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리던 멋진 남자는 틀림없이 당신을 찾아왔다. 그러나 당신의 예상대로 안 된 점이 있다면, 그의 손에도 우산은 들려 있지 않았다는 것. 애초에 오늘 우산을 가져온 아이들이 별로 없는가, 교실을 삼삼오오 빠져나간 아이들도 교사 현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가, 가방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가, 돈을 모아 콜택시를 부르거나 아니면 부모님 찬스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날씨는 기가 막히게 맑았고. 일기예보에서도 하루종일 맑을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물론 일기예보는 지금 창밖을 보다시피 멀거니 빗나갔고, 성빈도 사정이 그렇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그는 품에 달라붙어오는 당신을 받아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다."
매점에도 우산이 안 들어왔더라, 하고 덧붙이며 그는 팔에 걸고 있던 가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따뜻하게 데워진 밀크티 캔을 꺼내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조금 늦더라니 매점에 뭔가 있나 싶어 들렀다 온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기다리면 비가 그칠지 모르니까, 교실이나 아니면 학생회실 같은 곳에서 좀 기다려볼까?"
아니면 택시를 불러도 되니까, 하면서 성빈은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글쎄, 어쩌면 그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거나 조금이라도 멎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겠다고.
장호랑은 일기예보를 도통 보지 않는다. 그야 최성빈이라는 멋진 사람이 거의 매일 아침을 깨우러 와주면서, 우산을 챙겨라, 오늘 날이 춥다 정도를 이야기 해 주니 그 정보에 사람에 의존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작 오늘 일기 예보가 틀렸다는 것은 장호랑이 알기에 요원한 일..
"와아, 고마워!"
두 손으로 밀크티 캔을 받아들이고 한 시의 지체도 없이 손으로 까보려 하지만 틱 틱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항상 나오는 패턴이라지, 최성빈이 음료수를 주면 장호랑은 스스로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고, 실패하고, 애처로운 눈빛이나 부끄러운 눈빛으로 최성빈을 올려다 보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그 눈빛에 못 이기는 착한 최성빈이 음료를 따주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부탁을 하는 눈빛이 최성빈을 향해 올라갔다.
"일기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이러네." 하고 어깨를 으쓱한 성빈은, 당신이 캔을 잡고 애처로운 눈길로 올려다보자 뭔가 빠뜨려먹은 것을 발견한 사람의 멋적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손을 뻗어서 흔쾌히 당신이 든 밀크티 캔을 딱 하는 작고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따서는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결국 당신에게는 어디까지나 착했다. 조금 걱정하는 듯한 당신의 말에, 성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이 학생회실이지, 회의 안 할 때는 임원들 휴게실에 가까우니까 말야."
물론 해당 상황을 딱히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도 임원들이 학생회실을 오용하는 것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고, 2학년 부회장인 자신도 별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회의할 때만 잘 정리해두면 학교에서 뭐라고 태클을 걸지 않는 것도 있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오늘같은 날이면 학생회 임원들이 너도나도 학생회실에 틀어박혀서 빈둥대고 있을 게 뻔했다. 성빈은 확인을 해보기 위해 학생회 톡방을 열었다.
그러나 톡방에는 마침 학생회장네 집에서 밴을 몰고 왔다고, 임원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학생회장의 메시지가 떠 있었고, 임원들 대부분이 서관 현관으로 나가겠다고 대답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눈치가 보이니 그 밴에 당신을 태워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만 밴을 타고 가는 건 더더욱 절대 사절이었기에, 성빈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따로 가겠다'고 톡방에 메세지를 보내둔 뒤에 당신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비 그칠 때까지 잠깐 둘이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 그렇다니 날씨가 다시 한 번 거한 낚시를 걸어줘야... 학생회실에서 잠깐 있으면 햇살이 잠깐 비쳤다가, 그걸 보고 나섰더니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기도 애매한 시점에서 비가 다시 쏟아지는 거지..
