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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대회에 참가했던 령은 굳이 은호의 연락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령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앉아 말없이 음식을 받아들 뿐이었다. 그나저나 은호님은 이번엔 또 무슨 일을 하시려고 저러는 것일까? 령은 슬며시 궁금증이 들었지만 일부러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신은 관전하는 게 가장 편했으므로.
요리 대회라, 언젠가 개최된다고 듣기는 들었으나 마침 루오와 작은 전쟁을 벌이던 터였는지라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다. 전쟁의 끝에 그 망할 까마귀고기를 잘 조져놓기도 했고,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하여서 돈을 잃는다든지 상심하든지 하는 손해도 일체 보지 않았으니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그저 어찌어찌 잘 흘러갔겠거니 생각하며 그대로 잊어버렸던 참이다. 시원한 마루에 누운 채 덥고도 아늑한 아라의 공기에 슬슬 잠이 들려고 했는데...
"...아미친깜짝이야!!!!"
벌떡. 순식간에 상체가 일으켜지고 그닥 곱진 않은 말이 단숨에 울렸다.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텔레파시를 보내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눈살을 역력하게 찌푸렸지만 일단 하는 말은 들었다.
"...아...아아, 그래."
아라의 해변가로 오라, 이 말씀이시지. 저의 관리 지역에서 무언가를 하다니, 이건 필시 대가를 받아내야한다...라는 생각이었지만 라온하제 그 자체의 지배자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하다면 어떤가.
ㅡ대가는 필시 받아낸다 이 요망한 요호妖狐야!!!!!!!!
텔레파시로 도로 시끄럽게 소리지른 것은 낮잠을 방해했음에 대한 보복이 확실했다. 고막이 미친 듯이 울릴 게야.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여 낄낄 사악하게 웃다가 두 소매를 모으고 삽시간에 바다로 이동했다.
"후후. 다 모였더냐? 이상한 꿍꿍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더냐. 난 그저 재밌게 놀자고 부른 것밖에 없느니라."
밤프의 말에 대답을 한 후에, 그녀는 태연하게 식사를 하면서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숫자가 쓰여있는 숟가락이 떠올랐고 그것은 통에 모여들었다. 이어 그녀는 모두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자. 지금부터 왕게임이라는 것을 해보겠느니라. 이건 인간계에서 꽤 유명한 놀이인 것 같아서 나도 해보고 싶었느니라. 별 거 없느니라. 여기 왕이라고 쓰여있는 숟가락을 뽑으면, 다른 번호에게 그 어떤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느니라. 자고로 번호로 불러야하니까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지어다. 이런 간단한 놀이니라. 이해가 되었느냐?"
싱긋 웃으면서 은호는 숟가락이 담긴 통을 내려놓은 후에 모두를 바라보면서 웃어보였다.
"자. 뽑아보거라. 누가 왕인지 보자꾸나."
// 총 5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반응레스는 쓰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바로 뽑아오겠습니다!
(회상) 백아: 사..사우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루오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덜너덜) 루오: ?! 무, 무슨 일이냐. 왜 그러는가? 사우: ????? 왜 그러니, 백아야? 백아: 학교에서 왕게임을 했는데....못볼꼴 다 보였어요 짜라빠빠도 추고 쫄쫄이도 입고 으하으하아아앙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우&루오: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머리의 더듬이가 올곧게 펼쳐지며 흔들흔들 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것을 대놓고 어필해는 것 처럼 보이기도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이 뽑은 막대를 돌려 그들에게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걸 보여주며 손가락을 튕겨 커다랗고 새빨간... 토마토 인형탈 두 개를 만들어냈다.
"자! 2번과 4번은 이 인형탈을 입고 위의 영상과 같은 춤을 추거라!"
제4의 벽을 돌파해 손가락으로 이번 레스의 꼭대기에 자리잡고있는 영상을 손가락으로 척, 가르켰다?
이를 한껏 악물고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가 그 새를 억지로 비집고 나왔다. 두 손으로 삿갓을 푹 누른 채 얼굴을 한동안 가리다가 "에라이 모르겠다!!!"라고 소리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도중에 밤프에게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도 서글서글하게 지어보였다. 삿갓을 벗고 그 대신...그래...그래, 토마토 인형탈을 썼다. 거슬림을 피하기 위해 긴 머리카락은 모두 하나로 묶어내렸다. 그러고선 잠깐 가만히 있다가...
그는 내심 기대를 하며 잔뜩 집어들었던 토마토를 입힌 팝콘을 먹으려다가 가온의 너무나도 열혈적이다못해 땀내까지 나는 것 같은 춤을 멍하니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팝콘 통을 바닥에 떨어트려 쏟아버렸다. 그에게 부끄러워 몸을 베베꼬는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마치 공사장의 인부와도 같은 후덥지근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결국 내뱉은 말은..
"너무 완벽하다못해 이 토마토들이 감명을 받고 스스로를 갈아버리기 시작했군."
그는 토마토를 신통술로 조작해 믹서기에 집어넣고 순식간에 갈아버렸다. 끄아아아악 복수하겠다 신 놈들- 갈아져 맛있는(?)쥬스가 되어버린 토마토를 컵에담아 들이키던 그는 사우를 바라보고서야 아주아주아주 만족스러운듯 미소를 지으며 접시위에 올려져있던 방울토마토를 토마토 팝콘 삼아 입에 집어넣어 깨작깨작 씹어먹었다.
