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헐떡인다.) 으, 응. 알아써. 주, 인님. 주인, 님. (목을 억죄던 것이 사라지자마자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려 기침을 한다. 한참을 헛구역질하다 겨우 다시 일어난다.) 응, 응, 안 그럴게. 시키는 거 다 할게. (마치 생소한 말을 들은 것처럼 당신을 올려다본다.) 이름... (내 이름이 뭐지. 생명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날 뭐라고 불렀더라. 한참 고심하며 끙끙대다 별안간 고개를 퍼뜩 치켜든다.) 괴물, 나는 괴물이야. 내 이름은 괴물이야. (자랑스럽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내심 당신이 이름을 떠올린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란다.)
>>428 (당신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설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말에는 눈을 깜빡이며 고갤 천천히 기울였다.) 괴물이라고? (당신의 앞에 훅 다가가, 희고 긴 손을 뻗는다. 그리고 당신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는가 싶더니 입술을 슥 들어올려 이빨을 확인한다.) 동족을 먹어? 생명을 뺏는 걸 좋아해? 아니면 힘 세? (전혀 그렇게 안보이는데,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손을 뗐다.) 일단 레어로 돌아갈거야. 이름은 나중에 지어줄 테니까, 레어 안에서는 말 꺼내지말고 조용히 하고 있어.
>>429 (입술과 이빨을 검사당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다.) 아닌데... (생명체는 동족을 먹은 적도 없고, 생명을 뺏는 걸 좋아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기대했던 칭찬이 돌아오지 않자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은지도 잠시, 당신의 명령에 얼굴이 환해지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조용히 있을게. 나 말 잘 들을게. (곧바로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이 어떤 명령이라도 망설임없이 들을 기세다.)
>>430 (익숙해보이네, 명령을 듣는거.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따분해보이던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희미하게 뒤섞였다. 일어서서 당신의 지저분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가 싶더니, 옷 뒷덜미를 탁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대로 처음 겪은 것이라면 현기증을 동반한 순간이동을 통해 공용 해츨링 레어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이후, 당신을 내려놓고서 탁탁 손을 턴다.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귀족의 자제들 같은 복장의 아이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거나, 비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따라와. (그 말만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431 헉...! (목덜미가 잡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이지러지고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지러운 느낌에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다잡는다.) ...!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당신을 급하게 쫓아간다. 처음 보는 장소와 처음 보는 사람들에 두리번거릴 만도 한데,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금색 자수가 놓인 당신의 코트뿐이다. 그 와중에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기억하고 있는지 착실히 입을 꾹 다문 상태다.)
>>432 (당신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곁눈질로 흘끗 쳐다본 뒤, 그대로 커다란 복도를 걸어간다. 지나가는 이들은 대놓고 면전에서 말하진 못하지만 당신과 소년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년은 꿋꿋이, 앞을 향해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여기로 들어가. (도착한 곳은, 한 고풍스러운 문 앞. 그 문을 열고 들어서려던 찰나, 왠 3명의 소년소녀들이 옆에서 웃음소리를 흘리며 걸어온다. 고귀한 공작 혈통이 뭘 데려왔나했더니, 왠 냄새나는 짐승이잖아? 같은 말들을 하며. 소년은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당신을 보곤 한숨을 내쉰다.) ...냄새나는 짐승은 맞긴 하지만, 곧 내 정식 시종이 될 아이야. 빈 머리라도 예의는 갖추지그래. (손가락을 까딱, 한다. 당신보고 인사하라는 듯이.)
>>433 (당신을 어느 정도 따라잡고 나서야 겨우 주변을 둘러볼 틈이 생긴다.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줄도 모른 채 당신을 종종 따라가며 넋을 놓고 구경하기 바쁘다. 지금까지 여러 장소로 옮겨져 왔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다.) ... (냄새나는 짐승이라는 말에 몰래 팔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본다. 스스로가 더럽고 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신 또한 긍정하자 더욱 창피해진다. 손을 까딱하는 당신의 저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뒤늦게 깨닫고는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비록 무언가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명령을 따르는 방법은 이미 몸에 배어 있다.)
눈바람이 부는 겨울 숲 한가운데, 원주민들의 구전괴담 속에 등장하는 웬디고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커다란 거한이 우뚝 서 있었다. 눈이 발목 넘게 올라올 정도로 쌓여있거늘 그럼에도 그의 키는 눈보라 속에서 퍽 크고 우람해 위엄이 있는 것이었다. 입가에서는 새하얀 김이 풀풀 솟았다. 털을 그대로 남긴 가죽으로 두터운 코트를 해입고 있는 그 거한은, 이내 손에 들려있던 자루가 반쯤 꺾인 피투성이 손도끼를 버려두고는 천방지방 당황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처참한 몰골의 마차 두 대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주변에는 마차를 지키는 용병이었음직한 사람이 두서너 명, 마차를 끌다 절명한 말들과 함께 죽어 있었다.
말들이 날뛰고 산적들이 고함치는 소리에, 눈 덮인 겨울 숲을 가로질러 있는 힘껏 내달렸다. 그러나 이미 산길에 겨우 닦여있던 좁은 길을 덜컹거리며 지나던 일련의 마차 캐러밴은, 산적들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찍혀서 한창 습격받고 있던 참이었다. 나무를 패던 손도끼나마 급히 휘두르면서, 이끼가 끼기 시작한 실력이나마 백분 발휘해 산적떼를 격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기껏 패어놓은 장작개비도 내팽개치고 있는 힘껏 달려왔는데도 조금 늦어버리고 말아, 대열에 있던 마차들 중 두 대는 산적들의 손에 부서지는 것을 면치 못했다.
