음 (jR9Oy.OObg)

2021-05-09 (내일 월요일) 16:02:28

구천이 입술을 비쭉거렸다. 또다시 그의 기이한 애착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자신만의 인형도 아닌데, 구천은 꽉 붙든 상대의 손목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랑 있는 게 너한테도 더 좋을 거야.” 필사적이고 맹목적인 눈이 상대를 삼키려고 했다. 구천의 눈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이런다고 욕하지 마. 나도 지금 죽을 것 같단 말이야. 팔다리가 내 게 아닌 것 같고… 그래.” 구천이 숨을 뱉으며 상대방을 자신에게로 더욱 끌어왔다. 정말 상대를 삼키려는 속셈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제야 만족했다며 흉격에서 우러나온 정갈한, 조금은 찝찝한 웃음을 띠었다. “내가 압정으로 장난쳤다고 토라진 건 아니지?” 누구 하나 홀리고도 남을 시퍼런 눈은 언제나 소름 끼친다. 구천은 항상 상대방에게 소름 끼치는 존재라도 되어, 기억에 남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situplay>1596243042>644 요거 보고 갑자기 나도 전염돼서.. ㅋㅋㅋㅋㅋㅋㅋ ㅠ bl에 허덕이는 참치 그래 너! 나랑 잠깐만 놀아주라 ㅠㅠ

443 이름 없음 (qqIt5bIHuA)

2021-05-09 (내일 월요일) 16:33:22

>>442

"놔."

손목이 으스러질 듯 아프다. 나는 네 눈빛이 싫다. 집착으로 진득한 시선을 받으면 꼭 목까지 늪에 잠긴 느낌이 든다. 그렇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아 죽어 버릴까 두렵다. 그래서 나는 네 두 눈이 싫다. 그 눈빛이 싫다. 나는 네가 싫다.

"네가 죽든 말든 알 바 아냐. 놓으라고 했어."

잡힌 손목부터 시작해 몸이 끌려가자 소름이 돋는다. 전신이 올가미에 칭칭 감긴 것만 같다. 약한 모습은 한 치도 보이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틈을 내비치는 순간 귀신같이 알아채고 파고들 것을 안다. 그래서 강인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네까짓 것 따위가 이용할 만한 약한 부분 따위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짐이 무색하게 어느새 떨림이 시작된다.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만 같아 떨림이 멎질 않는다. 이토록 무력한 나 자신도 싫다.

"장난? 그게 고작 장난이라고?"

하, 실소를 내뱉으며 너를 노려본다. 나의 레비아탄, 포보스, 침대 아래의 괴물. 너는 내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444 이름 없음 (AT6ZSpCrT.)

2021-05-09 (내일 월요일) 17:36:05

>>443

놓으라고 해서 놓고, 그만하라 해서 그만했다면 진작에 멈췄을 것이다. 이미 상황은 치달을 대로 치달았으니 구천은 상대를 꼼꼼하게 훑기만 했다. 저항의 여지가 다분한 표정.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얇은 방어. 약간의 떨림. 구천은 잡은 손목을 제 낯짝 가까이 대고 지독하게 달 향을 들이켰다. 깊은 늪에서 허우적대는 널 건져 올려줄 사람은 나뿐이란 걸 아직도 모르고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구천은 조악했다.

“내가 다 사과할게.”

미안해. 잘못했어. 축축한 말들이 연거푸 쏟아져 나온다. 이와는 별개로 손목은 놓지 않았다. 입으로만 사과하고, 눈에는 아무런 기색도 없으니 이게 정말 사죄하는 사람이 맞는가? “그러니까 여기 있자.” 구천은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치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뺨을 붉게 물들였다.

445 이름 없음 (qqIt5bIHuA)

2021-05-09 (내일 월요일) 18:14:51

>>444

너와 맞닿은 곳부터 시작해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이 끔찍하다. 벌레는 팔을 타고 올라와 내 숨통을 막고 눈을 가린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꼼짝도 않는 손목이 못내 원망스럽다. 나는 이렇게나 약하다.

"미안하면 이거 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인다. 진심 따위는 담겨있지 않은 사죄의 말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끊임없이 속죄하는 입과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한 표정의 괴리에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심연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니체가 말했던가,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난 여기서 나갈 거야. 널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거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린다. 각오라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세뇌에 가까운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풋풋한 첫사랑을 고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뺨을 붉게 물들인 주제에 끝끝내 내 손을 놓지 않는 너를, 나는 한없이 증오한다.

446 이름 없음 (AT6ZSpCrT.)

2021-05-09 (내일 월요일) 19:46:29

>>445

구천이 아무렇지 않게 손목을 놓는다. 이전까지는 무슨 고집으로 놓아주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깔끔한 움직임이다. 상대방의 언성이 높아져서 순간적으로 놓은 걸까? 그래. 네 목이 아플까 봐.

“네가 날, 죽인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배 아플 정도로 실컷 웃은 구천은 살짝 맺힌 눈물을 없애버리고 다시 상대방을 봤다. 두 사람이 극과 극의 표정으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더 좋은 방법을 알려줄게.” 구천이 상대방의 귀로 가까이 간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주라.” 연인에게 속살거리는 것처럼 다정하다. 손에는 접칼이 들려있지만. “그럼 내가 홀라당 반해서 풀어줄지 어떻게 알아?”

447 이름 없음 (qqIt5bIHuA)

2021-05-09 (내일 월요일) 20:34:30

>>446

금방이라도 부러뜨리려던 기세는 어딜 갔는지, 손목이 맥없이 떨어진다. 붉게 남은 자욱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면서도 적대감 어린 표정은 풀지 않는다. 나는 네가 날 완전히 꺾어 놓으려 들 때보다도 이렇게 날 소중하다는 듯이, 아낀다는 듯이 대할 때가 더 싫다.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숨이 넘어가라 웃음을 터뜨리는 너를 노려본다. 이곳에서 나가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도 네게는 그저 소꿉장난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그럴 만도 하다. 너는 날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을 터이니. 여기서 나가겠다는 내 말은, 네게는 그저 커서 슈퍼맨이 되겠다는 어린아이의 소망보다도 허황된 바람일 것이다.

"죽어도 그럴 일 없으니까 꿈 깨."

귓가에 숨결이 와닿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친다. 네 손에 들린 칼만큼이나 날카로운 속삭임이다. 헛소리 하지 말라지. 나는 절대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일뿐더러, 그 말을 듣는다고 해서 네가 날 풀어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더 옥죄어든다면 모를까. 그러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네가 나를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형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내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448 이름 없음 (99VZXg/FLA)

2021-05-11 (FIRE!) 21:32:41

>>447

“내가 엄청 미운가 보네.”

구천의 표정은 시시각각 뒤바뀌고 있었다. 어떨 때는 실컷 웃었다가 어떨 때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떨 때는 낑낑대는 짐승의 얼굴을 하다가…… 지금은 낑낑대는 쪽이다. “근데, 내가 언제부터 미웠어?” 입에서 쓴맛을 느낀 구천이 묻는다. 아까 상대에게 사랑을 부탁할 때보다는 덜 절박해 보이지만, 집요한 눈을 보아하니 아직도 제 손아귀에서 상대를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구천이 상대의 앞에 쭈그린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이내 상대의 왼뺨을 살살 쓴다. 악에 받친 시선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제 행동만 몰아세우기 바쁜 얄팍한 이성. 눈앞에 있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 애정 증오 미움• 구천에게는 악영향만 끼칠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

449 이름 없음 (FPs64Rtv0s)

2021-05-11 (FIRE!) 23:51:23

>>448

당연한 걸 묻는 네 말에 대답 대신 하, 하고 짧게 조소를 흘린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버려진 어린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애처로운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괴물이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것만 같아 속이 갑갑해진다.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무고하지도 무해하지도 않으며, 언제든지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 내 목을 틀어쥘 지 모른다는 것을. 굳이 손에 들린 접칼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

언제부터 네가 미웠느냐고?

숨이 턱 막힌다. 내 감정을 고작 미움 따위에 비유하는 네가 기가 막혀서는 아니다. 처음부터였다고, 널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네가 끔찍하게 싫었노라고 저주를 퍼붓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의 관계가 항상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과거에는 분명, 네게 호의 비슷한 감정을 품었던 것도 같다. 아직 너를 제대로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그래야만 한다.
과거의 잔해가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막는다. 네가 손을 들어올릴 동안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뺨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나는 몸서리친다. 춥다. 얼음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떨림이 계속된다. 이 느낌이 싫다. 싫다. 나는, 네가, 싫다.

