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거의 끝나가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는거 아닌가.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는 마치 지금이 한창 장마철인 것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는 소리는 백색소음이라고 했던가, 사람을 멍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기에 한참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내 정신을 붙잡아 온 것은 다름 아닌 너의 목소리.
" 있어도 내가 말린다. "
아이스크림에 뭐라도 들어있었는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건 대체 무슨 의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창문에서 너의 얼굴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쭉 뻗고 있던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묻는다.
" 뭔 소리야. 내가 너 불쌍해서 놀아주는거라곤 생각 안해봤어? "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위로 튕기고 다시 잡는다. 그리고 다시 튕기고 잡고, 다시 튕기고-.
" 아, 미안. "
동전은 이번엔 수직으로 낙하하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다가 너의 머리에 안착한다. 그것도 정수리에 정확하게. 나의 신들린 명중률에 터져나올뻔한 웃음을 겨우 참으며 나는 그대로 너의 머리로 손을 뻗어서 동전을 잡으려다가 말했다.
" 실버타운 들어갈때까지 너랑 알고 지내야해? 으, 미래가 좀 어두운 것 같다. "
말은 그렇게해도 표정은 웃고 있다. 그때까지 서로 솔로면 언약식 같은거라도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하, 참. 어이없는 듯한 소리가 비실 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해가 숨은 지 오래라, 어두운 바깥 풍경이 창문을 거울로 만들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창문에서 시야로, 고스란히 맺혔다. 와삭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아이스크림을 씹어먹는 소리였다.
"어이구,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 표정도 그러해서, 깐족거리며 창 속에 맺힌 너를 바라보았다. 눈치채지 못 하면 그건 그것대로 우스웠고, 눈치채면 그건 또 그것대로 우스워서 비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 있자니 튕겨지던 동전이 그리는 궤적이 좀 이상하더라. 그리고 눈치챘을 때는 이미 머리 위에 동전이 안착해 있었다.
"용돈 감사."
그것을 너보다 먼저 손아귀에 쥐려고 했다.
"왜. 나 아예 니랑 옆집 살 건데. 대충 넌 303호, 난 304호."
미래가 좀 어둡다는 말에 아주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찌나 밝게 웃었는지 그 눈매가 휘어지더니 꼭 초승달 모양을 그렸다. 분명 약 올리는 것이다.
"빡시게 벌면 같이 들어가주게? 그럼 대신 집안일 니가 해."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몇 번 쓰레기통을 향해 던질 듯한 시늉을 해보이더니, 곧 쓰레기통을 향해 휙 던진다.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던 막대는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간다. 그러면 화색을 비추며 네게 으스댄다. 막대를 한 번에 쓰레기통으로 넣었다며.
이 주장에 흠이 있다면, 연애 횟수가 0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네 온화한 미소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다가, 비아냥거림에도 웃음으로 넘겨버리면 그제서야 몸의 방향을 틀었다. 거꾸로 앉아있던 의자에 바른 방향으로 앉나 싶더니, 양반다리를 틀고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퍽 편해보이는 자세였다. 그러나 표정은 너를 약 올리는 것이 실패해 되려 저가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이따 츄파춥스 사먹을 거."
그것도 고작해야 미니 츄파춥스였다. 100원을 눈 앞에서 흔들거리더니 주머니 속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 100원 대신 츄파춥스가 손에 들려 있었다. 짧은 손톱으로 비닐포장을 벗기려하면 잘 되지 않는 듯 틱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금방 스러지는 작은 소리다.
"그럼 내가 큰방."
땅따먹기라도 하는지, 한 집에서 살자는 말이 나오면 냉큼 구획을 정하고 있었다.
"손빨래도? 주름 각 맞춰서 다림질 해줄 거? 인형도 다 세탁해줄 거?"
괜찮다는 말을 집어넣으려는 못된 심보가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말들이 줄줄이 나열됐다.
"엥."
에엥? 그러는 너야말로 구라 까지 말란 듯 의심의 눈초리가 또렷히 향한다. 목소리에 당황과 불신이 어려 있었다. 표정 또한 그러했지만 곧 고민하는 낌새가 어렸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면, 묘한 설렘과 부끄러움도 조금 묻어 있다.
>>772 (이번 데이트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절대로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 것.) (언감생심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데이트" 라는 이름으로 당신과 함께 외출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스노우볼이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와 버린 걸까.) (가슴 속에서 날뛰는 심박음 때문에 영화 내용마저 머리에 잘 안 들어을 정도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태연한 척을 그럭저럭 잘 해온 것 같다.) (아직까진 이걸 들키고 싶지 않다...) (그것과 별개로 마음에 짚이는 점이라면 당신의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아보이는 것 정도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당신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보여.
피식, 하고 비웃음 아닌 비웃음이 새어나온다. 쉽게 흔들릴 사랑이고 자시고 뭘 해봤어야 알겠지.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나도 연애는 해본적이 없다. 나 좋다는 사람이 있어야 연애를 하지. 너가 자세를 바꾸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는 것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사탕껍질을 벗기려는 손짓이 답답해 손을 뻗으며 얘기했다.
" 줘봐, 내가 까줄테니까. "
손을 뻗어서 사탕을 달라는듯 까딱거린다. 그거 하나 못까고 있어. 사탕을 받으면 깐 다음에 입에 넣으려는 시늉을 하려다가 건네줄 생각이었다.
" 그래 너 큰방 써. 난 방 큰거 필요없다. "
몸 뉘일 곳이랑 내 물건들이 들어갈 공간만 있으면 된다. 돈도 내주는데 내가 작은 방 써도 할 말 없지 뭐.
" 다~ 해줄테니까 돈 많이 벌어오세요~ "
돈만 많이 벌어오면 더한 것도 해줄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 은근 있는데. 너가 아는 애도 있고. "
간만에 재밌는게 생겼다는듯 평소와 다름없는 웃는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한껏 장난끼가 들어가있다. 목소리에 들어가있는 저 설렘이라니. 그래도 누가 자기 좋다고하면 좋은 감정은 숨기지 못하나보다. 올라오는 묘한 감정을 무시하면서 나는 핸드폰을 열며 말했다.
거만한 태도를 취해보려는 것인지, 사탕을 까던 것을 잠시 그만두고서 팔짱을 끼어보였다. 우습지도 않다는 듯한 비웃음은 너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것뿐만이 아니었다. 도긴개긴, 도토리 키 재기. 그러다가도 네가 손을 뻗으면 사탕을 쥐어주었다. 까딱거리는 손길에 쥐어진 사탕의 비닐포장에는 조금 찢긴 자국만 있었다.
"큰방 써야 더 많이 어지럽히지."
그러고서 씩 웃어보이더라. 집안일을 네게 다 떠넘겼으니 부러 짓궂게 말하고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눈치챌 것이다.
"그래, 내 등골 아주 다 빼먹어라."
어후, 내 나이가 몇인데. 궁시렁거리는 목소리에, 등허리를 툭툭 두들기는 시늉까지 해보인다.
"진짜로?"
네게 깃든 장난기가 영 못미더웠다. 나 좋다는 애 없냐며 얘기했으니 그 주제로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불신의 싹이 움텄다. 그리고 딱 그만큼 신뢰의 싹도 움텄기에 영 고민스러운 것이다. 여느 비유처럼 봄바람이 나부낀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미약한 것이었지만, 누가 저를 좋아한다니 기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 완전 궁금한데. 알려줄 거야?"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등받이에 편히 기대고 있던 자세가 바뀌었다. 의자를 끌어 네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더니 네가 무슨 대답을 들려줄지 기대하고 있단 걸, 조금은 두근거리고 있단 것을 숨기지도 못 하고서 있다.
받은 사탕을 손쉽게 까서 입에 넣으려는 시늉을 했다가 그대로 다시 너에게 건네준다. 사탕을 감싸고 있던 봉지는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고서 너의 말에 고개를 삐딱하게하고선 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작게 한숨을 내쉰다.
" 내가 놀아줌에 감사히 여기거라. "
진짜 나 아니면 너 놀아줄 애가 없다 정말. 하지만 이런 상황이 마냥 즐겁기만 했기에 표정은 여전히 미소가 한가득이다.
" 이런걸로 거짓말은 안해. "
역시나 너는 속마음을 숨기는데 능하지 못하다. 못믿겠다면서도 기대가 된다는듯한 저 표정. 지나가다 처음 본 사람에게 물어봐도 누구나 알아챌만한 표정이다. 내가 거짓말이라고 하면 분명 실망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날 째려보거나 하겠지. 그런 모습도 재밌겠지만 이번엔 조금 봐주기로 했다.
" 그게 누구냐면~? "
핸드폰을 열어서 마치 누군가를 보여줄 것 같이 연락처를 쭉쭉 내린다. 허나 애초부터 보여줄 생각은 없었기에 연락처의 끝에 도달했을때 나는 화면을 꺼버리며 얘기한다.