한 대는 코끼리가 밟고 간 성냥갑 꼴이었고, 다른 한 대도 반파되다시피 해 있었다. 나머지 마차들은, 불운한 산적 떼들이 전설 속의 웬디고처럼 나타난 거한의 손에 반 넘게 박살나는 동안 이미 남자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너머로 한 줌 눈안개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차를 지키는 용병들은 이미 부상의 쇼크와 과출혈, 저체온 등으로 명을 달리해 있었고, 짐말도 마찬가지였다. 거한은 완전히 박살난 마차의 잔해를 황급히 뒤졌다. 황소 다리기둥만한 마차 골조와 판재들이 마치 삭정이처럼 툭툭 파헤쳐지고 휙휙 동댕이쳐졌다.
완파된 마차의 잔해 아래에 있는 것이라곤 어디에 쓰는지 모를 박살난 잡동사니들과 질그릇 여러 점, 이름모를 곡식이 든 식량 두어 푸대기 정도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행히 이 아래에 사람이 깔려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그는 옆으로 넘어져서는 반쯤 박살난 마차로 서둘러 다가갔다. 마차 뒤편으로 난 문짝이 반쯤 뒤틀려있다시피 해서 열기가 어려웠지만, 그는 쉽게도 문짝을 뜯어내다시피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마차 칸에서 발견한 게, 기절해 있는 당신이었다. 거한은 당신이 미약하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는 잠깐 마차에서 고개를 빼서는 캐러밴 행렬이 도망간 산길을 내다보고, 마차 주변에 죽어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오솔길이라지만 짐말을 죽어라 채찍질해가며 꽁무니빼고 있을 캐러밴을, 기절한 사람을 짊어지고 달려가서 따라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죽어있는 이들에게 무덤을 세워주자니 마차 안에 있는 산 사람까지 얼어죽을 판이었다. 마을은 여기서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눈바람은 조금씩 심해져 눈보라가 될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근방에 있는 그의 오두막까지 가는 것뿐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사람부터 살려놓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남자는 당신을 흔들어 깨워보려고 했다. 거친 북부 억양이 남자의 입에서 나직하게, 하지만 다급히 튀어나왔다.
"이보시오.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정신 차리시오! 이대로 있으면 얼어 죽소!"
/ situplay>1596243042>629 를 보고 생각나서 어설프나마 써보기로.. / 뜬금없이 꼽주는 전개만 아니면 좋다! 충분히 이어보고 싶은 참치가 이어줘!
쏟아진 짐가방들과 상자들 아래에서, 거한은 기적적으로 남겨진 생존자를 찾았다. 그러나 손목을 쥐어보면 그것은 너무 차가웠고, 잠깐 쥐어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열기와 맥동이 빠르게 시들어가고 있는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거한은 알 수 있었다. 경험상, 당신이 얼마 안 가 남겨진 생존자에서 마지막 사망자로 신분전환을 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거한은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짐가방들을 치우고, 두터운 털가죽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코트로 감싸고는 아기 포대기를 들듯이 안아들었다.
산적들과 싸움박질을 하느라 한껏 상승해있던 체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던 코트의 안감은, 잘라놓은 통나무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와 함께 당신을 조심스레 감싼다.
거한은 당신을 안아든 채로,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발목 위로까지 정강이 5분의 2쯤까지 눈이 한 발짝 한 발짝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지만, 각반이 둘러져 있는 그의 다리는 마치 질주하는 순록과도 같이 쌓여 있는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겨울 숲을 파헤치며 질주했다.
.........
당신은 깨어날 수 있었을까?
정신을 차린다면 가장 먼저 고소한 냄새가 코에 와닿을 것이다. 눈을 떠보면 나무 판자로 꼼꼼하게 짜개못을 박아 꾸며둔 천장이 보일 것이고. 곧 자신의 몸이 매우 푹신한 침대에 뉘어져서는 깃털을 채워넣은 두터운 이불에 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틀에 털가죽을 팽팽하게 매고 안에 지푸라기와 곡물의 겨를 가득 집어넣은 침상은, 소박한 모양새와 달리 안락하게 당신을 받아주고 있었다. 당신의 머리에는 무언가 단단히 매어져 있다. 약초 짓이긴 것을 얹어놓고 붕대로 잡아맨 모양이다. 덧날 기미는 없는지 상처는 욱신거릴 뿐 가렵지는 않다.
마치 커다란 창고와도 같은 나무 오두막집의 안이다. 바깥에는 칼바람이 쌩쌩 부는 소리가 매섭기 그지없었으나, 오두막 안은 훈훈한 온기와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로 가득하였다. 당신이 누운 침상 옆의 탁자에는, 촛받침 위에 놓인 초가 조그맣지만 안심되는 빛을 만들며 타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웬 거한이 벽난로 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젓는 데에 여념이 없다. 흡사 설화 속에서 튀어나온 웬디고나 설인을 연상케 하는 모양새였지만, 벽난로가 던지는 온화한 불빛 때문인지 그는 그런 존재들보다 훨씬 유순해 보였다. 그는 누비 무늬가 있는 새하얀 털가죽 셔츠를 입고 있었다. 두툼한 바지의 정강이 쪽 단에는 각반으로 칭칭 처매어 구겨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그의 바지에 그런 자국을 남겼을 법한 긴 부츠와 각반은 난롯가에 널려 있었는데, 표면에 눈이 어찌나 많이 들러붙어 있었던 걸까, 난롯가의 열기로 눈이 녹으면서 푹 젖어 있다. 그것들을 말리는 동안, 그는 가죽으로 된 모카신을 실내화로 신고 있었다.