450 이름 없음 (5WYeWoXODU)

2021-05-14 (불탄다..!) 23:16:52

>>449 오래 놀아줘서 고마우어ㅠㅠ.. 잠깐이나마 질척한 관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좋은 밤 보내!!!

451 이름 없음 (lFmdndR/gc)

2021-05-22 (파란날) 21:32:14

“왜 떠났냐는 말은 너무 멍청한 질문 아닌가.”

네 눈을 보고 낮게 웃는다. 상처 받은 표정인지, 화가 난 표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네 표정이 구분이 안 됐다.

“그래, 여전히 널 사랑해. 그리고 그만큼 네가 끔찍해.”

어쩌면 하기 싫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났어. 아직도 내가 애틋하니?”

언제부턴가 너한테서 그림자를 봤다. 거기선 지하실의 습하고 텁텁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것이었다. 그건 내 것이기도 했으니까.

452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00:57:32

나는 너를 아꼈다. 너는 내 친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이 아프다.

"...늦었구나."

검을 빼들고 너를 마주하는 이 순간이 아프다. 죽도록 아프고 괴롭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인 게냐."

온몸이 피에 전 네가 낯설다. 내 안의 너는 아직도 천둥이 무섭다며 방으로 숨어들던 작디작은 아이인데. 마치 괴물이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네 행세를 하는 것만 같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야.

왜, 대체 왜. 차마 못다한 질문을 목구멍으로 욱여넣는다. 대신 칼끝이 너를 향한다.

453 이름 없음 (KBjsv5t3Z2)

2021-05-23 (내일 월요일) 00:59:01

>>451
"아... 그래, 알겠어."

대답을 들은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내뱉었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에서는, 내가 상대의 어디가 좋아서 연애를 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엿보였다. 애틋? 애틋해서 물어본 걸로 보이다니, 혹시 눈이 안 좋은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래, 궁금증 풀어줘서 고맙다. 나 간다, 다시는 보지 말자."

갑작스러웠던 헤어짐의 이유가 궁금했었고, 일순간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것은 차라리 잘 됐다는 감정으로 변했다. 예상 밖의 급발진에 없는 미련마저 대청소라도 한듯 말끔하게 사라졌는데다, 스스로가 잘못한 거 딱히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으니까. 끔찍하다면서 제대로 말도 못할 이유라면, 굳이 알 필요 없는 거겠지. 볼 일은 다 봤으니 일 없는 거지. 저쪽도 딱히 일은 없는 것 같고. 기분도 별로인데 맛집이나 찾아서 먹부림으로 기분이나 달래자 생각하며 그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454 이름 없음 (TzA4.M/VDE)

2021-05-23 (내일 월요일) 01:01:15

>>451인데 나는 더 주고받는 상황을 원해서 미안하지만 >>453은 답레로 못 받을 것 같아~

455 이름 없음 (KBjsv5t3Z2)

2021-05-23 (내일 월요일) 01:04:03

>>454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456 이름 없음 (llHuJSIgxk)

2021-05-23 (내일 월요일) 11:32:50

>>452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평이한 인사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당신을 그저 반가워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다. 옅은 미소마저 띠고 있는 상황은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비릿한 혈향을 두르고는 하지 못할 짓이 아닌가.

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주위를 둘러보면 알 것이다.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흘러내리는 피가 눈물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괴물 주제에 말이다. 괴물이 눈물이 있던가? 슬픔이 있던가? 그런 것을 가질 자격은, 있던가?

칼 끝이 자신을 향하자 끝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흐느낌과 진배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르던 몸이 쓰러지듯 웅크려진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 내 유일한...미련이었던 사람.

"..아하하, 하, 흐으...."

왜 이리 늦게 오셨나이까. 저를 막으려거든 더 일찍 찾아오셨어야 합니다. 괴물이 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얼굴이라도 비추셨어야죠. 적어도 당신만을 생각하며 광인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때에라도 당신을 마주했다면, 조금은 우리의 마지막이 달라졌을 터인데. 왜 이제야, 이제서야,

"저를 죽이러 오셨나이까."

몸을 숙인 탓에 얼굴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목소리는 고저없이 덤덤했다. 이미 포기한 자의 체념이 엿보인다면, 착각인가.

457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12:42:04

>>456

강녕하였을 리 만무하다. 식사를 할 때면 돌을 씹는 듯한 기분이었고, 잠자리에 몸을 뉘이면 타오르는 불판 위에 오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매일 밤 아무도 모르게 괴로워하다 까무룩 기절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너는, 잘 지냈느냐.

작금의 상황에 와서도, 나는 묻고 싶다. 밥은 잘 챙겨먹었는지. 너무 늦게 자러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상처는 제때제때 치료해주고 있는지. 보살펴주어야 하는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정작 너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이 나의 보살핌 따위는,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그래."

입안이 온통 쓰다. 분명 너는 웃고 있는데, 꼭 우는 것만 같다. 나 또한 그러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지만, 나는 울고 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대체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게냐.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음에도, 무에 그리 슬픈 게야.

"나는, 너를 죽여서라도 막을 생각이다."

너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천진하게 웃던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부 내 오만이었다. 그러니 책임 또한 내가 져야 마땅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는 속으로 못다한 말을 읊조린다.

나는, 너를 죽어서라도 막을 생각이다.

458 이름 없음 (Nto2AnjgO.)

2021-05-23 (내일 월요일) 14:22:02

>>457

들려오는 답에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기다렸다는듯이 환히도 웃는다. 꼭, 세상에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사람처럼. 마침내 마지막 소원을 이룬 사람처럼. 그래. 그러셔야죠. 그리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뇌까리던 목소리가 한순간 끊겼다. 밭은 숨을 몰아쉬다 마른 기침을 두어번 내뱉었다. 입가에 흘러내린 것을 소매로 닦았으나 이미 피로 뒤덮인 탓에 닦이는 것이 아니라 더 더럽히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소매를 바라보다 손이 떨리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칼자루를 바투 쥐었다. 아, 끝이 멀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하필 이런 인간조차 되어먹지 못한 자가 당신의 곁에 있어 죄송합니다. 이러한 끝을 마주하게 해 미안합니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나는ㅡ

"그렇다면 부디, 그 칼 끝에 망설임을 두지 마소서."

당신의 손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나를 괴물로 보십시오. 처단해야 할 악인으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한때 당신이 주었던 팔찌를 끌렀다. 이것으로 당신과의 추억도 끌러지기를 바랐다. 당신이 나를 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뤄질리 없는 바람인 것을 앎에도, 그랬다. 계속 미끄러지려는 칼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459 이름 없음 (IFxpCbOoI6)

2021-05-23 (내일 월요일) 15:22:10

>>458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나서도, 밭은기침을 하는 너를 보자 걱정이 먼저 치밀어오른다. 더러워진 옷이, 떨리는 손이, 못내 안타깝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과 비명과 증오를 뒤집어쓴 괴물이 아닌 그저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너는 몸이 약해 항상 잔병치레가 많았지. 계절이 바뀔 때면 꼭 한 번씩은 감기를 호되게 앓곤 했어. 그때마다 나는 밤새도록 네 머리맡에 앉아 물수건을 갈아 주었는데. 너는,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너는 어째서, 너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는가.

어째서 내게 이런 역할이 주어진 것인가. 늘 그래왔듯 신은 무정하다. 내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두게 하다니. 혹은, 네 손으로 내 목숨을 거두게 하다니. 신은 항상 무정하고 또 잔인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너를 거두지 않을 걸 그랬다. 다른 이의 손에서 컸더라면 너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삶의 즐거움을 알고, 매일 아침 눈을 떠 밤에 눈을 감을때까지의 그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함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정하지만 강인한 사람으로 자라, 매일을 성실히 살아가다, 어쩌면 배필을 맞고, 자식을 낳고, 그렇게 종국에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제 너무 늦어 버렸다.

칼을 고쳐 쥐고 너를 향해 달려든다. 시리도록 날카로운 칼끝이 네 목을 향해 날아든다. 적당히 봐줄 상황이 아니다. 나는 널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다. 설령 이 칼로 네 배를, 목을, 심장을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네 몸이 차게 식고 마지막 숨이 떠나가게 되더라도.

