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 Picrewの「電脳メーカー」でつくったよ! https://picrew.me/share?cd=HnxiB5lwUu #Picrew #電脳メーカー 인축무해라는 말을 그대로 사람으로 빚어놓으면 이럴까? 흉진 데 하나 없는 곱게 생긴 두상에, 곱슬기를 머금고 유순한 동물의 털처럼 머리와 얼굴로 쏟아지는 연갈색 머리카락, 오똑하고 곧은 콧날과 입가에 서린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는 잠깐의 첫인상만으로 그에게 신뢰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든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에 담겨 있는 눈동자는 짙은 녹색인데, 항상 호기심 많은 커다란 개마냥 은은한 빛을 머금고 반짝이며 눈앞에 있는 대상을 호기심있고도 사려깊게 찬찬히 살핀다. 전체적으로 무엇 하나 모자란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귀한 집 도련님, 이라는 인상을 받기 쉬운 얼굴일까. 그러나 유순한 인상에 비한다면 반전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체격. 184센티미터 85킬로그램으로, 온순한 인상에 묻히기 쉬운 널찍한 어깨나, 꾸준한 자기관리로 탄탄하게 맺혀 있는 근육 같은 뜻밖의 마초성이 평소에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는 옷차림 아래에 잘 감추어져 있다.
성격 :: 그의 같은 반 친구 중 누군가가 말하길 '우리 학년 최고 아웃풋'. 생긴 외모답게 느긋하고 나긋하여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살가운 성격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곧잘 싫은 기색 없이 어울려주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원만해 널리 인망을 사고 있다.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하고 모범적인 생활에 성적도 최상위권에 속하기 때문에, 선생님들로부터도 예쁨을 받는 모범생이다. 다만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고루 눈길을 주려 하기 때문에 그 눈길을 한 곳에 붙들어두고자 한다면 여러 모로 힘든 일일 수 있다. 본인은 스스로가 정체되어 멈춰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이 내심 불만인 듯하다. 그러나, 느긋하고 상냥한 모습 뒤로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며 비정하고 복흑스러운 이면을 감추고 있다. 고문에 가까운 가정교육이 남긴 흉터와 같은 결과로, 스스로 내면에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그 누구도 내게서 행복을 찾지 못할 것" 이라는 신념에 가까운 생각을 품고 있다.
기타 :: 귀한 집에서 자랐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정확하게 본 것. 국내의 재계서열 최상단에 위치해 있는 기업 경영가의 삼남 이녀 중 막내아들이다. 학교에서는 팔방미인으로, 학업이면 학업, 운동이면 운동 어느 쪽에서건 최고의 평가를 거두어내는 요컨대 엄마 친구 아들. 교내 혹은 전국 학력고사에서 만점 내지는 상위 1퍼센트 이내를 유지하며, 점심시간이나 체육시간 때 벌어지는 축구나 농구 시합에서도 곧잘 두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든 것에 뛰어나다 보니 자기만의 뚜렷한 취미라던가 적성이라던가를 찾아내지 못해서, 진로나 자기 정체성에 고민이 큰 듯하다. 재벌가의 후계자로서, 사자 새끼는 벼랑에 내던지며 키워야 한다는 조부와 부친의 고압적인 교육철학에 따라 생애에 단 한 번뿐인 삶의 모든 순간에 완벽할 것을 요구받으며 고문 내지 혹사에 가까운 모진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무에서 확실한 성과를 내어야 하고, 자유라고 착각하여 방종-자유를 즐기기 위해 한 행동이 스스로의 완벽성을 훼손하는 것-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1년 정도, 십여 년 동안 억눌러 온 반항심을 폭발시켜 불량학생들의 무리에 끼여 방탕한 인생을 보낸 적이 있으나 어떤 사정으로 인해 고교 2학년에 올라와서는 그만두었다. 1년 정도 양아치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화를 남겼다.
이름 :: 장 호랑 나이 :: 17~18 성별 :: F 외모 :: Picrewの「ななめーかー」でつくったよ! https://picrew.me/share?cd=dh5OZf1TCL #Picrew #ななめーかー 작고 아담한 키. 황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곱슬거렸으며, 길이는 날개뼈 아래까지 길게 자라 있다. 마찬가지로 금빛의 눈. 속눈썹이 길게 나 있었으며 눈꼬리는 쳐져 있어 순하거나 만만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그 아래로는 작지만 오똑 솟은 코와, 마찬가지로 작은 입이 있었다. 손발도 작다는 인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거기에 근육이라도 가득 차있으면 덜 억울하지. 캔도 물병도 못 따기 일수다. 키는 151cm
성격 ::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하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쭈뼛거리며 과민반응하거나, 반응이 늦어지는 편. 하지만 친하고 편한 사람들 주변에서는 늘어지고 장난도 잘 받아주는 성격. 감성적인 면이 커서 슬픈 영화를 보면 항상 운다. 동물농장을 봐도 울 때가 많다. 최근에는 유투브에 올라오는 햄스터 영상을 보고 눈물이 팽 돈 적도 있다! 그만큼 섬세한 편이라 타인의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한 번 듣고 흘려보낼 법 한 일들도 기억해서 나중에 챙겨주는 편.
기타 :: 치기엔 피지컬이 불리했다. 위로는 언니가 하나만 있어서 집안의 응석꾸러기. 전형적인 중상류층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지만 과보호 탓인지 원래 그랬는지 성격이 붙임성이 참 없다. 본인의 단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매일 우유 먹고 키크는 스트레칭도 해보고.... 성적은 중상위권. 의외로 공부머리가 좋아서 수업 열심히 듣고 벼락치기로 성적을 얻어내지만 그 이상으로 노력을 할 생각은 없다. 장래에 대한 생각도 막연하고 집안에서 군식구로 살아도 눈치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남들에게는 말 못 할 생각을 하는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점심시간. 나름 귀한거 먹고 자랐다지만 본인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는다. 먹는것을 좋아하기에 가방에는 항상 간식이 있다. 과자나 빵이나 초콜릿이나 사탕이나 젤리나... 수업 중 몰래 먹다가 걸린 적은 없다. 그정도 스킬은 이미 중학교 때 마스터하고 올라왔기 때문 당황하면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버릇이 있다. 말도 더듬을 수도 있다. 뒷목에 손이 올라가거나 볼을 긁거나— 하여튼 거짓말은 더럽게 못 한다는 소리.
그러게. 정석적으로 학기 초 봄부터 시작해도 좋고... 그리고 소꿉친구라서 부모님끼리 친분이 있다고 한다면 성빈이네 아버지보단 성빈이네 어머니가 호랑이네 부모님이랑 친했으면 좋겠어. 매운맛 스프가 첨가된 덕분에 성빈이네 아버지가 사적으로 상종하기 아주 힘든 인간이 되었습니다 ^ㅁ^...!
>>10 성빈이네 아버지 무서워서 호랑이는 아직도 대하기 어색하먄 좋겠네 ㅋㅋㅋㅋㅋㅋ 좋아 그런 설정으로 하자! 시작은 봄! 그리고 이제 어디쯤이 배경인지 집은 주택인지 아파트인지 정도네! (이왕 소꿉친구인 김에 주택에 창문 너머로 서로의 방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12 >>>이왕 소꿉친구인 김에 주택에 창문 너머로 서로의 방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호랑주는 천재구나! 호랑주는 천재구나!! 호랑주는 천재구나!!!
작년쯤에는 방에 커튼이 쳐져 있는 날이 자주 있어서, 호랑이가 내심 섭섭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성빈이가 양아치 노릇을 그만둔 건 작년 11월(현실의 이맘때)쯤이야. 아마 11월 중순즈음부터 성빈이 방의 커튼이 호랑이가 기억하는 평소처럼 때 되면 열리기 시작했을 거고.
하긴 성빈이쯤 되는 신뢰도면(이것은 적폐해석입니다) 호랑이 아직 자고 있나요? 베란다로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 하면서(심지어 베란다로 안 불렀음) 호랑이 깨우러 오는 것도 가능하겠다. 그 반대도 가능하고... 호랑아 일어나, 하고 깨우기보단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모닝콜삼아 핸드폰으로 틀어줄 성빈이... 그러다 호랑이 일어나면 환하게 웃으면서 잘 잤어? 하고 인사해주고.
아니 애초에 얘네들 서로 베란다로 건너다닐 수 있게 어디서 건널판자 같은 거 구해다놨을지도 몰라
앗, 맞아. 그 부분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네. 성빈이네 아버지는 집안이 운영하는 대기업인 신일그룹 경영기획부의 높으신 분(아마 직함으로만 따지면 전무이사쯤)이고, 보통은 수도 중심가(아마 서초 쪽)의 사옥에서 출퇴근하다가 주말에 집에 오시니까... (((그래서 보통 성빈이는 주말에 어딘가로 놀러나가거나, 호랑이네 집에 놀러옴))) 아마 자연스레 수도권 위성도시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벚꽃이 쭉 펴고, 새 학기의 설레임과 두려움이 한결 사라지는 시기. 좋아하는, 쭉 좋아해오던 사람과 같이 등교를 할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자 가슴도 간질간질하니 괜시리 가방의 어깨끈을 손으로 꾹 쥐면서 긴장하게 된다. 언제나 함께 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게 말이 되는 일일까 하면서도 자기 전에 같이 있던 일이 떠오르고, 또 내일 얼굴을 볼 생각에 침대를 뒤척인다면 틀림 없이 사랑이겠지. 사랑의 열병은 불길 보다는 잔불처럼 언제나 호랑의 가슴 한 켠에 불을 지르기를 선호했다. 너무 뜨거워서 들통나 버리거나, 너무 차가워서 그것을 알지도 못 할 만큼 작지도 않을 정도로. 보기 드물게 일찍 일어나고, "조.. 좋은아침!" 하고 인사를 하고, 교복을 입고 집 앞에서 보자는 약속을 한 체로 발꿈치를 달싹이며 성빈이를 기다렸다. 아주 드물게, 호랑이가 성빈이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변 잡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몇 분 안 되지만 너무 긴 시간.
달칵, 하고 성빈의 집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자 활짝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또 늦잠 자는 거나 아닐지 모르겠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기에, 달캉, 하고 대문이 열렸을 때 당신의 눈과 마주친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담긴 눈이 조금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법 선명하게 비쳐들기 시작한 초봄의 햇살을 얼굴로 맞으면서, 아직 졸음을 못다 떨친 건지 주먹으로 눈가를 부비려다 어정쩡하게 멈춰선 손이 멋적다. 그러나 이내, 성빈은 그 멈춰선 손을 펼쳐서는 당신에게 흔들어보였다. 성빈은 "일어났네, 호랑아." 하고는, 참 이름과는 다르게 토끼같은 당신의 정수리로 자연스레 손을 옮긴다.
성빈은 대문을 열고 나올 때만 해도, 또다시 늦잠에 빠진 당신을 깨우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등교길인 왼쪽이 아니라 당신의 집이 있는 오른쪽으로 꺾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상이 빗나갔다고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런 사소한 변화가 기분좋았다. 오늘도, 안정적인 하루. 평소만큼이나 안정감 있으면서, 평소와는 다른 하루.
비몽사몽한 체 베개를 끌어안은 잠옷 차림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장호랑이 일찍 일어나서 아침 인사를 했고, 성빈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는 부분이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 이 시간에 방에서 음악소리와 함께, 누워서 자신에게 손을 뻗고 있는 성빈이를 봤을 테니까.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흐아음~ 재밌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게 억울했어."
언제나 아무런 의도 없이 머리에 손을 올리는 성빈이 얄미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길을 받는것이 기뻐서 베시시 웃으며 말 했다. 일찍 일어났어도 잠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점은 어디 가질 않아서 하품도 절로 나온다.
하고, 성빈은 빙긋이 웃는다. 그는 웃기를 참 잘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받아줄 때나 그는 늘상 웃는 얼굴이었다. 당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적어도 성빈은 당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머리에는(벌레나 나뭇잎 같은 걸 떼어주는 게 아닌 바에야) 함부로 손을 올리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꿈이 다 그렇지, 뭐."
성빈은 당신의 머릿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한 번 더 쓸어준 다음에 손을 뗐다. -흐려져 가는 재밌는 꿈에 대한 기억들 사이에서 당신에게 문득 장난의 신이 속삭이는 것 같다.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성빈과 함께 등교할 준비를 마쳤으니, 언젠가 지금보다도 좀더 일찍 일어나서 성빈이 일어나는 모습을 당신이 한 번 지켜보라고. 그리고 다음번엔 당신이 한 번 그를 쓰다듬어 보라고.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진 않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당신이 하품을 하자, 성빈도 따라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하품이 옮아간 모양이다. 칼같이 일어나도 졸릴 때는 졸린 법이기도 하고. 당신이 질문을 하자, 그는 하품을 마저 하고는 문득 짓궂게 씨익 웃었다.
눈을 얇게 하면서 성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30cm를 넘어가는 키의 장벽은 언제나 이렇게, 물리적으로 시선의 위치를 드러내게 하고야 만다. 이래서 키가 크고 싶었지만 노력은 배신하고 유전은 거짓말을 했다. 엄마 아빠는 다 키 큰데 나만 이렇게 작아. 억울해.. 발꿈치를 번쩍 번쩍 드는 버릇도 키차이가 부쩍 늘어나는 시절에 생긴 버릇이라는 걸, 결국 성빈이 탓에 생긴 버릇이라는 걸 알까.
"....절대 못 해...."
차라리 밤을 새고야 말지. 하지만 밤을 샐 수도 없다. 밤잠이 너무 많은 탓에 10시만 되도 피곤해지고 11시면 눈꺼플이 반쯤 감겨있는걸. 커피로 버티기에는 카페인이 들어가면 심장이 너무 벌렁거려서 무서워서 못 마시겠다. 때문에 친구들이랑 카페를 가도 언제나 에이드나 밀크티 핫초코 뿐이더라지.
"앗 그러고보니 아직 지각 한 번도 안 했다!"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장호랑. 고등학교 생활, 이대로 지각 없이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내년과 내후년이 걱정되지만 적어도 올해 일 년은 지각이 없을 것인가!
맨날 무얼? 하고 되묻듯이, 소년은 허리를 약간 숙여서는 당신과 눈높이를 맞춘다. 또록거리며 당신과 시선을 맞추려 하는 눈동자가 흡사 커다란 개를 불러세운 것 같다.
성빈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좋았다. 언제나처럼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거나,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베란다를 통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하루하루. 이런 생활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나는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 하는 안정감이랄까. 고등학교로 가는 이 등교길은 당신에게도 슬슬 익숙해질 것 같다.
절대 못 해... 하는 청자가 불분명한 당신의 중얼거림을 성빈은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다 아직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신이 새삼스레 놀랄 때는, 그때는 당신의 말소리를 들은 것인지 성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출석부가 깔끔하면 기분 좋잖아."
그리고 성빈은, 다시 허리를 숙여서는 당신의 눈높이에 가깝게 고개를 숙이고는 해사하게 웃는다.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다.
"그것보다도, 난 호랑이랑 이렇게 다시 같은 방향으로 등교하게 될 수 있게 된 게 더 좋지만. -그래서 반 애들은 좀 어때?"
허리를 숙여오며 얼굴이 가까워지면 헉 하고 반 걸음 발을 뒤로 했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작은 손으로 성빈의 얼굴을 밀어냈다. 가까워, 가까운게 싫지는 않은데 하여튼 가까워! 익숙함을 깨는 거리는 그것이 멀든 가깝든, 물적이든 심적이든 심정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지만 언제나 익숙해지기는 힘들다. 특히 감정을 감추는 것이 서툴고, 동시에 감정을 들키는게 두려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러한 행동을 더 해주면 좋겠지만 또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고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면서 몰라줬으면 하는, 짝사랑이란 불합리의 극치인 것이다.
"반, 반 애들 착하고 좋아. 중학교때 친구도 같이 올라왔고. 오빠는? 오빠 친구들 많이 반에 왔어?"
학교 쪽으로 짧은 보폭을 옮기며 물어본다. 호랑의 기억으로는 작년에 그닥 친구 얘기를 해 준 적은 없어서, 엄청 대단한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만 걱정이 들기도 했다.
당신의 팔힘에도 성빈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밀려나곤 했다. 딴에는 안간힘을 쓰는 당신의 손길에 한쪽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도 성빈은 마냥 밝게 웃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도 같은 이 안락한 일상... 그래, 이거면 충분해. 하고 소년은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이상을 욕심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빈은 그 욕심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꽤나 익숙했다.
"글쎄- 반이 아니라 내 학년 애들 중에도 딱히 얘랑은 같은 반 되기 싫다, 할 정도로 사이나쁜 애는 없으니까, 별 문제는 없어."
갑작스런 성빈의 접근에 잊고 있었던 점이 하나 있다. 이 인간이 핵인싸라는 점. 1학년 때도(몇몇 미심쩍은 구석이 없지 않았고, 이상하게 그 때는 당신과 영 소원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그는 매사에 상냥하고 믿음직스럽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은 친구였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당신에게 딱히 풀어놓지 않더라도, 적어도 교내에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칭찬일색이었다.
당신 이외에도 그를 좋아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많았다.
어느덧 저만치서 교문이 조금씩 가까워오는 것이 보인다. "랑이도 별탈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더... 잇고...싶으나... 성빈주 기력이 마이 딸려... 텀도 길어지고... 88 혹여나 호랑이의 다음 답레에 내가 유체이탈하거나 심쿵사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기력이 딸려서 리타이어해버렸다고 생각해줘 8-8 생각같아서는 랑이랑 같이 이 밤의 끝을 잡고 싶은데 그건 주말에 노려보는 걸로...
