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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가 제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령은 슬며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스가 저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겁을 먹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가만히 자신도 손을 더욱 힘주어 쥐는 것으로 화답했다. 자매라... 령은 속으로 죽어버린 제 자매들을 떠올리며 리스를 바라보았지.
아, 역시 장난은 조금 심했나보다. 저 늑대인간 남자가 하도 놀려대기에 그만 욱했던 마음으로 저질렀더니... 령은 방금 전 제 행동을 후회했다. 침착하자, 령. 이곳은 인간세계다. 신중히 행동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령은 문득 시선이 느껴지자 아래를 바라봤다. 리스가 커다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많이 놀란 것일까? 령은 리스가 걱정되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믿어줘서 고마워요, 리스."
령은 다시 온화하게 웃었다. 리스가 자신을 믿어줘서 기뻤다. 령은 제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플라스틱제로 된 호박모양 바구니는 여전히 제 팔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저기 있는 인간들은 괜찮으려나? 령은 걱정이 되는 듯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당신께서도 부디 즐거운 할로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령은 여우 여자에게 그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좋은 사람이구나. 이 여자는. 매번 생각한거지만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땐 기뻤다. 령은 받은 사탕과 초콜릿을 제 바구니에 넣었다. 호박모양 바구니가 더 이상 텅 비지 않아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내심 Trick or Treat가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으니.
아, 인간들이 가버렸다. 그 늑대 남자는 끝끝내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었지. 령은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비가 걸렸긴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령은 조용히 리스를 바라보았다. 리스도 웃고 있을까?
"흠... 해보고 싶은 것이라..."
령은 리스의 말에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보니 식사도 못하고 내려와서 조금 허기진 감이 있었다. 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로윈이라 그런지 먹거리를 파는 부스가 매우 많이 있었다. 령은 그 중 컵케잌을 파는 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은 모든 존재들을 신뢰하고 믿었다.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특히 그러한 자신에게 있어서 '신' 님의 존재는 절대적이고 위대한 것이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호의를 보일 정도로. 그렇기에 저번에 고양이 신들 사건에서 나타난 악신에게도 곧바로 공격하거나 적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던가.
"...령 님께서는 '신' 님이시니까요. 아름답고 자상하신 '신' 님. ...저는 언제나 령 님을 믿고 있어요."
희미하게 두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비록 령 님과 엄청 자주 만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지금까지 마주했던 령 님의 모습은 언제나 늘 따스했었기에. ...이런 평범한 동물일 뿐인 자신에게조차도.
세 명의 인간들은 이내 다시 축제를 즐기러 가려는 참인지, 자신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늑대인간 남자는 시비를 걸듯이 얘기해왔지만, 이어지는 박쥐 여자의 응징과 여우 여자의 가벼운 목례에, 자신 역시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다시금 허리를 들어올리자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령 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령 님의 옅은 미소. 그에 자신 역시도 미소를 부드럽게 지어보였다. 그러나...
...아... 령 님께는 안 보이겠지요? 자신이 순간 흰 천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해버렸다. 그렇기에 그저 두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이내 다시금 두 눈동자를 부드러이 접어 웃었다. 그리고 령 님께 혹시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 여쭤보았다. ...령 님께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저도 그것을 함께 해드리고 싶어요. ......령 님께서 더욱 행복하실 수 있도록.
이내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령 님을 기다리면서, 느릿한 동작으로 그 때까지도 손에 소중히 잡아들고 있던 사탕과 초콜릿을 그제서야 천천히 호박 바구니 속에 넣었다. 바구니 안이 살짝 차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 헤실헤실, 희미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러다 령 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령 님의 손가락 끝을 따라간 곳에 닿은 자신의 눈동자에는 또다시 처음 보는 신기한 음식들을 파는 부스가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맛있는 냄새가 코 끝을 간질이는 듯해, 자신도 모르게 살짝 킁킁, 코를 움직였다. 그리고는 한 박자 늦게 다시 령 님을 바라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왠지 맛있을 것 같아요. 처음 보는 음식 씨들 투성이지만요."
그래도 조금 기대되긴 했다. 만약 자신이 그대로 날개가 달려있었다면 작게 파닥파닥 움직였을 정도로. 이내 천천히 령 님과 함께 컵케잌 부스를 향해 옮기는 발걸음이 살짝 들떠보이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신'님이라. 령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렇게 맹목적으로 추앙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령은 그저 령일 뿐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지. 가온이 그저 가온이고 백호가 그저 백호이며 리스가 그저 리스이듯이. 령의 검은 눈동자가 리스로 향한다. 그 모습이 조금 슬퍼보인 건 기분 탓이었을까?
"리스. 저는 그렇게 추앙받을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태도를 거두어주세요."
령은 그저 령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누군가를 신으로 여기는 마음은 언젠가는 불행을 불러올 터였다. 그때 자신을 숭배하는 흑조 무리들이 저에게 다가온 인간 아이를 공격했던 것처럼. 령의 눈이 지긋이 감겼다 떠졌다. 아, 또 옛날 생각을 했나.