설령 그 뒤를 내가 따라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너를 막아야만 한다.

460 이름 없음 (YCEAnAd7XY)

2021-05-23 (내일 월요일) 16:12:47

>>459

애초에 시작부터 틀린 만남이었다.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시점부터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길을 걷고 말 것이다. 대신 당신과 온전한 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에게서 경멸을 받더라도, 당신과의 추억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당신이 가르쳐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칼을 쥐고 당신을 막아섰다. 죽는 건 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전할 말이 남았다. 칼을 맞대자 그제야 당신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뜯어보았다. 과거와 달라진 점도, 여즉 같은 점도 뚜렷히 보였다.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목 안쪽에서 비릿하게 올라오는 혈향을 억눌렀다.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억지로나마 꺼냈다.

"저의 목을 가져가신다면 일평생 평안하게 살 정도는 되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제게 있으니 당신은 그저, 행,복하게, 사, 시기를..."

내가 남길 마지막 모습이라면, 당신이 기억할 마지막이라면, 그래도 웃는 모습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웃었다. 행복했던 당신과의 기억을 내리눌러 밝은 웃음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아,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이제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을지 모른다. 끝마치지 못한 말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찰나에, 몸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놓친 칼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기침을 내뱉자 무언가 입 안을 굴러다녔다. 물컹거리는 것이 살조각인가 싶었다.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않고 뱉어내었다.

"부, 디...소, 인을 잊고,"

죄인인 주제에 당신의 행복을 바랐다. 그 행복을 망친 것이 바로 저일 터인데.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야가 흐려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무거웠다.

461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19:13:34

>>460

"...내가 언제, 부귀영화 따위를 바란 적 있더냐."

평생 재물이나 권력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그래, 황제에게 네 목을 바친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고 살 수 있겠지. 나는 괴물로부터 모두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고, 어쩌면 설화가 쓰여 후대까지 전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인가.

네가 없는 삶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이냐.

과거의 잔해는 전부 내버리고 날카롭게 벼린 얼음과 같은 마음을 품고자 했다. 죽음조차 불사하면서까지 너를 막고자 각오했다. 하지만 나는 칼을 내던지고 쓰러지는 너를 품에 안는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마냥 너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는 끝까지 미련하고 또 나약하다.

"아..."

탄식을 내뱉으며 핏덩이를 울컥 내뱉는 네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더럽혀진 것은 비단 너뿐이 아니다. 어찌 너만이 죄를 지었겠는가. 나 또한 죄인이요 짐승이다. 여기 피칠갑을 한 두 마리 짐승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놓지 못하고 있다.

"...아가."

그제야 너를 불러 본다. 먼 옛날, 잔뜩 겁에 질려 숨죽인 채 떨고 있던 너를 처음 그리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네 얼굴에 떨어진다. 이제 와서 둑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아가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아가, 아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오열이 터져나온다. 온몸이 칼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프다. 나는 너를 부여잡고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내가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저를 잊으라고 말하는 주제에 이리도 환하게 웃는 너를.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행복이 죽었다. 산산조각나 덧없이 스러지고야 말았다. 내 앞날에 남은 것은 절망, 그저 끝없는 절망뿐이다. 사는 것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숨만 쉬는 나날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이냐.

시선이 나동그라진 칼을 향한다. 더러워진 칼날이 이토록 달콤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거머쥔다. 목젖에 닿은 칼끝이 실날만한 상처를 낸다. 힘을 주어 칼을 꽂아넣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신을 찾는다. 만약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저 행복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달라지기를. 내 육신과 불행과 모든 것을 거름 삼아도 좋으니 부디, 이 아이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어쩐지, 아득히 먼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금자동아 옥자동아
만구강산 보배동아
둥글둥글 잘 크거라
어화둥둥 내 사랑아



/여기서 끊을까 아니면 좀 더 이을까? :)

462 이름 없음 (K9MzfmzkGE)

2021-05-23 (내일 월요일) 21:05:07

>>461

그렇게 답하는 것마저 당신다워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갑작스러운 통증만 아니었다면 그 어릴적처럼 천진하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헛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칼로 제 속을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색색 숨을 내쉬며 웃음 조각들울 내뱉었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당신이 돈이나 권력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그래서 기꺼이 내 목을 바치고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더, 럽습, 니, 다."

이미 더러워진 자를 부둥켜 안지 마소서. 당신까지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울지도 마십시오. 이제는 제가 눈물을 닦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그대는, 행복하시길 바라나이다. 저를 잊어서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나이다.

움직이려 들지를 않는 입술을 억지로라도 움직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크게 말한다 말하였는데, 저 혼자만의 착각일런지도 모른다. 실은 속삭임만큼이나 작게 들렸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예 당신에게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흘러나오는 피에 밀려 아예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시야가 흐려졌다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고통이 잦아들자 수마가 밀려들어왔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까무룩 잠들 것만 같았다. 오랜 동반자였던 죽음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더이상 버티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고 해서 마무리 지어야 될 것 같긴 한데...솔직한 마음으로는 돌리면서 너무 재밌었어서 너참치만 괜찮다면 조금 더 이어보고도 싶어.

463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21:10:02

>>462 사실 나도 너무 즐거워서 좀 더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더 이으면 좋을까? 🤔

464 이름 없음 (nNUkTgDP9U)

2021-05-23 (내일 월요일) 21:13:32

>>463 다행이다! 내 생각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하고 빌었으니까 과거 첫만남이었던 장소와 시간으로 회귀했다던가? 둘다 그래도 재미있겠고 보호자...? 너참치 캐 쪽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 너참치는 다른 아이디어 혹시 있어?

465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21:18:31

>>464 헉 마침 나도 딱 회귀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둘 다 돌아가길 바랐으니까 둘 다 회귀해도 재밌을 것 같아:) 서로 전생의 기억이 있는 줄 모르고 삽질하는 것도 묘미가 있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466 이름 없음 (uzUonpD2Ek)

2021-05-23 (내일 월요일) 21:21:56

>>465 확실히 그쪽도 재미있을 것 같지. 초반부터 보호자 안 만나려고 도망치다가 딱 들켜버린다던가...나중에 사실 알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된다던가! 난 좋아!! 앗, 그런데 이러면 생각보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너참치만 괜찮다면, 아예 어장 따로 파는 거 어떻게 생각해?

467 이름 없음 (XPZqq8jvGM)

2021-05-23 (내일 월요일) 21:24:02

>>466 나도 좋아좋아😊 음.. 그럼 우선 일대일 조율 어장으로 옮겨서 마저 얘기해 볼까? :)

468 이름 없음 (uzUonpD2Ek)

2021-05-23 (내일 월요일) 21:25:10

>>467 그러면 조율 어장에서 기다릴게!

469 이름 없음 (dGQ.9FlJrc)

2021-05-26 (水) 10:02:40

"그쪽, 진짜 신 맞아요.......?"

무슨 신이 이래. 전지전능, 자비롭고 관대하고 후광이 삐까번쩍 비치는 그런 경이로운 존재 아니었냐고. 한숨을 쉬려다 다시 목구멍 아래로 밀어넣었다. 면전에 대고 한숨 쉬는 행동은, 당신이 신이 아니고 그저 인간이라도 무례한 행동이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헤집으면서 생각했다. 신이라면 로또나 당첨시켜주면 좋으련만, 내가 지금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빈 집이었던 이웃집에 누가 들어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조용한 사람이기만을 바랐는데,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길 빌었어야 했나보다.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내지는 무능한 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서 뭐, 이번에는 뭔데요. 길멍이가 짖으면서 쫓아왔어요?"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것들이 담긴 검은 봉다리다. 사탕이 어딨지. 잘못 배운 담배를 끊기 위해서 사탕을 사는 일이 잦아졌다. 담배를 계속 피다 폐암으로 죽느니, 사탕만 처먹다 당뇨에 합병증으로 죽을 것 같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주 먹게 됐다. 덕분에 길거리에서 위로용으로 사탕을 건넬 수도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끊기면서 당신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이자쳐서 400원으로 받아낼 거에요."

이 사탕의 권장 소비자 가격을 알면 피식 웃을 법도 하겠지. 그래서 건넨 농담이었다. 200원짜리의 라임맛 막대사탕. 무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고.