저렇게 귀여운 애랑 17년 동안 알고 지냈는데 호감도가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수준일 리가 없지0v0! 다만 내색을 안합니다. (한 200레스쯤 뒤에는 이 레스를 링크걸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같은 짤을 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답레... 다음 답레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레스를 볼 수는 있을 것 같아. 기왕 좋은 기분으로 아침 시작할 거면 기분좋은 꿈도 꾸고 싶거든(욕심) 그리고 호랑주한테 잘 자라는 인사도 해주고 싶고..
한 평생 같이 지내면서 빼빼로 데이나 화이트데이, 발렌타인 데이 처럼 자신의 인기를 자랑 할 수 있는 날에는 언제나 두 손 가득 선물을 이고 오던 성빈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나보다. 문득 이렇게 대외적은 성빈의 평판을 확인하게 되면 앗, 하고 주춤하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지금의 관계는 아주 아주 우연한 결과였고, 언제 급변할 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또 고백을 하고, 성빈이 그걸 받아주게 된다면, 지금의 호랑은 붕 뜬 체로 가식적인 축하를 하고 옅어지는 관계를 파탄내지 않고자 스스로 거리를 두어야 할 테니까. 그런게 싫었다. 확실하지 않은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순간들이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는 더 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움에 가까운 거겠지. 호랑이가 아는 성빈이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이런 두려움에 긍휼하게 대해줄 것이고, 그러면 이전처럼의 겉모습을 보여도 신경써줘서 이러는지 진심인지 의심을 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의심마저 들키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작은 싫음을 꾹 삼키고 있어야 했다.
"걱정은 오빠가 되거든요~ 맨날 커튼치고 집에도 늦게 등어왔던 사람이~"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가 저 멀리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성빈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친구를 보았다. 그래도 신발 갈아 신는 것 까지는 같이 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친구한테 가는게 좀 더 자연스럽겠지, 하는 순간의 계산. 아니, 사실은 신발도 같이 갈아신고, 계단도 같이 오르다가 1학년 반 앞에서 안녕 하고 손 흔들고 헤어지고 싶었지만.
"저기, 저기 내 친구! 나 그럼 먼저 갈게! 오빠 나중에 봐!"
손가락으로 아까 봐 두었던 친구를 가리키며 방방 뛰다가 성빈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달려나갔다. 그래도, 하교할 때 볼 수 있으니까.
하고 성빈은 손사래를 쳤다. ─당신에게 주어진 입지가, 당신과 성빈의 관계가 그저 우연의 소치일 뿐일지라도, 당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명백히 존재했다. 가령, 빼빼로 데이나 발렌타인 데이 때 의리로 주는 것은 받아도 진심으로 주는 것은 단 한 번도 승낙한 적이 없었다던가. 화이트데이 때 의리로 주는 기성품 캔디 몇 개가 든 봉지 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것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던가.
여기서 한 가지, 당신만이 알고 있는 아주 고무적인 점은, 성빈은 이따금 간식을 조금씩 즐기곤 했는데 유독 화이트데이 날은 빼놓지 않고 이런저런 맛있는 간식을 구해와서는 당신과 함께 니눠먹곤 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가 영 수상쩍고 잘 보이지 않았던 작년마저 화이트 데이 간식은 빼놓지 않았었지.
성빈에게 그것은- 그리고 당신은 소중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깨뜨리지 않고 세워놓은 계란처럼 아슬아슬하게 맞춰진 일상의 균형에 올려진 평형추들 중 하나. 별다른 흔들림 없이, 심장이 터질 듯한 기쁨도 없이, 그러나 척추에 박히는 고심거리도 없이, 평온하게... 그냥 그저 그 평온의 한 편에, 네가 지금껏 있어왔던 것처럼 있어주면 좋겠어. 하는 작고도 아주 잔인하기 그지없는 욕심이 그의 마음 속에 놓여 있었다.
"이제 그럴 일 별로 없을 거라니까."
하고 성진은 조금 안쓰러운 미소를 짓다가, 당신이 자기 친구에게 아는 체를 하며 나중에 보자고 인사하자 당신과 당신의 친구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내심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성빈주가 감당하기엔 조금 강한 주제라고 생각되긴 해, 응... ^q^ (하얗게 탈 성빈이와 성빈주 모습이 눈에 선함) 하지만 아마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아마 얼굴 하얘진 성빈이를 호랑이가 신나게 놀려먹는 구도가 되지 않을까(?) 아직 대답 안했다고 어쩔까 승낙할까 말까 하고 애태우려 하면 상황이 크게 악화되겠지만.
이따금 창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똑똑똑, 하고 세 번. 2층 창문인데 노크라니, 보통 같으면 고층의 창문을 두드리는 노파 괴담으로 이어질 법한 이야기였지만, 당신에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신의 방에 난 창문들 중 옆집으로 난 창문을 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코앞에 창문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의 옆집에 사는 소년의 방의 창문이다.
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느리지만 일정한 박자로 정갈하게 세 번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성빈이 노크를 하는 소리다. 사람마다 노크 소리가 조금씩 다르지만 성빈이 하는 노크는 정말 그다운 특징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이 가장 자주 들었을 노크 소리였기에 당신에게 좀 더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방과 후에 당신의 창문 너머로 노크소리를 흘릴 만한 사람이 성빈밖에 없기도 했지만.
"랑아!"
그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어보면, 양말 바람으로 테라스에 나와서는 당신의 창문까지 손을 뻗어 노크를 하느라 난간을 쥐고 팔을 쭈욱 뻗었던 성빈이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일 것이다. 한 손에는 크레페 케이크가 들어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성빈은 단 것이며 이런저런 간식을 좋아해 이따금 즐기곤 했는데, 그래서 이따금 맛있는 간식을 들고 이렇게 당신의 집 방문을 두드리는 날이 있었다. 그렇지만 특정한 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방문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오늘, 3월 14일이었다.
하교길은 친구들에게 떠밀려서 오느라 들키지 않았지만 가방 안에는 평범한 남고생이 선물할 법 한 꽃다발과 초콜릿, 그리고 장문의 연애편지가 있었다. 가방을 끌어 안은 체 침대에 앉은 장호랑. 학교에서 보았을 때는 열심히 쓴 흔적도 보이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대답은 나중에 해주겠다고 하고 집까지 와버렸는데. 이걸 정말 어쩌지....
똑똑똑 하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 하고 랑아! 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에야 "어?!" 하고 깜짝 놀라며 방 안 에서 움찔거리는 소녀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커튼이라고는 필여할 때나 치고 지금은 치지 않았으니까 훤하지.
"어, 어, 무슨일이야...?"
드르륵 하고 문을 열고 얼굴만 빼꼼 내민 체 성빈을 바라보았는데, 사실 무슨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날의 이벤트를 몸소 체험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숨겨야 하나, 아니면 상담을 받아봐야 하나.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고백을 받는다는게.... 고백받은 경험이 많은 성빈이라면 성숙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어찌되었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무스하게 넘어가기는 글렀다- 창문을 열었을 때 성빈의 얼굴에서 희미해지는 미소와, 미소가 사라져가는 자리를 채우는 걱정 가득한 눈빛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당신의 상황이었다. 하긴 당연하다. 당신과 알고 지내 온 세월이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금방 알아챌 수 있겠지. 참, 이럴 때 보면 당신이 붙들고 있는 지금의 이 입지는 양날의 검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무슨 일이냐니. 그냥, 간식 먹자고. 크레이프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인지하고 사전에 준비해서 당신을 방문하는 것이지만, 그는 항상 갑자기 언뜻 생각나서 들렀다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얇은 크레페가 겹겹이 쌓인 사이로 딸기맛을 첨가한 듯한 분홍색 크림이 듬뿍 들어 있는 게 보이는 그 크레이프 케이크는, 확실히 맛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달뜬 대답과 행동. 본인 딴에는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고 노력한 결과지만 잘 아는 사람의 눈에는 무슨 일이 있다고 뻔히 들여다 보일 것이다. 창문을 드르륵 열고 테이블이 테이블이 소리를 하며 침대 및에서 낮은 원형테이블을 꺼냈다. 이렇게 와서 같이 무엇을 먹는 일이 잦다 보니까 아예 하나 장만해둔 것을 몇년째 쓰고 있는 녀석이다. 성빈이가 매일 보는, 분홍색과 흰색이 테마인 방. 상어인형도 침대 위에 있었고 다를 것은 없었으나 단 한가지, 책상 앞 의자에 걸린 가방이 불룩했다.
"바쁘진 않은데..."
침대에 걸터앉고는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움직인다. 시선은 자꾸만 성빈의 눈치를 살피었다. 스스로도 거짓말 하는 것을 못 한다고, 잘 알고 있으니까 빠르게 털어 놓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말을 힘겹게 해보았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말 하기 힘든 이유는 또 뭐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했다고 해도 성빈의 태도가 유별나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익숙한 동작으로 자기네 테라스 한 편에 놓여져 있는 두꺼운 건널판자를 테라스 난간 사이에 걸치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질 뿐이다. 성빈이 호랑의 방으로 건너오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의 방에 양말바람의 발을 들여놓은 소년은 이내 난간에 걸쳐져 있던 건널판자를 익숙한 손길로 당겨 당신의 방 창문 테라스에 기대어놓고는,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을 탁 닫았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하고 성빈은 차분한 톤으로 말하면서, 당신이 꺼내어놓은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다가 자신이 가져온 크레이프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이것 하나를 다 먹고 나면 잠자리에 들기까지 딱 알맞게 더 뭔가 먹고 싶은 생각 없이 밤을 보낼 수 있을 만한 크기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도, 결국 당신이 털어놓을 것임을 안다.
"......?"
그러나 당신이 털어놓은 내용은 성빈에게도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잠깐이지만, 당신은 성빈의 얼굴에 스쳐가는 뜨악한 충격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눈 한번 깜빡할 순간 스쳐간 그 축소된 동공이 뒤흔들리는 모습은 성빈이 눈 한번 깜빡하자 사라졌지만. 조금은 낯익지 않은가? 그의 얼굴 위를 잠깐 깜빡이듯 스쳐지나간 그 충격이?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는 성빈의 표정은 다시 원래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연한걸.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생기지 않은 게 이상하지... 랑이는 누가 봐도 사랑스런 애니까.
"─아하하. 뭔가 했더니. 하긴, 호랑이같이 귀여운 애라면 오히려 여태껏 고백 한 번 못 받아본 게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했어?"
잔뜩 긴장하며 말을 꺼내 놓았고, 찰나였지만 충격적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긴장되는 마음이 애간장을 태워먹는다. 침을 꿀꺽 삼키고 큰 눈으로 성빈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그 짧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어릴 때 이빨을 뽑으면 마시는 마취가스를 잔뜩 마신 것 처럼 자신과는 멀리 멀리 떨어져서 현실감이 상실할 것 만 같은 기분마져 들었다.
"우- 으...! 그렇게 가벼운 일이야?"
아하하 하고 웃으며 대답해주는 성빈에게 억울하다는 눈빛을 잔뜩 보내다가 눈쌀을 찌푸리고는 침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하긴. 호랑에게야 특이한 일이지 성빈에게는 일상같은 일일 것 아닌가. 상어 인형을 끌어안고 눈동자만 빤히 성빈을 올려다 보았다.
한 순간의 격랑이 거짓말이라도 된 것처럼, 당신의 말에 대답하는 성빈의 태도는 명경지수처럼 말갰다. "그러니까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려고 했던 거야." 당신이 침대에 드러누워 버리자, 성빈은 당신 침대 머리맡에 팔짱을 낀 팔을 얹고는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머리와 가까운 위치에 말이다. 성빈의 초록색 눈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얹어둔 크레페 케이크는 그만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응... 그렇구나. 아직 대답은 못 해준 거지."
그리고, 잠깐 침묵이 뒤따른다. 마치 쉬는 시간 교실에서 다 함께 왁자하게 떠들다가 어느 순간, 별안간 단체로 모두가 합이라도 맞춘 듯이 조용해지는 별난 순간이 떠오르는 그런 별난 침묵이다. 그 잠깐의 침묵이 따른 뒤에, 성빈은 조심스레 질문을 꺼낸다.
"랑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하고, 짐짓 태연한 척. 그렇지만 이 문장에서 '짐짓 태연한 척' 이라고 드러내놓고 성빈의 심리를 서술한 이유는, 당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짐짓 태연한 척하는 것도, 당신에겐 어딘지 낯익은 태도가 아닌가?
침대에 바로 누운 것이 아니라 가로로 누운지라 발이 허공에 둥 떠있었고, 그런 발은 호랑이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동동거리며 움직였다.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저 사람은 내가 초조해 하는 이유가 뭔지 알기는 하고 그런 말을 하는걸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장호랑은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며 그 순간에 얼어붙었다가, 상어 인형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시선처리를 하기 힘들 때는 종종 보이는 버릇이다.
"응."
그리고 침묵. 차라리 말이야. 고백해준 그 남자애가 첫사랑도 잊을 만큼 멋진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그럭 저럭 괜찮았을 뿐이고 눈 앞에 보이는 사람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평범해서.
닿는 것이 있었고, 닿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당신의 초조함은 닿았건만, 당신을 초조하게 애태우도록 만드는 원인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상어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이빨들 사이로 빼짓이 내미는 당신의 금빛 눈이 살며시 상어 이빨 사이로 내밀어질 때에는 성빈은 자신의 눈을 말없이 당신에게 맞추어주려고 했다. 문장을 불확실하게 적은 이유는, 당신이 눈을 마주치면서 건넨 질문에 그의 말문이 턱 막혔기 때문이리라. 성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갈가리 찢어졌다가, 다시 애써 봉합한 삶이 문득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성빈은 느꼈다. -내 잘못이야.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시인했다. 전부터 시인해 오던 사실이었다. 당신을, 장호랑을... 장호랑의 존재를 자신의 균형잡힌 삶의 한 조각으로 멋대로 끌어당겨다가 같이 꿰메어놓았다는 것 말이다. 당신의 허락마저 맡지 않고. 항상 상냥하게 웃으면서 다독여주시는 어머니, 맛있는 아침 밥상, 아침 햇살을 맞으며 걸어가는 등교길, 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그리고... 당신. 하교길에 같이 걸어가는. 집 앞에서 헤어져 놓고는, 방에 들어가서는 메신저로 수다를 떨거나, 종종 아예 창문을 열어젖히고는 얼굴을 맞대고 같이 수다를 떨어주는 당신. 최성빈의 평범한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이기적인 짓이었다. 이렇게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성빈은 생각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행복 또한, 스스로가 준비됐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바뀔 수 있는 법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애써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누가 또 고백을 하고, 호랑이 그걸 받아주게 된다면, 지금의 성빈은 붕 뜬 채로 가식적인 축하를 하고, 옅어지는 관계를 파탄내지 않고자 스스로 거리를 두어야 할 테니까. 당신은 진작에 그것을 깨달아 알고 받아들이고 속으로 앓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 소년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 대답을 하기까지는 이삼 초 정도의 침묵이 더 필요했다. 소년은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하고 소리지르려 했다.
"랑이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하고, 승낙하고 싶다면 승낙하고. 어느 쪽이든 도와줄게."
그러나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은 너무도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말이었다. 안개가 옅게 낀 것처럼 흐린 미소와 함께. 준비되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거만하고 오만한 만용인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할 참인가?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당연한 일" 이라고 한 주제에?
뭘 기대한건지. 약간 떠본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상대의 긴 침묵도, 고백 받았다고 말했을 때의 충격도, 그냥 상정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걸까.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성빈은 상어에게 가린 호랑의 표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장호랑은 고백을 거절할 생각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는 일은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며, 전혀 하고싶지 않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뺏기는 일이니까.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잃어버리니까. 진전하지 못 하는 상태여도 좋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쌓아온 관계를 무너트리기 싫다는게,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보다 컸으니까.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확실한 불행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
"누구 사귄다거나, 그런거 별로 관심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거절할건데 어떻게 하는게 좋으려나."
침착해진, 정확히 표현하자면 생각에 압도되어서 감정이 나오지 않는 상태로 돌아 누워서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도와줄거야. 분명 잘 알거야.
성빈은 괴어놓았던 턱을 들고는, 침대에 엎어놓다시피 기대어놓았던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벽 쪽으로 끌어서는 그리고는 다리를 쭉 펴곤 벽에 기대어앉았다. 저렇게 다리를 쭉 펴고 양 손으로는 땅을 짚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테디베어가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마침 곱슬곱슬 갈색 털인 것도 참 닮았다.
성빈은 호랑의 얼굴에서 상어를 치워버릴 만큼 모질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버린 호랑을 위해 다른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상대를 위해 눈감아주는 버릇이 상대를 보는 눈을 멀게 하듯이, 놓치고 싶지 않은데도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쌓아온 관계를 무너뜨리기 싫다는 게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보다 컸으니까. 일상의 조각 하나가 이빨 흔들리듯 뒤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것이- 그 충격이 겨우 일상의 조각 하나가 흔들리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큰 진동이었다는 것을 눈먼 소년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것이 이렇게 흔들린다면 너무도 쉽게 또다른 조각을 찾아 대체해버릴 수 있겠지만, 당신만큼은, 자신의 삶에 위치한 장호랑이라는 소녀만큼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이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던 자신의 눈가가 사르르 풀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은 알아챘을까?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걔를 위해서든, 너를 위해서든."
당연히 잘 안다. 마음에 없는 고백을 밀쳐내는 것은 성빈에게는 손쉬운 일이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자신의 삶에 얹혀 아슬아슬하게 잡아놓은 밸런스를 흩뜨리려는 외부 요인을 비정하게 밀쳐내 버리는 것은 그에게 꽤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걔한테 받은 것들... 온전히 보관해뒀다가,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 돌려줘. 미안하다는 말 해 주고."
