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을 핑계로 집에 가려고 슬쩍 빠져나왔더니, 어쩐지 우는 것 같은 동기와 마주치고 말았다. 못본 체 지나가려 해도 이미 마주친 상황에 뻘쭘하게 서 있는데, 아무것도 못 본 체 해달란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동기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적인 연민과는 별개로 좀 부담스러웠으니까.
맙소사, 저렇게 침울한 표정을 짓다니. 그렇지만 울고싶은 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꾹 참으며 여자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쌍따봉을 날려준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단 건지 내 말이 전달되지 않은 건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움직임이어도 소년의 고개를 떨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좌절도 잠시, 소녀가 침대로 갈 동안 기운을 회복한 소년은 문고리를 잡고 돌려본다. 철컥 소리만 요란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방 안에 갇혀버린 것이겠지.
소년은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삐그덕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 침대 위에 앉은 여자아이가 자신의 옆을 톡톡 치고 있다. 저건... 그래, 누가 봐도 옆에 앉으라고 하는 거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춘 듯 보이겠지만 소년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퐁퐁 솟아나는 중이다. 저 아이는 왜 자기 옆에 앉으라는 거지? 우리 오늘 처음 보는 거 아닌가?! 처음 보는 이성과 그렇게 스스럼없어도 되는 거야?! 나한테 뭔가 볼일이 있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일이야?!
...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극도로 어렵겠지. 소년은 기름칠 안 한 로봇같은 움직임으로 소녀가 통통 두드린 그 위치로 가 앉았다. 긴장이 가득찬 얼굴이 소녀를 향한다.
쌍따봉? 쌍따봉! 소녀는 침울한 표정을 짓다말고 같이 쌍따봉을 날려준다. 표정을 보면 소년의 쌍따봉을 도저히 해석하지못해서 혼란에 빠져있는 것 같다.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입을 ㅅ자로 끌어올리면서 굉장히 더 침울하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려는 소녀다. 소년이 침울한 표정을 좋아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소년이 문고리를 열어볼때 소녀는 뒤에서 고개를 절레잴레 저었다. 벌써 해봤지만 안됐다는 뜻이겠지. 머리를 쥐어뜯는 소년엔 소리는 안들렸지만 똥그랗게 눈을 뜨고 깜빡거린다. 놀란 것 같다. 그래도 소년이 어떤기분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은 것 같다.
소년이 삐꺽거리면 옆에 오자 소녀는 화-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의사가 잘 통해서 좋은 것 같다. 소녀는 뻐끔뻐끔거리지만 전달될리가 만무하다. 소녀는 입술에 검지를 얹더니 방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고민하는 것 같다.
소녀는 시계를 가리키고 소년에게 뭐라고 열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손가락을 시곗바늘 시침분침과 비슷하게 움직인 다음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 문을 가리킨다음 양손을 곧게펴 양쪽 손가락들을 가로로 마주친다음 앞으로 밀어낸다.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미치겠네!!' 더더 침울해진 소녀의 표정을 보고 소년이 했던 생각이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눈 앞의 어린 소녀가 자신의 위로(?)에 더 침울해진 거다. 말이라도 통했으면 더 좋았잖아! ...하고, 소년은 누군지 모를 누군가에게 불평을 토했다.
그거야 어쨌든 지금 현재 소녀의 뻐끔거리는 입을 보는 소년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는 건 좋다. 침울해하는 것보단 훨씬 도움이 된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말이 안 통하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은 별개였다. 소년은 자신의 마음이 점점 조급하고 초조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계를 향하는 소녀의 움직임에 소년도 시계를 바라본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시계 자체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으니 시간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거겠지. 소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계 앞으로 갔다. 시계를 가리키고 손가락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린 다음, 이번에는 문으로 가서 문고리를 돌리며 여는 시늉을 했다. 소녀를 돌아보며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받으려 한다.
소년이 시계를 본다. 할 말(?)을 다마친 소녀는 생글생글 웃고있다. 소년이 시계 앞으로 가자 소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지켜본다.
소년은 시계를 돌리기 시작한다. 소녀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눈썹이 ㄱ자를 거꾸로 뒤집은 모양과 ㄴ자를 붙여놓은 것 같이 된다. 이윽고 소년이 문으로 가서 여는 시늉을 하자 소녀는 두눈을 찔끈 감고 양손을 앞으로 뻗어서 홰홰 흔든다. 세게 흔드는 바람에 바람까지 나고있다.....아무래도 그게 아니라는 뜻 같네요?
소녀는 뻐끔뻐끔하며 다시 자기가 앉았던 침대로 돌아가앉는다. 발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아주 쉬는 동작을 한다. 그다음엔 침대에 아예 드러누워 팔을 베고 자는 동작을....
갑자기 단숨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폴짝하고 뛰어내린 소녀는 방의 한 모서리로 뛰어간다. 거기서 침대 쪽으로 걸어간다. 멈추더니 허공에 문을 두드리듯 똑똑 하는 손시늉을 한다. 입도 똑똑을 말하고 있지만 소리는 나지않는다. 그리고 손으로 뭘 돌리는 동작을 한다. 문고리를 표현하고 싶은 것 같다.
그다음에는 또 재빨리! 침대위로 뛰어올라간다. 소녀는 다시 자는 동작을 한다. 뛰어올라간 반동때문에 이번엔 소녀가 공중에 잠깐 떴다가 돌아온다. 자는 척을 하다가 기지개를 켜더니 자기가 서있던 곳에 대고 귀 뒤에 손을 펴서 대서 뭔가 소리가 났다는 시늉을!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아까 서있던 곳으로 쭉 걸어간다.
엉거주춤하게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멈춰선 소년은 방금 목격한 장면을 찬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으로 나가자는 이야기는 아마도 확실하게 아니다. ('아마도 확실하게'라니 이 얼마나 모순인지!) 뭔가... 소녀는 소년이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전달하려 하는 것 같... 아니아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다른 건가?