" 비밀이야~. 내가 알려줬다 그러면 화낼껄? "
한대 맞을 각오하고 큭큭대며 말한다. 근데 정말 거짓말은 아닌게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있단 말이야. 바보 같은 녀석아.
사탕을 먹다 말고 입이 벙긋거린다. 소리없이 네가 말을 전하고 있었다. 재밌냐? 그 세글자를 소리낼 때의 입 모양이었다.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한 번도 깔끔하게 이겨먹은 적이 없다. 사탕을 까득 깨물어 먹으려다 실패하고서는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린다. 왼쪽에 튀어나와있던 막대가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순...!"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걸로 거짓말 안 한다는 말이 분명 거짓이리라 생각했다. 이런 얄팍한 수에 넘어간 저가, 얼굴을 붉힌 저가 바보면 바보였다. 어떻게 하면 이것보다 더 크게 골탕 먹일 수 있나 싶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주자니 그건 따라하는 기분이라 별로였다. 일단은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곧 선에 휴대폰이 쥐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분주하다 싶더니 앨범에서도 한 폴더를 콕 집어 들어간다. 그리고 화면을 네게 보여준다.
"이 구라쟁이야, 누군 없냐?"
함께 지낸 시간이 몇 년이면, 흑역사도 몇 년이다.
"너무 자뻑이 심하신 거 같은데."
그리고 있는 꼬투리, 없는 꼬투리를 잡았다. 장난에 크게 당한 것이 어지간히도 분한지라 이것저것 말꼬리를 잡았다.
"이게 친구 등골 빼먹으려고 작정했나. 공짜 집이 그렇게 좋냐? 아까는 미래가 어둡다더니. 너 그러다 대머리 된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반응에 진즉에 이런 장난 한번 쳐볼껄, 하고 과거의 나에게 후회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봤으니까 다행이지. 약간은 화가 난듯한 너의 표정과는 다르게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네 얼굴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장난도 자주치면 장난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한동안은 봉인이다.
" 허어어, 진정해 진정. 거기 뭐가 들어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
내가 보여준 것처럼 내 흑역사가 잔뜩 모여있는 폴더가 네 핸드폰에서 보인다. 금방이라도 여기저기 흩뿌릴 기세라 일단 진정하라는듯 손짓을 하면서 내 핸드폰부터 후다닥 주머니에 넣는다. 서로가 서로의 폭탄 스위치를 갖고 있는 셈이라 결국 자멸하는 길이다.
" 자뻑이라니 말이 심하시네 ... "
상처받은 표정으로 풀죽은채 시선을 피한다. 물론 정말로 삐진건 아닐테고 너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 왜? 내가 항상 하는 행동이니까. 그래서 금방 표정을 풀고서는 네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답한다.
" 너도 공짜 집 준다고하면 귀가 솔깃하지 않겠어? 요즘 안그래도 집값 비싼데. "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고 다시 쏟아지겠다는듯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저 멀리에선 번쩍이는게 번개까지 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할 말은 해야겠는지라 그리 말하면서도, 어쨌든 서로의 폴더에 있는 흑역사는 공개되면 안 되는 것이다. 네 휴대폰이 주머니 속으로 자취를 감추면 저도 슬금슬금 폰을 집어넣었다. 너와 이리 티격태격 지낸 시간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또 이런다, 또. 자뻑 맞거든?"
여느 때와 같이 곧 표정이 풀릴 것을 알고 있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너일테고, 너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저이겠지.
"네, 대머리씨."
삐지거든 존댓말을 쓰고는 했더라. 너를 보지 않으면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창 밖이었고, 어느새 쏟아지던 비가 그쳐가고 있는 풍경이 눈에 담겼다. 아직 어두컴컴할지라도 아까까지만 해도 창문을 거세게 두들기던 빗줄기보다야 나았다.
"두번째요."
입에 물고 있던 사탕도 꽤나 녹아내렸다. 이번에는 한 번 깨물어 부술 수 있었고, 그래서 막대를 입에서 쏙 빼내었다. 아이스크림 막대로 했듯이 다시 한번 쓰레기통을 겨냥한다. 던질듯한 시늉이 몇 번 이어지고 나면,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화색이 도는 것도, 네게 으스대는 것도 똑같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자신이 네게 삐져있다는 걸 기억하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의 응용이었다. 혀를 내밀었을 때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는데, 너에 대한 얄미움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건 삐져있다는 시위였다. 그래도 별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든다면, 너와의 관계가 그만큼 불안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렇게 큰 장난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 아니. 이르면 곧 다시 웃으며 대화할테다.
"네이네이."
뻔뻔하게 굴었다. 사탕 막대를 던진 적도 없단 듯이, 네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일어났다. 입 안에 아직 박살난 사탕 조각을 녹여먹고 있었지만 이 입 안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이 바닥에 그림자로 그려졌는데, 그 위로 한 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지워진다.
"됐거든요, 그지 대머리씨."
즐겨입는 아우터였다. 후드집업의 지퍼를 쭉 올리더니 후드를 폭 뒤집어썼다. 우산이 없으니 그 대신 빗방울을 막아줄테다. 후드를 쓰고서 너를 바라보고, 눈이 마주치면 샐쭉 웃었다. 이미 사탕 막대를 골인시켰을 때 들켰을테지만, 삐진 건 이미 반쯤 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야. 여기서 말 못 해? 이라도 걸림?"
카페에 가서야 물어볼 법한, 네가 저에게 궁금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곤거린다.
>>778 아, 응. 괜찮아. 근데 왜 이렇게 덥지. 괜히 껴입고 왔나보다. (뭐지, 내 추악한 욕망을 들켜버린건가? 순간 당황하는 바람에 어색한 변명과 미소가 튀어나와버렸다. 빵빵한 영화관 에어컨이 부족할 리 없으니. 그러고보니 데이트…내내,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지만, 역시 당신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자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이었다. 서두르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며 걸치고있던 가디건을 추워보이는 당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걸치고 있기 더워서, 가지고 있어 줄래? (영화가 상영 중이니 조그맣게 속삭이고는 슬픈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한다.)
혓바닥을 잘라간다니 소름 돋는다. 하지만 내가 얄미운 짓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저렇게 삐진듯 존댓말을 하고 있어도 곧 웃으며 이쪽을 바라볼 것이라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처음엔 좀 쩔쩔매기도 했었지만 이젠 삐진 것과 삐진 척을 구분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너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일어난다. 그림자 옆에 하나의 그림자가 더 드리워진다.
" 진짜 사준다니까? 허, 사람 말을 못믿네. "
방금까지 놀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 사줄 용의가 있었는데. 저런 반응이면 사주고 싶다가도 사주기 싫어지는게 사람 마음인데 ... 하지만 이번엔 내가 장난을 조금, 아주 조금 심하게 친 것 같으니까 내쪽에서 한번 숙이고 들어가주 주기로 한다. 머릿속에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흘리는 피눈물은 애써 무시하며.
" ...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구나 넌 ... "
그 입에서 나온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잠시 얼빠진 얼굴로 너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저으며 내 후드도 똑같이 뒤집어쓴다.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금방 다시 비가 내릴테니까 관건은 속력이다. 뛸 준비 됐지? 눈빛으로 너를 바라본 나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연다. 비가 아예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슬비처럼 내리는 비는 충분히 맞으면서 뛸만한 것이었다.
" 가자! "
목적지는 여기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카페였다.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있으려면 카페가 좋지. 길거리 곳곳의 물웅덩이를 밟지 않으려 솜씨 좋게 겅중겅중 뛰면서 카페를 향해 질주한다. 아무리 여름의 끝자락이라고 여름은 아직 자신이 끝나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있어서인지 금방 땀이 흘러내린다.
" 허억, 허억, "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어느새 카페 앞에 도착한 나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와 동시에 카페 밖에서는 번개가 한번 크게 치더니 비가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이스 타이밍, 너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씨익 웃어보인다.
네 말을 듣고선 쿡쿡 웃으며 너를 보았다. 과장된 말투가 웃음을 유발했고, 웃음은 잠깐 토라진 것을 되돌리기에 충분했다. 절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뭐 어떤가. 실버타운 들어갈 각오도 했고, 비록 등골 빼먹을 작정으로 같이 살겠다 해준 것이지만 같이 살 친구도 있다. 놀린 건 되갚아줄 작정이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았다.
"방금도 구라쳤잖아. 믿겠냐? 거기다 니 입으로 그지라매."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100원을 꺼내 보여준다. 네 것이었던 것이 이제는 내 것이 되었고, 넌 정말 100원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겠지. 탈탈 털어도 먼지만 날릴 주머니를 보여줬던 건 어떻고.
"새삼스럽게."
얼빠진 얼굴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듯 쳐다보았다.
"그럼 그거 아니면 뭔데."