당신이 깨어났다면, 그는 벽난로에 걸어둔 냄비를 젓는 데에 여념이 없어 당신이 깨어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꿈을 꾸었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곤경에 처했다가 구출되는 꿈 같았는데... 기억이 닿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깨운 것은 장작이 타는 자작소리와 식기가 냄비에 스치는 맑은 소리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리면서 머리와 얼굴을 더듬자 억센 붕대가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데려왔구나. 그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더 당연한 것. 그녀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힘겹게 누인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사그작거리며 기상 알림을 울렸다.
"....."
시선이 냄비를 젓는 거한, 서리 낀 창문, 그리고 현관문 순서로 옮겨간다. 아직 머리를 후려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거한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만,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현관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슴께가 부자연스럽게 울컥거린다.
자칫 눈보라가 몰고 온 삭풍 소리에 파묻힐 수도 있는 작디작은 기상알림이었건만, 거한의 귀에는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국자를 내려놓고 얼굴에 안도의 빛을 띄며 당신을 돌아보았다.
"캐러밴 행열이 습격당했는데 당신이 크게 부상당해 있기에 우선 초라하나마 여기 모셨소. 산 아래 마을까지 데려가기엔 눈보라가 시작되려던 참이고, 당신이 얼어죽을 것 같기에..."
하고, 알아듣기 조금 힘든 북부 억양으로 상황설명을 하던 거한은, 당신이 비틀비틀 일어서자 크게 놀란 듯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커다란 여관의 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넓고 높은 오두막이었지만 그가 일어서니 머리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이었다. 그는 당신을 기꺼이 부축해주었지만, 당신이 현관 쪽으로 비틀대며 다가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문을 열어드려도 못 나가실 거요. 아마 당신 배까지 파묻힐 만큼 눈이 쌓여있을 테니까."
부자연스레 울컥거리는 흉곽을 보고, 거한은 부축하고 있던 팔을 놓아주고는 현관 한구석에 놓여있던 나무 양동이를 들어다 당신 앞에 놓아주었다.
>>439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거한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딘가 주눅들어보이는 기색으로 묻는다.
"....도적 두목님의 전리품으로 잡혀 온 게 아니라요?"
직접 보진 못해도 시끄럽게 지르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도적 떼의 습격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힘겹게 말하던 그녀는 속을 뒤집어 놓는 울렁거림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으웨에에엑. 먹은 것도 없어서 신물만 줄창 올라온다.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뱃 속 내용물까지 공개하진 않아서 참 다행이네. 근데 뭐? 도적 두목님?
둘 사이의 키 차이는 대충 봐도 머리통 두 개 반은 되어보였다. 거한의 눈에는 조그맣다 하고 치울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크고 무서운 곰 같은 남자가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머릿속도 마침 아찔아찔해 총기가 오락가락 하니 거한이 영락없는 도적 두목으로 보이는 것이다. 투박한 북부 사투리까지 말하면 입 아프다.
"아저씨. 저, 저는 깡말라서 안는 맛이 없,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 꼬마들을 위한 동화에서 호랑이나 사자 앞에서 저는 맛이 없어요 하는 그런 상황인가. 그녀는 방어적으로 두 손을 꼭 쥐어 가슴 위에 얹은 채로 뒷발질을 친다. 도망가봤자 어디로 가려고..
도적 두목이라는 소리에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북슬북슬까진 아니라도 턱을 뒤덮을 만큼은 자라난 수염이며, 치렁치렁 늘어진 금발이 거대한 체격과 어우러져 가장 먼저 가져다주는 이미지는 험상궂은 텁석부리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를 더러 산적이라고 많이들 오해하더구먼!" 그러나 깊숙이 패인 눈매 아래에 아이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빛을 띈 눈동자를 보자면 그는 맹수라기에는 너무 온순해 보였다. "난 그저 산속에 사는 사냥꾼일 뿐이오."
집을 둘러보자면, 벽난로 맞은편에 걸려 있는, 사냥꾼의 무기라기에는 이상한 커다랗고 넙적한 양손검을 제외하면 그곳은 확실히 사냥꾼의 오두막이었다. 벽난로 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라거나 이런저런 야채 줄줄이 매달아놓은 것들, 생활잡화나 식량이 들어있을 소쿠리들, 선반에 걸려있는 활과 화살들, 바닥에 깔린 털가죽 양탄자...
당신이 신물을 쏟아내는 동안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있던 텁석부리 거한은, 당신이 한바탕 곤욕을 치르는 게 끝나자 양동이를 들어다가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인 듯한 나무문 옆에 잠시 놓아두었다. 그러는 바람에, 당신의 말을 반쯤밖에 듣지 못했다. 당신이 그러니까.. 하고 뒷발질을 쳤지만, 그는 당신에게 겁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인지 당신에게 다가가지 않고 다시 난롯가의 의자에 걸터앉아선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산적도 아니고, 식인귀는 더더욱 아니니, 적어도 이 눈보라가 그치고 머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안심하고 쉬어주시구려. 날이 개는 대로 마차에 실려 있던 짐도 가져오고, 당신을 태우고 있던 마차 행렬에 대한 이야기도 수소문해 볼 터이니."
그는 당신을 그 마차 행렬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건 그렇지 않건 별 상관 없겠지만. 남자는 난롯가에 놓여있던 빈 사발을 집어들고는 불길 위에서 조용히 끓고 있던 냄비에 국자를 담갔다. 문득 고소한 냄새가 당신의 코를 간질인다. 당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확실히 그 말마따나 당신 엄청 말랐구만. 시장하실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겠소? 묽게 끓였으니 소화하기 어렵지 않을 거요."
