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을 좀더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었을 뿐이다. 그 손은 이내 거두어졌고, 성빈은 아까 당신의 방 구석에 놓아두었던 약국 봉투에서 약갑 하나를 꺼내 알약울 한 알 톡 뜯어서는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당신이 그것을 받아삼키면, 그는 곧 이온음료 페트병의 뚜껑을 뜯어서 당신의 입가에 가져다줄 것이다.
"응, 이거 먹고... 푹 자. 자고 일어나면 한결 가뜬해져 있을 거야."
성빈은 당신을 쫓아오거나 붙들려 들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으니까. 더 욕심낼 이유도 없고, 욕심낼 수도 없다. 욕심내기엔, 두렵기도 하고.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된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그러질까 봐. 성빈은 다시 당신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어 주다가, 다시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팔짱을 끼곤 상반신을 기댔다.
평소에도 낑낑거려야 딸 수 있는 음료수 뚜껑이기에 이런 세세한 배려가 고마웠다. 장호랑은 약을 받아 먹고, 이온음료를 쭉 들이킨 다음 후 하고 막힌 숨을 뱉었다.
"... 여기 있게?"
잠을 자기 위해 머리 밑에 베개들도 빼고 무거운 머리를 뉘이니 머리맡에 성빈이가 기대어 누워 있었다. 불편할 텐데. 빤히 그의 뒷통수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약기운 때문인지 잠이 슬슬 오기 시작해서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마지막 욕심을 내지 못 하고 잠들어 버린다. 잘 때 까지만 손 잡아달라고 할 걸. 아니면 가기 전 까지만. 아니면 일어날 때 까지만....
대답하는 데에는 잠깐의 공백이 필요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은 건 날 말하는 걸까, 널 말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겠다. 네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같이 있고 싶었다. 네가 그러기를 바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응..." 하고, 당신의 손길이 머리카락에 닿을 때 소년은 긍정의 추임새인지 잠꼬대로 하는 신음소리인지 모를 희미한 소리를 내고는 눈을 꾹 감았다.
피곤하다... 어째서인지 성빈은 그렇게 느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친 것도 아닌데, 왜인지 오늘 등굣길에 옆집의 소꿉친구 동생을 배웅해 주고 나서부터 왜인지 모를 무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 되어 필기를 하는데, 하얀 것은 배경이고 까만 것은 글자인데 자기가 지금 뭘 읽고 받아쓰고 풀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떠드는 것도 어째서인지 건성이 되었고. 몇몇 친구들이 성빈을 보면서 쟤 봄 타나 보다, 하고 웃는 것도 어 그래, 하는 초점없는 대답으로 흘리고 말았다.
왜인지 모를 탈력감은 점심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도 가시지 않았다. 밤새 협곡에서 청춘을 불태우고 1교시부터 내내 잠들어 있던 바보도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면 본능적으로 깨어나 급식을 누구보다 빨리 받아올 준비를 할 만큼, 점심시간이라는 것은 뭇 학생의 비타민제라 불리는 법인데 이상하게도 성빈은 힘이 없었다.
4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반장의 구령에 따라 경례를 마치자마자 성급한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나간다. 성빈은 원래같았으면 그 대열의 상대적으로 한적한 후미에 마음 편하게 따라붙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핸드폰을 꺼내서는
성빈이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은 당신의 대답이 돌아온 직후였다. 성빈은 당신의 응답 두 마디가 찍힌 메신저 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를 어쩌지. 성빈은 잠깐 침묵했다. 그냥 불러 봤어, 따위의 말을 할 성격은 못 됐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왠지 쓸쓸해서 불러 봤어, 라는 따위의 말은 더더욱 할 수 없다.
바보같네.
성빈은 문득 자기를 돌아보고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핸드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면 장호랑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매점 까지 내려가는 것이었다. 성빈이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에 대해서 별 다른 관심이 없던 것과 달리, 이쪽의 인물은 굉장히 잘 휘둘려서 친구들이 둘의 관계를 물으면 괜시리 아무 사이 아니라고 떠벌리고 다닐 수 밖에는 없었다.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매점 앞에 먼저 도착한 다음에는 무얼 먹을지 생각하기 보다 중앙 계단 윗쪽에서 내려올 성빈이를 기다리며 발꿈치를 들었다 내리길 반복했다. 너무 빨리 왔나?
하고 당신을 부르는 소리는, 중앙 계단이 아니라 매점 문 쪽에서 났다. 그는 당신보다 먼저 매점에 도착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매점 안에서 당신을, 당신은 매점 밖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기에 자칫하면 둘이 엇갈려 시간을 약간 낭비할 수도 있었지만, 열려 있는 매점 문 사이로 성빈이 당신을 먼저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랑아, 하고 당신을 부를 때, 성빈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그렇게 시원스레 걷히는데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이, 소년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