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243924> 자유 상황극 스레 2 :: 1001

이름 없음

2020-11-15 00:13:19 - 2021-09-12 23:02:17

0 이름 없음 (/8xYPD6Tn6)

2020-11-15 (내일 월요일) 00:13:19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53 이름 없음 (.PPS4cysng)

2020-11-29 (내일 월요일) 12:43:08

>>52
(잡힌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손등을 감싸안았다. 줄곧 아래를 향해있던 시선은 당신의 말에 퍼뜩 들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당신의 의중을 샅샅이 파헤쳐보려는 것처럼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가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당신을 노려보다시피 하다, 얼마 가지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고백이라도 하는 거야?

54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2:54:59

>>53
(손등에 닿는 당신 손가락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했다. 당신을 위로하고자 손을 잡았는데, 이쪽도 함께 위로받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시선, 흔들리는 눈동자. 당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노려보는 듯 하다가 얼마 안가 고개를 떨구면, 목소리를 눌러 웃는다. 당신이 웃는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웃었다.) 고백, 하면 받아줄건가? (담백한 어조로 말하며 당신의 붉어진 눈가를 한손으로 쓸었다.)

55 이름 없음 (TCpP6HMGlY)

2020-11-29 (내일 월요일) 13:01:20

>>54
(손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헛웃음을 지었던 입매가 일그러졌다. 네가, 나한테? 질나쁜 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담백한 말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려버렸다. 입술이 꾹 다물렸다.) 네가 너무 손해보는 장사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긍정이라기에도 애매한 답이 나왔다. 희미하게 웃으며 제 손으로 당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려했다.)

56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11:47

(당신의 일그러지는 입매를 매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꾹 다물리는 입술의 입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귀여운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 모르는 것 같지만.) 인간관계에서 전혀 손해본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이들을 대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릎을 숙여 당신의 손에 제 볼을 갖다대어주며 말했다.)

57 이름 없음 (6oWNgqBEas)

2020-11-29 (내일 월요일) 13:35:45

(머릿속의 생각들이 한순간, 뒤엉켜버렸다. 꼬여버린 생각의 실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심호흡하듯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내쉬었다.) ...진심..이겠지, 그래. 언제부터? (전혀 상상도 못했다. 아니, 그 정도는 이니었다. 알아차리지 못한 척 굴었다. 네가 나한테 그럴리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당신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58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47:09

>>57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지 생각했다. 당신의 손길을 한참 느끼면서 있다가 손바닥에 입술을 내리누르고 떨어졌다.) 네가 전애인이랑 헤어지고 우리 집에서 묵었을 때 있잖아. 아마 그때부터. (어깨에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해는 아직 떠 있었다. 여우비가 올 모양이었다.) 비 오네, 어디라도 들어가자. (당신을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밥 아직 못 먹었지?

59 이름 없음 (oTaoBLAPoU)

2020-11-29 (내일 월요일) 13:58:29

>>58
(손이 잠시 허공을 떠돌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것이 너의 고백 때문인지 손바닥에 느껴진 생경한 감각 때문인지 헷갈렸다.) 오래도 숨겼네. (마지막 이별은 몇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냈고.) 오늘 비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햇볕은 쨍쨍했다. 이런날을 뭐라 그러더라, 여우가 시집긴다고 했나.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았다. 내밀어진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나야 뭐, 그렇지. 넌 먹었고?

60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4:07:42

나도 아직. (당신이 내민 손을 잡으면 조용히 미소지었다가 마주 깍지를 꼈다. 팔과 팔이 스쳤다.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어 제게 더 가까이 붙였다.) 오래간만에 집에서 요리 해줄까? 재료 있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더 떨어지기 시작하자, 제 재킷을 벗어 당신의 머리를 가려준다.) 역시 너한텐 약간 남네. 아쉬운대로 그냥 덮고 있어.

61 이름 없음 (/QQ9.0rkYE)

2020-11-29 (내일 월요일) 14:57:31

>>60
그거 잘됐네. (당신에게로 몸을 가까이 하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나야 좋지, 뭐 해줄려고? (키득거리며 웃다가 머리에 재킷이 씌워졌다. 당신의 체취가 훅 다가왔다. 열이 오른 귓가를 감추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귀를 가렸다.) 나한테 주면 넌 어쩌려고? 그러다 감기 걸린다.

62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6:43:46

>>61
...! (당신이 가까이서 싱긋 웃으면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당신이 키득키득 웃는 사이 재킷을 씌우고 나서 모른척 말한다.) 그, 그냥, 집밥 종류. (후드를 덮어서 머리를 가렸다가 당신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말에 아직 약간 얼굴을 붉힌 채로 미소지었다.) 그럼 그 땐 네가 돌봐줘.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재킷은 당신에게 덮어준 채였다.)

63 이름 없음 (vPjBH676zA)

2020-11-29 (내일 월요일) 18:08:58

>>62
(당신이 말을 더듬자 약간 의아한 기색을 보인다.) 그것도 좋지. 네가 해준 건 언제나 맛있었으니까. (당신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라, 이걸 이렇게? (깔깔 웃다가 무엇인가 깨달은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잠시만, 그러면 고백은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는 거야?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면 내가 먼저 해야겠다. 좋아해, ㅡㅡㅡ. 나랑 사귀어줄래? (붉어진 귀는 이미 재킷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당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푸르른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64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20:00:34

>>63
기대해, 오늘도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당신의 말에 기운이 돋아 미소지었다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당신이 그렇게 웃을 때마다 내 마음이 두근거리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 어쩐지 조마조마했다.) 으, 응? (고백이라는 말에 약간 정신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당신이 눈을 찡긋거리면 그만 웃고 말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당신이 먼저 좋아한다 말해오면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방금, 뭐라고.) -나, 나를, 좋아한다고. (양손으로 제 화끈거리는 뺨을 덮었다가 넘치는 사랑스러움에 당신을 끌어안았다.) 나는 사랑해. 사귀자, 우리.

65 이름 없음 (4tLtLcyoOI)

2020-11-30 (모두 수고..) 09:43:37

>>64
그 정도야? 오늘은 또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되는데. (말을 마치곤 짓궃게 씩 웃었다.) 응, 너를- (당신의 뺨이 붉어진 걸 보고 파하- 웃음을 터뜨렸다. 한손으로는 당신을 마주안고 다른 손으로는 당신의 볼을 살살 쓸었다.) 아, 어떡해...나 이미 콩깍지 꼈나봐! 너무 귀엽다, 진짜.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릴 정도로 한바탕 웃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응, 나도 사랑해.

