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판 유저들에 의해 지정된 공식 룰을 존중합니다. ※친목&AT필드는 금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금지입니다! ※모두에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다른 이들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어서 상판을 찾았다는 점을 잊지말아주세요! ※지적할 사항은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해주세요. 날카로워지지 맙시다 :) ※스레에 대한 그리고 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환영합니다. 다만 의미없는 비난은 무시하겠습니다. ※인사 받아주시고, 인사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라는 다섯글자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있답니다. ※17세 이용가를 지향합니다. 그렇다고 수위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굉장히 편한 사람입니다. 질문하는 것 그리고 저라는 사람을 어렵게 여기지 말아주세요 XD
키아라는 지금, 유베리드 패밀리의 보호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오베론과의 정식 링크 절차를 밟기 위함이었습니다. 키아라는 안내데스크에 다가갑니다.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안내원이 무슨 일이냐 물어왔습니다.
"링크를 하려고 왔습니다."
키아라는 간단하게 용건을 말한 후, 안내원이 말해주는 대로 응접실에 들어가 유베리드 소장을 기다립니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자 다리의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합니다. 그와 마주하게 되는 이 순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야 그는 소문난 범죄자이자, 데미휴먼을 물건 다루듯 하는 사람이니까요.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가 더욱 증폭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있다. 러시아 속담이지. 그리고 난 그 이빨을 모조리 뽑을 사람이야. 공짜 치즈는 쥐덫위에만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속담이지. 그리고 난 그 치즈마저도 가져갈 사람이고. 돈이 돈을 낳고 돈이 돈을 굴린다. 경제의 기본 흐름이다. 소넷은 피묻은 돈, 검은 돈을 가리지 않았다. 손에 들어오기만한다면야 그게 어떤 돈이던 무슨 상관일까.
" 아아, 늦어서 미안하네. 소넷 유베리드야. "
규정에 따르면 링크할때는 소장이 직접 평가를 해야한다고 한다. CPA야 뭐, 정부 산하조직이니 입맛대로 이놈저놈이 평가해대고 아홉꼬리는 애초에 데미휴먼이 적은데다 소장부터가 그런 마인드이니. 허나, 유베리드는 다르다. 가능한한 빨리 회전을 시키려면 한 명 한 명 소장이 직접 보는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있는게, 여러 명을 동시에 소장을 시키는 것이다. 문서상 소장을 한 열댓명 만들면 편하지 않을까.
" 그래서, 링크 때문에 오셨나? "
이런 누추한 곳까지. 소넷은 제 자리에 털썩 앉고는 금장도금된 권총을 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놓곤 실례, 무거워서. 하고 덧붙였다.
키아라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한참 생각하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고 소넷이 들어옵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자연스레 정신이 바짝 듭니다.
"그렇습니다."
키아라는 무감정한 어투로 소넷의 말에 긍정을 표합니다.
"오베론이라는 사슴 데미휴먼과 링크하고 싶습니다."
곧 파트너가 될 이의 이름을 대며, 소넷이 테이블 위에 권총을 올려놓는 것을 잠자코 바라봅니다. 저 총은 과연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까요. 키아라는 지금 마피아 조직의 보스가 제 눈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자가 데미휴먼 보호소의 소장일까요.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데미휴먼들이 얼마나 많이 이 자 아래에서 핍박받고 있을까요.
지구의 평화를 지켜주시는 이니시에이터님인데 예의있게 나가야지.그쵸? 소넷은 미소를 띄며 뒤로 묶은 꽁지머리를 만지작 거리다가 좋아요. 하고 덧붙였다. 잠시 실례, 하고 말하며 주머니에서 고급진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은은한 헤이즐향이 퍼져나가 코 끝에 걸렸다.
" 시가? "
고급진거에요.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쿠바산이죠. 소넷은 자랑스레 말하며 오베론..오베론.. 하고 이름을 중얼거리며 서류철을 뒤적거리다가 서류집 하나를 꺼내들었다. 중얼중얼거리며 읽어내려가던 소넷의 입이 열린다.
" 뭐, 좋은 선택 하신거에요. 우리는 댁들이 데미휴먼으로 뭘하던 신경 안쓰니까. 빚의 담보로 맡기던 중화제를 타먹던 나쁜 유베리드로부터 구원해가던 신경안쓰니 서로서로 좋은거죠. "
역시 바로 알아채는건가. 하지만 속아주길 바란 것도 아니라 서로 무덤덤하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이랬다.
"이봐, 그만큼 널 믿는거라고... 마냐."
의의란건 이 병원에 왔을때부터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괜한 짓을 한 덕분에 책임이나 물고 있는 꼴이란. 이래서 답지않은 짓은 하는게 아니라고 하는건가. 쿠보타가 눈을 가늘게 뜬다. 담배란건 끊으면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따금씩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는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하긴 몇 년을 피워온 것을 이제와서 끊었다 한들. 아예 생각이 없기를 바라는게 웃기는 일일테다.
누군가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저 감정의 회오리였던 것이 말로 규명되고 논리적으로 설명되며 형태를 찾는다. 정론이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테지만 소장님이 말해 주시자 확연한 형상이 잡힌 느낌이다. 기껍지만 아직은 벅찬 크기의 단 것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서 눈앞에 놓인 것처럼.
"소장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아직 많이 자라야 할 것 같네요."
쓰다듬어 주시는 것에 우유사탕 씹는 것처럼 눈가를 누그러트리다, 안아 주시는 것에 골골거리는 소리라도 낼 것처럼 가늘인다. 역시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소장님하고 대화하기를 잘 했다. "소장님하고 같이 차 마시는 게 좋아요." 진짜 어린아이처럼 툭 뱉는다. 아빠가 이런 표현은 제때제때 하라고 하셨으니까.
"상담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상담비는 없지만 대신 보호소 일을 좀 도와도 될까요? 요즘 바쁘신 걸로 알고 있어서요." 이제 제법 본래대로 돌아온 마리야 야코바는 다시 예의 그 비정한 듯 맹한 낯으로 소장님을 바라본다. 받았으니 그만큼은 돌려 드려야지. 어차피 계산은 철저해야 하는 법이다.
//무려 스레 하나가 갈리고 난 뒤에 나온 지옥의 답레입니다...캡틴 힘드시면 이걸 막레로 해주셔도 되세요!
방 안에 옅은 헤이즐향이 피어납니다. 키아라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풀어 팔짱을 낍니다.
"아아, 그러신가요."
무표정했던 키아라의 얼굴에 일순 변화가 살짝 일었다가, 그새 사라집니다. 소넷의 말대로, 몇몇 이니시에이터가 유베리드에서 데미휴먼을 '사가서' 제멋대로 쓰는 상상을 한다니 역겨움이 치솟을 지경입니다. 다른 보호소들은 링크 이후 이니시에이터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감사를 한다는데, 유베리드 보호소에는 그런 것도 없다고들 합니다. 그야말로 방치인 셈이죠. 이니시에이터가 어떤 사람인지, 데미휴먼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은 이 자의 관심 밖이란 소리입니다. 그저 팔아치우기만 한다면 된다는 마인드인 겁니다. 물건처럼.
"링크 절차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소넷을 지그시 바라보며,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정중함을 담아 질문합니다. 한평생 링크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그 과정을 알리가요. 키아라는 빨리 링크를 마쳐 이 불편한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럼 말고. 소넷은 다시 시가를 안주머니에 넣고는 링크절차가 어떻게 되냐는 말에 부가설명은 필요 없는거냐며 마음에 든다고 하하 하고 웃었습니다. 크리스탈잔에 양주를 따르고는 한 잔 해요. 하고 키아라에게 하나 건네곤 제 몫으로 하나를 따라 쭉 들이키는 소넷입니다.
" 일단 그 서류에 서명해요 "
서류에는 서명한 직후부터 해당 데미휴먼은 유베리드와 관계가 없으며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해당 이니시에이터의 책임이고 유베리드는 일절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등의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러니 법의 감시망을 요리조리 피할 수 있던거겠지요. 어떤 사고가 나도 유베리드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꼼꼼한 성격을 대변이라도 하듯 서류에는 유베리드에게 책임을 절대 물을 수 없게 모든 내용에 대한 대비가 있었습니다.
유리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가 방 안에 고요하게 퍼집니다. 소넷의 한 잔 들라는 권유엔 잔을 들어 향을 맡다가 한 모금 들이키고,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서류를 받아 살펴봅니다. 서류엔 모든 일은 유베리드 보호소의 책임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유베리드다운 회피책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링크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키아라는 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돈이야 넉넉히 있으니 다행이지요. 링크 절차가 이게 전부란 사실엔 한편으로 안심하는 키아라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마련해준 이 환경이 유베리드 패밀리 보호소보다는 살만할 것이라고 감히 자부해 봅니다. 오베론의 짧은 꼬리가 신난 듯 붕붕댑니다. 키아라는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워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던가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오베론.”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은 동료이자, 파트너의 관계. 이렇게 함께 생활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사실이 더욱 실감되었습니다. 아직은 많이 서투를지도 모를 이니시에이터로써의 일이었지만, 키아라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게 자신을 믿고 흔쾌히 링크를 수락해준 오베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요.
“링크, 받아줘서 고마워.”
키아라는 새삼스레 말을 붙여봅니다. 동정심에서 비롯된 충동적인 결정이었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와서 조금 놀란 것도 있었습니다.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거의 초면에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서로 알아가는 건 지금부터 하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나도 나름 소장짓 오래 해먹은 사람이라 딱 보면 뭘 원하는지 알지. 눈깔 굴리는 소리만 들어도 팔아먹으려는건지, 실험체로 쓰려는건지, 중화제 타먹으려고 사는건지 다 알 수 있단말이야. 아가씨는 동정심이구만. 뭐 때문에 그 동정심이 잃었는지 확답은 못하지만 그래도 예상은 가는군. 굳이 말하진 않겠어. 소넷은 그렇게 덧붙이면서 서류 한장을 추가로 가져옵니다. 그 곳에는 수수료를 포함한 이런저런 명목으로 가격표가 붙어있었고 한 번에 납부할지, 나눠서 납부할지는 자유라고 말하며 시가를 쭉 빨아들입니다.
병원에 감금인지 입실인지 그 애매한 선에 있게된지 오늘로 벌써 며칠째다. 일과는 나름대로 정해져있다. 아침식사 이후 잠, 점심 식사 이후 잠깐 일어나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작성하고 저녁식사 이후 여러가지 검사를 받다가 잔다. 물론 중간중간에 엄청나게 자고있지만 그것까지 다 쓰다간 하루의 일과가 잠식사잠식사잠밖에 없어진다. 그래선 안돼지. 아무튼 여긴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는것도 시원치 않다. 수시로 사람이 바뀌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편히 잘 수가없다. 언니들이 자는걸로 뭐라하긴 했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편하게 잘 수 있었다고. 빨리 데리러 와주면 좋겠다. 어쩌면 스스로 탈출해야하나. 아 - 또 누군가 오는 것 같다. 루르는 책상을 톡톡 쳤다. 옆에 서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던 간호사는 차트를 뒤적이다가 이정도면 됐나 - 하고 차트를 톡톡치곤 돌아갔다.
데미휴먼은 쏠 생각같은건 없었다. 더불어 이니시에이터를 살려둘 생각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건 순전히 잠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잠도 모자랐고 답지않게 돌발상황에 놀라버린 탓이다. 뭐, 내 잘못이니 감수해야지. 이제는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날개라도 있는 탓에 외롭지는 않다.
" ..... "
필사의 자는 척. 블랑슈언니는 CPA로 끌려가서 험한 꼴을 당했다고 한다. 뭐, 그래서 내가 복수해줬지만 나도 아픈 건 질색이니 쓸데없는 말해서 끌려가기전에 잠이나 자자는 심보였다.
병실 앞에 선 리코는 가만히 왼팔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완전히 아물진 않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있으면 딱지가 앉고 떨어지며 살이 붙을 것이다. 다시 시선을 명패로 올린다. 이 병실에 있는 데미휴먼을 감시해야 한다고 했다. 에피는 아직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으니 자신이 잘 해야한다고 리코는 생각했다. 손 가득히 쥔 사탕과 팔에 낀 그림책을 보면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한가-싶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다. 처치를 끝낸 건지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와 엇갈리듯 리코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고 있어?"
침대 위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새-날개는 한쪽 뿐이었지만 새는 새였다-를 보고 리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 특유의 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다가가 일단 머리맡에 사탕을 두었다. 양이 많았기에 언뜻 보면 우르르 쏟아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자는 거야? 많이 아픈가? 많이 아플 땐 웅크려서 눈을 감고 쉬게 된다. 그러면 상처도 빨리 나았으니까. 자신이 많이 아팠을 때를 생각하며 리코는 천천히 손을 뻗어 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살짝 건드렸다.
누가 오는가 했더니 저번에 팔을 뚫어버린 데미휴먼 아이었다. 안그래도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콕콕 쑤셔왔는데 직접 온 걸 보니 더 하는 것 같다. 머리맡에 사탕이 놓여지고 자는거냐 물었을 땐 그저 그대로 자는척만 하고있었다. 제 얼굴을 톡톡 만졌을때 으음.. 하고 미간을 찡그렸다가 더 이상 이러는 것도 가슴이 콕콕 쑤셔 참을 수가 없어 슬며시 눈을 뜨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몽롱한 목소리로
" 일어났어.. "
하고 말했다. 팔에 붕대를 감고있는 걸 보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날 사용한 총이 대인저격총이었다는 점. 만에하나 그 날 총이 망가지지 않아 대물저격총을 가져왔다면 팔에 구멍이 난게 아니라 아마 저 총에 맞은 부분 아래로는 없어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그래도 데미휴먼을 건드리는건 안돼. 전부 피해자인 불쌍한 아이들이잖아. 루르는 순간 이어진 침묵과 엄청난 어색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 옆에 걸려있는 루르 스노드롭이란 이름표를 보곤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 일어났다. 새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리코는 조용히 손을 치웠다. 그리고 가만히, 몸을 일으킨 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새 쪽이었다. 이름을 묻는 말에 리코는 귀를 쫑긋거리다가 대답했다.
"리코는 리코야."
그리고는 눈을 데구르르 굴려서 머리맡 쪽의 이름표를 보았다. 에피에게 조금씩 배운 덕분에 이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많이 늘어났다. 리코는 가만히 속으로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루...가 아니라 루르? 그런 이름인가보다. 리코는 머리맡에 있던 사탕 중 하나를 집어 루르에게 내밀었다.
순간 리코는 리코구나. 하고 말할뻔했다. 그랬다간 또 얕잡혀보일게 뻔하다. 여기선 연장자답게, 시카의 딸 답게 멋지게 나가야한다고 루르는 생각했다. 그리곤 건네주는 사탕을 고마워.하고 받고는 그대로 까서 입으로 가져갔다. 자꾸 팔에 묶인 붕대에 시선이 간다. 일부러 그런건 아니지만, 아니. 일부러라곤해도 이지경으로 만들 생각까진 없었지만. 어쩌면 아까부터 가슴을 콕콕 찌르는 이 느낌은 미안함이라는건가. 자매들과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건가. 아니면 데미휴먼이라 가능한걸까.
" 거기 있으면 불편해. 이리와. "
같은 데미휴먼에 어린아이라는것에 경계심을 허문 루르는 침대를 톡톡치며 올라오라 권했다. 날개덕에 침대를 큰 걸 받았지만 한쪽뿐인 날개라 공간이 많이 남았다.
침대를 톡톡치며 올라오라 권하는 루르에게 되물었지만, 대답을 원해서 했다기보단 형식적인 확인에 가까웠다. 그걸 나타내듯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리코는 침대에 낼름 올라가 있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처럼(?)말이다. 아닌가. 아님 말고. 아무튼 침대에 사이좋게 앉은 리코는 미안하다는 말에 맹한 표정으로 루르를 보았다.
"괜찮아. 난 빨리 나으니까. 좀 있으면 다 낫는다고 했어."
데미휴먼 특유의 재생력이라고 해야할까, 침식이 상당히 진행된 리코는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빨랐다. 다친 부위가 왼팔이라는 자주 쓰지 않는 부위이기에 불편한 것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땐 엄청 아프긴 했지만 이제는 지난 일이기도 하고. 리코가 루르에게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건 리코가 팔을 다친 것과 루르의 연관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컸다. 팔을 다쳤던 현장에서 루르를 목격했다면 상처와 루르를 연관지어 '나쁜 녀석'이라고 기억했겠지만, 루르가 잡혔을 때 리코는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뒤늦게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갔던 모양이다.