황당함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채로 소녀를 보던 소년이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는다. 만세를 부르고 있던 소녀의 어깨를 한손으로 턱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무언가를 만지듯이 휘젓는다. 무언가를 힘차게 말하고도 있었는데 당연히 당신에겐 전달되지 않았을 테고. 자기가 메만졌던 빈공간에 서서 문을 똑똑 노크하는 시늉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그 빈공간을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일찍이 암벽이 희다 해서 붙은 이름인 백암산은, 그러나 동리 사람들에게는 으레 여우골로 통했다. 산 중턱 즈음에 깊은 골이 하나 있는데, 그 아래로 내려가면 천 년 묵은 여우가 산다고 해서 생긴 별칭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아비에서 아들로 전해진 설화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살이 붙었다. 꼬리가 아홉 갈래로 나뉘어 있네, 눈처럼 흰 털에 꼬이면 간을 빼먹히네 하지만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랐다 길을 잃은 김 씨네 막내아들이 이레가 지나서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온 일이 또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여우에게 홀린 게라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발길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산다는 여우 요괴는 작은 시골 마을의 화젯거리가 되어 주기 충분했다. 어린 손주는 매일 밤 할미의 무릎에 올라앉아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으며, 어미는 목 놓아 우는 아이에게 여우가 잡아간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 모든 게 사실일지는, 오직 여우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실바람을 타고 날아든 작은 흐느낌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저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실려 온 피 내음이 코끝에 서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기울였지만 들리는 소리는 미약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는 호흡. 상처입은 짐승일까, 인간의 아이일까, 그도 아니면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무엇이려나.
괴이하게도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 대더라니, 누가 오려는 징조였나 보군.
엇차, 하고 작게 기합을 내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구리에 낀 바구니를 바로 하고는 나무 등치에 기대어 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며 이마께를 간지럽혔다. 삿갓 아래로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노인의 그것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탁탁 소리를 내었다. 눈이 두 짝에 여분으로 하나가 더 달려 있어도 까딱 잘못하면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라는 산에서 사내는 눈을 감고도 잘만 발을 내딛었다. 적막한 산중에는 바람 소리, 새 소리, 누군가의 신음 소리, 그리고 지팡이가 탁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16 천잠을 짜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산누에는 양잠이 불가능하다. 오직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지에서만 고치를 만든다. 그러니 사람이 할 일이라곤 많이 없다. 애벌래나 번데기 따위를 잡아 참나무 군락에 모아 풀어놓고, 천지신명께 빌 뿐이다. 누에들이 덜 잡아먹히게 해 주십시오, 많이 살아남아서 고치를 많이 짓게 해 주십시오.
올해는 운이 좋았다. 옥색 고치로 가방을 가득 채우자 그만큼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릴 적부터 뛰어다녔던 너럭바위의 생각은 달랐다. 습관적으로 밟고 지나가던, 밟고, 밟고, 또 밟았던 그 자리를 다시 밟았다. 그게 푹 꺼지는 순간 깨달았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 뭣하는가? 이미 늦었다.
희고 커다란 바위의 비탈 위에 난잡한 검은 선이 그려졌다. 한때는 뜨겁고 붉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선의 끝에 붉은 먹을 품은 붓이 있다. 붓을 벼루에 푹 담근 것처럼, 아직도 먹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으윽....그르륵...."
호흡에 거품 끓는 소리가 올라온다. 온 몸이 부러지고 깨져 그렇게라도 숨을 쉬는 것이 기적이었다. 누군가가 눈 앞에 검은 종이를 가렸다 치웠다 하는 것 같다. 시야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간간히 암전이 일어난다. 골통과 눈이라고 성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가방에서 새어나와 굴러다니는 고치들을 보았다.
이렇게나 많이 땄는데. 이렇게 많이 땄는데..... 그녀는 초 단위로 다가오는 죽음을 부정한다. 집에 가서 이걸로 천잠을 짜야지. 우연히 손 안에 들어온 고치 하나를 꽉 쥐었다. 그녀는 혹시나 자신이 너무 꽉 쥐어 으스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다. 그저 고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을 꿈틀대는 것 뿐이었으니까.
어디 돈 될 만한 약초 같은 것이라도 캘 수 없을까 싶어 여우골에 올랐던 것이 발단이었다. 울퉁불퉁하고 굽이 진 길은 자칫하면 발목을 삐기에 충분해 보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만들었다. 망할 여우 새끼. 이렇게 고된 길을 올라 약초 한 포기도 얻지 못 한다면 다음은 너다. 드세게 내뱉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드세기만 할 뿐, 주위에 들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을 뿐더러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전부였기에 힘만 빠졌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우를 욕한 이는 결국 온몸에 힘이 빠질 대로 빠져 벌러덩 땅에 누웠다. 이상했다. 분명 남들보다 체력이 좋다는 것만을 장점으로 밀었는데 고작 등반 좀 했다고 이렇게 드러눕다니. 나도 이제 한물 갔구나, 라고 생각하던 아명雅溟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흙과 돌이 뺨에 닿아 시원했다. ......세상에나 이게 뭐야!
삐죽삐죽한 잎에 길게 늘어진 줄기들. 지금까지 찾던 약초가 틀림 없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뜨겁게 피가 도는 느낌과 고생길의 설움이 합쳐지며 아명은 저 약초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짐짝만 될 뻔 했던 바구니는 그제서야 아명의 허리춤에서 벗어나 제 본분을 다했다. 역시 신은 존재한다니까!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채집하는 손은 빨라졌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귀에 걸릴 것 같다 싶으면 적당히 내려오고 올라가고를 반복했는데, 입구멍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여우야 넌 오늘 운이 좋았다든가, 오늘 여우가 비명횡사 할 일은 없겠다든가.
그래, 비명횡사할 사람은 나지.
아명은 순식간에 일어난 방금의 일을 떠올렸다. 흥에 취해 그만 비탈을 디뎌 주욱 미끄러진 방금의 일을.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천치같아 실소가 나왔다. 역시 사람은 제 이름대로 살아야 한다. 바다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가 짠내 폴폴 풍기는 이름으로 산에 발을 들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여인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방 안을 노려보았다. 텅 비었던 공간이 어느새 낯선 이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명실상부한 자신의 집이니까. ─비록 죽은 자는 집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됐어. 일주일 안에 도망가겠지.”
이미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이가 다섯에 이르렀다. 이만하면 귀신 들린 집이라고 소문날 법도 하건만, 어째서 방문자가 끊이질 않는 건지. 사실 여인도 추측은 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조카가 죽자마자 홀랑 집부터 낚아챈 비정한 삼촌이라면. 마치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행동한 그 인간이라면. 어떤 감언이설을 써서라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나 죽은 것 자체에 유감은 없다. 딱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도 않으므로. 하지만 집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남은 부모님의 유품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다.
“너도 참 불쌍하다. 하필 우리 집을 골라서 살 곳도 잃고, 돈도 날리게 생겼네.”
여인은 침대에 다가가 낯선 이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말이니 사과는 하지 않는다.
