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네. 밀크티가 있으면 좋을 뻔했네. 큰누나가 홍차를 좋아하니까, 큰누나한테 물어봐야지."
그러고 보면 성빈이네 집은 다섯 남매가 시끌벅적한 집이었다. 성빈이 막내라고 했던가,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이 있다고 했었지. -성빈이네 큰누나는 호랑이도 두어 번밖에 만난 기억이 없지만, 몇 차례 경험으로는 상당히 사치스런 취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빈이 뭔가 비싼 것을 하고 있거나 할 때 그에게 물어보면 큰누나에게서 조언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으니가. 밀크티를 언급했다면, 아마 다음번에 성빈의 집에 놀러갈 때나 그가 놀러올 때는 한 통에 가격이 여섯 자리 숫자를 넘나드는, 영국 왕실의 로얄 워런티가 찍혀 있는 차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됐건 그건 나중 일이다. 비싸건, 비싸지 않건, 특이하건 그렇지 않건... 지금 당신과의 이 일상을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성빈은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빈은 당신의 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얼굴을 떼거나 손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뺨을 감싸쥔 채로 다음 케익 조각을 내밀어줄 것이다. 손을 떼기엔 너무도 따뜻했다.
차를 직접 끓여마시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냥 냄비에 홍찻잎과 설탕과 우유를 다 때려넣고 몽글몽글 끓여서 거름망에 거르는 식의 밀크티만 먹었으니 잘 모르는 사람이 먹기에는 아까운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냠."
그러면 이쪽에서도 성빈의 손을 놓지 않은 체로 다음 케이크 조각을 받아먹었다. 입 안에서 부숴지는 생크림과 크레이프가 달콤했고, 손 안에서 두 사람의 체온의 평균값을 향해 변온하는 살결도 기분이 좋았고, 또 이렇게 옆에 찰싹 붙어도 아무도 뭐라고 말 안 하는 지금이 좋았다.
"아니, 아마 하나 사서 보내줄걸...?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며칠 뒤에 상견례 하러 가신다던데."
성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애초에 밀크티는 뜨거운 차를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만들려고 찬 우유를 부어먹기 시작한 게 그 원류이므로, 어떻게 하든 입맛대로 만들어먹으면 그만인 물건이니까 이렇게 먹건 저렇게 먹건 별 상관없을 것이다. 그걸 아깝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맛있게 즐기면 그만이니까.
입을 오물거리는 당신과, 말은 딱히 하지 않지만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이 순간. 성빈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둘 다 앓아누우면 되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싱크로율 높아서 즐겁네! 아니면 저번에 '먼저 일어나서 깨우러 와봐~' 를 진지하게 듣고 밤을 샌 다음 진짜로 먼저 깨우러 왔는데 결국 깨우지는 못 하고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상황 닽은것도 생각했는데 이러면 자느라 못 돌리니깐
아니, 어느 한 쪽은 멀쩡해야 멀쩡한 쪽이 간호를 해주지. 그리고 클리셰대로라면 간병받은 쪽이 다음날 털고 일어났더니 간병한 쪽이 옮아서 앓아눕는 게 또...(장난) 호랑이가 침대에 머리 기대고 잠들면 아마 다음 순간에는 성빈이 품 안에 안겨 있는 걸 깨달을 텐데 괜찮으시겠쎄여^q^?
장호랑이 몸이 약하냐고 물어보면 어느 층위에서의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냐고 역으로 질문이 들어가야 비로소 제대로된 답변을 할 수 있았다. 근육이 적어서 낼 수 있는 힘이 적고 약한건 맞지. 하지만 잔병치레에 골골거리거나 체력이 특출나게 떨어지지는 않았기에 오늘같은 날은 더 지독하게 다가왔다.
"머리 아파....."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부를 사람이라고는 성빈이 밖에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이빨을 달달 떨어가며 창문 쪽으로 가다가 의자를 잡고 멈춰선다. 찬바람 쐬면 절대 안 좋겠지. 흐릿해진 의식이지만 그래도 상황을 판단할 여력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장호랑은 다시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가서 몸을 뉘이고 핸드폰을 꺼내 성빈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이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까지, 메신저 창에 띄워진 당신의 메시지 옆에 떠 있는 1이라는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변은 당신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그 순간에 찾아왔다. 아직 그는 당신의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을 텐데, 현관 패드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삑삑삑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것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속도로 봐서, 비밀번호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과연 몇 자리인가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삐리릭, 하고 현관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난다. 당신의 가족 중 한 명이 돌아온 걸까?
발소리는 아래층에서 잠깐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면, 이건 전자레인지 버튼을 누르는 소리다. 그리고 전자레인지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소리다.
그리고 발소리는 툭툭툭툭툭, 하고, 최대한 조용하게 애쓰면서, 하지만 최대한 급히 움직이면서 계단을 탁탁탁 달려올라온다. 그리고 똑똑똑, 하고 들려온 그것은, 보통 창문가에서 들리는 그 노크소리였다.