#답이 늦어서 미안해. 어젯밤에 일이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66 이름 없음 (eNx4/xvOP.)

2020-11-30 (모두 수고..) 13:26:09

>>65
한참 울었으니까 맛있는거 먹고 기운내야지. 안 그래? (당신이 웃는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당신이 저를 마주 안으면 한층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볼을 쓸어주는 당신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잠시 편안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난 이미 예전부터 네가 하는 행동은 다 예뻐보였는데, 이거 어쩌지. (웃느라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말에 당신의 이마에 이마를 툭 맞대고 웃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잠깐만 이러고.. 잠시만 더 이러고 있다가 들어가자.

#괜찮아! 답레하는데 부담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

67 이름 없음 (Cph13PWk3o)

2020-11-30 (모두 수고..) 19:29:00

흔들리는 붉은 빛, 붉은 하늘.
그 날의 석양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너와 함께.

늦은 오후. 시간으로 따지면 5시쯤. 적막한 교내에 방과후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퍼지면, 느즈막한 이 시간까지 남아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교사 밖으로 나온다. 그들은 어느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외의 용건으로 남아있던 학생들이었다. 밖으로 나온 뒤 저마다 두서넛씩 무리를 지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조용하던 학교와 운동장에 자근자근 발소리와 웃음소리들이 잔잔히 울려퍼진다. 멈춰있던 물이 흐르듯이 지나가는 풍경에서 눈을 살짝만 돌려보면,

"선배. 이제 나오는 거에요?"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영원히 바라지 않는 사진처럼.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저를 기다리게 한다니까요. 뭐. 그럼 점도 포함해서 좋아하지만요."

한 학년 아래의 그녀는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곱게 주름이 접힌 교복 치마가 걸음을 따라 흔들린다. 그와 거리가 좁아지자 멈춰서 소리없이 눈을 깜빡 접어 미소를 짓고 한 손을 내민다. 가는 손가락이 인상적인 하얀 손이었다.

"선배 기다리느라 손 다 식었으니까, 선배가 따뜻하게 해주세요. 그래줄거죠?"

어서 잡아달라는 듯이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그녀가 그를 올려다본다. 부드러운 갈색의 눈과 머리칼이 저녁 노을에 물들어 불그스름하다. 붉음에 대조적인 하얀 손은 잡으면 사라질 것처럼 보여도, 그럴 일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68 이름 없음 (0FKiwyOv4Y)

2020-11-30 (모두 수고..) 21:32:19

>>67
흥미가 생겨서 덥석 가입한 동아리였지만 활동은 예상외로 무척이나 힘들었다. 중간에 졸 뻔한 것을 다리 꼬집기로 간간히 버텼고 자꾸만 제자리를 벗어나려는 혼을 몇 번이나 끄집어 원래대로 두었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로 열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대답에 의지박약이 어떻게 열정을 낼 수 있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이 백 중에 오십은 넘을 것이다. 열정의 까닭은 그 애다. 뭐 까닭이랄 것도 없고 열정 자체가 그녀라 해도 무방했다. 혼자서는 힘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럽지만 이것만이라도 확실히 단언해야 나 자신이 온세상에 떳떳해지겠다. 세상아, 아주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그 애가 있어서 내가 열정을 냈다! 그 애가 있어서 냈다고!

‘역시 매일 기다리는 건 지치겠지.’

계단을 내려가고 인파가 거진 향하는 방향을 보고 걷다보면 뚜렷하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동아리 내내 상상만 하던 부드러운 갈색이 저곳에 실존해 그녀가 없는 이곳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침내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 흐릿하던 체취가 진해져왔다. 추워보이는 양 뺨이 안쓰러워 눈썹을 기울였지만 ‘좋아한다’는 소리에 연신 헛기침만이 나왔다. 남 속내 간지럽히는 말만 모아둔 책이라도 열심히 읽는 건지, 머리가 어질어질한 적이 한 두 번도 아니다.

“예, 예. 해 드려야죠.”

처음엔 하얀 손을 제 두 손으로 막 비비다 놀이 지는 하늘과 땅으로 가기 위해 한 손으로만 살짝 잡아당겨 선두로 나갔다. 은연 중에 붉은 빛을 가려 뒷사람이 사라질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본인을 비웃으며 손만 더 꽉 쥐었다.

69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1:58:16

여기까지 인 것 같다. 주인. (피로 점철된 바닥이 지평선 너머에서 비쳐오는 밝은 오렌지빛으로 점차 물들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당신의 손에 들린 검이 웅웅거리며 소리를 냈다. 길고 긴 싸움. 주인이라 부른 이와 첫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같이 성장했고, 같이 모험을 했으며, 같이 생사를 넘나들었다. 검의 내구도는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고, 단순한 수리라는 걸로 고쳐질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금의 주인을 잃고싶지 않아 매 위기들을 끊임없이 베어왔다. ─이제 이 이후로, 에고 소드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말은 하지마. 약해빠진 주인을 여기까지 끌고오느라 힘을 다 쓴 거 뿐이니까. (괜히 퉁명스런 목소리를 낸다. 웃음기를 오래 이어갈 수는 없었지만.)

70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2:12:22

>>69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더는 물건이 아닌 동료라고 생각할 만큼. 맨 처음 그를 뽑아들었던 순간 운명이란 걸 알았다. 당신을 쫓는 사람이 나 역시 뒤쫓았지만 그에겐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고 난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완전히 손에 쥘 수 있던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단 걸 모르고서 기뻐한 시간이 거짓말 같다.) ...그럴 법도 하겠지. 나는 못난 주인이었어. 너 같은 명검엔 어울리지 않는 주인이고말고. (칼집에 새겨진 낡고 닳은 문양을 손으로 덧그렸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찾아주기 전에 떠나보내는 게 유감이야. 아아, 나도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워. 하지만 네 덕분에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를 들어 눈부신 석양에 비춰 보면 희미한 오렌지빛이 살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실금 사이사이로 비춰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어쩌지. 너의 근원으로 널 다시 데려다놓으려면 다른 검을 쥐어야만 할 텐데. 네가 아닌 검을 쓰고 싶지 않아졌어.