소녀의 큰 눈에 아픔이 모여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할듯하다. 아프면 싫어! 왕 싫어! 윗입술 아랫입울을 모아 꼭 깨물었는데 파르르르르르 떨리고있다. 조금있으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지만 용케 울지는 않는다.
소녀는 소년이 손을 잡고 살펴보는동안 가만히 있었다. 자기의지랑 상관없이 파를르르르르 떨리는 입술은 예외다 예외야! 오버사이즈 소매가 쭈르륵 흘러내려서 소녀의 팔이 윤곽을 드러냈다. 손크기 자체는 작지만 의외로 손가락은 통통하다. 조물딱거리면 뼈위에 통통하게 오른 손가락살이 말랑하고 만져진다.
소녀는 입을 빵끗빵끗 열어서 뭐라고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분위기로 유추하면 대충 아프단 말일 것 같다. 소년이 울상짓고 자기가 다친 것처럼 소리지른 게 소녀로 하여금 어리광을 부르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녀는 이제 손가락을 쥐었다폈다하면서 손가락이 건재하다고 보여주려고 한다. 벌써 꿋꿋씩씩한 표정도 짓고있다!
소녀는 교훈을 얻어서 이번에는 문을 살살 두들린다음 문에 귀를 대본다.....입술을 뾰쪽 내밀고 문에서 귀를 떼더니 눈썹이 처진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소녀가 문을 쳐서 무엇을 하려고 했든지 그게 잘 안된 것 같다.
정신을 놓을것 같은 아릿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그/그녀는 겨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내부에 고여 있던 혈액이 마른 입술새로 주르륵 힘없이 흘러나와 검은 골목 바닥에 방울져 떨어졌다.
검붉고 응어리진 비릿한 액체가 마찬가지로 검고 비릿한 기름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빗물 웅덩이에 섞이고 붉게 퍼져 어둠속에 스며들어갔다. 사라져 가는 붉은 흔적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며 다시 괴롭게 아려오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어둠속을 바라보는 시선엔 경멸과 후회와 원망 그리고 그 모든것이 뭉게진 비탄이 얽기설기 엮여 응어려지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타오르는 격정에 바르르 떨렸다.
힘겹게 색색 숨을 몰아쉬며 힘이 풀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다리를 움직여 검은 바닥을 딛고 먼지가 쌓여 지저분한 벽에 손을 기대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억지로 일으켜진 육체에 격통이 몰려오고 그/그녀는 저도 모르게 윽 소리를 내며 단말마를 내지를 듯 입새를 벌리다 급하게 입술을 꽉 물어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토록 믿던 이에게 배신당한것도 모자라 제 몸 하나 어쩌지 못해 천치처럼 구는 꼴을 외부인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넝마가 되었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싸게 팔아 형편없이 무너진다면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야 말로 배신자가 바라는 그/그녀의 결말일 것이다.
일어서야 한다. 막 아물어진 상처가 과격한 움직임에 터졌는지 옆구리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다량의 혈액이 흘러나오자 순간적으로 머리에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뭐라도 잡기위해 급박하게 뻗은 손에 무언가가-아마도 사람- 걸렸다.
(이쪽의 성별은 받는 참치가 아무렇게나 정해줘~ 배경도 판타지든 현대물이든 다 괜찮아:D)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집에 개운하게 바람이나 쐬려고 열어둔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 대신 비릿한 피냄새가 흘러들어온다면 거기에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방금 막 씻고 나온 상태라면.
"..에이씨..."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나오자마자 상스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안 가득 신선한 공기 대신 비릿한 피냄새가 가득해서였다. 분명 환기의 목적이긴 했지만 이런 공기를 원한게 아니었다. 쿵쿵거리며 창문으로 다가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 시덥잖은 피냄새의 근원을 없애버릴 심산이었다. 바람결에 흘러오는 피냄새는 그렇게 먼 곳도 아닌 바로 앞 건물 사이 골목에서 나고 있었다. 위치를 알았으니 가서 치워버릴 일만 남았다. 문으로 나가는 것도 번거로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집은 3층이었지만 착지에 무리는 없었다. 오히려 젖어서 들러붙던 긴 머리에서 물기가 싹 털어져 가벼워졌다. 손으로 머리를 훑어 정리하고 곧장 앞 골목길로 들어갔다. 피냄새에 유독 예민한 후각에 이 골목은 유독 그 자체였다. 방으로 흘러들어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으로 진한 피의 향취로 가득했다.
"어느 구역 놈들이 장난질을 했길ㄹ, 어엌."
바닥에 떨어진 피웅덩이를 밟고 걸어가며 투덜대던 중 뭔가가 몸에 턱 하고 걸려서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버렸다. 얼떨결에 걸린 걸 잡고 보니 인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상처투성이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어 피냄새의 근원인 듯 했다. 하도 냄새가 진동을 해서 눈치채는게 늦었나보다. 인간이 상처입은 상태건 어쨌건 나름대로의 용건을 끝내기 위해 붙잡은 손을 생각없이 잡아당겨 피냄새를 두른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인간. 살아있어? 어? 대답 안 하면 처리장에 갖다 버린다."
처리장이라 함은 '이런 식'으로 죽은 시체나 잔해를 버리는 일종의 쓰레기장이었다. 말 그대로 처리되기 싫으면 대답하라며 잡은 손을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이쯤 하면 뭐라도 반응이 나오겠거니 싶어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을 가늘게 뜨고 인간의 반응을 살폈다. 바늘처럼 좁아진 세로동공이 차갑게 그의 전신을 훑도 다시 얼굴로 스윽 돌아갔다.
생존본능이 따르는 대로, 어쩌면 그대로 차가운 안식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픈 욕구를 거스른 의지의 힘으로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고 앞의 물체를 부여잡았다. 축축한 것의 촉감이 핏기 없는 손가락에 잡히고 상대의 온기에 덥혀져 뜨뜻미지근한 물기가 손마디에 흘렀다.
‘거슬린다..’ 식은땀과 붉은피가 섞여 이마에 흐르고 곳곳에 유혈이 낭자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말 듯 서 있는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신경을 쓸 만큼 그는 습기를 꺼렸다.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몸을 겨우 가누는 상황에서 불쾌함이 더해지니 머리에 열이 몰리고 아파와 절로 얼굴이 찌뿌려졌다.
귓가가 웅웅거리는 것이 말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기위해 둔중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팔이 잡아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외부자극에 숨이 턱 막히자 작게 컥컥였다.
"야 인간. 살아있어? 어? 대답 안 하면 처리장에 갖다 버린다."
