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성빈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옥상이 이 정도로 깨끗해지는 데엔 이런저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지만,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굳이 입을 놀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성빈의 손을 쥐었을 때는, 성빈의 손이 어째 평소보다 조금 따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신과 함께 당신이 봐둔 자리로 움직였고, 이내 당신이 점찍은 자리에 당신과 함께 앉았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네."
그러다 성빈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곤 중얼거렸다. 작년 겨울의 상쾌한 차가움이 가시지 않은 봄의 하늘은 아직도 높고 푸르렀다.
적당하게 그늘이 진 곳에 앉은 장호랑은 밝게 웃으면서 봉투 안을 뒤적거렸고, 자신이 먹겠다고 한 크로와상 샌드위치랑 딸기우유를 꺼낼 수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빨대를 못 챙긴 점이 아쉽긴 했지만 이정도야 종이팩을 열면 되는 일이었는데 생각처럼 되지는 않아서 더 힘을 주다가 성빈에게 넘겨주었다. 종이팩도 못 까는게 아니고 안 까지는 종이팩을 못 까는거다!
"벚꽂도 아직 다 안 졌을테고 옷 예쁘게 입고서 벚꽃 유명한 공원 같은데 가면 좋겠다. 그치?"
새로 사놓고 못 입은 원피스 라던게 아직 있었으니까, 봄이 되기 전에 한 번 입고 나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아깝지 않을텐데.
깔끔하게 열린 종이팩을 보고는 성빈을 보다 다시 종이팩을 보았다. 대체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해야 우유 곽의 제조과정과 그 과정에서 주로 일어나는 오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인지 장호랑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고마워, 라고 말을 하고는 우유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앗 그럴까? 그럼 이왕 가는 김에 프랜차이즈 말고 수제버거 먹으러 가자!"
육즙과 치즈가 줄줄 흐르는 수제버거를 떠올렸고 침을 꿀꺽 삼켰으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상상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크로와상 샌드위치. 묘하게 씁쓸해진 기분으로 한 입 베어물었더니 맛은 좋았다.
"나도 같은 일을 몇 번인가 당한 적이 있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데 나오더라구... 잡지식이 늘어버렸어. 이젠 랑이도 잡지식이 늘었네."
성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현대 인터넷은 잡지식의 보고라더니. 이런 잡다한 지식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뜬금없는 데서 접할 수 있다... 그러다 당신이 한 술 더 떠서 수제버거를 먹자고 제안하자, 성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랑이랑 먹으면 뭐든 맛있을 것 같아."
그리고는 성빈도 자기 몫의 햄버거 포장을 뜯어서는 한 입 베어물었다. 확실히 보기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햄버거나 수제 햄버거에 비해 떨어지는 비주얼이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먹는 한 끼 점심식사로는 맛이 좋았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성빈은 봉지에서 빨대를 꺼냈다.
힘을 충분히 동원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힘을 이용해서 조심조심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확실히 그는 몇 번인가 당신에게 자신의 피지컬을 의도치 않게 과시한 적이 있지만... 그는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그럴 여지가 있다면 후자의 방법을 먼저 시도해보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방비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이 다짜고짜 허리를 끌어안자, 한 팔로 끌어안기 힘든 그의 탄탄한 몸이 당신의 품 안에서 어째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포옹을 풀고 바라보면, 그는 약간 빨개진 귀를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서야 열어놓은 음료수 캔에 빨대를 꽂는 것이었다.
봄이여서, 슬슬 연애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시기라 그런걸까. 상대방은 유난히 더 많이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의식하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어떠려나..... 의식해주었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날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것도 싫다. 갑작스런 사고의 흐름에 멍 하고 파란 하늘을 보았다.
당신은 굳은 마음을 먹고 도박수를 던졌다. 그러나, 아직은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단단했다. 성빈은, 먹던 햄버거 봉지도 내려놓고는 푸르른 봄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성빈은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당신의 어깨로 내려 당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잘 모르겠어, 랑아. 너랑, 좋은 사람들이랑, 이렇게 평온하게 별 탈 없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는 정말 행복해. 내 삶에 다른 뭔가를 더 얹고 싶지 않아."
