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팔힘에도 성빈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밀려나곤 했다. 딴에는 안간힘을 쓰는 당신의 손길에 한쪽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도 성빈은 마냥 밝게 웃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도 같은 이 안락한 일상... 그래, 이거면 충분해. 하고 소년은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이상을 욕심내고 싶지는 않다. 아니,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빈은 그 욕심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꽤나 익숙했다.
"글쎄- 반이 아니라 내 학년 애들 중에도 딱히 얘랑은 같은 반 되기 싫다, 할 정도로 사이나쁜 애는 없으니까, 별 문제는 없어."
갑작스런 성빈의 접근에 잊고 있었던 점이 하나 있다. 이 인간이 핵인싸라는 점. 1학년 때도(몇몇 미심쩍은 구석이 없지 않았고, 이상하게 그 때는 당신과 영 소원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그는 매사에 상냥하고 믿음직스럽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은 친구였다. 그가 자기 이야기를 당신에게 딱히 풀어놓지 않더라도, 적어도 교내에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칭찬일색이었다.
당신 이외에도 그를 좋아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많았다.
어느덧 저만치서 교문이 조금씩 가까워오는 것이 보인다. "랑이도 별탈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더... 잇고...싶으나... 성빈주 기력이 마이 딸려... 텀도 길어지고... 88 혹여나 호랑이의 다음 답레에 내가 유체이탈하거나 심쿵사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기력이 딸려서 리타이어해버렸다고 생각해줘 8-8 생각같아서는 랑이랑 같이 이 밤의 끝을 잡고 싶은데 그건 주말에 노려보는 걸로...
저렇게 귀여운 애랑 17년 동안 알고 지냈는데 호감도가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수준일 리가 없지0v0! 다만 내색을 안합니다. (한 200레스쯤 뒤에는 이 레스를 링크걸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같은 짤을 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답레... 다음 답레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레스를 볼 수는 있을 것 같아. 기왕 좋은 기분으로 아침 시작할 거면 기분좋은 꿈도 꾸고 싶거든(욕심) 그리고 호랑주한테 잘 자라는 인사도 해주고 싶고..
한 평생 같이 지내면서 빼빼로 데이나 화이트데이, 발렌타인 데이 처럼 자신의 인기를 자랑 할 수 있는 날에는 언제나 두 손 가득 선물을 이고 오던 성빈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나보다. 문득 이렇게 대외적은 성빈의 평판을 확인하게 되면 앗, 하고 주춤하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지금의 관계는 아주 아주 우연한 결과였고, 언제 급변할 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또 고백을 하고, 성빈이 그걸 받아주게 된다면, 지금의 호랑은 붕 뜬 체로 가식적인 축하를 하고 옅어지는 관계를 파탄내지 않고자 스스로 거리를 두어야 할 테니까. 그런게 싫었다. 확실하지 않은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순간들이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는 더 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움에 가까운 거겠지. 호랑이가 아는 성빈이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이런 두려움에 긍휼하게 대해줄 것이고, 그러면 이전처럼의 겉모습을 보여도 신경써줘서 이러는지 진심인지 의심을 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런 의심마저 들키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작은 싫음을 꾹 삼키고 있어야 했다.
"걱정은 오빠가 되거든요~ 맨날 커튼치고 집에도 늦게 등어왔던 사람이~"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가 저 멀리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성빈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친구를 보았다. 그래도 신발 갈아 신는 것 까지는 같이 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친구한테 가는게 좀 더 자연스럽겠지, 하는 순간의 계산. 아니, 사실은 신발도 같이 갈아신고, 계단도 같이 오르다가 1학년 반 앞에서 안녕 하고 손 흔들고 헤어지고 싶었지만.
"저기, 저기 내 친구! 나 그럼 먼저 갈게! 오빠 나중에 봐!"
손가락으로 아까 봐 두었던 친구를 가리키며 방방 뛰다가 성빈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달려나갔다. 그래도, 하교할 때 볼 수 있으니까.
하고 성빈은 손사래를 쳤다. ─당신에게 주어진 입지가, 당신과 성빈의 관계가 그저 우연의 소치일 뿐일지라도, 당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명백히 존재했다. 가령, 빼빼로 데이나 발렌타인 데이 때 의리로 주는 것은 받아도 진심으로 주는 것은 단 한 번도 승낙한 적이 없었다던가. 화이트데이 때 의리로 주는 기성품 캔디 몇 개가 든 봉지 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것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던가.
여기서 한 가지, 당신만이 알고 있는 아주 고무적인 점은, 성빈은 이따금 간식을 조금씩 즐기곤 했는데 유독 화이트데이 날은 빼놓지 않고 이런저런 맛있는 간식을 구해와서는 당신과 함께 니눠먹곤 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가 영 수상쩍고 잘 보이지 않았던 작년마저 화이트 데이 간식은 빼놓지 않았었지.