/ 진짜 신이어도 좋고 사람이어도 좋으니, 이어줄 참치가 있다면 자유롭게 부탁해~

470 이름 없음 (ejvLUPvlo6)

2021-05-27 (거의 끝나감) 17:56:33

>>469

"그럼 신 맞지, 뭔 줄 알았냐."

무슨 인간이 이렇게 겁이 없을까. 정말 신이 맞느냐고 물어보는 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 말투로 미루어 보건대 반신반의 하는 반응이었다. 이어 한숨을 쉬려다 참는 행동이 퍽이나 귀여워 입매가 저절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인간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건 대부분의 신이 그러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신도 있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식어 방치에 가깝게 두는 신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이 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지 인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로 '반 휴가 반 출장'의 형식으로 지상으로 내려온 케이스였다. 아버지가 주신이기는 하나, 반 내놓은 자식이어서 인간계로 내려오는 허락을 받긴 어렵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는 진정한 신앙심을 찾기 드물다.

신이 존재하는 건 신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때, 괴로울 때,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진정으로 신을 바라는 그 마음. 그것이 신앙과 기도의 본질이었다. 때로 신들이 노파나 거렁뱅이로 분장해 인간들을 찾아가는 것도 신앙심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신을 알아보는 이에게는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런 허름한 맨션에 이사오고 나서도 굳이 신이라는 걸 감추지 않은 것이었다. 알아볼 이라면 알아볼 것이고, 그렇지 못해도 내게 손해는 없으니까.

"아니 뭐... 동네 개한테 긁혔어."

여기, 보이냐? 하고 네 눈 앞에 뺨에 난 상처를 들이댔다. 발톱에 발갛게 긁힌 자국은 신의 권능만 쓰면 0.1초만에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데 권능 낭비하기도 싫고, 우선은 '평범하게' 지내 볼 생각이어서 방치 중이었다. 네가 검은 봉지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설마 제물인가?
그런데 신에게 400원짜리 제물 바치는 게 어딨어.

당신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사탕을 받아들었다. 포장지를 매만지다 껍질을 벗기고, 라임색 막대사탕을 입에 꼬나 물었다. 단맛이 퍼진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가 보구나. 그래서 네가 단 걸 찾나 보구나.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니 소원 하나 들어줄게. 물론 로또 당첨 같은 건 안 돼. 그걸 원하면 성의를 좀 더 보이도록."

/ 재밌어 보여서 이어서 쓰다보니 길어졌네, 부담 갖지 말고 너참치도 자유롭게 부탁해!

471 이름 없음 (VfpFv0aHew)

2021-05-28 (불탄다..!) 01:22:27

과거 이야기는 캐묻지 않는 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란다, 아이야. 이미 한 번 망했던 세상이니 떠올려봤자 지금 상황이 더 쓰레기통처럼 느껴지거든. (거센 눈바람 속에서도 짐승의 발자국을 놓치지 않았다. 독한 진을 입에 머금어 체온을 높이고, 어깨에 비스듬히 맨 구식 라이플을 꺼내며 눈밭에 눕듯이 해,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킨다.) 저번에 놓친 사슴이구나. 새끼까지 있어. 침착하게 조준해. 아이가 맞지 않도록.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총구를 겨눠두고 당신의 발포를 기다린다.) …그래도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구나. 누군가를 데리고 다니는 건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지만.

472 이름 없음 (ggjqslJXsE)

2021-05-28 (불탄다..!) 03:17:16

>>470

"제 동생들이요."

아니 땐 굴뚝에 불나겠느냐고, 정말로 신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가 왜 있겠고, 다들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하지만 그들 중 누가 신이라는 작자가 동네 길멍이한테 긁히고 다닐 거라고 상상하겠냐고. 어디서 다쳐서는 사탕 하나 쥐여주니 저 봐. 웃는 것 좀 봐라. 제 동생들이 안 떠오르려야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조그맣고 저도 조그맣던 어릴 적에 있었던 일임에도 또렷했다. 놀다가 넘어졌는지 무릎을 까져 먹고 와서 울상을 짓고 있다가도, 제 목소리가 들리면 웃던 동생들 말이다. 잔소리해도 웃고, 걱정해도 웃고, 사탕을 쥐여주면 사랑한다는 소리를 곧잘 하던. 지금이야 고집불통 말도 안 듣고 쑥쑥 크는 통에 그런 일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신이 길멍이한테 진다거나 사탕을 좋아한다고는 못 들어봤거든요."

이번에는 사탕을 꺼낸 검은 봉다리가 아니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조금 꾸깃꾸깃하지만 쓰인 것은 아닌, 꽤 앙증맞은 그림이 그려진 캐릭터 반창고가 하나 손에 들려 나왔다. 이 반창고도 당신의 것인지, 손이 당신에게로 뻗어있다. 반대 손을 자세히 보면 같은 반창고가 손마디 마디에 더러 붙어있다. 언젠가 반창고를 사러 갔을 때, 운이 없어 이런 깜찍한 반창고만 남아있었기에 사게 된 것이었다. 지금 당신에게는 운이 좋은 일이다. 사탕을 쥐여주더니, 상처가 났다 하니 반창고까지 쥐여주는 이웃도 만나고. 당신이 신이라서 운이 좋은 걸까.

"소독하고 약 바르고서 붙여요. 그냥 붙이면 덧날걸."

네에, 아주 잘 보입니다. 들이대진 상처에 건성인 대꾸다. 대신 설명이 친절하잖아. 그 반창고가 당신이 문득 얼굴에 손 올렸을 때, 괜히 상처 건드려서 아플 일 없게 만들어줄 거라고. 건드렸다 덧나서 얼굴에 흉 남는 것도 그렇잖아.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 정도면 이웃에게 베풀 상냥함은 다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를 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데 당신의 말 한마디가 발목을 묶었다. 정말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어투와 성의를 보이라는 뻔뻔함까지. 진짜 신이 있고 당신이 그 신이라면. 로또 당첨이 안 되는 건 아쉽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아마도 대부분이 그것 말고도 소원이 넘쳐날 거거든. 근데 내가 지금 성의를 보이려고 해도 줄 수 있는 게 사탕 말고 딱히 뭐가 더 없는데 말이지.

"동생 대입 잘됐으면 좋겠다~ 는 돼요?"

사탕 받고 웃었잖아, 그쪽. 내 농담에 웃은 거라면 유감이지만 일단은 사탕 두 개를 더 내밀었다. 사과 맛과 오렌지 맛이다.

/ 응 이어줘서 고마워! 같이 재밌어해줄 참치가 나타나서 기쁘다 :D

473 이름 없음 (7qbpkYADpo)

2021-05-28 (불탄다..!) 10:30:39

>>471
음, 제가 선생님의 과거사를 여쭤본 적이 있던가요? (아이라 불렸으나, 제 3자가 보기에는 아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는 나이대의 그가 여상한 투로 답하며 신중하게 사슴을 겨누고 발포한다. 새끼는 도망치고, 어미는 즉사하여 쓰러진다. 다가가 제법 손상이 적은 사슴의 상태를 확인하곤 마저 답한다.) 저를 챙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시는 줄은 몰랐네요. 전 동업인 줄 알았거든요. (그는 자신이 잡은 가볍게 사슴을 들쳐맨다.) 사양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저 혼자서도 문제 없어서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474 이름 없음 (XKgjbV2YZ6)

2021-05-28 (불탄다..!) 11:23:31

>>473
응? (당황한 듯한 얼굴로 당신을 올려다보다, 같이 눈밭에 누워있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아이 역시 혼자 대답하기 시작한 당신을 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 어깨를 으쓱한다. 총을 거두는 아이에게 피식 웃어보인다.) 쉿. 아무 말도 하지말고, 반응도 하지 마렴. 아마 저 치도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니까. 종종 이야기를 들은 적 있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령같은 존재란다. 어설프게 다른 이를 흉내내서 자리를 차지하려하지만 조금만 신경써보면 눈치챌 수 있지. 갈 때 까지 기다리자꾸나. (자리를 뜨는 당신의 뒷모습을 측은한 얼굴로 지켜본다.) 가혹한 환경 탓에 스스로 스러지는 존재가 많구나. 한없이 차가운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미움받길 원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서글픈 이야기구나. (럼으로 입을 가글하고, 흰 눈밭에 뱉어낸다.)