겨우내 얼어 있던 땅이 단단할지언정 당신이 던진 도박수가 박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심어둔 씨앗은 벌써부터 봄을 감지하고 조금씩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만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이라 그것이 아직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으로 자라나는지, 조급해하지 말고 지켜보자. 적어도 지금 당신을 끌어안은 이 땅은, 이미 끌어안고 있는 당신 이외의 다른 것은 자신의 삶에 얹고 싶지 않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뭔가 더 얹고 싶지도... 뭔가 또 잃고 싶지도 않아."
하고, 성빈은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덧붙였다. 성빈의 눈은 파란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이 어깨를 끌어 안으며 나즈막히 입을 떼기 시작하면, 말을 나오게 한 장본인은 숨을 죽이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은 어떻게 그렇게 예상과 다르지 않았는지. 무언가를 더 얹고 싶지 않다는 말에 장호랑은 안심과 낙심을 동시에 하고야 말았다. 지금까지의 관계가 쭉 이어지겠구나 하는 안심. 더 나아갈 수는 없겠구나 하는 낙심. 그래도 본전인 셈인가.
"응."
상대의 말에 깔린 저의를 자기 좋게 해석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응 하고 대답을 하고는 성빈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코 끝에 스치는 샴푸향이 얄궂기도 하지. 아직 점심은 반도 안 먹었는데.
성빈에게 몸을 기댈 때면 항상 어떤 냄새가 났다. 어딘가 차려입고 나가는 날에는 그는 항상 비온 뒤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향수를 뿌렸다. 그렇지만 그가 향수를 뿌리지 않고, 당신과 이렇게 일상을 보낼 때면 다른 냄새가 났다. 흐릿한 샴푸 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잘 구워진 빵과 같은 포근한 냄새가 살며시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냄새였다.
항상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변함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당신과 이 소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년과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그것을 바꾸어나갈 힘은 당신에게 있다. 그렇지만 1년 365일 내내 전력을 다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처럼 잠깐 마음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포근한 냄새를 조금 더 즐기려는듯이, 따듯한 체온에 붙잡힌 듯이 호랑의 목소리는 느려졌고 눈은 감기기 시작했다. 바닥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온기가 오고 있었으니까. 적당히 배가 부른 나머지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또 지금의 공기가 고요하고 심장은 느리게 뛰어서 우유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툭 하고 딸기우유가 다리 사이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용케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장호랑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자신의 품 안에 기대는 당신을 보며, 성빈은 위에 입고 있던 후리스의 지퍼를 풀어서는 당신의 등을 후리스의 앞섶으로 감싸며 당신을 품 안에 기대어뉘었다. 당신이 조금씩 낮잠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눈치채서다. 당신이 품 안에서 잠드는 것은, 당신을 품 안에서 재우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익숙한 것들 중에서도,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좋아하는 쪽이겠지. 당신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도 아주.
그러나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되어 온 익숙한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준비됐는지와 상관없이 바뀔 수 있다. 어느 순간에는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성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관계면 좋겠어."
자기마저도 듣기 힘들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린 말은 까무룩 잠든 당신의 귀에 가서 닿았을까? 그것은 당신만이 알 일이다. 소년은 어느덧 제법 따스해지기 시작한 초봄의 햇살 아래 점심시간 종료 예비 종이 울리기까지의 달콤한 낮잠에 당신과 함께 빠져들었다.
>>417 대충 그 비슷한 전개... 작년에 성빈이가 하고 다닌 일이 들통나는 모멘트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리 말해주자면 성빈이의 경우는 남을 괴롭힌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애들을 때려주다 보니 그렇게 양아치 무리에 휘말려버린 꼴이긴 하지만. 양아치 A의 부하를 혼내주다 보니 양아치 A까지 혼내주게 됐는데 양아치 A를 고깝게 보던 양아치 B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성빈이를 끌어들였달까 대충 그런 상황 생각해두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