치질말고 여기서 말못할, 카페에 가서나 물어볼 말. 생각해보면 치질 걸렸는데 어떡하냐는 물음도 카페에서 하느니, 여기서 귓속말로 하는게 나을 성 싶다. 나만큼 날 잘 아는게 너일텐데 뭐가 물어볼게 있다고. 그러나 고민해볼 시간도 없이 문이 열렸다. 부슬부슬 여름끝에 맺히는 빗방울은 카페까지 달음박질 치는 동안 사람을 적시기에는 부족했다. 뛰어가던 도중 후드가 벗겨지지만 않았다면 더욱 그러했다. 언제 벗겨졌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촉촉했다. 여느 털달린 네발 짐승이 그러는 것처럼, 네 뒤를 따라 도착한 카페에 들어서며 고개를 탈탈 털어냈다. 흠뻑 젖은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감기 들지는 않겠거니.
"담배 피냐? 폐활량 무슨일."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제 코에, 네게서 담배 냄새가 걸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네게 다가간다. 가까이서 맡으면 담배 냄새가 날까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타이밍에 번쩍 치는 번개에, 천둥 소리 뒤로 이어지는 빗소리까지. 너와 가까운 거리에서 움찔 놀란게 괜시리 쪽팔려서 냄새 맡는 것은 포기하고 멀어진다.
핸드폰 케이스 뒤쪽에서 카드를 꺼내 눈 앞에 흔들어보인다. 이 플라스틱 쪼가리만으로도 모든 거래를 할 수 있는 세상에서 누가 현금을 들고다녀. 물론 여기에도 돈이 잔뜩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너에게 음료수 한잔 정도는 사줄 수 있는 돈이 들어있는데. 하지만 일단 비가 다시 오기 전에 카페로 가는게 먼저라 나는 신발끈을 묶는다.
" 카페 가서 말해준다고. 성격도 급하시네요 정말. "
후드를 뒤집어 쓰며 얘기한 나는 그대로 카페로 향한다. 그렇게 카페 문을 열고서 뒤를 돌아보았을때 뛰다가 후드가 벗겨졌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장대비를 맞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 부슬비는 너나 나나 평소에도 수없이 맞아왔다. 이런걸로 감기에 걸릴 네가 아닐테지. 익숙하다는듯 머리를 털어대는 너를 바라보다가 담배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냥 오늘 컨디션이 안좋은가봐. "
평소라면 한달음에 달려와도 별로 힘들지 않았을텐데 왜이리 힘이 드는지. 비오는 날엔 기력이 별로 없던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일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숨을 고른다. 담배 냄새라도 맡으려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너가 천둥 소리에 놀라 움찔하는 것을 보고선 피식, 하고 웃어넘긴다. 어차피 담배 안피는데 무슨 담배냄새람.
" 이걸로 결제해. 진짜 사준다니까. 나는 항상 먹는 초코 스무디로 부탁해. "
아까처럼 핸드폰 케이스 뒷면에서 카드를 꺼내서 너에게 건네주면서 말한다. 받아가던 받아가지 않던간에 주문을 하러간 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숨을 천천히 고른다. 앉아서 조금 쉬자 거칠던 호흡이 빠르게 얌전해진다. 너가 돌아오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버리고는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려는듯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인다.
이 성격 모르고 친구로 남아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해줄 생각이 없어보이니 한 번 툴툴대고 말았다. 카페에 도착하는데는 잠시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조금만 참지.
"내가 뭔 소릴 했다고. 컨디션?"
고개를 털다가 덜 털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탈탈 털어냈다. 물방울이 자그맣게 튀었고, 손에도 물기가 남았다. 몸도 안 좋은데 비 사이를 뛰었다 생각하니 네가 고른 메뉴는 자연스레 기각되었다. 찬 거는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 네게 말하지 않고 메뉴를 바꿀 예정이다. 손에 물기만 없었어도 이마에 손을 얹어 대강이라도 열을 재봤을텐데, 그럴 수도 없고.
"어어. 감사."
카드를 받아들었지만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 때는 제 것을 꺼냈다. 컨디션 얘기만 안 했어도 염치없이 네 카드로 시원하게 긁어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따뜻한 초코라떼와 청포도 에이드를 한 잔씩 주문하고, 계산대 바로 옆에 진열된 쿠키가 맛있어 보이길래 그것도 하나 결제했다. 결제된 쿠키는 바로 입에 문 채로 손에 쥔 진동벨을 흔들거리며 네게 돌아왔다. 화이트 초콜릿 칩이 콕콕 박힌 단 것이었다.
"쿠키 드실?"
네가 먹는다고 하면, 바로 입에 물고 있던 부분에서 아랫쪽을 뚝 반절 내어줄 생각이다. 실상은 제 돈으로 군것질을 하는 중이었지만, 네 돈으로 샀으면서 네게 선심쓰는 척을 해보인다.
"이걸 굳이 카페까지 와서?"
네 맞은편에 앉고 나서, 드디어 뭘 물어보려나 귀 기울였더니 별 시답잖은 것이었다. 이게 무슨 중대한 비밀 이야기라도 된다고 목소리도 죽이고, 카페까지 와서야 물어보는지.
"방금 생긴 듯. 저기 보여? 새로 온 알바같은데 좀 내 취향. 꼬셔볼까?"
널 따라서 작은 목소리로 답하더니, 눈짓으로 처음 보는 알바생을 가리켜 준다. 정말로 첫눈에 반했다란 이야기는 아니어도 확실히 취향이기는 했다. 쿡쿡 웃으며 말해버려 장난인게 다 드러났겠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보단 아무것도 바라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어설프다 생각해 숨겨놓고 있었던 마음인데, 그것에 당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손가락 하나라도 툭 닿으면 뜨거워진 손끝에 쿵쿵 뛰는 심장박동이 손끝을 통해서도 충분히 당신에게 흘러갈 지경이었기에. 무심한 얼굴이 언제까지 방패가 되어줄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다.) (무릎 위에 떨어지는 가디건에도 흠칫 놀라려다가, 당신이 서운해할까 봐 가디건을 조심스레 개킨다.) 네. (그러다 당신의 말이 짚여 무언가 닦을 게 없나 크로스백을 뒤져보는 손에 걸리는 게 있다. 언젠가 생일에 손수건을 선물하면서, 가방에 손수건 하나 넣어 다니라는 친구의 조언에 향수를 가볍게 뿌리고 넣어두고 잊고 있었던.. 하얀 손수건이다.) (향은 많이 죽었지만, 사용하지 않아 하얗고 말끔한 그것을 당신에게 내민다.) 자요... 땀이 많이 났어.
몸에 조금 힘이 없는게 정말로 컨디션이 별로인가보다. 으음 보통 이럴때는 다음날 앓아눕던데.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이러는건 반칙이다. 하지만 정말 아프다던가 그런건 아니라서 내색 하나 하지않고 주문을 하고 다녀오는 너를 바라본다. 입에 쿠키를 물고 오는게 저것도 내 돈으로 산건가.
" 내 돈이잖아. 반 줘. "
손을 뻗자 반을 뚝 잘라서 나에게 건네준다. 초콜릿 칩이 박혀있는 쿠키를 작게 한입 물자 과자 부스러기가 옷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손으로 대충 훌훌 털어버리고 이윽고 내가 준비했던 질문을 물어보자 별 것도 아니라듯이 답하는 너의 모습에 다시 몸을 뒤로 기울여 의자에 기댄다. 그래 이런걸 물어본 내가 바보지. 너의 눈짓을 따라 알바생을 바라보자 확실히 네 취향에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
" 아서라 아서. 오늘부로 그만둘라. "
이 카페에서 알바생 하나 없애고싶다면 그렇게 하던지.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면서 숨을 한번 크게 내쉰다. 어제 잠을 잘 못자서 그런건가. 예전엔 그런걸로 아프기는 커녕 이틀 사흘 밤을 새는 것도 가능했는데 이젠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힘들다. 그래봤자 얼마나 먹었냐만은 예전보단 힘들다는거다.
" 근데 진지하게 진짜 없냐? 너 좋아하는 사람은 찾아놓고 정작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 "
뭐 그럴 수 없다는건 아니지만 자길 좋아하는 사람은 찾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건 내 입장에선 뭔가 이상하다고 해야할까. 뭐 없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냥 궁금해서랄까. 아니 정말 궁금해서, 호기심에. 그러다 진동벨이 울리고 내가 가져오겠다고 말한뒤에 진동벨을 들고 향한다.
" 아, 뭐야 스무디 시켜달라고 했잖아. "
또 몸 안좋다는 소리 듣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구만. 스무디 먹고싶었는데, 하고 투덜대며 초코라떼를 손에 들고 한입 마신다. 그래도 따뜻한게 몸에 들어오니 좀 낫네.