#이걸 막레로 할게!! 이어줘서 고마워~ ㅋㅋㅋㅋㅋㅋㅋ재밌었어!!!

475 이름 없음 (7qbpkYADpo)

2021-05-28 (불탄다..!) 12:10:05

>>474 기척은 아저씨가 제일 많이 내고 있는데요. (눈밭에 드러누워있던 아이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아저씨 맨날 술 마시는 소리 내고 말하니까 사슴들이 맨날 도망가잖아요. 이제 잡아보나 싶었는데. 재미없어, 집에 갈래요. (아이는 발딱 일어나 몸에 묻은 눈을 털고 집으로 달려간다.)
/이건 내 막레로 할게, 수고 많았어~

476 이름 없음 (mQ8WYVA9As)

2021-05-28 (불탄다..!) 12:14:33

>>471 #상황 설정이 매력적이라서, 혹시 다른 참치가 새로운 전개로 이어보고 싶다 하면 괜찮을까?

477 이름 없음 (XKgjbV2YZ6)

2021-05-28 (불탄다..!) 12:29:30

>>475
#아이가 귀엽네! 술 마시는 소리 내고 말한다니...고생했어~~~

>>476
#응응 물론이지! (*^▽^*)

478 이름 없음 (mQ8WYVA9As)

2021-05-28 (불탄다..!) 13:53:57

>>471
(캐묻지 말라는 당신을 보는 눈이 시큰둥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게 숨을 내쉬는 것은 이미 몇 번쯤 겪은 상황을 다루듯 하다. 작은 몸이 당신을 따라 눈밭에 눕는다.) 알고 있어요. (접때와 다를 바 없는 일축에 시시하게 반항하는 것도 잠시, 라이플을 고쳐 쥐고 사슴을 향해 겨눈다. 조심스러운 초심자의 동작, 그러나 처음 집을 때부터 보이던 과단성은 여전하다. 건조한 방포성이 터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달아나는 어린 것이 어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여부 또한 앎을 요하지 않는다.) 저도 누군가를 졸졸 따라다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게 당신 같은 사람일 줄은 더욱이나. (가늠자에서 눈을 거둬 총구 저편으로 넘긴다. 낮게 흘리는 말은 사냥을 마치고 던지는 실없는 우스개에 가깝다. 웃음기는 흐렸지만.)

#고마워! 텀은 좀 긴 편일 듯싶어;u;

479 이름 없음 (XKgjbV2YZ6)

2021-05-28 (불탄다..!) 14:22:36

>>478
(사소한 반항은 이미 많이 겪어봐서 안다는 듯, 눈썹을 까닥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 흰 눈밭 아래에 깔린 희미한 녹초지를 찾아 주둥이를 묻는 사슴의 모습을 지켜보다, 당신이 어설프게 조준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훝는다. 하지만 점점 갖춰져가는 자세에 피식 웃음을 흘리지만, 총성에 묻히고 만다.) 당신 같은 사람이란건 무슨 뜻이니.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인만큼 물어두고 싶구나. 옆에서 술이나 마시며 집중을 방해하는 늙은이? (자리서 일어서며 털이 달린 낡은 후드를 뒤집어쓴다. 눈보라도 마침 가늘어지고, 저 멀리 뛰어간 새끼사슴의 모습은 뿌연 눈보라 속에 모습을 감추게 된다.) ...숨이 멎지않았어. 또 급하게 쐈구나. (부츠 속에서 그가 몸에 걸친 것 중 유일하게 광택을 유지하고있는 사냥칼을 꺼내들어 당신에게 내민다.) 마음 속의 기도를 잊지마렴.

#괜찮아! 나야말로 고맙지! 나도 이따 저녁에 돌아올게!

480 이름 없음 (mQ8WYVA9As)

2021-05-28 (불탄다..!) 17:24:30

>>479
그것도 괜찮게 들리네요. 그럼 옛날 일도 안 알려주는 주제에, 옆에서 술이나 마시며 집중을 방해하는 늙은이라고 해둘게요. (신발에 떠밀리는 눈만치 감촉되지 않는 중량의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묵직한 라이플을 갈무리해 어깨에 걸치면 예의 쓴말이 들리고, 사슴이 사냥꾼을 기다려주는 것도 아닌걸요, 따위의 말로 대꾸할까 하던 아이의 궁리는 날 서 빛나는 사냥칼에 조용히 사그라든다. 슬금 싫게 여기는 눈을 하며 칼자루를 받아든다.) ...목이었죠? (등에는 총을, 손에는 칼을. 사냥감에 접근하는 걸음은 빠르지 않되 주저가 없다. 무릎 굽혀 앉고 적절한 위치를 찾아 날을 꽂아넣는다. 비록 당신 말하는 마음 속의 기도는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진실되게 따른 적도 없지만 쇠하는 생명은 예나 지금이나 딱하게 비치고, 따라서 연민만은 하게 된다. 냉정하게 깜박이던 눈이 곧 당신 있는 쪽으로 향한다.)

#응 느긋하게 돌아와~!

481 이름 없음 (VfpFv0aHew)

2021-05-28 (불탄다..!) 20:12:39

>>480
(사슴의 목에 금속을 박아넣은 당신의 시선이 닿을 때 즘이면,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약해졌다고 한들 그저 한 명의 인간이 우뚝 서서 버텨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자세가 흔들리고, 눈꺼풀에 흰 눈조각이 붙어 한껏 떨려와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짧은 묵념 끝에 천천히 눈을 뜨고, 당신을 내려다본다.) ...이 말만은 해야겠구나. 처음 해주었던 네가 사냥에 소질이 없다는 이야기는 철회해야겠다. (아마도 그의 고집으로 보아,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일 지도 모른다. 칼은 당신에게서 회수하지 않은 채로 그 옆에 한 쪽 무릎을 눈밭에 대고 앉아 사슴의 몸뚱아리를 허리춤에 차고있던 로프로 묶어 썰매에 연결했다.) 그래서, 댓발 나온 입술은 언제쯤 집어넣을 거니. 옛날 일을 들을 때까지 평생 오리입으로 지낼 셈 같은데.

482 이름 없음 (mQ8WYVA9As)

2021-05-28 (불탄다..!) 23:54:48

>>481
(철회해야겠다. 당신이 다시 있을지나 모를 칭찬을 마칠 때, 큼지막한 눈은 여느 아이와 달리 휘둥그레지지도, 이채가 감돌지도 않는다. 묵언은 태연하다 못해 무념하다. 삼박 눈을 감았다 뜨며 피 묻은 날을 눈벌에 문질러 닦고 뒤집어 닦는 모습만이 그 나이대 아이답다. 성글게 남은 혈흔을 내려다보니, 이는 다시금 보아야만 한번 받은 호언을 거푸 되씹는 양같이 현시된다. 닦이지 않은 선혈은 장갑 표면으로 잡아 훔치고 사슴과 썰매의 연결을 관찰한다. 이윽고 당신을 노린 것은 댓 발 입술 소리가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셨지요. 옛날에도 지금과 같은 일을 하셨던 거예요? (하라는 대답은 않고 오히려 반문을 던지니, 아무래도 오늘의 반항도 짧게 끝나지는 않을 성하다.)

483 이름 없음 (bbKF9a.IqQ)

2021-05-29 (파란날) 01:42:23

>>472

"동생들?"

순간 멍하니 반문했다. 소원을 물어봤는데 본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말하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물론 예전에 받은 기도들 중 가족이 잘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느정도 본인이 자리를 잡고 난 뒤에 하는 말이지, 자기보다 주변 먼저 챙기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아직 남아있었나. 자신의 이익 앞에 천륜도 저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데, 조금은 놀랐다.

"그야 그렇지. 신들도 멋있는 이야기 먼저 퍼트리거든. 자기 PR의 세상이니까."

이거 영업비밀인데, 말했다가 만신전에서 쫓겨나는거 아닐지 모르겠다. 쫓겨나도 재주가 있으니 어디서든 먹고 살 자신은 있지만. 주신인 아버지가 노하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아직은 인간들과 섞여 살고 싶었으니까.