깡마른 것을 보고 걱정하는 그 태도는 극성맞은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보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구천이 입술을 비쭉거렸다. 또다시 그의 기이한 애착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자신만의 인형도 아닌데, 구천은 꽉 붙든 상대의 손목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랑 있는 게 너한테도 더 좋을 거야.” 필사적이고 맹목적인 눈이 상대를 삼키려고 했다. 구천의 눈은 언제나 그랬다.
“내가 이런다고 욕하지 마. 나도 지금 죽을 것 같단 말이야. 팔다리가 내 게 아닌 것 같고… 그래.” 구천이 숨을 뱉으며 상대방을 자신에게로 더욱 끌어왔다. 정말 상대를 삼키려는 속셈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제야 만족했다며 흉격에서 우러나온 정갈한, 조금은 찝찝한 웃음을 띠었다. “내가 압정으로 장난쳤다고 토라진 건 아니지?” 누구 하나 홀리고도 남을 시퍼런 눈은 언제나 소름 끼친다. 구천은 항상 상대방에게 소름 끼치는 존재라도 되어, 기억에 남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손목이 으스러질 듯 아프다. 나는 네 눈빛이 싫다. 집착으로 진득한 시선을 받으면 꼭 목까지 늪에 잠긴 느낌이 든다. 그렇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아 죽어 버릴까 두렵다. 그래서 나는 네 두 눈이 싫다. 그 눈빛이 싫다. 나는 네가 싫다.
"네가 죽든 말든 알 바 아냐. 놓으라고 했어."
잡힌 손목부터 시작해 몸이 끌려가자 소름이 돋는다. 전신이 올가미에 칭칭 감긴 것만 같다. 약한 모습은 한 치도 보이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틈을 내비치는 순간 귀신같이 알아채고 파고들 것을 안다. 그래서 강인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네까짓 것 따위가 이용할 만한 약한 부분 따위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짐이 무색하게 어느새 떨림이 시작된다. 짐승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만 같아 떨림이 멎질 않는다. 이토록 무력한 나 자신도 싫다.
"장난? 그게 고작 장난이라고?"
하, 실소를 내뱉으며 너를 노려본다. 나의 레비아탄, 포보스, 침대 아래의 괴물. 너는 내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놓으라고 해서 놓고, 그만하라 해서 그만했다면 진작에 멈췄을 것이다. 이미 상황은 치달을 대로 치달았으니 구천은 상대를 꼼꼼하게 훑기만 했다. 저항의 여지가 다분한 표정.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얇은 방어. 약간의 떨림. 구천은 잡은 손목을 제 낯짝 가까이 대고 지독하게 달 향을 들이켰다. 깊은 늪에서 허우적대는 널 건져 올려줄 사람은 나뿐이란 걸 아직도 모르고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구천은 조악했다.
“내가 다 사과할게.”
미안해. 잘못했어. 축축한 말들이 연거푸 쏟아져 나온다. 이와는 별개로 손목은 놓지 않았다. 입으로만 사과하고, 눈에는 아무런 기색도 없으니 이게 정말 사죄하는 사람이 맞는가? “그러니까 여기 있자.” 구천은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치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뺨을 붉게 물들였다.
너와 맞닿은 곳부터 시작해 벌레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이 끔찍하다. 벌레는 팔을 타고 올라와 내 숨통을 막고 눈을 가린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꼼짝도 않는 손목이 못내 원망스럽다. 나는 이렇게나 약하다.
"미안하면 이거 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인다. 진심 따위는 담겨있지 않은 사죄의 말이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끊임없이 속죄하는 입과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한 표정의 괴리에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심연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니체가 말했던가,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난 여기서 나갈 거야. 널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거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린다. 각오라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세뇌에 가까운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풋풋한 첫사랑을 고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뺨을 붉게 물들인 주제에 끝끝내 내 손을 놓지 않는 너를, 나는 한없이 증오한다.
구천이 아무렇지 않게 손목을 놓는다. 이전까지는 무슨 고집으로 놓아주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깔끔한 움직임이다. 상대방의 언성이 높아져서 순간적으로 놓은 걸까? 그래. 네 목이 아플까 봐.
“네가 날, 죽인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배 아플 정도로 실컷 웃은 구천은 살짝 맺힌 눈물을 없애버리고 다시 상대방을 봤다. 두 사람이 극과 극의 표정으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더 좋은 방법을 알려줄게.” 구천이 상대방의 귀로 가까이 간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주라.” 연인에게 속살거리는 것처럼 다정하다. 손에는 접칼이 들려있지만. “그럼 내가 홀라당 반해서 풀어줄지 어떻게 알아?”
금방이라도 부러뜨리려던 기세는 어딜 갔는지, 손목이 맥없이 떨어진다. 붉게 남은 자욱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면서도 적대감 어린 표정은 풀지 않는다. 나는 네가 날 완전히 꺾어 놓으려 들 때보다도 이렇게 날 소중하다는 듯이, 아낀다는 듯이 대할 때가 더 싫다.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숨이 넘어가라 웃음을 터뜨리는 너를 노려본다. 이곳에서 나가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도 네게는 그저 소꿉장난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그럴 만도 하다. 너는 날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을 터이니. 여기서 나가겠다는 내 말은, 네게는 그저 커서 슈퍼맨이 되겠다는 어린아이의 소망보다도 허황된 바람일 것이다.
"죽어도 그럴 일 없으니까 꿈 깨."
