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걱정을 담은 소리가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깔린다. 당신은 마침 침대에 누우려고 상반신의 무게균형을 뒤로 기울이려고 했으나, 성빈이 한 발 더 빨랐다. "다시 눕자." 하는 소리가 당신의 귓전에 닿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성빈의 팔뚝 정도가 아니라 상반신이 한꺼번에 당신의 품에 안겨들어 있었다. 아니, 당신이 성빈에게 안긴 꼴이다.
바깥의 아직 찬 봄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야 했던 손끝과는 달리, 성빈의 몸뚱이에는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 움직이면서 달아오른 체온이 고스란히, 두터운 초봄 외출복 아래로 느껴지는 성빈의 탄탄한 상반신에 따뜻하고 포근하게 남아 있었다. 성빈은 당신을 온 상반신으로 폭 끌어안은 채로 당신을 다시 침대에 뉘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전자레인지가 조리를 끝냈다는 삑삑거리는 알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팔 정도를 끌어안고 만족할 요량은 생각치도 못 한 기습에 새하얗게 지워지고야 말았다. 몸 전체를 끌어안겨지자 어지럽던 머리에 다시 핑 하고 혈류가 돌며 몇 배는 어지러운 기분이다. 병기운을 변명삼아 더듬 더듬 이불 아래로 팔을 뻗어 성빈의 몸을 두른 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심장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기 위해서인듯 입도 눈도 세게 꼭 감았다.
"안 돼. 여기 있어."
힘을 주어 성빈을 더 단단히 끌어 안았다. 그래봐야 원래 쪼그맣고 지금은 몸도 안 좋은 상황이라 성빈이가 뿌리친다면 맥 없이 풀려나겠지만.
당신의 응석 한가득 담긴 팔은, 성빈이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떨어져나가고 말 것이다. 물리법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이론상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모를 한 가지 사실은, 당신은 성빈에게 있어 어떤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의 손길에는 얼마 안 되는 물리적인 제재력보다 훨씬 강한 결속력을 지닌 욕심이 담겨 있었고, 성빈이 함부로 당신의 팔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었다. 옆구리에 감긴 당신의 팔에 담긴 온기에서, 품안에 놓인 당신의 몸에서 전해지는 맥박에서 느낄 수 있는.
성빈은 당신의 속박을 풀기를 포기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어줄게..."
당신을 품 안에 안은 채로,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를 살살 다독이며 쓰다듬기 시작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좀더 어릴 적, 서로가 서로에 대한 '거리감' 이라던가 '체통' 이라던가 '사랑' 같은 것에 좀더 둔감하던 옛날, 성빈은 종종 이런 식으로 당신을 꼭 끌어안아서 재우곤 했다. 훨씬 더 솔직하면서도 훨씬 더 순진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었던 그때처럼 그는 당신을 보듬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듣고 싶어하는 말을 그대로 해주는 탓에 호랑은 꿈을 꾸고 있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생각을 어디 멀리로 전개할 힘이 없는 탓에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해석하거나, 행동의 맥락을 짚을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에서 머무르고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호랑이는 조금 더 성빈의 품 안에서 부시럭 대다가 작은 말을 남기고는 얼마 못 가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맨날 아팠으면 좋겠다."
성빈의 몸에 두른 팔에는 힘이 스르륵 빠졌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베개 위로 굴렀다. 작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성빈에게 들려오고, 이불 아래로 조금씩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잠에 들어서, 이제 어디 가더라도 잡지 못 한다.
당신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자, 성빈은 당신의 머리와 팔이 베개와 침대 위로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조심스레 바로잡아 준 다음에 이불을 푹 덮어주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마에 얹어놓았던 손의 냉기가 가시기 전에, 아까 봉지에서 꺼내놓았던 해열용 쿨패드를 뜯어서 당신의 이마에 조심스레 착 붙였다. 뇌는 열에 약하니, 몸에서 열이 날 때 머리의 열을 잡아주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되니까.
당신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빈은 몸을 일으켰다.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향수 냄새가 옅게 묻어 있는 자신의 외투를 당신의 이불 위에 겹쳐서 덮어주었다. 잠깐이면 되니까. 그는 당신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움직였다. 1층의 전자레인지까지 내려갔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죽그릇을 쟁반에 받쳐들고 스프 떠먹는 숟가락과 함께 다시 당신의 방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당신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직 잘 자고 있으려나? 일단 가져다놓고. 깨면 먹여야지.
그런 성빈이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장호랑은 성빈이 나갔을 때와 다른 것 하나 없이 푹 자고 있었다. 봄의 조용한 공기와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가 가득한 코트. 성빈이 문을 열 때에 살짝 실수하여 평소처럼 소리를 냈다고 해도 뒤척임 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고 있는 장호랑은 별 달리 꿈을 꾸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편안하게 푹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이렇게 병문안을 와준 적이 있던가. 훨씬 더 철 없을 적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눈이 떠졌고 약속한 대로 성빈이는 어디 간 적이 없었다. 단지, 뿅 하고 눈에 안 보이던 죽을 들고 왔을 뿐이지. 아니면 들고 오는 걸 못 봤던가.