그럼 돼지. 하고 말한 루르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 리코가 올라오기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주곤 다시 뒤로 몸을 기댔다. 또 잠이 솔솔 올것만 같았지만 또 잠들기에는 이미 아이를 대화에 끌어들여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빨리나으니까 괜찮다는 말에 슬며시 타투 투성이의 팔을 뻗어 리코의 왼팔을 살짝 잡았다. 그래. 여기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구나. 총에 맞는게 어떤 느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루르였다. 그 날 에도, 온 몸이 총에 뚫려 죽을 뻔 했으니까. 그 때 신의 목소리와 함께 시카가 와서 구해주었다. 그건 구원이었다. 그때부터 루르는 시카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 약속. 나도 데미휴먼한테 그러지는 않아. "
인간이나 크토니안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하지만 그 말은 굳이 내뱉지 않고 리코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지 말라는 건 부탁일까 명령일까. 루르는 다시 타투투성이 팔을 슬며시 뻗어 리코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보다가 손을 내렸다. 젤러시는 늑대지만,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어쩌면 사이좋게 지내줄지도.
왼팔을 살짝 잡혔지만 리코는 가만히 있었다. 통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구멍이 뻥 뚫렸던 부위지만 빠르게 아물고 있었으니까. 붕대를 감아놓은 탓에 핥을 수 앖는 건 조금 아쉬웠다. 간질간질할때 싹싹 하면 시원한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약속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거는 건 조금 놀랐다. 책에서 읽어서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코의 손은 호랑이의 앞발이나 마찬가지니 아마 불가능할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살... 일거야. 아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던 리코가 나이를 묻는 말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마'라는 말이 붙은 것은 확신이 없어서였다. 갈가리 찢긴 전 주인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다시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동생? 나만해? 동생도 새야?"
동생, 저번에 토끼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 그땐 경매장에 동생을 데리러 왔었다고 했지. 리코는 가만히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신기하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루르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경계심이나 불쌍한 데미휴먼을 보는게 아닌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 집에 있을 제 동생을 눈 앞의 리코에 오버랩시켜 바라보며 조금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아이나 이 아이나 아픈건 똑같네. 눈이 아프냐, 팔이 아프냐의 차이지만 공통점은 둘다 가만 보고 있으면 많이 귀엽다는 점이지. 루르는 리코를 살짝 들어 제 몸에 기대어 눕히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니, 동생은 여우야. 꼬리가 이렇게 있고 귀가 이렇게 있는. "
그렇게 말하며 폭신폭신한 털에 쌓인 귀와 꼬리를 손으로 만들어 보여주고는 조만간 만나겠지. 하고 덧붙였다. 뭔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슬쩍 스쳐지나갔지만 생각에서 그쳤다. 물만 마실 수 있는 이곳은 너무도 심심하고 지루했기에 또 물이나 마시고 있을 순 없으니까.
" 동생은 눈이 좀 아파. 어쩌면.. 머리도. 그래도 너랑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
시큼한 포도를 싫어하는 여우... 리코는 얼마 전 읽었던 그림책의 여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달콤한 포도맛 사탕을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리코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맞춰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눈이 아파? 머리도? 많이 아파? 빨리 나으면 좋겠다."
눈도 머리도 아프다고...? 무슨 짓을 당한 걸까. 엄청나게 많이 맞았을지도 몰라. 조금 전에 조만간 만나겠지라는 말은 많이 아픈 동생이라 곧 병원에 올 거라는 말이었을까.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리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는지 고개를 위로 올려 루르를 보며 말했다.
총에 맞아본게 한 두번도 아니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어떻게 버티고 치료해야하는지 전부 알고있다. 맞자마자 치명상이 아님을 알았으며 즉석에서 응급처치까지 떠올렸지만 가지고있던 약을 전부 줘버려서 정말 기초적인 처치만 끝내고 여기까지 실려온 것이지만. 갑갑하고 축 내려앉은 병실의 공기에 머리가 아파질것 같은 소독약 냄새가 코 끝에 걸려있었다. 사람이 살아나가고 죽어나가는 이 냄새. 아마 그 아이도 제대로된 치료를 제 때 받았다면, 아니 애초에 데미휴먼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텐데. 마음속 깊은곳에서 뜬금없이 화가 꿈틀댄다. 꿈틀거리던 화는 점점 더 거세지고 강해진다. 검은색의 화가 꿈틀대며 몸을 키우자 화는 붉게 변했고 검은 화는 붉은 증오가 되어 마음속 깊은 심연에서 얼굴을 보였다. 심연에서 얼굴을 드러낸, 기어이 증오가 되어버린 것은 몸에까지 영향을 끼쳐 가만히 살살 잡고있던 리코의 손목을 저도모르게 꽉 쥐어버렸다. 그랬다가 정신을 차린건 '아파'하고 말하는 제 동생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일까.
" 아, 미안.. 내 동생은 아마.. 낫지 못할거야. 눈도, 머리도. 노력하고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않아. 머리는 나을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눈은 힘들지 않을까. "
가만가만 리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턱 밑을 간질였다. 역시 몇 번이나 막내동생이 겹쳐보인다. 시카가 다방면으로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차도는 없어서 뱀파이어나 다름없는 생활이 강제되고있다.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게 언제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말했을 때, 선명한 색으로 세상을 보는 건 무슨 느낌이냐 물었을때 아무말도 하지못하고 사랑한다.라고밖에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보니 다시 검은 화가 꿈틀댔고 마음속이 대바늘에 찔리는 것 마냥 너무나도 아팠다.
그 안에 있는건, 그 안에서 벌어지는 건 솔직히 맨정신에 감당하기 힘든 것들도 있으니까, 그런 낯선 열대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느니 차라리 없는 셈 치부해버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게 이니시에이터로서의 치부가 될지라도. 스칼렛은 덜컹하는 자체에 덩달아 덜컹하고는 운전 거칠게하면 위험해요. 하고 주의를 주곤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 유페미아씨는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
하지만 아는게 없어서 좋아보이는건지는 모르겠어요. 하고 스칼렛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이며 미소지었다. 달리던 차량밖으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던 스칼렛은 아, 여기 세워주시겠어요? 하고 말했다.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스칼렛이 세워달라고 한 곳은 비포장도로의 한복판이었다. 말이좋아 비포장도로지, 그냥 외벽과 맞닿아있을 숲의 시작지점이었다.
손목을 꽉 잡혔다. 뭔가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리코는 조심스레 루르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손목을 강하게 옥죄던 힘은 금새 사라졌지만, 혹시라도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은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구나... 미안해..."
나을 수 없는 걸 나을 수 있냐고 물어본 게 잘못이었나보다. 리코는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가만가만 머리를 쓸던 손이 턱 아래를 간질이기 시작했고, 리코는 또 다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길래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리코의 눈에 루르의 왼팔에 새겨진 타투가 들어왔다. 그게 타투라는 점은 모르고 있지만, 뭔가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문자도 있었고.
잘못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한테 있는거야.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미안해하지말라고 말했다. 왜 우리가 미안하다고 해야하는거야 우리는 피해자인데.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지어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사과해야하는거야? 시작된 의문은 다시 꿈틀거리며 증오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 쓸려나간 감정의 껍데기를 채워준 건 고통과 증오, 원망과 생존욕구 뿐이었다. 가만히 제 동생을 생각하는 루르였다. 아마 두번 다시 빛을 볼 수 없을지 모르는 그 불쌍한 아이는 대체 뭘 잘못한걸까. 무죄임에도 목에 줄이 걸린 젤러시는, 빵 한조각에 씻을 수 없는 흉터를 입은 블랑슈는, 그저 데미휴먼이라고 꼬리가 잘려나간 ■■■은, 아무것도 모른채 빛을 잃은 ■■■는. 대체 우린 뭘 잘못해서.
" 아? "
그림이야? 하고 묻는 말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 루르는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설명했다. 0127은 태어난 날, 1204는 시카와 만난 날. 올빼미는 자신을 의미하고 나침반은 내가 나아갈 길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손등은 제 이름을 상징하노라고 말했다. 그 외에 자잘한게 아주 많지만, 일단 넘어갈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엔 감탄이 섞여 있었다. 하고 싶냐는 물음에 리코는 가만히 생각해 봤다. 자신은 태어난 날도 제대로 모를 뿐더러 안다고 해도 이미 팔(과 다리)에 줄무늬가 있었기에 자리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인펜이나 크레파스로는 금방 지워져 버린다. 문득 그 생각이 든 리코는 말없이 손을 뻗어 루르의 문신을 문지르려고 했다. 아마 문지른 다음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흠칫 놀랄 것이고.
"...이거... 안 지워져? 뭘로 그린 거야?"
신기하다. 그렇게 중얼거린 후 리코는 그제야 하고싶냐는 루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답했다. 자신의 팔, 평범한 사람의 팔과는 확연히 다른 털투성이인데다 골격마저 뒤틀린 짐승의 앞다리 같은 팔을 들어 보여주면서.
조금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해놓고나면 예쁘기도하고 의미도 있으니까 여러번 하게된단다. 그리곤 줄무늬가 많다는말에 왼쪽 눈을 감아 눈꺼풀위에 십자가를 보여주었고 목 뒤의 무한대와 허벅지의 붉은 리본, 그리곤 옷을 살짝 걷어올려 등판의 천사와 악마날개까지 보여주곤 굳이 팔일 필요는 없노라고 덧붙였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할 수 있으니까. 아마 여기서 나가면 나도 여기저기 더 추가할 생각이야.
" 모르면 정하면 괜찮지않을까? "
가령 네 생각에 특별한 날이라던가, 이 날이었으면 좋겠네. 하는 날이라던가 하는 날로 정해도 괜찮아.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혔고 슬며시 리코의 어깨를 잡아 눕혀 제 품안에 안고는 들리지않을만큼 작게 누군가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마 같은 나이또래라는 제 동생이리라. 언니들은 걱정이 없다. 바로 아래의 동생도 그렇지만 막내동생은 아무래도 어린데다가 머리때문에..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
상처를 내고 잉크를? 리코는 처음 들어본 방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눈꺼풀, 목 뒤와 등까지 그려진 타투를 보고 이번엔 동공을 땡그랗게(?)했다. 많아! 팔만 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다 할 수 있구나! 하지만 상처를 낸다는 게 무서웠다. '사람'가 참으라고, 조용히 있으라고 한다면 참아낼 수는 있지만 순수하게 자기 의지만으로, 명령 없이 그런 통증을 참을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리코가 조용히 견딜 수 있다고 해서 통증마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고, 통증을 즐기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렇기에 새기는 방법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리코는 타투를 좀 무서운 걸로 인식해버렸다. 귀가 조용히 뒤로 젖혀진 리코는 루르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뉘였다.
"...아픈 건 무서워... ...내가 정해도 돼? 특별한 날?"
그런 건 사람이 정하는 건 줄 알았는데. 살짝 고개를 기울인 리코는 불편한 건 없냐는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병원은 냄새가 강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다. 같이 살게 된 에피도 좋은 사람이고, 밥도 제 때 나오고 맛있는 것도 많이 받는다. 지금 누운 자리도 나쁘지 않고 팔도 그렇게 아프진 않다. 불편한 거 없는 것 같아. 응. 그렇게 결론을 내린 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루르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데미휴먼이 인간다운 취급을 받고 사는것이 다행이라는것는 엄청난 불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쳤다. 우리도 인간인데, 시카의 말처럼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인간인데. 루르는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 감정을 죽여놓기로했다. 그러니까 구해주면된다. 피는 피를 부르겠지만 저들이 흘릴 피가 훨씬 많을테고 내 피로 자유로워진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루르는 제 팔에 새겨진 0127와 1204를 만지작 거리며 응. 특별한 날. 하고 말했다.
" 사실 12월4일은 시카가 날 데려가면서 내 새로운 생일이 됐어. 다시 태어났거든. 동시에 내가 죽은 날이기도 하고. "
너무 어렵나? 루르는 너무 어려웠다면 미안하다며 손을 뻗어 사탕을 꺼내 직접 까서 리코의 입 안에 넣어주고는 달달할때 녹여먹자구. 하고 덧붙였다.
복수라고 볼수도 있지만 시카의 근본적인 목표는 역시 데미휴먼의 인권과 권리장전이에요. 인간에 대한 복수는 그에 딸려오는 부가적인 것들이구요. 시카의 딸래미들은 보시면 알겠지만 전원이 그저 데미휴먼이라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허수지구의 아이들은 데미휴먼이라서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데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거죠. 같은 데미휴먼인 시카의 입장에서는 이런 잘못된 건 고쳐야만 한다 - 라는게 정설입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루르의 말을 듣던 리코는 그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말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때리고, 죽지 않을 만큼만 적은 양의 밥을 주던 전 주인. 옆자리 아이가 괴물이 되어 주인을 덮치고 그 틈을 타서 도망쳤던 일, 빗물로 배를 채우며 돌아다니다 맛있는 냄새를 따라갔더니 미호를 만나 아홉꼬리보호소에 들어갔던 그 경험을.
"...근데 그 날이 언제였는지, 날짜를 모르겠어... 나중에 미호한테 물어보러 갈 거야."
처음으로 맛있는 밥을 가득 먹은 날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번도 맞지 않았고,처음으로 푹신푹신한 잠자리에서 잠을 잤던 날. 리코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루르가 내미는 사탕을 재주좋게 낼름 받아먹은 리코는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눈을 느리게 꿈뻑였다. 달달한 침을 연달아 삼키다보니 사탕은 이미 다 녹아 있었다. 달콤한 뒷맛의 여운을 느끼던 리코는 작게 하품을 했다.
"....음... 졸려..."
두텁진 않아도 적당히 포근한 이불과 온기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리코는 금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밖에서 햇빛을 쬐며 낮잠자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따뜻한 실내에서 자는 것도 좋아. 리코는 저도 모르게 뒷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고나서 축 늘어졌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루르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결국 이 아이도 데미휴먼이라서 당하고 살았던거야. 가족들과, 자매들과 다를게 없어. 이런 안타까운 사태가, 불쌍한 아이가 더 생기지 않았으면 해. 데미휴먼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수 있다면 몇 발이고 쏠 자신이 있어. 시카는 그걸 실현해 줄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다가 그만한 추진력이 있어. 시카라면 가능해. 시카라면.
" 졸려? "
그러고보니 나도 졸리네. 흐아아암 하고 하품을 한 루르는 그럼 또 자보실까, 하고 말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면증에 가깝게 잠에 빠져드는 루르였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잘 수 있는 건 그리 특별한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잘 자. 하고 덧붙인 루르는 가만가만 리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잠에빠졌다.
쿠보타의 대답을 듣고 매우 침착해진다. 상대가 아주 막나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나쁜 생각'을 실현할 의사가 손톱만큼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기에. 시간 재고 있으니까 다른 데로 빠지지 말고 오세요. 여전히 고저없이 평이한 말투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다.
"으음, 개인 고유의 판단기준을 타인이 온전히 납득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요."
베어도 된다는 말에 자동적으로 이의가 솟아나지만 그 주제로 입씨름을 해 보았자 평행선일 것을 알기에 그 주제는 유보한다. 그래도 고개를 갸울인다. "특이하네요. 쿠보타는 데미휴먼을 이질적으로 보잖아요. 사람들은 대체로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면 해칠 때 더 주저함이 없는데, 쿠보타는 왜 기준이 반대예요?"
내용에 비해 억양은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대충 대답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실은'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알았다'라는 뜻에 가깝지만. 경계선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걸 뚜렷하게 하려고 답을 찾는 건가? 하지만 뜻이 확실히 무엇이건 간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타인의 주관이라는 건 대체로 이해하기 힘들어요."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눈앞에 둔 기분이다.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게 자꾸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 더 귀찮은 지점은 답이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답이 없다고 사고하는 걸 관두는 행동은 오답이라고 아빠랑 미호 소장님이 입을 모으니까.
"그 답이라는 거, 잘 찾았으면 좋겠네요."
일단 기계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걸 한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이렇다 할 진심이 없지만.
