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장호랑쪽의 가족은 많이 바쁜 일이 없다에 가까웠다. 기껏 해봐야 아빠가 출장을 나가거나, 엄마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거나 이니까.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낸다는건 어떤 고독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 으응!"
아주 낯뜨겁고 위험 천만한 헤프닝이었지만 이렇게 받아주는 상냥함에 장호랑은 감동받았다! 눈을 크게 뜨고, 또 총기가 가득하게 반짝이면서 성빈을 보았다. 그리곤 폭 하고 아직 침대에 앉아 있는 성빈의 허리를 끌어안다가 "금방 올게!" 하는 말을 남기고는 창문을 열어 자기 방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번 주말이 특이 케이스인 거야. 어머니는 보통 주말에 집에 계시고, 아버지도 집에 오시니까... 사실 집에서 누군가랑 같이 시간 보내는 건 랑이 쪽이 더 많지만."
하고, 성빈은 자신의 허리를 푹 끌어안아 오는 당신의 머리를 도닥도닥 쓰다듬어주었다. -이 소년에게 있어 당신은 무엇일까? 이웃집 소꿉친구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애완동물 같은? 사랑스러운? 말못할 마음을 품고 있는? 성빈에게 묻는다면 그 스스로는 그 어느 쪽이라고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소년에게 차지하고 있는 이 위치는,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라면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징적이고도 독점적인 위치임에 틀림없었다.
"응, 조심히 다녀와."
당신이 성빈네 집 정문의 초인종을 누르거나 아니면 다시 건널판자를 통해서 성빈의 방으로 넘어왔을 때는, 어느덧 팬에 버터를 녹이는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맴돌고 있었다.
요리를 하는데 방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성빈의 방을 건너서 들어왔는데 주방은 아랫방일텐데 벌써부터 허공에 버터 냄새가 맴돌았다. 자기가 왔다고 큰 소리로 말을 하기 직전에, 좋은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든 체로 살금 살금 내려갔다. 요리를 하는 최성빈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둘 생각이었다. 숨소리도 죽이고 조심 조심...
당신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줄도 모르고 소년은 버터를 녹이면서 온도를 체크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한동안 그가 누워있는 모습만 보느라 잊고 있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키가 퍽 컸다. 커다란 키, 그 반면에 온순한 성질을 짐작케 하는 부드러운 연갈색의 머리카락의 뒷모습. 그는 파자마 차림에 윗옷만 가디건으로 갈아입고 나서 그 위에 베이지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키가 크는 바람에 조금 짧아진 파자마 바짓자락의 아래로, 실내화를 꿰어신고 있는 발과 함께 그의 발목과 복사뼈가 매초롬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리네이드해 놓은 채끝살을 한번 집게로 뒤집어보고 있는 그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것에 열중하느라 당신이 그렇게까지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모습이 장호랑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까. 작년에도 저 옷 입었었는데, 분명 저렇게 작지는 않았었을텐데. 오빠 일년만에 키 엄청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벽, 또는 기둥 뒤에 숨어서 아주 조용히 심호흡을 한 다음에 핸드폰을 다시 켰다. 사진으로 꼭 찍을거야. 대대손손 물려줄 가치가 있는 모습이다. 마음을 먹고 몸을 살짝, 팔을 쭉 뻗어 성빈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약간 각도가 부족했다. 그래서 한 쪽 발도 까치발로 서고 조금 더 더 팔을 뻗다가
"힉." 당신이 옆으로 나자빠지는 소리에 소년은 어깨가 움찔하는 게 당신 눈에 보일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앗 뜨...!" 그 바람에 뜨거운 팬에 손 어딘가 닿은 건지, 소년은 또 한 번 더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 직후, 성빈은 집게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내려놓고 당신에게로 후닥닥 달려왔다.
"호랑아, 괜찮아?"
하고 소년은 당신이 자빠지면서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본다. 그런 그의 손가락 중 하나에 살짝 빨간 자국이 남아있는 게 보였다. 가벼운 1도 화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후다닥 달려오기 전의 행동들이 딱 봐도 데인 것 처럼 보여서 눈을 땡그랗게 뜨면서 되려 호들갑을 떨었다. 몸을 펄떡 일으켜 세우고 달려오는 성빈의 손을 잡아서 자세히 보니 역시 데였다..
"나는 괜찮은데 오빠가 안 괜찮잖아.... 미안..... 아니! 그것보다 빨리 물에 씼어야지!"
자기가 사과하는 것 보다는 성빈이가 다친 것을 조치하는게 우선이었다. 빠르게 성빈의 손을 잡고 싱크대 까지 가려고 했다. 찬 물에 손을 씻으라고 말을 한 다음에는 다시 후다닥 뛰어다니며 응급상자를 찾았다.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안다. 어렸을때 성빈이 집에서 놀다가 가구에 찍히거나 넘어져서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흰색 응급상자 안에는 적당히 연고와 밴드가 있어서 그걸 가지고 갔다.