네게 쿠키를 반 뚝 떼어주고 나서, 한 입 베어문 자국이 남은 반쪽짜리 조각은 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쿠키 모양대로 볼이 튀어나왔지만, 몇 번 우물거리면 그마저도 사라진다.
"개너무하네. 팩폭 자제 좀."
예상했던 반응이다. 너라면 당연히 뜯어 말리거나 저 아르바이트의 안위를 걱정하거나 하겠지, 생각했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네게 일러주었던 취향의 아르바이트생을 힐끗여보고, 그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푹 기운을 빼버린다. 힘 빠진 목소리가 테이블에 흐른다.
"내가 그렇게 별론가?"
살면서 한 번은 하겠거니 하고서 흘러보낸 시간을 붙잡았어야 했나보다.
"야, 진짜 진지하게 <ruby 난 이번생은 글렀다니까> <ruby>, 말했잖아."
엎드렸던 자리에서 퍼뜩 일어나더니 목소리까지 낮췄다. 꼭 말해줄 것처럼 과장되게 굴더니 대답은 실속이 없는 것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지만, 연애 횟수 0번이라는 의미는 짝사랑으로 끝났다는 소리다. 네 흑역사 폴더에 분명 외사랑앓이의 흔적도 있을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때처럼 그럴 여력은 없는데, 연애를 해보고는 싶다. 하지만 사랑할 자신은 없으니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아야 싶었던 것이다. 실버타운으로 가겠지만.
"그럼 니가 주문하러 갔어야지."
진동벨과 함께 사라진 후 음료를 담은 트레이와 돌아왔을 때. 트레이에 있는 티슈로 손을 닦았다. 닦은 손은 네 이마에 얹으려 하고, 다른 남는 손은 제 이마에 올리려 했다. 열을 재려는 것 뿐이다.
장난 섞인 말로 충고해주고선 테이블에 엎드려서 퍼져버린 너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저 종잡을 수 없는 애랑 오랫동안도 친하게 지내왔다는 사실에 나에게 감격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이 녀석이랑 친구하면서 재밌는 일도 많았으니까- 같은 추억에 잠길만한 생각을 이어가던 그때 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별로지. "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여기서 위로해준다면 아마도 나한테 어디 아프냐면서 호들갑을 떨게 분명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너도 솔직히 인정하는 부분 아니야? 조금 식은 초코라떼를 한 모금 더 넘긴다. 몸이 따뜻할 정도로 알맞은 온도가 된 초코라떼는 온기를 오롯이 내 몸 구석구석 전달해준다. 진짜 내일 아프려는건가.
" 뭐, 얼마나 살았다고 이번생 타령을 하고 있어. 살면서 연애 한번은 해보지 않겠어? "
뭐 예전엔 분명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너도 누군가를 짝사랑했고 나도 누군가를 짝사랑했었지. 그리고 그 증거물들은 서로의 핸드폰에 고이고이 저장되어있다. 분명 서로 나중에 놀려먹을 목적으로 저장해둔 것이겠지. 이런 점은 서로 얘기하지 않아도 정말 똑같아서 왜 친구인지 알겠다는 사람들의 말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 자기가 간다고 해놓고. "
입술을 삐죽이면서 네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아마 몸이 조금 뜨끈한게 아마 내 이마가 네 이마보다 조금은 더 따뜻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집에서 쉴걸 그랬나,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의미가 있을리가 없다. 그렇게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에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장난 섞인 말에 킥킥 웃으면서 답한다. 개구진 웃음소리에 사고뭉치라는 단어가 연상되어 떠오르기 좋았다.
"그래도 넌 내가 별로여도 사고쳐도 옆에 있을 거잖아. 등골 빼먹으려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가, 얄미운 소리를 하면서 환히 웃어보였다. 그리고 청포도 에이드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쭉 빨아들이면 청포도 과육 알갱이도 몇 알 입 안으로 굴러 들어와서 그것들을 우물거렸다. 상큼한게 먹고 싶어서 시킨 거였는데, 이것보다 더 달고 진한게 먹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령 눈 앞의 초코라떼라거나.
"청춘은 짧댔거든?"
대꾸 한마디를 하고서 빨대로 청포도 에이드를 휘적거리다가, 슬쩍 네 앞쪽으로 밀어놓는다. 초코 스무디는 아니지만, 아이스인건 같으니까 네가 넘어가줬으면 하고 바란다. 한 입 뺏어먹기 위해 한 입 내어주겠다고 한 행동이었는데, 네 이마에 손이 닿고나니 그 생각이 달아났다. 네 앞쪽으로 밀어놨던 에이드를 다시 끌고온다. 찬 거 먹였다가 괜히 탈날까.
"그럼 컨디션 구리다는 애를 시켜먹냐? 야, 모지리야. 다 먹으면 곱게 집이나 가라."
빌빌대다가 쓰러질까 겁난다며, 데려다줘야겠다며 툴툴거린다. 툴툴거리고 있으면 네가 영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설마 너 말하는 거야?"
저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도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카페를 둘러봐도 일면식 있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아까까지 저보고 별로라니, 실버타운 들어갈 때까지 알고 지내야하면 미래가 좀 어둡다니 하던 너 밖에 없다. 이것도 장난인지 아닌지 감이 잡히질 않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부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니 인터넷에서 본 말이 생각났다. 친구랑 키스하는 상상을 해서 못 하겠으면 그건 그냥 우정이라고.
너의 말에 딱히 반박은 하지 못한다. 저렇게 왈가닥인데 내가 안챙겨주면 누가 챙겨주냐고. 내가 반대로 물어도 너 또한 내 옆에 있어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렇게 얄미운 소리를 하면서 미워하지 못하게 웃는 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이다. 근데 네 눈빛이 내 초코라떼로 향하는게 어쩐지 이걸 먹고싶어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너에게 내 것을 스윽 밀어주면서 말했다.
" 뭔 청춘 타령이야. 아직 끝날라면 멀었다. "
청포도 에이드가 내 쪽으로 왔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을 눈으로 쫓는다. 아 시원한거 먹고싶었는데. 아마도 내 이마가 예상보다 따뜻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래도 한입만 달라고 부탁해볼까 싶었지만 이런 몸으로 아무리 사정사정해봤자 안줄께 뻔하니까 일찌감치 포기한다.
" 그럼 여기 앉아있는게 나 말고 누가 있어. "
카페를 슥슥 둘러보는 모습이 꽤나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나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모습. 근데 내가 왜 이런 말을 늘어놓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컨디션이 안좋아서 뇌와 입 사이의 필터가 좀 약해진건가.
" 남이 보면 별로인데다 미래도 어둡긴 하지만 기왕 실버타운까지 같이 가서 살꺼면 내가 데려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말이야. "
큭큭대면서 말하고 있지만 말에 장난끼는 하나도 없다. 이런걸로 장난 치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너도 잘 알텐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당황스러워서 일단 부정하고 보는게 아닐까. 그야 반대 상황이었어도 난 너와 같은 반응일테다. 그러다 너의 질문에 한번 말문이 막혀서 손가락을 테이블에 톡톡 두드리며 잠깐동안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고 한번 긴 한숨을 내뱉는다.
" ... 마음의 준비했으니까 이제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아. "
그래도 갑자기 키스라니 좀 당황스러웠으니까.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다시 앞으로 쭉 빼서 너를 부담스럽지 않을만한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본다. 내가 얘를 왜 좋아하게 됐더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날부턴가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자.
" 으음, 괜히 말했나. 그냥 평생 친구로 살껄 그랬나? "
아무래도 사이가 조금 어색해질테니까 말이야. 나답지 않게 살짝 겁이났지만 이미 질러버린건 돌이킬 수 없다. 그저 조용하게 너를 바라보면서 답을 기다릴뿐.
수긍과 반박 중에 수긍이 돌아왔다. 그럼 저가 이겼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청포도 에이드에 꽂혀있는 빨대를 물었다. 기분이 좋을 때 더 배로 기분이 좋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입 안을 맛난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입 안에 굴러다니는 청포도 알갱이들을 우물거리고 있으면 초코라떼가 시야 안에서 가까워진다. "이러다 곧 실버타운 간다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저가 사준 것이었으니 초코라떼를 한 모금을 홀랑 마셔버린다.
"...저기 많이들 앉아 있구만."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만 빼면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은 너 말고도 있었다. 여기 앉아있는데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스스로 그렇게 말한 너뿐이었지만. 퉁명스럽게, 태연하게 대꾸하려고 노력했다. 웃고 있는 표정이, 아까 장난에 당했을 때보다 훨씬 더 얄밉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그 폭탄 발언 덕분에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되질 않는데,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뭘 무슨 되도 않는, 미친 거 아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무슨 말을 들어버린건지 사고가 쫓아가지를 못 했고, 갑자기 훅 더워진 기분이 들었다. 분명 쏟아지던 빗줄기는 아니었어도 비를 맞은지라 덥다는 생각은 들 수가 없었는데 열기가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고, 고개를 몇번 내젓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에 손부채질도 몇번 해주고.