자신도 생각했었던 거절 방법이었지만 역시 남의 입으로 듣는 감회는 달랐다.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이기도 하고, 진짜 싫은 일이기도 해서 내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낸 다음 다시 옆으로 돌아 누워서 얼굴을 올려다 보는 일 없이 성빈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길고 곧아서 예쁜 손가락이라고 언제나 생각한다. 손톱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답레 쓰면서 푸는 TMI) 성빈이, 삼남 이녀 중 막내라면서요. 위로 형이 둘 누나가 둘이라는 소린데. 형이랑 누나들은요? 맏형(11살 터울)은 유부남. 가정을 꾸려 독립했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일그룹 사옥에서 출퇴근하고 있으며 아버지보다도 집에 얼굴 비추는 일이 적은 레어한 존재. 큰누나(9살 터울)는 국립 발레단 소속 발레리나. 반쯤 독립하다시피 했고,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고... 오, 이거 성빈이네 큰누나 결혼식 일상 돌릴 수 있겠다. 이걸 매직짱구가 작은누나(6살 터울)는 경영학부 박사과정 밟는 중. 신나는 대학원 생활 덕분에 맏형급으로 집에 얼굴 잘 안 비춤... 아니 못 비춤. 작은형(3살 터울)은 현재 미대 재학 중. 기숙사를 얻어서 들어갔는데 성빈이가 주말에 호랑이네 집으로 슬금슬금 놀러오는 거랑 비슷한 이유로 주말에는 얼굴을 잘 안 비추고, 주중에 종종 집에 다녀감.
분명 은유인데 직유 수준으로 무섭고 섬뜩하게 날아와 꽂히는 비유다. 성빈은 이따금 정말 태연한 표정으로 소름돋는 상상을 유발하는 말을 던지곤 했다. 당신의 칭얼거림 같은 손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이 만지작댈 수 있도록 손을 내어준 것은, 당근과 채찍에서 당근 부분인 걸까? -아니, 그는 당신이 그의 손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것을 기꺼이 내주곤 했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당신이 손에 어떤 짓을 하던지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그의 손은 퍽 컸다. 그리고 따스했다. 당신의 얼굴 절반 정도는 쉽게 파묻힐 수 있을 만큼.
"힘내."
이 정도 코멘트면 좋으려나. 하고 성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녀석이 몇 반의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일에 대비해 주목해둬서 나쁠 것 없겠지. 벽에 기대어앉은 채로, 성빈은 발등으로 테이블 다리를 걸어 자기 쪽으로 지익 끌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케이크 포장 뚜껑을 벗긴 뒤, 동봉돼 있던 플라스틱 포크를 집어들고 크레페 케이크를 한 조각, 한입 크기로 잘라내서는 포크에 꿰어 들어올린다.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를 냈다. 치과 치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지.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 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확실히 덮어두고 없던 셈 치기에는 확실하게 병증이 깊어질 사건이었다. 사람의 고통이 깊어가는걸 본인이 싫다는 이유 만으로 좌시하기에는 너무나 상냥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니, 당장 내일 서투른 조치의 흔적이 보일 것이다.
"오빠..."
사람을 그렇게 까지 아이 취급 하는 거냐는, 싫은 눈빛을 보냈지만 크레페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 보였다. 아주 아주 어릴 적에는 거리낌 없이 냠냠 잘 받아먹었다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물론 상대에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을 것이고 아이 취급이나 받고 있을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관계의 특수성에서 오는, 유사연애적 행동을 마다할 만큼 배부른 사람은 아니였다.
랑아. 나 말야, 지금 안심하고 있어.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고 몸서리치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성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런 천박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심지어 그 사실을 기뻐해버리고 만 자기 자신에게 새삼 깊은 혐오를 느꼈다. 안심해버렸다. 그만 안심해버렸다. 나의 삶에 꿰매어져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조각들 중 하나인 당신이 손 끝에서 영영 떠나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아니구나.
그거면 됐어.
그러나 성빈의 마음에는 덩어리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 무게 자체로는 성빈의 삶의 균형을 깨뜨리기에는 충분치 않은 정도의 덩어리였으나, 그것은 폭약 덩어리였다. 언제 터질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고 터지는 것은 확실히 예정된 불길한 폭약.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거리를, 딱 지구와 달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같은 궤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는 예정된 운명이었다... 당신은 언젠가 떠난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성빈은 포크로 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조각 크게 잘라 당신에게 내밀었다.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이는 하데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 그만해, 멍청아... 당신에게 포크를 건네는 성빈의 귀가 빨개졌다. 공연히 이상한 심술이 났다. 성빈은 쿡, 하고 겹겹이 얇은 크레페 사이로 배어나온 분홍색 크림을 당신의 뺨에 콕 찍어 묻혔다. 그러고서야 그는 호랑의 입에 그것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성빈이 겪는 고난은 몰라주고 장호랑은 온통 달큰한 상상 뿐이었다. 그야 이렇게 포크로 떠서 먹여주고 받아먹는건 꽤나 연인스러웠으니까.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틀림없이 사귀는 사이로 보였을 테고. 그러면 결국 사귀는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찼어서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볼에 생크림을 쿡 하고 묻히고 난 다음에야 크레페를 입에 넣어주기 전 까지. 당황스러웠는데 그것을 토로할 입이 없어서, 천천히 크레페를 씹음과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고 성빈을 올려다 보았다.
얼굴에 위장삼아 띄워놨던 자상한 미소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흐뭇한 웃음으로 변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케이크를 우물거리면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성질은 나는데 입에는 맛있는 게 들어와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한 짜증이 한가득 담겨 있는 토끼 같은 얼굴을 보자면 누구라도 얼굴에 엄빠미소를 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맛있어?"
성빈은 얄궂게 물어보며, 당신의 뺨으로 손을 뻗어서는 엄지손가락으로 호랑의 뺨에 묻은 크림을 슥 닦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기 입으로 아무렇지 않게 가져갔다. 그러다 이내 크림 사이로 옅게 올라오는 화장품 맛에 눈을 깜빡였지만... 화장품 맛에도 방금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에 대한 자각은 딱히 없어 보였다.
순간적인 사건에 장호랑의 얼굴에 전체적인 핏기가 확 돌았다. 갈 곳을 잃은 손들은 잠시나마 허공에서 무언가를 주무르듯이 작게 꼼지락 거렸고, 말 대신 헉 하는 숨 소리만 나왔었다. 꿀꺽 하고 크레페를 급하게 삼키고는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상어 인형을 끌어안으며 침대에 몸을 던져버린다.
─그렇지만 성빈은 자신의 행동에 어떤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며 괴성을 지르고 침대에 몸을 던져버린 당신의 모습을 보고도 성빈은 뭐가 문제인지 알아채는 게 아니라, 포크를 내려놓고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것뿐이었으니까.
"저기, 괜찮아? 혀라도 씹었어? 구강 연고 가져올까?"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이던가, 당신과 성빈이 어울리기 시작한 시절은 꽤 오래되었더랬다. 성빈은 당신에게 별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기대고, 손이나 어깨에 뺨을 기댄다던가, 무릎베개를 해준다던가 하는... 일종의 물리적 거리감이랄까, 그런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물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남들의 눈이 있는 학교에서는 그런 행동을 삼가게 되었지만(그럼에도 성빈은 경계심이 좀 떨어지는 것 같긴 했다), 어차피 성빈과 정말 제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학교가 파하고 나서 방과 후에 성빈의 방에 놀러가거나 지금처럼 그가 당신의 방에 놀러올 때가 아니던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상어인형을 끌어안고는 다른 손으로 이불을 잔뜩 뒤집어 써서 얼굴 정도만 빼꼼 내밀었다. 이런 상냥함이 원망스럽다. 싫지 않아서 더 원망스럽다. 오빠는 이런 마음 없어서 편하고 좋겠네 아아- 하는 생각을 하며 성빈의 옆으로 기어가서는 찰싹 달라붙었다.
"맛있으니까 더 먹을래. 아—"
이불에 가려져서 얼굴이 붉어진건 안 보일 것이라 믿고 조금은 뻔뻔하게 요구해보기로 했다. 손도 이불 안에 있으니까 포크로 찍어 먹지도 못 한다네요.
애석한 일이지만, 당신이 케이크를 받아먹기 위해 이불 사이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었을 때도 당신의 양 뺨은 여전히 빨갰다. 온통 빨개진 얼굴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포크로 케이크를 한 조각 크게 잘라 당신에게 내미는 것이다. 화이트데이 간식. 오늘이 3월 14일이라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달콤한 울림이지 않은가. 당신이 그 케이크를 받아먹는다면,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빈은 자기 손으로 당신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쥐려 할 것이다. 커다랗고 서늘한 손바닥이, 열에 달뜬 당신의 뺨을 폭, 하고.
"저기, 랑아."
그렇게 말을 꺼내놓고, 성빈은 아차 싶었다. 앞으로도 너랑 계속 이런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이기적인 소리를. 내 곁에 계속 지금처럼 남아달라는 이기적인 소리를. 그래서, 소년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돌리기를 택했다.
"그렇네. 밀크티가 있으면 좋을 뻔했네. 큰누나가 홍차를 좋아하니까, 큰누나한테 물어봐야지."
그러고 보면 성빈이네 집은 다섯 남매가 시끌벅적한 집이었다. 성빈이 막내라고 했던가,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이 있다고 했었지. -성빈이네 큰누나는 호랑이도 두어 번밖에 만난 기억이 없지만, 몇 차례 경험으로는 상당히 사치스런 취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빈이 뭔가 비싼 것을 하고 있거나 할 때 그에게 물어보면 큰누나에게서 조언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으니가. 밀크티를 언급했다면, 아마 다음번에 성빈의 집에 놀러갈 때나 그가 놀러올 때는 한 통에 가격이 여섯 자리 숫자를 넘나드는, 영국 왕실의 로얄 워런티가 찍혀 있는 차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건 나중 일이다. 비싸건, 비싸지 않건, 특이하건 그렇지 않건... 지금 당신과의 이 일상을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성빈은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빈은 당신의 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얼굴을 떼거나 손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뺨을 감싸쥔 채로 다음 케익 조각을 내밀어줄 것이다. 손을 떼기엔 너무도 따뜻했다.
차를 직접 끓여마시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냥 냄비에 홍찻잎과 설탕과 우유를 다 때려넣고 몽글몽글 끓여서 거름망에 거르는 식의 밀크티만 먹었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 먹기에는 아까운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냠."
그러면 이쪽에서도 성빈의 손을 놓지 않은 체로 다음 케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입 안에서 부숴지는 생크림과 크레이프가 달콤했고, 손 안에서 두 사람의 체온의 평균값을 향해 변온하는 살결도 기분이 좋았고, 또 이렇게 옆에 찰싹 붙어도 아무도 뭐라고 말 안 하는 지금이 좋았다.
"아니, 아마 하나 사서 보내줄걸...?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며칠 뒤에 상견례 하러 가신다던데."
성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애초에 밀크티는 뜨거운 차를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만들려고 찬 우유를 부어먹기 시작한 게 그 원류이므로, 어떻게 하든 입맛대로 만들어먹으면 그만인 물건이니까 이렇게 먹건 저렇게 먹건 별 상관없을 것이다. 그걸 아깝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맛있게 즐기면 그만이니까.
입을 오물거리는 당신과, 말은 딱히 하지 않지만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이 순간. 성빈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둘 다 앓아누우면 되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싱크로율 높아서 즐겁네! 아니면 저번에 '먼저 일어나서 깨우러 와봐~' 를 진지하게 듣고 밤을 샌 다음 진짜로 먼저 깨우러 왔는데 결국 깨우지는 못 하고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상황 닽은것도 생각했는데 이러면 자느라 못 돌리니깐
아니, 어느 한 쪽은 멀쩡해야 멀쩡한 쪽이 간호를 해주지. 그리고 클리셰대로라면 간병받은 쪽이 다음날 털고 일어났더니 간병한 쪽이 옮아서 앓아눕는 게 또...(장난) 호랑이가 침대에 머리 기대고 잠들면 아마 다음 순간에는 성빈이 품 안에 안겨 있는 걸 깨달을 텐데 괜찮으시겠쎄여^q^?
장호랑이 몸이 약하냐고 물어보면 어느 층위에서의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냐고 역으로 질문이 들어가야 비로소 제대로된 답변을 할 수 있았다. 근육이 적어서 낼 수 있는 힘이 적고 약한건 맞지. 하지만 잔병치레에 골골거리거나 체력이 특출나게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오늘같은 날은 더 지독하게 다가왔다.
"머리 아파....."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부를 사람이라고는 성빈이 밖에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이빨을 달달 떨어가며 창문 쪽으로 가다가 의자를 잡고 멈춰선다. 찬바람 쐬면 절대 안 좋겠지. 흐릿해진 의식이지만 그래도 상황을 판단할 여력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장호랑은 다시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가서 몸을 뉘이고 핸드폰을 꺼내 성빈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이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까지, 메신저 창에 띄워진 당신의 메시지 옆에 떠 있는 1이라는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변은 당신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그 순간에 찾아왔다. 아직 그는 당신의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을 텐데, 현관 패드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삑삑삑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것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속도로 봐서, 비밀번호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과연 몇 자리인가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삐리릭, 하고 현관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난다. 당신의 가족 중 한 명이 돌아온 걸까?
발소리는 아래층에서 잠깐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면, 이건 전자레인지 버튼을 누르는 소리다. 그리고 전자레인지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소리다.
그리고 발소리는 툭툭툭툭툭, 하고, 최대한 조용하게 애쓰면서, 하지만 최대한 급히 움직이면서 계단을 탁탁탁 달려올라온다. 그리고 똑똑똑, 하고 들려온 그것은, 보통 창문가에서 들리는 그 노크소리였다.
어떻게 벌써?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보면 아직 메신저에서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지도 않았을 텐데?
메신저의 1이 사라지지를 않아서 갑자기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프기도 아픈데 좋아하는 사람은 문자도 안 읽는다니! 이불을 코 끝까지 당겨오고는 투덜거렸는데, 그래도 뭔가 하는 일이 있어서 바쁘겠거니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성빈이는 자연스레 호랑이네 집으로 들어와 죽을 준비한 체로 평소와는 다른 곳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힘 없는 목소리로 출입 허가령을 내린 다음에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상체를 들었다.
"와아, 오빠다."
제 방으로 들어온 성빈에게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어 흔드는데 영 맥아리가 없는 것이 확실히 아파보였겠다. 잠깐이나마 자다 깬 상태임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고, 성빈이가 빠르게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애석히 여겨주시길.
들어오세요, 하는 입객령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역시나 성빈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인 걸까 코트 차림을 하고 있는 성빈에게는 아직 차가운 바깥바람이 묻어 있었다. 익숙한 손길로 코트와 장갑을 휙 벗어던지고 나면, 셔츠에 가디건 차림이 되는 소년. 코를 킁킁대 보면 서늘한 초봄 바람이 서린 시내의 냄새 사이로, 비가 그친 직후 정원을 거닐면 날 것 같은 흐릿한 풀꽃 향기가 났다. 어딘가로 차려입고 나갈 때 그가 즐겨 뿌리는 향수에서 나는 냄새였다.
전말은 이랬다. 성빈은 오늘 오전 자신의 친구 A의 생일에 줄 선물을 고르고자, A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시내에 나가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조금 전에 당신의 어머니가 성빈에게 '호랑이가 아침에 보니 아프더라, 나는 부득이한 일정 때문에 곤란하니 혹시 시간 되면 호랑이가 무사한지 한 번 봐달라' 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 메시지를 받은 즉시 성빈은 친구들에게 전화해 일정을 취소한 뒤에 택시를 잡아타고는 부리나케 편의점과 약국을 들러서는 집까지 있는 대로 달려온 것이다. 택시 문을 닫고 내리는 순간, 진동에 폰을 꺼내보니 당신에게서 온 메시지가 잠금화면 위에 떠 있었고.
"랑아."
하고 부르는데 눈물이 핑 돈다. 누가 보면 당신이 중병으로 응급실에라도 입원한 줄 알겠다. 그러나 소년은 자기 눈가에 글썽, 하고 눈물이 맺힌 것도 모르고 침대에 누워 있는 당신에게로 다가와서 당신의 손을 꼭 잡아준다. 장갑의 가죽 안감 냄새가 흐릿하게 배인 손이, 차다. 성빈은 그 성그런 손 하나는 당신 손에 쥐어주고, 다른 하나는 당신 이마에 얹어본다. 차갑다. 시원하다. 서늘하다.
성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다. 해열패드를 붙여주고, 우선 사온 죽부터 먹여준 다음에, 약이랑 이온음료를 먹여주고... 해야 할 일은 이것저것 떠오르지만, 양 손이 모두 당신에게 잡혀 있어서야 어쩔 수 없다. 특히 당신이 히히히 하고 웃으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장난감마냥 붙들고 있다면 더더욱. 그가 당신의 이마에 얹혀 있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떼도록 한 것은 당신의 질문이었다. "어?" 하고, 그제서야 소년은 자기 눈가로 손가락을 가져가 보는 것이다. 그리곤 거기 맺혀 있던 물기를 당황하며 황급히 닦아낸다.
"아니, 아니야... 울기는 무슨. 그냥 급하게 오다 보니까 눈에 먼지가 들어갔겠지."
이마에 덮어놓은 손을 뗀 김에, 성빈은 반대쪽 손은 당신이 계속 만지작거리게 두고는 한 손으로 약국 봉지를 뒤적였다. 열이 날 때 이마에 붙이는 패드였다. 열에 달뜬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참지 못하고 나직이 질문을 건넸다.
질문에 어? 하고 손을 떼어가는 것을 보면 성빈이도 의도하지 않게 눈물이 흘렀나보다. 빠르게 닦아내는 모습에 의문을 품었으나 급하게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지금은 그걸 분석할 정신이 없었고, 자신을 신경써서 빨리 왔다는 부분이 기뻤으니까.
"어? 음.. 쪼끔?"
