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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감금인지 입실인지 그 애매한 선에 있게된지 오늘로 벌써 며칠째다. 일과는 나름대로 정해져있다. 아침식사 이후 잠, 점심 식사 이후 잠깐 일어나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작성하고 저녁식사 이후 여러가지 검사를 받다가 잔다. 물론 중간중간에 엄청나게 자고있지만 그것까지 다 쓰다간 하루의 일과가 잠식사잠식사잠밖에 없어진다. 그래선 안돼지. 아무튼 여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는것도 시원치 않다. 수시로 사람이 바뀌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편히 잘 수가없다. 언니들이 자는걸로 뭐라하긴 했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편하게 잘 수 있었다고. 빨리 데리러 와주면 좋겠다. 어쩌면 스스로 탈출해야하나. 아 - 또 누군가 오는 것 같다. 루르는 책상을 톡톡 쳤다. 옆에 서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던 간호사는 차트를 뒤적이다가 이정도면 됐나 - 하고 차트를 톡톡치곤 돌아갔다.
데미휴먼은 쏠 생각같은건 없었다. 더불어 이니시에이터를 살려둘 생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건 순전히 잠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잠도 모자랐고 답지않게 돌발상황에 놀라버린 탓이다. 뭐, 내 잘못이니 감수해야지. 이제는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날개라도 있는 탓에 외롭지는 않다.
" ..... "
필사의 자는 척. 블랑슈언니는 CPA로 끌려가서 험한 꼴을 당했다고 한다. 뭐, 그래서 내가 복수해줬지만 나도 아픈 건 질색이니 쓸데없는 말해서 끌려가기전에 잠이나 자자는 심보였다.
병실 앞에 선 리코는 가만히 왼팔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아물진 않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있으면 딱지가 앉고 떨어지며 살이 붙을 것이다. 다시 시선을 명패로 올린다. 이 병실에 있는 데미휴먼을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에피는 아직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으니 자신이 잘 해야한다고 리코는 생각했다. 손 가득히 쥔 사탕과 팔에 낀 그림책을 보면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한가-싶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다. 처치를 끝낸 건지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와 엇갈리듯 리코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고 있어?"
침대 위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새-날개는 한쪽 뿐이었지만 새는 새였다-를 보고 리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 특유의 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다가가 일단 머리맡에 사탕을 두었다. 양이 많았기에 언뜻 보면 우르르 쏟아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는 거야? 많이 아픈가? 많이 아플 땐 웅크려서 눈을 감고 쉬게 된다. 그러면 상처도 빨리 나았으니까. 자신이 많이 아팠을 때를 생각하며 리코는 천천히 손을 뻗어 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살짝 건드렸다.
누가 오는가 했더니 저번에 팔을 뚫어버린 데미휴먼 아이었다. 안그래도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콕콕 쑤셔왔는데 직접 온 걸 보니 더 하는 것 같다. 머리맡에 사탕이 놓여지고 자는거냐 물었을 땐 그저 그대로 자는척만 하고있었다. 제 얼굴을 톡톡 만졌을때 으음.. 하고 미간을 찡그렸다가 더 이상 이러는 것도 가슴이 콕콕 쑤셔 참을 수가 없어 슬며시 눈을 뜨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몽롱한 목소리로
" 일어났어.. "
하고 말했다. 팔에 붕대를 감고있는 걸 보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날 사용한 총이 대인저격총이었다는 점. 만에하나 그 날 총이 망가지지 않아 대물저격총을 가져왔다면 팔에 구멍이 난게 아니라 아마 저 총에 맞은 부분 아래로는 없어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그래도 데미휴먼을 건드리는건 안돼. 전부 피해자인 불쌍한 아이들이잖아. 루르는 순간 이어진 침묵과 엄청난 어색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 옆에 걸려있는 루르 스노드롭이란 이름표를 보곤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 일어났다. 새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리코는 조용히 손을 치웠다. 그리고 가만히, 몸을 일으킨 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새 쪽이었다. 이름을 묻는 말에 리코는 귀를 쫑긋거리다가 대답했다.
"리코는 리코야."