"야, 아니, 야! 마음의 준비를 왜 해! 하자고는 안 했다?!"
망했다. 분명 지금 다시 이마로 열을 재보면 너보다 더 뜨거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얼굴이 빨개졌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빨개졌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너와 마주보고 지냈는데, 어째 시선을 마주하는게 긴장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할 수 있다는 답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정확히는 네가 무슨 답을 줄지 상상조차 못 했다. 이런 질문을 네게 하게 되리라고는 평생을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좀 예고라도 하든가. 갑자기 미쳤냐고, 진짜."
예, 아니오. 둘 중의 하나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너와 멀어지는 것은 싫었고, 그렇다고 너와의 관계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는 걸 상상할 수 있냐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상대가 너여서인지는 모르겠다. 네가 저를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으니까.
과연 지금 얘기하는게 맞았던걸까.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다가 결국 고개를 숙여버리는 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근데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버린걸 어쩌겠어. 내가 생각해도 폭탄 발언이라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나도 처음엔 이런 감정이 드는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었거든.
" 미치지는 않았는데. "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다시 고개를 드는 너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이제 내 이마랑 열을 재면 나보다 더 뜨겁겠네. 지금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나니까 딱히 다른 말을 할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땀이라도 날까 올려져있는 티슈를 너에게 건네준다. 이렇게 격한 반응이니까 내가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하네. 하지만 평생 말 안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나도 지금 할 생각은 없거든?! 너가 키스할 수 있냐고 물어봤잖아. "
여기서 무슨 키스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평생 비밀로 하고 지낼껄 그랬다. 그냥 평생을 친구로 지내면서 이런 관계로 지냈으면 좋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마구마구 밀려오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옛 어른들이 그랬다. 그러니까 이젠 밀어붙이는 수 밖에 없다.
" 고백에 예고가 어딨어. 나 너 좋아해. "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들었을만한 목소리다. 다행히도 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우리의 대화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기는 했지만. 후, 하고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쉰다. 그래 나도 지금 내가 미친 것 같기는 한데, 진짜 돌이킬 수가 없거든요. 여기서 더 가까워지던지 멀어지던지 둘 중 하나다.
" 어차피 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꺼잖아. "
여기서 바로 결정하란 말은 안해. 아까보다 더 식어버려서 약간 차가운 느낌마저 드는 라떼를 한입 마시고 내려놓는다. 아까는 분명 달달했는데 지금은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파서 입맛이 없어져버린건지 맛을 느낄만한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려버린건지.
누구나 막연하게 바라는 정도다. 연애는 하고 싶지만 부러 노력을 할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도 괜찮은가 하면 마음이 잘 맞는 좋은 사람이랑 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바람. 눈 앞에 그 조건에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저를 좋다고 해주면 좋겠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 정도. 한 번쯤 너처럼 잘 맞는 사람이랑 연애해보고 싶다고, 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너에게서 오늘 당장 고백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할 수 있다고만 해도 됐잖아. 부끄럽게 무슨, 으으."
로맨스 영화도 잘 안 보는데, 지금 처한 상황의 장르는 완벽하게 로맨스다. 휴지를 건네 받았지만 그저 쥐고만 있는게 휴지를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잊어먹기라도 한 것 같다. 그만큼 생각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입 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누가 들었다면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저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았는지 오늘에서야 알게된 지라, 한 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고백같은 걸, 하다못해 추파라도 받아봤어야 그런 걸 부끄러워한다는 것도 알지. 머리가 곧 터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에이드를 빠르게 마셔버린다. 목이 계속해서 타는 기분이었다.
"당연하지, 바보멍청아. 지금도 너랑 키스할 수 있나 생각 중이거든?"
연애를 해본 적이라고는 없으니 인터넷에서 본 그 글 말고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그거라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당사자가 눈 앞에 있는데다 키스를 해본 적도 없으니 상상하기 영 쉬운 것은 아니라 애를 먹고 있었지만.
"알거든, 내가 그렇게 눈새로 보이냐."
그렇게 대꾸하고보니 뭔가 억울했다. 좋아한다는 티라도 낼 수 있었지 않나. 여지껏 늘 둘이 같이 붙어다닌답시고 받았던 그 수많은 오해 속에서 너와 내 반응이 다른 부분이라도 있었던가. 다시 청포도 에이드를 먹으려고 하면, 언제 다 마셔버렸는지 아무것도 입에 머금어지지 않는다.
나도 너를 좋아하게 될 줄 알았겠니. 사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시작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평소처럼 너랑 연락하고, 너랑 만나고, 너랑 돌아다니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 새부턴가 좋아져 버린걸. 옆에서 나란히 걸을 때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나도 미칠 것 같은 건 마찬가지다.
" 너 이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애였어? "
이건 또 처음 보네. 연애 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 없냐 노래를 부르던 애가 막상 원하는 상황이 나오자 고장 난 고양이처럼 어리바리한 모습이란. 양이 꽤 남아있던 청포도 에이드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 어차피 여기서 계속 생각해봤자 결과는 안나올 것 같으니까 말이야. "
눈새로 보이냐는 말에 그저 웃기만 한다.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없지 않나 싶었다.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테니 눈치를 못채는 것도 당연할테다. 너와 만난 날에 비해서 너를 좋아한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친구들의 대화에서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도 눈치를 못채는건 조금 답답하긴 했었다.
" 일단 사귀고 생각하는건 어때. 어차피 거절 당하나 사귀다 헤어지나 결과는 비슷할 것 같은데. "
그래도 계속 불타오를 생각은 없는지, 차츰차츰 가라앉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가라앉는다 한들 뺨 위에 붉음은 쉽게 가시지 않을 듯 하다. 얼음을 말고는 남아있는 게 없는 않은 플라스틱 컵만 괜히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괴롭힌다.
"뭐?"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듯 벙긋이던 입은 굳게 다물렸다. 이제는 마냥 부끄러워 혼란스러운 것만이 아니다. 이미 너와 더 이상은 어제와 같은 친구로는 못 지낸다는 사실이 지금에서야 선명하게 그어졌기 때문이다. 사귀든 사귀지 않든간에 저가 괜찮다고 한들 네가 괜찮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친구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온갖 생각으로 들어차 어지러웠던게 깔끔히 지워졌다. 두 눈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니 개못됐어. 아주 성격 좋고 착하기는 개뿔이."
사귀고 싶냐하면 더 생각해봐야할 일인데, 너와 이렇게 멀어진다고 생각하면 답이 금방 나오고 말았다.
"씨, 나랑 사귀는 거 감사한 줄 알아."
괜히 틱틱대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속상해서, 네게 하면 안 될 짓을 하는건 아닌가 싶어서 지금의 감정을 무어라 정의내릴 수 없었다.
치질 같은 말을 서슴없이 뱉어대는 너가 이런 모습도 보인다는게 내 눈에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너를 아직도 100%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을 한잔 가져와 네 앞에 놓아주며 얘기한다.
"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아한다고 깔끔하게 얘기하는게 낫지. 너 앞에서 끙끙 앓기만 해봤자 너가 놀리기만 더 하겠어? "
물론 정말 끙끙 앓지는 않았겠지만 너를 만날때마다 이걸 질러? 말아? 의 갈등 한가운데에서 고심하곤 했을테다. 하지만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지금이 너에게 고백할 타이밍이라고 딱 촉이 온 것뿐이다. 너와 더이상 친구 사이로 지내지 못할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밀어붙이기로 결심했으니까. 물론 완벽한 절교 같지는 않겠지만 껄끄러운 관계가 되겠지.
" 맨날 나보고 못됐다고하면서, 한번 더 들려준다고 내가 슬퍼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지만 너가 어색해지지 않게 나는 평소처럼 너를 대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갑자기 여기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거나하면 분명 아까처럼 고장날테니까. 그리고 이런 모습을 너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하는 어렴풋한 추측도 있었고. 그렇게 완전히 식어버린 초코 라떼를 마시려고 손을 뻗는 순간 너의 말이 들려온다. 잠깐 멈칫했던 손은 원래의 목적대로 라떼를 손에 쥐었고, 그것을 마시기 전에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내가 너를 데려가는걸 고마워해야하는게 아니고? "
활짝 웃으며 말한 나는 조금 말라있던 입을 손에 들고있던 라떼로 적시고서 말을 이었다.
"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
이런 나라도 긴장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라 무언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면서 힘이 쭉 빠져버린다. 아, 나 아픈 사람이었지. 몸에 열감이 확 올라오면서 뜨거운 숨을 한번 내쉰다. 집에 가야하나.