71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2:23:16

>>70
글쎄...낯간지러운 말은 딱 질색이라서. 잘 알지않나. (마치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백색의 고동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울려퍼진다. 그 박자는 물론 당신의 심장 박동과 일치하다. 하지만, 이쪽은 서서히 그 박자가 느려지며 어긋나고 있다.) 이제서야 깨달았냐. 망할 주인. 그러니까 잘 하지 그랬냐. 나도 너처럼 약한 주인의 손에 쥐어지고 싶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세기의 명검, 의지에 따라 그 백색은 모든 그림자를 베어내고 그 검날은 푸른 날의 구름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을 몰고다니는 저주받은 검이라고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또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기로 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붕. 마치 버럭 화내는 것처럼 한순간만 빛을 뿜어내자 칼날에 굳어있던 피가 순식간에 벗겨졌다.) 주인은 검을 쥐기 위해 태어났어. 내가 키운 역작이란 말이다. 지금의 주인이라면, 섬기는 걸 마다할 검은 없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고, 탁한 회색빛으로 뭉쳐들었다.) 주인은 그저 죽을 때까지 검을 쥐고나서, 늙어 죽기 전에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모든 검 중의 최강의 명검은 바로 이 몸이었다고. (짧지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주인, 거기 있나?

72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2:44:51

>>71
그래, 마지막까지 너답네... 부드러운 말이라곤 한 마디도 안 해 주고, 그 와중에 자기 잘난 건 잘 알아서. (느려지는 고동에 내 심장소리도 맞아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심장 고동을 통제할 수 없기에, 점점 그의 박자가 느려져간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같은 게 잡았는데. (많은 이들이 검을 노렸다. 마검이라고 불리는 그를 큰 사냥감을 잡는 것처럼 하나의 트로피로 가지려는 자, 금전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 그를 가지려는 자, 그에게 파멸할 나를 구하려는 과거의 현재의 인연들. 그러나 그의 주인은 언제나 나였다.) ...뭐- (화내는 듯한 그에게 놀라다가도 금이 깊어질새라 눈을 부릅떴다.) ... (긴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긍의 한 마디도 없이 흐려져가는 그를 바라봤다.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응. 밤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도 베어버리고, 주인이 원한다면 구름 위에서 운명을 연주하는 신의 현도 끊어 잘라버릴 수 있고, 자신이 부러져도... 주인을 살리는, 세계제일 성검의 주인이 여기 있지. (아직 듣고 있을까? 말라버린 목으론 기침을 내뱉지 않는 게 고작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도 잃어버린 나의 찬가에, 분명 그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73 이름 없음 (43mqMEzTB.)

2020-11-30 (모두 수고..) 22:52:40

살이 베일듯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당신과 나는 새하얀 눈이 덮인 설원에.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죄수들이 메고 떠난 새하얀 헝겊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허연 눈밭에 무릎을 처박은 당신이 처량하다. 죽음을 직감한 숲은 숨을 죽이고서 가련한 나뭇잎마저 숨을 멈춘다.

" …선택해. "

설원에는 오직 당신과 나. 그 뿐이었다. 무릎을 처박은 당신과, 허리를 꼿꼿히 펴든 나의 사이에는 긴 침묵보다도 무거운 시간과 추억이 내려앉았다. 당신을 담은 나의 눈이 시렵다. 차디찬 겨울 바람 때문일지, 처연한 그대의 숨소리 때문일지.

" 나를 죽여. 사람들에게 마녀를 잡았다고 말해. 그럼 당신은 사형에서 면하겠지. "

나는 당신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붉게 물든 눈조각이 낡은 신발 밑창 아래로 눌려버린다. 한 발짝 더 다사가자 조금 더 붉게 불든 눈덩이가. 다시 한 발짝 더.

" 아니면, 이대로 내 손에 죽던가. "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마녀, 상대는 마녀와 내통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남자. 상황은 남자가 총살형을 집행 받기 직전 마녀가 사형 집행인들을 죽이고 상대에게 선택권을 쥐어주고 있는 상황! 아무렇게나 이어줘도 좋아!

74 이름 없음 (nXOdwxMkFQ)

2020-11-30 (모두 수고..) 22:57:39

>>72
(이 성격은 본디 타고난 것이었다. 타고난 것이면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멀리 하고 싶은 곳으로부터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자신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도 정말로 변하지 않았구나. 당신과 함께 해온 시기는 자신이 살아온 시기에 비하면 아주 일부의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당신이라고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첫만남부터 어느정도 예감했는 지도 모른다. 일시적으로 빛을 뿜어낸 탓인지 더이상 이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소재로 만들어진 몸체 일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뎌진 칼날이, 정신이, 천천히 풍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새벽녘의 바람은 따듯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이름들은 이제 그만둬라. 이제 주인만의 이름을 만들어라. 나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말야. (당신의 걱정을 비웃듯이, 대답하고선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해서...이 몸을 쥐었던 것에 부끄럽지 않을 영웅이 되어라. 주인은...이전부터, 이 몸이 모든 걸 해줬다고 생각하지만...그렇진 않아. (내뱉는 말이 점점 더뎌지고, 에고소드의 정신은 천천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줄 말이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죽음을 버텨낸다.) 주인은...이 몸의 첫번째 친구였다. 가족이었고, 동료였고, 또...또. (소리가 멎는다. 불어오는 바람이 수풀을 간지럽히는 소리만이 당신의 주변에서 맴돈다. 꽤 긴 침묵이 이어지다, 갑작스레 왁! 소리를 낸다.) 하, 놀랐냐, 주인. 자꾸 졸려와서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그러니까...날 최대한 높이 치켜들어라. 제일 높은 곳에서 지켜봐줄테니. 알겠나, 주인, 아니, ─.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다.)

75 이름 없음 (Cph13PWk3o)

2020-11-30 (모두 수고..) 23:24:31

>>68
그의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은 실체가 있었고 분명한 실감이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차게 식은 손에 그의 손이 막 비벼지자 그녀가 작게 키득이며 웃었다. 해달라고 해주는 그 행동이 간지러워서, 간질거려서.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환히 웃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앞을 향할 때 그녀도 같은 방향을 향하며 가는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크고 든든한 그의 손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밀어넣고 꼬옥 쥐었다.