4번과 5번. 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크게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웬 백발이 풍성한 노인이 닭을 안고있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그가 변신한 모습일테지. 그는 푸른 닌자복을 입고 도망치려던 백호 앞에 우뚝 선 채 닭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마저 달라진 채 말을 내뱉었다.
"그걸 내놔라! 아니면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리고 분명, 혼자서 어떡할 테냐고 묻는 백호의 다음 대사가 들려온 뒤에는...
"캇, 이 몸이 혼자라고?"
그가 닭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 오⬆️⬆️⬆️오↗️⬆️⬆️⬆️⬆️⬆️"
[성스런 요들]
"자연의 힘을 부리는 자가 길을 막아섰다면 운이 다했다는것도 알아야지. 그리고 내 걸음걸이와 이 눈빛만으로도 자네는 이제 곧 맹렬하게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것도 알아야지!"
령은 몸이 굳어져버렸다. 그러니까... 방금 본 영상의 춤을 자신이 춰야한단 말인가? 령은 할 수만 있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 할 수는 없지. 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섬주섬 치맛자락을 갈무리하며 모두의 앞에 나섰다.
"그럼... 춤 추겠습니다."
령은 모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Beep Beep I'm a sheep. Beep Beep I'm a sheep.... 노랫소리가 들렸고 령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춤을 추었다. 중간에 소화하기 좀 힘든 동작도 있었지만ㅡ예를 들자면 상체를 바닥에 붙이고 하체는 공중으로 띄우는 그 동작ㅡ어떻게든 잘 소화 해냈다.
"휴..."
춤을 다 춘 령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던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왕이 선언되자마자, 잠시 그 얌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잔인한 미소가 스쳐가는 것을 보았는가? 워낙 한순간이라, 아마도 대부분의 신들은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일단, 머리 좀 식히도록 하자... 3번은 내가 주는 초콜릿을 먹고 '앞 집 팥죽은 붉은 팥 풋팥죽이고 , 뒷집 콩죽은 햇콩단콩 콩죽,우리집 깨죽은 검은깨 깨죽인데 사람들은 햇콩 단콩 콩죽 깨죽 죽먹기를 싫어하더라.'...라고 말 하기만 하면 돼. 쉽지?"
완벽한 발음으로 말해놓고 표정은 굳은 그대로 변화가 없었다. 못 외울 것을 고려했는지, 친절하게도 메모지를 건네어 주더라. ...아무래도 문제는 초콜릿인데... 설이 어디선가 가져온 초콜릿은, 작은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 전형적인 초콜릿 색의 한마디로 평범한 조각 초콜릿이였다
그럼 참가자는.... 에이렐주, 리스주, 아사주, 밤프주. 4명이 되는군요! 룰은 간단합니다..!! 기본적으로 질문을 하는 이가 다이스를 굴리건, 특정인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건...그것은 자유입니다. 아무튼 질문을 합니다. 그럼 지목된 이는 답을 하고, 그 답을 한 이가 질문을 합니다. 단..여기서 한 번이라도 답을 한 이는 질문대상에서 빠지게 됩니다. 즉...예를 들어서 가온이가 에이렐에게 질문을 하면 에이렐은 답을 했으니까 한 턴이 다 돌아가 기전까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진 못합니다. 그런 방식입니다..! 그럼...처음 질문자를 골라볼까요? 이번엔 은호, 누리, 가온, 백호. 4명이 다 나옵니다..!!
"응... 이건 역시 뒹굴뒹굴 굴려야할지도." "이상형은 어떤 타입이야? 머리가 길다거나,눈매라던가 색이라던가. 단신. 장신? 자세하게, 세세하게 대답해줘." 단 리스가 걸리면 라온하제에서 만난 신 중에 가장 신님에 가까운 이를 대답해줘어. 라고 말합니다. 빙글빙글 돌려서 나온 대상자는..
제일 좋아하는 신이 누구냐라...그것에 대해서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은호님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너무 재미없는 대답이니까. 그렇기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한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은호님과 누리는 제외할게. 이런 답을 바란 것은 아니겠지? 내가 좋아하는 신은 가온이. 저래보여도 상당히 귀엽거든. 단순하긴 해도 놀리면 얼마나 재밌는데. 후훗. 무엇보다 일도 열심히 하고 내 직속 후배니까 말이야. 선배가 후배를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해. 어때? 사랑이라던가 그런 조건은 없었지? 후훗."
멍하니 다른 신 님들의 질문과 대답을 경청하던 중,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몽롱한 두 눈을 깜빡깜빡였다. 들려오는 질문은 다름 아닌, 라온하제의 지역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냐는 것. 그에 당연히 다솜을 제일 먼저 떠올렸지만, 이내 살고 있는 곳은 제외라는 말씀에 느릿하게 머릿속에서 다솜을 지워냈다. 그리고 잠시 으음...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하며 헤실헤실, 작게 웃어보였다.
"...저는... 당연히 다솜이 제일 마음에 들지만, 다솜을 제외한다면 비나리가 제일 좋아요. 비나리의 폭포가 있는 명소 풍경이 너무 예뻤거든요. ...그래서 다음 번에도 또 찾아가고 싶어요."
...조만간 말이예요. 조용히 덧붙이면서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면 이제 다음 질문을...
하지만 차마 신 님 한 분을 콕, 찝을 수가 없어, 살짝 난감한 듯이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두 눈을 꽈악 감고 두 손바닥을 펼친 채, 그대로 아무 방향을 향해 손바닥을 공손히 내밀었다.