>>794 (이젠 영화에 집중하는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관까지 와서 당신의 옆얼굴만 본다면, 그건 좀 징그럽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지만 본인의 심정과는 정반대의 것인지라 탐탁치 못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다, 시야 안에 새하얀 물건이 들어와 흠칫 놀랐다. 동시에 당신을 향해 돌아보면, 시선이 마주쳤다. ……봐주고 있던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구나. 순식간에 열이 올라온다. 어두컴컴한 영화관 안이 아니라면, 새빨갛게 되어버린 얼굴을 들켜버렸겠지.) …고마워. 다음에 돌려줄게. (비교적 담담한 감사인사와 함께 손수건을 받아들고, 가만히 내려다본다. 당신과 같은 향기가 은은히 흘러나와서, 차마 쓰진 못하고 쥐고 있기만 했다. 큰일이야, 어제보다 더 좋아져서. 영화의 내용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쌍방삽질 너무 좋아 ~v~*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부분은 개인적인 생각이 담긴 부분이었는데 너참치가 잘 메꿔줘서 고마워! (쭈압)
어지간해서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된 부분이다. 네가 떠다준 물을 비워버린다. 아무리 찬물을 마셔도 정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얼떨떨한게 너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당연하지.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고 누가 생각했겠냐고."
누구길래 그렇게 좋아 죽냐고 놀렸을게 뻔하다. 옆에서 차라리 마음이라도 털어보라고, 고백하라며 부추겼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랬다면 오늘 이 일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 번 물끄러미 너를 바라보려고 했다. 방금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뻗친 모양새여도 볼 수 있는게 너였는데, 그런 너를 보려고 할 뿐인데 묘한 기분이 들어서 조심스러웠다.
"슬퍼하라고 한 말 아니거든?"
샐쭉거렸다. 고백을 했다고, 고백을 수락했다고 달라진 부분이 없는 네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제 대하던 것처럼, 늘 대하던 것처럼 대해도 괜찮은 걸까 하고. 연애를 해본 적이 있어야 무얼 알텐데.
"됐거든? 실버타운가서 혼자 잘 먹고 잘 살 자신 있었거든?"
트레이에 비어버린 청포도 에이드와 네가 떠다 주었던 빈 물컵 한 잔을 올린다.
"... 나도."
솔직히 지금에서야 고맙다기보다는 아직도 얄밉다는 마음이 더 컸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은 돌려주고 싶었다. 연인 관계가 되었다는 걸 모른 척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오늘 집에 돌아가서 잠에 들때까지도 붕 뜬 기분일 것 같았다.
고백할까? 아니야 뜬금없이 지금? 하면서 갈등하던게 몇개월이다. 너라는 사람을 좋아해버리는 바람에 나도 한동안 혼란스러워서 밤에 잠 못든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너랑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면서도 지금 확 고백해버려? 라는 생각을 계속 했으니까. 하지만 고백은 직접 만났을때 해야한다는 말을 내 입으로 했왔던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었다.
" 이제 애인인데 조금 말을 부드럽게 하는게 어떨까요? "
물론 반쯤 농담이라서 지금처럼 대해도 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버리면 너만큼이나 나도 불편할 것 같았으니까. 지금처럼 친구로 지내면서도 데이트 같은 연인들이 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아는만큼 오히려 서로에 대해서 배려를 할 수 있을테니까. 선을 넘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 네에네에. 집주인님께 제가 감히 실례되는 말을 해버렸네요. 하지만 꼭 나도 데려가야해? "
짐짓 얄미워보이는 웃음이지만 악의는 전혀 없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가 트레이에 마신 것들을 올려놓자 나도 반쯤 남은 초코라떼를 올려놓는다. 다 식어버려서 맛도 없는데다가 이젠 별로 먹고싶지도 않았고. 초코 특유의 텁텁함이 입에 남아있어서 해소하고자 트레이를 가져다놓을 겸해서 물을 마시러 다녀온다.
" 바래다주는거야? 감동인데. "
물론 내가 아파보여서 그런 것이겠지. 아마 집가면 약먹고 바로 뻗어버릴지 않을까 싶었다. 서있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아프면 기력이 없는건 당연한거니까. 사실 지금도 약간 붕뜬 기분이기도 했고. 아까 카페에 들어올때는 무척이나 쏟아지던 비가 거의 그쳐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아니면 집에 갈 타이밍은 다신 없을듯한.
" 그럼 손잡고 갈까? "
자, 내 오른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제 사귀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맑은 웃음을 보인다.
놀라버렸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너와 내가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몇 년이 아닌게 다행인가 싶었다. 몇 달 간 너와 있었던 시간을 떠올려보면 저는 늘 평소와 같았던 것 같은데, 너는 그 시간동안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다시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다. 뭐가 이렇게 부끄럽고 간지러운지, 알레르기라도 있는건지.
"진짜 미친 거 아냐?"
조금 말을 부드럽게 해달라 했는데 되려 조금 더 말이 험해졌다.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상냥하게 말한다거나, 어휘 선택을 좀 더 부드러운 것으로 고른다거나.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떠올리니 이건 소름이 돋았다.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애인이라는 단어가 네 목소리로 귀에 콕 박힌 것 때문도 있었겠지만.
"몰라. 그때가서 생각할거야."
미쳤나봐, 진짜 미쳤나봐. 그런 생각밖에 들지를 않았다. 아까 실버타운에서 같이 살자느니, 누구랑 사귈 생각말고 저랑 살자고 대꾸했던 네 모습이 떠올랐다. 저를 좋아하는 애들이 있다며 말하던 네 모습도 떠올랐고, 머릿속에서 분명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만 해도 넌 그렇게 티를 내고 있었던건데, 저가 아무 생각도 없이 툭툭 받아치고 있었던게 이제서야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말했지. 빌빌대다 쓰러질까 겁난다고."
비가 그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산이라도 사러 뛰어 갔다올 뻔 했는데, 적어도 집에 바래다주는 동안은 비가 안 오면 좋을텐데.
"너 솔직하게 말해."
내밀어진 손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해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얼 타고 있었다.
"니 연애 해봤지."
손 한 번 잡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네가 내민 오른손을 내 왼손이 살포시 쥐었다. 힘을 주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게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를 일이다.
말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했더니 바로 미친거 아니냐는 말이 튀어나온다. 역시 하루아침부터 그렇게 되는건 불가능하겠지. 나도 다 알고 있었지만 너가 좀 더 편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해본 말이었다. 하루 아침에 바뀌어버린다면 나도 지금까지 너에 대해서 쌓아놓았던 정의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일테니까.
"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
실버타운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배는 더 살았을때나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잘 살고 있을지 아니면 중간에 틀어져서 아예 서로를 잊고 살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 나는 해피엔딩을 원하기에 최대한 노력해볼 예정이다. 갑작스럽게 고백했고, 너가 받아줬으니 내가 더 노력을 할 차례다.
" 그럴리가 있나. 내가 연애했으면 너한테 가장 먼저 얘기했겠지. "
이런건 너한테 숨겨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연애를 했으면 가장 먼저 너가 알아챘을테다. 내가 아무리 숨기려 들어도 너는 언제든지 금방 알아채곤 했으니까. 내가 잘 못속이는건지 너가 잘 알아채는건지는 모르겠지만.
" 근데 조금 설레긴하네. 나, 맨날 상상 속에서만 네 손 잡았거든. "
너랑 나란히 걸어갈때도 니 손끝이 스칠때마다 심장이 어찌나 쿵쾅대던지. 시답지 않은 이유로 손을 잡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구질구질한것 같아 포기한 것도 몇번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잡는다고해서 너가 알아챘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 손을 잡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생각을 몇번이고 했던 것은 정말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네 손을 잡고 있으니 좋긴 하네. 네 오른손을 잡아온 네 왼손을 살짝 힘을 줘서 잡으며 얘기했다.
돌아버린 건 아니신지요, 하는 정도의 부드러움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부드럽다기보다는 비꼬는 것처럼 들릴테니까 안 한다.
"진짜 얄미워 죽겠네. 너 아파서 다행인 줄 알아."
나중에 정말로 너와 같이 실버타운 거주를 고려해야할 날이 온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과부하다. 오늘 일어난 일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은 난리가 났으니까. 복잡한 머릿속에서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과 사귀게 됐다는 사실 두 가지만 겨우 확립하고 있을 뿐이다.
"근데 어떻게... 연애에도 재능이 있나?"
네 손을 쥘 생각도 못한 제쪽이 너무 서투르고 무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소화해내기에도 버거우니까, 분명 방금 전까지도 친구였던 네가 애인이 되어버려서는 손을 잡자고 한 것에 조금이나마 설레버렸다는 걸 감당치 못한다. 친구라고만 생각했었기에 더욱 그랬고, 친구라고만 생각했어도 저 좋다고 하는 사람이 그러기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손 잡는게 별 대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대수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자각치 못하고 있는건지 퉁명스러운 대꾸만 돌려준다. 제 손을 잡고 있는 네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멈칫거렸다.
"어, 빨리. 최대한 빨리."