항상 철두철미한 최성빈이 일기예보 하나를 체크 못 한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고, 결국 오늘 우산이 없는 것은 기상청의 탓으로 돌아갔다. 일기예보가 이렇게까지 빗나갈수도 있나? 작은 의문점을 가지다 밀크티를 받아들이면 그런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고마워! 라는 한 마디를 한 뒤에 한 모금 마셔보면 달고 부드러워서 역시 맛있었다.
학생회실로 가도 되겠다는 성빈의 의견에는 홀린듯 고개를 끄덕이고, 최성빈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회실 안에는 아늑한 쇼파와 테이블, 간단한 간식거리들과 마실 것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구미를 당길만한 것은 없고,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의 수준이었다. 장호랑은 학생회실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우와 나 학생회실 처음 와봐! 하는 감탄사를 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쇼파에 등을 기대었고 창 밖을 보았다. 조금씩 비가 그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당장 기상청 SNS를 켜보면 쏟아지는 항의에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어쩌랴. 기상청 측에서도 이변이라 할 만한 저기압의 급격한 변덕 때문이었는걸. 그래도 시기로 따지면 봄비가 올 때가 되긴 했다. 이 봄비가 멈추고 비거스렁이가 다 불어가고 나면, 비로소 따뜻한 봄날이 시작되겠지. 복장 규정이 춘추복으로 바뀌고, 꽃들이 피어나고. 당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와 꽃놀이를 갈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이 3월의 끝자락을 적시는 봄비 덕에, 당신은 이 소년을 조금 더 독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학생회실은 언제나와 같은 모양이었다. 구색맞추기용으로 진열해둔 장식품에 가까운 간식들과, 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보통 차기가 바쁘게 비워지곤 하는-, 예술부장이 가져다놓은 이런저런 만화책들, 학생회장의 고상한 취미가 반영된 플루프 인형 같은 게 놓여 있는 일종의 아지트. 소년이 속해 있는 곳들 중 하나였다.
당신이 소파에 기대어앉자, 성빈 역시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옆자리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창밖의 비는 어느샌가 그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성빈도 그게 보였는지, 당신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얼마 안 있어도 될 것 같다."
삼월 말의 비 오는 날, 느긋한 오후. 침침한 조명 아래, 나직이 비 내리는 소리 가운데, 당신과 그뿐이었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빈 부실을 빌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음료수 캔을 조금씩 홀짝이면서 반 친구들 이야기나 별난 선생님 이야기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조그만 순간들 하나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작은 순간들이 모두 소중했다. 자신이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길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지만.
눈치껏 좀 길게 내려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오늘의 봄비는 변덕이 심한지 음료수 한 캔을 다 비웠을 때쯤에는 어느샌가 빗소리도 그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해 먹구름 사이로 생긴 틈으로 햇살까지 한 줌 내리쬐고 있었다. 성빈은 당신의 말에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렇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럼 가자."
하고, 성빈은 당신에게 녹색의 눈길을 돌리며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항상 그러듯이, 산책가자는 말을 들은 커다란 개처럼.
응, 이라는 대답 대신에 가볍게 내밀어준 손을 잡았다. 항상 그렇듯이, 최성빈의 손이 장호랑의 손보다 조금 차갑고, 또 장호랑의 손이 최성빈의 손보다 조금 따듯했다. 그런 온도차이를 좋아했다. 촉감 외에도 더 선명하게 닿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바보같이 헤실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띄운 체 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갔다.
교문을 나서고 집으로 가는 멀지 않은 길의 한 가운데에서는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호랑이 어? 하는 소리를 내고 하늘을 올려다볼 무렵 툭 하고 이마에 커다란 빗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헉! 오빠 비온다 비!"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인지, 봄비인지 모를 굵은 빗줄기를 보며 장호랑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로 돌아가기에도, 집으로 뛰어가기에도 애매한 거리이며 아무것도 안 한다는 최악의 선택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옷과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들고 있었다.