"...신 님께서는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나 가장 가지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라. 나..?"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나 가장 가지고 싶은 일이라는 물음에 난감한지 아니면 기쁜 건지. 속을 모를 미소를 지으면서
"으음..하고싶은거.. 하고싶은거.." "아. 아무것도 안하는 거?" 뭔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완전한 침묵과 완전한.. 음.. 그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가질 순 없거든! 이라고 생글생글 웃습니다.
"그게 전자라면 후자는.. 궁극적인 모든 것의 지혜를 포함한 모든 일..이겠지? 모든 걸 갖고 싶고, 가질 수 없는 것조차도 가지고 싶고, 내가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르는 것까지도 다 가지고 싶어. 그걸 완전하게 만들고 싶기도 하고 그게 일의 한도라면 전부 다... 말이야!" 묘하게 눈이 반짝거리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기는 없는 게 아사답네요. 아. 아닙니다. 더 말하는 건 안돼요~ 모순적인 답변을 마친 다음에 내가 또 질문해야 해? 라고 말하는군요.
사랑의 의미로 사귀고 싶은 이에게 어떤 식으로 관심을 표하고 싶냐니. 그것에 대해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이에게 어떻게 관심을 표할거냐니..그러니까, 이건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은걸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글너 경험도 없었고, 지금까지 누군가를 짝으로 둔 적도 없었고, 신이 되기 전, 그러니까 늑대로 살 때도 알파 늑대로서 무리를 이끌긴 했지만 저의 짝인 늑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좋아하는 이가 생긴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아주 좋은 집을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물론 늑대일 때는 그것이 아늑한 굴이겠지만 여기서는 굴을 팔 수도 없으니까 집을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그렇게 말을 한 후에, 이어 조금 고민을 하다가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어쩌면 미리내 지역에 있는 얼음으로 조각상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선물할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것밖에는 안 떠오릅니다! 짝이 없는 늑대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머리카락마다 있는 3개의 꽃=메귀리의 작은 꽃 머리 색=메귀리 꽃색 순서를 반전 시켜둔 것(메귀리는 노란 색 작은 꽃인데 그마저 초록색 이파리에 둘러쌓여있습니다) 갈라진 머리 끝=메귀리 호영이란 부분의 특징 끝이 2~4갈래로 나뉘어져 있음 상체의 절벽=메귀리 꽃이 달려있는 줄기의 특징인 '옆으로 납작하다'
>>319-320 앗... 설이는 어째서...(동공대지진)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네, 전 괜찮아요!ㅋㅋㅋㅋ 안 그래도 세설주께서 많이 바쁘고 힘들어 보이셔서 좀 고민했었는데... 사과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세설주! 일상 돌리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함께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XD
>>337 하지만 누리의 비설은 매우 안타깝게 잘 짜여있을 거라 믿고, 은호 님과 가온이, 백호의 이야기도 좋다고 생각하는 걸요! XD ㅋㅋㅋㅋ사실 다른 분들을 보면서 어떻게 떡밥을 풀어나가야 하는지 그런 걸 공부하는 기분이랍니다. :) 각자의 이야기가 개성 넘쳐서 재밌기도 하구요.ㅋㅋㅋ
>>342 ㅋㅋㅋㅋ기대할 겁니다! 예전부터 극장판 이야기를 말씀해오신 리온주이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누리의 이야기는 어떨지 궁금하니까요. :) 은호 님은 예전에 나왔고, 가온이는 독백으로 얼추, 백호도 전 비나리의 관리자라고 나왔는데, 누리는 크게 나온 것은 없으니까...(끄덕)
>>358 으음...일단...에이렐주..이건 확실하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에이렐이 인간들 사이에 평판이 안 좋은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만... 에이렐이라는 신 자체를 의미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애초에 신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에겐 감춰져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대다수는 신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요. 극소수를 제외하면 말이에요. 혹시나 싶어서 이야기드려요.
최초에는 메귀리가 있었다. 그 메귀리는 자그마한 꽃을 피웠고, 그 꽃을 보고 감동한 한 신이 그 꽃에 자신의 신통력을 나누어주었다. 그것이 메귀리 신이 탄생한 자그마한 순간이었다. 메귀리 신이 태어나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 곳에는 한 신이 인자한 얼굴로 자기를 보고있었다. 그 시기는 아직 '인류'라는 종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이라고만 기억되는 시기였다. 아직 꽃의 형태인 메귀리 신에게 신통력을 나눠준 동물신은 이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그리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 한 유인원 무리가 나무에서 쫒겨나 2족 보행을 시작했다. 훗날 그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 불리우겠지. 메귀리 신은 그들을 지켜봤다. 그 유인원 무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형체가 구부정한 허리에서 일자 허리로 점점 퍼지며 수로 자기보다 빠르지만 약한 이들을 몰아세워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유인원 무리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그 무리는 점점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구석기 시대-훗날 그리 불리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메귀리 신은 그들에게 흥미를 느껴 꽃 형태로 티나지 않게 움직여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장은 놀라웠다. 비록 이동하면서 지내는 생활이기는 하나 동굴을 하나 장악해 그들보다 강한 육식 동물들도 절벽에 몰아 떨어트려 그 고기를 먹는 그야말로 다른 동물들이 한 적 없는 사냥법에서부터, 벽에 뭔가를 '그려넣는' 것을 보며 메귀리 신들은 그들에게 눈을 뗄수없었다. 거기다 그들은 우연히 내려친 벼락에서 '불'을 건져 점점 만물 위에 서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중 한명이 '씨를 심어 그 결과물을 취하자'라고 말하며 그들의 도구를 갈아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 메귀리 신은 그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씨앗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발달하며 결국 '계급 사회'와 '청동기'라는 첫 문명이 시작되는 것을 메귀리 신은 보게되었다. 또한 메귀리 신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도 이때쯤 시기이다.