비가 쏟아지는 것도 문제고 지금 이 상황도 문제다. 잡고 있는 손에서 영 알 수 없는 간지럼이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아서라도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다. 네가 사는 곳이야 수도 없이 드나들었으니 발걸음은 생각치 않아도 알아서 목적지를 향해준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걸 너가 알았다면 화를 냈으려나. 하지만 그런 부분마저 너의 매력이니까 나는 달갑게 너를 좋아할 수 있었다. 환자일때 조금 더 놀려놓을까했지만 크나큰 업보로 돌아오는 것이 두려워 그만 놀리기로한다. 지금도 충분히 쌓아둬서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 재능이 있다면 네쪽보단 내쪽이 좀 더 있는 편이 아닐까? "
지금만 봐도 너는 대수롭지 않아하지만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너에게 오늘 하루는 정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을테니까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사람 욕심이라는게 어쩔 줄 몰라하는 네 모습을 보니까 껴안아주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일단 손만 잡자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나는 이미 잊은지 오래다.
" 비 오기 전에 후딱 가야지. "
빨리 가자는 말에 나도 걸음을 조금 빨리한다. 열감이 남아있고 몸에 기력은 없었지만 이 정도 속도로 걷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마음이 간질간질하는 것이 이런 감정이 정말로 설렘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버린다. 짝사랑할 때와는 또 다른 설렘. 다행히도 우리가 만난 장소는 우리집에서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너의 집도 우리 집에서 크게 떨어진 곳이 아니었으니까.
" 바래다줘서 고마워. "
아까 우리가 뛰쳐나왔던 곳을 지나 좀만 더 걸어가면 우리집이 나온다. 부모님은 시골로 내려가시고 혼자서 이곳에 남았기에 나는 작은 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빌라 앞에 다다라서야 잡고 있던 네 손을 조금 천천히 놓는다. 조금 더 같이 있고싶었지만 내 몸 상태를 알고 있는 너가 분명 용납치 않겠지.
" 집 도착하면 연락해야해? "
손을 가볍게 흔들고서 너가 가는 모습을 보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가 뒤돌아서 갈때까지 빌라 입구에서 멀뚱멀뚱하게 서있는다. 너가 잘 안보일때쯤 되어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지만, 이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말할 수 있었다. 저의 애인 자리는 네가 꿰찼으니까, 연애에 재능이 있든지 말든지 상관없는게 되어버렸다. 있든 없든 네가 자신의 연애 상대로 있을테니까.
"안 쓰러졌네."
네 집 앞에 도착하고 나니 하는 말이다. 빌빌대다 쓰러질 것 같다며 놀렸으니, 그 말을 회수했다. 사실은 얼마 멀지도 않은 거리를 걷는 짧은 시간이 너와 손을 잡은 채로 걸으니, 꼭 그 곱절의 곱절처럼 느껴져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아까 쳤던 말장난을 한 번 더 이은 것이다.
"별 걸 다 고맙대."
손이 놓아지면 어색해서 한 번 꾹 쥐어보았다. 분명 감각은 제대로 있는데 제 손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너와 계속 닿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내가 무슨 애냐. ...하긴 할게."
평소였으면 내가 무슨 애냐, 하고서 뚝 끊어졌을테다. 그러고서 간다고 한마디 남긴 후에 집으로 가버렸을텐데, 오늘부터는 너와 조금 다른 관계가 되었으니까. 연락하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너와 전화든, 문자든, 카톡이든 무엇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든 간에 그게 고민될 일은 아니었는데. 집 돌아가면 무슨 말로 연락해야할 지가 벌써부터 고민이다.
하얀 은발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린 청년은 제국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집을 세우고 살고 있었다. 집 안은 상당히 소박한 분위기였으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꽃 문양은 십여년 전, 황제의 미움을 받아 대거 숙청당한 한 귀족가문의 문양이었다. 그 문양을 집에 걸어둔 청년은 그 가문의 피를 이은 이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혼자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던 집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다른 인기척이 있었다. 그 인기척의 주인이 앉아있는 탁자 앞에 이것저것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 ㅡ물론 제국의 화려하고 달콤한 간식거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볍고 소박하게 먹을 수 있는 작은 요깃거리였으나 나름 정성스럽게 차린 모양이었다.ㅡ 을 접시에 담아 내려놓은 후, 청년은 건너편 자리에 앉아 상대에게 말했다.
"손님이 올 것을 알았으면, 미리 뭐라도 준비를 했을텐데. 혼자 사는 집이기에 누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해 이 정도밖에 대접할 수 없는 무례를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름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며 청년은 앞에 있는 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느정도의 경계심이 있는지, 몸에 힘을 완전히 풀지 않고 상대를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를 살짝 보이며 청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여기까진 무슨 볼일이신지요? 나름 조용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황제 폐하는 제 목숨마저 앗아가길 바라시는지요? 아니면 그것과는 상관없는 다른 볼일이 있으신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에게 받은 검을 들 수밖에 없음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그러고 보면 당신과 나란히 걷느라, 당신과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느라 정작 당신과 얼굴을 제대로 마주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겨우 당신의 말에 잠깐 당신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지 확인하느라 당신을 주의깊게 바라보았을 뿐. 심지어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들킬까 시선을 내리깔았다. 영화관의 어둠이 자신의 안색을 가려주기 충분하길 바라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 뒤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면 눈치챘는데 모르는 척해주는 걸까- 하고 고민할 뿐이다. 그래서 당신의 얼굴이 마찬가지로 발개져있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지만 역시 당신이 보고 싶어.) 역시 이런 장르는 조금 낯간지럽네요... 그래도 같이 와서 다행이야. (그래서 조금 용기를 내어본다. 시답잖은 말과 함께,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는.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손, 잡아줄래요? (당신에게 '손이 차갑다' 고 들었던 자신의 손이 지금도 충분히 차가우리라고, 적어도 미적지근하리라고 굳게 믿으면서. 어느샌가 당신의 손과 엇비슷한 온도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그래도, 데이트잖아. 이 정도는 괜찮잖아. 괜찮은 거죠? 괜찮다고 말해줘.)
그녀는 살가이 미소지으며 내어진 과자를 한입 베어물었다. 제국의 화려하고 달콤한 과자와는 다른 것이었지만-
" 으음, 무슨 차와 마시면 어울릴까요. 산뜻한 허브티? 조금 어레인지해서 캐모마일, 아니면 바질이려나. "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소녀가 말을 마쳤다. 제국의 마녀, 이자벨. 꽃을 피워 꿈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능력으로 제국은 사상자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황제에게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았다는 무용담이 노래되는 인물. 그녀는 집을 한번 둘러보며, 발도 닿지 않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 좀 무례하다고 할 정도로 초라하긴 하네요. 푸른 피를 가졌으면서, 꼭 붉은 피를 가진 처럼 살게 됐으니, 뭐. 이해하지 못할것도 아니지만요. "
그래, 반가워요. 저는 이자벨, 익히 알고계시겠지만. 그녀가 말했다. 그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계하는듯한 눈초리가 의아하다는듯.
" 당연히, 황제 폐하가 당신의 목을 원해서 왔죠. 자기가 전부 죽여버린 피를 이은 사람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당장 오늘 밤 자길 죽이러 오는게 아닐까? 하고, 수척해진게 좀 꼴불견이시더라구요. 안그래도 간신과, 간신의 개들이 옆에서 어찌나 사납게 짖어대던지... 피를 한 방울도 남겨둬선 안되느니, 더러운 피의 자식은 언젠가 반드시 복수를 할 거라느니. 멍멍, 멍멍. "
그녀는 손으로 꼭 강아지를 닮게끔 만들어, 짖는 시늉을 해보였다. 무관심하고 지루하단듯이, 턱을 괴며. 그리고 그 손 모양을 바꾸어,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푸르르고 투명해서, 손대면 꼭 흩날릴것같이 위태로운 꽃 한송이를.
" 그러면서도 누구도 손에 피를 묻히긴 싫어서, 결국 내가 끌려왔죠. 당신을 영원히 잠들게 하라네요. 정말 웃겨. 내가 하는건 죽이는게 아닌가? 거기서 거기잖아요.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
대답을 꼭 하진 않아도 되는 질문을 구태여 던진 그녀였다.
" 저기말예요. 이대로 죽을래요? 그 꽃, 향기 한번만 맡으면 고통없이 죽을수 있는데. 그냥 쓰러지듯 잠들어서, 그대로 영원히 쉬는거죠. 자비로운 지모신이 당신을 안아줄거에요. 어차피 여기서 내가 그냥 집에 돌아가도, 또 암살자를 보내올걸요. 다음 번 친구는 어떤 미치광이가 올지 모르겠네요. 그 마녀를 보내도 죽지 않았으니, 확실히 죽일수 있는 미치광이를 수배해~ 네크로맨서가 해골 군단을 이끌고 올까요? 머리에 든 건 피와 약탈뿐인 바바리안? 아니면 단검에 독을 바른 어쌔신? 활의 명수라서, 천리 밖에서 당신 목에 화살을 꽂을 엘프? 내가 장담하는데, 죽을거면 나한테 죽는게 나을걸요. 그게 아니면- "
도망이나 갈래요? 그녀가 키득거렸다. 마치 재밌는 장난을 꾸미는 어린 사고뭉치 소년처럼.