흐리멍텅해서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에 낯선 목소리가 꽃히고 묘하게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에 독기어린 청록색 눈으로 상대의 얼굴이 위치할 곳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인간..으윽 너는 인간이 아니라기도 한 모양이지.“
우왁스럽게 잡히고 흔들려 골이 흔들리고 절로 불쾌함과 무력감이 뇌리에 자리잡고 다시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와 힘없는 몸짓으로 상대를 그러잡았다. 핏방울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려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야에 이질적인, 샛노란 빛이 뚫어져라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훝어보는 눈길에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도 무력하게 누군가에게 기대어 겨우 서 있는 상황도 모든 것이 심기에 거슬렸다. 씨발. 마르고 피딱지가 얹힌 입술 사이로 낮게 읖조려진 욕설을 내뱉었다. 갖다 버린다고. 감히 누구를, 나를? 망할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배려없이 당기고 흔들어서인지 막힌 숨소리가 들렸지만 알게뭐냐. 아픈가 어쩐가보다 숨은 쉬고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래 숨은 붙어있네. 다음은 정신이 아직 붙어있나 보려고 피범벅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있자 독기 가득한 녹색 눈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를 본다기보다 적당히 눈이 마주칠만한 곳을 보는거 같았다.
"목숨 구걸보다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가 먼저냐? 기가 찰 놈이네."
어이쿠. 맥없이 흔들리는 몸을 나머지 팔로 붙잡아 지탱해줬으나 스스로 설 힘은 없어보였다. 그야 이렇게나 피를 흘렸으니 당장 숨이 안 넘어간 걸로 대단하다고 해줘야 할 판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귀찮게 됐다. 죽었으면 마음 편하게 갖다 버리는 건데 이건 아직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냥 두고 가자니 누가 치울 때까지 근방에 피냄새를 풀풀 풍길게 분명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밤잠이 편할까. 고민하던 중 희미하게 흘러나온 욕지거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오호."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징글징글한 정신머리까지 갖고있는건가. 흥미로워보이는 반응에 머릿속 결론이 먼 곳으로 갖다 치우자는 생각에서 주워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주워다가 영 시원찮으면 그 때 가서 버려도 되잖냐. 내면 속 못된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그의 피투성이 얼굴을 치켜들어 나를 보게 만든 다음 제안을 하나 했다.
"어이 인간. 너 이대로 있으면 출혈사하던가 뒷골목 놈들한테 조각조각 해체될거다. 모든 뒷골목이 그렇듯이 말야. 하지만 네놈은 운이 좋아. 적어도 살기 위해 발악한다는 선택지가 생겼으니까. 그래, 네놈이 원한다면 내 재주껏 그 명줄 이어주지. 약간의 대가는 받아가겠지만. 어쩔래? 이대로 뒤질래. 한번 발악이나 해볼래?"
어쩌면 이대로 죽는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기회는 줘봐야 하지 않겠어?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빛나는 눈을 휘어 웃으며 혀끝으로 도드라진 송곳니를 훑었다.
흔들고 품평하는 듯 훝어보다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정체도 모를 낯선자에게 기대어 물밖에 나온 물고기 마냥 헐떡일 수 밖에 없다는건 정말이지 기분이 더러웠다. 추상적인 개념이든 물리적인 개념이든 그 어떠한 것이 되었던 간에 최대한 파악을 하여 손아귀에 놓고 시작해야 마음이 놓이는데 지금은 저 자를 볼수도 물리적으로 제약을 가할 수도 없다. 절대적으로 상대가 우위에 놓인 상황.
이리저리 어디 건질것이라도 있나 재보는지 서늘한 안광이 어둠속에서 흔들리는걸 집요하게 쫓았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지 않더라도 여태 겪어온 경험으로는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건 여태 길러온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서고 시퍼렇게 빛나는 샛노란 불길에 흐려져가는 머리가 경종을 울렸다.
무엇이 흥미를 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승의 동공이 유쾌하다는 빛을 띠었다. 짧은 감탄사 끝에 반응할 틈도 없이 고개가 우왁스럽게 제쳐졌다. 핏물이 매서운 겨울 공기에 식어 서늘함을 품어 지나간 자욱에 남기고 얼굴을 지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윤곽이 보일 정도로 저를 쥐고 흔드는 자와 가까워지고 핏기가 빠져 창백하게 싸늘해진 입가에 더운 숨이 얽혔다.
"씨발." 다시 한번 더 뚜렷한 발음으로 혈향섞인 숨과 함께 욕설을 토해내고 상대의 옷깃을 그러쥔 손에 더 힘을 가해 거칠게 움켜쥐었다. 여상한 말투로 건내어진 제안은 명백하게 자신이 피식자임을, 제안을 내밀은 본인이 포식자임을 전제하고 있었다.
"...대충 보기에 재밌어 보이는걸 찾았으니 갖고 놀겠단 뜻인가. "
망할. 들끓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몸이 핏물을 내뱉고 뿌옇게 눈앞이 흐려지다 맑아졌다. 후원자라 부르고 부모라 여기던 놈에게 뒤통수 맞은 것도 모자라 이런 뭔지도 모를 자에게 목숨줄을 내맡기고 어쩌지도 못하는 꼴이라. 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곤 비소를 흘렸다.
"하하..흐으...그 죽음보다 더한곳 데려가봐. 원하는 데로 마지막까지 발악해볼테니. 것보다 상대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하는게 예의 아닌가. 어차피 네 손아귀에 쥐어진 목숨인데 물음에 답하는 자비라도 보여주지 그래"
재차 튀어나온 욕설에 히죽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고 슬금 더 올라갔다. 수치스럽겠지. 화가 나겠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어쩌지 못 해 죽을 맛이겠지. 나는 이런 인간들을 잘 알았다. 언제나 우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느닷없이 바닥으로 내쳐진 것도 분한데 당장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그나마 붙잡고 있는 목숨마저 끊어질지 모른다는 상황이 얼마나 엿 같을까.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 답지 않게 이글거리는 청록빛 눈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아. 원래는 냄새나는 걸 치우려고 왔을 뿐이지만 말야. 네놈이 살아있어서 생각을 슬쩍 바꿔준거라고."
안정을 취해도 모자를 그의 속을 더 긁을 심산으로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하고 갓 흘러내린 피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살려준다는 말 따위 무르고 당장 저 목을 물어뜯는 것도 좋을거 같은데. 아직 맥이 살아있을 때 말이다. 반은 장난으로 든 생각에 피식 실소했다. 그 웃음기가 고스란히 남아 더욱 속을 긁는 말투로 그의 의문을 일축해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그럴듯한 말로 끌어들이고 대가랍시고 목숨에 준하는 것을 앗아가는 존재를 인간들 사이에선 악마라고 하지 않던가?"