오늘은 시간을 내서 비나리 지역의 광장으로 나왔다. 내가 이곳으로 나온 이유는 다름아닌 청소를 하기 위함이었다. 비나리 지역의 광장은 수많은 신들이 쉬러 오는 장소였다. 물론 무지개가 피어나는 폭포처럼 명소는 아니었지만 이곳도 오는 신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비나리 지역을 관리하는 내가 청소를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답게 서 있는 은호님과 누리님의 모습을 조각한 얼음상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내 신통술을 이용해서 저 얼음상은 녹지 않게 하고 있다. 관리자의 힘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니까. 아무튼 오늘도 멋지게 반짝이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얼음 조각상을 바라보면서 나는 경례를 올렸다.
"오늘도 은호님과 누리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어 나는 신통술을 써서 빗자루를 꺼냈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하루에 두 번은 깨끗하게 청소를 하지만 오늘은 정말 제대로 대청소를 하듯이 청소를 할 생각이었기에 열심히, 열심히 나는 광장의 바닥을 쓸었다. 다행히 그렇게 넓지 않았기에 충분히 혼자서 청소가 가능했고,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날씨도 나름 시원하니 무엇이 두려울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나는 잠시 빗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느 한 신의 모습이 보였다. 전에 모두가 놀고 있을 때 본 적이 있는 신이었다. 이름이 에이렐이었던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나는 절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멜로디에 맞춰서 빗질을 하고 있었다.
"아..아차!"
나도 모르게 하는 그 행동에 깜짝 놀라 제대로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지만, 다시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노랫소리가 끝날 쯤에, 나는 비를 여전히 잡고서, 두 손으로 크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좋은 노래 잘 불렀습니다! 비나리 광장에서 이런 멋진 노래를 들려주시다니!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로서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이름이..아마 에이렐 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뒤이어서 나는 신통술을 이용해서 집에 있는 신과로 만든 주스가 담겨있는 병을 내 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면서 이야기했다.
"신과로 만든 주스입니다! 입맛에 맞는 달콤함이 느껴질테니 한번 먹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천하에 누구도 겨룰 자가 없다던 무인이 있더랬지. 길 가던 사람들은 령이 검을 뽑아들면 감탄사부터 내질렀더랬다. 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 하며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검하며... 아, 쓸데없는 생각이다. 령은 고개를 내리저었다. 지금은 자신이 받은 칭찬이 아니라 다른 걸 생각해야만 했다. 령은 이 궁의 침입자를 배제하고 궁을 지키는 무인이었다. 그러니 궁을 지키는데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업무 중 다른 생각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필시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일테지.
궁 안을 가르던 령의 발소리가 멈췄다. 필시 인기척을 느낀 것일테다. 령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디인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여기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령은 제 옆을 돌아보았다. 이것은 검사로서의 직감에 의존한 것일 뿐이지만 왠지 나쁜 이 같지는 않았다. 아마 이 궁 안의 시종같군. 령은 그리 생각하고 검으로 향하던 손을 막았다.
"게 누구십니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높은 목소리가 령의 입에서 나왔다. 령은 여전히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마 상대방이 수상한 기색을 보인다면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쟈쟈쟝~ 선레를 써왔습니다!
"취미 생활이라고 해도 저는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 이곳에서 해준 멋진 공연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할 의무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감사를 표하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달달하니 좋다는 그 말에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번에도 신과 열매는 재배가 잘 되었구나. 달달하니 좋다는 그 말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신과가 열리는 나무를 기르는 과수원을 하니,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지간하면 신과는 시들거나, 맛이 없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절대적인 케이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신과의 맛이나 평가는 민감한 편이었다. 그것은 내가 과수원을 잘 운영하는지, 내가 나무를 잘 기르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니까. 물론 민감하다고 해도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 어찌되었건 그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었으니까.
"이 비나리 지역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산책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놀러 오셨습니까?"
내가 아는 바, 그녀는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이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인 내가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관리자로서, 비나리 지역에 사는 신들은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까. 물론 다른 지역에 사는 신까지는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좋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 노래를 은호님이나 누리님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모셔와야... 는 안되겠군요. 은호님과 누리님은 지금 모녀가 나란히 다솜의 벚꽃나무를 보러 가셨으니 제가 방해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두 분이 에이렐 씨의 노래를 들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정말로 고운 노래였다. 물론 나는 노래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노래가 상당히 아름답고 잘 부른 노래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당장 내가 노래를 부르면...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에, 손에 쥔 빗자루를 더욱 꼬옥 쥐면서 곧 들려오는 질문에 대답했다.
"네!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이자 은호님의 보좌를 맡고 있는 늑대 수인 신인 가온입니다! 이후 잘 부탁하겠습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는 전의 놀이에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관리자이기에 나름 유명한 것일까. 어느 쪽이건 좋았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꾸벅 인사를 한 후에, 다시 에이렐 씨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노래를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기를 바래야겠습니다!"
