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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인가. 령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곧 있으면 자신은 저 눈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관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은 미리내의 관리자직을 이어받게 되니까. 령은 창문에 손을 대어봤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럴 때가 아니지."
령은 오늘을 위해 사두었던 검은 원피스를 차려입고 서둘러 신통술을 써 비나리에 도착했다. 아까 전까지 보았던 눈송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령이 검은 눈을 깜박인다. 그래. 자신은 지금 비나리에 있다. 이제 얼마 후면 자신이 정식으로 관리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 든다.
"긴장 풀자."
령은 혼잣말을 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래. 나는 잘할 수 있다. 오백년을 살며 별 일을 다 겪었는데 고작 지역 하나 통솔하는 것 쯤이야. 령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당당하게 또각또각 걸었다. 하이힐과 지면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곧게 울려퍼졌다.
하루 아침에 남자 여우가 되어버렸다. 물론 겉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몸의 골격이 조금 변한 것 같고 몸의 유선이 사라졌고 꼬리가 살짝 더 커진 것 같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약간 굵어진 목소리가 나왔다. 대체 왜 갑자기 하루 아침에 이렇게 남자 여우가 된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할 것은 해야만 했다.
오늘은 미리내의 관리자를 새로 임명하는 날이다. 원래라면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임명을 해야 했지만, 아빠는 지금 남자가 된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겠다면서 외출을 했다. 그렇기에 새로 임명하는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물론 어떻게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있으면 령이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나대로 준비를 마쳤다. 확실히 예복을 입은 후에 미리내의 기운을 손에 담는 것도 마쳤다. 남은 것은 령에게 주는 것 뿐이었다.
조용히 기다리는 도중, 령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령이겠지? 령일거야. 그럴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는 령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니 잠시만. 지금은 남자니까 수트를 입어야 하잖아. 그렇지? 령은 출발하기 전 황급히 다시 수트로 갈아입고 비나리로 왔다. 하필이면 남자 몸이라 그런지 더 긴장되는 것 같다. 심호흡을 하자. 젠장할. 심호흡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몸이라도 여자 몸이면 더 편할 것 같은데... 령은 그 생각을 하며 데굴 눈을 굴렸다.
저쪽에서 웬 수컷 여우 신이 다가오고 있었다. 령은 잠깐동안 왜 저 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고민을 하다가 경악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신이 누리? 그럼 다른 신들도 모두 성별이 바뀐 건가? 대체 왜?
"어... 응. 맞아. 너 누리 맞지?"
령은 대폭 낮아져서 통 적응이 안되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이렇게 말하니까 적응이 안된다. 누리도 마찬가지겠지. 령은 불안한 듯 슬쩍 눈을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임명받았으면 좋겠는데. 령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제 관리자로 임명 받는거야?"
령은 누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예복을 갖춰입은 걸로 보아서는 임명을 받는 게 확실하긴 한데... 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는거지?
목소리도 다르고 조금 모습도 달라진 것 같지만...분명히 수컷이지만, 그래도 령이 맞는 듯 싶었다. 역시 령도 바뀌었구나. 그렇다면 다른 신들도 다 바뀐 것일까. 지금 이 상황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페닉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엄마가...아니라 아빠의 힘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하니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것은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일단 관리자로 확실하게 임명하기 위해서 여기로 만나기로 한 것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령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리내의 관리자로서 임명하러 온 거야! 새로운 미리내의 관리자가 되기로 했고, 그 관리자의 임명은 고위신인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해야하지만, 그래도 지금 안 계시니까 내가 대신 하러 온 거야. 사실 특별히 뭘 하는 것은 없어."
그러니까...어떻게 해야 했더라. 아빠에게 배운 것을 떠올리면서 나는 령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위엄있는 자세를 취하고 목소리도 일부로 깔아서 이야기했다.