리스가 두 눈을 휘어 웃어보이자 이내 령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아무튼 즐거워보이니 다행이었다. 령은 내심 안도했다. 리스가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따분해하거나 라온하제로 돌아가고 싶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걱정은 단순한 기우였나보다. 령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면 구경을 해야겠지요. 갑시다, 리스."
령은 상냥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리스에게 말을 걸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지금 이 시간이 꿈만 같을 정도로 행복했다. 부디 리스에게도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령은 속으로 빌었다.
리스와 함께 간 컵케잌 부스는 다양한 컵케잌을 팔고 있었다. 호박모양, 거미모양 등등 다양한 장식들을 초콜렛이나 사탕으로 만들어 컵케잌 위에 얹었다. 령은 컵케잌들을 둘러보았다. 딸기, 초코 등등 다양한 맛의 컵케잌이 있었다.
자신의 말에 령 님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슬픈 듯한 검은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령 님의 말씀에, 멍한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지고는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령 님께서 슬퍼하고 계세요. 추앙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하고 계세요. 하지만 령 님께서는... 령 님께서는... '신' 님. "......"
보이지 않을 입술이 살짝 움찔, 느릿하게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두어 번 반복했다.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모습은 묘한 혼란스러움이 희미하게 묻어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결국은...
"......령 님께서 그러시길 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머리를 살짝 꾸벅, 숙였다 다시 천천히 들어올렸다. 멍한 눈동자가 더욱 몽롱해졌다. 하지만, 무언가 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저, 령 님께서 원하셨으니까요. 그러니... ...부디, 슬퍼하시지 말아주세요.
령 님의 '행복'을 기원하며 부드러이, 느릿하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령 님께서도 그제야 다시 짙은 미소를 지어주셨고, 그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이어진 령 님의 상냥한 목소리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손이 더욱 부드럽게 잡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서로 연결된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손가락을 머뭇머뭇거리다가 이내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령 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해요. 잠시 두 눈을 깊게 감았다. 구슬은 빛나지 않았다.
컵케잌 부스에 가보니 신기하면서도 예쁜, 각양각색의 처음 보는 컵케잌들이 가득했다. 그 컵케잌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두 눈동자를 살짝 반짝반짝 빛내며, 느릿하게 "...와아...!" 하고 감탄했다. 그러다 이어진 령 님의 물음에 뒤늦게 메뉴판에 시선을 두었다.
"...으음... 다들 너무 예쁘셔서 무엇을 선택할 지 고민돼요..."
호박 바구니를 든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꼼지락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내 곧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흰 천에 덮인 손을 들어올려 한 컵케잌을 가리켰다. 딸기맛인지 전체적으로 분홍색에 하얀 생크림이 위에 올려져 있고, 그 생크림 위에는 마녀 모자를 쓰고있는 잭 오 랜턴 모양의 초콜릿이 박혀있는 컵케잌이었다.
"...저는 저 귀여운 음식 씨를 맞이하고 싶어요."
령 님을 바라보며 헤실헤실, 희미하게 휘어진 눈동자에 묘한 기대감이 가득히 녹아있었다. 이어서 같은 질문을 령 님께 되돌려 물어보았다.
혼란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눈동자를 마주보며 령은 생각했다. 아아, 나는 또 죄를 범하고 말았구나. 이때까지 신으로써, 고고한 흑조로써 다른 이들에게 추앙받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던 게 몇번째던가? 아마 셀 수도 없이 많겠지. 령은 그런 걸 원치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삶을 원했을 뿐이다. 친구를 사귀고, 즐거이 놀고, 가끔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런 삶. 하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을 숭배했고 결국 제가 할 줄 아는 건 그들의 기대를 어그러뜨리는 것 밖에 없었지. 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쩌면 숭배받는 게 무서운 것이었나?
리스가 알겠다는 말을 덧붙여왔다. 동시에 령의 밤하늘색 눈이 스르르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의 숭배는 없는 것일까? 아아, 다행이다. 령은 마음이 놓였다. 이제 더 이상은 '신'으로써 있지 않아도 된다. 그저 편하게 다른 이들과 같이 평범한 삶을 즐겨도 된다. 령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다만 겉으로는 특유의 아리송한 표정만 짓고 있을지도 모르지.
리스가 령의 손을 잡았다. 령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리스의 손은 따스했다. 온기를 안고 있었다. 령은 그게 퍽 좋은 모양이었다. 령은 눈을 휘어 웃었다. 리스. 령이 조용히 리스를 불렀다. 그대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컵케잌을 바라보는 리스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예쁘다고도 생각했다. 령은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리스가 기뻐하니 다행이었다.
"과연 이곳의 컵케잌들은 모두 맛있고 예쁘게 생겼군요."
령은 리스를 보며 흐뭇해하다 그녀가 가리킨 컵케잌을 보았다. 분홍색에 흰 크림이 얹어져있고 마녀모자를 쓴 잭오랜턴 모양의 초콜렛으로 장식된 컵케잌이었다. 이제 령이 고를 차례였다. 령은 주위를 둘러보다 초콜렛색에 분홍색 크림이 얹어져있고 거미 모양의 초콜렛이 얹어진 컵케잌을 골랐다.
"그러면 주문을 하도록 하죠."
령은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리스와 제가 먹을 컵케잌을 주문했다. 주문하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는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