작은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한 손으로 훔쳐내면서. 그리고는 다시 "...끄응..." 하고 한 박자 늦은 소리를 내면서 땅 바닥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각종 과일과 채소, 그리고 그 밖에도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가득히 들어있는 상자는 보기만 해도 제법 묵직해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혼자서 끙끙거리며 들어올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느릿한 발걸음을 떼었다. 신통술을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그런 신통술은 아직 알 지도 못 하고, 무엇보다 저는 '신' 님이 아니니까 그런 능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걸요. ...그러니까...
하지만 역시 약한 몸으로 너무 무리하게 많은 것들을 옮기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결국 커다란 상자에 시야가 가려져, 발 밑에 있던 돌부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거기에 발이 탁, 걸려버렸다. 그리고 이내 몸이 앞으로 엎어짐과 동시에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재료들. 그에 순간 멍한 두 눈동자가 약하게 떨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황급히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과 얼굴에 가득히 묻은 흙은 미처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재빨리 상자 안에 과일들을 다시 흙을 털어 주워 담기 시작했다. 드물게 빠른 몸짓으로.
그렇게 재료들을 뒤따라 가면서 주워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궁 안의 어느 인적이 드문 숲 속. 제법 깊숙한 그 곳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나무들의 그림자에 가려 마치 침입자 같은 분위기를 풍겨버렸고, 그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 한 채 이내 들려오는 높은 목소리에 한 박자 늦게 몸을 움찔, 한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의... ...령 님...?
안도감 반, 놀라움 반의 마음으로, 두 손으로는 흙투성이 사과를 든 채 황급히 나무 그림자 밖으로 종종, 걸어갔다. 그리고 꾀죄죄한 몰골로 허리를 꾸벅, 숙여 정체를 밝혔다.
"...죄, 죄송합니다...! 궁에서 일하고 있는 궁녀, 리스입니다. ...령 님을 놀라게 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음식들을 주워담다보니 이런 곳까지 와버려서 그만..."
"당연한 겁니다! 은호 님이 저에게 관리자를 맡기셨고, 저를 믿고 계시니 열정적으로 생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 자리는 은호 님이 저를 신뢰한다는 증표나 마찬가지입니다!"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병을 받아들었고, 그것을 신통술로 다시 집으로 보냈다. 참으로 신통술이란 신기한 힘이었다. 신이 되기 전에는 이런 것을 하려면 우선 입으로 문 후에 열심히 굴까지 가고 거기서 또 먹이를 찾은 후에 물고 다시 돌아와야 했는데 이런 힘이 있으니 상당히 편리했다. 나의 일족이었던 그 늑대들도 모두 나처럼 신이 되었으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에이렐 씨에겐 에이렐 씨의 일정이 있을테니, 노래를 듣고 싶다면 제가 찾아가는 것이 맞을 겁니다! 언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제가 근처에 있으면 구경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것을 여쭤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에이렐 씨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오래 전 벗을 그리거나, 그 벗의 무덤에서 불러줄 수 있는 노래 같은 것이 있다면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래를 잘 알고 계시기에 혹시 아시는가 싶어서 여쭙겠습니다."
물론 내가 잘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알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래 가끔은 말이지...
//일상이라는 것은 굳이 길게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성의없는 것만 아니면 빨리 끝내도 좋고 길게 이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이제는 당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의 수명은 이미 신이 된 나와는 달리 길지 않다. 그렇기에 이제 내가 이끌던 무리 중에서 살아있는 이는 없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 뿐. 가끔 호은골로 내려가, 그 무리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긴 하지만 그뿐이다. 이제와서 다시 그들을 볼 수도 없고, 내가 신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긴 하지만...
"1:1 교습이라. 그러기에는 에이렐 씨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저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편은 아니어서... 그냥 어떤 노래가 있는지만 가르쳐주시면 제가 스스로 찾아서 연습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묻는 입장인데 교습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이기에 그것은 미안해서 내가 요청할 수 없었다. 신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노래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니, 그저 어떤 노래가 있는지만 알아도 충분했다.
아, 리스였나. 그녀를 본 령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그녀라면 굳이 검에 손을 댈 필요도 없다. 아니, 궁 안의 시녀를 해한 죄로 쫓겨날 수도 있다. 령은 슬그머니 날이 선 시선을 감추었다. 오히려 칠흑같은 밤하늘을 닮은 눈에 담긴 것은 온정이었다. 령은 천천히 리스에게로 다가갔다. 리스는 흙이 온 몸에 묻은 모양새였다.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한건가? 령은 손을 뻗어 리스의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심히 따스해보였다.
"리스였군요. 미안합니다. 궁 안에 침입자가 있는 줄 알고 너무 날이 서게 대응해버렸군요. 많이 놀라셨나요?"
령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리스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어디 다친 구석이라도 있나 싶은 모양새였다. 그것도 당연하다. 리스는 흙을 온 몸에 뒤집어쓴 모양새였으니. 령의 표정에 걱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것을 운반하던 참이었습니까?"