많이 아프냐는 물음에 찬찬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본 다음 대답을 했다. 성빈이를 신경쓰느라 몰랐지만 몸의 근육들이 시큰거렸고, 머리는 띵 하고 어질어질 지끈거렸고, 으슬으슬 추위도 거기 있었다.
"추워."
이불을 벗어난 상체의 추위가 아프냐는 물음 이후에야 자각이 되서, 작게 웃으며 뒤로 누웠다. 성빈의 한 쪽 팔을 상어인형처럼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참고로 진짜 상어인형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냐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상냥한 걱정을 담은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깔린다. 당신은 마침 침대에 누우려고 상반신의 무게균형을 뒤로 기울이려고 했으나, 성빈이 한 발 더 빨랐다. "다시 눕자." 하는 소리가 당신의 귓전에 닿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성빈의 팔뚝 정도가 아니라 상반신이 한꺼번에 당신의 품에 안겨들어 있었다. 아니, 당신이 성빈에게 안긴 꼴이다.
바깥의 아직 찬 봄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야 했던 손끝과는 달리, 성빈의 몸뚱이에는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 움직이면서 달아오른 체온이 고스란히, 두터운 초봄 외출복 아래로 느껴지는 성빈의 탄탄한 상반신에 따뜻하고 포근하게 남아 있었다. 성빈은 당신을 온 상반신으로 폭 끌어안은 채로 당신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전자레인지가 조리를 끝냈다는 삑삑거리는 알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팔 정도를 끌어안고 만족할 요량은 생각치도 못 한 기습에 새하얗게 지워지고야 말았다. 몸 전체를 끌어안겨지자 어지럽던 머리에 다시 핑 하고 혈류가 돌며 몇 배는 어지러운 기분이다. 병기운을 변명삼아 더듬 더듬 이불 아래로 팔을 뻗어 성빈의 몸을 두른 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심장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기 위해서인듯 입도 눈도 세게 꼭 감았다.
"안 돼. 여기 있어."
힘을 주어 성빈을 더 단단히 끌어 안았다. 그래봐야 원래 쪼그맣고 지금은 몸도 안 좋은 상황이라 성빈이가 뿌리친다면 맥 없이 풀려나겠지만.
당신의 응석 한가득 담긴 팔은, 성빈이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떨어져나가고 말 것이다. 물리법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이론상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모를 한 가지 사실은, 당신은 성빈에게 있어 어떤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의 손길에는 얼마 안 되는 물리적인 제재력보다 훨씬 강한 결속력을 지닌 욕심이 담겨 있었고, 성빈이 함부로 당신의 팔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었다. 옆구리에 감긴 당신의 팔에 담긴 온기에서, 품안에 놓인 당신의 몸에서 전해지는 맥박에서 느낄 수 있는.
성빈은 당신의 속박을 풀기를 포기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어줄게..."
당신을 품 안에 안은 채로,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살살 다독이며 쓰다듬기 시작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좀더 어릴 적, 서로가 서로에 대한 '거리감' 이라던가 '체통' 이라던가 '사랑' 같은 것에 좀더 둔감하던 옛날, 성빈은 종종 이런 식으로 당신을 꼭 끌어안아서 재우곤 했다. 훨씬 더 솔직하면서도 훨씬 더 순진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었던 그때처럼 그는 당신을 보듬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그대로 해주는 탓에 호랑은 꿈을 꾸고 있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생각을 어디 멀리로 전개할 힘이 없는 탓에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해석하거나, 행동의 맥락을 짚을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에서 머무르고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랑이는 조금 더 성빈의 품 안에서 부시럭 대다가 작은 말을 남기고는 얼마 못 가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맨날 아팠으면 좋겠다."
성빈의 몸에 두른 팔에는 힘이 스르륵 빠졌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베개 위로 굴렀다. 작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성빈에게 들려오고, 이불 아래로 조금씩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잠에 들어서, 이제 어디 가더라도 잡지 못 한다.
당신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자, 성빈은 당신의 머리와 팔이 베개와 침대 위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조심스레 바로잡아 준 다음에 이불을 푹 덮어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에 얹어놓았던 손의 냉기가 가시기 전에, 아까 봉지에서 꺼내놓았던 해열용 쿨패드를 뜯어서 당신의 이마에 조심스레 착 붙였다. 뇌는 열에 약하니, 몸에서 열이 날 때 머리의 열을 잡아주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되니까.
당신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빈은 몸을 일으켰다.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향수 냄새가 옅게 묻어 있는 자신의 외투를 당신의 이불 위에 겹쳐서 덮어주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그는 당신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움직였다. 1층의 전자레인지까지 내려갔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죽그릇을 쟁반에 받쳐들고 스프 떠먹는 숟가락과 함께 다시 당신의 방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당신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 잘 자고 있으려나? 일단 가져다놓고. 깨면 먹여야지.
그런 성빈이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장호랑은 성빈이 나갔을 때와 다른 것 하나 없이 푹 자고 있었다. 봄의 조용한 공기와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코트. 성빈이 문을 열 때에 살짝 실수하여 평소처럼 소리를 냈다고 해도 뒤척임 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고 있는 장호랑은 별 달리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편안하게 푹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이렇게 병문안을 와준 적이 있던가. 훨씬 더 철 없을 적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눈이 떠졌고 약속한 대로 성빈이는 어디 간 적이 없었다. 단지, 뿅 하고 눈에 안 보이던 죽을 들고 왔을 뿐이지. 아니면 들고 오는 걸 못 봤던가.
"죽 진짜 사왔네... 고마워."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음량이 작고 목소리가 탁하다는 점이 달랐다. 흠칫, 내 놓고도 놀랐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당신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성빈은 이내 그냥 당신의 침대 옆에 숫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먹을 사람이 잠들어버렸으니,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성빈은 죽그릇의 뚜껑을 닫아놓았다. 어차피 전자레인지 안에서 절절 끓을 만큼 뜨거워져 있던 죽이니 오히려 한동안 놔두는 게 더 좋을 성싶다. 성빈은 물컵과 물병, 그리고 죽이 놓인 쟁반을 당신의 침대 머리맡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당신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면 늘 하듯이, 그는 당신 침대의 머리맡 옆에 팔짱낀 팔을 올려놓고는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흡사 바닥에서 두 손끝이랑 머리만 침대에 얹어두고 주인을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개처럼.
그런 채로, 성빈은 곤히 잠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성빈의 머리를 스쳤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깨어 있는 당신에게 절대로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입 속으로 조용히 되뇌어보는 것. 그뿐이다.
저기, 랑아,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내 일상의 한 조각이라기엔 네가 내 마음 속에 너무 크게 박혀 있는 것 같아.
당연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손을 뻗어 잠든 당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져보면서, 차차 백일몽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잠깐의 낮잠을 자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당신의 머리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머리를 얹어놓은 채로 꾸벅꾸벅 잠들어 있는 성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성빈은 이내 눈을 살며시 떴다. 초점이 흐린 녹색 눈동자가 잠에 옅게 취해서는 당신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성빈은, 천진난만하게 헤실헤실 웃는다. 그리곤 잠에 취한 눈을 부비며 당신의 침대에 얹어놓았던 상반신을 일으켜서는 쟁반에서 물병을 집어들고는 물을 한 컵 따라준다.
오빠 피곤했구나 하고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고, 성빈이 따라준 물을 받아 마셨다. 열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걸까, 아니면 따라주는 사람이 다른걸까. 물이 아주 달았다. 물을 마시는 와중에 졸려하는 성빈의 머리를 보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말 걸. 눈 뜨고 그냥 손을 뻗어서 천천히 머리카락이나 만져볼걸. 그래도 되는 날이어서 괜히 아쉬웠다.
좋음과 좋아함. 같은 단어에서 피어난 다른 말.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퍽 다른 그 두 가지 단어가 한 사람에게 겹쳐 있었다. 당신이 머리카락을 마음껏 매만지게 둔 채로, 성빈은 가만히- 자신의 그 두 가지 단어를 모두 가져간 한 햇살같은 색의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 당신에게 눈을 두다가, 성빈은 죽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뚜껑을 열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잠이 조금 길어졌으면 죽을 다시 데워야 했을 것이로되, 그릇 표면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죽은 그럭저럭 적당히 먹을 만한 온도까지만 식은 것 같다. 전복죽을 사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어쩌면, 그는 정말로 전복죽을 사왔다. -하긴, 함께 지내온 세월이 있으니 입맛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죽을 저으며 첫 숟가락을 뜨려던 성빈은 당신이 건넨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없나 보다.
"아침을 조금 늦게 먹었거든. 괜찮아."
하며 성빈은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리곤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 너만 먹는 게 마음에 걸리면, 얼른 나아서 내일 저녁은 같이 먹자. 그래줄 거지?"
손가락을 꼬물락 거리다가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에 응! 하고 밝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 잡은 약속이니까 어디 잊어버리지 않도록 적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에 일정을 잡았다
[성빈오빠랑저녁먹기]
그게 성빈이 문자기록이었다는 점이 약간 흠이었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있지는 않았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어지럽고 추웠으니까. 이불을 걷고 상체가 공기와 닿자 갑자기 오한이 들어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쓰고 먹기는 불편하니까, 그리고 아파서 정신 없으니까 라는 핑계로
흡사 손아랫동생을 얼러주는 친오빠 같은 태도다. 막내로 태어나 꽤 응석쟁이로 자랐을 성빈이 제법 의젓하고 말쑥한 모습으로 큰 데에는 당신의 존재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는 반듯이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 당신을 가만 바라보다가, 죽그릇을 내려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쿠션 두어 개를 찾아내서는 당신의 베개 아래 끼워넣어 당신의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올라오도록 받쳤다.
아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으면 성빈은 아프지 않아도 이렇게 해줄 테니 굳이 아플 필요 없다고 펄쩍 뛰지 않을까. ─성빈은 당신을 뭐라고 딱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했다. 소꿉친구, 친한 동생, 사랑스러운 아이, 내게 있어 당연하고 소중한... 그러니까, 친분이라거나 친근 같은 말로는 성빈에게 있어서의 당신을 쉽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단어를 가져다대자면 소중일까.
그렇지만 그렇게 소중한 당신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초록색 눈동자 뒤편에서 뭉클뭉클 일렁이는 까만 그림자를, 성빈은 당신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조용히 씹어삼켰다.
"미안하다니."
대신에 그는, 죽그릇 뚜껑을 덮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랑아.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심결에 그렇게 말을 해버리고는 성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흐응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다행인 점은 이미 열 때문에 얼굴이 빨개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일이 없다는 점일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길에 문득 문득 닿는 피부가 조금 전 보다 미세하게 더울 수는 있겠다.
"...이제 약 먹고 잘래... 졸리다. "
살짝 웃고는 도주를 선택했다. 잔다고 하면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 방금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성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을 좀더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었을 뿐이다. 그 손은 이내 거두어졌고, 성빈은 아까 당신의 방 구석에 놓아두었던 약국 봉투에서 약갑 하나를 꺼내 알약울 한 알 톡 뜯어서는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당신이 그것을 받아삼키면, 그는 곧 이온음료 페트병의 뚜껑을 뜯어서 당신의 입가에 가져다줄 것이다.
"응, 이거 먹고... 푹 자. 자고 일어나면 한결 가뜬해져 있을 거야."
성빈은 당신을 쫓아오거나 붙들려 들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으니까. 더 욕심낼 이유도 없고, 욕심낼 수도 없다. 욕심내기엔, 두렵기도 하고.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된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그러질까 봐. 성빈은 다시 당신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어 주다가, 다시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팔짱을 끼곤 상반신을 기댔다.
평소에도 낑낑거려야 딸 수 있는 음료수 뚜껑이기에 이런 세세한 배려가 고마웠다. 장호랑은 약을 받아 먹고, 이온음료를 쭉 들이킨 다음 후 하고 막힌 숨을 뱉었다.
"... 여기 있게?"
잠을 자기 위해 머리 밑에 베개들도 빼고 무거운 머리를 뉘이니 머리맡에 성빈이가 기대어 누워 있었다. 불편할 텐데. 빤히 그의 뒷통수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약기운 때문인지 잠이 슬슬 오기 시작해서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마지막 욕심을 내지 못 하고 잠들어 버린다. 잘 때 까지만 손 잡아달라고 할 걸. 아니면 가기 전 까지만. 아니면 일어날 때 까지만....
대답하는 데에는 잠깐의 공백이 필요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은 건 날 말하는 걸까, 널 말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네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같이 있고 싶었다. 네가 그러기를 바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응..." 하고, 당신의 손길이 머리카락에 닿을 때 소년은 긍정의 추임새인지 잠꼬대로 하는 신음소리인지 모를 희미한 소리를 내고는 눈을 꾹 감았다.
피곤하다... 어째서인지 성빈은 그렇게 느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친 것도 아닌데, 왜인지 오늘 등굣길에 옆집의 소꿉친구 동생을 배웅해 주고 나서부터 왜인지 모를 무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 되어 필기를 하는데, 하얀 것은 배경이고 까만 것은 글자인데 자기가 지금 뭘 읽고 받아쓰고 풀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떠드는 것도 어째서인지 건성이 되었고. 몇몇 친구들이 성빈을 보면서 쟤 봄 타나 보다, 하고 웃는 것도 어 그래, 하는 초점없는 대답으로 흘리고 말았다.
왜인지 모를 탈력감은 점심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도 가시지 않았다. 밤새 협곡에서 청춘을 불태우고 1교시부터 내내 잠들어 있던 바보도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면 본능적으로 깨어나 급식을 누구보다 빨리 받아올 준비를 할 만큼, 점심시간이라는 것은 뭇 학생의 비타민제라 불리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성빈은 힘이 없었다.
4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반장의 구령에 따라 경례를 마치자마자 성급한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나간다. 성빈은 원래같았으면 그 대열의 상대적으로 한적한 후미에 마음 편하게 따라붙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핸드폰을 꺼내서는
성빈이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은 당신의 대답이 돌아온 직후였다. 성빈은 당신의 응답 두 마디가 찍힌 메신저 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를 어쩌지. 성빈은 잠깐 침묵했다. 그냥 불러 봤어, 따위의 말을 할 성격은 못 됐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왠지 쓸쓸해서 불러 봤어, 라는 따위의 말은 더더욱 할 수 없다.
바보같네.
성빈은 문득 자기를 돌아보고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핸드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면 장호랑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매점 까지 내려가는 것이었다. 성빈이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에 대해서 별 다른 관심이 없던 것과 달리, 이쪽의 인물은 굉장히 잘 휘둘려서 친구들이 둘의 관계를 물으면 괜시리 아무 사이 아니라고 떠벌리고 다닐 수 밖에는 없었다.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매점 앞에 먼저 도착한 다음에는 무얼 먹을지 생각하기 보다 중앙 계단 윗쪽에서 내려올 성빈이를 기다리며 발꿈치를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너무 빨리 왔나?
하고 당신을 부르는 소리는, 중앙 계단이 아니라 매점 문 쪽에서 났다. 그는 당신보다 먼저 매점에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매점 안에서 당신을, 당신은 매점 밖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기에 자칫하면 둘이 엇갈려 시간을 약간 낭비할 수도 있었지만, 열려 있는 매점 문 사이로 성빈이 당신을 먼저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랑아, 하고 당신을 부를 때, 성빈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그렇게 시원스레 걷히는데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이, 소년에게는...
>>315 >>323 (눈앞이 깜깜해짐) 선생님 너무 강력합니다. 그래서 아주 좋아요 호랑이가 잘 돌려말하느냐, 직구로 꽂아버리느냐에 따라 성빈이 반응이 엄청 갈리긴 하겠지만 호랑이가 잘 돌려 말한다는 가정 하에는 호랑이가 성빈이의 우울 모먼트를 조금 볼 수 있을지도.
>>324 >>325 저것도 악수가 아니라 랑이 손잡고 다니려고 손 뻗은 거야. 개인적으로 랑이가 좀더 어리고 천진난만했을 때 먼저 성빈이 손을 덥석덥석 잡은 게 성빈이에게 버릇으로 남아서 이젠 성빈이가 손을 내미는 것... 이었으면 좋겠다는 적폐캐해스러운 바람이 있습니다 uu
당신의 손을 마주쥐고는, 당신이 팔을 흔드는 대로 내버려둔다. 손은 오래 잡고 있지 못했지만, 성빈은 당신의 옆에 다가붙었다. 남들의 눈이 있어 손은 잡지 못해도, 성빈은 당신과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할 수 있다 했어...
지나간 옛노래 한 소절이 문득 성빈의 귓가를 스치는 것도 같았다.
"그렇네... 나가서 사와버릴까?"
성빈은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순진한 미소였지만, 왠지 조금 장난스럽게 보이는 미소였다. 나가서 사온다는 말은 학교 가까이에 있는 베이커리나 편의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연히 학교가 파하지 않았는데 학교 문 밖을 나갔다 오는 것은 선생님의 특별한 허락이 있지 않는 한 엄연한 비행의 축에 들었지만, 학교 문 밖을 나가서는 수업이 시작할 때가 됐는데도 안 돌아오는 게 아니고서야 그것을 크게 문제삼는 선생님은 없었다.
장호랑의 인텔리한 추리! 어찌나 인텔리했는지 용의자가 찐텐으로 당황했다! 초록색 눈동자의 위아래로 흰자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눈을 치켜뜨다가 눈을 깜빡이며 당신을 바라보던 성빈은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면서 당신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려 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호랑이가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해준다면 담장 정도는 넘을 수 있어."
당신은 성빈을 잘 알고 있는 게 맞았다. 성빈은 자신의 삶의 궤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 했고, 그 궤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에도 말한 적이 있던가? '랑이' 라는 말이 붙으면, 성빈은 당신의 생각보다 많은 것을 "예외로 취급"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정문으로 나갔다 와도 되는걸. 내가 선생님들한테 워낙 평판이 좋아서..."