"흑조 수인 신 령! 그대는 미리내의 관리자가 되어 미리내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 대답하도록 하라! ....아...나는 위치가 위치라서 조금 진지하게 하지만 령은 가볍게 해도 돼. 아무튼 대답하도록 하라!"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였지? 응! 잘한 것 같아! 기분이 절로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도대체 왜 라온하제의 신들의 성별이 바뀐건지는 몰랐으나 령은 이 일이 예삿일이 아님을 느꼈다. 어쩌면 관리자로 임명받은 다음 가장 먼저 할 일이 성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령은 무심코 제 머리를 쓸어넘기다 늘상 있었던 긴 머리카락의 부재를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지? 진짜...
"그렇구나. 너도 바뀌었네. 혹시 은호님도 바뀐 건 아니겠지?"
라온하제를 지키는 고위신마저 저리 되버린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을 한단 말인가? 령은 내심 한줄기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듯한 표정으로 누리를 바라보았다. 제발 은호님만은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다고 해줘. 아니면 나 죽을래.
"은호님이 안계신다고? 그렇구나... 어쨌든 알겠어."
은호님의 부재는 예상치 못했던지라 령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다행일지도 몰라. 령에게 있어 은호는 다가가기 어려운 신이었다. 자신보다 위의 위치에 있으면서 은근히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은호를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반면 누리는 이렇게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니 은호보다는 얘기하기가 한결 편했다.
"저는 미리내의 주민들과 소통을 하며 이곳을 책임지겠습니다. 저만의 의견을 중요시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 모두를 위한 미리내를 만들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면 돼?"
령은 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미리내의 관리자직을 이어받는다고 하니 아무래도 엄중해져야겠지만 누리 특유의 분위기가 그것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답 잘한 것 같아. 령은 속으로 생각하고 미소하였다.
"...엄마는 아빠가 되었어. 아빠 말로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거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지 않을래?"
일단 아빠는 그냥 헤프닝 정도로 즐기라고만 이야기했다. 이런 것이 한두번이 아닌 것일까. 애초에 나는 태어난지 이제 2년이 조금 지난 상태라서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아빠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걸까. 령이 저렇게 불안해하는 것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아닐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냥 넘길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너무 불안해하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애써 나는 웃으면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언젠가 이 땅을 지배할 지배자로서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은걸!
아무튼 의식은 시작이 되었고 령은 자신의 답을 내놓았다. 미리내의 주민들과 소통을 하며 책임을 지겠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 모두를 위한 미리내를 만들 것이다.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엄마...가 아니라 아빠도 그렇게 깐깐하게 보진 않을 것이다. 너무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아빠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나도 그럴 생각이다. 관리자도 행복하고 즐거운 내일인 곳. 그곳이 바로 '라온하제'이니까.
"응! 그 정도면 돼! 사실 일단은 절차 같은 거니까! 령은 충분히 잘 할거라고 믿어! 그러니까..이게...미리내의 기운이 든 힘이야."
기본적으로 관리자들은 각 지역의 기운이 담긴 힘을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지역을 책임진다는 증표 같은 것이니까. 손에 모인 파란색 기운을 령의 구슬로 주입하자 그 구슬은 푸른빛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남는 것은 미리내를 상징하는 눈꽃 문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령은 미리내의 관리자야! 어때? 매우 빨리 끝나지? 언제 한번 미리내로 놀러갈게!"
역시나... 령은 허어 하고 탄식을 하였다. 은호님마저 그렇게 되어버리면 누가 우리의 성별을 되찾아주지? 령은 앞이 캄캄한 듯 하였다. 아냐... 그래도 시간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어. 그렇지? 영원히 남자 몸으로 살진 않을 거 아냐.
"아...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령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빠른 사람이었다. 괜스레 부정하고 날뛰느니 그 시간에 해결책을 강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좋아. 그럼 어디서부터 조사한다... 일단 성별이 변한 날짜부터 체크하는 게 좋겠어. 그 다음엔... 령이 조사 계획을 짜고있는 동안 누리는 자신을 미리내의 관리자로 만들 일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누리. 이게 미리내의 힘이구나."
령이 신기한 듯 제 구슬 속으로 사라지는 푸른 빛을 바라보았다. 빛이 다 흡수된 구슬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 결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름다워. 이것이 관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구나. 령은 잠시 감탄한 듯 제 구슬의 눈 결정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되게 빨리 끝났네. 고생했어, 누리. 나중에 미리내로 한 번 놀러와. 끝내주게 맛있는 붕어빵을 선물해줄게."