크토니안을 잡고 돌아오다, 한낮에 성인 남성이 보호소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가늘이다, 왜 저러고 있는지 생각하다, 생각하는데 의미가 없다는 사고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보호소 사람들은 가족이고 가족을 보호하려면 의혹은 우선 위협으로 가정하고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 서 계셨어요."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오신 건가요? 그러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억양은 평소처럼 고저없이 건조하다. 지금 나는 견제를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굳이 그렇지 않게 보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제 이름은 마리'야'이고 보호소에 마리'아'라는 아이가 또 있어요. 저는 20대이고 그 아이가 어린애니까 보호소에 있는 아이를 찾고 계신 거라고 생각해요. 차분히 덧붙이며 설명한다.
"하지만 마리아를 어떻게 알고 계신 건지는 아직 대답을 못 들었어요."
고저없이 말하지만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이유를 모르는 이상 지금은 정체모를 성인 남성이 보호소 앞에서 서성거리며 어린아이를 찾는 구도이다. 마리아의 가족으로서 그리고 보호소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일종의 보호자로서 대답은 꼭 듣고 이 남자를 야찌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마침 적당한 때에 이곳을 지났던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눈앞의 상대가 이런 형태로 미리 주의를 받지 못하고, 실수로라도 비관계자에게 누설했다면…… 여혹을 바탕으로 한 상정들이 순차적으로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아무래도 좋은 꼴은 못 보겠지. 여러 방면으로.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든간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는 엉성한 결과주의를 신봉하는 자로서 더이상의 만약을 가정하지 않기로 했다. 즉, 실답지 않게 웃으며 여자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손 잡아도 괜찮겠어요?" 허락의 청을 행동 뒤에 도치하면서.
"저는 야오쳰위라고 해요."
부르기 어렵다면 야오라고만 부르셔도 되고요, 덧붙이며 손아귀에 힘을 뺀 채 손을 위아래로 약하게 흔들었다. 인사가 오가는 잠깐의 순간에 그는 상대의 몸상태를 대략적으로 살폈다. 팔은 우선은 멀쩡해보지만 다리에 비하여 상대적인 걸지도 모른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툭 치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페미아에게로 내민 손에 든 힘이 더욱 약해지다, 자연스럽게 손이 풀리며 악수를 거두었다. 접촉은 자제해야겠다. 혹여라도 나이 많은 환자를 다치게 해서 배상금을 무는 불상사가 없었으면 한다는, 다분히 속물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 사람들을 이해하신다고요? 신기한 분이시네요."
데미휴먼인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그는 의문어린 표정을 짓다 적당히 납득했다. 결론은 좋게 생각하기 힘들다는 거니까. 그는 유페미아가 열변을 끝내기까지 잠자코 말을 귀담아듣고선 손으로 턱 언저리를 짚으며 고민의 제스처를 취해본다. 그러면서도 표정에는 진지한 기색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과연 평생에 심각할 때가 있기는 할지 모르겠다. 검은 손톱이 박힌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그가 맞장구를 쳤다.
"부상이라니까 생각났는데요. 그래도 데미휴먼에게는 그나마 온건한 것 같긴 해요. 그래도 조심해야겠네요. 너무 방해했다간 죽일지도 모르고. 사실 피하려고 해도 그쪽에서 저흴 끌어들이는 것 같지만요."
졸리다는 말을 입에 달면서도 정확한 사격을 가하고, 제압당한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사격을 가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 총잡이가 지근거리에서 오발하는 실수를 할 확률은 낮았다. 그는 본인의 추측이 틀리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시카의 딸이 내세우는 철칙이나, 유령도시에서 본 블랑슈의 행동을 고려하면 마냥 허황한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마리야는 눈을 가늘인다. 처음 보는 사람이 부모의 지인이라고 주장하면 보통 아는 척 하지 않는 것이 정석 아니던가. 하지만 이 이상 캐묻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나쁜 의도가 있다면 유베리드 같은 곳에서 데미휴먼을 '살 수 있는데' 아홉꼬리 보호소까지 와서 특정 데미휴먼을 지목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뭐, 위험할 것 같으면 미호 소장님이 중간에 차단해 주시겠지. 정말 수가 틀려도 역시 소장님께서 그렇게 만든 사람의 뼈와 살을 친히 분리해주실 것이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하지만 미성년자가 주제인 만큼 충분히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상대방에 지적에 작게 뚱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검 손잡이에 손을 댄 건 다분히 충동적인 기준에서 비롯되었지만 더 수상했으면 주저없이 공격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건 몇 안되게 감정적인 가치를 지닌 독보적인 존재이므로 그만큼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첨언하자면 굳이 검을 뽑지는 않았겠지만요."
칼집 째로 때린다던가 그 다음 체술을 쓴다던가. 엄마가 가르쳐준 방법들은 무궁무진하다. 더군다나 이쪽은 데미휴먼이라서 신체적인 조건이 더 유리하지 않던가. 애초에 베는 게 아니라 때리는 거라도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면 안되는 거지만 가족을 위해서라고 뻔뻔하게 합리화를 하는 마리야 그레고로브나였다.
논리적인 충고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유 없이 아무에게나 적대감을 가지지도 않고요. 조금은 어린아이같이 다박다박 대답한다. 물론 이유 없이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부분이 객관적으로 얼마만큼 사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수비를 공고히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아주 조금은 해 본 마리야였다).
화창한 대낮, 키아라는 간만에 보호소에 마리아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도 그렇고, 이전에 콜트와 함께 마리아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었다지요. 그래서 키아라는 휴대폰을 들어, 콜트에게 간단한 연락을 취했습니다. 보호소 앞에서 만나자는 간단한 문자 한 줄이었습니다. 그 뒤, 키아라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집을 나섭니다. 보호소로 가는 길에 가게를 들러 마리아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넋을 놓고 걷다 보니 어느새 보호소 앞이었습니다. 키아라는 보호소 앞의 벤치에 앉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잠시 시선을 둡니다. 그 뜨거웠던 햇살도 이제는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듯 했습니다. 벌써 가을이 오는 모양입니다.
내용에 비해 억양은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대충 대답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실은'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알았다'라는 뜻에 가깝지만. 경계선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걸 뚜렷하게 하려고 답을 찾는 건가? 하지만 뜻이 확실히 무엇이건 간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타인의 주관이라는 건 대체로 이해하기 힘들어요."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눈앞에 둔 기분이다.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게 자꾸 사람을 귀찮게 만든다. 더 귀찮은 지점은 답이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답이 없다고 사고하는 걸 관두는 행동은 오답이라고 아빠랑 미호 소장님이 입을 모으니까.
"그 답이라는 거, 잘 찾았으면 좋겠네요."
일단 기계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걸 한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이렇다 할 진심이 없지만.
"고맙지만... 빈 말 할 필요없어. 오히려 네가 이해하는게 더 비정상이야."
귀염성 없는 대답이다. 네가 말하는 기계적 상호작용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 분명 제대로 된 데미휴먼으로 자라기 위해 주변에서 그런걸 가르치는 거겠지만, 솔직히 이쪽은 못 미덥다. 인간도 제대로 못 자라나게 세상인데.
애초에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검리'의 문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다. 당연히 이해하기도 어렵지.
"왔다... 귀찮은 녀석."
잠시 뒤 병실의 문이 열린다. 정확히 6분. 쿠보타가 1분 초과해서 도착했다. 역시 스스로 허들을 너무 높힌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역시 그런 것에 신경쓰지도 않고 적당히 의자에 눌러 앉았다.
매일 약속한 시간에 찾아오는 간호사. 루르는 고개를 들고는 딱히 없어요. 하고 말하고는 손을 들어 난간을 톡톡, 하고 두번 쳤다. 간호사는 차트를 넘겨보다가 싱긋 미소를 지어주고는 링겔을 조작했고 이후 차트판을 톡톡 치고는 루르와 눈을 맞추었다.
" 시술은 언제에요? " - 아마 5일후일거에요. 걱정마세요. 금방, 그리고 잘 끝날거니까. - " 으응.. 알겠어요. 고마워요. "
간호사는 그럼 다음에, 하고 말하곤 다시 돌아갔고 루르는 5일인가-하고 중얼거리며 이전에 리코가 주고간 사탕을 꺼내 입에물었다. 입 안 이리저리 굴리다보면 금새 달달한 맛이 퍼졌고 혀 끝에서 사탕을 굴리고 있다보면 시간이 흐르는 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딸기맛. 딱히 제일 좋아하는 맛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맛 또한 아니다. 그저 있으면 먹고 아니라면 마는 그런 것이니 이번에는 '그냥 있으니까 먹는다.' 정도가 맞으려나.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에 발소리가 들렸다. 또 누군가가 온다. 계속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러 오는 것이 영 불편했다. 모르는 사람앞에서는 잔뜩 긴장하고 부끄러워지고 고개를 숙이게 되는 성격이라, 차라리 잠들어서(잠들 수 없다면 자는 척이라도해서) 상황을 벗어나는 루르였다. 앞에 오는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저 이번에도, 자는 척을 하면 될 일이다.
>>312 그게... 저번부터 루르도 간호사도 서로 얘기할때 뭔가 톡톡 두드리는게 보이니까...? 서로 신호같은거 보내는 것 같고.. 맨 처음엔 모스부호인가 했는데 그냥 두번씩 두드리는 걸 봐서는 사전에 정해둔 암호?같은걸까?싶기도 하고... 5일 뒤의 시술이란게 뭐 탈출이라던가 그런 거 아닐까나 하고 방금 문득 생각도 들고...
감시라고는 하지만 마리야 그레고로브나는 어쩐지 루르 스노우드롭에게는 잘해주고 싶었다. 스노우드롭이 범죄자이고 그런 동시에 자신이 죽인 사람들보다 훨씬 호사스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그러므로 도의적으로는 상냥한 대우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녀를 대할 때면 어쩐지 미호 소장님이나 아빠를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아빠라면 분명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병실에 갈때 굳이 과자를 만들어 들고 간 것은(산 것도 아니고 무려 직접 만든 것이다) 그런 판단에 의해서였다. 마리야는 평소처럼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침대 바로 옆에 앉아서 바구니를 무릎에 놓았다.
"저기, 평소라면 안 깨우겠지만 오늘 과자를 들고 와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봤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내가 직접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네가 먹으라고 가져온 의미가 없으니까. 물론 거절한다면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지만 그런 의사표현도 깬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해. 상대에게 손도 대지 않고 고저없이 읊는다. 스노우드롭이 자는 척 하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마리아는 칭찬을 받자 좋은 듯 헤실헤실 웃다가도 묻는 말에는 잘 대답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아라는 얼굴 가득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내 키아라는 마리아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벤치 위에 올려둔 검은 봉지로 손을 뻗었습니다. 잠깐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러 맛의 과일 사탕이 든 봉지였습니다.
"자, 이건 엄마가 마리아한테 주는 선물." "와아, 고마워요, 엄마!"
마리아는 사탕 봉지를 건네받고 기쁜 듯 키아라에게 폭 안겼습니다. 금방이라도 좋아서 펄쩍 뛸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
쿠보타가 1분 늦은 거 빼고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나름 성실하게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해준 상대를 힐난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지 않아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많이 캐물었으니까 쿠보타도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도 돼요."
개인적인 질문을 많이 했으니 이쪽도 질문을 받는 게 공평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상대의 성격상 궁금한 게 있으면 거침없이 물어봤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물어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없으면 이만 가볼 거고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충동적으로 온 만큼 여기서 더 할 것이 남아있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이 둘씩이나 버티고 앉아있는 것은 루르의 입장에서도 귀찮을 테니.
자는척, 자는척. 이러다가 정말 잠들면 그걸로 좋은거겠지만 아무래도 불편해서 잠이오질 않는다. 집이었다면 이미 잠들어도 몇번은 더 잤을텐데 그러지 못하는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러워 지기도한다. 원망? 원망스럽다는건 이런느낌인가. 싫지만 싫지가 않은, 어딘가 귀엽기까지한 이런게 그런느낌인가. 루르는 잠시간 뒤척이면서 잠꼬대를 하는척을 하다가 과자를 들고와서 깨울수밖에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나 - 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러지않으면 갈 것 같지도 않으니까. 잠시간 눈을 마주보던 루르는 "ㅁ..뭐.." 하고 강한척을 해보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 과자라니.. "
누구를 애로 생각하는거야 뭐야. 라고 말하는 루르였지만 어느샌가 눈은 과자로 가있었고 하나정도는 먹어봐도 괜찮지않을까 -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언제줄건데? 나 주려고 가져왔다며.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걸 말하는게 어디 쉬운일인가. 루르는 가만히 눈으로 과자와 마냐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아, 그 때 그 데미휴먼. 하고 한마디를 하고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성인이지만 자주 먹어. 단 걸 안 좋아한다면 취향에 못 맞춘 건 유감스럽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바구니를 열어 루르의 곁에 놓는다. 마카롱 조금, 다쿠아즈 조금, 그 밖에도 그밖에도 웬만한 건 다 조금씩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기대하지 않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쪽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고 있어. 확신범에게서 사과를 기대하는 건 시간 낭비이고. 고저없이 읊으면서 과자를 하나 꺼내 부스럭 먹는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굳이 과자를 가져오면서 사과를 종용하는 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 한 마디 덧붙이면서.
말 사이에 잠깐의 텀이 있던 것은 마카롱을 까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느라 생긴 틈이다. 앗, 달다.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리지만 그 아린 느낌이 너무나도 좋다. 순간 눈이 풀린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던 루르는 황급히 표정을 숨기고 입 안에 있던 연보라색 마카롱을 우물거리다 넘겼다. 달달해서 좋네. 그런데 나 이런 취급 받아도 되는건가? 에이, 뭐 어때. 상관없..겠지.. 아마..
" 그래서, 왜 찾아온거야? 용건이라도 있어? "
상대가 적이라면 무조건 강하게나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을 아래로 떠. 아, 절대로 존댓말해선 안돼. 무조건 반말이야 알겠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바로 비집고 들어가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고 또 늘어져. 싸움이란건 원래 지저분한거야. 젤러시와 블랑슈의 가르침이었다. 젤러시는 알파였고, 블랑슈는 알파를 노리는 2인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아 애증의 관계인 둘의 가르침이라면 루르를 강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문제라면 루르는 그런 가르침을 받아 적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소심하다는 것.
마리아가 콜트의 말을 듣고 의문스럽게 고개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콜트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 눈을 도록 굴리며 답합니다.
"...무거워 보여요. 안 쓸래요." "그래도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아저씨가 원하는 것 꼭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활짝 웃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딸, 이제 보호소로 다시 가야해요. 아저씨한테 안녕 해야지?"
키아라는 마리아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그저 잠깐 얼굴만 보려고 한 것이기에 시간은 그리 넉넉히 잡아두지 않았습니다.
"벌써요? ...콜트 아저씨, 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다시 꾸벅 인사를 합니다. 마리아의 찰랑이는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습니다. 인사를 마친 마리아는 키아라의 품에 안겼습니다. "엄마, 이제 가면 또 언제 올 거에요?" "글쎄, 엄마는 많이 바빠서 잘 모르겠단다. 그래도 우리 딸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한동안 모녀의 단란한 대화가 지속되었습니다.
눈이 살짝 풀린 듯한 저 표정을 마리야는 너무나도 잘 안다. 우유 사탕을 씹으면서 거울을 볼 때 자신이 딱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주 해올게. 그러면서 마카롱은 빼고 덜 단 것을 우물거린다. 아 그리고 단 거 하니까 그쪽 질문에도 대답할 겸 생각나는 게 있는데.
"너한테 왠지 잘해주고 싶어서."
널 보면 아빠나 미호 소장님을 볼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 두 사람 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족이니까 귀납적으로 생각하면 너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아. 사실 일차적인 목적은 감시가 맞지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잘해주면 좋다고들 하잖아? 그래서 오는 김에 둘 다 하면 어떨까 싶었어. 무표정으로 줄줄 읊는 말은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대로 고민을 한 결과물이었다.
"왜인지는 물어봤자 나도 몰라. 난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라. 사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좀 어렵거든."