" 내 마법이면 우리 둘,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건 문제도 아닌데. 제국도 순식간에 멸망시킬수 있는게 나에요. 대단하죠? "
"숙청된 일가가 내놓을 수 있는게 얼마나 되겠는지요. 입에 맞지 않는다면 굳이 들지 않아도 됩니다."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소박한 음식이었으니 전자에 익숙한 이에게는 절대로 입에 맞을리 없었다. 그렇기에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며 청년은 접시에 담겨있는 간식거리 하나를 집어서 입에 담았다. 부드럽긴 하나, 딱 그 뿐인 맛을 조용히 느끼며 청년은 이자벨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들으며 청년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납득했다. 언제든 자신을 죽이러 올 것임을 알았기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할지도 않았다. 허나 쉽게 목숨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승산이 없을지도 모르나 마지막 한순간까지 저항할 생각인듯, 손을 아래로 내려 허리춤으로 향하나 곧 들려오는 말에 그 움직임은 멈춰섰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나 살아남은 자로서 짊어지고 책임져야 할 것이 있으니까요. 자존심을 버리고 더욱 먼 곳으로, 더욱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 제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나 언젠가 다시 저희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이 제가 남아있는 유일한 사명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중간에 죽어버리고 실패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만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살아남은 자란 언제나 그런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살며시 밝히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청년 역시 바라봤다. 자신의 마법이면 두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말을 조용히 곱씹으며 청년은 그녀에게 자신이 품은 의문을 이야기했다.
"당신은 제국에서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무엇보다 저를 이대로 보내준다는 제안을 하는 이유도 지금으로서는 감도 안 잡히는군요. 물론 도망치게 해준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고고하게 꿋꿋하게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으나 지금은 몸을 사리고 뜻을 펼칠 준비를 해야 할 시기니까요. 허나 당신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는지요?"
의심하고 싶진 않으나 생각도 못한 말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 입에 담았다.
" 아뇨, 그럭저럭 먹어줄만 해요. 차와 함께 마셨더라면 좀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
부드럽기는 하나, 딱 그 뿐인 맛. 그러나 그녀에겐 꽤 신선했다. 구름을 먹으면 이런 맛일까? 너무 고상한 표현이다. 솜을 먹는다고 하는게 좀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지. 그녀는 그가 손을 허리춤 아래로 내리는걸 가만히 지켜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칼에 베이면 죽는다. 사자소생의 기적? 그런건 신화에나 나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행동을 멈추자 오히려 재미없다는듯이 늘어지게 하품했다. 여전히 발은 그네를 타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교양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 재미없어. "
그의 긴 말을 그녀는 겨우 한 마디로 일축시켜버렸다. 참으로 무례하고, 또 예의없는 행동이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안드는건지,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아남은것, 겨우 그따위 일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자존심도 버리고, 낡은 긍지 하나만을 간직한채로. 먼곳으로, 빛이 들지 않는 곳에 그저 숨어 살아갈 뿐인 목숨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문, 부흥. 그리고 숙명.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들 투성이인 나열. 그녀는 날아보고 싶었다. 제가 피워내지 않은 꽃이 가득한 꽃밭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 저기, 너무 사람을 믿는거 아녜요? 나는 당신을 죽이러 온 사람인데. 이러고 시간을 끄는 사이에 내가 심어놓은 꽃이 서서히 당신을 잠들게 하거나, 아니면 저어기 멀리서 엘프가 당신을 노리고 막 화살을 발사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까 칼 빼 들려고 했을때가 좀더 재밌었는데. "
에휴. 경박한 한숨을 내뱉고,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그와 마주 바라보았다. 그가 내뱉은 의문을 들은 뒤에는, 제법 진실되게 소리내어 웃었다.
" 어떤 제약도 없는 자유라는건, 그 무엇보다 자유롭지 못하죠.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은 슬프게 웃어보였다. 감정이 다분히 묻어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 글쎄요. "
그녀는 그리고-
" 제게 푸른 피가 아닌, 붉은 피가 흐르는지. 알고싶어서요. "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사연이 많은건 꼭 그 하나만이 아니었던것같다.
// 이 다음은 내일 이어줄수 있을것같아! 저녁에 올게~ 재밌는 일상은 오랜만인걸! 고마워~~
>>818 나도, 이런 영화는 혼자 보러올 생각도 못했을걸. 나쁘진 않지만.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집중력을 다른 곳에 뺏기고 있을 뿐. 영화 속 사랑 이야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설레임을 불러일으킨다지만, 가장 큰 설레임의 원인이 옆에 있었으니까.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자극이 큰 탓이었다. 지금처럼, 닿아온 당신의 비스듬한 시선에 빨려들어갈 것 같이 내려다본다.) ……내가 먼저 잡으려했는데. (얼어있기도 한순간, 새빨개진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며 자그맣게 투덜거린다. 그야,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인 걸.) (팔걸이에 올려진 당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다. 다만, 처음 자신이 고백했을 때처럼 어색하게 잡는 게 아니라 손가락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엮어 깍지를 꼈다. 둘의 체온이 섞여지고, 손의 온도는 더욱이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옆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아마 부끄러움과 행복함이 반반 섞인, 삐뚜름한 미소가 아닐까.) 좋아해.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며 음악이 터져나오기 직전, 자그맣게 중얼거린다.)
"온전히 믿는다면 이런 물음조차 던지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정말로 저를 죽일 생각이라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겠죠. 이런 물음에 여흥거리는 없을테니까요. 만일 그게 제 오산이었다면 저 역시 거기까지라는 것이겠죠."
경계는 어느 정도 줄이겠으나, 그렇다고 당신을 완전히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청년은 입에 담았다. 적어도 상대가 바로 공격해오거나 하지 않았으니, 자신도 그에 상응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보여주듯 청년에게서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또한 모두 속임수였다고 한다면 결국 자신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죽는 것은 분할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청년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그 또한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어느 정도 공감을 하듯, 그는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적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는듯 이야기를 하며 청년은 그녀를 다시 유심히 바라봤다.
자신에게 무슨 피가 흐르는지 알고 싶다는 그 말의 진의는 무엇일지. 자신이 정말로 살아있는 존재인지를 알고 싶은 것일까. 상당히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을 하는 와중 보이는 건 자신에게 뻗는 손이었다. 이젠 자신이 선택할 시간일까. 자신을 믿는다면 그 손을 잡으라는 것일테고, 믿지 못하겠다면 그 손을 잡지 말라는 이야기일터.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이 아니냐는 타박을 떠올리며 그는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저는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진 못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물론 저를 죽이러 온 존재일지도 모르나, 여기서 당신을 베기 위해서 검을 뽑으면, 그 작자들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니까. 죽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죽이세요. 허나 마지막 발버둥 정도는 칠지도 모른다는 것은 부디 용서해주시길."
뻗은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온전히 자신의 감을 믿고 던져보는 모험수였다. 만일 이게 함정이라면 최소한의 발버둥은 쳐볼 것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그는 우선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정말로 자신을 죽일 작정이라면 이런 말장난은 필요없을테니까.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직 신만이 모든것을 알고 계신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놓이는 사실이었기에, 그는 어둠 속을 불안해 하지 않고 똑바로 달릴 수 있었다. 누구도,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 조차도 자신을 쫓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달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숨이 차다는 것을 겨우 느낄 수 있었고, 날이 밝아오는 여명을 눈치채고 희미한 빛을 향해 검은 눈동자를 돌렸다. 이 새벽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이 그를 안도하게 했으며 죄로부터 도망치게 했다. 아침이 되면 거리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죄인을 지탄하는 시선은 한낮의 어둠까지 닿지 못할 것이고 자신은 늘 그렇듯이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신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깊은 곳에 또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튿날 마르코는 집주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요란스러운 것은 집주인의 목소리만이 아니어서 작은 골목의 여관 안에서는 여간 소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수근덕댔다. "구석집 늙은이가 죽었다는 모양이든데!" "그런데 그냥 죽은 게 아니라더군!" "살인, 살인 사건이야." 저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이 목소리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마르코는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인의 고함에 맞춰 문 앞에 물을 뿌리려 나섰다. 그 때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심판을 위해 저울질을 하는 듯한 기분을.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르코는 그 아이에게서 자신에게 이르는 불길한 인연을 본능처럼 눈치챘다. 하지만 아직은 시초일 뿐이었다. 그 아이와 소년은 아직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저 운명이 가르쳐 준 풍향에 맞춰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힘 없이 흘러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