찹, 하고 당신의 손은 조금 차갑고 훨씬 커다란 손이 감싼다. 당신의 조그만 온기가 손 안에 머무는 이런 순간이 좋다는 것을 성빈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신의 헤실거리는 미소를 보며, 그는 얼굴에 마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학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교문을 나선 지 어느 정도 지나자 질나쁜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의 안색이 다시 표변하기 시작했다. 문득 눅눅한 공기에 하늘을 올려다본 성빈은 언제 햇살이 내리쬐었냐는 듯 다시 시꺼멓게 떡지며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한 구름을 보고 불길함을 예견한 건가 걸음을 약간 빨리하려 했으나, 눈치채는 게 조금 늦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의 비온다,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성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재킷의 단추를 툭툭 끌러내어 벗은 다음에 당신의 어깨에 뒤집어씌워 주었다. 졸지에 그는 와이셔츠에 니트조끼 차림이 됐지만, 그는 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빗방울이 다시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당신의 손을 꼭 쥐고는 물었다.
어깨 위에 잘 아는 사람의 재킷이 뒤집어 씌워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 몰라하던 자신과는 크게 대비되는 대처. 재킷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려고는 했지만 손을 꽉 잡고 안남지하도까지 뛰어가자는 말을 어찌나 단호하게 하던지,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깨 위로는 사이즈가 큰 재킷을 걸치고, 머리 위에는 책가방 하나를 얹은 체 물 웅덩이를 찰팍이며 최성빈이 이끄는 길 대로 따라간다. 기묘한 고양감과,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해지고, 시선은 손을 잡고 이끄는 최성빈에게 고정되며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채도가 한 층 높아진 것만 같은 감각으로 한참을 달렸다.
"후아, 오빠 잠깐만..!"
중간쯤 뛰었을 때는 숨이 차서 속도를 느리고 앞에 가는 사람의 자비를 구하게 되었지만...
조금 그런 느낌일까. 나도 모르게 너부터 먼저 생각해버리고, 엉겁결에 생각보다 손발이 먼저 나가고 마는 그런 느낌. 이상해. 이상하네. 나 조금 이상하지. 너한테 나는 그저 알고 지내는 이웃집 오빠일 뿐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너부터 생각하고 너에게 이렇게 대하고 있어. 너와 같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이 순간, 물기 먹은 공기들 사이로 부슬부슬 내리는 차갑고 습한 빗소리와,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반짝이는 헤드라이트들과, 신호등들과, 간판의 LED 불빛들로 둘러싸여,
이 세상에 이 빗길과 너와 나만 덜렁 놓여 헤매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정말로 너와 잠깐이라도 이렇게 단 둘이 되어버린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멋대로, 생각을.
당신 생각에 빠져서 익사해버릴 뻔한 성빈을 덥석 붙들어 꺼내어준 것도 당신이었다. 당신이 가쁘게 숨을 고르며 잠깐만, 하고 자비를 구하자, 성빈은 조금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멈춰섰다. 그러나 그는 멈춰선 지 1초도 걸리지 않아 자기와 당신이 비 내리는 보도 한복판에 멈춰섰다는 것을 깨달았고,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어서, 당신과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처마로 이끌었다. "응, 잠깐 저기서 쉬었다 가자." 꽤 오래되어 보이는 빌딩의 현관이었다. 두 소년소녀가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도 당신은 머리에 쓴 가방과, 성빈이 급히 씌워준 재킷 덕분에 쫄딱 젖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빈은 벌써 꽤 낭패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빗방울을 실컷 맞아 살에 처덕처덕 달라붙기 시작한 와이셔츠라던가, 평소의 부드러운 컬이 들어간 연갈색 머리카락이 한가득 빗물을 먹은 점이라던가, 얼룩덜룩 물방울이 맺혀서 제구실을 못하는 안경이라던가. 빗발이 전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회색 하늘을 처마 아래서 내어다보며, 성빈은 안경을 벗어내리곤 비에 젖은 앞머리를 조금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시력이 약간 떨어져 안경을 눈에 달고 사는 사람이 그렇듯이 그는 미간과 눈살을 조금 찌푸렸고, 그렇게 보고 있자니 성빈은 평소의 그 대형견 같은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다.
물론, 이내 당신을 돌아볼 때에는 미간과 눈살에 주었던 힘이 부드럽게 풀려서는 평소의 그 온화한 대형견같은 인상으로 돌아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