도둑고양이마냥 노란 눈에 일순 황금빛 이채가 감돌며 등 뒤로 거대한 두 쌍의 날개가 펼쳐져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정말 악마인지 어쩐지는 재쳐두고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지. 그리고 그가 한 대답을 무르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도. 날개를 두어번 움직여보고 이만하면 됐겠다 싶어 날개를 도로 접어넣고 눈빛도 처음의 가벼운 샛노란 색으로 되돌렸다.
"이 이상은 네놈이 제대로 지옥에서 기어올라왔을 때 대답해주지. 그 전에 응급처치는 해야겠구만."
응급처치 라고 말하고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 당겨 피투성이 입술에 키스했다. 다 죽어가는 인간 붙잡고 뭐하는 짓일까 싶어도 입술이 닿은 순간부터 숨쉬기가 편해지거나 고통이 덜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거다. 지혈은 덤이고. 입술을 떼고나서 내 입술에 남은 피를 혀로 훑으며 그를 붙잡은 손을 움직여 등과 다리를 받쳐들고서 피범벅인 골목길을 벗어났다.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길은 평소보다 깨끗한 것 말고 어떤 이변도 남아있지 않았다.
간만에 입맛을 돋구는 인간을 만났다는 즐거움에 나는 그를 데리고 한달음에 내 집으로 돌아갔다. 푹신한 침대에 그를 던지다시피 내려놓는 행동에 배려는 없었다. 그가 아파하건 말건 콧노래를 흥얼대며 그의 옆에 털석 앉아서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적이자 계약서로 보이는 종이와 나이프가 나타났다. 내가 먼저 나이프로 내 손가락을 찔러 내 서명란에 새빨간 지장을 찍은 뒤 그의 서명란만이 기다리는 종이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며 재차 확인삼아 물었다.
"이제 여기에 피로 서명만 하면 네놈은 죽을 고비 정도는 가뿐히 넘기고 원래의 몸보다 휠씬 좋은 상태로 깨어날 거다. 대가는 그 다음에 치르면 돼. 무슨 대가인지는 깨어나서 확인하고. 그럼 찍는다?"
이미 손을 잡아 엄지에 나이프 끝을 쿡 찌르고 있으면서 묻긴 뭘 묻나 싶지? 나이프 자국을 따라 흘러나오는 붉은 혈액을 계약서에 찍은 순간 엄청난 격통이 전신을 강타하고 그 뒤로 소름끼치게 웃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이봐아. 일어나. 어~이. (마치 표백된 것처럼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 속에, 어딘가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그 기억이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라는 것을 인식한 당신이 눈을 뜨면,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 대신 달린 헬멧에 ^_^ 이모티콘이 떠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V-3. 드디어 일어났구나. 꽤 오래 기다렸어. 뭐, 갑작스럽지만 네 구속을 풀어주려고 해. 구속 당한 기억조차 없겠지만 말야. (당신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가, 금새 내렸다.) 오케이, 완료. 자, 부디 엘라흐에게서 잘 도망치길 바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전자 헬멧은 또다시 방긋 웃는 이모티콘을 띄웠다. 당신이 정신을 차리면 헬멧을 쓴 사람은 없고, 육면이 전부 새하얀 방에 있음을 깨닫는다. 피가 아래 틈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는 문 하나만 빼고. 이름, 본인의 성별, 나이까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기억 속에, 선명한 붉은 빛만이 당신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29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니, 이건 꿈이라고도 할 수 없다. 나는 의미 없는 포말처럼 끝없는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고 파도가 없으며 하늘에는 새와 바람과 구름이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없었다. 하늘과 바다는 흰색마저 표백당해 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투명하다고 하기에는 어두운 기묘한 색이었다. 아무것도 없음조차 없는 완전한 무의 바다 위에, 오직 나의 잠든 의식만이 번데기 안에서 표류했다.
그리고 나는 서 있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던 것처럼, 누군가 나를 낚아 올려 흰색 방에 집어넣었다. 나는 '흰색'과 '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번데기 껍질이 찢어지고 굳어있던 의식이 움직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 목소리는 나를 V-3라고 불렀다.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고 만져보았다. 피부가 희다. 몸 위를 덮고 있는 건 영 어설프다. 백색 천 두 장을 끈을 사용해 성의없이 앞 뒤로 설겁게 이어놓은 것 말고는 어떤 옷도 몸에 붙어있지 않다. 가슴팍은 불룩 튀어나왔는데 허리는 안으로 들어가 있다. 손목과 발목이 손아귀 안에 쏙 들어온다. 손으로 머리를 쓸자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묻어나온다. 길이를 재어보니 정수리에서 팔꿈치까지 내려온다.
"......"
방은 흰색이다. 주사위처럼 모든 면과 변이 고르다. 주사위의 눈은 단 하나다. 그 밑으로 붉은 것이 새어나온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선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색깔인가. 나는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리와 옷 밑단이 붉게 스며든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만져보고, 또 그것을 손 안에 쥐고 조물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원래 있던 곳으로 떨어진다. 손에서 쇠 냄새가 난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새어나오는 것들을 손으로 걷어내고 몸을 낮추었다. 뺨을 바닥에 붙이고 문 아랫틈을 통해 그 밖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자 한다.
>>30 (당신이 문 틈 아래를 보면, 그곳엔 피웅덩이가 이어져있다. 핏물의 근원지는 아마도 문 바로 앞. 그리고 피웅덩이 너머로 펼쳐진 광경은……지금 당신이 있는 방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흰색만이 펼쳐져있는, 아무것도 없는 방처럼 보인다. Memento Mori. 그 글자가 당신의 부글거리는 뇌수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일격의 고통이 엄습해왔지만 정말 일순이었을 뿐, 금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당신은 불안해질 수도, 호기심에 찰 수도 있겠지만 선택지는 결국 하나 뿐이다.)
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었다.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까지의 호기심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찾아온다. 본능적인 공포. 죽음, 피, 빨간색. 나는 황급히 방의 구석으로 달려갔다. 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수십 분을 -내가 만약 분의 개념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 그렇게 있다가, 나는 마침내 일어나 다시 문 앞으로 돌아갔다.
"으으..으..."