령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상자는 가녀린 리스가 들기엔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보였다. 령은 상자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리스가 이 상자를 들기에 알맞지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령은 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상자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령이 리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령은 리스가 저 무거운 상자를 혼자서 들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새였다. 그도 아니면 굳이 남의 일에 참견할 리 없었으니까.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어보았다. 가사를 중얼중얼, 읊어보기도 하면서 나름 그 노래가 무엇인지 기억해보기로 했다. 확실히 가사는 작별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분위기도...너무 어둡지 않은 것 같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 노래라면 어떻게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로 집에 가서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열심히 연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으로 갚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신과로 만든 주스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어보았다.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로서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래보여도 비나리 지역의 관리자이기에, 그 정도의 힘은 있었다. 물론 만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근처의 그 어떤 신보다 강력한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난. 그렇기에 에이렐 씨를 바라보면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령 님의 눈빛이 달라지셨어요. 자신이 정체를 밝히자, 밤하늘 같은 검은빛의 령 님의 눈동자에는 이제 매서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 대신 따스함이 깃돌았다. 그러한 분위기 변화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잘 읽어낼 수 있었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안도감 반, 기쁨 반으로 살며시 웃어보였다.
이어서 령 님은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그대로 자신의 몸에 욷은 흙을 털어주셨다. 그 다정한 손길에 그제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의 현재 몰골을 파악하고는, 한 박자 늦게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멍한 두 눈동자는 살짝 커진 채.
"...아니요. 령 님께서는 령 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신 것 뿐이신걸요. 저는 많이 놀라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령 님. ...저야말로 령 님께 죄송합니다. 이런 몰골이나 보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꼼지락꼼지락, 사과를 든 손가락이 괜히 작게 움직였다. ...'신' 님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버리다니... 어쩌면 좋죠, 저? 너무 창피하고 죄송해요... 그래도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주는 령 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따스해, 그것만으로도 모든 아픔이 다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신' 님의 따스하신 걱정.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두려운 행복함.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렇기에 자신은 괜찮다는 메시지를 담아 령 님께 배시시, 작게 웃어보인다. ...령 님께서 저를 걱정해주시는 것 같아요. ...너무 기뻐요...!
그렇게 행복으로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다, 이내 이어지는 령 님의 말씀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서 령 님께서 손을 내미시자, 멍한 두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황급히 상자를 품 속에 꼬옥, 끌어안았다. 동시에 드물게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개까지 열심히 도리도리, 좌우로 흔들면서.
"괘, 괜찮습니다! 감히 령 님께 저의 일을 드릴 수는 없는걸요...! ...어차피 수라간까지만 가면 되니까... 가깝습니다. 령 님께서도 바쁘고 힘드실테니까... 제 일까지 무겁게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말씀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령 님. ...그 친절만으로도 저는 기뻐요."
헤실헤실, 희미하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상자를 꼬옥 끌어안은 두 팔은 풀지 않았지만.
리스는 자신에게 환히 웃어보였다. 뭐가 좋다고 그리 웃어대는 걸까? 이렇게 험한 몰골을 해놓고... 령의 표정이 살짝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리스에게 남은 마지막 흙먼지까지 다 털어내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죄송하다라... 자신이 그녀의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먼저 위협한 것은 령이니 그녀에게 잘못이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녀는 리스가 흙투성이를 하든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나든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다. 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리스. 제가 먼저 위협했으니 저에게 잘못이 있는 셈이지요. 사과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령은 괜찮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도 리스가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저의 퍼런 사슬에 놀라 울음이라도 터뜨려버린다면... 그것은 싫었다. 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날카로운 기색만 좀 감췄으면 좋으련만... 무구를 잡은 자 특유의 서슬 퍼런 기색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령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그 예민함으로 가끔 저를 대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지.
괜찮다라... 어쨌든 그녀는 수라간으로 가는구나. 령은 무심하게 눈을 한 번 깜박여보였다. 다음 순간 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납득할 수 없었다. 궁 안의 궁녀들이 얼마나 잡일에 시달리는지는 자신도 직접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리스는 자신의 일까지 얹어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가? 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눈에 결단력이 돌았다.
"제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궁 안에 침입자들이 있는지 어슬렁대는 일밖엔 없습니다. 궁 안에 침입자가 없다면 저는 그냥 노는 거나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리스는 아니잖습니까? 궁 안의 시녀들이 얼마나 바쁜지는 할 줄 아는 일이 검 휘두르는 일 밖에 없는 저조차도 보고 들은 게 있을 정도입니다. 리스, 부디 저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령 님의 표정은 왜인진 잘 모르겠지만 한순간 살짝 안타까운 빛이 어른거렸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유를 차마 직접 여쭤보지는 못 했다. ...'신' 님의 깊은 생각을 제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예요. 다만, 령 님께서 웃어주시길 바랬다. 령 님께서 행복하시길 바랬다. 그렇기에 그저 배시시, 작게 웃었다. 령 님의 이어진 말씀에도 여전히.
"...령 님께서는 그렇게 위협을 하시는 것이 일이자 임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령 님께서야말로 저에게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령 님께서는 잘못 하신 거, 하나도 없으시니까요. ...오히려 덕분에 령 님을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저는 기쁜걸요."
진심이었다. 만약 령 님께서 그렇게 경계의 목소리를 내시지 않았다면, 자신은 령 님을 만날 수 없었겠지. ...애초에 위협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위협으로 자신이 울어버릴 일은 결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위협의 주인이 령 님이시라면, 더더욱 미소만이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야, 령 님께서는 이렇게나 다정하시고 따스하신 '신' 님이셨으니.
하지만 그러한 령 님께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시려는 것은 황급히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야, 이것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버려 자신이 처리해야만 하는 일. 그런데도 이것에 '신' 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그건 절대로 안 돼요.
하지만 애써 고개까지 저었건만, 결국 령 님의 눈에는 결단력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강하지만 따스한 목소리. 그러한 령 님의 다정한 청에, 결국에는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령 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희미하게 웃으면서.