"그거 알아요? 선배 손은 항상 따뜻해서 손난로 대신 쓰기 딱 좋아요."

간질간질하게 깍지를 끼어놓고 천연스럽게 말을 하는 그녀. 앞을 향한 얼굴엔 희미한 웃음기가 감돈다. 금방이라도 돌아보고 농담이에요. 라며 할 것 같은데 하지 않는다. 대신 붉디 붉은 황혼을 드리우고 천천히 걸어간다.

"오늘따라 노을이 엄청 붉네요. 꼭 세상이 불타는 것 같아요."

그녀의 보폭에 맞춘 걸음으로 걸어가는 귀갓길은 정말 그랬다. 황혼이 드리운 것은 그녀와 그만이 아닌 온 세상이어서, 색채가 옅은 배경은 그야말로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가까이 가도, 손을 대도 전혀 뜨겁지 않은 불길로 감싸인 세상은 익숙하고 동시에 그립다.

"그래서 선배, 오늘은 어디로 갈래요? 늘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 아니면 제가 지금 가고 싶은 카페?"

답이 정해진게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하며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본다.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한결같은 빛이 빙글 감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니 다른 각도로 빛이 둥글게 감싸돈다. 시선에 한술 보태어 가는 손가락 끝이 그의 손바닥을 살짝 간지럽혔다.

76 이름 없음 (o5fQlt2iUw)

2020-11-30 (모두 수고..) 23:34:27

>>74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이 탄생하는 순간 수많은 별이 축복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늘에서 막 내린 눈처럼 하얀 그를 보고, 그는 혹시 별으로부터 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의 동지인 당신을 찾으러 눈이 계속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일까라며. 더는 어린애가 아니지만 그 생각은 발자국 없는 설원 한 조각을 떠 놓은 것처럼 순수히 줄곧 내 마음에 살아 있었다.) 없어질 때가 되니 마음도 약해지는 모양이야? 네가 그림자를 자처하다니. (그의 웃음에 맞춰서 웃으려 했다. 작게 툭, 튀어나온 웃음소리. 웃어야 해. 이제 그의 햇살을 맞고 서 있을 수 없지 않니.) 나도 이제 컸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컸지. 하지만 나한테 더 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지. (그는 모든 걸 해주진 않았지만, 많은 걸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그를 점차 지워갔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짐작했을 때, 어쩌면 처음부터였다.) 미안해. 나한테 너는 첫 친구도, 첫 가족도, 첫 동료도 아니었어. 하지만 나한텐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네가 유일한 친구고 가족이고 동료였지. (너를 반대하는 가족에게 도망쳤다. 너를 갈망하는 친구를 죽였다. 나를 연민하는 동료를 쫓아냈다. 그때도 그는 경고하고 있던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사슬에 걸린 사슬처럼 이어지던 생각은 왁! 하는 소리에 툭 끊어졌다.) 으악! ...놀랐잖아. (졸림을 호소하는 그의 말에 침묵하며, 유언과도 같은. 아니, 유언을 가만히 들었다.) ...알았어.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가만 안 둘 테니깐.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가 하얀 눈가루가 되어 별이 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칼끝을 겨눴다. 석양─ 이 아닌 막 뜨는 반원의 해를 향해, 새벽녘의 해를 향해. 그리고, 그 해가 뜰 저만치 높은 하늘 위로 칼끝을 치켜세웠다. 어둠이 슬금슬금 물러가는 하늘이 보였다.) ...이거 봐, 저녁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해가 떴어. 일몰이 아니라 일출이었네. 어느새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 (아무도 모르는, 나만, 그의 주인인 나만 알고 있는, 내가 지어준 그의 이름을 부른다.)

77 이름 없음 (OGWaQ8myLw)

2020-11-30 (모두 수고..) 23:40:24

>>73
머리가 눈 색으로 새어버리는 줄 알았다. 자기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 수발총의 공이 넘어가는 소리와 정교회 목사의 기도소리-그것은 기도를 빙자한 저주였다-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오자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당신, 당신이야? 그렇지?!"

손이 뒤로 묶여있었다. 나는 꼴사납게 자루 쓴 머리를 휘두르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았다. 뜨거운 입김이 자루 안에서 얼어붙어 그것은 버석버석히 흔들렸다.

"더 이상 여기선 안 돼. 우리 도망가자. 산맥 너머 동쪽으로! 그곳 시비리로 도망가면 교회도 황실도 아무것도 안 쫓아올거야! 아무도 죽을 필요 없어!"

나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공황 상태였다. 그야 일분 전까지만 해도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생존'과 '도주' 단 두 단어였다. 풀려버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 눈밭에 머리를 쳐박는다.

"빨리...지금 가야 해..당장..!"

78 이름 없음 (2hMiGEhcUA)

2020-12-01 (FIRE!) 00:07:21

" 그래… 당신은… "

자루를 뒤집어쓴 남자는 연거푸 머리를 처박았다. 셀 수 없는 총알 세례가 아닌 찬바람에 휘청이며. 나는 그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당신도, 나도, 찬바닥에 무릎을 처박고서 서로를 마주했다. 설산이 고요하다. 마치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린다는 듯. 표독스럽게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 아직도 모르겠어? "

나는 당신의 자루를 벗겨냈다. 목에 단단히 묶인 밧줄을 펴내고, 거칠게 자루를 끌어냈다. 겁에 질린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머리칼이 새하얗게 새어버린 듯 눈발이 내려앉은 나의 얼굴도.

" 당신은…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도망치지 못해. "

담담히 쓸어내리는 문장이 메마른 노랫말과 같다. 하나하나 내뱉어내는 그 말들이 너무도 거칠어 입 안이 비릿해지고야 만다. 새하얗게 질린 당신의 뺨을 한 번, 바닥에 떨구어진 장총을 한 번. 장총을 쥔 손을 당신과 포개었다. 보란듯, 총구를 하늘 향해 치켜들고, 목젖에 맞춰들고. 나는 조용히 내려깐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 그 어디에도 우리의 낙원은 없어. "

겹쳐둔 당신의 손을 어루어만졌다. 산송장의 손을 감싸쥔듯 차갑다. 당신이 느끼는 나도 산송장과 같을지.