없는거랑 모른건 많이 다른건데. 루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른다는건 있지만 모른다는거고, 없는건 그냥 아예 없는거야. 모르는지 어쩌는지도 몰라. 루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릴때는 그저 감정이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감정표현을 하고, 기뻐서 웃고 슬퍼서 울고 화가나서 화를 내고 침착하려고 냉정해지는 이들이 부러웠다. 루르는 그래서 그들을 흉내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숨을 뱉고 거울 앞에 서서 타인의 모습으로 절정을 맞았다. 넘쳐흐르는 자신을 흘려보내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었다. 그들이 부러웠으니까.
" 나한테 잘해줘도 얻을 수 있는거 없어. "
루르는 단칼에 말하고는 눈치를 보다가 뭐 어때. 하고 마카롱 하나를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네. 나중에 ■■■한테 해달라고 해야겠어. 직접 만들어서 가져온다면 더 맛있을거야.
세월이 흐르면 마리아도 정들었던 보호소를 떠나고, 언젠가는 엄마의 품도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키아라는 어찌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의 전부인 마리아가 제 품을 떠난다면... 이 거친 세상에 마리아를 내보내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마리아는 분명 잘 헤쳐나가겠죠.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까요.
예를 들어서 아빠나 미호 소장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단순한 건 쉽게 알지만 지금 내가 가지는 호감의 이유를 고민하면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어려워. 사실 그 이유를 규명하려고 잘해주는 것도 있어. 얘기하고 잘해주다 보면 왜 그런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카롱들을 꺼내서 루르 쪽으로 밀어주며 고개를 갸울인다.
"물론 물리적인 건 얻을 수 없겠지만 정신적인 이득은 내가 정하는 거야."
담담하게 대꾸하곤 마카롱만큼 단 과자들을 추려서 추천한다. 네가 지금 먹고 있는 건 마카롱이고 이건 다쿠와즈, 에클레어, 츄러스, 브라우니. 다 비슷하게 달지만 식감이나 맛은 다 다를거야. 이미 이름 알고 있다면 미안. 좋아하는 맛이나 싫어하는 맛 있으면 다음에 만들어올 때 참고할 테니까 말해.
어려운 말을 하는구나. 루르는 그렇게 말하곤 한 쪽에 걸쳐있는 날개를 만지작 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지금 딱좋아. 제일편해. 원래는 날개가 한 쌍이 있어야 했기에 침대도 넓은 편이지만 루르는 옛날에 한쪽 날개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안그래도 넓은 침대는 더욱 더 넓어졌다. 날개 하나가 없으면 좋은 아주 사소한 것들중에 하나랄까. 다시는 하늘을 날지 못하겠지만.
" 만들어온거야? "
너 보기보다 대단하구나. 루르는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도 요리잘해. 이것저것 만들 줄 알아서 언니들의 술안주나, 간식거리나.. 아니면 밥 같은 것도 전부 만들어. 병원밥은 별로야. 너무 싱겁고..
미약하지만 나름대로 부루퉁한 티를 내며 대꾸한다. 나름 성의를 담아서 호감의 표시로 가져왔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생각한다. 블랑슈나 젤러시 말고도 자매가 더 있었구나. "...그 동생이 너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런 요리를 다 만들어준다는 건 좋아하는 사람들이 먹어줄 때 드는 기분이 투자한 시간에 비해 이익이 된다는 거겠지. 그런 걸 먹다 병원 밥을 먹으면 당연히 심심할 거야. 담담하게 공감해 준다.
"원래대로라면 잡으러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너는 범죄자이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교정과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CPA나 코르포 데이가 너희 자매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으니 너를 잡아 보았자 자원 낭비인 것도 사실이야. 내가 잡고 싶어도 못 잡을 거란 소리야. 그리고,
"...사실 감정적으로는, 잡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마지막 말은 조금 망설이다 덧붙인다. 단 것을 베어물었을 때와 비슷하게, 조금 멍한 눈빛과 풀린 눈가를 잠시 보이면서.
날 잡아가야 하는게, 우리 가족을 잡아야하는게 너희들의 일이라면 그대로 하도록 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이해나 입장이 다른것은 이해하니까. 대신에 나도, 우리 가족도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할거야. 우리가 해야만하고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할거야.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있어.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절대 잡히지 않을거니까. 이래봬도 하나하나 계획하고 움직이는 스타일이거든.
루르는 그렇게 말하곤 흐암 - 하고 하품을 하고는 아래로 조금 녹아내렸다. 선반위에 있는 총알 하나를 집어 손장난을 치고 있는 루르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이랄까, 단순히 상대의 생각이 알고싶었다. 어째서 나한테 동질감을 느끼는걸까. 아니, 나에게 동질감을 느낄거면 거기 있지 말고 차라리 우리한테 합류하란말이야. 한 명이라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거라고 언젠가 블랑슈가 말한 기억이 난다. 시카는 더 이상 가족을 늘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너희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라고 종종 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너희를 정면으로 상대했다간 이쪽의 손실이 매우 커질 거고 나는 그런 싸움은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주의라서. 그런데 또 너희가 승리하면 그 이후도 그거대로 사회적인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 거고. 너희 사상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들을 자유롭게 활동하게 두는 건 사회적 상식에 맞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저울로 비유하자면 내 가치는 지금 평형 상태인 것 같아. 거기다 너에 대한 호감까지 섞여서 지금은 결론을 내리기 매우 모호한 상태야. 무표정에 고저 없는 억양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갸울인다.
"...난 그냥 너희랑 아예 척지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나는 인간도 섞여 있는 내 가족이 우선이고 그걸 위해서는 알파 지구의 정세에 어느 정도 협조할, 즉 앞으로도 너희와 대립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너한테 호감이 있는 만큼 아예 친해질 수 없다면 좀 속상할 것 같아.
지루하구만. 지루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자신을 감시하겠답시고 바뀌는 사람들을 보고있으며 지낸게 얼마나 됐는지 이젠 기억조차 안난다. 슬슬 몸을 움직이기도 괜찮아졌으니 스스로 나가볼까 - 했지만 그랬다간 귀찮은게 한 둘이 아니다. 귀찮은건 싫으니 그러지 말아야겠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귀찮은게 싫을 뿐. 그리고 다른 이유는, 분명 데리러 올걸 알고 있으니까. 루르는 병상에 누워서 한 손으로 총탄을 만지작 거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짐작조차 안갈만큼 멍한 표정을 짓고 허공을 응시하던 루르는 제 옆을 감시하던 사람이 나가자 또 다른 사람이 오겠구나. 하고 생각하곤 일전에 다른 데미휴먼이 주고 간 마카롱을 까서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고 있으면 퍼지는 달콤한 맛이 너무나도 좋았다. 오래먹고 있으면 혀가 아릴정도지만, 그런 점이 좋았다.
" 어라.. "
이번엔 좀 늦네? 혹시 까먹은걸까. 아니면 뭔가 일이 생긴걸까. 확 그냥 지금 나가버릴까? 총이 없어도 이런 곳을 탈출하는 것 쯤은 쉽다. 혹시 나가는 길에 우연히 권총 한자루라도 줍는다면 쉬운 정도가 아니라 내 전문분야가 되는거고. 해볼까, 말까. 귀찮기야 하겠지만 성공한다면 더 이상의 지루함은 없고 앞으로는 좋은 미래만이 기다릴것이다. 그리고 나가면서 이 지루함을 타파해줄 스릴은 덤이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해보자.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언젠가 블랑슈가 그런말을 했다. 너는 조금 더 과감해지고, 과격해질 필요가 있다고. 그거야, 폭력의 재능과 함께 태어난 사람이나 하는 말이지 나는 아니라고. 루르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침대에서 나오긴 했다. 다행힌것은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는다는것. 이대로 밖으로 나가버릴까. 이대로 밖으로 나간다음 언니에게, 혹은 시카에게 연락할까. 이대로 들키지 않고 나간다면 정말 좋겠다고 루르는 생각했다. 슬며시 이리저리 둘러보던 루르는 제 왼쪽 눈꺼풀 위에 있는 십자가를 손으로 한 번 슥- 만지고는 몸을 숙여 그대로 문으로 향하다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누워있어라는 말과, 째려보는 눈빛에 딸꾹, 하고 딸꾹질을 하고는 살살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째려보는 눈을 마주보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밀치고 밖으로 도망칠까 아니면 얌전히 자리에 누워있을까. 루르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이쪽을 신경쓰지 않는 의사. 그리고 누워있는 환자. 그리고 간호사. 루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겠어.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마. 하고 말하고는 쭈글쭈글 자리로 돌아가 눕고는 이불을 덮었다.
" 저기, 잠깐 정도는 나가도 괜찮지 않아? "
하루종일 소독약냄새 맡고있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기 있으면 생명이 빨려나가는 느낌이야. 어때? 나랑 나가서 산책이나 하고올래? 루르는 세상 좋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마카롱 하나를 더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멸균구역이라지만 오래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단 말이야. 특히나 나는 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래. 주기적으로 환기를 해주거나, 바깥바람을 쐬주지 않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관자놀을 꾹 눌러보였다. 정말 나가게 되어서 틈이 난다면 탈출을 감행할지도 모르지만, 이 남자는 지난번의 경험에 미루어보면 피지컬이 뛰어나다. 그 말인 즉슨, 어설프게 탈출했다간 다시 잡혀와서 좋은 꼴은 못볼거란 말이지. 의자를 끌어 침대 가까이 두고 앉자 루르는 저도 모르게 자석에서 밀려나듯 뒤로 슬슬슬 밀려났다. 그건 나중에, 얘기좀 하고. 라는 말에 한숨을 폭 내뱉은 루르는 결국은 같은 루틴이네. 하고 말하며 다시 마카롱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 이름? "
마카롱을 오물거리던 루르는 안개에 싸인 눈송이와 'Snowdrop'이라는 제 이름의 타투가 그려진 손등을 들어 보여주곤 '루르 스노드롭'하고 말했다. 콜트. 콜트라. 옛날에 유명한 총기사가 있었어, 콜트라고.. TMI를 쏟아낼뻔한 루르는 간신히 꾹 참고는 콜트라고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아니, 그나저나 저 헬멧은 대체 뭘까. 고개를 갸웃하고는 혹시 나도 물어봐도돼? 하고 말하곤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서까지 찐따로 보일 순 없다. 젤러시였나, 블랑슈였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들 앞에서 찐찐거리는건 이해하지만 남들앞에서도 찐찐거렸다간 무사하지 못할거라고.
아니면 루르 브라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던 루르는 헬멧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두 가지중 한 가지만 알려주겠다는 말에 되게 불친절하구만. 하고 말하고는 마지막 남은 마카롱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첫 번째, 헬멧 그 자체. 헬멧 자체야 뭐 그냥 헬멧이겠지. 전투용이라던가 아니면 신원을 가리기 위해서라던가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궁금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궁금한건 두 번째. 헬멧을 쓰고다니는 자신의 이야기. 뭐, 남이야 어떻게 살던 상관없는 루르였지만 오랜만에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 그럼 두 번째로할래. 쓰고 다니는 이야기. "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면 실망이 클거야~ 하고 말한 루르는 경청하겠다는 자세인지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내가 자살하고 그렇게 한 범죄자를 찾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꽤나 불행한 스토리에 루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렇군, 그런데, 그래서? 로 이어지는 의미없는 질문 3박자를 뱉을것만 같은 시큰둥한 표정의 루르는 '그랬구나' 하고 한 마디를 뱉을 뿐이었다. 누가 더 불행한지 겨뤄보자 - 라고 말한다면 자신도, 자신의 자매들도 만만치 않은 스토리를 안고 살아가고있었다. 20대가 되기도전에 사형대로 올라간 젤러시나, 빵 한조각에 눈을 잃을뻔하고 객사할뻔한 블랑슈, 이용은 당할대로 당하고 데미휴먼이라고 살처분당할뻔한 나. 그 외에도 두 명이나 더 있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기로했다.
"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
아내가 죽은거랑 헬멧이랑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전혀 감이 안잡히는데. 물론 루르는 제 나름대로 머리를 써보긴했다. 속죄의 의미로 쓴다던가, 이 엿같은 세상에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쓴다던가. 하지만 정확히 딱 떠오르는 답은 없었을뿐이다.
짝짝짝. 루르는 무미건조하게 박수를 쳤다. 이번에도 그렇군, 그런가, 그래서?로 이어질수 있는 멍한 표정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다는 점에는 칭찬을 줄 수 있었다. 그 왜, 우리도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언젠가는 데미휴먼이 일어설 수 있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누구보다 위에 서있는, 그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신념은 무서운 법이다. 강한 신념과 올곧은 정신만 있다면 해내지 못할것이 없다.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무식한 이들이 신념을 가지면 무서운 법이라고 하는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틀려먹은 신념을 가지고 믿고 행동한다면 그 파급은 엄청날테니.
" 그렇게 될지 안됄지 모르겠지만 응원을 해줄게. "
반쪽짜리 응원이지만. 사격을 배웠다는 말에 루르는 호오- 하고 또 조금 흥미가 동하는 듯 했다. 사격도 이쪽이라면 엄청나게 배웠거든, 죽지 않으려고. 남들은 연필잡고 공부할때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웠지. 권총부터, 맨패즈까지 내가 다루지 못하는 총은 이 세상에 없어.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내비췄다. 분명 기억속에서 지우고싶고 인생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였지만 그래도 배워온 것고 남겨온 것은 있었다.
루르는 콜트가 다가오자 우왓,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한발짝 더 물러섰다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 이상 다가와주지 않았으면 하는데.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쭈그러들어 말이 나오지는 못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적이지만 나를 위해주었다 - 라는 것이다. 루르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감정에서 생각이 나와서 이런 행동을 했을 터인데 한 번 감정이 쓸려나가고 남아 있는 것들이라고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들만 남아버렸으며 감정표현이라는 것은 남을 흉내내기밖에 해보지 못했고 이제와서 시카와 자매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린 감정을 배워가고 있는 루르에게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일이었다. 너와 같이 이야기하고싶을 뿐이다 - 라는 말에 루르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 어.. 그게.. 왜? "
이해할 수 없어. 아니, 이해가 안돼. 이해하고싶지도 않아. 루르는 그렇게 말하며 불안한듯 손으로 총알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어느순간 팅, 하고 손에서 놓쳐버려 바닥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뒹구는 소리에 앗. 하고 정신을 차린 루르는 도망가지 않고 왜 여기 있는거냐는 말에 어.. 어..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은 도망칠 때가 아니다. 물론 잠깐 너무 답답해서 도망칠 생각도 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 더 정보를 모은 다음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만에하나라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시카가 했던 말은 반드시 데리러 갈테니 갈 때 까지 기다리고 있어라. 였다. 스스로 나올수도 있지만 기다리라는 말은 그간에 뭔가 준비할 게 있다는 이야기였고 덤으로 요즘들어 계속해서 마주치고 일을 방해하는 녀석들의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모으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CPA로 끌려가서 블랑슈가 당했던 험한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바였고 그래서 급하게 젤러시가 구하러 간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CPA로 끌려간다면 이송 도중에 구해올 계획까지 세워놓았으니까.
" 내가 탈출하려고 하면.. 그래, 네 말대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겠지. 응. "
그런데, 그걸 내가 왜 신경써야해? 일순 멍해보이던 루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감정이 쓸려나가고 그 빈자리를 채운것. 삶에 대한 열정과 동시에 내가 빼앗긴 것과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 내가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소중한 것 마저 모조리 빼앗아간 이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그 남은 자리를 채웠고, 결국 종국에 남은것은 시카와 그 자매들 뿐이었다. 그 외에 것들이 죽어나가던 어쩌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 있지. 사람들은 참 웃겨. 그 사람들이 나한테, 우리 가족한테 한 일은 신경쓰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해. 그래서 - 나도 당한대로 돌려주겠다는데 뭐가 나쁘다는건지 모르겠네. 있지, 그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젤러시가, 블랑슈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죽어나갈때 신경이나 써줬어? 정답은 아니야. 그런데 왜 나는 그걸 신경써야해? "
"난 너가 나쁘다고 말하진 않았다." "아무도 몰랐지... 가족이 죽어갈때. 아무도 신경 안 썼어."
내 아내가 죽었어도 유산 했어도 세상은 아무도 신경 안 썼다.
"그럼 누가 신경 썼으면 어땠을까. 누가 그 옆에서 도와줬으면... 누가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해줬으면."
"누가 밤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빛중 하나가 꺼진다고 신경이나 쓸까?" 누군가가 신경 썼으면... 꺼지지 않을거야.