"......령 님께서는 노시는 게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일이시라는 것은 저도 조금은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낮추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령 님. 령 님의 아름다운 검술 실력에 대한 이야기는 저 역시도 자주 들어왔었거든요. ...신경 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조금만... 조금만 부탁 드릴게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였다 펴고는 이내 꼬옥 안고 있던 상자를 령 님께 천천히 건네었다. 하지만 결국 상자 위에 있던 과일들과 채소들을 덜어내어 자신 역시도 품에 안아들었다. 조금이라도 령 님의 짐을 가볍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품 안 가득히 음식 재료들을 안아들고는, 령 님을 바라보며 기쁜듯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령 님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덕분에 자신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라... 그 말에 령의 눈빛에 깃든 안타까움이 조금은 물러갔다. 결국 자신도 이성과 감정을 가졌으니 이런 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가? 조금 씁쓸하면서도 기뻐서 령은 리스를 보며 마주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혹여 저 때문에 리스의 마음이 상할까봐 걱정을 했답니다."
령은 리스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리스는 제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역시 리스 또한 신이라는 건가. 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람결에 방울이 흔들리며 딸랑 하는 소리를 냈다. 령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방울은 여전히 흔들리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리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령은 리스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아름다운 검술 실력이란 말에 슬쩍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제 검술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단 것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아름답다'라는 말로 치하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령은 얼떨떨한 듯 슬쩍 웃어보였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이렇게 표현하는 자도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검술 실력을 칭찬해줘서 고마워요, 리스. 실은 제 검술에 대해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몇 없어서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드는군요. 그리고 죄송해할 거 없습니다. 리스를 돕는 건 순전한 제 의지니까요."
령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품 안에 한가득 음식 재료를 드는 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령은 상자를 안아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수라간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걱정은 안해도 될 터였다.
...아. 령 님께서 웃어주셨어요. 물론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섞이신 것 같은 웃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냥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령 님의 말씀에, 드물게 곧바로 입술을 열었다. 고개까지 도리도리, 작게 저으면서.
"저는 절대로 령 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저는 령 님께서 이리도 다정하고 친절하신 신 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믿고 있으니까요. 감히 령 님 때문에 저의 마음이 상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헤실헤실, 호의와 신뢰 가득한 미소가 얼굴에 꽃피웠다. 자신이 어떻게 감히 '신' 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겠는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상해온 적 없이, 호의와 사랑을 베풀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령 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동경스러운 숭배심이 차오를 뿐.
딸랑딸랑, 청아한 령 님의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슬쩍 웃으시는 령 님께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이어서 들려오는 령 님의 목소리. 강하면서도 다정한 그 목소리에, 의아한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신가요? 저는 그러한 말씀을 종종 들어왔답니다. 비록 저는 령 님의 검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령 님께서는 아름다운 신 님이시니, 저도 분명 령 님의 검술도 아름다우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말이예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은 그저 미소로 삼키며, 령 님께 건네드린 상자에서 음식 재료들을 꺼내어 품 안에 한가득 안았다. 그리고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수라간까지는 다행히 가까운 거리였기에 의외로 금방 도착하게 되었다. 한 손으로는 음식 재료들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닫혀 있는 문을 어떻게든 끙끙, 힘겹게 열어 수라간을 활짝 공개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릴 뻔한 음식 재료들을 황급히 손을 다시 가져와 간신히 막은 뒤, 령 님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상자는 저 부뚜막 옆에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령 님? 여기까지 이렇게 걸음 하시게 해버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꼭 은혜를 갚아 보답해 드릴게요."
령은 리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정하고 친절하다라... 자신에게 이러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는 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싫지는 않았다. 령은 대답대신 환하게 웃어보였다. 리스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며.
"저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고마워요, 리스. 리스야말로 정말 친절한걸요."
령은 환히 웃으면서 상자를 바로잡았다. 몸을 흔드는 바람에 방울이 다시 한 번 흔들리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었다. 령은 방울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정하고 친절하다라... 그 말에서 오는 온기에 령은 괜스레 제 몸이 따스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령의 시선이 리스로 향했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망막에 리스의 모습이 맺혔다. 나도 아름다우니 나의 검술도 아름답다라... 령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리스에게 신뢰받고 있구나... 하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비록 지금의 령은 상자를 들고 있어 제대로 된 감사인사조차 드리지 못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꾸벅 몸을 숙이고 싶었다. 령은 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칭찬 감사해요, 리스. 다음에 언제 한 번 리스에게도 검술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리스가 자신의 검술을 보지 못했다니까 한 말이었다. 령은 상자를 들고 가다가 수라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다 리스가 수라간 문을 열자 속으로 자신이 열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음, 부뚜막 옆이라. 령은 리스가 말한 곳에 상자를 놓았다.
령 님께서는 자신에게 웃어주셨다. 되려 자신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되돌려 주시면서. 하지만 '친절'이라는 단어가 령 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되돌아오자, 그것에는 작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친절함'이라는 것은 령 님께 어울리는 단어랍니다. 그 단어가 지닌 따스한 온기는 령 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으니까 말이예요. ...그래도 저야말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령 님."
헤실헤실, 조금은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한껏 풀어진 웃음이었다. 만약 이곳이 야생의 세계였다면, 제일 먼저 표적이 되어 잡아먹혔겠지. ...그 정도로 신뢰와 믿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 없이, 그저 령 님께 다시금 진심 가득한 칭찬을 건넸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이렇게 령 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고 기쁜 일이었으니. 그렇기에 들려오는 말씀에, 살짝 놀란 듯이 멍한 두 눈동자를 크게 떴다.