79 이름 없음 (2hMiGEhcUA)

2020-12-01 (FIRE!) 00:07:45

# >>78 앗 앵커 안 달았다...! >>77

80 이름 없음 (KXl1y9uQqY)

2020-12-01 (FIRE!) 00:26:23

>>76
웃기지 마라. 이 몸이 주인의 그림자라니, 이미 나약한 본체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아니, 언제였지. 흐릿하고 막연한 사건들만이 존재하고 정작 나열은 되지 않는다. 시간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운데, 마치 포커싱을 맞춘 것처럼 당신과 함께 지냈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망할, 주마등이라니, 시덥잖은 짓 하지마 여신. 그런 말을 분명 입으로 담은 거 같았는데,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몸 끝이 세워져, 하늘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당신이 해오는 이야기는 선명하게 들려오지만 주변의 공간을 능숙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마치 꿈결 같다.) ...망할, 난 그 이름이 맘에 안들었어...마지막이니까 봐준다. (어라, 내 마지막 말은 욕짓거리가 되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당신의 말마따나 일출을 보려 노력한다. 우웅, 마지막 떨림, 마지막 빛, 그리고...그리고.) ...후에 저승에서도, 이 몸을 주워라. 기다리고 있겠다. (우뚝.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의 바람마저 멎었다. 어둠 한 점 남아있지 않은, 여명의 빛이 이 세계를 가득 메우는 순간─당신이 상상한 별의 죽음과도 같이 순백색의 가루가 되어 빛을 타고 오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한없이 높은 곳으로. 에고 소드의 흔적이라곤 당신이 꽉 쥐고 있는 손잡이 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곳엔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글귀가 어느새 새겨져있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

81 이름 없음 (Xf4rmajAhM)

2020-12-01 (FIRE!) 01:41:32

>>80
응, 기다릴 너를 위해 영웅이 될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다. 그쪽을, 위를 쳐다보지 않으려 하면서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느린 고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피가 들어가 먹먹한 귀도 이명을 멈춘 때. 팔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가지 마. (순간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에서 눈을 돌리고 위를 향했다. 뒤늦게 바라봐도 더 볼 수 없는 먼 하늘로 가는 금속가루만 보였다. 아, 보지 말 것이지. 더 슬퍼질 테니 뜨는 해를 바라보며 모두 잊어버릴 것이지.) 가지 마. 소테르σωτήρ. 가지 마... (그러나 손에 남은 건 그의 인격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손잡이뿐. 아니, 그의 마지막 말이 하나 새겨져 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별을 향해... 별. (가슴이 답답하다. 서늘한 새벽바람을 맞아 피가 말라가는 옷이 체온을 빼앗으며 몸을 얼려간다. 문득 참을 수 없게 우습다. 그러니, 웃자. 시원하게 웃자.) 하하, 하하하하하하, 아하하, 아하하, 흐, 으흐, 흑, 으, 으으, 흐읍, 흐, 하, 하하하하, 흣, 하, 아아아, 하, 아, 아, 아, 흐, 흑... 하악, 아아아아... (그리고 그를 위해 감정을 쓸 수 있을 때 모두 풀어버리자. 지금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그러고 나선 나를 위해 새 검을 구하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시작해야지.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세상에 하나의 영웅담으로 매듭지어져야 한다.) 응, 나 별을 향해 갈게. 무언가 가로막아도 피하고, 부수고, 뛰어넘고, 밀어서 은하수 길을 따라갈게. 하지만... 만약에 내가 실패해서 죽었다고 하면 네가 같이 환생해야 해. 내가 별을 찾을 때까지 계속 내 검으로 태어나. 도전 횟수 안 정해놨으니까 불평할 거리도 없지? 난 더 이상 네 말 같은 건 안 들을 거니까, 얼마든지 말 못하는 검으로 태어나던가. 답답한 건 먼저 죽은 대가로 치자. 우리 또 만나. (밤이 다 갔다는 것처럼 뜨는 순간을 놓친 해가 부지런히 하늘을 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횡설수설 내뱉은 말을 주워섬기듯 새가 지저귄다. 아침의 시작이었다.)

82 이름 없음 (KXl1y9uQqY)

2020-12-01 (FIRE!) 03:00:33

>>81
(얼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 대륙 내에서 당신의 이름을 칭송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뒤였다. 이제 그 어떤 검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검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명성 높은 대장장이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든. 그저 당신은 난폭하면서도 절제하며 검을 휘둘렀고, 더 이상 휘두르는 것 조차 불가능해질 즘이면 수리하지도 않고 새 검으로 갈아치웠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도 보였고, 당신의 상대를 베어나가는 것은 그 뒤의 문제처럼도 보였다. 이제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어지게 되었으나, 당신이 뽑아들었던 또 하나의 명검도 수명을 다해 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지금의 당신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공허함? 허탈함? 혹은 그저 새 칼을 들여야하는게 성가시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하는 아주 일말의 기대감은 마치 아기새의 숨소리처럼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저 가장 가까운 도시의, 가장 가까운 대장간을 들른 당신이었지만 이미 당신의 소문은 날 대로 나있어, 유명한 대장장이들이 당신 곁으로 몰려와 자신들이 직접 만든 칼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명검이며, 한 자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당신은 이 중에서 한 자루의 칼만 집어들면 끝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장간 창고 구석, 낯익은 순백색의 짧고 미약한 공명을 보기 전까진. 대장간 주인은 당신의 시선에 당황해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 볼품없는 검은 먼 대륙에서 찾은 에고 소드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건지, 의식이 없는 불량품이라고. 당신은 그 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한 맥박, 그리고 칼날에 새겨져있는 ‘구원자’ 라는 글귀. 여기까지가, 영웅으로써의 당신과 관련해 남아있는 마지막 기록이었다.)

83 이름 없음 (bTZzzmVI7.)

2020-12-01 (FIRE!) 13:19:45

>>66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까르르 웃다가 당신이 꽉 끌어안자 숨막힌다며 당신의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것이 싫은 기섹은 아니다.) 그으러면...내가 책임지면 되겠네, 그렇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곤 고민하는 척 하더니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말하는 모양이 제가 어떤 식으로 보일지 아는 것 같다.) 어리광이야? 나야 환영인데! (킥킥 웃으며 당신의 등을 토닥였다. 다른 손으로 당신의 뺨을 매만지다가, 충동적으로 뺨에 입을 맞췄다. 짧은 접촉 후에는 놀리듯 바로 얼굴을 멀리하곤 짓궃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양해를 구했는데 한참 더 늦었을 때의 심정을 구하시오(점수 미정)
#답레의 텀, 들쭉날쭉, 알아둘 것!