그리고는 눈을 데구르르 굴려서 머리맡 쪽의 이름표를 보았다. 에피에게 조금씩 배운 덕분에 이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많이 늘어났다. 리코는 가만히 속으로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루...가 아니라 루르? 그런 이름인가보다. 리코는 머리맡에 있던 사탕 중 하나를 집어 루르에게 내밀었다.
순간 리코는 리코구나. 하고 말할뻔했다. 그랬다간 또 얕잡혀보일게 뻔하다. 여기선 연장자답게, 시카의 딸 답게 멋지게 나가야한다고 루르는 생각했다. 그리곤 건네주는 사탕을 고마워.하고 받고는 그대로 까서 입으로 가져갔다. 자꾸 팔에 묶인 붕대에 시선이 간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지만, 아니. 일부러라곤해도 이지경으로 만들 생각까진 없었지만. 어쩌면 아까부터 가슴을 콕콕 찌르는 이 느낌은 미안함이라는건가. 자매들과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건가. 아니면 데미휴먼이라 가능한걸까.
" 거기 있으면 불편해. 이리와. "
같은 데미휴먼에 어린아이라는것에 경계심을 허문 루르는 침대를 톡톡치며 올라오라 권했다. 날개덕에 침대를 큰 걸 받았지만 한쪽뿐인 날개라 공간이 많이 남았다.
침대를 톡톡치며 올라오라 권하는 루르에게 되물었지만, 대답을 원해서 했다기보단 형식적인 확인에 가까웠다. 그걸 나타내듯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리코는 침대에 낼름 올라가 있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처럼(?)말이다. 아닌가. 아님 말고. 아무튼 침대에 사이좋게 앉은 리코는 미안하다는 말에 맹한 표정으로 루르를 보았다.
"괜찮아. 난 빨리 나으니까. 좀 있으면 다 낫는다고 했어."
데미휴먼 특유의 재생력이라고 해야할까, 침식이 상당히 진행된 리코는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빨랐다. 다친 부위가 왼팔이라는 자주 쓰지 않는 부위이기에 불편한 것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땐 엄청 아프긴 했지만 이제는 지난 일이기도 하고. 리코가 루르에게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건 리코가 팔을 다친 것과 루르의 연관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컸다. 팔을 다쳤던 현장에서 루르를 목격했다면 상처와 루르를 연관지어 '나쁜 녀석'이라고 기억했겠지만, 루르가 잡혔을 때 리코는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뒤늦게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갔던 모양이다.
그럼 돼지. 하고 말한 루르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 리코가 올라오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주곤 다시 뒤로 몸을 기댔다. 또 잠이 솔솔 올것만 같았지만 또 잠들기에는 이미 아이를 대화에 끌어들여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빨리나으니까 괜찮다는 말에 슬며시 타투 투성이의 팔을 뻗어 리코의 왼팔을 살짝 잡았다. 그래. 여기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구나. 총에 맞는게 어떤 느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루르였다. 그 날 에도, 온 몸이 총에 뚫려 죽을 뻔 했으니까. 그 때 신의 목소리와 함께 시카가 와서 구해주었다. 그건 구원이었다. 그때부터 루르는 시카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 약속. 나도 데미휴먼한테 그러지는 않아. "
인간이나 크토니안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 말은 굳이 내뱉지 않고 리코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지 말라는 건 부탁일까 명령일까. 루르는 다시 타투투성이 팔을 슬며시 뻗어 리코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보다가 손을 내렸다. 젤러시는 늑대지만,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어쩌면 사이좋게 지내줄지도.
왼팔을 살짝 잡혔지만 리코는 가만히 있었다. 통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구멍이 뻥 뚫렸던 부위지만 빠르게 아물고 있었으니까. 붕대를 감아놓은 탓에 핥을 수 앖는 건 조금 아쉬웠다. 간질간질할때 싹싹 하면 시원한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약속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거는 건 조금 놀랐다. 책에서 읽어서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코의 손은 호랑이의 앞발이나 마찬가지니 아마 불가능할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살... 일거야. 아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던 리코가 나이를 묻는 말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마'라는 말이 붙은 것은 확신이 없어서였다. 갈가리 찢긴 전 주인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다시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동생? 나만해? 동생도 새야?"