표정을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손잡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나는 손가락 끝으로 손잡이를 몇 번이나 건드렸다. 그러다가 결국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돌렸다. 금속의 차가운 질감과 기계 부품이 자그락거리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손잡이를 쥔 채로 문을 조금씩 열고 들어간다.
>>28 산보를 하러왔다는 얘기를 하듯 시답잖다는 어투의 말들이 귓가에 멍멍하게 울렸다. 이런취급은 그날 이후 10년만인가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앞에서 방만하게 구는 자 따윈 본적이 없었다.
'이유야 내 앞에서 감히 멍청하게 구는 유사 유인원들은 그 즉시 목을 따주었으니.'
자신의 머리위에 서서 놀겠다는 의도를 가진,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그 어떤 이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젠 그따위 거치적이는 일을 볼 장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다 꺼져가는 심장박동이 거세지고 단전에서 부터 불길이 옮아 머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입안에 고인 핏물이 가느다란 줄기를 남기며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도 무시하고 눈에 날을 세워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앞의 작자를 바라보았다.
'우습나. 우습겠지. 젠장 좆같은.'
참자. 지난 날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저런 자들은 지겹도록 보지 않았었나. 먹잇감 하나를 물고는 질릴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끈질긴 맹수들. 더 이상 수작에 놀아나선 안된다. 다시 흔들리는 순간 저 괴인에게 확실하게 목줄을 잡았다는 확신을 던져주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곤 천불이나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홧홧거리는 속을 삭였다. 서릿발 같은 입김이 나와 얼굴을 식힌자리를 싸늘한 겨울바람이 지나가 얼얼했다.
" 장난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그렇게 입맛만 다시다간 기껏 잡은 유흥거리가 죽을 수도 있지 않겠나."
빈정이는 목소리가 다 쉬어가는 목에서 거슬린 쇳소리를 내며 나왔다. 장시간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목안이 따끔거렸다. 악마라 그럴듯했다. 세상의 모든것으로부터 내쳐져 낭떠러지로 굴러떠러진 자신을 쥐곤 재밌어하는 이가 악마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머금고 입매를 비틈과 동시에 짐승을 닮은 샛노란 안광이 순간 기묘한 금빛이채를 내었다. 거대한 날개가 희미한 선을 쏟아 내리귿던 달빛을 가리고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친. 인외의 것이 바깥에 존재한다는 얘긴 어렴풋이 들었지만 단 한번도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은적도 생각하여 본적도 없었다. 눈앞이 순간 깜깜해져 앞으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것인가 저절로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순간 입술이 벌어지고 이물질이 고인 혈향과 함께 뒤섞였다.
"...! 무슨 짓거리야!"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경악인지 정체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몸이 벌벌떨렸다. 묘하게 방금전보다 힘이들어간 몸을 움직이려 시도하려 하자 부유감이 들고 중심이 아래로 쏠려 짧은 신음을 흘렸다.
정신차릴 틈도 없이 옮겨져 매트리스에 내팽겨쳐지자 다시 신음성을 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세차게 뛰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활기가 도는 몸상태와 방금전의 이상행동의 연관성이 떠오르는 것을 무시하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가정집인가.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옆의 매트리스가 푹 꺼지고 여태 어둠속에 가려져있던 상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뭐하려는 거지?"
계약의 자세한 내용따위 어차피 협상이 가능할거라곤 기대도 하지않았다만 적어도 어떠한 항목이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젠장맞을 악마에게 상식을 바라는것 자체가 잘못이지. 역시나 저 맘대로 상황을 정리하는 상대를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잠시후 어마어마한 격통이 전신을 강타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뜨곤 난간을 붙잡았다.
손에 돌돌 만 계약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자 의식이 살아있는지 힘껏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딱 정신 놓기 좋을만큼 마력을 넣어주었을텐데 그걸 정신력으로 버티는 인간을 보면 참 어리석다는 감상 밖에 들지 않았다. 애써 배려해줬는데 그걸 걷어차다니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둘 다인가? 인간은 정말 변치 않는구나. 나는 내 고급 침구를 식은 피범벅으로 만든 그를 보며 조롱하듯이 말해줬다.
"그냥 눈 딱 감고 정신 한번 놓았다 잡으면 전부 끝나있을텐데 왜 아득바득 깨어있으려고 하는거냐? 편해지라고 해준 응급처치가 무쓸모해졌잖냐. 어휴 미련하다 미련해. 인간이란 언제 어느 때든 미련하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말 못 봐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다 한술 더떠서 손등으로 그의 뺨을 두번 툭툭 두드렸다. 봄바람처럼 가볍디 가벼운 두드림이었지만 격통 중인 그에게는 골이 흔들릴만치 아프게 느껴질 거란 걸 알면서 그랬다. 느끼기 싫었으면 순순히 정신을 놓았어야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보아하니 약을 써도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할 거 같고. 그럼 약만 아까우니까 그대로 계약서 내용이나 들어봐. 불만 있으면 말해도 되는데 할 수나 있겠냐?"
그의 고통을 덜어줄 의향은 전혀 없어서 그 옆에 앉은 그대로 하고싶은 말들을 떠들어댔다. 어차피 남는게 시간이고 또 시간이라 그의 고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러고 있어도 됐다. 곱게 말아놓았던 계약서를 도로 펴서 들고 잘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그의 눈 앞에서 휙휙 흔들었다. 보여도 인간의 문자가 아니니까 못 읽을게 뻔했지만 일부러 약올라보라고 그런거였다. 그야 나는 악마니까. 잔뜩 약올려놓고 혹시나 뺏기기 전에 휙 가져와 내용을 한줄한줄 적당히 가위질쳐서 읽어주었다.
"그러니까 위는 서문이라 패스. 나랑 네놈이 계약한다 뭐 그런 내용이야. 본론만 말하자면 이 계약은 내가 네놈을 살려주고 신체를 강화시켜주는 대가로 네놈은 일정기간 이 몸의 보디가드가 되면 된다 이거야. 일정기간이라고 해둔 건 네놈이 얼만큼 강해졌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정확한 기간은 아직 몰라. 예상해보건데 못해도 최소 세달은 될 걸?"
손가락 세개를 쫙 펴서 그에게 보이도록 내밀었는데 이거 역시 보이긴 할라나. 입꼬리를 삭 올려 경박한 웃음을 지으면서 선심 쓴다는 말투로 나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몸도 고쳐주고 더 강하게 해주니까 완전 좋지? 그렇지만 솔직히 이렇게 아픈데 왜 그런거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들긴 하지? 그래서 특별조건을 하나 넣어줬어. 본 계약의 대가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요구사항 하나를 들어주는 걸로. 아 대가의 기간을 줄여달라던가 그런 건 안 돼. 그랬다간 나한테 패널티가 돌아오니까. 자 내용은 여기까지. 질문 있냐? 아니 그 전에, 정신은 아직 깨어있어?"