84 이름 없음 (HWemksMIfM)

2020-12-01 (FIRE!) 16:08:38

>>83
힘들 때는 밥이 최고지. 오늘은 수분 보충도 할 겸. (당신이 제 가슴께를 두드리면 아차, 하고 손을 떼어낸다.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당신을 보고 눈을 휘어 웃었다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알아줬으면 해. 내가 어리광 부리는 건 너 뿐이야. (당신이 뺨을 어루만지면 붉어진 뺨이 열기를 더했다. 당신이 뺨에 입맞추면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떴다.) 어.. (뺨에 남은 입맞춤의 감촉에 몸이 굳었다. 당신이 저를 짓궂게 바라보면 붉어진 제 얼굴을 감싼채 말을 더듬는다.) 너, 너 정말...

#문제없다! 짬날 때 확인할테니 부담갖지 말어라!

85 이름 없음 (UJ0K0iqO3Q)

2020-12-01 (FIRE!) 20:08:07

>>84
(당신이 손을 떼어내자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장난섞인 엄살에 가까웠나 보다. 내 행동, 손짓 하마에 얼굴 붉히는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는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은 잘하지, 아주. (킥킥거리며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듣기는 좋네! (굳은 당신을 보며 참치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당신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한손을 깍지껴 잡으려 한 후에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계속 이렇게 밖에 있을 생각이야? 나는 몰라도 그러다 감기 걸린다, 너. 간호해주는 건 상관없지만 아픈 건 보기 싫다구.

86 이름 없음 (owq6daphrQ)

2020-12-01 (FIRE!) 21:18:58

>>85
(당신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머릿속까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온통 빛으로 뿌옇게 보였다. 당신이 웃을때마다 그 빛은 점차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당신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깍지를 끼려는 것 같은 당신의 손길에 제 손을 겹쳐쥐어 먼저 깍지를 꼈다. 당신과 한 손을 잡은 채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하, 걱정해주니까 기분은 좋네. 고마워. (하지만 역시 너무 걱정끼치는 건 싫었다. 당신이 제 몸을 걱정하는만큼이나 나 역시 당신의 마음을 걱정했다. 현관문을 열고 하금테 안경 너머로 당신을 보며 웃었다.) 들어가자.

87 이름 없음 (quEkNWz0Fo)

2020-12-02 (水) 15:15:25

>>86
기분이 좋긴 뭘 좋아. 걱정할 테니까 아프지 말랬더니. (눈을 슬쩍 흘기며 툴툴거렸다. 생각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지. 금테 안경 너머의 눈과 마주쳤다. 웃음에 휘어지는 눈매에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응.

#어쩐지 막레 느낌이네. 짧게나마 달달한 거 돌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88 이름 없음 (XiS0y8/kfE)

2020-12-02 (水) 15:34:28

>>87
#그러게,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처음에는 우는걸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로 마무리되어서 참 좋다. 덕분에 즐거웠어!

89 이름 없음 (WIqzGEunYs)

2020-12-03 (거의 끝나감) 20:52:19

이 편의점은 제가 먹었는데요. 다른 데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방독면 안에서 정중한 말투로 꾸민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바닥에 거꾸로 세워둔 피묻은 야구배트를 빙글빙글 돌리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발치에는 쓰러져있는 좀비인지, 사람인지 모를 시체의 다리가 보인다.)

90 이름 없음 (6/QRhgzxjA)

2020-12-04 (불탄다..!) 00:53:57

>>89
그러죠 뭐. (이런 시국에 또라이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좀비보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련없이 문을 닫고 유유히 멀어졌다.)

91 이름 없음 (ihCyKh8f1g)

2020-12-05 (파란날) 02:15:29

"오 신이시여, 이런 젠장맞을!"

포격이 끝났다. 사나운 울림이 잦아들자 참호 속의 병사들은 하나 둘씩 고개를 든다. 인원 수를 파악하는 장교들의 고함소리, 재수없게 포탄에 당한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앤드류 또한 얼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그는 포격 소리에 머리가 띵한지 웅크려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쓴 편지가 피 섞인 흙탕물에 흠뻑 젖어버렸어! 사랑하는 메리에게 보낼 편지였는데!"

그는 속이 잔뜩 상해 푸념을 한다. 난장판이 된 편지지를 손으로 털어보지만 그게 될 리가. 이미 편지지는 검붉은 카키색으로 염색된지 오래다.

"후방 참호에서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편지에 썼는데, 이런 편지지를 보고 어떤 바보가 그 말을 믿겠나?"

"가엾은 메리.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았다간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겠지.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전해준다면 분명 메리는 쓰러지고 말 거야."

앤드류는 마침 옆에 있던 또 다른 병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물론, 새 편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이보게 전우, 혹시 멀쩡한 종이 남은 것 있나? 내 연인에게 보낼 편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네. 이 꼴이 난 편지를 부칠 수는 없잖은가."

92 이름 없음 (lYEKjiYtN2)

2020-12-05 (파란날) 05:00:02

>>91
앤드류에게 말을 걸린, 군모를 푹 눌러쓴 병사는 종이를 내미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앤드류로서는 낯이 익을 목소리였다.

"쓰러지긴 뭘 쓰러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퉁명스레 쏘아붙인 병사, 메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지만 같은 소대로 편성되었을 줄이야... 쯧. 어차피 다시 분대로 갈라지면 볼 일 없을 테니 굳이 아는 척 하지 마라."

말을 마친 순간, 멀리서 메리의 이름을 호명하는 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는 몸을 일으키고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너희 분대장님도 찾고 있을 테니 어서 가봐. 난 간다."

그렇게 말한 뒤, 메리는 금방 돌아서서는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자신의 분대를 향해 달려갔다.

93 이름 없음 (ihCyKh8f1g)

2020-12-05 (파란날) 13:28:57

>>92
"오 메리. 이 지랄맞은 상황 속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네. 전쟁도 웃으면서 해야지. 군인이 웃을 수 없다는 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사실 아주 위험한 징후란 말일세 전우!"