"너는 예전 임무에서 만난 우리들의 머리를 쏘지 않았어. 그저 제압할 뿐이었지."
"거기에 있는 데미휴먼은 물론 인간도 죽지 않았어. 게다가..." "너가 쏜 인간중 하나는 어머니 였다. 그것도 데미휴먼의 어머니."
"너가 죽이지 않는 다는 선택은, 어머니를 잃은 데미휴먼을 만들지 않았다는거다. 너가. 너가 '선택'을 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는 병실 문쪽으로 걸어갔다.
"너에게는 더 쉬운길이 있어. 너는 이제 힘도 있고 너는 선택도 할수 있다." "선택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은 너같이 힘있는 사람만 구할수 있지."
"이번에 너가 내릴수 있는 선택은 그거야. 감시가 없는 여기서 그저 나간다. 아니면 그냥 여기서 올때까지 기다린다야."
"전자는 위험은 전혀 없다. 내가 있지만 나는 그저 넘어갈거다. 그냥 나가서 너의 가족에게 연락해 만나면 넌 돌아간다. 이 주변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후자는 위험이 있다. 네 가족들은 여기 오고 여기 사람들은 다치고 위험해 지며 가족들은 위험한 작전을 펼치고 이니시에이터들은 또 여기로 와서 싸우겠지."
너는 어디에 있냐. 결론은 그것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선 알지못할 소리를 늘어놓는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자신을 계몽하려든다던지, 새로운 걸 가르치려 한다던지 하고 있는 모습에 루르는 적잖이 당황했고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래. 내가 나쁜게 아니고, 그들이 나쁜거야. 그래. 그들이 신경썼다면 하늘위에 별이 꺼질 일은 없었을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야.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았고 하늘위에 별이 꺼졌어. 중요한 건 그거지. 결국 남는 건 내 곁에 누가 있느냐고, 누가 나를 챙겨주느냐야. 부모라는 사람들은 태어난지 5분만에 날 넘겼고-애초에 만들어진 생명이었지만-팀이라고, 전우라고 같이 작전을 수행해온 사람들은 필요가치가 없어지자 누구보다 먼저 자진해서 날 죽이려들었어. 근데 시카는, 내가 데미휴먼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받아줬어.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게 해주었고 나한테 내가 잃어버린 감정이란걸 가르쳐줬어. 선택? 그건 선택지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거야.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선택할 것도 없지. 내가 할 선택지라곤 그저 시카를 믿고 따를 뿐이야. 시카를 믿고, 자매들을 사랑하고 살아갈 뿐이야. 그게 내 선택지야.
루르는 장황하게 말을 하고는 목이 말라졌는지 물을 집어들어 세모금을 한 번에 마시고는 이불을 정리했다. 신념은 확고했다. 잠깐 너무 지루해서 조금의 익사이팅이 필요했지만 금새 사그라들었기에 그냥 다시 누워있기로 정한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탄알을 주워 다시 손에서 굴리며 말은 고맙네. 하고 한 마디를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택은 선택지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거야. 루르는 왜인지 그 말이 다가왔다.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감동받다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멋지네.
쿠보타가 1분 늦은 거 빼고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나름 성실하게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해준 상대를 힐난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지 않아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많이 캐물었으니까 쿠보타도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도 돼요."
개인적인 질문을 많이 했으니 이쪽도 질문을 받는 게 공평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상대의 성격상 궁금한 게 있으면 거침없이 물어봤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물어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없으면 이만 가볼 거고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충동적으로 온 만큼 여기서 더 할 것이 남아있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이 둘씩이나 버티고 앉아있는 것은 루르의 입장에서도 귀찮을 테니.
"...좋군."
흠. 여기서 태클이 없다, 라. 녀석도 많이 컸군. 아니면, 1분이라도 더 빨리 오려고 노력한, 나의 성장인가. 어느쪽이든 긍정적인 결과다. 여기서 또 괜한 농담을 하면 으르릉거리고 덤벼드는 것이 녀석일테니까. 거기에 피곤하다.
질문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드는 인물이 하나 있다. 쿠보타는 고개를 조금 올려 들려진 모자 챙 사이로 마냐를 바라봤다.
미호와 서류절차를 마친 유페미아는, 놀이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코를 찾아 데리고 나가...기 전에, 아이를 데리고 잠시 멈춰선다.
"작별을 고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지금 고하게나. 아, 물론, 영영 이별은 아니네! 우리 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보호소에 자주 놀러 오면 되니까!"
"그래도..., 같이 살았을 때보다는 아무래도 뜸할 테니, 정들었던 벗이나 선생님이 있다면 인사해 두는 게 좋겠지. 미호 소장에게 인사를 해도 좋고 말이야!"
말하자면, 아이에게 작별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눈치가 없는 유페미아가 아이의 이런 섬세한 감정적 필요를 집어내는 건 본래라면 희귀한 일이겠지만, 급격한 주변환경의 변화가 아이에게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일 것이라는 건 유페미아도 경험상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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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를 고하고, 유페미아는 리코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나와, 애마인 지프트럭의 조수석에 리코를 태우고(안전벨트를 매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도 운전석에 오른다. 지프트럭은 보호소에서 좀 떨어진, 도시 외곽의 한 빌라 앞에서 멈춰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드라이브 내내, 백미러에 걸려있는, 소형 크토니안이 박제되어 들어있는 장식품이 잘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유페미아는 빌라의 계단을 두 칸씩 겅중겅중 뛰어 올라가, 3층에서 복도 맨 끝에 있는 문의 열쇠를 돌리고,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쳐 넣고는-유페미아의 문은 혹시나 연구결과를 또다시 빼앗길까 하는 노파심에 이중잠금식이었다-,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열어 젖힌다.
"어서 오시게나, 리코 군! 이곳이 리코 군이 앞으로 생활할 곳이라네!"
문 너머로는, 각각 욕실과 서재로 향하는 문과, 주방과 일체식으로 되어 있는 거실이 보인다.
"...혼자 사는 집이라서 좀 좁네. 리코 군이 양해해 주시게."
유페미아는 멎쩍개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이 덧붙인다. 사실, 홀로 사는 집이라서 좁은 게 맞다. 비록 불미스러운 연유로 해고됐지만, 해고 된 지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은퇴자금을 그동안 꾸준히 마련해뒀던 유페미아는, 금전적으로는 그다지 부족한 점이 없다. 다만, 이니시에이터가 되고 링크를 맺기 전까지는 사람 혼자 살 정도의 생활공간이면 족했기에, 이런 1.5룸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리코같은 갓-캐를 모실 곳이 이런 누추한 공간이라서 죄송해지네요;;; 리코야 미안해ㅠㅜㅠㅠ
유페미아의 말을 들은 리코는 미호를 비롯한 보호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항상 따뜻하게 안아주던 미호, 가까이 지내던 데미휴먼 아이들, 보호소 직원, 발톱을 자주 갈았던 나무기둥(?)등 리코의 기준에서 친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리코는 유페미아를 따라 보호소를 나섰다.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 가만히 있던 리코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호소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산책으로는 갈 수 없었던 곳을 간다는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에 리코는 살짝 귀를 파닥였다.
도시 외곽의 한 빌라 앞에서 차가 멈추고, 리코는 유페미아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두 칸씩 성큼성큼 올라가는 유페미아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간 리코는 집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섰다. 꼬리털이 살짝 선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긴 처음 오는 장소인걸. 탐색하듯 1.5룸을 천천히 둘러보며 리코는 말했다.
“괜찮아요. 여기 좋아요…”
전체적인 크기로 봐서는 보호소가 더 넓지만, 아무래도 여럿이서 같이 쓰는 공간이 대부분이다 보니 실제 크기에 비해 좁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두 명이서 이 정도의 공간.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라고 리코는 생각했다. 좁은 곳은 아늑하다고 느끼는 리코이기에(?) 이 집이 딱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거기에 아무리 좁아도 골목길 신문지 한 장보다야 훨씬 좋은 환경이니까. 그렇게 여기저기 둘러보던 리코는 서재로 향하는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이 방은 뭐예요?”
//엩 아아ㅏ아니야 누추하다니 그렇지 않다!!! 그리고 리코는 택배박스 하나만 있어도 행복한 호양이니까 너무 신경쓰지말라구!(????? 그리고 사실 나도 졸려서 킵할라고 그랬는데... 우리 통했구나...(흐릿(? 답레는 천천히 줘도 되니까! 에피주 잘자! :) 나도 이만 자러 가볼게.. 다들 굿낫...
잠들었었다. 오랜만에 정말 푹 잠들었다. 꿈을 꾸지도 않았다. 그저 빗소리를 들으며 기분좋게 잠들어있었을 뿐이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쉬고 있었거든. 정말 기분좋게 잠들었을때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리곤 어느샌가 들려오는 말소리에 헛, 하고 잠에서 깨곤 눈을 느리게 부비적 거리며 허리를 세웠다.
" 뭐야..? "
아, 정말 오랜만에 기분좋게 잠들었었는데. 루르는 늘어지게 하품을 뱉으며 기지개를 켜고는 용건 없으면 그냥 다시 자면 안될까? 하고 말하며 다시 몸을 눕히곤 이불을 끌어올렸다.
" 시카의 딸 - 命に嫌われている。" DAY 21 - 19 : 22 : 41 A "알파" 지구, 태스크포스 본청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적응의 동물이라고. 요 며칠 세간을 떠들석하게 만든 데미휴먼의 인신매매부터 시카의 딸의 테러소식까지 어느 순간 전부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조용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자신이 시카의 딸이라느니, 외벽이 무너지고 있다느니 하는 이상한 음모론이 돌고 있는 것만 빼면요. 그나마도 일부 정신나간 이들의 헛소리로 치부하면 정말 평화로운 일상이었습니다. 여전히 아웃월드를 잇는 창이 열리는 빈도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고 크토니안의 출현 빈도또한 줄어들지 않았지만요.
하늘은 어느샌가 어두워졌습니다. 차가운 어둠이 내리고 땅에는 따뜻한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집 안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어떤 데미휴먼은 지금도 살기 위해 싸우고 있을 것이고 어떤 이니시에이터는 살리기위해 싸우고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시간에 이니시에이터 핫라인이 울렸고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가용가능한 전 이니시에이터는 태스크포스 본청으로 모여줄것. 사안이 급하니 설명은 모두 모인 이후에 하겠다고 하는 메세지가 도착해있었습니다.
태스크포스. 본래는 특수임무전대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근래들어서는 이니시에이터들의 연합으로 의미가 바뀌었고 혼자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조력의 의미로 혹은 온갖 지하범죄가 들끓는 곳에서 서로의 뒤를 봐주는 자경의 의미로 그도 아니라면 그저 뜻이 맞는 이들끼리 만든 모임이라는 뜻의 태스크포스. 그리고 그 태스크포스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태스크포스 본청에서 이니시에이터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겪었던 큰 사건들이 그저 기억 속으로 사그라드는 때였습니다. 요 며칠간은 유난히 조용했고, 뉴스는 여전히 아웃월드를 잇는 창의 빈도가 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그 시카의 딸이란 녀석들도 도저히 지칠 기미는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평화롭지만은 않은 일상을 만끽하고 있던 키아라는 급하게 걸려온 연락을 받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급한 사안. 태스크포스의 호출. CPA도 코르포 데이도 아닌 태스크포스라니, 약간은 의아했지만 키아라는 나갈 채비를 합니다. 도심에 아웃월드를 잇는 창이 열려서 크토니안이라도 나타난 걸까요.
집을 나온 키아라는 길을 따라 태스크포스 본청으로 갑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이니시에이터들을 긴급 호출하게 만들었는지,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습니다.
엄마로부터 태스크포스 핫라인 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야 야코바가 대번에 던진 말이었다. 시카의 딸이 요새 조용하지만 그간의 패턴을 봤을 때 이게 마지막일 리는 만무하고, 루르 스노우드롭 사건을 겪고 난 뒤부터 본부에서 어쩌고 하면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기라도 가능한 모든 이니시에이터를 긁어 모으려는 움직임인 만큼 무슨 속셈인지 알아내기는 해야 한다. 사기가 아니라도 급한 사안이 분명한 만큼 호출에 응해야 하긴 한다. 최악의 경우로 시카의 딸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면 데미휴먼이 상대이므로 데미휴먼이 투입되어야 한다. 어찌 되었건 정면돌파가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검을 챙겼다. 또 다시 싸우러 가볼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고 유페미아의 몸도 회복되어, 이제는 병원에서 퇴원해 그리운(?) 집에서 생활하는 일상이 돌아왔다.
태스크포스 본청에서 이니시에이터를 소환한다. 유페미아는 태스크 포스니 CPA니 지구정부의 관료적인 기관에 대해서는 알파지구의 일반 시민이 가지고 있을 정도의 딱 평범한 수준의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소환장이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지난 번 이런 관료적인 기관의 이벤트에 초청됐을때는 유페미아는 피투성이가 되고 한 사람이 죽은 채로 끝났다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바로 이니시에이터라는 직업의 일환인 것을.
유페미아는 '끙차'하는 기합과 함께 지팡이에 힘을 실어 몸을 일으키고는-퇴원할 정도로 몸은 회복했지만, 유페미아는 당분간은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일시적인 후유증을 입었다. 손잡이 부분에 크토니안의 형태가 세겨져 있는 이 지팡이도 이 때문에 장만한 것이다- 리코에게 이제는 일종의 의례가 되어버린 "같이 가겠나, 리코 군?"이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리코의 대답에 리코에게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자신도 선선해진 날씨에 헌팅캡과 코트를 걸치고는 집을 나선다. 든든한 동지인 마취총도 잊지 않고 챙겼고 말이다.
도착한 본청은 이미 이니시에이터들로 웅성거렸습니다. 링크한 데미휴먼을 대동한 이니시에이터와 그렇지 않은 이니시에이터, 이니시에이터와 링크한 데미휴먼과 링크할 이니시에이터를 찾고있는 데미휴먼까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개중에는 이미 태스크포스로써 활동하고 있는 이들까지 보였습니다. 지나가는 이들 중 눈에 띄는 것은 13명으로 구성된 현재로서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지는 태스크포스 141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108,121이 지나갑니다. 나름 네임드가 있는 태스크포스 몇몇과 신생 태스크포스들 그리고 태스크포스를 구하려고 하거나, 아예 생각이 없는 사람들까지 모여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이었습니다. 단상 위에 태스크포스 본부장이 올라오고 왜인지 코르포데이의 마일리와 레오까지 나와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코르포데이가 아닌 이니시에이터로써 왔는지 이니시에이터들과 섞여있었습니다.
" 자, 잠시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니시에이터 여러분. "
본부장인 중년의 남자는 마이크를 톡톡 쳐서 음량을 확인하고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말했습니다. 뒤에 있는 스크린에 지도를 띄운 본부장은 레이저 포인트를 사용해 한 지점을 가리켰습니다. '훤림 숲'이라고 적혀있는 숲은 외벽과 가까웠고 허수지구-만일 허수지구가 실존한다면-와도 가까운 지역이었습니다. 많이 넓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면적이 있는 숲을 동그라미를 치던 부장은 입을 열었습니다.
으음, 호출 자체는 사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들이 우글거리는 본청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태스크포스 141에 마일리와 레오까지 온 것에 눈을 조금 키우고 고개를 갸울인다. 사기가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 터졌을 터인데, 대체 뭐가 태스크포스 본청을 이렇게 움직였을까?
태스크포스 본청이 사기당한 건 아닐까.
거두절미한 본부장의 설명을 듣고 매우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야 크토니안 반응 확인은 시카의 딸이 저번에도 써먹은 미끼 아닌가.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면 과연 비상 동원이 이루어질 정도로 급한 사안이 맞기는 했다. 어느 쪽이건 상당히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며 이어질 설명을 경청하려 한다.
'대규모 크토니안 반응'이라는 말에 유페미아의 심장이 고동치지만, 그것도 잠시, 유페미아의 기분은 금새 가라앉는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와중에는 순수 크토니안을 마취하고, GPS 칩을 삽입한다는 매우 수상한 행동을 할 수가 없기 떄문이다. 다양한-어쩌면 새로운!- 형질의 순수 크토니안을 만나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태깅과 방생은 불가능하다. 유페미아는 교수시절 연구조교였던 '초이'에게 들은 '그림의 떡'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알 것만 같았다.