아, 나왔다. 교내외를 막론한 학력고사에서 거의 만점을 유지하는 초 우등생의 특권. 학교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우등생에겐 그만한 특권과 묵인이 따라오는 법이다.
"물론, 나갔다 오는 게 번거로우면 매점에서 사먹자. 소시지빵 말고도 맛있는 게 많으니까... 아직 샌드위치는 맛있는 게 많이 남아있을 거야."
지금은 학교니까 이만 물러나주자. 쓰담쓰담은 방과후에 실컷 만끽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느라 포기하는 몫까지 전부 다,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아니, 당장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산 뒤에 옥상에 올라갔을 때 아무도 없다고 하면 그 때부터도 실컷 만끽할 수 있을 테다.
"깎여도 복구할 자신 있고... 그 정도면 아주 싸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하는걸."
성빈은 당신의 머리에서 손을 살며시 내리며 웃었다. 그리곤 매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치즈불고기햄버거랑 탄산음료가 좋겠다. -그러고 보니 햄버거 먹어본 지 오래됐네."
그는 당신이 말했던 크로와상 샌드위치와 자기가 먹을 햄버거를 집어서 바구니에 집어넣고는 음료수 코너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그런데 이러면 랑이한테 먹여주는 건 못 하겠다..." 하는 말이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아이쿠, 이런. 성빈은 자기가 말실수를 햇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합 다물더니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성빈도 자기 말실수가 치명적인 것은 알았는지, 계산을 마친 봉투를 든 채로 얌전히 매점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귓바퀴는 여전히 빨갰고, 시선은 당신과 마주치려고 애를 쓰다가 계속 다른 데로 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아까전에 했던 당신의 제안을 이제사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응. 다음에 꼭 가자. 햄버거 먹으러."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성빈이 그 말을 당신에게 들릴 만큼만 낮은 목소리로 한 덕에 쓸데없는 소문이 어딘가로 튈 공산은 아주 적다는 것이었다. 그는 간신히 당신과 시선을 맞추고는, "그럼 이제 옥상으로 갈까?" 하고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하고 성빈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옥상이 이 정도로 깨끗해지는 데엔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굳이 입을 놀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성빈의 손을 쥐었을 때는, 성빈의 손이 어째 평소보다 조금 따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신과 함께 당신이 봐둔 자리로 움직였고, 이내 당신이 점찍은 자리에 당신과 함께 앉았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네."
그러다 성빈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곤 중얼거렸다. 작년 겨울의 상쾌한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봄의 하늘은 아직도 높고 푸르렀다.
적당하게 그늘이 진 곳에 앉은 장호랑은 밝게 웃으면서 봉투 안을 뒤적거렸고, 자신이 먹겠다고 한 크로와상 샌드위치랑 딸기우유를 꺼낼 수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빨대를 못 챙긴 점이 아쉽긴 했지만 이정도야 종이팩을 열면 되는 일이었는데 생각처럼 되지는 않아서 더 힘을 주다가 성빈에게 넘겨주었다. 종이팩도 못 까는게 아니고 안 까지는 종이팩을 못 까는거다!
"벚꽂도 아직 다 안 졌을테고 옷 예쁘게 입고서 벚꽃 유명한 공원 같은데 가면 좋겠다. 그치?"
새로 사놓고 못 입은 원피스 라던게 아직 있었으니까, 봄이 되기 전에 한 번 입고 나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아깝지 않을텐데.
깔끔하게 열린 종이팩을 보고는 성빈을 보다 다시 종이팩을 보았다. 대체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해야 우유 곽의 제조과정과 그 과정에서 주로 일어나는 오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인지 장호랑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고마워, 라고 말을 하고는 우유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앗 그럴까? 그럼 이왕 가는 김에 프랜차이즈 말고 수제버거 먹으러 가자!"
육즙과 치즈가 줄줄 흐르는 수제버거를 떠올렸고 침을 꿀꺽 삼켰으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상상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크로와상 샌드위치. 묘하게 씁쓸해진 기분으로 한 입 베어물었더니 맛은 좋았다.
"나도 같은 일을 몇 번인가 당한 적이 있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데 나오더라구... 잡지식이 늘어버렸어. 이젠 랑이도 잡지식이 늘었네."
성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현대 인터넷은 잡지식의 보고라더니. 이런 잡다한 지식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뜬금없는 데서 접할 수 있다... 그러다 당신이 한 술 더 떠서 수제버거를 먹자고 제안하자, 성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랑이랑 먹으면 뭐든 맛있을 것 같아."
그리고는 성빈도 자기 몫의 햄버거 포장을 뜯어서는 한 입 베어물었다. 확실히 보기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햄버거나 수제 햄버거에 비해 떨어지는 비주얼이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먹는 한 끼 점심식사로는 맛이 좋았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성빈은 봉지에서 빨대를 꺼냈다.
힘을 충분히 동원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힘을 이용해서 조심조심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확실히 그는 몇 번인가 당신에게 자신의 피지컬을 의도치 않게 과시한 적이 있지만... 그는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럴 여지가 있다면 후자의 방법을 먼저 시도해보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방비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이 다짜고짜 허리를 끌어안자, 한 팔로 끌어안기 힘든 그의 탄탄한 몸이 당신의 품 안에서 어째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포옹을 풀고 바라보면, 그는 약간 빨개진 귀를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서야 열어놓은 음료수 캔에 빨대를 꽂는 것이었다.
봄이여서, 슬슬 연애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시기라 그런걸까. 상대방은 유난히 더 많이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의식하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어떠려나..... 의식해주었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날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것도 싫다. 갑작스런 사고의 흐름에 멍 하고 파란 하늘을 보았다.
당신은 굳은 마음을 먹고 도박수를 던졌다. 그러나, 아직은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단단했다. 성빈은, 먹던 햄버거 봉지도 내려놓고는 푸르른 봄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성빈은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당신의 어깨로 내려 당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잘 모르겠어, 랑아. 너랑, 좋은 사람들이랑, 이렇게 평온하게 별 탈 없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정말 행복해. 내 삶에 다른 뭔가를 더 얹고 싶지 않아."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단단할지언정 당신이 던진 도박수가 박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심어둔 씨앗은 벌써부터 봄을 감지하고 조금씩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만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이라 그것이 아직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으로 자라나는지, 조급해하지 말고 지켜보자. 적어도 지금 당신을 끌어안은 이 땅은, 이미 끌어안고 있는 당신 이외의 다른 것은 자신의 삶에 얹고 싶지 않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뭔가 더 얹고 싶지도... 뭔가 또 잃고 싶지도 않아."
하고, 성빈은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덧붙였다. 성빈의 눈은 파란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이 어깨를 끌어 안으며 나즈막히 입을 떼기 시작하면, 말을 나오게 한 장본인은 숨을 죽이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은 어떻게 그렇게 예상과 다르지 않았는지. 무언가를 더 얹고 싶지 않다는 말에 장호랑은 안심과 낙심을 동시에 하고야 말았다. 지금까지의 관계가 쭉 이어지겠구나 하는 안심. 더 나아갈 수는 없겠구나 하는 낙심. 그래도 본전인 셈인가.
"응."
상대의 말에 깔린 저의를 자기 좋게 해석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응 하고 대답을 하고는 성빈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코 끝에 스치는 샴푸향이 얄궂기도 하지. 아직 점심은 반도 안 먹었는데.
성빈에게 몸을 기댈 때면 항상 어떤 냄새가 났다. 어딘가 차려입고 나가는 날에는 그는 항상 비온 뒤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향수를 뿌렸다. 그렇지만 그가 향수를 뿌리지 않고, 당신과 이렇게 일상을 보낼 때면 다른 냄새가 났다. 흐릿한 샴푸 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잘 구워진 빵과 같은 포근한 냄새가 살며시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냄새였다.
항상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변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당신과 이 소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을 바꾸어나갈 힘은 당신에게 있다. 그렇지만 1년 365일 내내 전력을 다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처럼 잠깐 마음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포근한 냄새를 조금 더 즐기려는듯이, 따듯한 체온에 붙잡힌 듯이 호랑의 목소리는 느려졌고 눈은 감기기 시작했다. 바닥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온기가 오고 있었으니까. 적당히 배가 부른 나머지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또 지금의 공기가 고요하고 심장은 느리게 뛰어서 우유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툭 하고 딸기우유가 다리 사이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용케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장호랑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자신의 품 안에 기대는 당신을 보며, 성빈은 위에 입고 있던 후리스의 지퍼를 풀어서는 당신의 등을 후리스의 앞섶으로 감싸며 당신을 품 안에 기대어뉘었다. 당신이 조금씩 낮잠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눈치채서다. 당신이 품 안에서 잠드는 것은, 당신을 품 안에서 재우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익숙한 것들 중에서도,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좋아하는 쪽이겠지. 당신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도 아주.
그러나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되어 온 익숙한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준비됐는지와 상관없이 바뀔 수 있다. 어느 순간에는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성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관계면 좋겠어."
자기마저도 듣기 힘들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린 말은 까무룩 잠든 당신의 귀에 가서 닿았을까? 그것은 당신만이 알 일이다. 소년은 어느덧 제법 따스해지기 시작한 초봄의 햇살 아래 점심시간 종료 예비 종이 울리기까지의 달콤한 낮잠에 당신과 함께 빠져들었다.
>>417 대충 그 비슷한 전개... 작년에 성빈이가 하고 다닌 일이 들통나는 모멘트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리 말해주자면 성빈이의 경우는 남을 괴롭힌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애들을 때려주다 보니 그렇게 양아치 무리에 휘말려버린 꼴이긴 하지만. 양아치 A의 부하를 혼내주다 보니 양아치 A까지 혼내주게 됐는데 양아치 A를 고깝게 보던 양아치 B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성빈이를 끌어들였달까 대충 그런 상황 생각해두고 있었어
>>420 멋진 차를 사긴 하겠지만 스포츠카보다 세단? 그나마도 사회 초년생이라고 한다면 다른 부잣집 애들이랑 다르게 검소하게 국산차를 사지 않았을까. 물론 호랑이가 멋진 차를 타고 싶다고 하면 부가티를 끌고 나옵니다. 아 그보다 시설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둘이서 가는 거 좋다... 엄청 좋다. 성빈이한테 '이러니까 결혼생활 같아' 하고 실언 시켜버린다. (미침)
>>421 양아치 시절의 성빈이를 겪어본 애면 성빈이가 감정없이 웃는 얼굴로 이상한 말은 하면 안된다? 라고 말하는 걸 듣지 않을 리 없다
아, 생각해보니 성빈이도 상류사회층이니까 그런 상류사회적인 모먼트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 아버지가 갑자기 대뜸 성빈이 찾아와서는 사진 보여주면서 네 아내로 삼으면 여러 사람이 좋을 만한 아이다. 하고 강압적으로 권한다던가. 오 이건 된다(못된 성빈주)
>>423 꽤나 가까운 성빈이의 모습에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시트에 신일그룹은 재계서열 최상단이라고 적어두었습니다 홍홍. 외할아버지의 후대 교육 철학 때문에 성빈이네 오누이들은 물질적으로 모자란 것은 없을지언정 성인이 되기 전까진 자신의 집이 속한 위치보다 검소한 삶을 살아.
언젠가 지금보다도 좀더 일찍 일어나서 성빈이 일어나는 모습을 당신이 한 번 지켜보라고. 그리고 다음번엔 당신이 한 번 그를 쓰다듬어 보라고. 장호랑의 짝사랑 상대인 최성빈이 어느 날에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성빈이가 예상하지 못 했던 부분은 그 날이 오늘이라는 점! 그리고 무려 밤을 새는 방식으로 먼저 깨우러 오는 방법을 택했다는 점! 왜 일찍 일어나지는 않았냐면, 순전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위해 불을 끄고 커피를 빨아마시며 얼마나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던가. 큭큭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장호랑은 방의 창문을 열어 차가운 아침공기를 맞이했다.
"으, 추워."
빨리 가서 깨우고 돌아와서 자야지~ 하는 마음으로 건널판을 세우고 넘어가, 아주 조용히 성빈의 방 창문을 열었다. 훅 하고 들어오는 따듯한 공기에 몸이 풀리고 좋아하는 냄새가 가득하자 머리가 핑 돌 것 같았다. 성빈이의 자는 얼굴을 보는 몇 안 되는 기회. 장호랑은 조용히 성빈이의 머리 맡으로 가서,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밤을 새면서 만일 당신이 성빈의 방이 있는 방향 쪽에서 비쳐들어오는 스탠드 불빛을 신경썼다면, 성빈의 수면시간이 평소보다 상당히 늦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불이 꺼진 것이 거진 4시에 가까웠을 때니까. 가정교사가 추천해준 안남시에서 주최하는 공립 수학 경시대회에 대비하기 위한 문제집 풀이와, 마감이 가까워진 학교 과제 해결을 위해 평소보다 늦게 잘 결심을 하고 에너지드링크를 마신 것은 좋았는데, 문제집이며 학교 과제는 1시가 되기 전에 마무리지었거늘 입에 잘 대지도 않는 에너지드링크가 약발이 너무 잘 받아버리는 바람에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4시까지 관심도 없는 유튜브 영상들을 뒤적거리면서 깨어있었던 것이다.
다른 때에 이렇게 한가한 시간이 생겼더라면 당신을 보러 갔을 텐데, 불이 꺼져 있는 당신의 방을 두드려볼 용기는 성빈에게 없었다. 당신은 꿀같은 잠을 자고 있을 테니까-라고 성빈은 생각했었으니까. 아마 당신이 아직도 깨어있는 줄 알았다면 당신을 불렀겠지만, 당신이 불을 끄고 잘 버티고 있었던 통에 그는 당신이 깨어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문을 열었을 때는, 아직 추운 초봄의 밤을 위해 20도 정도의 온도로 유지되고 있던 보일러로 따뜻한 방의 온기가, 특유의 냄새를 머금고 달콤하게 당신을 감쌌다. 성빈의 방에서는 항상 특유의 냄새가 옅게 났다. 그가 쓰는 샴푸 냄새, 그의 방에 놓인 가구에서 나는 오래된 나무 냄새, 그가 이따금 뿌리는 향수 냄새, 그의 몸에서 나는 옅은 빵냄새 같은 것들이 조금씩 옅게 섞여서 만들어진 냄새였다.
성빈은 세상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베개에 모로 얼굴을 파묻고, 눈을 꼭 감은 채로 부슬부슬 헝크러진 연갈색 머리카락 아래에서 무언가 입을 달싹거리며 소리없는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당신이 따뜻한 공기에 취해 침대에 쓰러지려는 찰나, 성빈은 문득 잠결에 손을 뻗었다. 당신이 잠에 빠져드는 순간에 당신은 뭔가 따뜻한 것이 당신의 어깨를 감싸안는다고 느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정말로 잠이 들어 버린 걸까, 아니면 잠이 들려다가 깼을까. 당신은 당신의 몸이 무언가 푹신한 것 안에 끌려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튼튼한 게 당신의 머리를 받치고, 당신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팔이 무언가 탄탄한 것에 기대어져 있는 것 같은......
눈을 떠 보면, 성빈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인다. 그러니까, 당신이 기대하던 것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가까이에서. 성빈의 속눈썹 갯수를 셀 수도 있을 만한 거리에서.
스스로의 몸이 가볍게 띄워지며 침대 위로 올려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성빈이가 4시에 자기 시작해서 지금은 일어날 수 없는 것 처럼,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이 자는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밤을 새버렸으니 사실 건널판을 넘어올 때 다치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는 눈이 떠지길 마련. 느려진 반응이지만 한 순간 숨이 막혔다. 눈을 크게 뜨고 헉 하는 소리를 삼키다가 머리를 굴렸다. 왜... 왜.....? 성빈의 잠버릇이 고약하다는것을 모르는(왜냐하면 같이 잔다고 해봐야 어릴적에 낮잠이나 같이 자는 정도였으니까) 장호랑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알이 핑글핑글 돌다가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꿈이구나! 커피를 마시다가 양치도 못 하고 자버린 것이다. 아아 안되는데, 오빠 깨우러 가야 하는데...
"흐으으."
기분 좋게 숨을 내쉬고는 가까이 있는 상빈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었다. 기분 좋은 온도가 느껴진다.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꿈이라도 좋으니까 이렇게 하고 있을래. 같은 베개를 베고, 밀착한 상태에서 잠을 잔다는 꿈을 또 언제 꿔보겠는가?
도톰한 오리털 이불 아래에 보관돼 있던 성빈의 체열은 방 안의 공기보다도 더 따뜻하게 당신을 감싸왔다. 코 끝에 흐릿하게 걸리는 그의 체취나, 팔 안에 안기는 허리나, 이마를 맞댈 때 와닿는 따뜻한 이마 살갖, 숨결... 그 감각들은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하게 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만큼이나 잠에 한가득 잠겨있는 이 소년은, 먼저 잠에서 깬다거나, 당신을 밀어낸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칭얼대는 잠꼬대 소리를 내며 당신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비비고는 당신을 더 꾸욱 하고 끌어안는 것이다. 꿈에서 깰 것인지, 달콤한 꿈을 만족할 때까지 즐길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당신의 조그만 고백에 성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나직하게 웃음소리 같은 것을 흘리며 자세를 약간 고쳐 당신이 더 편하게 안겨있을 수 있도록 몸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다른 이들의 눈치라는 것을 모르고 서로 좀 더 솔직하고 순진하게 좋아했던 그 예전의 더 어렸던 나날들 중 하루를 다시 되퍼올려 가져온 듯한 주말 아침이었다. 당신은 성빈과 함께 나란히 따뜻학한 잠자리 속에서 부둥켜안고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에서 먼저 깬 쪽은 다름 아니라 장호랑 쪽이었고, 습관처럼 기지개를 펴려다가 자기 몸에 닿는 다른 누군가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잠은 한방에 날아가고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고민하던 찰나에 성빈이가 몸을 뒤척였다.