육군성은 지역연대라 하여 한 부대에 같은 지역의 청년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마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아니면 아는 사람들끼리 모아 사기 증진을 기대한 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지역연대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조심하게! 메리! 참호족에 걸리기 싫으면 발을 잘 말리게!"

그는 멀어져가는 메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지른다. 시시껄렁한 뜬소리까지 덤으로 씌워서. 메리는 아는 척 하지 마라 엄포를 놓았지만, 그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다.

이내 앤드류 또한 양 손에 무거운 탄통을 하나씩 들고서 분주한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진다.

94 이름 없음 (61Mc8CnyVg)

2020-12-07 (모두 수고..) 16:54:44


그게 네 진심이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모든 상승은 늘 추락을 전제한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멍하니 떠올린다. 옳은 말일 것이다.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만큼 무심히 흘렸던 말이었는데, 이제와서, 이 순간에서야 생각나는 걸 보면.

너는 가겠다고 말한다. 가지마. 그 한 마디를, 나는 결국 하지 못한다. 너는 그런 나를 잠시 지켜보고 서있는가 싶더니, 미묘한 감정이 섞였을 날숨을 한 번 내뱉은 후, 돌아섰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맴돌아 어지럽다.

버릇처럼 내뱉던 비아냥. 별 시답지 않은 일에도 빙글빙글 웃음을 짓던 나와, 언짢은 듯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던 너. 별 것도 아닌 호기심을 내세워 네 방에 들어갔던 일이나,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책만 들여다보는 네게 답지않게 심술이 나 책을 빼앗아 들었던 기억.

그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었고, 너는 여느 때의 얼굴로 돌려달라고 말할 뿐이었고. 할 일 없으면 그땐 네가 찾아오라, 장난기로 감췄던 진심. 정작 네가 정말로 찾아온 이 순간에는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면서.

"………."

네가 좋았는데.


#렛츠 비터앤스윗 청춘물!

95 이름 없음 (t8vEai6kVQ)

2020-12-07 (모두 수고..) 17:21:34

>>94
진심이란 무엇일까. 진심이란 말로 내뱉기 전까지는 티끌만큼이나 가볍고 또 변덕스러운 것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만큼이나 아름답다가도 더럽고, 잔기침을 유발하는 그러한 진심을 나는 말했다. 그것이 중요했다. 입밖으로 내뱉은 이상 더이상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까마득하게 멀어진다. 그게 진심인거야.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떻게 주워담겠어. 내가 뱉은 말을 네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제 그렇게 된 셈인거지.

" 갈게."

나는 발끝으로 선 발레리나처럼 발끝에 힘을 주어 천천히 그 축을 회전시켰다. 돌아선 방향엔 이제 네가 없었다. 여린 볼 안쪽 살을 송곳니 사이에 두고 짓이기며 나는 곧고 힘차게 나아갔다. 내 자신의 이런 면이 싫다. 이럴 때는 자존심을 내려놓아도 좋을텐데. 후회한다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나는 나를 세워야했다. 그리고 아마 너도 날 붙잡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따듯한 차, 낡은 책, 글자, 글자, 빙글빙글 머릿속의 단어들을 꺼냈다. 나는 빠르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꺼내어 펼친다. 가자. 여길 벗어나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커튼을 열어 달빛을 낼 것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결국 돌아돌아 다시 네가 떠오르고 만다. 지겹게도.

#고등학생 정도 나이대려나?

96 이름 없음 (61Mc8CnyVg)

2020-12-07 (모두 수고..) 20:29:53

>>95

멀어지는 네 뒷모습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어쩐지 붕 떠버린 사고로, 생각한다. 늘 웃는 낯이어서 속셈을 알기 힘들다던가, 빙글거리며 웃는 표정이 능청스럽다던가, 그러면서도 사물을 다루는 법이 영리하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참 많이도 들어왔는데. 그 끝에서 나는 궁금해한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어쩌면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아마, 둘 다 아닌 거겠지. 지금의 내 얼굴에는 역시, 표정따위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하여 너와 내가 맞이한 끝은 어이 없을 정도로 고요한 것이었다. 문득 옛날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라벨? 아니면 사티? 한쪽 손에는 작은 MP3, 나머지 한쪽 손에는 이어폰을 들고, 너는 물어왔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자, 너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라벨? 아니면 사티? 여느때처럼 웃는 낯으로 속을 긁어볼 생각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그것이라, 제정신인가,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그랬지. 네 주변은 언제나 너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답했더라. 나는 사티의 3번, 그게 아니라면 라벨, 그랬던 것 같다.

그러자 너는 참으로 드물게도 웃는 표정을 한 뒤, 이어폰 한짝을 내게 건네주었다. 받은 이어폰을 귀에 끼우자, 익숙한 선율이 들려온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3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그게, 그 오래된 MP3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고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래서 진심이었는데, 너는 그리도 쉽게 진심에 답한다.

이젠 끝인가? 응, 이젠 끝이야. 내 짧은 확인 질문에 간결하게 대답해오는 것은 역시 나이다. 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나는, 그리하여 포기가 빠르다. 영리하기도 하지. 그래, 우리의 끝은 그리하여 그렇게도 고요했다. 그러니 고생스러울 일도 없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포기해도 될 리가 없잖아.
너인 걸.

살지도 죽지도 못하지만 제발 안아주세요.* 언젠가 읽었던 시를 인용한다. 나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점에서, 나는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좀 멀게 떠올린다. 영리하지 못해도 좋아요. 너를 붙잡지 않는 영리함은, 내 것일 필요가 없었다. 인생 첫번째 바보짓이어도 좋아요. 왜냐하면 너도 바보니까, 너는 멈추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나도 바보니까, 너를 멈출테니까.

"───."

그러니, 이름을 부른다.



# 쓰다가 한 번 날렸어… 울어…
# 예스 고등학생… 근데 전개가 너무 빨라졌나:3c…
# 김혜순, 좀비레인

97 이름 없음 (YHkM6N2Uc6)

2020-12-13 (내일 월요일) 13:06:19

"이제 곧 자정이야."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네 앞에 우두커니 서있어. 너는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이네. 하긴. 이제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다른 사람을 못 앉게 한다거나, 혼자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아다닌다거나. 디저트 카페에서 혼자 커플 메뉴를 주문하는 바보같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미안했어."