당신이 비닐봉투를 뒤적여 캐릭터 반창고를 꺼내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운 반창고를 보면 반사적으로 웃음이 흘렀다. 당신이 반창고를 내밀면 받아들고 엄지로 매만졌다. 당신의 손마디에도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곤 당신의 당부에 시선을 마주쳤다. 소독하고서 약 바르고 붙이라는 당부. 본인도 상처입었을텐데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마음씀씀이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보면, 인간들은 꼭 저런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당신 역시 잘 되어야 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세상은 꼭 그렇게 나쁜 곳만은 아니었다. 신이라는 명목 하에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세상에 좋은 면도 있다는 것을. 당신처럼 좋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뭐, 못 갈 대학을 갈 수 있게 해줄 순 없지만..."

당신이 내민 사탕 두 개를 챙겨가며 말했다. 당신의 빈 손에 대신 금색 핀이 자리했다. 뱀 두 마리가 지팡이를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사과 맛 사탕을 까서 입에 넣고 굴리다가, 당신을 마주 보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노력하면 원래 수준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게 해줄게. 상업이나 여행, 무역 쪽이 좋겠다. 그 쪽이 내 분야라 빨이 잘 듣거든."

사과 맛 사탕을 어금니로 깨물어먹고 나서 남은 사탕과 반창고를 손에 들었다. 입안에 단맛이 맴돈다.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사탕과 반창고를 챙겨넣고 나서, 당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가 떨어졌다. 당신 자신에게도 축복을 걸어주기 위함이었다.

"다 잘 될거야."

주변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맨션의 창문이 흔들릴 정도였다. 풍압을 이기지 못한 창문이 깨지면, 어느새 신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 늦어서 미안, 어떻게 이을지 고민하다가 늦었네. 나는 여기서 막레로 할게! 고마웠어.

484 이름 없음 (PEO8B/wDKE)

2021-05-30 (내일 월요일) 00:19:40

>>482
(당신에게서 돌아온 반문은 일순 뇌리를 꿰뚫는 기억의 편린이었다. 이제와서야 쓰디 쓴 극약, 그리고 스스로 타 마신 독약 역시도 밟히고 밟혀 볼모지로 변한 땅에 틈 하나 주지 못했지만, 얄궃게도 타의로 인해 새겨진 깊숙히 찔린 삽질 하나가 파묻혀있던 오물을 찌른 셈이었다.) 너같은 아이가 한 명 있었단다. 말이 많고,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거기다 행동력까지 있었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꽈악. 굵디 굵은 로프가 쥐어짜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눈보라를 뚫고 들어온 짐승의 울음소리 같다. 썰매 방향을 틀어, 저 멀리 있을 보금자리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아이는 내가 쏜 총에 맞아 죽었지. 너무 성가셨거든. (짧은 침묵. 나른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당신을 돌아본다.) 믿을 용기가 있다면, 거짓도 진실이 되는 법이란다. 그러니 진실되게 말하자면, 네가 참 혹은 거짓을 가려낼 수 있을 때까진 이 사실을 명심해두렴. (럼으로 목을 적시고, 썰매를 끌고 나아간다.)

485 이름 없음 (JaUjYkB/t2)

2021-05-30 (내일 월요일) 00:29:19

문을 여니 고소한 빵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게를 둘러보니 계산대 뒷편에 알이 둥근 은테 안경을 쓴, 어쩐지 흐릿한 인상의 점원이 한 손에 든 도톰한 책을 읽고 있었다.

486 이름 없음 (rbG5fV5p6s)

2021-05-30 (내일 월요일) 10:44:31

선배, 이제 일 좀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언제까지 저한테 보고서 부탁하실 거에요. (당신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다가, 경찰 뱃지 옆에 놓인 어린 아이의 사진을 바라본다.) 딸입니까?

487 이름 없음 (/ERnkZViFI)

2021-05-30 (내일 월요일) 17:17:10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인간 세계에 이런 식으로 퍼져있는거야?!"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과는 다른 먼 어딘가에 있는 올림푸스. 그리고 그곳의 신 중 하나인 제우스는 크게 한탄하며 인간세상에서 가지고 온 신화책을 읽으면서 격노했다. 거기에 쓰여있는 내용 하나하나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결국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번개불을 이용해 완전히 태워없애버린 후에야 그 신은 겨우 진정했다. 허나 당황스러운 감정을 전혀 감추지 못하며 금발 머리카락을 꽉 잡다가 살며시 놓았다.

"올림푸스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번개나 그런 것을 무서워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그 이후의 내용은 완전 왜곡에 쓰레기잖아. 그보다 왜 기억에도 없는 것들이 멋대로 내 자손이니 뭐니 하는거야?! 오랜 시간동안 할 일만 하고 살았는데 왜 유부남이 되어있고 바람둥이가 되어있는건데?!"

바로 근처에 있는 다른 신에게 따지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저 하소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이 억울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는 듯 다시 머리카락을 콱 쥐어잡다가 놓으니 절로 머리카락 몇가닥이 우수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쩌는게 좋을까? 어떻게 해야 이 왜곡된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까?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다가 사실 권위를 위해서 제우스의 자손이라고 칭하던 이들 때문에 제우스가 졸지에 바람둥이가 되었다는 설을 보면서 써봤어.
상대 신은 아무나 상관없어. 헤라도 상관없고, 아폴론이나 아르테미스, 포세이돈 등등. 신화의 내용이 사실은 인간들이 멋대로 왜곡하고 오버한 내용이라는 설정으로 했기 때문에 원작 신화와는 다른 성별이나 성격이어도 오케이!
막 이게 제우스의 망상이라던가, 뜬금없는 말로 꼽을 주고 가버린다거나 그런 거 아니면 어떤 전개라도 괜찮아!

488 이름 없음 (k/0o2ist92)

2021-05-30 (내일 월요일) 22:49:35

>>484
...정말 있었던 일이에요? 아니면 제게 들려주기 위해 진실처럼 꾸며낸 거짓일 뿐인가요? (아이가 알 방도는 없다. 당신이 어수선한 말로 흐트리는 일 없이, 눈 한 점 내리지 않는 설원처럼 명명하게 말하지 않는 이상. 당돌한 물음을 내놓는 아이의 한쪽 눈이, 눈조각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잠깐 빈미한다. 눈을 굳게 감았다 뜨고, 자리 털고 일어나 느짓이 당신 발자국을 따른다. 사냥할 때의 과단성은 평시라고 일변하지 않는다. 두려움 비치지 않는 동자가 잠연히 당신을 바라본다.)

489 이름 없음 (Uzh2oD5UC.)

2021-05-31 (모두 수고..) 07:37:29

>>485
트레이에 치아바타 샌드위치와 에그타르트, 초코칩 쿠키와 마카롱을 담아 계산대에 올려놓은 뒤, 그는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주세요."

490 이름 없음 (QW3upyvtvo)

2021-05-31 (모두 수고..) 08:54:24

>>486

"비슷한 거."

대답하긴 했지만, 부연을 할 생각은 없는지 선배는 그냥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 한숨이 나오기 딱 좋은 순간에, 얼굴을 묻는 팔 사이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더라도, 나한테는 소중한 존재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참으로 미묘한 뉘앙스다. 자랑스러워하는 건지, 씁쓸해하는 건지…….

"……보고서는 고마워."

491 이름 없음 (r4JsvDcY.6)

2021-05-31 (모두 수고..) 09:42:17

>>487

"그러게요, 아빠."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대꾸한 신의 모습은 어라, 흔히 '학생'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새다. 단정하게 목 아래까지 꼭 잠그고 있는 단추, 넥타이도 빼먹지 않았으며, 재킷 또한 야무지게 여물어져 있다. 참던 웃음이 기어코 터져서 짓궂게 깔깔대는 이 얼굴. 어디서 보았더라, 헤르메스라고 불리던 그 신과 닮았다. 제우스, 당신을 아빠라고 칭한 것을 보아 이 신도 인간 세상에서 퍼진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이 당신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인간 리셋?"

증거 인멸이죠, 증거 인멸. 그런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정말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과장되고 거짓투성이 신화를 없애고, 그를 알고 있던 인간들까지 없애면 바람둥이 유부남 설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대신 폭군이나 인간 박해, 그런 꼬리표가 붙겠지만. 이리 보니 어째 인간들이 보는 신화 속 이야기가 영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헤르메스, 전령의 신, 장난의 신, 나그네신…. 하소연하는 당신을 보고도 낄낄대며 장난이나 치고 있으니.

"아, 리셋하면 안 되겠다. 저 한창 노는 중이라서."