귓가에 숨결이 와닿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친다. 네 손에 들린 칼만큼이나 날카로운 속삭임이다. 헛소리 하지 말라지. 나는 절대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일뿐더러, 그 말을 듣는다고 해서 네가 날 풀어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더 옥죄어든다면 모를까. 그러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네가 나를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형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내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구천의 표정은 시시각각 뒤바뀌고 있었다. 어떨 때는 실컷 웃었다가 어떨 때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떨 때는 낑낑대는 짐승의 얼굴을 하다가…… 지금은 낑낑대는 쪽이다. “근데, 내가 언제부터 미웠어?” 입에서 쓴맛을 느낀 구천이 묻는다. 아까 상대에게 사랑을 부탁할 때보다는 덜 절박해 보이지만, 집요한 눈을 보아하니 아직도 제 손아귀에서 상대를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구천이 상대의 앞에 쭈그린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이내 상대의 왼뺨을 살살 쓴다. 악에 받친 시선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제 행동만 몰아세우기 바쁜 얄팍한 이성. 눈앞에 있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 애정 증오 미움• 구천에게는 악영향만 끼칠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
당연한 걸 묻는 네 말에 대답 대신 하, 하고 짧게 조소를 흘린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버려진 어린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애처로운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괴물이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것만 같아 속이 갑갑해진다.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무고하지도 무해하지도 않으며, 언제든지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 내 목을 틀어쥘 지 모른다는 것을. 굳이 손에 들린 접칼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
언제부터 네가 미웠느냐고?
숨이 턱 막힌다. 내 감정을 고작 미움 따위에 비유하는 네가 기가 막혀서는 아니다. 처음부터였다고, 널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네가 끔찍하게 싫었노라고 저주를 퍼붓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의 관계가 항상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과거에는 분명, 네게 호의 비슷한 감정을 품었던 것도 같다. 아직 너를 제대로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그래야만 한다. 과거의 잔해가 우악스럽게 입을 틀어막는다. 네가 손을 들어올릴 동안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뺨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나는 몸서리친다. 춥다. 얼음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떨림이 계속된다. 이 느낌이 싫다. 싫다. 나는, 네가, 싫다.
대답을 들은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내뱉었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에서는, 내가 상대의 어디가 좋아서 연애를 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엿보였다. 애틋? 애틋해서 물어본 걸로 보이다니, 혹시 눈이 안 좋은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래, 궁금증 풀어줘서 고맙다. 나 간다, 다시는 보지 말자."
갑작스러웠던 헤어짐의 이유가 궁금했었고, 일순간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것은 차라리 잘 됐다는 감정으로 변했다. 예상 밖의 급발진에 없는 미련마저 대청소라도 한듯 말끔하게 사라졌는데다, 스스로가 잘못한 거 딱히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으니까. 끔찍하다면서 제대로 말도 못할 이유라면, 굳이 알 필요 없는 거겠지. 볼 일은 다 봤으니 일 없는 거지. 저쪽도 딱히 일은 없는 것 같고. 기분도 별로인데 맛집이나 찾아서 먹부림으로 기분이나 달래자 생각하며 그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평이한 인사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당신을 그저 반가워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테다. 옅은 미소마저 띠고 있는 상황은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비릿한 혈향을 두르고는 하지 못할 짓이 아닌가.
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주위를 둘러보면 알 것이다.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흘러내리는 피가 눈물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괴물 주제에 말이다. 괴물이 눈물이 있던가? 슬픔이 있던가? 그런 것을 가질 자격은, 있던가?
칼 끝이 자신을 향하자 끝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흐느낌과 진배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르던 몸이 쓰러지듯 웅크려진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 내 유일한...미련이었던 사람.
"..아하하, 하, 흐으...."
왜 이리 늦게 오셨나이까. 저를 막으려거든 더 일찍 찾아오셨어야 합니다. 괴물이 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얼굴이라도 비추셨어야죠. 적어도 당신만을 생각하며 광인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때에라도 당신을 마주했다면, 조금은 우리의 마지막이 달라졌을 터인데. 왜 이제야, 이제서야,
"저를 죽이러 오셨나이까."
몸을 숙인 탓에 얼굴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목소리는 고저없이 덤덤했다. 이미 포기한 자의 체념이 엿보인다면, 착각인가.
강녕하였을 리 만무하다. 식사를 할 때면 돌을 씹는 듯한 기분이었고, 잠자리에 몸을 뉘이면 타오르는 불판 위에 오른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매일 밤 아무도 모르게 괴로워하다 까무룩 기절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너는, 잘 지냈느냐.
작금의 상황에 와서도, 나는 묻고 싶다. 밥은 잘 챙겨먹었는지. 너무 늦게 자러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상처는 제때제때 치료해주고 있는지. 보살펴주어야 하는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정작 너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도.
이 나의 보살핌 따위는,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그래."
입안이 온통 쓰다. 분명 너는 웃고 있는데, 꼭 우는 것만 같다. 나 또한 그러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지만, 나는 울고 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대체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게냐.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음에도, 무에 그리 슬픈 게야.
"나는, 너를 죽여서라도 막을 생각이다."
너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천진하게 웃던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부 내 오만이었다. 그러니 책임 또한 내가 져야 마땅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는 속으로 못다한 말을 읊조린다.
들려오는 답에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기다렸다는듯이 환히도 웃는다. 꼭, 세상에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사람처럼. 마침내 마지막 소원을 이룬 사람처럼. 그래. 그러셔야죠. 그리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뇌까리던 목소리가 한순간 끊겼다. 밭은 숨을 몰아쉬다 마른 기침을 두어번 내뱉었다. 입가에 흘러내린 것을 소매로 닦았으나 이미 피로 뒤덮인 탓에 닦이는 것이 아니라 더 더럽히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소매를 바라보다 손이 떨리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칼자루를 바투 쥐었다. 아, 끝이 멀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하필 이런 인간조차 되어먹지 못한 자가 당신의 곁에 있어 죄송합니다. 이러한 끝을 마주하게 해 미안합니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나는ㅡ
"그렇다면 부디, 그 칼 끝에 망설임을 두지 마소서."