"좋다 말았구만....."
이 사건을 자신의 연구에 사용할 수는 없으리라고 마지못해 결론을 내린 후에야, 유페미아의 눈에 크토니안 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태스크 포스. 더 효과적으로 크토니안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은, 위에 나열된 것과 동일한 이유로 유페미아는 별 관심이 없다. 유페미아의 연구를 이해해주는 넓은 아량의-혹은 뒤틀린 도덕관념의-상대를 만나지 않고서야,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것과 같은 무허가 연구를 진행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훤린 숲'. 분명, 소문에 따르면 허수지구는 이 숲에 맞닿어있다고 했었다. 그 당시에는 도시괴담 치부했던 것인데... '스칼렛 다이아몬드'라는 한 아가씨를 만난 뒤로는 그렇게 쉽게 생각하기가 힘들어졌다. 만약 허수지구가 존재한다면 A지구민 뿐만 아니라 허수지구의 주민들도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 곳의 아이들은 여기보다 훨씬 힘든 상황에서 죽음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던 스칼렛의 말이 자꾸만 맴돈다.
태스크포스 본청은 이니시에이터와 데미휴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태스크포스의 본부장이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장내에는 잠시 마이크 두드리는 소리가 울립니다. 대규모 크토니안 반응이 감지됬다는 저곳은 허수지구와 가까운 곳입니다. 키아라는 그 점을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본부장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크토니안 반응도 시카의 딸의 함정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숲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나왔던 루르를 떠올리며 키아라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좋다 말았다는 유페미아의 말을 들으며 리코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이 많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오랜만이다. 저번에도 사람이 꽤 있기는 했지만 이번보다는 적은 규모였고, 아는 얼굴이 더 많았으니 그때랑 지금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아무튼 리코는 저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귀를 기울여도 저 말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은 크토니안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사실뿐이었지만.
“괴물이 많이…”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건가. 괴물이 많으면 그걸 잡을 사람도 많아야 하니까. 리코는 나름대로 납득하며 마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대량의 크토니안 반응이 있었고, 이니시에이터들 어느정도로는 제압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소집할 수 있는 이니시에이터를 가능한한 불러모아서 해당 지역을 정리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간다고 막지는 않겠지만 가능한 사람들은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걸 막지 못하면 알파지구가 쓸려나가는것도 그리 가능성없는 이야기는 아닐거라고 조금 무게감을 주어 말했습니다. 레벨5개체의 반응은 확인이 돼지 않았지만 아마도 최대 레벨4개체까지는 있을것이라도 말했습니다.
" 여러분들끼리 임의의 태스크포스를 조직해서, 해당 지역을 태스크포스별로 나눠서 구획정리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
이야기를 계속 들어본 결과 결론은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함정이어도 함정이 아니어도 어차피 싸우기는 해야 하는 것이다. 태스크포스를 조직하는 거라면 혈혈단신으로 왔으니 알아서 팀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지만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키티의 딸이라고 말하면 어지간한 태스크포스는 받아 주겠지.
강당을 둘러보다 사람들 틈에서 리코를 찾아낸다. 최근에 링크를 해서 나갔으니 옆에 있는 여성은 리코의 이니시에이터인가 보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둘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차피 어린애와 장년의 여성은 지켜야 할 우선순위에 올라 있기도 하고, 가족인 리코와 한 팀이 되는 게 낫다는 계산의 결과이다. 상냥한 웃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정중한 무표정을 하고 두 사람에게 목례를 한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팀을 나눠서 팀별로 구역을 맡아서 정리하게 한다는 걸까? 대충 이해한 리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괴물의 수도 많고, 위험도도 높다는 뜻이겠지. 알파지구가 쓸려나가는 것도 그리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 그렇게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했다. 살짝 털이 곤두선 느낌이 든다.
“같은 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실상 리코는 스스로 나서서 팀을 짤 생각은 없었다. 그건 에피가 결정할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리코는 얌전히 유페미아의 지시를 기다렸다.
본부장은 여기저기서 태스크포스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어느정도 정리가 끝났을 때 쯤 중재를 위해 다시 마이크를 톡톡쳐서 주목을 얻어낸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동시에 단상 앞에 있던 태스크포스 본청소속 직원들이 앞으로 나와 만들어진 태스크포스들의 인적사항등을 받아가고는 태스크포스별로 넘버링을 부여했습니다. 해당 넘버링은 임시로 배정된것으로서 현 시점에만 사용이후 폐기될 예정이라고도 덧붙여 주었지요. 마리야&리코, 유페미아 팀의 넘버링은 212였습니다. 태스크포스 212. 그게 해당 태스크포스를 지칭하는 넘버링으로 배정된것입니다.
" 현재 훤림의 숲 경계선에 태스크포스를 파견해 정찰과 경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근처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었으니, 우선 그 곳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
바로 이동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합니다. 적어도 이런저런 정리들을 해두고 3일안으로만 해당 베이스캠프로 모여달라고 말하고는 단상에서 내려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다가온것은 마일리와 레오였습니다.
" 또 뵙네요. 아, 오늘은 코르포데이가 아니고 이니시에이터로 왔어요. 넘버링은 213으로 받았네요. "
바로 다음의 넘버링입니다. 4쌍으로 구성된 마일리의 태스크포스는 이렇게 만난것도 다시금 인연인데 잘 해보자며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했습니다.
" 사안이 많이 심각한가봐요. 아, 그래도 저 아는건 좀 있는데 궁금한거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
마냐다! 리코는 반갑게 손을 들어 마냐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태스크포스를 맺자는 마냐의 말에 조심스럽게 에피를 올려다 보았다. 모르는 사람보다 마냐가 더 나을 것 같기에, 유페미아가 마냐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유페미아는 그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유페미아가 거절할까 속으로 안절부절하던 리코는 그제야 안심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태스크포스를 맺은 후 받은 번호는 212, 이제 훤림의 숲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면 되는 모양이다. 바로 갈 필요는 없고 3일 안으로 가면 된다고 하니 유페미아가 준비를 마치고 가자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한 손을 들어 털을 골랐다.
"악수... 괜찮아요...?"
마일리와 레오, 그리고 마일리와 같은 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자 리코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이런 손인데 괜찮은 걸까? 다치게 하진 않겠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알려주겠다는 마일리의 말에 리코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까진 질문이 필요할 정도로 궁금한 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어차피 리코가 할 일은 지시에 따르는 것이니 굳이 질문이 필요하진 않겠지, 그렇게 판단한 리코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다른 사람들이 질문하기를 기다렸다.
마일리는 반가워요. 하고 말하며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고는 훤림의 질문과 크토니안의 질문에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 허수지구같은건 없어요. 일단 그 점부터 짚고 넘어가죠. 대체 왜 허수지구같은 소문이 퍼지는건진 모르겠지만.. "
옆에 서있던 레오는 아무말도 않고 고개를 끄덕일뿐입니다. 눈빛으로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요. 마일리와 같은 태스크포스에 속한 이들도 역시 허수지구같은건 없지-하는 반응입니다. 레벨4개체도 2기정도기만 확인이 되었다고 마일리는 덧붙입니다. 순수 크토니안이 1기, 어떤 것에서 파생한것인지 파악이 안돼는 것이 1기.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 아, 그리고 이건 그냥 덧붙이는 이야기인데 해당 지역에 그 뭐야.. 크토니안을 숭배하는 단체가 있다고해요. 테러집단이나 다름없어서 무장까지하고 데미휴먼을 잡아서 크토니안에게 바친다고하네요. 사실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 - 아, 그건 내가 알고있어. 그거 사실이야. 뭐 정말 테러단체인지 어떤진 모르지만 확실히 무장을 한 단체가 데미휴먼을 어디선가 계속해서 모으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하더라고. 내 아는 놈이 훤림숲 근처에서 작업해서 알아.-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요. 마일리는 최악이라는 표정이고 레오는 마찬가지로 무표정으로 일관합니다.
리코의 이니시에이터가 감사하는 것에 고저 없이 대답한다. 겸양이 아니고 진짜 가로막고 서기만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리코와는 같은 보호소라서 이미 아는 사이에요. 나름대로 부드럽게 덧붙이곤 리코와 인사를 나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마일리의 팀이 바로 옆 번호를 배정받았다며 인사해 오는 것을 보고 전력이 더 늘었다는 생각을 한다. 리코의 이니시에이터가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진짜 바로 옆 구역을 맡게 되면 유사시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리코 쪽의 전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세 명으로는 조금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마일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태스크포스 본청의 일인데다가 얼마전 훤림 숲 근처를 순찰하다가 레오와 함께 크토니안 무리가 이동중에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마일리는 말했습니다. 게다가 저기 서 있는 것은 본부장이 확실하니 신뢰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입니다.
마냐와 잠시 인사를 나눈 리코는 오가는 문답을 듣고 제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괴물.. 크토니안 활동이 포착된 건 100% 확실하고, 레벨4 개체(아마 강한 괴물인 것 같다)도 있고, 크토니안을 숭배하는 단체도 있다고 한다. 데미휴먼을 잡아서 크토니안에게 바친다는 말에 리코는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무서운 괴물이랑 무서운 사람이랑 둘이 같이 있는 거네.
허수지구는 없다는 대답이 코러스로 들려오자, 유페미아는 왠지 바보 취급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포기하고는 입을 도로 닫는다.
"오오... 4레벨의 순수 크토니안이란 말인가..!"
어째서인지는 학계에서도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주제이지만, 어쩄든 고레벨의 크토니안들은 순수 크토니안보다는 감염돼 크토니안화된 개체들이 많았기에-유페미아는 의외의 (희?)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두 눈을 초록빛으로 형형히 빛내는 꼴은 마치 사냥감을 바라보는 고양이를 연상시킬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면 4레벨의 크토니안과 유페미아 중에서 사냥감이 될 것은 당연히 유페미아임에도 불구하고.
크토니안을 숭배하는 단체가 있고, 그들이 데미휴먼을 산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에 유페미아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런 일은 단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솔직히 그동안 인생을 편하게 살아온 예전의 유페미아라면은 도시괴담으로 치부할 이야기지만, 데미휴먼 인신매매장도, 시카의 딸도 현실로 드러난 시점에서는 그런 사이비 종교단체가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 단체, 위험하게 들리는데. 리코 군, 같이 가도 괜찮겠나? 아가씨-나도 참, 아직 이름을 안 물어봤군 그래-도 괜찮고?"
역시 정부기관의 입장에서는 허수 지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편이 더 편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일리의 대답을 듣다 사이비 종교단체에 대한 말을 듣고 눈을 가늘인다. 데미휴먼을 잡아다 바치는 건 그렇다손 쳐도 숭배할 게 없아 크토니안을 숭배하다니,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리코는 괴담 같다고 생각하지만 마리야 그레고로브나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괴물과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는 괴물2가 같이 있는 느낌이었다.
"마리야 야코바라고 해요."
그런 인간들이 눈에 들어오면 잡아서 족쳐야겠네, 라고 지나가듯 생각하며 리코의 이니시에이터에게 대답한다.
3일이라는 시간이 있다고 하니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고 끝까지 남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태스크포스 212도 밖으로 나가자 의외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신발 앞코로 바닥을 톡톡 찍으면서 서 있다가 212의 얼굴을 보고는 아! 하고 얼굴 가득 사근사근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는 언제 봤다는지 악수를 청했습니다. 얼굴에는 사람좋다는 미소를 가득 띄고 있는 하늘색머리의 고양이 데미휴먼은 안녕하세요! 하고 활기차게 말했습니다.
" 스칼렛 다이아몬드라고합니다. 유페미아씨는 구면이네요? 아무튼 다들 반가워요! "
눈을 말똥말똥뜨고 왜요? 뭐 묻었어요? 하고 제 얼굴을 만지작 거리다가는 뭐야 아무것도 없네 하고 말하고는 아! 하고 뭔가 깨달은듯 손바닥을 짝 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 아, 그.. 놀라실수도 있지만 놀라지말고 들어주세요. 저는 시카의 딸이에요. 하지만 여러분과 싸울생각은 없어요. 정말로요. 그저 도움이 필요해서 왔을 뿐이에요. "
바깥으로 나가자 생전 처음 보는 데미휴먼이 생글생글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유페미아-아무래도 리코의 이니시에이터를 칭하는 것 같았다-와 구면이라니 그쪽에 일이 있나 하고 악수를 망설인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 시카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을 키운다.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리코와 유페미아의 앞을 막는다. 그러다 불현듯 저쪽에서 해칠 의도가 있었다면 이것보다는 더 촘촘한 판을 짰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눈을 가늘이고 스칼렛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상대방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동안 시카의 딸 하면 싸울 일이 많았어서 경계하는 건 이해해 줬으면 해."
하지만 진짜로 해칠 의도가 없다면 나는 들어볼 의향이 있어. 이론적으로는 잡으려고 시도하는 게 맞지만 어차피 그쪽에서 수틀리면 세 사람으로는 어쩔 방도가 없고. 그렇게 말하며 유페미아와 리코를 돌아본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이.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남을 사람은 남은 자리를 뒤로 한 채 리코는 유페미아를 따라 걸었다. 밖으로 나서자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처음 보는 데미휴먼이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고양이? 고양이일까? 리코는 자신을 스칼렛 다이아몬드라 소개한 데미휴먼의 활기찬 인사에 한 손을 들어 인사로 답했다.
“안녕, 리코는 리코야.”
시카의 딸, 루르랑 같은 쪽? 루르뿐만이 아니라 토끼랑 늑대랑도 같은 쪽인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리코는 스칼렛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동안 당했던 것이 있으니 경계를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쪽을 돌아보는 마냐를 보고 리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경계는 하지만 이런 곳에 혼자 온 걸 보니 아예 못 믿을 건 또 아닌 것 같고...
'마리야 야코바'라는 마리야의 대답에 유페미아는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 지도교수님이셨던 에프라임 교수님의 탐사에 동행해주었던 이니시에이터, 키티의 딸의 이름이...
"마리야 군, 혹시 모친의 이름이-"
하지만 좀 더 자세히 확인하려던 찰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유페미아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긴 방금 전의 대화는, 좀 더 시간도 많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거 스칼렛 군 아닌가! 반갑네! 그 때는 잘 들어갔는가?"
반갑게 인사하지만,
"시카의 딸이라고? 자네가? 하지만 지난 번에는-"
시카의 딸이라는 말에는 얼어붙고 만다.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후에야 유페미아는 입을 연다.
"마리야 군, 내 생각에도 스칼렛 군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여기 있는 스칼렛 군은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분명히 단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공격하지 않았던 걸 보면 다른 시카의 딸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네. 그 때 나는 눈치도 못 채고 있었고, 스칼렛 군은 데미휴먼이니 육탄전으로 날 제압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이겼으리라고 생각되거든!"
아니면 그것까지도 계획된 함정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의심을 표하는 것은 일단은 보류하기로 한다.
손사래를 치는 스칼렛은 전혀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자신이 시카의 딸과 연관되어 있으니, 아니 애초에 시카에 딸에 소속되어 있으니 경계하는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부디 경계를 풀어달라고 말하는 스칼렛은 두 손을 합장하듯 붙이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보라색의 가죽자켓은 입고 있는 고양이 데미휴먼은 손톱을 길게 늘여 공격할떄처럼 바꾸고는 제 무기를 전부 보여주었습니다. 이게 제가 가진 모든 무기에요. 절대 이렇게 바꾸지 않을게요. 하고 말한 스칼렛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인 스칼렛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찢어서 넘겨주었다. 이쪽으로 연락을 주면 연락처를 받고 조만간 자신이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겠다 전한 스칼렛은 손목시계를 보고 아 벌써 시간이..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해야할 이야기를 짧게 하고 끝내자. 스칼렛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곤 여전히 사근사근한 태도와 미소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나선 이야기를 이어갔다.
" 훤림숲이요. 이야기는 들으셨죠? 대규모 크토니안. 사실, 그런건 저희도 위험하거든요. "
사실 해야할 것도 있고.. 아, 정말 죄송한데 하려는게 뭔지는 말씀 못드려요. 이 점은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곤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서 완급조절이 필요하니까.. 평일에 한 번 더 진행할게요!!