"헉...!"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던 시도는 단단히 감긴 팔에 저지되었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몰래 나갈 수는 없으려나....... 하지만 마지막 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 했고 숨을 죽이며 성빈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왜냐면 지금 성빈이를 깨울 용기는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꿈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현실이었다.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로도 여전히 성빈의 체취며 온기로 가득한 이불 한가운데가 얄궂기 그지없다. 당신이 품속에서 들썩대자, 꾹 감겨 있던 성빈의 짙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떠졌다. 깊이감을 담고 반짝이는 녹색의 눈동자가 말없이 당신의 금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나 그는 품 안에 안긴 당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성을 내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어깨에 감긴 팔을 느슨히 풀어서, 당신이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면 그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누워 있는다면, 그는 당신에게 말없이 이마를 기대어올 것이다.
눈빛이 얽히고 성빈이 부스스하게 웃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서로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지만 이렇게 아침부터 끌어안고 있는 것은 불쾌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눈을 얇게 뜨고 깜빡였다.
"읏."
이마의 온도가 따듯했다. 성빈의 손은 종종 차가울 때가 있었으나 이불 안이여서, 그리고 머리여서 그런지 전혀 차갑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성빈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발칙한 생각이지만 키스하고 싶어. 이루어지지 않을 생각일 것을 알지만 성빈이가 먼저 와주었으면 좋겠어서 괜시리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러나 당신의 우려와는 다르게 성빈은 어떤 저품이나 불쾌함 따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의 우려섞인 질문에 오히려 반문을 건넸으니까, 그는 당신에게 이마를 기댄 채로,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그 녹색의 눈동자 안에는 어떤 꺼림이나 주저함의 기색도 없었다. '주변의 시선' 이라는 것에 주저하고 있었을 뿐, 그가 여기는 그와 당신 사이의 거리는... 어렸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혀 멀어지지 않았나 보다. 그는 그저 다시 눈을 감을 뿐이다. 길다란 속눈썹이 곱게 닫힌다.
당신이 눈을 질끈 감자, 문득 성빈의 이마가 당신의 이마에서 툭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오늘의 단꿈은 여기까지일까, 싶을 때 조금 다른 게 당신의 이마에 닿았다. 이마보다 좀더 부드럽고 좀더 말랑한 게, 살며시 톡, 하고 부드럽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당신의 이마를 찍고 떨어져나갔다.
"잘 잤어?"
눈을 뜨면, 태연하게 아침인사를 건넨 소년이 아직 다 떨어져나가지 못한 졸림은 머금은 미소를 옅게 짓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마에 확실한 감촉이 닿았다 떨어지면 장호랑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귀 끝이 빨개질 만큼 너무 선명한 감촉이어서, 얼굴을 들키지 않게 이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공교롭게도, 상대의 체취가 더 강하게 나는 곳이러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커졌을 뿐이지만.
"나, 나는 아무 꿈도 못 꿨어.."
왜냐면 꿈보다 더 좋은 현실을 보냈으니까. 이불을 뒤집어쓴 체 대답을 하다가, 잠결에 몰래 한 고백이 떠오른다. 기억할까. 기억했으려나.
"그...! 오빠 어제 무슨 꿈 꿨어..?"
이불 안에서 얼굴만 조금 내밀고는 성빈이를 바라보며 물어봤다. 설마 꿈이라고 하던 그게 내가 말한 그거라던가.
하며, 성빈은 자신에게 안경을 씌워주는 호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불공평해 보이는 이 사랑은, 그러나 어찌 보면 한없이 공평하다. 부풀어오르는 것과 자기도 모르게 파묻어버리는 것의 무게가 똑같기에. 당신은 당신을 이 소년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잘 심어나가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
안경을 쓰고 나니 주변 사물이 훨씬 잘 보인다. 성빈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휴대폰 액정에는 .dice 11 4. = 시 .dice 0 59. = 10분이라는 시간이 찍혀 있었다.
생각의 연쇄를 끊고 엷게 베시시 미소 지었다. 서로 다른 의미에 행복함이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게 좋았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을, 방금까지만 해도 쿵쾅거리던 탓에 따듯한 자리 손으로 잡고는 만지작 거렸다. 아침에는 손 안 차갑구나.
"조금이 아니잖아!"
장호랑은 펄떡 솟아올랐다가 찬찬히 생각을 해 보고 다시 성빈의 침대에 앉았다. 어. 딱히 약속이나 할 일이 있는건 아니었어...
성빈은 당신에게 기꺼이 손을 내어주다가, 핸드폰을 본 당신이 펄쩍 뛰자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한 번 쭉 키더니,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 말소리의 여운이 잦아들 때쯤, 당신은 문득 따뜻하고 단단한 게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린다.
"─오늘은 뭐 약속이나 할 일 같은 것 없어?"
하고, 재차 확인이나 다짐을 하듯이 당신이 방금 마음 속으로 확인했던 일을 물어보는 것이다.
최성빈은 빈번하게 장호랑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드물게는 애닳게 만들었고, 아주 가끔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지금 한 일은 가장 마지막의 일. 어깨를 끌어안아오면 뒤에서부터 오는 온기와 촉감에 머리가 과부화 되버리고 만다. 표정이 안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한게 감춰졌을까. 숨소리도 내지 못 하고 눈만 땡그랗게 뜬 체, 자신의 잠옷을 꽉 쥐는 것이 한계였다.
"따, 딱히 아무것도 없어서.... 응.. 먹을래....."
잔뜩 긴장한 체 말을 하다가도 머리가 약간만 풀어지면 지금 성빈의 행동이 자신을 편하게 여기기만 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 묘하게.. 취급이 친한 동생 보다는 애완동물 같지 않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설렘으로 말을 잃은 당신을 나직이 부드럽게 눌러내리는 소년의 무게에는, 그러나 분명히 설레임보다는 조금 더 무겁고 음울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네가 떠나가 버리기 전까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 이기적이고 추악하지만 이렇게나마... 비겁하고 초라한 나를 용서해 줘.
그것은 편함이라기보다는 초라하고 꼴사납기 그지없는 자기연민이자 자기불신에서 우러나온 구걸.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소년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에 일상적으로 짓눌리면서 일그러진 내면. 완벽해야만 할 신일그룹 경영가의 떳떳한 자제로서, 다른 이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을, 내색해서도 안 될 모습이었다.
눈을 꾹 감고 당신을 뒤에서 감싸안고 있던 소년이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가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당신의 등에서 떨어져나갈 때는 소년의 얼굴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간이면... 실례지만 너희 집에서 먹는 것도, 아니, 잠시만."
하고, 성빈은 핸드폰을 다시 잡더니 메신저에 문자를 몇 통 보냈다. 문자가 몇 통인가 오고가는 동안, 소년의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의 빛깔이 바뀌었다. 분명 입꼬리가 올라간 각도도 같고, 눈초리가 구부러져 있는 모양도 같은데, 그것은 초조한 미소에서 순전한 기쁨을 담은 미소로 조금씩 그라데이션하며 바뀌어가는 것이었다. 마치 똑같은 오브제에 주변 조명 색만 바뀌는 것처럼.
"아니- 그냥 우리 집에서 먹어도 되겠다. 이번 주말은 우리 집에서 보내도 될 것 같아."
성빈은 그렇게 오랜만인가? 하고 셈을 세어보려다가, 작년에 생각이 닿았고, 빠르게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셈이네. 뭘 먹으면 좋을까..."
냉장고에 먹을 것은 많았다. 머핀도 아직 몇 개인가 남아있을 테고... 동파육이며, 장조림 같은 고기반찬도 아직 남아있을 테고, 겨우내 먹던 김치도 남은 것이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은 모르는 냉장고 안의 이런저런 상자들을 생각해보면 조금 뒤적거려 보면 제법 그럴듯한 밥상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채끝살이 있다고 했던가?
예전부터 종종 고기를 구워준 적이 있었다. 작년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 아니겠어. 장호랑은 가끔 확신이 들 때가 아니라면 작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지금도 그랬다. 아마 나중에도 그럴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년간 교류를 끊었다고 한다면 너무 보잘 것 없어지지 않는가. 아무 이유 없이 끊어질 사이라면....
"어떤 고기야? 집에 밥 있어?"
적당히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밥은 있는지 물어봤다. 고기를 구워줄 거라면, 그건 분명히 성빈이 몫이니까 간단한 일이지만 밥이라도 얹혀야지 하는 마음이다.
성빈의 작년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작년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저 너무 바빴다- 라거나, 다른 친구들이랑 좀 복잡한 일이 있었다- 라면서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고, 이렇게 당신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년이 어땠는가를 들어보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그는 그것에서 당신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원래 누리고 있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었는지 배운 듯했다.
"밥? 밥솥을 열어봐야 알겠는데... 채끝살 스테이크 해 줄게."
하면서, 성빈은 부시시 눈을 비비며 그제서야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뭔가 해주겠다고 장담한 것치곤 아직 꽤나 잠기운을 떨치지 못한 모양.
반대로 장호랑쪽의 가족은 많이 바쁜 일이 없다에 가까웠다. 기껏 해봐야 아빠가 출장을 나가거나, 엄마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거나 이니까.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낸다는건 어떤 고독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 으응!"
아주 낯뜨겁고 위험 천만한 헤프닝이었지만 이렇게 받아주는 상냥함에 장호랑은 감동받았다! 눈을 크게 뜨고, 또 총기가 가득하게 반짝이면서 성빈을 보았다. 그리곤 폭 하고 아직 침대에 앉아 있는 성빈의 허리를 끌어안다가 "금방 올게!" 하는 말을 남기고는 창문을 열어 자기 방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번 주말이 특이 케이스인 거야. 어머니는 보통 주말에 집에 계시고, 아버지도 집에 오시니까... 사실 집에서 누군가랑 같이 시간 보내는 건 랑이 쪽이 더 많지만."
하고, 성빈은 자신의 허리를 푹 끌어안아 오는 당신의 머리를 도닥도닥 쓰다듬어주었다. -이 소년에게 있어 당신은 무엇일까? 이웃집 소꿉친구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애완동물 같은? 사랑스러운? 말못할 마음을 품고 있는? 성빈에게 묻는다면 그 스스로는 그 어느 쪽이라고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소년에게 차지하고 있는 이 위치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라면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징적이고도 독점적인 위치임에 틀림없었다.
"응, 조심히 다녀와."
당신이 성빈네 집 정문의 초인종을 누르거나 아니면 다시 건널판자를 통해서 성빈의 방으로 넘어왔을 때는, 어느덧 팬에 버터를 녹이는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맴돌고 있었다.
요리를 하는데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성빈의 방을 건너서 들어왔는데 주방은 아랫방일텐데 벌써부터 허공에 버터 냄새가 맴돌았다. 자기가 왔다고 큰 소리로 말을 하기 직전에, 좋은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든 체로 살금 살금 내려갔다. 요리를 하는 최성빈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둘 생각이었다. 숨소리도 죽이고 조심 조심...
당신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줄도 모르고 소년은 버터를 녹이면서 온도를 체크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한동안 그가 누워있는 모습만 보느라 잊고 있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키가 퍽 컸다. 커다란 키, 그 반면에 온순한 성질을 짐작케 하는 부드러운 연갈색의 머리카락의 뒷모습. 그는 파자마 차림에 윗옷만 가디건으로 갈아입고 나서 그 위에 베이지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키가 크는 바람에 조금 짧아진 파자마 바짓자락의 아래로, 실내화를 꿰어신고 있는 발과 함께 그의 발목과 복사뼈가 매초롬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리네이드해 놓은 채끝살을 한번 집게로 뒤집어보고 있는 그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것에 열중하느라 당신이 그렇게까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모습이 장호랑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까. 작년에도 저 옷 입었었는데, 분명 저렇게 작지는 않았었을텐데. 오빠 일년만에 키 엄청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벽, 또는 기둥 뒤에 숨어서 아주 조용히 심호흡을 한 다음에 핸드폰을 다시 켰다. 사진으로 꼭 찍을거야. 대대손손 물려줄 가치가 있는 모습이다. 마음을 먹고 몸을 살짝, 팔을 쭉 뻗어 성빈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약간 각도가 부족했다. 그래서 한 쪽 발도 까치발로 서고 조금 더 더 팔을 뻗다가
"힉." 당신이 옆으로 나자빠지는 소리에 소년은 어깨가 움찔하는 게 당신 눈에 보일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앗 뜨...!" 그 바람에 뜨거운 팬에 손 어딘가 닿은 건지, 소년은 또 한 번 더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 직후, 성빈은 집게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내려놓고 당신에게로 후닥닥 달려왔다.
"호랑아, 괜찮아?"
하고 소년은 당신이 자빠지면서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본다. 그런 그의 손가락 중 하나에 살짝 빨간 자국이 남아있는 게 보였다. 가벼운 1도 화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후다닥 달려오기 전의 행동들이 딱 봐도 데인 것 처럼 보여서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되려 호들갑을 떨었다. 몸을 펄떡 일으켜 세우고 달려오는 성빈의 손을 잡아서 자세히 보니 역시 데였다..
"나는 괜찮은데 오빠가 안 괜찮잖아.... 미안..... 아니! 그것보다 빨리 물에 씼어야지!"
자기가 사과하는 것 보다는 성빈이가 다친 것을 조치하는게 우선이었다. 빠르게 성빈의 손을 잡고 싱크대 까지 가려고 했다. 찬 물에 손을 씻으라고 말을 한 다음에는 다시 후다닥 뛰어다니며 응급상자를 찾았다.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안다. 어렸을때 성빈이 집에서 놀다가 가구에 찍히거나 넘어져서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흰색 응급상자 안에는 적당히 연고와 밴드가 있어서 그걸 가지고 갔다.
라는 대답을 끝맺기엔 당신의 행동이 너무 빨랐다. 당신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싱크대까지 잡아끄는 서슬에는, 그 큰 체구의 성빈도 할 수 없이 끌려오다시피 따라왔다. 당신이 약통을 찾아왔을 때는 성빈은 찬물에 환부를 담그고 있다가 꺼내고 있었다. 그는 키친타올로 손의 물기를 닦은 뒤, 손을 당신에게 내밀었다.
"괜찮을 거야. 물집도 안 잡혔는걸."
자 봐, 하듯이 소년은 당신에게 데인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확실히 물집도 잡히지 않은 그냥 빨간 자국뿐이다. 이 정도면 연고를 발라두면 이틀쯤 뒤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낫게 될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이 내민 이 손가락은, 10개나 되는 손가락들 중에서 하필이면 왼손 약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화를 내기엔 이 소년은 너무도 물렀다. "다음번에는 불 앞에 있을 땐 놀래키지 말기... 알았지?" 하고, 손에 밴드를 감아주는 당신을 다독이듯이 타이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문 편이었다.
고기는? 하고 화들짝 놀라 팬을 돌아보는 당신을 맞이하는 것은, 아직 트레이에 얌전히 놓여있는 마리네이드된 날고기와 반쯤 녹아있는 버터 덩어리였다. 고기는 아직 굽지도 않고 버터를 녹이던 와중에 손을 덴 것이고, 당신이 구급통을 가지러 갔을 때 다행히 성빈의 사고는 가스불을 꺼놓는 데에까지 닿았다.
구김살 없는 네 모습이, 아니 조금 구겨지더라도 금방 밝게 떨쳐내는 네가- 좋아, 하고 마음 속으로 다음 마디를 되뇌이려다 성빈은 내심 흠칫 놀라고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접어 숨겼다. ...너랑 있으면 자꾸 바보같은 생각이 들어. '내게 충분한 것' 이라고 그어놓은 선에서 자꾸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게 돼. 성빈은 당신을 부드럽게 두어 번 더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당신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밥? 전원이 꺼져 있네... 아마 밥이 얼마 남지 않아서 따로 퍼다가 냉장고에 넣어놓은 모양이야."
그의 말을 듣고 냉장고를 열어본다면, 딱 2인분 정도의 밥이 밀폐용기에 담겨져 있는 게 보일 것이다.
"밥도 데우고... 혹시 괜찮다면 야채칸에서 양파랑 그린빈이랑 아스파라거스도 좀 꺼내줄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헤헤 하고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뭐가 엄청 많네. 음료수에 각종 야채에 과일에...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훅 지나가 버릴 것 같았으므로 성빈이 요구한 것들을 적당히 꺼내서.... 잠깐 적당히가 어느정도지? 일단 밥은 뒤로 빼놓고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두꺼운 아스파라거스라 이걸 몇 개를 집어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린빈은 봉투에 담겨져 있었으니 꺼내서 성빈 옆에 두었고, 다시 돌아와서는 고민을 한다. 사람 엄지손가락 만큼 두꺼운 아스파라거스는 과연 둘이서 먹기에 몇개가 적당한가.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망고가 있다. 식후 디저트로 괜찮을 것 같다. 당신이 아스파라거스 4대를 집어 성빈에게 건네주자, 성빈은 그것을 받아다 우선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양파는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구나?"
하고, 성빈은 야채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버터가 다 녹자, 그는 집게로 소고기 덩이를 잡아서는 팬 위에 올렸다. 치이이- 하는 귀가 즐거워지는 굉음과 함께, 버터향과 섞여 나는 고기 지져지는 냄새가 확 치솟아올라오며 주방을 감싸기 시작했다. 성빈은 고깃덩이 하나를 더 올려놓고는, 치이익 하는 소리를 등지고 호랑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성빈은 다시 팬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고기덩어리를 척척 뒤집더니, 뒤집어진 고기 위에 조그만 숟가락으로 연신 녹은 버터를 떠올려 끼얹었다. 고기가 차차로 익어가는 냄새가 풍겨나왔다. 성빈의 귓가에는 당신이 야채를 다듬는 소리가 도닥도닥 하고 울렸다. 문득 성빈은 어릴 적, 말 그대로 소꿉친구답게 당신과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성빈은 그 다음에 무심코 이어지는 말을 꺼내려다가 참았다. 정말, 왜 너랑 있으면 이렇게 입이 제멋대로 바보같은 소리를 하려고 드는 건지 모르겠어. 입을 꾹 다물고 성빈은 빠르게 단어를 골랐다. 그 동안 말이 끊긴 채로 2~3초 정도가 흘렀다. 그러고 나서야 성빈은 얼버무리는 다음 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성빈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시선을 되돌릴 때 그의 귓바퀴가 살짝 빨개져 있는 게 보일 뿐이다. 팬 위에서 달아올라 있는 지방들 위에 야채가 와르르 쏟아지자, 기름이 야채를 익히는 고소한 냄새가 등천했다.