라는 대답을 끝맺기엔 당신의 행동이 너무 빨랐다. 당신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싱크대까지 잡아끄는 서슬에는, 그 큰 체구의 성빈도 할 수 없이 끌려오다시피 따라왔다. 당신이 약통을 찾아왔을 때는 성빈은 찬물에 환부를 담그고 있다가 꺼내고 있었다. 그는 키친타올로 손의 물기를 닦은 뒤, 손을 당신에게 내밀었다.
"괜찮을 거야. 물집도 안 잡혔는걸."
자 봐, 하듯이 소년은 당신에게 데인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확실히 물집도 잡히지 않은 그냥 빨간 자국뿐이다. 이 정도면 연고를 발라두면 이틀쯤 뒤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낫게 될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이 내민 이 손가락은, 10개나 되는 손가락들 중에서 하필이면 왼손 약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화를 내기엔 이 소년은 너무도 물렀다. "다음번에는 불 앞에 있을 땐 놀래키지 말기... 알았지?" 하고, 손에 밴드를 감아주는 당신을 다독이듯이 타이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문 편이었다.
고기는? 하고 화들짝 놀라 팬을 돌아보는 당신을 맞이하는 것은, 아직 트레이에 얌전히 놓여있는 마리네이드된 날고기와 반쯤 녹아있는 버터 덩어리였다. 고기는 아직 굽지도 않고 버터를 녹이던 와중에 손을 덴 것이고, 당신이 구급통을 가지러 갔을 때 다행히 성빈의 사고는 가스불을 꺼놓는 데에까지 닿았다.
구김살 없는 네 모습이, 아니 조금 구겨지더라도 금방 밝게 떨쳐내는 네가- 좋아, 하고 마음 속으로 다음 마디를 되뇌이려다 성빈은 내심 흠칫 놀라고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레 접어 숨겼다. ...너랑 있으면 자꾸 바보같은 생각이 들어. '내게 충분한 것' 이라고 그어놓은 선에서 자꾸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게 돼. 성빈은 당신을 부드럽게 두어 번 더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당신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밥? 전원이 꺼져 있네... 아마 밥이 얼마 남지 않아서 따로 퍼다가 냉장고에 넣어놓은 모양이야."
그의 말을 듣고 냉장고를 열어본다면, 딱 2인분 정도의 밥이 밀폐용기에 담겨져 있는 게 보일 것이다.
"밥도 데우고... 혹시 괜찮다면 야채칸에서 양파랑 그린빈이랑 아스파라거스도 좀 꺼내줄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헤헤 하고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뭐가 엄청 많네. 음료수에 각종 야채에 과일에...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훅 지나가 버릴 것 같았으므로 성빈이 요구한 것들을 적당히 꺼내서.... 잠깐 적당히가 어느정도지? 일단 밥은 뒤로 빼놓고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두꺼운 아스파라거스라 이걸 몇 개를 집어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린빈은 봉투에 담겨져 있었으니 꺼내서 성빈 옆에 두었고, 다시 돌아와서는 고민을 한다. 사람 엄지손가락 만큼 두꺼운 아스파라거스는 과연 둘이서 먹기에 몇개가 적당한가.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망고가 있다. 식후 디저트로 괜찮을 것 같다. 당신이 아스파라거스 4대를 집어 성빈에게 건네주자, 성빈은 그것을 받아다 우선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양파는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구나?"
하고, 성빈은 야채들을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버터가 다 녹자, 그는 집게로 소고기 덩이를 잡아서는 팬 위에 올렸다. 치이이- 하는 귀가 즐거워지는 굉음과 함께, 버터향과 섞여 나는 고기 지져지는 냄새가 확 치솟아올라오며 주방을 감싸기 시작했다. 성빈은 고깃덩이 하나를 더 올려놓고는, 치이익 하는 소리를 등지고 호랑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성빈은 다시 팬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고기덩어리를 척척 뒤집더니, 뒤집어진 고기 위에 조그만 숟가락으로 연신 녹은 버터를 떠올려 끼얹었다. 고기가 차차로 익어가는 냄새가 풍겨나왔다. 성빈의 귓가에는 당신이 야채를 다듬는 소리가 도닥도닥 하고 울렸다. 문득 성빈은 어릴 적, 말 그대로 소꿉친구답게 당신과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성빈은 그 다음에 무심코 이어지는 말을 꺼내려다가 참았다. 정말, 왜 너랑 있으면 이렇게 입이 제멋대로 바보같은 소리를 하려고 드는 건지 모르겠어. 입을 꾹 다물고 성빈은 빠르게 단어를 골랐다. 그 동안 말이 끊긴 채로 2~3초 정도가 흘렀다. 그러고 나서야 성빈은 얼버무리는 다음 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