계약서를 근처로 홱 던져놓고 그에게로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골목길에서 그의 턱을 쥐어올렸을 때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히죽거렸다. 이렇게 근처에서 보니 또 군침이 도는게 아주 살짝만 물어볼까 하는 장난기가 들다가도 더 큰 즐거움을 위해 참자는 기분이 동시에 들어 혀로 그의 턱에 남은 핏자국을 한번 핥아올리는 걸로 참아주기로 했다.
짧게 머리를 자른 채 페도라를 깊숙히 눌러 쓴 남자가 나지막히 욕설을 중얼였다. 오후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남자는 멀끔히 정장을 빼입은 채 제 옆으로 각진 서류가방을 꼭 붙여놓고 있었다. 제법 부내가 나는 옷감과 반짝이는 시계. 분명히 말할 수 있건대, 불안과 격동의 시기였던 1930년과는 제법 어울리지 않는 외관이었다.
개업하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의 테라스에는 낭만에 젖은 연인들이 가득했다. 혼란의 시기에도 그들은 꿋꿋히 사랑을 피워냈다. 젠장, 젠장. 그저 젊음의 새싹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분명 여섯이 정각이 되기 전에 온다고 했거늘. 이런 중대한 자리에서도 기어코 지각을 하고 마는 당신이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를 쥔 남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 일념 하나로 당신을 만나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이상의 돈을 썼고, 죽음의 문턱 직전에 동앗줄을 붙잡았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남자가 제 미간을 거칠게 문질렀다. 얇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담배는 재떨이에 짓이긴지 오래였다. 설마 그 돈을 들이고도 사기를 당한 건 아니겠지. 미간에서부터 손길을 끌어 제 얼굴을 어루만지던 남자가, 먹이를 포착한 맹수의 눈으로 카페의 입구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발견한 것이다.
" 늦었잖아. "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따지듯 입을 열었다.
" 아니, 아니야. 그건 됐어. 됐고...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겠지. "
남자가 서류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금과라도 들은 듯 제법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만들었다.
" 돈은 필요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주지. 내 요구는 딱 두 개야. 나를 이 도시에서 탈출시켜주는 것, 나머지는 빌어먹을 내 보스가 나를 영원히 찾지 못하게 해주는 것. "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호흡이 제법 거칠어진 모습이었다. 그대로 말문을 막은 남자는 카페 안을 한 번, 밖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자세를 낮춘 채로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40 "내가 네 보스 모가지 자를 수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했겠어~ 안 했겠어~? 그게 그렇게 애기 손모가지 비틀듯 되는 일이 아니야~."
"그보다 사람이 구석탱이에 몰리더만 물독 빠진 생쥐처럼 눈깔이 아주 뒤집어지려 하네. 아이고~ 그렇게 안 굳어도 돼~. 내가 여기 와 있다는게 무슨 뜻이야? 벌써 주변에 내 사람 쫙 깔렸어~. 지금은 바늘 하나 못 들어와~."
회색 정장 조끼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은 탁자에서 의자를 당겨 꺼내 그 위에 앉았다. 한쪽 팔로는 손을 휘적거리고, 다른 팔로는 그 팔의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부드럽게 너스레를 떤다. 나름 뒷세계의 기둥 중 하나라지만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그보다 너 여기서 나간다고 새벽이슬처럼 싹 쨀 수 있을 것 같니? 어휴~ 힘들걸 힘들어~? 도시서 나가기만 해서 될 일이었으면 네가 돈 퍼부어가면서 나한테 왔겠어~? 어디 항구 밀수꾼이랑 작당하고 석양 지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게 훨씬 싸게 먹히지~."
"안 그래도 그간 분위기를 보니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예수님 옆에 못을 박아버릴 기세던데~. 암만 돈을 많이 받았어도 평생동안 안 들키게 뒤를 봐달라는게 말이 돼~ 안돼~? 누가 보면 도망은 둘째치고 날 돈으로 후려쳐서 예쁜 옷 입혀놓고 메이드 삼으려는 줄 알겠어~. 내가 암만 사랑스러워도 그건 좀 아니지~."
당신의 조급함은 전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는 흰 궐련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반쯤 탄 성냥을 휘둘러서 껐다. 잠시 눈을 감고 매캐한 연기를 음미하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연다.
"하아~ 이 짓도 오래오래 해처먹으려면 담배도 끊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내가 살려고 일하는지 일하려고 사는지 모르겠어~. 아이구~."
"대체 뭔 짓을 저질렀길래 저것들이 저래 미쳐 날뛰니? 이게 무슨 사태인가 해서 알아보려 했는데, 당신 보스가 소리지르다가 목이 쉬었다는 것 빼곤 도통 뭔 일인지 알 수가 없더라~. 이렇게까지 정보에 락이 걸린 걸 보면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거야~ 그렇지이~? 나두 뭘 알아야 일을 하지~. 나한테 조금만 말 좀 해봐~ 응~?"
쏟아지는 고통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떨리는 손을 쥐었다. 손톱면이 나이프에 찔린 환부에 스쳐 화끈거렸지만 그를 뛰어넘는 온몸에 퍼지는 통증에 입을 꽉 다무는 움직임만을 겨우 취할 수 있었다. 옆에서 잔뜩 신나 알짱이는 놈의 모습이 가늘게 뜬 눈거풀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정신 사나워 신물이 올라오는 속으로 말하지 못할 욕설을 짓씹었다. 무어라 경박하게 떠들어대는 움직임이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자신을 비웃는 내용일거라 확신이 들어 손마디를 뚜둑 소리나게 움켜쥐었다. 망할 새끼가. 또 무슨 기가 찬 생각을 하는지 근처에서 정성스레 야단을 떠나 싶었더니. 가벼운 촉감이 뺨가를 조롱하듯 두드리는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골이 울리고 이명이 귓가에서 윙윙거려 쥔 손을 풀고 시트를 움켜잡았다. 버거운 고통을 견디는 몸이 땀을 흘려대고 이미 흘린 피로 너절해진 셔츠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게 상당히 거슬렸지만 의식이 멀쩡해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작자 옆에서 곧이곧대로 정신을 놓고 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이 타들어 갔다. 이토록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 몰렸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본가에서 나온 후에 이런 추태를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을 실컷 조롱하는 것도 지겨워졌나 잠시 다른데를 바라보며 무어라 신나게 떠들더니 불쑥 종이를 내밀었다.
