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바로 누운 것이 아니라 가로로 누운지라 발이 허공에 둥 떠있었고, 그런 발은 호랑이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동동거리며 움직였다.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저 사람은 내가 초조해 하는 이유가 뭔지 알기는 하고 그런 말을 하는걸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장호랑은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며 그 순간에 얼어붙었다가, 상어 인형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시선처리를 하기 힘들 때는 종종 보이는 버릇이다.
"응."
그리고 침묵. 차라리 말이야. 고백해준 그 남자애가 첫사랑도 잊을 만큼 멋진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그럭 저럭 괜찮았을 뿐이고 눈 앞에 보이는 사람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평범해서.
닿는 것이 있었고, 닿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당신의 초조함은 닿았건만, 당신을 초조하게 애태우도록 만드는 원인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상어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이빨들 사이로 빼짓이 내미는 당신의 금빛 눈이 살며시 상어 이빨 사이로 내밀어질 때에는 성빈은 자신의 눈을 말없이 당신에게 맞추어주려고 했다. 문장을 불확실하게 적은 이유는, 당신이 눈을 마주치면서 건넨 질문에 그의 말문이 턱 막혔기 때문이리라. 성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갈가리 찢어졌다가, 다시 애써 봉합한 삶이 문득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성빈은 느꼈다. -내 잘못이야.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시인했다. 전부터 시인해 오던 사실이었다. 당신을, 장호랑을... 장호랑의 존재를 자신의 균형잡힌 삶의 한 조각으로 멋대로 끌어당겨다가 같이 꿰메어놓았다는 것 말이다. 당신의 허락마저 맡지 않고. 항상 상냥하게 웃으면서 다독여주시는 어머니, 맛있는 아침 밥상, 아침 햇살을 맞으며 걸어가는 등교길, 학교에서 보내는 나날들, 그리고... 당신. 하교길에 같이 걸어가는. 집 앞에서 헤어져 놓고는, 방에 들어가서는 메신저로 수다를 떨거나, 종종 아예 창문을 열어젖히고는 얼굴을 맞대고 같이 수다를 떨어주는 당신. 최성빈의 평범한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이기적인 짓이었다. 이렇게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성빈은 생각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행복 또한, 스스로가 준비됐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바뀔 수 있는 법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애써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누가 또 고백을 하고, 호랑이 그걸 받아주게 된다면, 지금의 성빈은 붕 뜬 채로 가식적인 축하를 하고, 옅어지는 관계를 파탄내지 않고자 스스로 거리를 두어야 할 테니까. 당신은 진작에 그것을 깨달아 알고 받아들이고 속으로 앓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 소년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 대답을 하기까지는 이삼 초 정도의 침묵이 더 필요했다. 소년은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하고 소리지르려 했다.
"랑이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하고, 승낙하고 싶다면 승낙하고. 어느 쪽이든 도와줄게."
그러나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은 너무도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말이었다. 안개가 옅게 낀 것처럼 흐린 미소와 함께. 준비되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거만하고 오만한 만용인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할 참인가?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당연한 일" 이라고 한 주제에?
뭘 기대한건지. 약간 떠본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상대의 긴 침묵도, 고백 받았다고 말했을 때의 충격도, 그냥 상정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걸까.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성빈은 상어에게 가린 호랑의 표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장호랑은 고백을 거절할 생각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는 일은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며, 전혀 하고싶지 않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뺏기는 일이니까.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잃어버리니까. 진전하지 못 하는 상태여도 좋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쌓아온 관계를 무너트리기 싫다는게,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보다 컸으니까.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확실한 불행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
"누구 사귄다거나, 그런거 별로 관심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거절할건데 어떻게 하는게 좋으려나."
침착해진, 정확히 표현하자면 생각에 압도되어서 감정이 나오지 않는 상태로 돌아 누워서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도와줄거야. 분명 잘 알거야.
성빈은 괴어놓았던 턱을 들고는, 침대에 엎어놓다시피 기대어놓았던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벽 쪽으로 끌어서는 그리고는 다리를 쭉 펴곤 벽에 기대어앉았다. 저렇게 다리를 쭉 펴고 양 손으로는 땅을 짚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테디베어가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마침 곱슬곱슬 갈색 털인 것도 참 닮았다.