아무래도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가 인간 사이에서 학생 흉내라도 내면서 놀고 있는 모양이다. 이 장난기는 당신의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자 좀 사그라드나 싶다. 인제야 좀 진지하게, 짐짓 고민하는 체를 하는 것이다. 턱을 한 손으로 쥐며 과장된 행동과 함께.

"너그럽게 인간들을 봐주시는 건 어때요? 귀엽잖아요, 아빠."

#헤르메스의 성별은 안 정했고
#시대적 배경이 현대라고 생각하고 이었는데 아니라면 말해줘!!

492 이름 없음 (rydvM29Vv2)

2021-05-31 (모두 수고..) 10:39:03

>>490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진작 말하면 좋았잖습니까."

다시금 어린아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가, 어쩐지 짠한 느낌이 들어 사진에서 시선을 떼었다. 일은 몰라도, 위로는 젬병이라. 결국 다시금 일 이야기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현장 출동 명령 입니다. 습격 사건인데, 피해자가 아직 살아있대요."

책상 위에 엎드린 당신에게 들리도록 말하고 조용히 당신을 바라봤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에너지 드링크를 가져와 당신의 얼굴 옆에 내려놓았다.

"이거 드시고 같이 가보시죠."

493 이름 없음 (siBV5Gosc6)

2021-05-31 (모두 수고..) 13:09:12

>>492

“……내가 후배 하나는 잘 뒀지.”

잠깐 고개를 들어 당신이 내려놓은 걸 보나 싶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내 드링크의 뚜껑을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돌려 열고는, 그리 말하며 웃는다. 그 웃는 표정과 목소리에, 금방의 쌉싸래한 맛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당신에게도 그쪽이 더 익숙하기는 할테다. 성정이 거칠어지기 쉬운 험한 일을 하는 수사본부의 인원치고는 드물게도, 유들유들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인데.

“가자, 가.”

운전은 네가 하는 거지? 그리 덧붙이며, 한번에 들이킨 드링크의 병을 휴지통 안으로 솜씨 좋게 던져넣었다.

494 이름 없음 (rydvM29Vv2)

2021-05-31 (모두 수고..) 14:31:53

>>493

"저도 선배님의 파트너를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장님께서 민완형사로서 선배님께 많이 배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몸을 일으켜 드링크를 마시는 모습을 바라봤다가, 웃는 얼굴을 마주봤다. 미소짓는 당신의 얼굴에 방금의 사진은 잊어버린 것 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식사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까? 그걸론 배고프실텐데."

운전은 젊은 제가 해야죠. 당신이 던진 드링크 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말했다. 홀인원이네요. 덧붙이곤 경찰차가 주차되어 있는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피해자는 현재 입원치료 중입니다만, 현장과 병원. 어느쪽 먼저 가보시겠습니까?"

495 이름 없음 (6KFsKjcNy6)

2021-05-31 (모두 수고..) 15:15:45

" —들려? 이 사이렌 소리? "

주홍 물감을 쥐어짠듯 짙게 물든 노을을 등지고서, 한 여인이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새하얀 와이셔츠 위로 낭자한 선혈들과 두 뺨 가득 말라붙은 핏자국. 비린내나는 기괴, 찬란한 노을의 아름다움, 그 기이함. 여자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처참히 으스러진 발목이 바닥 위로 붉은 자국을 그려낸다. 그럼에도 여자는 계속해서 걸었고, 이윽고 당신의 앞에 다다라서야 자세를 낮추어 상처가 가득한 손으로 당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 나는 곧 죽겠지. "

여자가 힐긋 고개를 돌려 빌딩 아래 혼잡한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텅 빈 눈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당신과 눈을 마주할 때는, 벅찬 감정이 구겨지고 구겨져 꾹 눌린 그 오렌지빛 눈동자가 가득하다. 노을을 닮은 그 눈. 지긋지긋한.

" 함께 죽자.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악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거야. 몇 번의 삶을 걸쳐온... "

여자가 느릿히 입술을 잘근였다.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고, 돌아와 당신의 몰골을 훑어보던 여자가 건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연다.

" 아니면, 또 내 손에 죽던가. 이젠 익숙할테니말야. "

#
운명의 혐관(...)같은 느낌으로 쓴 자유상황극. 집착 빌런vs히어로 구도인데 사실 사실 히어로쪽 본성이 진성 또라이고 빌런은 생각보다 착한 놈이다! 라는 설정도 괜찮을 거 같네. 아무튼 뼈대는 악연의 붉은 실로 얽힌 운명이라는 설정! 편하게 이어줘!

496 이름 없음 (78QIj0/m7I)

2021-05-31 (모두 수고..) 20:08:31

>>491

"아빠라고 하지 마. 아무튼 인간리셋. 사실 생각 안해본 것은 아닌데 그게 절차가 상당히 복잡해서. 일단 올림푸스의 신들을 모아서 회의를 한 후에 찬성표를 많이 받아야할테고, 여기 말고 다른 곳의 신들과도 만나서 서로 협의를 해야하고 그 이후에는 그 사라진 인간들이 모두 저승으로 갈테니 저승으로 가서 또 협의를 해야하는데 하는데만 몇십년이 걸려."

헤르메스의 말에 제우스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라는 듯이 주절주절 말을 읊었다. 그리스 지대가 이 세상의 전부라면 자신들끼리만 서로 협의해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지역의 신들을 설득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제우스는 이마를 꽉 잡았다.

"대체 넌 어쩌다가 신화에선 그렇게 일만 하는 신으로 그려진거야? 지금도 이렇게 당당하게 논다고 말하는 이가 신화에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심부름꾼으로 그려지는건 불공평한거 아니니?"

물론 신이라고 해서 항상 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자신보다는 훨씬 좋은 이미지로 가득한 헤르메스가 부럽다는 듯이 제우스는 괜히 토라진 목소리를 내면서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슬쩍 헤르메스가 입고 있는 교복을 바라보면서 제우스는 뚱한 표정으로 헤르메스에게 말했다.

"인간들이 없어지면 그 교복이라는 것을 입고 어울려 놀 수 없어서 그런게 아니고? 귀엽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이대로 봐주면 계속 내가 쓰레기에 바람둥이가 되잖아. 이렇게 된 이상 인간 상태로 놀면서 사실 제우스는 그런 신이 아니라고 변호를 해주면 안될까? 넌 놀 수 있고, 나도 조금은 이미지를 원상복구할 수 있고 일석이조잖아."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한들 이미지가 확 바뀌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나 지푸라기 잡는 기분으로 그렇게 부탁하며 제우스는 잔에 잠긴 넥타르를 마시면서 헤르메스에게 한 잔 마시겠냐게 물었다.

/나도 현대라고 생각하고 썼으니 괜찮아!

497 이름 없음 (zK7vtxHJps)

2021-06-01 (FIRE!) 00:06:46

>>488
진실 같은 거짓, 거짓 같은 진실. 무슨 차이가 있겠니. 어차피 과거의 일인 걸. 우리가 지나온 흔적 역시 새 눈에 파묻히겠지. 우리가 신경써야할 건 네가 잡은 이 사슴으로 만들어낼 첫끼를 포르치니 버섯을 넣은 스튜로 할 지, 허브솔트와 카이엔 페퍼를 곁들인 구이로 할 지 정하는 일이란다. (평소처럼, 취기 섞인 가벼운 목소리다. 신앙심이 깊은 걸까, 죄가 깊은 걸까 알 수 없을 정도로 음주를 하고, 기도를 한다. 이러한 사냥 외에 그의 하루 일과는 항상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오두막에는 한기가 돌고 있었다.) 난로에 불 좀 떼주겠니. 난 이녀석을 작업실로 옮겨야겠구나. (그는 돌아오자마자 잦은 기침을 하고, 럼을 마시며 목을 달랬다.)

498 이름 없음 (XW6aL8L7P6)

2021-06-01 (FIRE!) 00:30:06

>>494

서장을 인용한 당신의 말에, 눈썹을 들어올려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정작 본인에게는 칭찬 한 마디 없었는데. 하지만 그 역시, 농담기가 다분한 몸짓이라. 이내 외투를 집어들고, 한동작으로 휙 걸친다.

“다녀와서 먹지, 뭐.”

간단한게 대답하고, 씨익 웃는다. 이래서야, 끼니 때는 제대로 챙기기나 하는 걸까 싶다. 그러고보면 당신의 선배는 꽤나 마른 체형이다. 형사라는 직업은, 몸이 재산일텐데.

