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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나는 잠시 빗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느 한 신의 모습이 보였다. 전에 모두가 놀고 있을 때 본 적이 있는 신이었다. 이름이 에이렐이었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나는 절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멜로디에 맞춰서 빗질을 하고 있었다.
"아..아차!"
나도 모르게 하는 그 행동에 깜짝 놀라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지만, 다시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노랫소리가 끝날 쯤에, 나는 비를 여전히 잡고서, 두 손으로 크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좋은 노래 잘 불렀습니다! 비나리 광장에서 이런 멋진 노래를 들려주시다니!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로서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이름이..아마 에이렐 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뒤이어서 나는 신통술을 이용해서 집에 있는 신과로 만든 주스가 담겨있는 병을 내 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면서 이야기했다.
"신과로 만든 주스입니다! 입맛에 맞는 달콤함이 느껴질테니 한번 먹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천하에 누구도 겨룰 자가 없다던 무인이 있더랬지. 길 가던 사람들은 령이 검을 뽑아들면 감탄사부터 내질렀더랬다. 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하며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검하며... 아, 쓸데없는 생각이다. 령은 고개를 내리저었다. 지금은 자신이 받은 칭찬이 아니라 다른 걸 생각해야만 했다. 령은 이 궁의 침입자를 배제하고 궁을 지키는 무인이었다. 그러니 궁을 지키는데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업무 중 다른 생각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필시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일테지.
궁 안을 가르던 령의 발소리가 멈췄다. 필시 인기척을 느낀 것일테다. 령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인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여기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령은 제 옆을 돌아보았다. 이것은 검사로서의 직감에 의존한 것일 뿐이지만 왠지 나쁜 이 같지는 않았다. 아마 이 궁 안의 시종같군. 령은 그리 생각하고 검으로 향하던 손을 막았다.
"게 누구십니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높은 목소리가 령의 입에서 나왔다. 령은 여전히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마 상대방이 수상한 기색을 보인다면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쟈쟈쟝~ 선레를 써왔습니다!
"취미 생활이라고 해도 저는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 이곳에서 해준 멋진 공연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할 의무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감사를 표하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달달하니 좋다는 그 말에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번에도 신과 열매는 재배가 잘 되었구나. 달달하니 좋다는 그 말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과가 열리는 나무를 기르는 과수원을 하니,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지간하면 신과는 시들거나, 맛이 없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절대적인 케이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신과의 맛이나 평가는 민감한 편이었다. 그것은 내가 과수원을 잘 운영하는지, 내가 나무를 잘 기르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니까. 물론 민감하다고 해도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 어찌되었건 그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었으니까.
"이 비나리 지역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산책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놀러 오셨습니까?"
내가 아는 바, 그녀는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이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인 내가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관리자로서,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들은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까. 물론 다른 지역에 사는 신까지는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좋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 노래를 은호님이나 누리님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모셔와야... 는 안되겠군요. 은호님과 누리님은 지금 모녀가 나란히 다솜의 벚꽃나무를 보러 가셨으니 제가 방해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두 분이 에이렐 씨의 노래를 들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정말로 고운 노래였다. 물론 나는 노래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노래가 상당히 아름답고 잘 부른 노래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당장 내가 노래를 부르면...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에, 손에 쥔 빗자루를 더욱 꼬옥 쥐면서 곧 들려오는 질문에 대답했다.
"네!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이자 은호님의 보좌를 맡고 있는 늑대 수인 신인 가온입니다! 이후 잘 부탁하겠습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는 전의 놀이에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관리자이기에 나름 유명한 것일까. 어느 쪽이건 좋았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꾸벅 인사를 한 후에, 다시 에이렐 씨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노래를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기를 바래야겠습니다!"
작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한 손으로 훔쳐내면서. 그리고는 다시 "...끄응..." 하고 한 박자 늦은 소리를 내면서 땅 바닥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각종 과일과 채소, 그리고 그 밖에도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가득히 들어있는 상자는 보기만 해도 제법 묵직해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혼자서 끙끙거리며 들어올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느릿한 발걸음을 떼었다. 신통술을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그런 신통술은 아직 알 지도 못 하고, 무엇보다 저는 '신' 님이 아니니까 그런 능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걸요. ...그러니까...