성빈에게 그것은- 그리고 당신은 소중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깨뜨리지 않고 세워놓은 계란처럼 아슬아슬하게 맞춰진 일상의 균형에 올려진 평형추들 중 하나. 별다른 흔들림 없이, 심장이 터질 듯한 기쁨도 없이, 그러나 척추에 박히는 고심거리도 없이, 평온하게... 그냥 그저 그 평온의 한 편에, 네가 지금껏 있어왔던 것처럼 있어주면 좋겠어. 하는 작고도 아주 잔인하기 그지없는 욕심이 그의 마음 속에 놓여 있었다.
"이제 그럴 일 별로 없을 거라니까."
하고 성진은 조금 안쓰러운 미소를 짓다가, 당신이 자기 친구에게 아는 체를 하며 나중에 보자고 인사하자 당신과 당신의 친구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내심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성빈주가 감당하기엔 조금 강한 주제라고 생각되긴 해, 응... ^q^ (하얗게 탈 성빈이와 성빈주 모습이 눈에 선함) 하지만 아마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아마 얼굴 하얘진 성빈이를 호랑이가 신나게 놀려먹는 구도가 되지 않을까(?) 아직 대답 안했다고 어쩔까 승낙할까 말까 하고 애태우려 하면 상황이 크게 악화되겠지만.
이따금 창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똑똑똑, 하고 세 번. 2층 창문인데 노크라니, 보통 같으면 고층의 창문을 두드리는 노파 괴담으로 이어질 법한 이야기였지만, 당신에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신의 방에 난 창문들 중 옆집으로 난 창문을 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코앞에 창문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의 옆집에 사는 소년의 방의 창문이다.
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느리지만 일정한 박자로 정갈하게 세 번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성빈이 노크를 하는 소리다. 사람마다 노크 소리가 조금씩 다르지만 성빈이 하는 노크는 정말 그다운 특징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이 가장 자주 들었을 노크 소리였기에 당신에게 좀 더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방과 후에 당신의 창문 너머로 노크소리를 흘릴 만한 사람이 성빈밖에 없기도 했지만.
"랑아!"
그 소리를 듣고 창문을 열어보면, 양말 바람으로 테라스에 나와서는 당신의 창문까지 손을 뻗어 노크를 하느라 난간을 쥐고 팔을 쭈욱 뻗었던 성빈이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일 것이다. 한 손에는 크레페 케이크가 들어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성빈은 단 것이며 이런저런 간식을 좋아해 이따금 즐기곤 했는데, 그래서 이따금 맛있는 간식을 들고 이렇게 당신의 집 방문을 두드리는 날이 있었다. 그렇지만 특정한 날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방문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오늘, 3월 14일이었다.
하교길은 친구들에게 떠밀려서 오느라 들키지 않았지만 가방 안에는 평범한 남고생이 선물할 법 한 꽃다발과 초콜릿, 그리고 장문의 연애편지가 있었다. 가방을 끌어 안은 체 침대에 앉은 장호랑. 학교에서 보았을 때는 열심히 쓴 흔적도 보이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대답은 나중에 해주겠다고 하고 집까지 와버렸는데. 이걸 정말 어쩌지....
똑똑똑 하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 하고 랑아! 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에야 "어?!" 하고 깜짝 놀라며 방 안 에서 움찔거리는 소녀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커튼이라고는 필여할 때나 치고 지금은 치지 않았으니까 훤하지.
"어, 어, 무슨일이야...?"
드르륵 하고 문을 열고 얼굴만 빼꼼 내민 체 성빈을 바라보았는데, 사실 무슨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날의 이벤트를 몸소 체험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숨겨야 하나, 아니면 상담을 받아봐야 하나.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고백을 받는다는게.... 고백받은 경험이 많은 성빈이라면 성숙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어찌되었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무스하게 넘어가기는 글렀다- 창문을 열었을 때 성빈의 얼굴에서 희미해지는 미소와, 미소가 사라져가는 자리를 채우는 걱정 가득한 눈빛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당신의 상황이었다. 하긴 당연하다. 당신과 알고 지내 온 세월이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금방 알아챌 수 있겠지. 참, 이럴 때 보면 당신이 붙들고 있는 지금의 이 입지는 양날의 검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무슨 일이냐니. 그냥, 간식 먹자고. 크레이프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인지하고 사전에 준비해서 당신을 방문하는 것이지만, 그는 항상 갑자기 언뜻 생각나서 들렀다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 얇은 크레페가 겹겹이 쌓인 사이로 딸기맛을 첨가한 듯한 분홍색 크림이 듬뿍 들어 있는 게 보이는 그 크레이프 케이크는, 확실히 맛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달뜬 대답과 행동. 본인 딴에는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고 노력한 결과지만 잘 아는 사람의 눈에는 무슨 일이 있다고 뻔히 들여다 보일 것이다. 창문을 드르륵 열고 테이블이 테이블이 소리를 하며 침대 및에서 낮은 원형테이블을 꺼냈다. 이렇게 와서 같이 무엇을 먹는 일이 잦다 보니까 아예 하나 장만해둔 것을 몇년째 쓰고 있는 녀석이다. 성빈이가 매일 보는, 분홍색과 흰색이 테마인 방. 상어인형도 침대 위에 있었고 다를 것은 없었으나 단 한가지, 책상 앞 의자에 걸린 가방이 불룩했다.