당신의 손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나를 괴물로 보십시오. 처단해야 할 악인으로 생각하십시오.
나는 한때 당신이 주었던 팔찌를 끌렀다. 이것으로 당신과의 추억도 끌러지기를 바랐다. 당신이 나를 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뤄질리 없는 바람인 것을 앎에도, 그랬다. 계속 미끄러지려는 칼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나서도, 밭은기침을 하는 너를 보자 걱정이 먼저 치밀어오른다. 더러워진 옷이, 떨리는 손이, 못내 안타깝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과 비명과 증오를 뒤집어쓴 괴물이 아닌 그저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너는 몸이 약해 항상 잔병치레가 많았지. 계절이 바뀔 때면 꼭 한 번씩은 감기를 호되게 앓곤 했어. 그때마다 나는 밤새도록 네 머리맡에 앉아 물수건을 갈아 주었는데. 너는,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너는 어째서, 너를 죽이겠다는 각오를 듣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는가.
어째서 내게 이런 역할이 주어진 것인가. 늘 그래왔듯 신은 무정하다. 내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두게 하다니. 혹은, 네 손으로 내 목숨을 거두게 하다니. 신은 항상 무정하고 또 잔인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너를 거두지 않을 걸 그랬다. 다른 이의 손에서 컸더라면 너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삶의 즐거움을 알고, 매일 아침 눈을 떠 밤에 눈을 감을때까지의 그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함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정하지만 강인한 사람으로 자라, 매일을 성실히 살아가다, 어쩌면 배필을 맞고, 자식을 낳고, 그렇게 종국에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제 너무 늦어 버렸다.
칼을 고쳐 쥐고 너를 향해 달려든다. 시리도록 날카로운 칼끝이 네 목을 향해 날아든다. 적당히 봐줄 상황이 아니다. 나는 널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다. 설령 이 칼로 네 배를, 목을, 심장을 찌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네 몸이 차게 식고 마지막 숨이 떠나가게 되더라도.
애초에 시작부터 틀린 만남이었다. 과거에 대해 알게 된 시점부터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길을 걷고 말 것이다. 대신 당신과 온전한 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에게서 경멸을 받더라도, 당신과의 추억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당신이 가르쳐준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칼을 쥐고 당신을 막아섰다. 죽는 건 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전할 말이 남았다. 칼을 맞대자 그제야 당신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뜯어보았다. 과거와 달라진 점도, 여즉 같은 점도 뚜렷히 보였다.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목 안쪽에서 비릿하게 올라오는 혈향을 억눌렀다.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억지로나마 꺼냈다.
"저의 목을 가져가신다면 일평생 평안하게 살 정도는 되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제게 있으니 당신은 그저, 행,복하게, 사, 시기를..."
내가 남길 마지막 모습이라면, 당신이 기억할 마지막이라면, 그래도 웃는 모습이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웃었다. 행복했던 당신과의 기억을 내리눌러 밝은 웃음을 자아내었다.
그리고, 아,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이제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을지 모른다. 끝마치지 못한 말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찰나에, 몸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놓친 칼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기침을 내뱉자 무언가 입 안을 굴러다녔다. 물컹거리는 것이 살조각인가 싶었다.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않고 뱉어내었다.
"부, 디...소, 인을 잊고,"
죄인인 주제에 당신의 행복을 바랐다. 그 행복을 망친 것이 바로 저일 터인데.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야가 흐려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무거웠다.
평생 재물이나 권력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그래, 황제에게 네 목을 바친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고 살 수 있겠지. 나는 괴물로부터 모두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고, 어쩌면 설화가 쓰여 후대까지 전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인가.
네가 없는 삶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이냐.
과거의 잔해는 전부 내버리고 날카롭게 벼린 얼음과 같은 마음을 품고자 했다. 죽음조차 불사하면서까지 너를 막고자 각오했다. 하지만 나는 칼을 내던지고 쓰러지는 너를 품에 안는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마냥 너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는 끝까지 미련하고 또 나약하다.
"아..."
탄식을 내뱉으며 핏덩이를 울컥 내뱉는 네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더럽혀진 것은 비단 너뿐이 아니다. 어찌 너만이 죄를 지었겠는가. 나 또한 죄인이요 짐승이다. 여기 피칠갑을 한 두 마리 짐승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놓지 못하고 있다.
"...아가."
그제야 너를 불러 본다. 먼 옛날, 잔뜩 겁에 질려 숨죽인 채 떨고 있던 너를 처음 그리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네 얼굴에 떨어진다. 이제 와서 둑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아가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아가, 아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오열이 터져나온다. 온몸이 칼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프다. 나는 너를 부여잡고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내가 어찌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저를 잊으라고 말하는 주제에 이리도 환하게 웃는 너를.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행복이 죽었다. 산산조각나 덧없이 스러지고야 말았다. 내 앞날에 남은 것은 절망, 그저 끝없는 절망뿐이다. 사는 것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저 숨만 쉬는 나날에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이냐.
시선이 나동그라진 칼을 향한다. 더러워진 칼날이 이토록 달콤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거머쥔다. 목젖에 닿은 칼끝이 실날만한 상처를 낸다. 힘을 주어 칼을 꽂아넣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신을 찾는다. 만약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저 행복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달라지기를. 내 육신과 불행과 모든 것을 거름 삼아도 좋으니 부디, 이 아이가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그렇게 답하는 것마저 당신다워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갑작스러운 통증만 아니었다면 그 어릴적처럼 천진하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헛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칼로 제 속을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색색 숨을 내쉬며 웃음 조각들울 내뱉었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당신이 돈이나 권력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그래서 기꺼이 내 목을 바치고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더, 럽습, 니, 다."