멍멍해진 귓가에 쏟아지는 말들이 흐려졌다 선명해져 모든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계약서라는 단어가 어렴풋이 들려 숨을 몰아쉬고서 눈에 힘을 주었다. 환해진 배경에 적응이 덜된 동공으로 빽빽한 글씨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자니 두통이 배로 심해졌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심지어 대학에 아시아인 동기가 있어 잠시 보던 중국어도 아닌 기묘한 문자가 나열되어 있는 종이가 패턴이라도 찾아내어 암호문처럼 해석할 틀이라도 만드려는 틈에 금방 감추어졌다. 고통과 낙담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놈에게 보이기 싫어 고개를 내리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내려와 시야가 가려졌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상대에게 정보를 의존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 없는 상황이라니 최악이다. 앞으로 몇 달간은 제대로 힘들 것이 뻔히 보였다.
지금 그가 말한 대로라면 적어도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전제 안에서 단순히 마땅히 줄 역할이 없어 충실한 개새끼 노릇이라도 하라 주는 명칭인지 진실로 필요로 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보디가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대신 요구사항 하나를 말할 권리를 가진다는 걸로 정리가 된다. 막상 듣고 보니 상상했던 최악보단 별거 아니긴 하지만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선 다시 장난기가 동했는지 얼굴을 들이미는 상대를 응시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는 예측하는 것도 피곤해 뭐 하냐는 감상을 담아 쏘아보던 중 턱밑에서 뜨뜻하고 미끌한 촉감이 올라왔다.
진짜 뭐하자는 거지. 내가 무슨 디저트라도 돼? 돌발행동에 애써 유지하던 표정을 적나라하게 일그러뜨렸다. 고통을 참기에도 바빠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시트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쥐고선 겨우 입을 열었다 닫았다. 지금 몸이 무거워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았다. 평정이 무너지고 감정이 올라와 머리가 뜨거워지자 겨우 잡은 의식이 흔들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뒤의 오너가 12월 초까지 굉장히 시간이 없을 예정이라 오늘 이후로 이렇게 길게 주고 받는게 너무 힘들것 같아 ㅠㅠ. 진행되는 걸 보니까 서로 풀릴것도 많아보이고 꽤 길어질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1;1로 따로 어장을 만든다면 12월초까지 짦게 일상이나 잡담등을 주고받거나 생존신고를 할 생각이야. 만약 1;1을 하기 힘들다면 지금 얘가 기절한걸로 해서 일차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 종료된걸로 엔딩을 내야할것 같아...
>>42 // 확인 늦어서 미안. 1:1도 괜찮긴한데 너참치 현생에 어장까지 끼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어. 그러니까 너참치 현생에 시간적 여유가 나아지고서도 이 내용으로 1:1을 하고 싶어진다면 그때가서 어장을 세우는 건 어떨까? 괜히 무리해서 겸하다가 너덜너덜하게 지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버려서. 생존신고도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43 아니야 괜찮아. 나도 몇번 늦었고. 밤에 생존신고를 하는것 정도는 괜찮아. 단지 걱정되는게 있다면 소통을 거의 못하니 너참치가 지치는 거지. 12월 초 10~14일 후엔 확실히 현생이 풀릴거라 그 후의 일은 크게 우려되는건 없기도 하고. 게다가 10일하고 며칠후에 서로 찾는게 가능할까 싶기도 해서. 만약 부담스럽다면 1:1로 억지로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아
>>44 사실 너참치 말대로 소통이 거의 없을지도 모를거란 점이 좀 걸리긴 했어. 나로서는 생존신고만 하기보다 아예 확실히 집중할 수 있는 시기에 딱 시작하는게 좋거든. 그래야 썰도 잘 나오고 잘 풀리고 그러더라고. 찾는거는 걱정 안 해도 되는게 나 거의 지박령 수준이라;;; 혹시나 중간에 너참치가 내용에 흥미를 잃어서 안 찾게되도 괜찮기도 하고. 확실한 건 12월 중순쯤에 와서 찾으면 분명 나 있을거야. 1:1이 부담스러운게 아니니까 그것만은 알아주길!
땅바닥에 버려진 신문 한 부가 자동차 바퀴에 휩쓸려 볼썽사납게 날아간다. 고물상 무리가 포탄 껍질 따위를 수레에 가득 싣고 걸어간다. 창 밖으로 보이는 주변은 살풍경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표정이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도 보인다. 고풍스러운 자동차 뒷자석에 앉아있는 여성은 눈을 돌렸다. 푸른 눈은 새벽빛 하늘처럼 공허하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가족 분들께서도 돌아오신다는 소식 듣곤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나이 든 기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여성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는 그녀의 뒤바뀐 인상이 낮설었다. 그녀가 저택을 떠나갈 때는 반드시 조국과 민족을 지키겠다며, 웃는 얼굴로 호기롭게 떠나갔었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귀향길 기차 안에서 3시간 정도를 생각했다. 역시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패전이라도 전쟁이 끝난 게 그녀는 안심스러웠다. 그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대로 군인이었던 가문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잘못하셔서 패전한게 아닙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하루만에 사단이 몇 개씩 녹아내리는 그 지옥을 마다하지 않고 싸우셨....."
"한스. 나 좀 피곤한데."
말허리를 끊어먹자 기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동차는 산길을 올라 예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의 저택으로 향한다. 차 문을 열자 습기 먹은 바람이 느껴진다. 그녀는 금발 위에 모자를 눌러썼다. 차에서 내리자 가슴에 달린 금속판이 흔들린다. 상이훈장, 그리고 전투 참전 기장이었다. 기사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투박한 전투 참전 기장에 아로새겨진 그 최후의 전투는 마치 악마의 모루 같았다고 들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작달막한 몸은 칼처럼 다려진 장교 제복과 그닥 어울리진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힘들게 대문 앞까지 걸어가 섰다.
>>51 (남자는 조용한 눈빛으로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양을 지켜보았다. 당신의 주먹이 힘없이 떨어지자 손을 깍지 껴서 쥐고 손바닥을 조용히 문질렀다. 남자가 입은 코트 안쪽이 당신의 눈물로 젖어갔다. 당신이 묻는 동안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당신의 머리를 당겨 어깨로 안으며 나직히 말했다.) 네가 혼자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