성빈은 호랑의 얼굴에서 상어를 치워버릴 만큼 모질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버린 호랑을 위해 다른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상대를 위해 눈감아주는 버릇이 상대를 보는 눈을 멀게 하듯이, 놓치고 싶지 않은데도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교하게 쌓아온 관계를 무너뜨리기 싫다는 게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보다 컸으니까. 일상의 조각 하나가 이빨 흔들리듯 뒤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것이- 그 충격이 겨우 일상의 조각 하나가 흔들리는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큰 진동이었다는 것을 눈먼 소년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것이 이렇게 흔들린다면 너무도 쉽게 또다른 조각을 찾아 대체해버릴 수 있겠지만, 당신만큼은, 자신의 삶에 위치한 장호랑이라는 소녀만큼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이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던 자신의 눈가가 사르르 풀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은 알아챘을까?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걔를 위해서든, 너를 위해서든."
당연히 잘 안다. 마음에 없는 고백을 밀쳐내는 것은 성빈에게는 손쉬운 일이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자신의 삶에 얹혀 아슬아슬하게 잡아놓은 밸런스를 흩뜨리려는 외부 요인을 비정하게 밀쳐내 버리는 것은 그에게 꽤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걔한테 받은 것들... 온전히 보관해뒀다가,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 돌려줘. 미안하다는 말 해 주고."
자신도 생각했었던 거절 방법이었지만 역시 남의 입으로 듣는 감회는 달랐다.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이기도 하고, 진짜 싫은 일이기도 해서 내는 칭얼거리는 소리를 낸 다음 다시 옆으로 돌아 누워서 얼굴을 올려다 보는 일 없이 성빈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길고 곧아서 예쁜 손가락이라고 언제나 생각한다. 손톱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답레 쓰면서 푸는 TMI) 성빈이, 삼남 이녀 중 막내라면서요. 위로 형이 둘 누나가 둘이라는 소린데. 형이랑 누나들은요? 맏형(11살 터울)은 유부남. 가정을 꾸려 독립했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일그룹 사옥에서 출퇴근하고 있으며 아버지보다도 집에 얼굴 비추는 일이 적은 레어한 존재. 큰누나(9살 터울)는 국립 발레단 소속 발레리나. 반쯤 독립하다시피 했고,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고... 오, 이거 성빈이네 큰누나 결혼식 일상 돌릴 수 있겠다. 이걸 매직짱구가 작은누나(6살 터울)는 경영학부 박사과정 밟는 중. 신나는 대학원 생활 덕분에 맏형급으로 집에 얼굴 잘 안 비춤... 아니 못 비춤. 작은형(3살 터울)은 현재 미대 재학 중. 기숙사를 얻어서 들어갔는데 성빈이가 주말에 호랑이네 집으로 슬금슬금 놀러오는 거랑 비슷한 이유로 주말에는 얼굴을 잘 안 비추고, 주중에 종종 집에 다녀감.
분명 은유인데 직유 수준으로 무섭고 섬뜩하게 날아와 꽂히는 비유다. 성빈은 이따금 정말 태연한 표정으로 소름돋는 상상을 유발하는 말을 던지곤 했다. 당신의 칭얼거림 같은 손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이 만지작댈 수 있도록 손을 내어준 것은, 당근과 채찍에서 당근 부분인 걸까? -아니, 그는 당신이 그의 손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것을 기꺼이 내주곤 했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당신이 손에 어떤 짓을 하던지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그의 손은 퍽 컸다. 그리고 따스했다. 당신의 얼굴 절반 정도는 쉽게 파묻힐 수 있을 만큼.
"힘내."