"응. 다음번엔 내가 네 옆에서 깨워줘야겠다. 밥은 데워뒀지?"
하고, 성빈은 팬을 솜씨좋게 들까불며 당신을 바라보고 싱긋 웃는다. -그의 성격상, 그가 당신의 방에 당신을 깨우러 올 때라면 오늘 아침처럼 같은 이불 안에서 눈을 뜨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아주 낮겠지만, 그는 당신만큼이나 당신과 맺어두고 있는 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재확인할 수 있으니 나쁠 것은 없겠다.
"호랑이네 집에 가면 카레를 해볼까."
야채를 볶는 것은 금방이었고, 이내 미디엄 레어로 익힌 스테이크에 아스파라거스와 그린빈, 양파가 가니쉬로 곁들여진 풍성한 스테이크 플레이트 2장이 마련되었다.
쩔쩔매고 있는 당신에게 성빈은 아예 얼굴에 웃음기를 숨길 생각 없이 싱글벙글한 채로 농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렇지만 오빠는 아침에 호랑이 얼굴 보고 싶으니까, 호랑이만 괜찮다면 깨워줄게."
부드럽게 머리를 삭삭 쓸어주고 나서야, 성빈은 자기 몫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고 스테이크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응, 이 정도면 됐네. 혼자 만들어 먹는 것이라면 별 성을 들이지 않고 그냥 대강 익혀서 먹어치웠겠지만, 오늘은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스테이크의 별난 점은 그것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고기를 불에다 굽는 건데 정성을 들이고 들이지 않고에 따라 티가 팍팍 난다는 것. 그러다 당신이 프라이팬 이야기를 하자, 성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프라이팬에 낮은 돈까스 망을 받쳐두고 뚜껑을 덮으면 해결될 거야. 우리 집도 보통은 그렇게 해서 먹는걸."
그러면 이제 카레 만드는 법이나 카레 재료 문제만 해결하면, 다음 번에 성빈을 당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성빈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반찬삼아 밥을 먹던 성빈이, 입에 있는 것을 넘기고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당신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찾았다 인증코드 나야말로 지금 이게 꿈은 아닌지 얼떨떨해. 바로 어제 정주행 한번 해보고 눈물이 핑 돌아서 그냥 잠자리에 누웠는데... 응, 그렇잖아도 혐생 관련해서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짤막짤막하게 돌리는 것도 익숙하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652 아, 지금 나가봐야 하는구나.. 혹시 언제쯤 돌아올지 대략적으로라도 알려줄 수 있어? 만나는 지점 같은 경우에는 호랑이가 성빈이네에 놀러왔다가 성빈이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성빈이 방에서 기다리다가, 방에 호랑이가 있는 줄 모르고 비 맞은 생쥐 꼴로 들어온 성빈이가 호랑이 보고 ˚0˚ 하고 놀란다던가.. 아니면 두 사람이 같이 하교하다가 때아닌 급작스런 봄비를 같이 맞았다던가?
아침에 등교 채비를 마치고 대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고 햇빛이 눈부셔 봄기운이 완연했기에, 당신과 함께 나온 성빈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은 좀 덥겠다. 집에 올 때는 마이는 벗어야겠네." 하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시원하게 불던 봄바람이 복선이었을까 점심시간 때에는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봄비가 후득후득 내렸기에 당신의 반 학우들 중에서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이 울상이 되었으나, 또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생들이 하교할 때에는 또 비가 그쳐 먹구름 사이로 제법 하늘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당신의 일주일 시간표 중에는 성빈과 종례 시간이 같은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 되면 성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당신에게 문자를 보내 어디서 만나서 같이 가자고 하거나, 혹은 당신의 반에 찾아오곤 했다.
"랑아."
당신의 금색 눈동자와 소년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칠 때,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렇듯 익숙하게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 먹구름이 가시지 않아 음울한 봄의 하늘 아래에서도 소년의 얼굴은 부드러운 온기로 빛나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아아아8w8!!!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게. 굳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호랑주 일 잘 끝마쳤으면 좋겠다. 일단 상황은 저렇게 써뒀는데, 뭔가 이 부분은 잇기 힘들어서 고쳐줘야겠다거나 이 부분이 좀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줘.
전과 다를 것 없이, 창문을 통하여 인사를 하고 등교를 했던 하루. 장호랑 또한 전과 다를 것 없이 수업에는 집중을 하지 않고 창 밖을 보며 언제쯤이야 지루한 수업이 끝날지를 걱정하기만 했다. 지평선을 가리는 산허리 뒤로 시커먼 구름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하교시간 직전이 되어서야 알아버렸고. 여러모로, 너무 늦어서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상태. 친구들을 보내고 청소도 다 끝난 교실 안에서, 장호랑이 입술을 쭉 내밀고 창 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 비, 비. 내심은 최성빈이라는 멋진 남자가 우산이 있다고 둘이 달싹 붙어서 가는 상황을 생각하기도 하다가, 랑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오빠!"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감사하며 크게 최성빈을 불러보고 쪼르르 걸어나가 바로 앞에 찰싹 붙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성빈의 얼굴을 보다가- 두 손 어디에도 없는 우산의 부재를 발견했다.
"어, 어쩌지 나도 우산 없는데..!"
곁눈질로 창 밖을 보아하니, 금방 끝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시야를 가득 가린 어두운 구름은 저 멀리의 산 너머도 가리고 있었으니까. 단지, 자그마한 바람은 들었다. 날씨도 안좋고 하니까 이대로 비가 그칠 때 까지 같이 있고 싶다고.
당신이 그리던 멋진 남자는 틀림없이 당신을 찾아왔다. 그러나 당신의 예상대로 안 된 점이 있다면, 그의 손에도 우산은 들려 있지 않았다는 것. 애초에 오늘 우산을 가져온 아이들이 별로 없는가, 교실을 삼삼오오 빠져나간 아이들도 교사 현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가, 가방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가, 돈을 모아 콜택시를 부르거나 아니면 부모님 찬스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날씨는 기가 막히게 맑았고. 일기예보에서도 하루종일 맑을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물론 일기예보는 지금 창밖을 보다시피 멀거니 빗나갔고, 성빈도 사정이 그렇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그는 품에 달라붙어오는 당신을 받아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다."
매점에도 우산이 안 들어왔더라, 하고 덧붙이며 그는 팔에 걸고 있던 가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따뜻하게 데워진 밀크티 캔을 꺼내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조금 늦더라니 매점에 뭔가 있나 싶어 들렀다 온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기다리면 비가 그칠지 모르니까, 교실이나 아니면 학생회실 같은 곳에서 좀 기다려볼까?"
아니면 택시를 불러도 되니까, 하면서 성빈은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글쎄, 어쩌면 그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거나 조금이라도 멎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겠다고.
장호랑은 일기예보를 도통 보지 않는다. 그야 최성빈이라는 멋진 사람이 거의 매일 아침을 깨우러 와주면서, 우산을 챙겨라, 오늘 날이 춥다 정도를 이야기 해 주니 그 정보에 사람에 의존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작 오늘 일기 예보가 틀렸다는 것은 장호랑이 알기에 요원한 일..
"와아, 고마워!"
두 손으로 밀크티 캔을 받아들이고 한 시의 지체도 없이 손으로 까보려 하지만 틱 틱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항상 나오는 패턴이라지, 최성빈이 음료수를 주면 장호랑은 스스로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고, 실패하고, 애처로운 눈빛이나 부끄러운 눈빛으로 최성빈을 올려다 보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그 눈빛에 못 이기는 착한 최성빈이 음료를 따주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부탁을 하는 눈빛이 최성빈을 향해 올라갔다.
"일기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이러네." 하고 어깨를 으쓱한 성빈은, 당신이 캔을 잡고 애처로운 눈길로 올려다보자 뭔가 빠뜨려먹은 것을 발견한 사람의 멋적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손을 뻗어서 흔쾌히 당신이 든 밀크티 캔을 딱 하는 작고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따서는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결국 당신에게는 어디까지나 착했다. 조금 걱정하는 듯한 당신의 말에, 성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이 학생회실이지, 회의 안 할 때는 임원들 휴게실에 가까우니까 말야."
물론 해당 상황을 딱히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도 임원들이 학생회실을 오용하는 것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고, 2학년 부회장인 자신도 별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회의할 때만 잘 정리해두면 학교에서 뭐라고 태클을 걸지 않는 것도 있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오늘같은 날이면 학생회 임원들이 너도나도 학생회실에 틀어박혀서 빈둥대고 있을 게 뻔했다. 성빈은 확인을 해보기 위해 학생회 톡방을 열었다.
그러나 톡방에는 마침 학생회장네 집에서 밴을 몰고 왔다고, 임원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학생회장의 메시지가 떠 있었고, 임원들 대부분이 서관 현관으로 나가겠다고 대답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눈치가 보이니 그 밴에 당신을 태워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만 밴을 타고 가는 건 더더욱 절대 사절이었기에, 성빈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따로 가겠다'고 톡방에 메세지를 보내둔 뒤에 당신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비 그칠 때까지 잠깐 둘이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 그렇다니 날씨가 다시 한 번 거한 낚시를 걸어줘야... 학생회실에서 잠깐 있으면 햇살이 잠깐 비쳤다가, 그걸 보고 나섰더니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기도 애매한 시점에서 비가 다시 쏟아지는 거지..
항상 철두철미한 최성빈이 일기예보 하나를 체크 못 한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고, 결국 오늘 우산이 없는 것은 기상청의 탓으로 돌아갔다. 일기예보가 이렇게까지 빗나갈수도 있나? 작은 의문점을 가지다 밀크티를 받아들이면 그런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고마워! 라는 한 마디를 한 뒤에 한 모금 마셔보면 달고 부드러워서 역시 맛있었다.
학생회실로 가도 되겠다는 성빈의 의견에는 홀린듯 고개를 끄덕이고, 최성빈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회실 안에는 아늑한 쇼파와 테이블, 간단한 간식거리들과 마실 것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구미를 당길만한 것은 없고,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의 수준이었다. 장호랑은 학생회실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우와 나 학생회실 처음 와봐! 하는 감탄사를 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쇼파에 등을 기대었고 창 밖을 보았다. 조금씩 비가 그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당장 기상청 SNS를 켜보면 쏟아지는 항의에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어쩌랴. 기상청 측에서도 이변이라 할 만한 저기압의 급격한 변덕 때문이었는걸. 그래도 시기로 따지면 봄비가 올 때가 되긴 했다. 이 봄비가 멈추고 비거스렁이가 다 불어가고 나면, 비로소 따뜻한 봄날이 시작되겠지. 복장 규정이 춘추복으로 바뀌고, 꽃들이 피어나고. 당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와 꽃놀이를 갈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이 3월의 끝자락을 적시는 봄비 덕에, 당신은 이 소년을 조금 더 독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학생회실은 언제나와 같은 모양이었다. 구색맞추기용으로 진열해둔 장식품에 가까운 간식들과, 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보통 차기가 바쁘게 비워지곤 하는-, 예술부장이 가져다놓은 이런저런 만화책들, 학생회장의 고상한 취미가 반영된 플루프 인형 같은 게 놓여 있는 일종의 아지트. 소년이 속해 있는 곳들 중 하나였다.
당신이 소파에 기대어앉자, 성빈 역시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옆자리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창밖의 비는 어느샌가 그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성빈도 그게 보였는지, 당신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얼마 안 있어도 될 것 같다."
삼월 말의 비 오는 날, 느긋한 오후. 침침한 조명 아래, 나직이 비 내리는 소리 가운데, 당신과 그뿐이었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빈 부실을 빌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음료수 캔을 조금씩 홀짝이면서 반 친구들 이야기나 별난 선생님 이야기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조그만 순간들 하나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작은 순간들이 모두 소중했다. 자신이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길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지만.
눈치껏 좀 길게 내려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오늘의 봄비는 변덕이 심한지 음료수 한 캔을 다 비웠을 때쯤에는 어느샌가 빗소리도 그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해 먹구름 사이로 생긴 틈으로 햇살까지 한 줌 내리쬐고 있었다. 성빈은 당신의 말에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렇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럼 가자."
하고, 성빈은 당신에게 녹색의 눈길을 돌리며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항상 그러듯이, 산책가자는 말을 들은 커다란 개처럼.
응, 이라는 대답 대신에 가볍게 내밀어준 손을 잡았다. 항상 그렇듯이, 최성빈의 손이 장호랑의 손보다 조금 차갑고, 또 장호랑의 손이 최성빈의 손보다 조금 따듯했다. 그런 온도차이를 좋아했다. 촉감 외에도 더 선명하게 닿고 있다는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바보같이 헤실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띄운 체 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갔다.
교문을 나서고 집으로 가는 멀지 않은 길의 한 가운데에서는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호랑이 어? 하는 소리를 내고 하늘을 올려다볼 무렵 툭 하고 이마에 커다란 빗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헉! 오빠 비온다 비!"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인지, 봄비인지 모를 굵은 빗줄기를 보며 장호랑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로 돌아가기에도, 집으로 뛰어가기에도 애매한 거리이며 아무것도 안 한다는 최악의 선택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옷과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들고 있었다.
찹, 하고 당신의 손은 조금 차갑고 훨씬 커다란 손이 감싼다. 당신의 조그만 온기가 손 안에 머무는 이런 순간이 좋다는 것을 성빈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신의 헤실거리는 미소를 보며, 그는 얼굴에 마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학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교문을 나선 지 어느 정도 지나자 질나쁜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의 안색이 다시 표변하기 시작했다. 문득 눅눅한 공기에 하늘을 올려다본 성빈은 언제 햇살이 내리쬐었냐는 듯 다시 시꺼멓게 떡지며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한 구름을 보고 불길함을 예견한 건가 걸음을 약간 빨리하려 했으나, 눈치채는 게 조금 늦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의 비온다,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성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재킷의 단추를 툭툭 끌러내어 벗은 다음에 당신의 어깨에 뒤집어씌워 주었다. 졸지에 그는 와이셔츠에 니트조끼 차림이 됐지만, 그는 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빗방울이 다시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당신의 손을 꼭 쥐고는 물었다.
어깨 위에 잘 아는 사람의 재킷이 뒤집어 씌워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 몰라하던 자신과는 크게 대비되는 대처. 재킷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려고는 했지만 손을 꽉 잡고 안남지하도까지 뛰어가자는 말을 어찌나 단호하게 하던지,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깨 위로는 사이즈가 큰 재킷을 걸치고, 머리 위에는 책가방 하나를 얹은 체 물 웅덩이를 찰팍이며 최성빈이 이끄는 길 대로 따라간다. 기묘한 고양감과,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해지고, 시선은 손을 잡고 이끄는 최성빈에게 고정되며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채도가 한 층 높아진 것만 같은 감각으로 한참을 달렸다.
"후아, 오빠 잠깐만..!"
중간쯤 뛰었을 때는 숨이 차서 속도를 느리고 앞에 가는 사람의 자비를 구하게 되었지만...
조금 그런 느낌일까. 나도 모르게 너부터 먼저 생각해버리고, 엉겁결에 생각보다 손발이 먼저 나가고 마는 그런 느낌. 이상해. 이상하네. 나 조금 이상하지. 너한테 나는 그저 알고 지내는 이웃집 오빠일 뿐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너부터 생각하고 너에게 이렇게 대하고 있어. 너와 같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이 순간, 물기 먹은 공기들 사이로 부슬부슬 내리는 차갑고 습한 빗소리와,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반짝이는 헤드라이트들과, 신호등들과, 간판의 LED 불빛들로 둘러싸여,
이 세상에 이 빗길과 너와 나만 덜렁 놓여 헤매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정말로 너와 잠깐이라도 이렇게 단 둘이 되어버린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고, 멋대로, 생각을.
당신 생각에 빠져서 익사해버릴 뻔한 성빈을 덥석 붙들어 꺼내어준 것도 당신이었다. 당신이 가쁘게 숨을 고르며 잠깐만, 하고 자비를 구하자, 성빈은 조금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멈춰섰다. 그러나 그는 멈춰선 지 1초도 걸리지 않아 자기와 당신이 비 내리는 보도 한복판에 멈춰섰다는 것을 깨달았고,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어서, 당신과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처마로 이끌었다. "응, 잠깐 저기서 쉬었다 가자." 꽤 오래되어 보이는 빌딩의 현관이었다. 두 소년소녀가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도 당신은 머리에 쓴 가방과, 성빈이 급히 씌워준 재킷 덕분에 쫄딱 젖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성빈은 벌써 꽤 낭패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빗방울을 실컷 맞아 살에 처덕처덕 달라붙기 시작한 와이셔츠라던가, 평소의 부드러운 컬이 들어간 연갈색 머리카락이 한가득 빗물을 먹은 점이라던가, 얼룩덜룩 물방울이 맺혀서 제구실을 못하는 안경이라던가. 빗발이 전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회색 하늘을 처마 아래서 내어다보며, 성빈은 안경을 벗어내리곤 비에 젖은 앞머리를 조금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시력이 약간 떨어져 안경을 눈에 달고 사는 사람이 그렇듯이 그는 미간과 눈살을 조금 찌푸렸고, 그렇게 보고 있자니 성빈은 평소의 그 대형견 같은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다.