하지만 역시 약한 몸으로 너무 무리하게 많은 것들을 옮기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결국 커다란 상자에 시야가 가려져, 발 밑에 있던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거기에 발이 탁, 걸려버렸다. 그리고 이내 몸이 앞으로 엎어짐과 동시에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재료들. 그에 순간 멍한 두 눈동자가 약하게 떨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황급히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과 얼굴에 가득히 묻은 흙은 미처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재빨리 상자 안에 과일들을 다시 흙을 털어 주워 담기 시작했다. 드물게 빠른 몸짓으로.
그렇게 재료들을 뒤따라 가면서 주워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궁 안의 어느 인적이 드문 숲 속. 제법 깊숙한 그 곳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나무들의 그림자에 가려 마치 침입자 같은 분위기를 풍겨버렸고, 그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 한 채 이내 들려오는 높은 목소리에 한 박자 늦게 몸을 움찔, 한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의... ...령 님...?
안도감 반, 놀라움 반의 마음으로, 두 손으로는 흙투성이 사과를 든 채 황급히 나무 그림자 밖으로 종종, 걸어갔다. 그리고 꾀죄죄한 몰골로 허리를 꾸벅, 숙여 정체를 밝혔다.
"...죄, 죄송합니다...! 궁에서 일하고 있는 궁녀, 리스입니다. ...령 님을 놀라게 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음식들을 주워담다보니 이런 곳까지 와버려서 그만..."
"당연한 겁니다! 은호 님이 저에게 관리자를 맡기셨고, 저를 믿고 계시니 열정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 자리는 은호 님이 저를 신뢰한다는 증표나 마찬가지입니다!"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병을 받아들었고, 그것을 신통술로 다시 집으로 보냈다. 참으로 신통술이란 신기한 힘이었다. 신이 되기 전에는 이런 것을 하려면 우선 입으로 문 후에 열심히 굴까지 가고 거기서 또 먹이를 찾은 후에 물고 다시 돌아와야 했는데 이런 힘이 있으니 상당히 편리했다. 나의 일족이었던 그 늑대들도 모두 나처럼 신이 되었으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에이렐 씨에겐 에이렐 씨의 일정이 있을테니, 노래를 듣고 싶다면 제가 찾아가는 것이 맞을 겁니다! 언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제가 근처에 있으면 구경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것을 여쭤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에이렐 씨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오래 전 벗을 그리거나, 그 벗의 무덤에서 불러줄 수 있는 노래 같은 것이 있다면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래를 잘 알고 계시기에 혹시 아시는가 싶어서 여쭙겠습니다."
물론 내가 잘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알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래 가끔은 말이지...
//일상이라는 것은 굳이 길게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성의없는 것만 아니면 빨리 끝내도 좋고 길게 이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이제는 당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의 수명은 이미 신이 된 나와는 달리 길지 않다. 그렇기에 이제 내가 이끌던 무리 중에서 살아있는 이는 없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 뿐. 가끔 호은골로 내려가, 그 무리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긴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와서 다시 그들을 볼 수도 없고, 내가 신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긴 하지만...
"1:1 교습이라. 그러기에는 에이렐 씨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저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편은 아니어서... 그냥 어떤 노래가 있는지만 가르쳐주시면 제가 스스로 찾아서 연습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묻는 입장인데 교습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이기에 그것은 미안해서 내가 요청할 수 없었다. 신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노래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 그저 어떤 노래가 있는지만 알아도 충분했다.
아, 리스였나. 그녀를 본 령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그녀라면 굳이 검에 손을 댈 필요도 없다. 아니, 궁 안의 시녀를 해한 죄로 쫓겨날 수도 있다. 령은 슬그머니 날이 선 시선을 감추었다. 오히려 칠흑같은 밤하늘을 닮은 눈에 담긴 것은 온정이었다. 령은 천천히 리스에게로 다가갔다. 리스는 흙이 온 몸에 묻은 모양새였다.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한건가? 령은 손을 뻗어 리스의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심히 따스해보였다.
"리스였군요. 미안합니다. 궁 안에 침입자가 있는 줄 알고 너무 날이 서게 대응해버렸군요. 많이 놀라셨나요?"
령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리스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어디 다친 구석이라도 있나 싶은 모양새였다. 그것도 당연하다. 리스는 흙을 온 몸에 뒤집어쓴 모양새였으니. 령의 표정에 걱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것을 운반하던 참이었습니까?"