호빵이랑 코코아도 같이 말이지. 령은 소탈하게 웃어보이고는 누리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누리는 자신과 엄... 아니 아빠가 성별이 바뀌었는데도 당황하지 않는걸까? 그 점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응! 미리내의 힘이야! 미리내를 관리하고, 미리내의 지형을 바꿀 수 있고, 미리내의 날씨조차 바꿀 수 있는 힘이야! 아..하지만 너무 남용하면 미리내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 너무 무리하게 날씨를 바꾸려고 하거나, 아예 지형을 겨울이 아니라 다른 계절로 바꾸려고 하거나 그러면 말이야. 사실 그렇게 시도를 하면 아마 경고가 오게 될 거야. 아빠에게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빠는 라온하제의 지배자 고위 신. 밑의 다른 신들이 어떻게 힘을 사용하는지는, 적어도 관리자들의 경우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물론 령이 말썽을 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말썽을 부리겠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나는 믿음을 가지고 령을 바라보았다.
"사실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걸! 그냥 미리내의 기운을 옮기는 것 뿐이니까! 긴장하고 준비를 한 령이 더 고생한 것이 아닐까? 아..그리고 붕어빵? 호빵? 코코아? 정말이야?!"
달콤한 것 너무 좋아! 절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나도 모르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혹시 백호 언....형이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 미안하지만 저건 나 혼자서 조용히 먹고 싶은걸. 백호 언....형이 따라오면 다 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어디로 가면 돼? 령의 집으로 가면 돼? 아니면 근처 식당?"
나도 모르게 꼬리가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렸다. 이런 본능만큼은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새삼 자신이 잘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령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 목에 걸린 구슬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리내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하지만 맡은 일은 해야하는 법! 령은 두 손을 꽈악 쥐고는 뭔가를 다짐한 듯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보여야지. 령은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미리내의 힘으로 함박눈이 내리도록 해보았다. 지금쯤 미리내에는 눈이 내리고 있겠지.
"하하... 그런가? 나는 그저 이 장소로 오기만 했을 뿐인걸."
령은 멋쩍은 듯 다시 머리카락으로 손을 향하다 머리가 휑한 걸 깨닫고 아쉬운 듯 손을 다시 내렸다. 머리가 길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손이 있을 곳이 있어 좋단 말이야. 역시 남자 몸은 단점이 너무 많아.
아, 누리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단 걸 언급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귀여워라. 누리는 이래서 동생같은 느낌이 느껴진다. 친동생 같은 느낌이랄까? 자신에게도 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령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와도 되는데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이라던가... 령은 아무리 봐도 엄청나게 준비라던가, 마음의 준비라던가 그런 것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복장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걸. 아무튼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약간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배시시 웃었다. 물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남자가 된 령은 뭔가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늠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집에 손님을 들이고 싶다는 말과 집으로 가도 괜찮겠냐는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나중에라고 했는데?
"지금 말이야? 딱히 상관은 없지만 괜찮아? 다음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었어?"
물론 나는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괜찮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그보다 청소가 깔끔하게 되어있다는 말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무슨 기대를 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엄...아빠가 이야기했어! 남의 집에 놀러갈 때는 함부로 막 탐사를 하면 안된다고 말이야!"
"백호 언...형도 아니고 그렇게 먹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야!! 물론 먹고 싶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어!!"
뭔가 분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방방 뛰면서 꼬리를 바짝 위로 세웠다. 뭔가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그것을 떠나서 뭔가...뭔가...조금 분하기도 하고...아무튼 참으로 복합적이었다. 물론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 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뭔가 이러니까 어린애같은 느낌이 더 드는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우으..심정이 복잡해.
아무튼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 령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좋아. 나도 딱히 할 것은 없으니까! 그럼 가볼까?"
이어 나는 가볍게 신통술을 발동시켰다. 주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 바람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미리내의 눈밭 위에 서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이 소리가 너무 예뻐서 절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수컷이 되어도 이것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령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