내가 그렇게 귀찮았구나. 그래서 얼굴도 바라봐 주지 않는 거구나. 이제 마지막인데. 열두 시가 지나면 나는 사라지는데. 너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 거구나. 여태 나만 행복했던 거야. 이런 나도 참 이기적이네.

"..."

미련이 남아서 너를 뚫어져라 바라봤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어. 나만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이 바보야.

98 이름 없음 (lF4Hp47LRs)

2020-12-14 (모두 수고..) 23:34:23

>>97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의 평소 모습에 비하면 그는 오늘 너무 과묵했다. 마치 침묵의 저주에라도 걸린 듯이,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늘어뜨린 채로 고개를 푹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몇 마디를 주워섬길 터였다. 추억을 되짚어본다거나,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던 일들을 이야기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바보같이 먹을 일도 없을 내일 저녁 메뉴를 묻는다거나. 사실 그 사람은 당신과 단둘이 있을 때면 꽤 수다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지금 그 사람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무언가 중요한 부품 하나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라도 되는 마냥,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련하다... 후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사과는 됐어."

당신이 입술을 꾹 깨물 때, 그제서야 그 사람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며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아래 드리워진 그늘 안쪽으로, 그 사람의 눈동자가 선명한 빛깔을 띄고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행복했어?"

하고, 그 사람은 나직이 당신에게 질문을 건넸다.

99 이름 없음 (T1tK/jaEyA)

2020-12-15 (FIRE!) 11:04:38

"야,"

대뜸 던져진 말이었다.
당신과 나는 언제나처럼 학교 내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대화는 잠시 끊어졌었다. 나는 한구석에 만들다만 눈사람이라도 되는 것같은 눈뭉치를 두어번 툭툭 차더니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누구 안 사귀냐?"

당신과 나는 15년지기 친구였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당신이라면 실상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사귀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에 반해 당신은...경험이 있는 편이었고. 그마저도 짧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지만 아예 경험조차 없는 나보다야 나았다.

나는 다시 나무들로 시선을 돌렸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나무들에는 어지럽게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볼에 닿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100 이름 없음 (If2ejKLAkw)

2020-12-18 (불탄다..!) 04:52:16

>>99

"뭐."

뜬금없이 날아오는 야, 에 뭐, 로 대답하며 지내는 걸 15년 넘게 해왔지만, 가끔은 놀랍다. 내게 그렇게나 묵은 인간관계가 가족 말고 더 있다니. 그렇게나 알고 지냈다는 건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겠지만,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이윽고 들려오는 물음은 누구 안 사귀냐는 소리.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글쎄, 사귀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 티도 제법 냈고, 또 이번 크리스마스에 만나기로 했거든. 그날 꼭 고백할거야."

숱한 실패를 겪고 나서 연애같은 건 나한테 안 맞는가보다, 하고 체념했는데도, 좋은 사람을 찾아내고 마는 운과 안목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어느정도 내려놓으니 편해졌다.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준다면 기쁘겠지만, 아니면 또 어떤가. 그 사람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희망고문하지 않는 길을 알며, 그 숱한 실패의 경험 덕에 반한 사람에게서도 나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한 지금은 두려울 게 별로 없었다. 친구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좀 슬프겠지만.

"근데 별일이네, 그런 걸 다 묻고. 그런 거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 아냐, 이건 너무 연애중심주의적인 발상이지. 최근에 순정물이라도 덕질하나? 아니다, 내 실패담이 은근 재밌었던 걸 수도 있지. 지나고 보니 나도 왜 그랬나 싶은데 뭐. 눈이 내린다. 우산은 깜빡했지만 패딩이면 충분하지. 지퍼를 잠그고 파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101 이름 없음 (gFj4F4Mumo)

2020-12-18 (불탄다..!) 09:44:18

>>100

"그러냐?"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잘되겠지, 무던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이야 꽤 인기 있는 편이 아니던가? 나와는 달리 다가가는 시람도 숱히게 보였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그냥, 생각나서."

뭐어어....여전히 사람대신 공부랑 결혼한 입장이긴 하다마는,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자조적이었다. 나도 아예 짝사랑조차 없지는 않았었나. 당신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든 짝사랑은 결국 외사랑으로 조용히 스러져갔다. 나는 코트의 목깃이나마 세우고 단추

102 이름 없음 (xBU7o1MQbA)

2020-12-18 (불탄다..!) 09:46:21

>>100

"그러냐?"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잘되겠지, 무던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이야 꽤 인기 있는 편이 아니던가? 나와는 달리 다가가는 시람도 숱히게 보였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그냥, 생각나서."

뭐어....여전히 사람대신 공부랑 결혼한 입장이긴 하다마는, 킬킬거리며 웃는 꼴이 자조적이었다. 나도 아예 짝사랑조차 없지는 않았었나. 당신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든 짝사랑은 결국 외사랑으로 조용히 스러져갔다. 나는 코트의 목깃이나마 세우고 단추를 잠궜다.

"좀 춥긴 하다, 어디라도 들어갈래?"

패딩을 입은 당신이 아니라 코트를 입은 내가 추운 거긴 하다마는, 큰 상관은 없지 않겠나.

#중도작성!!! 위에 건 그냥 무시하면 된다...

103 이름 없음 (If2ejKLAkw)

2020-12-18 (불탄다..!) 11:53:16

>>102 "잘 안 돼도 상관없어, 잘 되면 좋지만 그 사람 기만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백이거든."

겁난다고 친구인 척 하면 속이는 거나 다름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며 어깨만 으쓱였다. 전형적인 둘러대는 듯한 대사로 대답하더니 공부와 결혼한 입장이라며 자조적인 투로 킬킬댄다. 흠, 외롭나? 누구 소개해주고 그런 일은 안 하는 주의니 안타깝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겠다 싶어 다시금 어깨나 으쓱였다. 그러고 있자니 춥다며 어디 들어가겠냐 묻는다.

"글쎄, 밥 시간은 애매하고. 카페에서 군것질이나 할래?"

추우니까 당 떨어지고 그러네. 김에 거기서 쿠키라도 좀 살까, 지난번에 무려 수제 마들렌을 받은 보답을 해야지. 수제는 아니지만 내 최애 쿠키니까 마음에 들어해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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