령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상자는 가녀린 리스가 들기엔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보였다. 령은 상자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리스가 이 상자를 들기에 알맞지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령은 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상자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령이 리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령은 리스가 저 무거운 상자를 혼자서 들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새였다. 그도 아니면 굳이 남의 일에 참견할 리 없었으니까.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어보았다. 가사를 중얼중얼, 읊어보기도 하면서 나름 그 노래가 무엇인지 기억해보기로 했다. 확실히 가사는 작별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위기도...너무 어둡지 않은 것 같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 노래라면 어떻게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로 집에 가서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열심히 연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으로 갚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신과로 만든 주스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로서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래보여도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이기에, 그 정도의 힘은 있었다. 물론 만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근처의 그 어떤 신보다 강력한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난. 그렇기에 에이렐 씨를 바라보면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령 님의 눈빛이 달라지셨어요. 자신이 정체를 밝히자, 밤하늘 같은 검은빛의 령 님의 눈동자에는 이제 매서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대신 따스함이 깃돌았다. 그러한 분위기 변화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읽어낼 수 있었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안도감 반, 기쁨 반으로 살며시 웃어보였다.
이어서 령 님은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그대로 자신의 몸에 욷은 흙을 털어주셨다. 그 다정한 손길에 그제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의 현재 몰골을 파악하고는, 한 박자 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멍한 두 눈동자는 살짝 커진 채.
"...아니요. 령 님께서는 령 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신 것 뿐이신걸요. 저는 많이 놀라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령 님. ...저야말로 령 님께 죄송합니다. 이런 몰골이나 보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꼼지락꼼지락, 사과를 든 손가락이 괜히 작게 움직였다. ...'신' 님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버리다니... 어쩌면 좋죠, 저? 너무 창피하고 죄송해요... 그래도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주는 령 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따스해, 그것만으로도 모든 아픔이 다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신' 님의 따스하신 걱정.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두려운 행복함.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렇기에 자신은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아 령 님께 배시시, 작게 웃어보인다. ...령 님께서 저를 걱정해주시는 것 같아요. ...너무 기뻐요...!
그렇게 행복으로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다, 이내 이어지는 령 님의 말씀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서 령 님께서 손을 내미시자, 멍한 두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황급히 상자를 품 속에 꼬옥, 끌어안았다. 동시에 드물게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개까지 열심히 도리도리, 좌우로 흔들면서.
"괘, 괜찮습니다! 감히 령 님께 저의 일을 드릴 수는 없는걸요...! ...어차피 수라간까지만 가면 되니까... 가깝습니다. 령 님께서도 바쁘고 힘드실테니까... 제 일까지 무겁게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말씀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령 님. ...그 친절만으로도 저는 기뻐요."
헤실헤실,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상자를 꼬옥 끌어안은 두 팔은 풀지 않았지만.
리스는 자신에게 환히 웃어보였다. 뭐가 좋다고 그리 웃어대는 걸까? 이렇게 험한 몰골을 해놓고... 령의 표정이 살짝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리스에게 남은 마지막 흙먼지까지 다 털어내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죄송하다라... 자신이 그녀의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먼저 위협한 것은 령이니 그녀에게 잘못이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녀는 리스가 흙투성이를 하든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든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다. 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리스. 제가 먼저 위협했으니 저에게 잘못이 있는 셈이지요. 사과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령은 괜찮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도 리스가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저의 퍼런 사슬에 놀라 울음이라도 터뜨려버린다면... 그것은 싫었다. 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날카로운 기색만 좀 감췄으면 좋으련만... 무구를 잡은 자 특유의 서슬 퍼런 기색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령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그 예민함으로 가끔 저를 대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지.
괜찮다라... 어쨌든 그녀는 수라간으로 가는구나. 령은 무심하게 눈을 한 번 깜박여보였다. 다음 순간 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납득할 수 없었다. 궁 안의 궁녀들이 얼마나 잡일에 시달리는지는 자신도 직접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리스는 자신의 일까지 얹어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가? 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눈에 결단력이 돌았다.
"제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궁 안에 침입자들이 있는지 어슬렁대는 일밖엔 없습니다. 궁 안에 침입자가 없다면 저는 그냥 노는 거나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리스는 아니잖습니까? 궁 안의 시녀들이 얼마나 바쁜지는 할 줄 아는 일이 검 휘두르는 일 밖에 없는 저조차도 보고 들은 게 있을 정도입니다. 리스, 부디 저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령 님의 표정은 왜인진 잘 모르겠지만 한순간 살짝 안타까운 빛이 어른거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유를 차마 직접 여쭤보지는 못 했다. ...'신' 님의 깊은 생각을 제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예요. 다만, 령 님께서 웃어주시길 바랬다. 령 님께서 행복하시길 바랬다. 그렇기에 그저 배시시, 작게 웃었다. 령 님의 이어진 말씀에도 여전히.
