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색 도시의 곁에 머물며 지켜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찾으려고 노력은 할 수 있겠군요. 죄다 부서지고 터지고 망가지고 무너지고 폭삭 주저앉고 잿더미가 되고 오류나고 조각조각 따따다가 된 상황이지만 말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이 세계의 주민들인 그 검은 악귀들이 여러분의 세계로 건너가서 여기가 조금 안전해졌다는 겁니다.
익숙한 건물인가, 해서 보면 딱히 그건 아닙니다. 그냥 비슷하게 생긴 건물일 뿐입니다. 여기는 정말로 다른 세계입니다. 거인이라, 글쎄요? 어쩌면 이 세계에는 아틀라스 같은 거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바람을 타고, 여러분의 근처로 전단지가 날아듭니다. 놀랍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찢어진 부분 말고, 읽을 수 있는 부분만 읽어보면...
[...세계를 버린(찢어짐)우리들은(찢어짐)새로운 세계를 차지해야(찢어짐)이것은 복수이기도 할 것입니다(찢어짐)]
...이렇네요. 뒷면에는 지도가 있습니다.
[설명회 장소]
무언가 설명회를 열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뭔가 건질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다른 곳을 살펴봐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긴 분명 다른 세계인데 왜 우리와 같은 글을 쓰고 있는 걸까요? 참 알 수가 없네요. 지도와 주변 지형과 도로를 보니 장소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설명회 장소는 그냥...... 평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평지예요. 단상은 커녕 풀 한 포기도 없어요. 대신 바닥에 떨어진 많은 전단지를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이 발견한 전단지와 같은...... 게 아니네요. 이번 전단지는 그나마 찢어진 부분이 적고 수가 많아서 이것저것 맞춰보며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쓴 글을 잘라서 인쇄한 것 같습니다.
[이 세계를 버리고 떠난 두 신을 저주한다! 어째서 이 세계가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뒀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 힘이 있는데 왜 그 힘을 이 세계에 쓰지 않았지?(중략) 우리는 그들의 장자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권리가 있다! 비록 세계를 건너는 기술이 대부분 소실되어 기묘한 검은 연기 같은 상태로만 넘어갈 수 있지만(중략) 긴 전쟁으로 세계는 멸망에 가까워졌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우리도 위험하다. 하루 빨리 이주를 마쳐야 한다!]
이번에도 뒷면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는 없는 그 사악한 존재인 아니마들에게 사용할 독이 저장 시설 문제로 공기 중에 퍼진 상태입니다. 되도록 직접 호흡하지 마시고 마스크를 착용하십시오.]
......이 세계에 들어오고서부터 느낀 영 좋이 못한 것들이 독 때문이었군요. 하지만 여러분을 독으로 죽이려고 한 그들 또한 독으로 고통받았던 모양입니다.
글쎄요... 서점 정도면 어떨까요? 시내에 하나씩은 꼭 있고, 잘못돼도 책 몇 권 정도는 남아 있겠지요. 뭐, 그냥 화풀이로 이러는 걸지도 모릅니다. 신이 자기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더 좋은 피조물을 만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죠.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숨 쉬기가 조금씩 불편해지는 건 잘 알겠습니다. 행동 기회는 앞으로 한 번에서 많아야 두 번정도 남았네요. 돌아가시겠습니까?
정말 빠른 기사님 택시! 애용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지요. 한참 달려서야 '^!@#%서점'이라는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앞 문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드네요. 다른 세계가 맞긴 한 모양입니다. 서점 안은 폭탄이라도 맞은 듯 처참했습니다. 책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고운 하드커버가 두동강이 나서 저기서 발판 대신 쓰이고 있네요. 다행히 그런 책들 밑에는 멀쩡한 책이 있긴 했습니다.
[종교로 대동단결! 신을 불러내자!] [이렇게 된 이상 저쪽 세계로 간다] [4차 세계전쟁이 알려주는 교훈] [우리는 어떻게 해서 낙원을 지옥으로 만들었나?]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는 책은 없어보입니다. 여러분은 이 엉망진창인 서점 안에서, 저 목록 외에도 원하는 책 한 가지씩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책은 무엇이고 내용은 어떤가요? 물론 책 말고 다른 걸 챙겨도 됩니다. 돈 없는 돈통이나 책장 뒤에 숨겨진 담배 같은 거요.
어떻게 낙원은 지옥이 되었나. 참 우리도 알고 싶은 내용입니다. 슬슬 위험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읽는 건 안전한 사무소로 돌아가서 읽는 쪽이 낫겠지요.
다시 문을 통과해서 돌아가면, 밖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지만 검은 문 너머의 세계보다는 확실히 낫다는 걸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죽지 않기 위해서 저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출근이랑 등교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 수능까지 이러면 아니마들을 대거 고용해서 저것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수능 중요하죠 수능.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한 거리를 지나 사무소로 돌아옵니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빠서 여러분은 별로 신경쓰지 않네요.
책을 읽어봅시다.
[어떻게 낙원은 지옥이 되었나? 이건 모두 우리들의 잘못이다. 옛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무한하며 영원하다고 믿었다. 세계를 조금씩 깎아서 연명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중략) 자원은 줄어들고 환경은 오염되었다. 하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모두가 나눠 가지면 충분할 양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더 많이 가지길 원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들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라는 이유를 휘황찬란한 것으로 감추었다.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다보니 전쟁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시작되고야 말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사건 말이다. (중략) 성직자들이 신의 응답을 듣지 못하게 된 건, 그들이 신에게 받은 성스러운 힘이 발현되지 않게 되었던 건 언제인가? 언제부터인가 신들께서는 우리들의 말에 더 이상 답을 해주시지 않았다. 종교계가 그걸 눈치챘을 땐 세계 전쟁 발발 후 한 달이 지나서였다. 신이 우리를 떠났다. 그건 정말이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략) 우리는 결국 낙원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걸로 모자라서 신들께서 새로 만드신 세계까지 탐내려 하고 있다. 멸망하는 건 우리들이면 족하다. 한 번 갔다가 퇴치당하고 돌아왔으면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우리들의 동생 되는 세계를 그냥 놔두라. 그리고 이 끝없는 시간 속에서 죄를 뉘우치라.]
대충 이런 책입니다. 신은 인간들이 하는 행태에 질려서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 모양입니다. 세계를 두 번이나 만들었으니 만들고 나서 잠에 드는 것도 당연했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쪽 세계는 시간이 거의 멈춘 거나 다름 없는 상태로 흘러가고 있나봅니다. 그러고보니 갔을 때와 돌아왔을 때의 시간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네요. 정말...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저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