쩔쩔매고 있는 당신에게 성빈은 아예 얼굴에 웃음기를 숨길 생각 없이 싱글벙글한 채로 농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렇지만 오빠는 아침에 호랑이 얼굴 보고 싶으니까, 호랑이만 괜찮다면 깨워줄게."
부드럽게 머리를 삭삭 쓸어주고 나서야, 성빈은 자기 몫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고 스테이크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응, 이 정도면 됐네. 혼자 만들어 먹는 것이라면 별 성을 들이지 않고 그냥 대강 익혀서 먹어치웠겠지만, 오늘은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성빈은 생각했다. 스테이크의 별난 점은 그것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고기를 불에다 굽는 건데 정성을 들이고 들이지 않고에 따라 티가 팍팍 난다는 것. 그러다 당신이 프라이팬 이야기를 하자, 성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프라이팬에 낮은 돈까스 망을 받쳐두고 뚜껑을 덮으면 해결될 거야. 우리 집도 보통은 그렇게 해서 먹는걸."
그러면 이제 카레 만드는 법이나 카레 재료 문제만 해결하면, 다음 번에 성빈을 당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성빈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반찬삼아 밥을 먹던 성빈이, 입에 있는 것을 넘기고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당신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찾았다 인증코드 나야말로 지금 이게 꿈은 아닌지 얼떨떨해. 바로 어제 정주행 한번 해보고 눈물이 핑 돌아서 그냥 잠자리에 누웠는데... 응, 그렇잖아도 혐생 관련해서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짤막짤막하게 돌리는 것도 익숙하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652 아, 지금 나가봐야 하는구나.. 혹시 언제쯤 돌아올지 대략적으로라도 알려줄 수 있어? 만나는 지점 같은 경우에는 호랑이가 성빈이네에 놀러왔다가 성빈이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성빈이 방에서 기다리다가, 방에 호랑이가 있는 줄 모르고 비 맞은 생쥐 꼴로 들어온 성빈이가 호랑이 보고 ˚0˚ 하고 놀란다던가.. 아니면 두 사람이 같이 하교하다가 때아닌 급작스런 봄비를 같이 맞았다던가?
아침에 등교 채비를 마치고 대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고 햇빛이 눈부셔 봄기운이 완연했기에, 당신과 함께 나온 성빈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은 좀 덥겠다. 집에 올 때는 마이는 벗어야겠네." 하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시원하게 불던 봄바람이 복선이었을까 점심시간 때에는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봄비가 후득후득 내렸기에 당신의 반 학우들 중에서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이 울상이 되었으나, 또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생들이 하교할 때에는 또 비가 그쳐 먹구름 사이로 제법 하늘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당신의 일주일 시간표 중에는 성빈과 종례 시간이 같은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 되면 성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당신에게 문자를 보내 어디서 만나서 같이 가자고 하거나, 혹은 당신의 반에 찾아오곤 했다.
"랑아."
당신의 금색 눈동자와 소년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마주칠 때,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렇듯 익숙하게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 먹구름이 가시지 않아 음울한 봄의 하늘 아래에서도 소년의 얼굴은 부드러운 온기로 빛나고 있었다.
너무 늦었다아아아8w8!!!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게. 굳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호랑주 일 잘 끝마쳤으면 좋겠다. 일단 상황은 저렇게 써뒀는데, 뭔가 이 부분은 잇기 힘들어서 고쳐줘야겠다거나 이 부분이 좀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줘.
전과 다를 것 없이, 창문을 통하여 인사를 하고 등교를 했던 하루. 장호랑 또한 전과 다를 것 없이 수업에는 집중을 하지 않고 창 밖을 보며 언제쯤이야 지루한 수업이 끝날지를 걱정하기만 했다. 지평선을 가리는 산허리 뒤로 시커먼 구름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하교시간 직전이 되어서야 알아버렸고. 여러모로, 너무 늦어서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상태. 친구들을 보내고 청소도 다 끝난 교실 안에서, 장호랑이 입술을 쭉 내밀고 창 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 비, 비. 내심은 최성빈이라는 멋진 남자가 우산이 있다고 둘이 달싹 붙어서 가는 상황을 생각하기도 하다가, 랑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오빠!"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감사하며 크게 최성빈을 불러보고 쪼르르 걸어나가 바로 앞에 찰싹 붙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성빈의 얼굴을 보다가- 두 손 어디에도 없는 우산의 부재를 발견했다.
"어, 어쩌지 나도 우산 없는데..!"
곁눈질로 창 밖을 보아하니, 금방 끝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시야를 가득 가린 어두운 구름은 저 멀리의 산 너머도 가리고 있었으니까. 단지, 자그마한 바람은 들었다. 날씨도 안좋고 하니까 이대로 비가 그칠 때 까지 같이 있고 싶다고.
당신이 그리던 멋진 남자는 틀림없이 당신을 찾아왔다. 그러나 당신의 예상대로 안 된 점이 있다면, 그의 손에도 우산은 들려 있지 않았다는 것. 애초에 오늘 우산을 가져온 아이들이 별로 없는가, 교실을 삼삼오오 빠져나간 아이들도 교사 현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가, 가방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가, 돈을 모아 콜택시를 부르거나 아니면 부모님 찬스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날씨는 기가 막히게 맑았고. 일기예보에서도 하루종일 맑을 것이라고 보도했던 것이다. 물론 일기예보는 지금 창밖을 보다시피 멀거니 빗나갔고, 성빈도 사정이 그렇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그는 품에 달라붙어오는 당신을 받아안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가져올 걸 그랬다."