"...령 님께서는 그렇게 위협을 하시는 것이 일이자 임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령 님께서야말로 저에게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령 님께서는 잘못 하신 거, 하나도 없으시니까요. ...오히려 덕분에 령 님을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저는 기쁜걸요."
진심이었다. 만약 령 님께서 그렇게 경계의 목소리를 내시지 않았다면, 자신은 령 님을 만날 수 없었겠지. ...애초에 위협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위협으로 자신이 울어버릴 일은 결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위협의 주인이 령 님이시라면, 더더욱 미소만이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야, 령 님께서는 이렇게나 다정하시고 따스하신 '신' 님이셨으니.
하지만 그러한 령 님께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시려는 것은 황급히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야, 이것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버려 자신이 처리해야만 하는 일. 그런데도 이것에 '신' 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그건 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애써 고개까지 저었건만, 결국 령 님의 눈에는 결단력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강하지만 따스한 목소리. 그러한 령 님의 다정한 청에, 결국에는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령 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희미하게 웃으면서.
"......령 님께서는 노시는 게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일이시라는 것은 저도 조금은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낮추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령 님. 령 님의 아름다운 검술 실력에 대한 이야기는 저 역시도 자주 들어왔었거든요. ...신경 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조금만... 조금만 부탁 드릴게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 펴고는 이내 꼬옥 안고 있던 상자를 령 님께 천천히 건네었다. 하지만 결국 상자 위에 있던 과일들과 채소들을 덜어내어 자신 역시도 품에 안아들었다. 조금이라도 령 님의 짐을 가볍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품 안 가득히 음식 재료들을 안아들고는, 령 님을 바라보며 기쁜듯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령 님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덕분에 자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라... 그 말에 령의 눈빛에 깃든 안타까움이 조금은 물러갔다. 결국 자신도 이성과 감정을 가졌으니 이런 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가? 조금 씁쓸하면서도 기뻐서 령은 리스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혹여 저 때문에 리스의 마음이 상할까봐 걱정을 했답니다."
령은 리스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리스는 제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역시 리스 또한 신이라는 건가. 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람결에 방울이 흔들리며 딸랑 하는 소리를 냈다. 령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방울은 여전히 흔들리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리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령은 리스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아름다운 검술 실력이란 말에 슬쩍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제 검술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단 것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아름답다'라는 말로 치하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령은 얼떨떨한 듯 슬쩍 웃어보였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렇게 표현하는 자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술 실력을 칭찬해줘서 고마워요, 리스. 실은 제 검술에 대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몇 없어서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드는군요. 그리고 죄송해할 거 없습니다. 리스를 돕는 건 순전한 제 의지니까요."
령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품 안에 한가득 음식 재료를 드는 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령은 상자를 안아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수라간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걱정은 안해도 될 터였다.
...아. 령 님께서 웃어주셨어요. 물론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섞이신 것 같은 웃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냥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령 님의 말씀에, 드물게 곧바로 입술을 열었다. 고개까지 도리도리, 작게 저으면서.
"저는 절대로 령 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저는 령 님께서 이리도 다정하고 친절하신 신 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믿고 있으니까요. 감히 령 님 때문에 저의 마음이 상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헤실헤실, 호의와 신뢰 가득한 미소가 얼굴에 꽃피웠다. 자신이 어떻게 감히 '신' 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겠는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상해온 적 없이, 호의와 사랑을 베풀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령 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동경스러운 숭배심이 차오를 뿐.
딸랑딸랑, 청아한 령 님의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슬쩍 웃으시는 령 님께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이어서 들려오는 령 님의 목소리. 강하면서도 다정한 그 목소리에, 의아한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신가요? 저는 그러한 말씀을 종종 들어왔답니다. 비록 저는 령 님의 검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령 님께서는 아름다운 신 님이시니, 저도 분명 령 님의 검술도 아름다우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말이예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은 그저 미소로 삼키며, 령 님께 건네드린 상자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내어 품 안에 한가득 안았다. 그리고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수라간까지는 다행히 가까운 거리였기에 의외로 금방 도착하게 되었다. 한 손으로는 음식 재료들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닫혀 있는 문을 어떻게든 끙끙, 힘겹게 열어 수라간을 활짝 공개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릴 뻔한 음식 재료들을 황급히 손을 다시 가져와 간신히 막은 뒤, 령 님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상자는 저 부뚜막 옆에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령 님? 여기까지 이렇게 걸음 하시게 해버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꼭 은혜를 갚아 보답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