이미 더러워진 자를 부둥켜 안지 마소서. 당신까지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울지도 마십시오. 이제는 제가 눈물을 닦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그대는, 행복하시길 바라나이다. 저를 잊어서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나이다.
움직이려 들지를 않는 입술을 억지로라도 움직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크게 말한다 말하였는데, 저 혼자만의 착각일런지도 모른다. 실은 속삭임만큼이나 작게 들렸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예 당신에게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흘러나오는 피에 밀려 아예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시야가 흐려졌다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고통이 잦아들자 수마가 밀려들어왔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까무룩 잠들 것만 같았다. 오랜 동반자였던 죽음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더이상 버티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고 해서 마무리 지어야 될 것 같긴 한데...솔직한 마음으로는 돌리면서 너무 재밌었어서 너참치만 괜찮다면 조금 더 이어보고도 싶어.
>>465 확실히 그쪽도 재미있을 것 같지. 초반부터 보호자 안 만나려고 도망치다가 딱 들켜버린다던가...나중에 사실 알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된다던가! 난 좋아!! 앗, 그런데 이러면 생각보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너참치만 괜찮다면, 아예 어장 따로 파는 거 어떻게 생각해?
무슨 신이 이래. 전지전능, 자비롭고 관대하고 후광이 삐까번쩍 비치는 그런 경이로운 존재 아니었냐고. 한숨을 쉬려다 다시 목구멍 아래로 밀어넣었다. 면전에 대고 한숨 쉬는 행동은, 당신이 신이 아니고 그저 인간이라도 무례한 행동이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헤집으면서 생각했다. 신이라면 로또나 당첨시켜주면 좋으련만, 내가 지금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빈 집이었던 이웃집에 누가 들어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조용한 사람이기만을 바랐는데,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길 빌었어야 했나보다.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내지는 무능한 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서 뭐, 이번에는 뭔데요. 길멍이가 짖으면서 쫓아왔어요?"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것들이 담긴 검은 봉다리다. 사탕이 어딨지. 잘못 배운 담배를 끊기 위해서 사탕을 사는 일이 잦아졌다. 담배를 계속 피다 폐암으로 죽느니, 사탕만 처먹다 당뇨에 합병증으로 죽을 것 같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주 먹게 됐다. 덕분에 길거리에서 위로용으로 사탕을 건넬 수도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끊기면서 당신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이자쳐서 400원으로 받아낼 거에요."
이 사탕의 권장 소비자 가격을 알면 피식 웃을 법도 하겠지. 그래서 건넨 농담이었다. 200원짜리의 라임맛 막대사탕. 무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고.
무슨 인간이 이렇게 겁이 없을까. 정말 신이 맞느냐고 물어보는 너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 말투로 미루어 보건대 반신반의 하는 반응이었다. 이어 한숨을 쉬려다 참는 행동이 퍽이나 귀여워 입매가 저절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인간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건 대부분의 신이 그러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신도 있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식어 방치에 가깝게 두는 신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이 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단지 인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이유로 '반 휴가 반 출장'의 형식으로 지상으로 내려온 케이스였다. 아버지가 주신이기는 하나, 반 내놓은 자식이어서 인간계로 내려오는 허락을 받긴 어렵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는 진정한 신앙심을 찾기 드물다.
신이 존재하는 건 신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할 때, 괴로울 때,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진정으로 신을 바라는 그 마음. 그것이 신앙과 기도의 본질이었다. 때로 신들이 노파나 거렁뱅이로 분장해 인간들을 찾아가는 것도 신앙심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신을 알아보는 이에게는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런 허름한 맨션에 이사오고 나서도 굳이 신이라는 걸 감추지 않은 것이었다. 알아볼 이라면 알아볼 것이고, 그렇지 못해도 내게 손해는 없으니까.
"아니 뭐... 동네 개한테 긁혔어."
여기, 보이냐? 하고 네 눈 앞에 뺨에 난 상처를 들이댔다. 발톱에 발갛게 긁힌 자국은 신의 권능만 쓰면 0.1초만에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데 권능 낭비하기도 싫고, 우선은 '평범하게' 지내 볼 생각이어서 방치 중이었다. 네가 검은 봉지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설마 제물인가? 그런데 신에게 400원짜리 제물 바치는 게 어딨어.
당신의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사탕을 받아들었다. 포장지를 매만지다 껍질을 벗기고, 라임색 막대사탕을 입에 꼬나 물었다. 단맛이 퍼진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가 보구나. 그래서 네가 단 걸 찾나 보구나.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니 소원 하나 들어줄게. 물론 로또 당첨 같은 건 안 돼. 그걸 원하면 성의를 좀 더 보이도록."
과거 이야기는 캐묻지 않는 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란다, 아이야. 이미 한 번 망했던 세상이니 떠올려봤자 지금 상황이 더 쓰레기통처럼 느껴지거든. (거센 눈바람 속에서도 짐승의 발자국을 놓치지 않았다. 독한 진을 입에 머금어 체온을 높이고, 어깨에 비스듬히 맨 구식 라이플을 꺼내며 눈밭에 눕듯이 해,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킨다.) 저번에 놓친 사슴이구나. 새끼까지 있어. 침착하게 조준해. 아이가 맞지 않도록.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총구를 겨눠두고 당신의 발포를 기다린다.) …그래도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구나. 누군가를 데리고 다니는 건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불나겠느냐고, 정말로 신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가 왜 있겠고, 다들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하지만 그들 중 누가 신이라는 작자가 동네 길멍이한테 긁히고 다닐 거라고 상상하겠냐고. 어디서 다쳐서는 사탕 하나 쥐여주니 저 봐. 웃는 것 좀 봐라. 제 동생들이 안 떠오르려야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조그맣고 저도 조그맣던 어릴 적에 있었던 일임에도 또렷했다. 놀다가 넘어졌는지 무릎을 까져 먹고 와서 울상을 짓고 있다가도, 제 목소리가 들리면 웃던 동생들 말이다. 잔소리해도 웃고, 걱정해도 웃고, 사탕을 쥐여주면 사랑한다는 소리를 곧잘 하던. 지금이야 고집불통 말도 안 듣고 쑥쑥 크는 통에 그런 일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신이 길멍이한테 진다거나 사탕을 좋아한다고는 못 들어봤거든요."