동생, 저번에 토끼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 그땐 경매장에 동생을 데리러 왔었다고 했지. 리코는 가만히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신기하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루르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경계심이나 불쌍한 데미휴먼을 보는게 아닌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 집에 있을 제 동생을 눈 앞의 리코에 오버랩시켜 바라보며 조금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아이나 이 아이나 아픈건 똑같네. 눈이 아프냐, 팔이 아프냐의 차이지만 공통점은 둘다 가만 보고 있으면 많이 귀엽다는 점이지. 루르는 리코를 살짝 들어 제 몸에 기대어 눕히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니, 동생은 여우야. 꼬리가 이렇게 있고 귀가 이렇게 있는. "
그렇게 말하며 폭신폭신한 털에 쌓인 귀와 꼬리를 손으로 만들어 보여주고는 조만간 만나겠지. 하고 덧붙였다. 뭔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슬쩍 스쳐지나갔지만 생각에서 그쳤다. 물만 마실 수 있는 이곳은 너무도 심심하고 지루했기에 또 물이나 마시고 있을 순 없으니까.
" 동생은 눈이 좀 아파. 어쩌면.. 머리도. 그래도 너랑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
시큼한 포도를 싫어하는 여우... 리코는 얼마 전 읽었던 그림책의 여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달콤한 포도맛 사탕을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리코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맞춰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눈이 아파? 머리도? 많이 아파? 빨리 나으면 좋겠다."
눈도 머리도 아프다고...? 무슨 짓을 당한 걸까. 엄청나게 많이 맞았을지도 몰라. 조금 전에 조만간 만나겠지라는 말은 많이 아픈 동생이라 곧 병원에 올 거라는 말이었을까.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리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는지 고개를 위로 올려 루르를 보며 말했다.
총에 맞아본게 한 두번도 아니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어떻게 버티고 치료해야하는지 전부 알고있다. 맞자마자 치명상이 아님을 알았으며 즉석에서 응급처치까지 떠올렸지만 가지고있던 약을 전부 줘버려서 정말 기초적인 처치만 끝내고 여기까지 실려온 것이지만. 갑갑하고 축 내려앉은 병실의 공기에 머리가 아파질것 같은 소독약 냄새가 코 끝에 걸려있었다. 사람이 살아나가고 죽어나가는 이 냄새. 아마 그 아이도 제대로된 치료를 제 때 받았다면, 아니 애초에 데미휴먼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마음속 깊은곳에서 뜬금없이 화가 꿈틀댄다. 꿈틀거리던 화는 점점 더 거세지고 강해진다. 검은색의 화가 꿈틀대며 몸을 키우자 화는 붉게 변했고 검은 화는 붉은 증오가 되어 마음속 깊은 심연에서 얼굴을 보였다. 심연에서 얼굴을 드러낸, 기어이 증오가 되어버린 것은 몸에까지 영향을 끼쳐 가만히 살살 잡고있던 리코의 손목을 저도모르게 꽉 쥐어버렸다. 그랬다가 정신을 차린건 '아파'하고 말하는 제 동생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 아, 미안.. 내 동생은 아마.. 낫지 못할거야. 눈도, 머리도. 노력하고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않아. 머리는 나을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눈은 힘들지 않을까. "
가만가만 리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턱 밑을 간질였다. 역시 몇 번이나 막내동생이 겹쳐보인다. 시카가 다방면으로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차도는 없어서 뱀파이어나 다름없는 생활이 강제되고있다.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게 언제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말했을 때, 선명한 색으로 세상을 보는 건 무슨 느낌이냐 물었을때 아무말도 하지못하고 사랑한다.라고밖에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보니 다시 검은 화가 꿈틀댔고 마음속이 대바늘에 찔리는 것 마냥 너무나도 아팠다.