물론, 이내 당신을 돌아볼 때에는 미간과 눈살에 주었던 힘이 부드럽게 풀려서는 평소의 그 온화한 대형견같은 인상으로 돌아왔지만.
거실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다' 는 표현이 그렇게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가 없이 차갑고도 엄중하게 굳어 있었다. 그 냉기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지만, 성빈은 그 진원지에 함부로 시선을 두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을 그 쪽으로 향하고 있을 뿐, 시선은 공손하게 탁자 위로 내리깔려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의 소파에는 구김살없는 양복 바지에, 와이셔츠 차림을 한 중년의 남자가 앉아서는 몇 장인가의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사실 어떤 사무의 서류가 아니라 성빈의 성적과 관련된 각종 서류들이었지만, 그것들을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과 태도는 그런 성적표에 떨어지기에도 과한- 휘하 조직의 성과를 검토하는 임원진의 그것과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샐러리맨이라고 하는 존재들은 그 직장이 어떻건, 직급이 어떻건 잘 차려입은 양복 차림에 언제건 어떤 일이라도 진심으로 임할 준비가 된 반듯한 태도가 특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런 샐러리맨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었다. 실내이기에 외출을 위한 양복 상의는 벗어다 걸어놓았지만, 양복 상의가 없더라도 한 치 빈틈이 없어보이도록 잘 다려진 줄무늬 양복바지와 단단히 채워진 허리띠, 빳빳한 셔츠, 문외한이 보더라도 한 눈에 고급품임을 알 수 있는 넥타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조금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그 섬세하고 값비싼 만듦새를 알 수 있는 넥타이핀과 시계 등, 점잖으면서도 세련된 옷차림. 가르마를 단정하게 타 넘긴 검은 머리카락은 뿌리가 조금 희끗했고, 날렵한 인상의 얼굴에는 적지않은 세월이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내려앉아 주름져 있었다.
이뿐이었으면 그는 그저 회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노련하고 경험많은 직장인 중 한 명으로 보였겠지만, 사납고 날카로운 눈매에 담긴 남자의 눈동자에는 마치 불운한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는 맹수와도 같은 살벌한 기색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단지 "경험 많은 직장인" 일 뿐 아니라 "시총 670조의 대기업 임원" 으로까지 정의하는 요소였다.
이상한 점은, 그 남자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는 성빈의 그것과 똑 닮은 초록색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녹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길에 실려 있는 기백이 달라, 온유해 보이는 성빈의 눈과 달리 그 남자의 눈은 흡사 천년 묵은 집채만한 독사를 보는 것과도 같은 그런 위압감이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남자는 마지막 장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고는, 서류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 하고 종이 내려놓는 소리마저 어찌나 차가운지 성빈은 몸서리가 쳐지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참았다.
"양호하구나."
남자는 무뚝뚝하게 말문을 열었다. 교내 중간고사 전과목 만점. 3·4월 전국연합학력평가 전과목 만점. 수학 올림피아드 금상. TOEFL 120점 만점. 이외 이런저런 테스트들을 포함한 기타 등등. 일반적인 가정집에서 자식이 이 정도 성적을 거두어왔다면 온 동네에 잔치를 열었어도 과하지 않았을 놀라운 성취였거늘, 그 성취 앞에서 남자가 보여준 반응은 '간신히 별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요구목표의 최저한도를 달성한' 것을 보는 듯한 정도의 반응이었다.
"네가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마음 잡기로 했다는 것은 이 정도면 잘 알았다."
그 말은 마치 상대방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성빈은 그게 아님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어 분자 하나도 미동할 것 같지 않았고, 성빈은 숨을 쉬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학업에 성실히 정진한다고 그게 그 사람을 전부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되지는 않는다. 너만큼 공부할 줄 아는 놈들은 강남까지 갈 필요 없이 서울에만 해도 널리고 널렸어.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느냐? 사람이 어떻게 평가받는지?" "그 사람이 입에 올리는 한 마디, 움직이는 손짓 하나하나가 모두 평가기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일수록 보는 눈이 많아지기에 그 평가가 더 엄격해진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네가 작년에 벌이고 다닌 방종한 행실들을 네게 때 안 묻히고 관두게 하려고 내가 지출한 비용이 얼마라고 했지?" "...훌륭한 샐러리맨 5명의 연봉을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하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중산층 가정 다섯 호를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 금액을 선뜻 너를 위해 지출했다. 왜 그랬을 것 같냐?" "...제가 아버지의 아들다운 완벽한 학생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아들. 성빈과 똑같은 눈색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최성빈의 이버지. 신일그룹의 부회장, 최이룡이었다.
"반만 맞았다." "...나머지 반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네가 완벽한 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아들이 될 거라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
침묵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성적표들 옆에는 다른 물건이 놓여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파이프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자 매캐한 독연이 성빈의 목을 살며시 졸랐다.
"신용이 아니라 신뢰다. 무슨 차이인지는 알고 있겠지."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것들로 얻을 수 있는 게 신용이라면, 그런 것들로는 얻을 수 없는 게 신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신뢰에 대해서 자주 하는 말을 기억하고 있을 거다." "모두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되, 그 누구도 신뢰하지 마라고 하셨었지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어기고 너를 신뢰하고 있다. 작년의 뒤치다꺼리를 포함해서 너에게 들여온 양육비나 교육비 같이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것들은, 네게 보내고 있는 신뢰에 비하면 조족지혈만큼의 가치도 없어."
아버지는 독성의 숨결을 내쉬었다. 성빈은 조용히 입을 닫고 그의 나직한 위협을 경청하고 있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뇌옥에 감금당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내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네가 내 아들다운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 하나만으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투자를 너에게 하고 있는 거다. 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해왔듯이."
이룡은 나직하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얼핏 들으면 졸리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 어린 나직하고 섬뜩한 독기가 성빈의 신경을 날카롭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신뢰라는 것이 신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이유는 신뢰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 위에 말 그대로 한도 없는 신용이 얹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와 같이 그 오가는 신용의 액수가 훨씬 많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신뢰에는 더더욱 커다란 무게가 실리는 법이다. 무게는 힘이고, 또한 그에 정비례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잘못 다루면 그 신뢰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족쇄가 돼서 네 목을 잡아챌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신뢰라는 것을 나보다도 훨씬 경솔하고 멍청하게 다루었다. 내 경고를 잊어버리고 시정잡배들에게 함부로 신뢰를 건넸지. 우정이라는 애매모호한 미끼에 웃길 정도로 쉽게 덥석 낚여서. 그 대가로 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내가 두 번 상기시키지 않아도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네게 충분한 교훈으로 남았으리라 믿는다."
얼핏 들어보면 아들의 삶을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걱정해주는 부모의 말이었지만, 그러나 이룡이 천천히 풀어놓는 그 말에는 성빈을 마비시키고 옥죄는 메시지가 있었다. 허튼 짓 하지 마라. 네 스스로의 의지를 죽여라. 방종이나 일탈은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재단한 대로의 인생을 살아라. 아버지는 나직이, 노골적으로 윽박질렀다.
"저렴한 신뢰를 결코 믿지 마라. 특히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뜬구름잡는 소리로 연막을 치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조심해라. 너를 신뢰한다고 말했던 네 그 건방진 친구들이 너를 얼마나 쉽게 배신했는지는 잘 기억하고 있겠지? 그것들이 내민 우정이라는 부도수표는 네 인품이나 네 신뢰에 대한 보답 따위가 아니라, 네가 쥐고 있는 그 숫자로 매길 수 있는.. 그나마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의 단내를 탐내는 얄팍한 수작질이라는 점을 명심해라."
"내 신뢰의 가치를 증명해라. 최백호의 아들의 삶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짧은 다리로 용캐 여기까지 뛰어온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찰나, 시선에 잡힌 성빈의 몰골이 성치 못했다.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다 젖어버린 체, 그세 피로가 쌓인건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와이셔츠는 젖어서인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호랑은 그 모습을 꽤.. 아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숨기지 못 할 사실이었다. 저절로 눈은 성빈에게 고정되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깐, 나보다 오빠가 다 젖었잖아!"
다리를 방방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으레 보이던 반응. 발 끝을 번쩍 번쩍 들면서 성빈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어떡해, 하는 걱정어린 말을 내뱉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쩌지.. 택시라도 부를까?"
// 어쩌지.. 도게자라도 해야 할까...
매운맛 성빈이 너무 좋아!! 성빈 아빠 무서워서 성빈이 뒤에 숨는 어린 호랑성빈도 생각나고....
짧은 다리로 용캐 여기까지 뛰어온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찰나, 시선에 잡힌 성빈의 몰골이 성치 못했다.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다 젖어버린 체, 그세 피로가 쌓인건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와이셔츠는 젖어서인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호랑은 그 모습을 꽤.. 아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숨기지 못 할 사실이었다. 저절로 눈은 성빈에게 고정되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깐, 나보다 오빠가 다 젖었잖아!"
다리를 방방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으레 보이던 반응. 발 끝을 번쩍 번쩍 들면서 성빈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어떡해, 하는 걱정어린 말을 내뱉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쩌지.. 택시라도 부를까?"
// 어쩌지.. 도게자라도 해야 할까...
매운맛 성빈이 너무 좋아!! 성빈 아빠 무서워서 성빈이 뒤에 숨는 어린 호랑성빈도 생각나고....
다리를 동동 굴러대는 당신다운 반응에, 성빈은 자신이 물뿌리개 반 통쯤을 맞은 꼴을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무방비하게 띄워버리고 말았다. 그는 상대적으로 덜 젖은 바짓단에 슥슥 손을 문질러 닦고는, 물기가 닦여나간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난 비 좀 맞아도 끄떡없는걸.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의 말마따나 성빈은 그 피지컬만큼이나 몸이 튼튼해 잔병치레를 잘 안 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아주 안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걱정을 참지 못하고 꺼내는 말에 "여기까지 왔는데 택시를-" 하고 저만치 앞에 보이는 지하도의 입구로 시선을 돌리려던 성빈은, 생각을 바꿨는지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며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보였다.
짧은 다리로 용캐 여기까지 뛰어온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찰나, 시선에 잡힌 성빈의 몰골이 성치 못했다.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다 젖어버린 체, 그세 피로가 쌓인건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와이셔츠는 젖어서인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호랑은 그 모습을 꽤.. 아니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숨기지 못 할 사실이었다. 저절로 눈은 성빈에게 고정되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깐, 나보다 오빠가 다 젖었잖아!"
다리를 방방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으레 보이던 반응. 발 끝을 번쩍 번쩍 들면서 성빈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어떡해, 하는 걱정어린 말을 내뱉었다.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쩌지.. 택시라도 부를까?"
// 미안........................ 이걸 써두고도 오랫동안 올리지를 못 했다.... 요즘 우울하고 바쁘고 피곤하고 그래서 생각은 계속 했는데 정작 손은 안 가고........ 그래도 언제까지 기다리게만 할수는 없어서 힘 내서 올려본다! 기다려줘서 항상 고마워 !!!!!!!!
사실 답레를 다시 써서 계속 이어가는 건 어떨까 했어. 8v8 호랑주가 새 일상을 시작하고 싶다면 새 일상으로 하자. 지금껏 나온 일상 주제들은 호랑주가 >>644에 정리해뒀던 게 있네.. 호랑이나 성빈이네 집에서 공부하는 상황이라거나, 아니면 이번에는 성빈이 쪽이 앓아눕는 상황이라거나(저번엔 호랑이가 앓아누웠었지) 정도가 괜찮을 것 같은데. 호랑주는 특별히 돌리고 싶은 상황 있어?
주말, 연휴, 어찌 되었든 빨간 날. 화창한 햇살과 적당한 구름, 상쾌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우고 가는, 안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날씨. 장호랑과 최성빈은 함께 있었다.
- 언니야 오빠야 이거봐!!
왜냐하면 또 다른 이웃집의 부부가 갑작스러운 출장을 나가시게 되었고, 아이를 홀로 둘 수도 없고, 급하게 부를 지인도 마땅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불안한 나머지 가끔 반찬이라도 나눠먹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 밖에는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우와! 예쁜 돌맹이네?"
장소는 놀이터. 모래사장의 근처. 유민이(호랑과 성빈에게 맡겨진 아이의 이름이다)는 모래사장의 옆에서 손으로 땅을 파 초록색 돌맹이를 집어들어 성빈과 호랑에게 자랑했고, 호랑은 유민의 옆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다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을 성빈을 힐끔 힐끔 뒤돌아 보았다.
// 유민이는 ... 장치이다...... 둘의 무언가를 이끌어내기위한 도구적 등장인물이다.....
유월 초의 초여름날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포근했던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해져 여름옷을 꺼내어 입어봄직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스치우는 바람은 아직 선선해 나들이하기 좋은 날이 되었다. 성빈은 썩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날씨에까지 집 안을 고집할 정도로 극렬 실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나들이를 나설 때 종종 혼자 나서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여럿이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중에서도 옆집의 소꿉친구와 둘이서 나들이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친구와 어울리면 보통 네 명 이상이었고, 당신과 같이 다니면 둘이기에, 세 명이라는 나들이 인원수는 그에게는 조금 낯선 것이었다. 옆집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큰형과 아는 사이였다고 기억한다-께서 곤란한 일이 생겨, 유민이를 맡기고 간 것이다. 아버지가 알면 남의 집 아들을 보모로 아느냐며 불꽃같이 성화를 냈겠지만,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호랑이 힐끔 돌아보자, 성빈은 잠깐 집 방향을 얼핏 바라보던 시선을 호랑이에게로 돌렸다가 유민이에게로 내렸다. 유민의 손에 들려있는 조그마한 돌멩이- 화분 장식용 옥 자갈임직한 그것을 보고 성빈은 쭈그려앉아 유민과 시선을 맞춰주고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유민을 칭찬해주었다.
에어컨 청소하라고 끌려가는 통에 잠깐 자리 비운다고 말도 못했네.. 88 거기다 내가 애랑 놀아준 경험이 많지 않아서 성빈이 반응이 좀 어색할 수도 있어,, 성빈이가 말한 '병에 담아두고 보면' 은 짤의 이걸 이야기하는 거야. 어릴 적에 몇 갠가 만들어본 기억이 있어서 가져왔어!
한편 정주행 다시 하다가 >>511 보고 생각난 건데 성빈이 호랑이 성빈이네어머니 셋이서 저녁상 겸상하다 갑자기 성빈이한테 앞접시 하나 가져다달라고 보내놓고는 호랑이한테 귀띔해주는 성빈이 어머니... 쟤 저래뵈도 벌써 혼담 들어오니까 잡을 거면 확실하게 잡으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생각이 나고 그래
어린아이의 마음은 쉽게 변덕을 일으키는 법이었고, 그만큼 주변의 어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법이었다. 성빈과 호랑은 어른이 아니였지만 그럼어도 조금 더 성숙한 자로서, 미성숙한 이들에게 의연히 대하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다. 어떤걸 하고 싶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호랑은 유민이에게 물어보았고, 유민이는 큰 눈으로 호랑과 성빈을 번갈아 보았다.
- 소꿉놀이 할래! 나는 아기고, 언니는 엄마고, 오빠는 아빠야!
" 그래? "
별 생각 없이 어린아이에게 맞춰준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히 생각을 더해보니 성빈을 의식하게 되었다. 하면 좋지. 하고 싶은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호랑은 성빈을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면, 당신이 유민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 동안 쭈그려앉았던 무릎을 펴고 일어선 성빈이 초록색 눈동자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당신이 시선을 맞춰오는 것을 눈치채고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만 평소의 그 나긋나긋한 미소가 조금 쑥스러운 기색을 띈 듯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는 미소를 띈 채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 좋아."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괜찮다는 대답이 아니라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그냥 표현을 그렇게 쓴 것일 테다. 그는 유민이도 소꿉놀이가 엄청 하고 싶은 것 같고- 하면서 눈망울을 또랑또랑 빛내는 유민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곁눈질로 호랑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호랑이 수긍하자, 성빈은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유민이가 활짝 웃으며 덧붙인 말에, 성빈은 드물게도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웃는 채로 어색하게 굳으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 성빈과 호랑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대 역할을 붙여버린 유민은 마냥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성빈도 굳었던 얼굴표정을 풀고는, 흠흠 하고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으며 호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자신의 생물학적/사회적 성별에 별 불만이 없던 성빈이었기에, 더군다나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면 이런 모습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미래상을 뚜렷하게 그려놓고 있던 성빈이었기에 유민이 제시한 생각지도 않던 엄마 역할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게 낯설어서 왠지 조금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성빈은 장난기가 조금 동했다. 그리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가 갑자기 가냘퍼졌기에 호랑은 숨을 멈추며 잠시 일어섰다. 발 뒷꿈치를 살짝 들고는 벌써 역할에 몰입해있는 성빈과 유민이를 번갈아보다가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여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들과 아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나는 우리 여보만 좋으면 다 좋지 뭘 이제와서~"
낯을 붉히며 시선은 땅아래로 향하지만 꽤 당당한 말투였다. 유민이도 마음에들어 하는 듯 오오오 하는 소리를 하며 호랑과 성빈을 번갈아 보는 것을 보니... 다음을 기대하는 눈치이다.
멋없는 후드집업 차림인 것이 조금 아쉬운 걸까 성빈은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훑어본다. 괜히 당신을 한 번 놀려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능청스레 대꾸한 것은 좋으나, 제법이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신이 생각보다 굽힘없이 대꾸하기도 했고, 막상 저질러놓고 보니 부끄러운 건 이쪽이라, 얼굴은 최대한 태연하게 웃고 있지만 귓가가 조금씩 따끈따끈하게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호랑이와 같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본 게 있으니 흉내 자체는 어떻게든 가능이야 할 것 같지만...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당신을 보며 운을 떼던 성빈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유민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