이 정도 코멘트면 좋으려나. 하고 성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녀석이 몇 반의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일에 대비해 주목해둬서 나쁠 것 없겠지. 벽에 기대어앉은 채로, 성빈은 발등으로 테이블 다리를 걸어 자기 쪽으로 지익 끌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케이크 포장 뚜껑을 벗긴 뒤, 동봉돼 있던 플라스틱 포크를 집어들고 크레페 케이크를 한 조각, 한입 크기로 잘라내서는 포크에 꿰어 들어올린다.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를 냈다. 치과 치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지.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 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확실히 덮어두고 없던 셈 치기에는 확실하게 병증이 깊어질 사건이었다. 사람의 고통이 깊어가는걸 본인이 싫다는 이유 만으로 좌시하기에는 너무나 상냥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니, 당장 내일 서투른 조치의 흔적이 보일 것이다.
"오빠..."
사람을 그렇게 까지 아이 취급 하는 거냐는, 싫은 눈빛을 보냈지만 크레페 케이크는 정말 맛있어 보였다. 아주 아주 어릴 적에는 거리낌 없이 냠냠 잘 받아먹었다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물론 상대에게 그럴 의도는 전혀 없을 것이고 아이 취급이나 받고 있을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관계의 특수성에서 오는, 유사연애적 행동을 마다할 만큼 배부른 사람은 아니였다.
랑아. 나 말야, 지금 안심하고 있어.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고 몸서리치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성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런 천박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심지어 그 사실을 기뻐해버리고 만 자기 자신에게 새삼 깊은 혐오를 느꼈다. 안심해버렸다. 그만 안심해버렸다. 나의 삶에 꿰매어져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조각들 중 하나인 당신이 손 끝에서 영영 떠나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아니구나.
그거면 됐어.
그러나 성빈의 마음에는 덩어리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 무게 자체로는 성빈의 삶의 균형을 깨뜨리기에는 충분치 않은 정도의 덩어리였으나, 그것은 폭약 덩어리였다. 언제 터질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고 터지는 것은 확실히 예정된 불길한 폭약.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거리를, 딱 지구와 달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같은 궤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는 예정된 운명이었다... 당신은 언젠가 떠난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성빈은 포크로 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조각 크게 잘라 당신에게 내밀었다.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이는 하데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 그만해, 멍청아... 당신에게 포크를 건네는 성빈의 귀가 빨개졌다. 공연히 이상한 심술이 났다. 성빈은 쿡, 하고 겹겹이 얇은 크레페 사이로 배어나온 분홍색 크림을 당신의 뺨에 콕 찍어 묻혔다. 그러고서야 그는 호랑의 입에 그것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성빈이 겪는 고난은 몰라주고 장호랑은 온통 달큰한 상상 뿐이었다. 그야 이렇게 포크로 떠서 먹여주고 받아먹는건 꽤나 연인스러웠으니까.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틀림없이 사귀는 사이로 보였을 테고. 그러면 결국 사귀는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찼어서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볼에 생크림을 쿡 하고 묻히고 난 다음에야 크레페를 입에 넣어주기 전 까지. 당황스러웠는데 그것을 토로할 입이 없어서, 천천히 크레페를 씹음과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고 성빈을 올려다 보았다.
얼굴에 위장삼아 띄워놨던 자상한 미소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흐뭇한 웃음으로 변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케이크를 우물거리면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성질은 나는데 입에는 맛있는 게 들어와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한 짜증이 한가득 담겨 있는 토끼 같은 얼굴을 보자면 누구라도 얼굴에 엄빠미소를 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맛있어?"
성빈은 얄궂게 물어보며, 당신의 뺨으로 손을 뻗어서는 엄지손가락으로 호랑의 뺨에 묻은 크림을 슥 닦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기 입으로 아무렇지 않게 가져갔다. 그러다 이내 크림 사이로 옅게 올라오는 화장품 맛에 눈을 깜빡였지만... 화장품 맛에도 방금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에 대한 자각은 딱히 없어 보였다.
순간적인 사건에 장호랑의 얼굴에 전체적인 핏기가 확 돌았다. 갈 곳을 잃은 손들은 잠시나마 허공에서 무언가를 주무르듯이 작게 꼼지락 거렸고, 말 대신 헉 하는 숨 소리만 나왔었다. 꿀꺽 하고 크레페를 급하게 삼키고는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상어 인형을 끌어안으며 침대에 몸을 던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