접근금지, 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멈춘다. 그도 그럴게, 가뜩이나 좁은 집인데 하나밖에 없는 방에 접근제한을 두기에는 어린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유페미아는 리코가 방에 들어가는 걸 막는 대신에, 방의 문에 달려있는 키패드에 숫자를 찍어넣어 문을 열어준다.
"-잠겨있네. 여기, 0,2,0,1 번을 눌러야 열린다네. 아까 전의 현관문은 1,0,2,0을 누르면 열리는데, 이 문은 그것과 순서만 반대인 셈이지! 참고로 10월 20일은 내 생일이고 말이야."
...삼년 전, 어떻게 해서 그리도 쉽게 연구 자료를 빼앗길 수 있었는지, 자신의 빈약한 비밀번호 책정능력을 마음껏 뽐내는 유페미아이다.
"숫자가 어렵지는 않으니, 리코 군 정도면 금새 외울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네."
상대가 숫자를 읽을 줄 모르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보통 11살 쯤이면 읽고 쓰고는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게 어디까지나 유페미아가 살아온 세상에서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유페미아는 현관문에 했듯이, TA-DA☆ 라는 효과음을 넣으며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내 연구실로 어서 오시게, 리코 군!"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남향으로 놓인 창문과, 데스크탑 컴퓨터와 그동안 방생한 크토니안의 위치 추적 데이터를 수신하기 위한 모뎀 등이 어지러이 올려져있는 책상, 천장까지 빼곡히 올라가있는 사무용 캐비넷들, 그리고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는 책장 두개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묵직한, 어쩌면 위압적일수도 있는 학구적인 용도의 방이다. 유페미아는 방을 돌아가며 리코에게 소개해주기 시작한다.
"여기, 책장에 있는 책은 대부분 크토니안에 대한 책들이라네. 이 중에는 내가 쓴 책도 꽤 되지! 대부분이 전공자 이상을 위한 전문서적이라, 내용이 조금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책을 읽고 싶다면 언제나 이 방으로 찾아와도 된다네, 리코 군!
"...이쪽, 사무용 캐비넷은 내가 연구자료를 모아두는 곳이라네."
"...그리고 여기, GPS와 연결된 컴퓨터는 하루도 빠짐 없이, 24시간 내내 순수 크토니안의 위치 변화를 기록한다네! 여기 찍혀있는 점이 보이나? 이게 바로 23번 크토니안이 지금 있는 장소라네. 여기 찍혀있는 점은 같은 크토니안이 17시간 전에 있었던 곳이고 말이야. 그리고 여기 찍혀있는 다른 색깔의 점은 7번 크토니안이구만. 여기, 두 점이 같은 곳에 찍혀 있는 게 보이지? 이건 23번과 7번 크토니안이 서로를 이곳에서 만났음을 의미하네! 껄껄, 친구라도 사귄 모양이구만! 아니면 적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 크토니안의 성향 상 후자가 더 일리 있구만!"
유페미아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리코에게 컴퓨터 모니터가 보고하는 상황을 해석해준다.
"...어쨌든, 이 컴퓨터는 크토니안 연구에 중요한 기기이니 가급적이면 건들지 않아 줬으면 좋겠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면, 거실에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하시게나!"
.....그나저나, 그동안 리코에게 자신이 크토니안을 연구한다는 것을 설명해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갸악 길어졌다..! 리코 주께서는 그냥 부담가지시지 마시고 짧게짧게 이어주시면 돼요..!
이 방에도 현관문과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유페미아가 키패드를 누르는 걸 지켜보는 리코였지만 사실 번호를 외우려는 의도보단 그냥 움직이니까 본다에 가까운 행위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유페미아가 먼저 번호를 알려줬으니 그럴 의도가 있건 없건 리코는 비밀번호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
하나, 둘, 셋처럼 손으로 세는 것까진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적혀있는 숫자를 읽는 것은 아직 어려웠던 리코가 키패드에 적힌 숫자를 보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금새 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유페미아의 말이 리코에겐 빨리 외우라는 말로 들렸기에 리코는 필사적으로 아까 본 유페미아의 손이 눌렀던 자리를 떠올렸다. 분명 이… 동그란 거랑, 오리처럼 생긴 거, 다시 동그라미, 그리고 막대기였다. 혼자 쩔쩔매며 키패드를 보고 있던 사이, 유페미아는 문을 열어 안쪽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대강 기억한 것 같다고 판단한 리코는 시선을 그제야 문 안쪽으로 돌렸다.
“우와…”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흘릴 정도로 안쪽은 굉장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어지러이 놓인 책상, 천장까지 빼곡히 쌓인 캐비닛, 뿌옇지만 책이 빼곡한 책장 두 개.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되겠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 리코는 그냥 이 방은 안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혼자 속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설명을 듣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책장에 꽂힌 책도, 저기 상자(유페미아는 컴퓨터라고 말했다)도 크토니안에 관련된 것 같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설명하는 유페미아를 가만히 지켜보던 리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거 안 건드릴게요. 그런데 게임…? 그게 뭐예요?”
//그엥... 새벽에 비와서 그런가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가 춥네... 창문 닫아야겠다... ;ㅁ;
크토니안 주제의 서적, 크토니안에 관한 문서, 크토니안의 데이터를 표시하고 있는 모니터까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리코의 눈길에, 유페미아는 자신이 크토니안 연구가라는 것을 리코는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맞다, 그러고 보니 내 직업(아직까지도 유페미아는 이니시에이터가 아닌, 크토니안 생태학자를 자신의 진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을 리코 군에게 설명하지 않았구만!"
"나는 이니시에이터로 일은 하고 있지만, 사실은 크토니안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네. 연구란 건, 음... 아, 그래!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해, 새로운 걸 알아내는 것을 뜻하지!"
"순수 크토니안은 다른 생물 속에 알을 낳아서 기생하면서 그 생물을 감염-여기서 감염이란 다른 동물이 크토니안으로 변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네-시키지만, 다른 동물이 없으면 순수 크토니안은 어떻게 번식할까. 리코 군, 생각해 보았는가? 나는 순수 크토니안에게는 사실 숙주에게 기생하지 않고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리코 군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다른 동물이 근처에 있을 땐 순수 크토니안은 그 동물 안에 알을 낳지만, 다른 동물이 근처에 없다면 밖에도 알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지! 아쉽게도 아직 확실히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말일세!"
"나는 이 생각을 논문-논문이란 새로운 것을 알게 됐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기 위해 쓰는 글이라네, 리코 군-을 써서 발표하려 했지만, 쥴스-하퍼라는 아주 못된 영감이 연구자료를 훔쳐 논문을 먼저 발표하고 말았다네!"
"하지만 걱정 말게나 리코 군, 나는 아직도 크토니안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비록 논문의 최초 발표자가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지만, 내 가설을 증명-증명이란 생각이 맞았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거라네-할 사람은 내가 될 걸세! 맹세하지!"
...아이에게 자신의 집에 크토니안 관련 서적이 많은 이유를 설명한답시고 시작한 이야기가, 하다 보니 유페미아 스스로의 이야기에 심취해, 자신의 산란장 이론에서 쥴스-하퍼에게 배신당한 이야기까지 멈추지 않고 줄줄 이어져 나온다. 맹세하지, 대목에서는 흥분해 주먹을 허공애 흔들어 대기까지 한다. 자신의 과거에 완전히 빠져든 유페미아는, 리코가 게임이 뭐냐고 질문해서야 현실로 돌아온다.
"게임... 게임이라. 게임은 전자기기로 하는 오락-그러니까 놀이...같은 거라네. 아마도?"
술술 나오던 과학적 개념들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게임은 유페미아도 익숙한 것은 아니기에 설명하는 데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렸다.
"말로 하는 것 보단 직접 보여주는 게 좋겠군. 거실로 나오게, 리코 군!"
이렇게 말하며 유페미아는 거실로 앞장서 달려나온다. 유페미아의 거실은 서재와 같이 베란다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남향이었다. 북쪽 끝에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전자렌지와 오븐을 비롯한 주방 공간이, 서쪽 벽에는 각종 옷들과 밤에 바닥에 깔고 잘 담요 등을 수납하고 있는 붙박이장이, 동쪽 벽에는 구식 텔레비전이, 남서쪽 구석에는 에어컨이, 정 가운데에는 접이식 앉은뱅이 탁자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탁자 위에는 이 순간의 주인공인 노트북 컴퓨터가 올려져 있었다.
유페미아는 랩탑의 전원을 켜고 포탈사이트에 무어라 친 다음, 화면을 리코에게 밀어 보인다. 노트북 화면에는 밝은 색깔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플래시 게임이 띄워져 있다. 플래시 게임을 선택한 것은 아직 어린 리코의 나이나, 호랑이 손 때문에 제한된 컨트롤을 배려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유페미아가 게임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아는 게임이 이런 류 밖에 없다는 것도 있다. 유페미아는 리코의 손을 마우스 버튼위로 가지고 와, 손을 겹쳐 마우스를 클릭해 가면서 게임을 설명한다.
"자, 이 작은 물고기가 보이나, 리코 군? 이 게임은 이 물고기보다 큰 물고기를 피하면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어, 물고기가 몸집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걸 목표로 하는 게임이라네..."
몇 번, 손을 겹쳐얹은 채로 시범을 보인 후, 유페미아는 마우스에서 자신의 손을 뗴어낸다.
스칼렛과 헤어지고 이틀정도 지났을까요. 베이스캠프로 가기까지 하루가 채 남지않았을 때 연락은 찾아왔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더 빨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혹시나 상처입은게 있다면 대신 사과하겠다는 말 등등 메일의 대부분이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본론의 이야기는 다음페이지로 넘어가야 시작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있는 곳의 주소를 알려주면 자신이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하는 스칼렛이었습니다. 성격상 남들에게 폐끼치기는 정말 싫어하는지 메일의 절반 이상이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 뿐인 메일에는 쓰면서 얼마나 마음을 들여 썼을 지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유페미아는 스칼렛의 메일을 받은 후,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시카의 딸에게 집주소를 자발적으로 넘기는 것은 악수라고 판단, 집 대신에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보냈다. 아늑하고 한적한, 이전에 키아라와 만났던 적도 있었던 카페였다. 지난 번에 같은 (임시) 태스트포스를 결성한, 마리야 야코바라는 아가씨에게도 메일을 전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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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날, 유페미아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카페에 나와 시럽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시며 스칼렛과 마리야를 기다린다. 리코를 위해서는 바나나를 갈라 바닐라, 딸기,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생크림을 높게 올린 바나나 스플릿 선데를 사주었다.
메일을 받은 유페미아의 제안에 따라 리코는 유페미아와 함께 카페에서 스칼렛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스칼렛과 마리야 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고, 좀 더 정확하게는 기다린다기보단 리코 자신의 앞에 놓인 맛있는 것을 먹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바나나만 먹어도 맛있는데 그 위에 바닐라, 딸기,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라니, 거기에 생크림까지 올라가다니. 지금까지 먹었던 단 맛의 상한선을 한꺼번에 올려버리는 듯한 맛이다. 빨리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씩 먹고 있었지만, 먹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맛있으니까.
먹는 데에 열중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는 않은 듯, 리코는 먹는 사이사이 시선을 문 쪽으로 보냈다.
나름의 패셔니스타 스칼렛은 전과 같은 복장으로 카페안으로 성큼 들어왔습니다. 어디보자 - 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이 찾고있는 사람을 찾던 스칼렛은 일단 커피부터 시킬까 - 하는 심정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는 리코와 유페미아를 찾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그 이후 손을 살짝 들어 다시금 인사를 했습니다.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오는 스칼렛은 어떻게 봐도 16살의 모습이 아닌것은 확실했습니다. 엇차 - 하고 의자를 빼서 앉은 스칼렛은 바로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훤림숲에 대규모의 크토니안이 출현한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물론, 우리가 한 일은 아니지만 아웃월드의 창을 여는 것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카였기에 아웃월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했고 그런 시카도 조만간 이런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말합니다. 물론 훤림 숲의 크토니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지구 밖에 있다고 말합니다. 훤림 숲에 출현한 크토니안과 더불어 지구 외부에도 크토니안이 대거 출현했고 허수지구가,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 물론, 언니들이나 동생에게 말해서 처리하면 될 일이긴 해요. 하지만 그.. 그랬다가는 필요없는 피가 너무 많이 흘러요. 알잖아요? 태스크포스가 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면 거기서 움직일 우리하고 겹치거든요. "
스칼렛의 메일을 유페미아에게 전달받고 무심하게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이 맞다면 상대는 그녀의 언니들과는 꽤 다른 사람이고, 더 나아가 얘기를 들어볼 만한 상대인 것 같았다. 답지 않게 약속시간에는 조금 늦었지만 덕분에 스칼렛이 본론을 시작할 때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허수지구가 진짜로 존재는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스칼렛의 말에 뚜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다.
"그래서 그 크토니안들을 우리가 처리해 줬으면 하는 거야?"
이쯤 되면 함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 애초에 보다 공격적이고 살의가 있는 스칼렛의 '언니'들이라면 이보다 훨씬 단순한 방법을 썼을 것이다. 블랑슈나 젤러시와 태스크포스들의 반경이 겹쳤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상상하기도 싫다. 허수지구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게 도덕적으로 옳기도 했다. 그러면 남은 것은 하지만 우리한테 배정된 구역이 따로 있을텐데, 어떻게 훤림 숲을 벗어나 그 크토니안들을 처리할 수 있지? 라는 고민 뿐이다.
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어느새 스칼렛이 와 있었다. 리코는 한 손을 들어 인사하고 마저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려다 문득 오늘 여기 온 것은 스칼렛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리 눈 앞에 있는 이게 맛있어도 일단 여기 온 목적인 이야기부터 들어야겠지. 리코는 잠시 멈추고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불가능했기에(…) 조금씩 떠 먹으면서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럼 숲이랑 거기랑 같이 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큰 임무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아서인지, 리코는 맹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 처리하는건.. 뭐, 괜찮아요. 누군가는 할테니까. 태스크포스가 알아서 할테지만 제가 도움을 바라는건 조금 다른쪽이에요. "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공세에 당황한 눈빛을 보인 스칼렛은 쪽 - 하고 커피를 마시고는 하나씩 설명할게요. 잠시만요. 하고 말하곤 어디보자.. 하고 책상을 톡톡 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하려는 일은 허수지구 밖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거에요. 그 아이들은 정말 위험하거든요. 지금당장 죽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분명히 살아있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지만 분명히 살아있어요. 모든 생명에게 미움받고있지만 살아있어요. 그 아이들을 빼오는 건 제가 할게요. 그러니 그 동안 태스크포스의 눈을 돌려주시고 혹시라도 있을 크토니안이 온다면 그 쪽을 부탁드려요. 창을 여는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시카가 모든걸 알고있고 저와 제 자매들은 그저 그걸 배웠을 뿐이에요. 지금 당장 이자리에서 창을 여는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스칼렛은 미소를 지으며 섬뜩한 말을 뱉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열어본 경험이 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도 신기했습니다.
자, 그럼 일단 가서 어떤지 봐야겠지요? 스칼렛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거리가 좀 되니까 기차를타고 이동해서 역에 내리고, 택시를 탄 다음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할거라고 말한 스칼렛은 혹시 마지막으로 제가 알려줘야할게 있을까요?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습니다.
아. 스칼렛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왜 123번 태스크포스여야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블랑슈나 젤러시라면 태스크포스의 눈을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살인멸구를 했을 거란 뜻이리라. 그렇다면 더더욱 스칼렛을 도와야겠지. 여기서 거절했다가 애먼 태스크포스들이 살해당하는 것은 사절하고 싶다.
"일단은 없어."
지금 당장 여기에서 창을 열 수도 있다는 말은 거슬렸지만 일단은 스칼렛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으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주제로 인식되었다. 물어보고 싶은 사항이 생길 수도 있고 양동 작전이니만큼 스칼렛과 연락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건 스칼렛이 제시한 연락처면 해결이 되겠고.
지금 이 데미휴먼 아가씨는 말하고 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창을 여는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이는, 복잡하고 전력소모가 심한-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규제가 단단히 걸려있는-기계를 사용하지 않고도 창을 열 수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유페미아의 동공이 커지고, 입이 떡 벌어진다. 그도 그럴게, 창을 자유롭게 열수만 있다면 유페미아의 연구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할 테니까.