이번에는 사탕을 꺼낸 검은 봉다리가 아니라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조금 꾸깃꾸깃하지만 쓰인 것은 아닌, 꽤 앙증맞은 그림이 그려진 캐릭터 반창고가 하나 손에 들려 나왔다. 이 반창고도 당신의 것인지, 손이 당신에게로 뻗어있다. 반대 손을 자세히 보면 같은 반창고가 손마디 마디에 더러 붙어있다. 언젠가 반창고를 사러 갔을 때, 운이 없어 이런 깜찍한 반창고만 남아있었기에 사게 된 것이었다. 지금 당신에게는 운이 좋은 일이다. 사탕을 쥐여주더니, 상처가 났다 하니 반창고까지 쥐여주는 이웃도 만나고. 당신이 신이라서 운이 좋은 걸까.
"소독하고 약 바르고서 붙여요. 그냥 붙이면 덧날걸."
네에, 아주 잘 보입니다. 들이대진 상처에 건성인 대꾸다. 대신 설명이 친절하잖아. 그 반창고가 당신이 문득 얼굴에 손 올렸을 때, 괜히 상처 건드려서 아플 일 없게 만들어줄 거라고. 건드렸다 덧나서 얼굴에 흉 남는 것도 그렇잖아.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 정도면 이웃에게 베풀 상냥함은 다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를 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데 당신의 말 한마디가 발목을 묶었다. 정말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어투와 성의를 보이라는 뻔뻔함까지. 진짜 신이 있고 당신이 그 신이라면. 로또 당첨이 안 되는 건 아쉽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아마도 대부분이 그것 말고도 소원이 넘쳐날 거거든. 근데 내가 지금 성의를 보이려고 해도 줄 수 있는 게 사탕 말고 딱히 뭐가 더 없는데 말이지.
"동생 대입 잘됐으면 좋겠다~ 는 돼요?"
사탕 받고 웃었잖아, 그쪽. 내 농담에 웃은 거라면 유감이지만 일단은 사탕 두 개를 더 내밀었다. 사과 맛과 오렌지 맛이다.
>>471 음, 제가 선생님의 과거사를 여쭤본 적이 있던가요? (아이라 불렸으나, 제 3자가 보기에는 아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는 나이대의 그가 여상한 투로 답하며 신중하게 사슴을 겨누고 발포한다. 새끼는 도망치고, 어미는 즉사하여 쓰러진다. 다가가 제법 손상이 적은 사슴의 상태를 확인하곤 마저 답한다.) 저를 챙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시는 줄은 몰랐네요. 전 동업인 줄 알았거든요. (그는 자신이 잡은 가볍게 사슴을 들쳐맨다.) 사양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저 혼자서도 문제 없어서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473 응? (당황한 듯한 얼굴로 당신을 올려다보다, 같이 눈밭에 누워있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아이 역시 혼자 대답하기 시작한 당신을 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 어깨를 으쓱한다. 총을 거두는 아이에게 피식 웃어보인다.) 쉿. 아무 말도 하지말고, 반응도 하지 마렴. 아마 저 치도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니까. 종종 이야기를 들은 적 있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령같은 존재란다. 어설프게 다른 이를 흉내내서 자리를 차지하려하지만 조금만 신경써보면 눈치챌 수 있지. 갈 때 까지 기다리자꾸나. (자리를 뜨는 당신의 뒷모습을 측은한 얼굴로 지켜본다.) 가혹한 환경 탓에 스스로 스러지는 존재가 많구나. 한없이 차가운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미움받길 원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서글픈 이야기구나. (럼으로 입을 가글하고, 흰 눈밭에 뱉어낸다.)
>>474 기척은 아저씨가 제일 많이 내고 있는데요. (눈밭에 드러누워있던 아이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아저씨 맨날 술 마시는 소리 내고 말하니까 사슴들이 맨날 도망가잖아요. 이제 잡아보나 싶었는데. 재미없어, 집에 갈래요. (아이는 발딱 일어나 몸에 묻은 눈을 털고 집으로 달려간다.) /이건 내 막레로 할게, 수고 많았어~
>>471 (캐묻지 말라는 당신을 보는 눈이 시큰둥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게 숨을 내쉬는 것은 이미 몇 번쯤 겪은 상황을 다루듯 하다. 작은 몸이 당신을 따라 눈밭에 눕는다.) 알고 있어요. (접때와 다를 바 없는 일축에 시시하게 반항하는 것도 잠시, 라이플을 고쳐 쥐고 사슴을 향해 겨눈다. 조심스러운 초심자의 동작, 그러나 처음 집을 때부터 보이던 과단성은 여전하다. 건조한 방포성이 터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달아나는 어린 것이 어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여부 또한 앎을 요하지 않는다.) 저도 누군가를 졸졸 따라다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게 당신 같은 사람일 줄은 더욱이나. (가늠자에서 눈을 거둬 총구 저편으로 넘긴다. 낮게 흘리는 말은 사냥을 마치고 던지는 실없는 우스개에 가깝다. 웃음기는 흐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