"바쁘진 않은데..."
침대에 걸터앉고는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움직인다. 시선은 자꾸만 성빈의 눈치를 살피었다. 스스로도 거짓말 하는 것을 못 한다고, 잘 알고 있으니까 빠르게 털어 놓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말을 힘겹게 해보았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말 하기 힘든 이유는 또 뭐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했다고 해도 성빈의 태도가 유별나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익숙한 동작으로 자기네 테라스 한 편에 놓여져 있는 두꺼운 건널판자를 테라스 난간 사이에 걸치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질 뿐이다. 성빈이 호랑의 방으로 건너오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의 방에 양말바람의 발을 들여놓은 소년은 이내 난간에 걸쳐져 있던 건널판자를 익숙한 손길로 당겨 당신의 방 창문 테라스에 기대어놓고는,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을 탁 닫았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하고 성빈은 차분한 톤으로 말하면서, 당신이 꺼내어놓은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다가 자신이 가져온 크레이프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이것 하나를 다 먹고 나면 잠자리에 들기까지 딱 알맞게 더 뭔가 먹고 싶은 생각 없이 밤을 보낼 수 있을 만한 크기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켜도, 결국 당신이 털어놓을 것임을 안다.
"......?"
그러나 당신이 털어놓은 내용은 성빈에게도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잠깐이지만, 당신은 성빈의 얼굴에 스쳐가는 뜨악한 충격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눈 한번 깜빡할 순간 스쳐간 그 축소된 동공이 뒤흔들리는 모습은 성빈이 눈 한번 깜빡하자 사라졌지만. 조금은 낯익지 않은가? 그의 얼굴 위를 잠깐 깜빡이듯 스쳐지나간 그 충격이? 하지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는 성빈의 표정은 다시 원래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연한걸.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생기지 않은 게 이상하지... 랑이는 누가 봐도 사랑스런 애니까.
"─아하하. 뭔가 했더니. 하긴, 호랑이같이 귀여운 애라면 오히려 여태껏 고백 한 번 못 받아본 게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했어?"
잔뜩 긴장하며 말을 꺼내 놓았고, 찰나였지만 충격적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긴장되는 마음이 애간장을 태워먹는다. 침을 꿀꺽 삼키고 큰 눈으로 성빈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그 짧은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어릴 때 이빨을 뽑으면 마시는 마취가스를 잔뜩 마신 것 처럼 자신과는 멀리 멀리 떨어져서 현실감이 상실할 것 만 같은 기분마져 들었다.
"우- 으...! 그렇게 가벼운 일이야?"
아하하 하고 웃으며 대답해주는 성빈에게 억울하다는 눈빛을 잔뜩 보내다가 눈쌀을 찌푸리고는 침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하긴. 호랑에게야 특이한 일이지 성빈에게는 일상같은 일일 것 아닌가. 상어 인형을 끌어안고 눈동자만 빤히 성빈을 올려다 보았다.
한 순간의 격랑이 거짓말이라도 된 것처럼, 당신의 말에 대답하는 성빈의 태도는 명경지수처럼 말갰다. "그러니까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려고 했던 거야." 당신이 침대에 드러누워 버리자, 성빈은 당신 침대 머리맡에 팔짱을 낀 팔을 얹고는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당신의 머리와 가까운 위치에 말이다. 성빈의 초록색 눈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얹어둔 크레페 케이크는 그만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응... 그렇구나. 아직 대답은 못 해준 거지."
그리고, 잠깐 침묵이 뒤따른다. 마치 쉬는 시간 교실에서 다 함께 왁자하게 떠들다가 어느 순간, 별안간 단체로 모두가 합이라도 맞춘 듯이 조용해지는 별난 순간이 떠오르는 그런 별난 침묵이다. 그 잠깐의 침묵이 따른 뒤에, 성빈은 조심스레 질문을 꺼낸다.
"랑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하고, 짐짓 태연한 척. 그렇지만 이 문장에서 '짐짓 태연한 척' 이라고 드러내놓고 성빈의 심리를 서술한 이유는, 당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짐짓 태연한 척하는 것도, 당신에겐 어딘지 낯익은 태도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