스칼렛이 부탁하는 건 허수지구의 아이들을 빼오는 동안 태스크포스의 눈을 돌리는 것, 그리고 혹시라도 괴물… 크토니안이 온다면 막아주는 것. 이렇게 두 가지 정도인 것 같다. 리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걱정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잘 못 한다는 사실과, 거짓말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를 떠나 ‘사람’이 묻는다면 자신은 곧이곧대로 말해버릴 거라는 것. 할 수 있을까, 약간의 불안감이 들고 리코는 귀를 살짝 뒤로 젖혔다.
“아니, 없어…”
앗, 지금 출발하려는 건가 봐. 리코는 남아있던 아이스크림과 바나나를 호다닥 마저 먹어 치웠다.
스칼렛은 그러면서도 유페미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모르는게 좋을거라고 말했습니다. 창을 여는건 11살먹은 어린아이도 배우면 할 수 있을정도로 쉽지만 닫는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서 함부로 열었다간 온 사방이 크토니안 천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마지막으로는 준비해놓았던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16살먹은 스칼렛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운전대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훤림이라고 부르는 숲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음산한 느낌은 얼마전 루르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차에서 안쪽으로 얼마나 걸었을까요, 스칼렛은 이쯤가면 슬슬 도착할거라고 말했고 그러기 무섭게 갑자기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몸을 낮췄습니다. 뭐야? 라는 반응이 들기도 전에 보인 것은 대여섯명으로 구성된 한 무리의 태스크포스였습니다. 총을 들고있는 이니시에이터와, 칼을 들고있는 데미휴먼이었고 그들은 숲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리코와 마냐, 그리고 유페미아를 보곤 걸음을 틀어 이곳으로 다가옵니다.
- 여어, 여기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
바닥에 누워있는 스칼렛은 들키지 않는게 중요하다 했습니다. 무엇때문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할 일은 남들의 눈에 띄어선 좋을 게 없다고 말했으니 이 사람들을 떼어내는 게 가장 중요해보였습니다.
스칼렛이 주저앉은 것에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태스크포스 하나하고 맞닥뜨린다. 들키면 안 된다고 했었지. 그 말을 기억하며, 리코와 유페미아를 본 척 스칼렛을 넘겨다보곤 태스크포스 무리를 예의 그 천연덕스러운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태스크포스 212라고 합니다. 미심쩍으시면 태스크포스 213의 마일리와 레오 씨, 그리고 다른 분들과 안면이 있으니 그 분들께 확인받으시면 되어요. 그렇게 소개하며 태스크포스 본청에서 나누어준 넘버링을 보여준다.
"그냥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혹시 특정 태스크포스들에게만 개방된 지역이 있는 건가요?"
있다면 브리핑을 들은 날은 못 들은 것 같아서요. 계속 천연덕스러운 무표정을 유지하며 자신들은 공식적인 용무로 이 자리에 있으며, 불법적인 짓은 전혀 저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어필한다. 어차피 거짓말도 아니다. 일행에 예정된 것보다 한 사람이 더 있을 뿐이지.
창을 여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에 리코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리코는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고, 마지막에 스칼렛이 차를 운전할 땐 조금 놀랐지만 크게 티는 내지 않았다. 운전을 하니까 스칼렛은 어른이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차를 타고 가다 내린 곳은 음산한 느낌이 나는, 어둑한 숲이었다.
“앗, 어…”
한참을 걷다가 슬슬 도착할 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바닥에 풀썩 누운 스칼렛을 보고 놀란 리코는 뒤이어 들어오면 안 된다며 다가오는 사람과 데미휴먼을 보고 두 번째로 놀랐다. 마냐가 그들에게 무어라 대답하는 걸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리코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유페미아와 사람들을 번갈아 보는 것뿐이었으니.
이름모를 태스크포스들은 넘버링을 확인하고는 저들끼리 무어라 말을 주고받더니 이곳은 자신들의 관할이니 엄한데 힘빼지 말고 원래 구역으로 돌아가라 이른 뒤 자리를 떠났고 그들이 자리를 떠난 뒤 한참 후에야 스칼렛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야 - 큰일날뻔 했네요. 하고 말하는 스칼렛의 바보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요. 안으로 한참을 더 걸어가자 스칼렛은 잠깐. 하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고 침을 꿀꺽 넘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달빛이 비춘것은 이쪽으로 등을 진채 걸어가는 거대한 크토니안의 형상이었습니다. 순수 크토니안은 아닌것으로 보이는게 몸 곳곳에 털이 나있었고 네 발로 걸어가며 거대한 엄니가 나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마 멧돼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 크토니안은 킁킁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봅니다.
" 들..킨것 같은데.. "
거슬리게,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며 손톱을 길게 늘이고 뛰어나가 크토니안의 목을 베어 단번에 쓰러트렸습니다. 휴 - 하고 별거 아니란듯이 말했을 때 어두운 숲속에서 여러쌍의 눈들이 이쪽을 바라보는게 보였습니다. 여러 마리의 소형크토니안부터 대형크토니안까지 넉넉잡아 10마리는 훨씬 넘을 괴물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천천히 다가옵니다.
다행히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해준 마냐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리코는 다시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다 거대 크토니안과 마주쳤다. 다행히 거대 크토니안은 스칼렛이 해치웠지만…
“…으… 괴물이 많아…”
수많은 크토니안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코는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서 몸을 숨기고, 가장 가까이 있는 크토니안을 향해 폴짝 뛰어오른 순간 옆구리에 큰 충격을 받고 그대로 옆으로 날아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통증이지만 어찌저찌 착지만큼은 제대로 해냈다. 충격의 정도로 봐서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 것은 분명했다. 그나마 뼈가 부러지거나 찢어지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바들거리며 떨리는 다리로, 네발로 땅을 딛고 일어선 리코는 급히 자세를 바로 잡으며 주위를 경계했다.
“─으, 아파... 너무 많아…”
매복했다가 공격하는 식의 전술을 쓰는 리코에게는 꽤나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미 위치를 들킨 상황에서 매복 따위는 소용없는데다 상대가 다수인만큼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리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감정하고 깔끔하게 뱉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인간들에게 걸리는 편이 나을 뻔했다 - 라는 생각도 찰나 해봤지만 다음 순간 블랑슈의 경우를 생각하곤 매우 침착해졌다. 아무리 봐도 갈기갈기 찢어져서 고통받느냐 한 조각으로 고통받느냐의 차이인데, 아무래도 오늘 일진에 대하여 진지하게 회의적인 사고를 가져봐야 할 것 같다.
크토니안 상대인 만큼 주저없이 칼을 뽑은 다음 작은 크토니안 여럿에게 달려들어 최대한 단칼에 베어 넘기려고 해본다. 다대일 구도는 장기적인 싸움에서 불리하니 일단 머릿수부터 줄여 보자, 라는 생각이었다.
태평하게 감탄이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도 눈앞에 나타난 맷돼지 크토니안의 등장에 감탄을 뱉어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교수직에서 해임된후, 유페미아로써는 이런 대형 크토니안을 마주할 일이 도통 없었으니까. 말하자면, 대형 크토니안은 오랜만이란 이야기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은, 유페미아가 얼 빠져 구경하는 동안, 스칼렛이 맷돼지 크토니안을 베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대형 크토니안을 포함한 열마리 남짓한 크토니안 무리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유페미아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으며, 마취총이 아닌 제대로 된 라이플을 케이스에서 꺼내, 가장 커다란 대형 크토니안에게 조준한다. 총알을 곧게 날아가 크토니안의 미간 사이에 박히지만, 워낙 커다란 개체라 이것으로 죽었을지는 모르겠다.
몇 마리나 베어넘겼을까요. 남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다는 스칼렛은 이미 혼자서 춤을 추듯 학살해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맞고 엎어진 리코에게 달려들어 일으켜 세우곤 괜찮아? 하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근처 풀숲에 옮겨놓고는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간신히 피하곤 다시 급소를 향해 손을 날립니다. 썰어도 썰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알 턱이 없습니다. 도망친다한들 이것들이 쫓아와서 지구 내부까지 들이닥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앙입니다. 어떻게든 여기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 뿐입니다.
지킬 수는 없을 것 같다더니, 엄청 잘 싸우네. 혼자 춤을 추듯 학살극을 벌이는 스칼렛을 보며 리코는 속으로 감탄했다. 엄청 강해, 운전도 할 수 있고… 스칼렛은 엄청 강한 어른이구나! 그렇게 감탄하는 것도 아주 잠시였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크토니안이 감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다시 공격을 해야 한다. 리코는 재빨리 옆으로 뛰어, 한번 더 달려든 크토니안의 공격을 훌쩍 피한 후 달려들었다. 대형급은 아니더라도 리코가 올라탈 정도의 덩치는 있었기에 리코는 그대로 발톱을 박아 올라타서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아까의 복수야, 하고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면서.
뒤늦게 리코가 곁에서 떨어진 것을 깨달은 유페미아는, 한 달음에 리코 곁으로 달려간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가려고 했다. 머리가 두 개에, 보통의 두더지의 몇 배로 비대해진 두더지 크토니안이 유페미아의 가는 길을 막았기 떄문이다. 이런 근거리에서는 총알이 아깝다고 판단한 것인지, 유페미아는 두더지 잡기를 하듯이 라이플의 개머리판으로 두더지 크토니안을 때려잡고는, 멀리서 다가오는 두 마리의 크토니안의 실루엣을 향해 총알을 날린다.
스칼렛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싸움꾼으로서 순수하게 감탄한다. 춤추듯 학살하는 모습은 명백히 본을 받아야 할 실력이었다. 확실히 시카의 딸들이 강하긴 하다. 그때 루르 스노우드롭을 죽였으면 쳰위의 말대로 이런 상대들과 아예 척을 졌을테고...음. 떠오르는 회의적인 미래에 마리야 그레고로브나는 매우 침착해졌다.
그나저나 어디서 이렇게 대형으로 밀려오는 거야?
자신도 나름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면 벨수록 숫자가 늘어나니 전세가 불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도망을 가면 알파 지구로 저것들을 끌어들이는 셈이니 여기서 막아야 할 테고. 결국 이를 악물고 달려들다, 크토니안 하나에게 명치를 맞고 저만치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다. 폐 속에 공기가 사라진 듯한 고통에 헐떡이며 의식을 찾으려 노력한다.
점점 밀려드는 크토니안에 스칼렛마저도 지친 모습을 보였습니다. 헉헉 대면서 숨을 몰아쉬다가 복부를 크게 가격당해 기침과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베어넘기고 찌르기를 몇번을 했을까요. 잠시 쉬어가는 타임인지 뒤로 슬슬 물러났을 때 보인것은 아까보다 이상하리만치 더 많아진 크토니안들에 둘러싸여버린 광경이었습니다. 보통은 바로 달려드는 족속들이었을텐데 대치만 하고있다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때 쯤 다시 크토니안이 달려들었고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돌렸던 스칼렛을 덮친 크토니안은 스칼렛의 두 팔을 양발로 꾹 누른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채 당장이라도 스칼렛을 물어죽일 것 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특이점이라면, 그 한마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리를 둔채 노려보기만 하다가 저 숲속 멀리에서 들려오는 기괴하고 뒤틀린 울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더니 등을 돌린채 사라져갑니다. 스칼렛을 덮친 그 한마리만 빼고요.
" 이.. 개.. 저리..비켜..! "
체급차이에서 오는 힘을 어쩌진 못하는지 몸을 비틀기만 할 뿐인 스칼렛의 목을 물고 던져버린 크토니안은 다시 달려들어 스칼렛을 덮치고 양 손을 꾹 누른채로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하는 듯 낮은 울음소리를 냅니다. 구해야할까요, 시카의 딸인데도?
이상해, 아까보다 더 늘어난 것 같아. 리코는 주위를 곁눈질로 보며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공격하고 공격해도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서로 지쳤다는 걸까, 잠시 찾아온 대치상황에 의아함을 품을 즈음 다시 크토니안이 덮쳐왔다. 뒤를 돌아보고 있던 스칼렛이 크토니안에게 깔린 것을 보자 리코는 곧바로 튀어나갔다.
“저리 가!”
최후의 일격이라도 준비하는 건지, 낮은 울음소리를 내는 크토니안에게 달려든 리코는 그대로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고 팔을 휘둘렀다. 가능하면 얼굴 쪽을, 그것도 눈에 맞기를 노리며 휘둘렀다. 대놓고 얼굴 쪽을 노린다면 크토니안이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를 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치명상을 입히기도 좋은 부위니까-라는 것을 생각하며 했다기보단 그냥 본능적으로 달려든 쪽에 가깝지만.
유패미아에 의해 일으켜진 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투가 가능하고 영구적인 상처는 없는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스칼렛의 괜찮냐는 말에 대답해 주려고 애쓰며 크토니안을 베어 넘기다 이변을 눈치채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스칼렛을 덮친 크토니안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고 한다. 물론 상대는 시카의 딸이지만, 그렇게 나온 반론은 매우 가볍게 제껴 버렸다. 지금 와서 구하지 않을 거면 루르 스노우드롭을 살려둔 의미가 없기도 하고, 저걸 내버려뒀다간 다음 표적이 자신들(최악의 경우에는 알파 지구 그 자체)가 될 확률이 높으며, 자신들은 허수 지구의 생명들을 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는데 스칼렛이 죽으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게 주 이유였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면 아빠가 실망할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그건 일단 그러려니 하자. 아무튼 도망쳐야 할 이유보다는 스칼렛을 구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한 번에 3연타를 당한 크토니안은 괴성을 지르며 떨어져나갔다가 다시 노려보다간 이내 등을 돌려 다른 무리를 따라 숲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 고마워, 디지는줄 아라써.. "
스칼렛은 헙, 하고 제 손으로 입을 막고는 창피하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뭔가 이상해. 너무 이상해. 하고 몇 번을 곱씹던 스칼렛은 더 진행하는건 무리일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말도 했습니다. 아직 이론에 불과하지만 분명 크토니안은 무리생활을 하지도 않을터인데 방금 그 행동은 무리의 알파의 소리에 물러난 것 같다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이 상태로는 무리겠네요. 하고 한마디를 하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요.
그는 말없이 상하로 흔들리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괜한 것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유페미아의 팔은 튼튼하게도 움직여주었다. 그리고 나이가 오십이니 안심하라고. 그러니까……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소리다. 오십대 인간이 얼마나 약할지 어떻게 알고. 유감스럽게도 야오쳰위는 노년에 가까워가는 중년인을 대해본 경험이 전무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족했다. 그런 관계로 유페미아의 장담에도 그는 눈을 조금 굴리다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런가요?'하며.
"제 근처에 있었던 인간들은 정확하게 맞혔는데, 저한테는 발치에만 쐈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젤러시 건도 있고요. 그러며 그는 상대 쪽으로 손바닥을 펴더니 말 한마디에 한 번씩 손가락을 접었다. 타뷸라의 늑대 사건에 대한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음…… 그건 그거 아닐까요? 데미휴먼에게 조금 관대하게 대해주는 것 뿐이지, 방해되는 행동을 끝까지 용인해주지는 않은 거."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봐주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말은 그렇게 끝맺어졌다.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려다,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리고선 입을 가린다. 여기선 아마 웃으면 안 되겠지. 그는 괜히 따지도 않은 캔을 들여다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에피는 크토니안, 괴물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 이야기하는 유페미아를 본 리코가 내린 결론은 그러했다. 어려운 이야기를 제하고 남은 것은 에피가 크토니안을 좋아하고,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에 그런 게 있었구나. 나름대로 납득하며 리코는 에피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따숩게 햇살이 비치는 남향. 볕을 쬐며 털고르기 좋은 곳이라는 감상을 떠올린 리코는 가만히 유페미아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노트북 화면-리코는 작은 TV같다는 생각을 했다-에 그려진 밝은 캐릭터들, 유페미아가 제 손을 가져다 마우스 위에 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는 설명을 가만히 듣는다. 이걸로 저 물고기를 움직이는 거구나.
"...네, 해볼게요."
혼자서 해보라는 말에 대답한 리코는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에 움직이는 물고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꿈틀꿈틀, 꼼질꼼질, 리코는 저도 모르게 꼬리를 좌우로 휘둘렀다. 가만히 화면을 응시하는 리코의 목에서는 금색 목걸이의 금속부분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