그 안에 있는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건 솔직히 맨정신에 감당하기 힘든 것들도 있으니까, 그런 낯선 열대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느니 차라리 없는 셈 치부해버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게 이니시에이터로서의 치부가 될지라도. 스칼렛은 덜컹하는 자체에 덩달아 덜컹하고는 운전 거칠게하면 위험해요. 하고 주의를 주곤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 유페미아씨는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
하지만 아는게 없어서 좋아보이는건지는 모르겠어요. 하고 스칼렛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이며 미소지었다. 달리던 차량밖으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던 스칼렛은 아, 여기 세워주시겠어요? 하고 말했다.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스칼렛이 세워달라고 한 곳은 비포장도로의 한복판이었다. 말이좋아 비포장도로지, 그냥 외벽과 맞닿아있을 숲의 시작지점이었다.
손목을 꽉 잡혔다. 뭔가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리코는 조심스레 루르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손목을 강하게 옥죄던 힘은 금새 사라졌지만, 혹시라도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구나... 미안해..."
나을 수 없는 걸 나을 수 있냐고 물어본 게 잘못이었나보다. 리코는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가만가만 머리를 쓸던 손이 턱 아래를 간질이기 시작했고, 리코는 또 다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길래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리코의 눈에 루르의 왼팔에 새겨진 타투가 들어왔다. 그게 타투라는 점은 모르고 있지만, 뭔가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문자도 있었고.
잘못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한테 있는거야.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미안해하지말라고 말했다. 왜 우리가 미안하다고 해야하는거야 우리는 피해자인데.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지어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사과해야하는거야? 시작된 의문은 다시 꿈틀거리며 증오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 쓸려나간 감정의 껍데기를 채워준 건 고통과 증오, 원망과 생존욕구 뿐이었다. 가만히 제 동생을 생각하는 루르였다. 아마 두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을지 모르는 그 불쌍한 아이는 대체 뭘 잘못한걸까. 무죄임에도 목에 줄이 걸린 젤러시는, 빵 한조각에 씻을 수 없는 흉터를 입은 블랑슈는, 그저 데미휴먼이라고 꼬리가 잘려나간 ■■■은, 아무것도 모른채 빛을 잃은 ■■■는. 대체 우린 뭘 잘못해서.
" 아? "
그림이야? 하고 묻는 말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 루르는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설명했다. 0127은 태어난 날, 1204는 시카와 만난 날. 올빼미는 자신을 의미하고 나침반은 내가 나아갈 길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손등은 제 이름을 상징하노라고 말했다. 그 외에 자잘한게 아주 많지만, 일단 넘어갈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엔 감탄이 섞여 있었다. 하고 싶냐는 물음에 리코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자신은 태어난 날도 제대로 모를 뿐더러 안다고 해도 이미 팔(과 다리)에 줄무늬가 있었기에 자리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인펜이나 크레파스로는 금방 지워져 버린다. 문득 그 생각이 든 리코는 말없이 손을 뻗어 루르의 문신을 문지르려고 했다. 아마 문지른 다음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흠칫 놀랄 것이고.
"...이거... 안 지워져? 뭘로 그린 거야?"
신기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후 리코는 그제야 하고싶냐는 루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답했다. 자신의 팔, 평범한 사람의 팔과는 확연히 다른 털투성이인데다 골격마저 뒤틀린 짐승의 앞다리 같은 팔을 들어 보여주면서.
조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해놓고나면 예쁘기도하고 의미도 있으니까 여러번 하게된단다. 그리곤 줄무늬가 많다는말에 왼쪽 눈을 감아 눈꺼풀위에 십자가를 보여주었고 목 뒤의 무한대와 허벅지의 붉은 리본, 그리곤 옷을 살짝 걷어올려 등판의 천사와 악마날개까지 보여주곤 굳이 팔일 필요는 없노라고 덧붙였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할 수 있으니까. 아마 여기서 나가면 나도 여기저기 더 추가할 생각이야.
" 모르면 정하면 괜찮지않을까? "
가령 네 생각에 특별한 날이라던가, 이 날이었으면 좋겠네. 하는 날이라던가 하는 날로 정해도 괜찮아.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혔고 슬며시 리코의 어깨를 잡아 눕혀 제 품안에 안고는 들리지않을만큼 작게 누군가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마 같은 나이또래라는 제 동생이리라. 언니들은 걱정이 없다. 바로 아래의 동생도 그렇지만 막내동생은 아무래도 어린데다가 머리때문에..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