“병원 먼저.”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증언을 듣고, 현장 정보랑 대조해보자며, 자연스레 조수석의 문을 열어 차에 탄다. 안전벨트 까먹지 마. 그리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499 이름 없음 (yKsWxPAR/E)

2021-06-01 (FIRE!) 01:12:52

>>498

방금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당신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 진중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저는 국가공무원1종시험을 패스한, 속칭 캐리어 출신으로 촉망받는 것에 비해서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선배는 수사본부에서도 손꼽히는 베테랑으로 가서 많이 배우라고 서장이 직접 얘기했던 터다. 그래서 우선은 당신과 조금 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었다. 문제 아닌 문제라면, 저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고 당신은 유들한 인상에 비해 빈틈이 없는 편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다녀와서, 함께 식사하러 가시죠. 선배."

당신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제 체격에 비해 마른 당신의 체형이 도드라져 보였다. 제가 고등학교 때 운동부였다는 걸 감안해도 확연한 체격차이였다.

"네, 병원 먼저."

증언 수집의 중요성인가. 당신의 말을 듣고 내심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 올라타서, 오사카 미쿠니 병원 주차장으로 네비게이션을 찍었다. 안전벨트 까먹지 말라는 당신의 당부에, 벨트 먼저 매고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시켜 서를 빠져나오면서 당신에게 넌지시 물었다.

"드라이브할 때 음악은 듣는 편이십니까?"

500 이름 없음 (8XhjqSG0Us)

2021-06-01 (FIRE!) 05:16:32

고대로부터 까마득한 세월 동안 이어지던 천마전쟁에 종지부가 찍힌지도 어언 1천년.
그 때부터 지금까지 천상이든 지하든 지상이든 천계인과 마계인은 어디서 어떻게 마주치더라도 싸움 따윈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장소 불문 이유 불문하고 절대 싸우지 말 것. 이라는게 길고 긴 평화 협정의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천마간 협정에서 유혈 사태를 초래하는 전투를 하지 말라고 했지 개인간의 사.소.한 다툼까지 금한 건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게 자신에게 그렇게 치명적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전쟁터에서 나만 집요하게 죽이러 쫓아오던 망할 천사놈이 그걸 괴롭힘으로 바꿔서 쫓아다닐 줄은...!

딸랑~

"어서오세ㅇ......"

지상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에 자리한 카페에서 일을 하던 중인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언제나처럼 손님을 맞기 위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문을 돌아봤다. 그러나 들어온 사ㄹ 아니 천사놈을 보고 급속도로 표정이 굳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긋지긋함. 저 놈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었다.

제길. 여긴 어떻게 찾아낸거지. 결계와 봉인 몇겹이나 해두었는데. 그것도 며칠 전에 새로 깔은건데! 그거 하느라 철야까지 했는데! 속에 오만가지 욕과 별별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당장 전력으로 쫓아내고 싶었지만 여긴 도시 한복판이고 지금은 가게 안에 인간도 제법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표정관리를 하고 평범하게, 최대한 평범하게 접대, 하는 척을 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어금니를 살포시 물고 웃는 내 얼굴은 가관일게 분명했다. 차라리 가관이라고 비웃어도 좋으니 제발 나가달라고, 나는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제발 가! 가!!!

//전쟁 끝났으니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계인(악마) & 어째서인지 이 마계인(악마)만 죽어라 쫓아다니는 스토커 천계인(천사)! 로 이어주실 분!
천사가 악마를 쫓는 이유는 사랑도 좋고 애증도 좋고 그냥 심심해서도 좋다! 이어주는 참치에게 맡기겠다!

501 이름 없음 (8XhjqSG0Us)

2021-06-01 (FIRE!) 05:45:11

>>500 추가. 맥브레이커는 사절이다!

502 이름 없음 (eJp8vFP/Nw)

2021-06-01 (FIRE!) 23:23:29

>>499

“듣지, 운전 안 할 때도 듣고.”

평소였다면 왜, 틀어주게? 하는 반문 정도는 이어질 법 했는데, 정작 찾아든 건 침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재미없는 대답으로 대화의 맥을 끊어놓는 건 이쪽의 성격상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생각하는 일이 있다보니 자연히 대답이 단조로워진 탓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정도를 양립시키지 못해 쩔쩔 맬 사람도 아니다. 침묵은 잠시고, 다시 말소리가 이어진다.

“근데, 지금은 브리핑이 더 듣고 싶네.”

요약해볼 수 있겠어? 덧붙인 말은 의문문이라기보다는 평서문에 가깝다. 그야, 하지 못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었다. 당신이 현장에서 기가 꺽이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여태까지 보아왔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고 있다. 뭐, 현장에는 캐리어조라고 하면 재수없는 책상붙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조금 늦었다, 미안!
# 그리고 이쪽도 막연하게 생각해둔 이미지는 있지만 그쪽 참치가 '선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얘기해주면 좋겠어~ 일단 이쪽이 생각하는 '후배'는 건장한 젊은 남성에 엘리트? 다른 사람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선배'한테는 깍듯한 편이고… < 같은 느낌.
# 그쪽 참치가 처음 시작한 배경의 상황극이니까 배경 설정 추가는 맘껏 해줘~ 이번 레스로 배경이 일본인 걸 알아서 좀 신났어ㅋㅋ

503 이름 없음 (r94sQJteqQ)

2021-06-02 (水) 02:01:44

>>495 "아-주 잘 들리네요, 늦을 줄 알았더니, 요즘은 출동 속도가 참 빨라졌어요. 그쵸?"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의 숙적만큼은 아니었지만 멀쩡하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몰골을 한, 청바지와 티셔츠 위로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 여성이 빌딩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명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말투는 숙적에게 건네는 말보다는, 이웃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듯 가볍고 태연스러웠다. 이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그는 가만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숙적의 손길을 피할 여력도 없어보였던 그였지만, 여자의 손끝은 그의 피부끝에 닿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자디잘게 조각나는 듯 하더니, 그 자리에서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도 잠시, 사라졌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재생되듯 되돌아온 그는, 조금 전과 다름없는 몰골로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죽음을 재촉하더라도 숙적에게 희롱당하는 것 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는 듯한 모양으로 축 늘어진 채, 그는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가만히 듣다,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웃었다. 함께 죽자,악연의 고리를 끊어버리자, 라. 그는 여자의 손이 미처 거두어지기 전에, 손을 뻗어 꽉 쥐더니, 힘울 주어 그녀를 바닥에 내치고 양 손목을 뒤로 잡아 단단히 고정한 뒤, 재빠르게 그 등 위로 눌러앉아 제압했다.

"어머나, 싫은데요?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세요. 안 말려요."

숙적의 등에 올라앉아 여유롭게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운 뒤, 권총을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그는 생글거리는 낯으로 나긋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제 컨디션에서 잘 생각하고 결정한 거 맞죠?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구조 요청을 하는 게 어때요? 원한다면 구급차는 불러 줄 수 있는데... 아, 물론 구속되실거고, 지금까지 적하신 죄목이면 여생을 따뜻한 감옥에서 보내실 수 있겠네요. 주기적으로 노역도 나가실 테니 심심하진 않으실 거예요. 새 친구도 사귀실 수 있을 거고... 아, 근데 그 손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네요, 모범수라도 되고 싶으시다면요!"

피투성이가 된 숙적의 등에 올라타서는 마치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듯 발랄한 투로 재잘거리는 그 모습은, 모 히어로보다는 적어도 제정신은 아닌 미치광이에 가까웠다. 그러던 그는 아! 하고 말을 멈추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곧 죽으신다면서요. 그럼 함께 죽는 거나, 그쪽이 절 죽이시는 거나, 별 차이 없지 않나요? 그리고 악연의 고리를 끊고 싶으시다면서요. 저도 완전 동의하는 바인데, 저희가 한날 한시에 죽는 거보다는, 좀 시간차를 두고 죽는 게 좀 악연을 끊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한... 50년 이상 정도면 끊어지고도 삭아 없어질 것 같은데! 어때요? 전 어차피 오래 살거니까 오늘이나 근시일내에 먼저 죽으시면 까짓거 50년 이상 살고 죽을게요. 그럼 저희 다음생에도 다시 볼일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성 또라이 느낌이 좀 살았으려나 모르겠네ㅋㅋㅋ 열심히 캐입해봤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