매점에도 우산이 안 들어왔더라, 하고 덧붙이며 그는 팔에 걸고 있던 가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따뜻하게 데워진 밀크티 캔을 꺼내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조금 늦더라니 매점에 뭔가 있나 싶어 들렀다 온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기다리면 비가 그칠지 모르니까, 교실이나 아니면 학생회실 같은 곳에서 좀 기다려볼까?"
아니면 택시를 불러도 되니까, 하면서 성빈은 당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글쎄, 어쩌면 그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거나 조금이라도 멎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겠다고.
장호랑은 일기예보를 도통 보지 않는다. 그야 최성빈이라는 멋진 사람이 거의 매일 아침을 깨우러 와주면서, 우산을 챙겨라, 오늘 날이 춥다 정도를 이야기 해 주니 그 정보에 사람에 의존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작 오늘 일기 예보가 틀렸다는 것은 장호랑이 알기에 요원한 일..
"와아, 고마워!"
두 손으로 밀크티 캔을 받아들이고 한 시의 지체도 없이 손으로 까보려 하지만 틱 틱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항상 나오는 패턴이라지, 최성빈이 음료수를 주면 장호랑은 스스로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고, 실패하고, 애처로운 눈빛이나 부끄러운 눈빛으로 최성빈을 올려다 보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그 눈빛에 못 이기는 착한 최성빈이 음료를 따주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부탁을 하는 눈빛이 최성빈을 향해 올라갔다.
"일기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이러네." 하고 어깨를 으쓱한 성빈은, 당신이 캔을 잡고 애처로운 눈길로 올려다보자 뭔가 빠뜨려먹은 것을 발견한 사람의 멋적은 표정이 되었다. 그는 손을 뻗어서 흔쾌히 당신이 든 밀크티 캔을 딱 하는 작고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따서는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결국 당신에게는 어디까지나 착했다. 조금 걱정하는 듯한 당신의 말에, 성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이 학생회실이지, 회의 안 할 때는 임원들 휴게실에 가까우니까 말야."
물론 해당 상황을 딱히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도 임원들이 학생회실을 오용하는 것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고, 2학년 부회장인 자신도 별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회의할 때만 잘 정리해두면 학교에서 뭐라고 태클을 걸지 않는 것도 있었다. 다만, 생각해보면 오늘같은 날이면 학생회 임원들이 너도나도 학생회실에 틀어박혀서 빈둥대고 있을 게 뻔했다. 성빈은 확인을 해보기 위해 학생회 톡방을 열었다.
그러나 톡방에는 마침 학생회장네 집에서 밴을 몰고 왔다고, 임원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학생회장의 메시지가 떠 있었고, 임원들 대부분이 서관 현관으로 나가겠다고 대답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눈치가 보이니 그 밴에 당신을 태워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만 밴을 타고 가는 건 더더욱 절대 사절이었기에, 성빈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따로 가겠다'고 톡방에 메세지를 보내둔 뒤에 당신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비 그칠 때까지 잠깐 둘이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야."
// 그렇다니 날씨가 다시 한 번 거한 낚시를 걸어줘야... 학생회실에서 잠깐 있으면 햇살이 잠깐 비쳤다가, 그걸 보고 나섰더니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기도 애매한 시점에서 비가 다시 쏟아지는 거지..
항상 철두철미한 최성빈이 일기예보 하나를 체크 못 한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고, 결국 오늘 우산이 없는 것은 기상청의 탓으로 돌아갔다. 일기예보가 이렇게까지 빗나갈수도 있나? 작은 의문점을 가지다 밀크티를 받아들이면 그런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고마워! 라는 한 마디를 한 뒤에 한 모금 마셔보면 달고 부드러워서 역시 맛있었다.
학생회실로 가도 되겠다는 성빈의 의견에는 홀린듯 고개를 끄덕이고, 최성빈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회실 안에는 아늑한 쇼파와 테이블, 간단한 간식거리들과 마실 것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구미를 당길만한 것은 없고,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의 수준이었다. 장호랑은 학생회실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우와 나 학생회실 처음 와봐! 하는 감탄사를 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쇼파에 등을 기대었고 창 밖을 보았다. 조금씩 비가 그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당장 기상청 SNS를 켜보면 쏟아지는 항의에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어쩌랴. 기상청 측에서도 이변이라 할 만한 저기압의 급격한 변덕 때문이었는걸. 그래도 시기로 따지면 봄비가 올 때가 되긴 했다. 이 봄비가 멈추고 비거스렁이가 다 불어가고 나면, 비로소 따뜻한 봄날이 시작되겠지. 복장 규정이 춘추복으로 바뀌고, 꽃들이 피어나고. 당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와 꽃놀이를 갈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고 이 3월의 끝자락을 적시는 봄비 덕에, 당신은 이 소년을 조금 더 독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학생회실은 언제나와 같은 모양이었다. 구색맞추기용으로 진열해둔 장식품에 가까운 간식들과, 구석에 놓인 작은 냉장고-보통 차기가 바쁘게 비워지곤 하는-, 예술부장이 가져다놓은 이런저런 만화책들, 학생회장의 고상한 취미가 반영된 플루프 인형 같은 게 놓여 있는 일종의 아지트. 소년이 속해 있는 곳들 중 하나였다.
당신이 소파에 기대어앉자, 성빈 역시도 자연스럽게 당신의 옆자리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창밖의 비는 어느샌가 그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성빈도 그게 보였는지, 당신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얼마 안 있어도 될 것 같다."
삼월 말의 비 오는 날, 느긋한 오후. 침침한 조명 아래, 나직이 비 내리는 소리 가운데, 당신과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