"죽 진짜 사왔네... 고마워."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음량이 작고 목소리가 탁하다는 점이 달랐다. 흠칫, 내 놓고도 놀랐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도 당신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성빈은 이내 그냥 당신의 침대 옆에 숫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먹을 사람이 잠들어버렸으니,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성빈은 죽그릇의 뚜껑을 닫아놓았다. 어차피 전자레인지 안에서 절절 끓을 만큼 뜨거워져 있던 죽이니 오히려 한동안 놔두는 게 더 좋을 성싶다. 성빈은 물컵과 물병, 그리고 죽이 놓인 쟁반을 당신의 침대 머리맡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당신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면 늘 하듯이, 그는 당신 침대의 머리맡 옆에 팔짱낀 팔을 올려놓고는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흡사 바닥에서 두 손끝이랑 머리만 침대에 얹어두고 주인을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개처럼.
그런 채로, 성빈은 곤히 잠든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성빈의 머리를 스쳤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깨어 있는 당신에게 절대로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입 속으로 조용히 되뇌어보는 것. 그뿐이다.
저기, 랑아,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내 일상의 한 조각이라기엔 네가 내 마음 속에 너무 크게 박혀 있는 것 같아.
당연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그는 손을 뻗어 잠든 당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매만져보면서, 차차 백일몽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잠깐의 낮잠을 자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당신의 머리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머리를 얹어놓은 채로 꾸벅꾸벅 잠들어 있는 성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성빈은 이내 눈을 살며시 떴다. 초점이 흐린 녹색 눈동자가 잠에 옅게 취해서는 당신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성빈은, 천진난만하게 헤실헤실 웃는다. 그리곤 잠에 취한 눈을 부비며 당신의 침대에 얹어놓았던 상반신을 일으켜서는 쟁반에서 물병을 집어들고는 물을 한 컵 따라준다.
오빠 피곤했구나 하고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고, 성빈이 따라준 물을 받아 마셨다. 열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걸까, 아니면 따라주는 사람이 다른걸까. 물이 아주 달았다. 물을 마시는 와중에 졸려하는 성빈의 머리를 보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말 걸. 눈 뜨고 그냥 손을 뻗어서 천천히 머리카락이나 만져볼걸. 그래도 되는 날이어서 괜히 아쉬웠다.
좋음과 좋아함. 같은 단어에서 피어난 다른 말.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퍽 다른 그 두 가지 단어가 한 사람에게 겹쳐 있었다. 당신이 머리카락을 마음껏 매만지게 둔 채로, 성빈은 가만히- 자신의 그 두 가지 단어를 모두 가져간 한 햇살같은 색의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 당신에게 눈을 두다가, 성빈은 죽그릇으로 손을 뻗었다. 뚜껑을 열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잠이 조금 길어졌으면 죽을 다시 데워야 했을 것이로되, 그릇 표면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죽은 그럭저럭 적당히 먹을 만한 온도까지만 식은 것 같다. 전복죽을 사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어쩌면, 그는 정말로 전복죽을 사왔다. -하긴, 함께 지내온 세월이 있으니 입맛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죽을 저으며 첫 숟가락을 뜨려던 성빈은 당신이 건넨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없나 보다.
"아침을 조금 늦게 먹었거든. 괜찮아."
하며 성빈은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리곤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 너만 먹는 게 마음에 걸리면, 얼른 나아서 내일 저녁은 같이 먹자. 그래줄 거지?"
손가락을 꼬물락 거리다가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에 응! 하고 밝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 잡은 약속이니까 어디 잊어버리지 않도록 적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에 일정을 잡았다
[성빈오빠랑저녁먹기]
그게 성빈이 문자기록이었다는 점이 약간 흠이었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있지는 않았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어지럽고 추웠으니까. 이불을 걷고 상체가 공기와 닿자 갑자기 오한이 들어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쓰고 먹기는 불편하니까, 그리고 아파서 정신 없으니까 라는 핑계로
흡사 손아랫동생을 얼러주는 친오빠 같은 태도다. 막내로 태어나 꽤 응석쟁이로 자랐을 성빈이 제법 의젓하고 말쑥한 모습으로 큰 데에는 당신의 존재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는 반듯이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 당신을 가만 바라보다가, 죽그릇을 내려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쿠션 두어 개를 찾아내서는 당신의 베개 아래 끼워넣어 당신의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올라오도록 받쳤다.
아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냈으면 성빈은 아프지 않아도 이렇게 해줄 테니 굳이 아플 필요 없다고 펄쩍 뛰지 않을까. ─성빈은 당신을 뭐라고 딱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했다. 소꿉친구, 친한 동생, 사랑스러운 아이, 내게 있어 당연하고 소중한... 그러니까, 친분이라거나 친근 같은 말로는 성빈에게 있어서의 당신을 쉽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단어를 가져다대자면 소중일까.
그렇지만 그렇게 소중한 당신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누구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초록색 눈동자 뒤편에서 뭉클뭉클 일렁이는 까만 그림자를, 성빈은 당신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조용히 씹어삼켰다.
"미안하다니."
대신에 그는, 죽그릇 뚜껑을 덮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랑아.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심결에 그렇게 말을 해버리고는 성빈을 빤히 바라보다가 흐응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다행인 점은 이미 열 때문에 얼굴이 빨개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일이 없다는 점일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당신의 손길에 문득 문득 닿는 피부가 조금 전 보다 미세하게 더울 수는 있겠다.
"...이제 약 먹고 잘래... 졸리다. "
살짝 웃고는 도주를 선택했다. 잔다고 하면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 방금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어지러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