어떻게 벌써?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보면 아직 메신저에서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지도 않았을 텐데?
메신저의 1이 사라지지를 않아서 갑자기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프기도 아픈데 좋아하는 사람은 문자도 안 읽는다니! 이불을 코 끝까지 당겨오고는 투덜거렸는데, 그래도 뭔가 하는 일이 있어서 바쁘겠거니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성빈이는 자연스레 호랑이네 집으로 들어와 죽을 준비한 체로 평소와는 다른 곳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힘 없는 목소리로 출입 허가령을 내린 다음에 눈을 느리게 꿈뻑이며 상체를 들었다.
"와아, 오빠다."
제 방으로 들어온 성빈에게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어 흔드는데 영 맥아리가 없는 것이 확실히 아파보였겠다. 잠깐이나마 자다 깬 상태임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고, 성빈이가 빠르게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애석히 여겨주시길.
들어오세요, 하는 입객령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역시나 성빈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인 걸까 코트 차림을 하고 있는 성빈에게는 아직 차가운 바깥바람이 묻어 있었다. 익숙한 손길로 코트와 장갑을 휙 벗어던지고 나면, 셔츠에 가디건 차림이 되는 소년. 코를 킁킁대 보면 서늘한 초봄 바람이 서린 시내의 냄새 사이로, 비가 그친 직후 정원을 거닐면 날 것 같은 흐릿한 풀꽃 향기가 났다. 어딘가로 차려입고 나갈 때 그가 즐겨 뿌리는 향수에서 나는 냄새였다.
전말은 이랬다. 성빈은 오늘 오전 자신의 친구 A의 생일에 줄 선물을 고르고자, A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시내에 나가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조금 전에 당신의 어머니가 성빈에게 '호랑이가 아침에 보니 아프더라, 나는 부득이한 일정 때문에 곤란하니 혹시 시간 되면 호랑이가 무사한지 한 번 봐달라' 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 메시지를 받은 즉시 성빈은 친구들에게 전화해 일정을 취소한 뒤에 택시를 잡아타고는 부리나케 편의점과 약국을 들러서는 집까지 있는 대로 달려온 것이다. 택시 문을 닫고 내리는 순간, 진동에 폰을 꺼내보니 당신에게서 온 메시지가 잠금화면 위에 떠 있었고.
"랑아."
하고 부르는데 눈물이 핑 돈다. 누가 보면 당신이 중병으로 응급실에라도 입원한 줄 알겠다. 그러나 소년은 자기 눈가에 글썽, 하고 눈물이 맺힌 것도 모르고 침대에 누워 있는 당신에게로 다가와서 당신의 손을 꼭 잡아준다. 장갑의 가죽 안감 냄새가 흐릿하게 배인 손이, 차다. 성빈은 그 성그런 손 하나는 당신 손에 쥐어주고, 다른 하나는 당신 이마에 얹어본다. 차갑다. 시원하다. 서늘하다.
성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다. 해열패드를 붙여주고, 우선 사온 죽부터 먹여준 다음에, 약이랑 이온음료를 먹여주고... 해야 할 일은 이것저것 떠오르지만, 양 손이 모두 당신에게 잡혀 있어서야 어쩔 수 없다. 특히 당신이 히히히 하고 웃으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장난감마냥 붙들고 있다면 더더욱. 그가 당신의 이마에 얹혀 있던 손을 자기도 모르게 떼도록 한 것은 당신의 질문이었다. "어?" 하고, 그제서야 소년은 자기 눈가로 손가락을 가져가 보는 것이다. 그리곤 거기 맺혀 있던 물기를 당황하며 황급히 닦아낸다.
"아니, 아니야... 울기는 무슨. 그냥 급하게 오다 보니까 눈에 먼지가 들어갔겠지."
이마에 덮어놓은 손을 뗀 김에, 성빈은 반대쪽 손은 당신이 계속 만지작거리게 두고는 한 손으로 약국 봉지를 뒤적였다. 열이 날 때 이마에 붙이는 패드였다. 열에 달뜬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성빈은 참지 못하고 나직이 질문을 건넸다.
질문에 어? 하고 손을 떼어가는 것을 보면 성빈이도 의도하지 않게 눈물이 흘렀나보다. 빠르게 닦아내는 모습에 의문을 품었으나 급하게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지금은 그걸 분석할 정신이 없었고, 자신을 신경써서 빨리 왔다는 부분이 기뻤으니까.
"어? 음.. 쪼끔?"
많이 아프냐는 물음에 찬찬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본 다음 대답을 했다. 성빈이를 신경쓰느라 몰랐지만 몸의 근육들이 시큰거렸고, 머리는 띵 하고 어질어질 지끈거렸고, 으슬으슬 추위도 거기 있었다.
"추워."
이불을 벗어난 상체의 추위가 아프냐는 물음 이후에야 자각이 되서, 작게 웃으며 뒤로 누웠다. 성빈의 한 쪽 팔을 상어인형처럼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참고로 진짜 상어인형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냐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