...제 중얼거림이 들린 걸까요? 아니면 령 님께서는 '신' 님이시니까 제 생각이나 마음 정도는 쉽게 아실 수 있는 걸까요? 어느 쪽인지는 자신이 감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령 님의 그 말씀에 진심을 담아 기쁜 듯한 미소를 희미하게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일 뿐.
"...네...! 저도 령 님의 아름다운 검술, 꼭 보고 싶어요. ...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조용한 중얼거림 속에는 다짐 어린 마음이 묘하게 섞여들었다. 아무튼 이내 도착하게 된 수라간. 낑낑거리면서 문을 열곤 령 님께서 상자를 놓아주시는 것에 따라 자신 역시도 상자에 그 때까지도 소중히 품고 있던 음식 재료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정성스럽게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다시 살짝 흙투성이가 된 옷자락을 두 손으로 탁, 탁, 털고는, 령 님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면서 작게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도... 령 님께 도움을 받아버렸는 걸요. 그러니 저도 령 님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령 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나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혹시 있으시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이루어리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령 님...?"
청동기가 끝나갈 무렵,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왜 인류는 전쟁을 하는가. 왜 쓸데없는 이유로 스스로의 동족을 아무 가치없게 죽이는가. 생존을 위해서도, 번식을 위해서도 아닌 명예, 국가 등의 시시한 이유로 왜 서로를 죽이는 것인가. 그런 어리석은 인간들은 무수한 '나'가 온 지면을 뒤덮어,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리라.
"퍼져나가거라. 무수한 나여"
씨가 흩날린다. 신통력을 이용한 메귀리 '종'의 복제. 그것은 땅바닥에 심어져 느리지만 서서히 범위가 넓어져간다. 훗날 그녀가 중2병이라 부르는 시기의 시작이다. 메귀리는 인간들의 밭, 길바닥, 전장 그 모든 곳에 심어져 싹이 트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웬 잡초들이야?"
수확을 준비하는 농민들의 낫에 메귀리가 베여나간다. 피는데 걸린 시간보다 빨리 그녀의 분신들은 사라져간다.
"..그들은 이 나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건가?"
입에서 세어나오는 한마디의 한탄. 아마 그 때부터 일 것이다. 그녀가 인류에게 흥미를 완전히 잃은 것은.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철기로 발전하여 문명이 확실시 되간다. 메귀리 신은 인류에 대한 흥미를 끄고 인류의 첫 시조들이 잇었던 동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나, '그리스 시대'로 불리는 시대가 접어들기 시작했다
"칭찬 고마워요, 리스. 리스는 늘 저에게 온정 가득한 말을 주는군요. 리스에게 받는 것이 너무나 많아 기쁠 따름이랍니다."
헤실헤실 리스가 미소를 짓자 령도 그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이 신은 정말로 순수한 신이구나. 령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고 자신을 좋게 봐주는 존재라. 령은 문득 생각에 빠졌다. 리스는 다른 신들을 모두 '신'이라며 우러러보았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신인 자가 다른 신을 우러러보다니. 령은 복잡미묘한 생각을 하였다. 그게 과연 옳은 것일까? 글쎄다.
아, 불현듯 령은 정신을 차렸다. 다시 자신의 장신구에서 방울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잡생각을 쫓아보냈다. 지금은 리스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 령은 리스를 보았다. 리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검술을 꼭 보고싶다고 하며... 령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젠가는 리스에게 검무를 춰주도록 하지요."
령의 마음속에 희미하게 기쁨이 피어올랐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수랏간에 도착했더랬지. 령은 상자를 내려놓곤 리스가 음식 재료를 옮겨담는 것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리스가 하시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묻자 속으로 생각에 잠긴다. 하고싶은 일이나 원하는 것이라...
"글쎄요. 지금 당장은 없군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훗날 원하는 것이 생긴다면 그때 리스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아니예요, 령 님. 제가 령 님께 받는 것에 비하면 제가 령 님께 드리는 것은 깃털 끝만큼도 되지 않는 걸요. 그래도... 령 님께서 기쁘시다면 저도 행복해요. ...감히 바라건대, 령 님께서 언제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령 님을 바라보는 부드럽게 접히는 두 눈동자에 담긴 것은 진심 어린 기도였다. '신'인 자가 누구에게 기도를 올리느냐? 싶기도 하겠지만, 자신은 '신'이 아니었으니 가능한 것이었다. ...저의 기도,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신' 님.
자신의 '신' 님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따스히 웃어주실 것이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령 님의 저 따스한 미소 같으실지도 몰라요.
딸랑딸랑, 령 님의 방울소리에 상상 속 자신의 '신' 님의 모습도 점차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 대신, 지금 바로 자신의 옆에 계신 령 님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들려오는 령 님의 약속. 그에 기쁜 마음이 얼굴에 희미하게 가득히 꽃피워졌다.
"...네! ...기쁜 마음을 소중히 품고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령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비록 자신의 시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령 님의 아름다운 검무는 똑바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저도 령 님처럼 아름답게 춤출 수 있다면 좋겠어요. 검무는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예요.
그렇게 기대의 마음을 품고, 수라간에 들어서서 령 님께서 내려놓으신 상자 위에 천천히 음식 재료들을 옮겨담았다. 그리고 그것이 끝마쳐지고 령 님께 드린 질문에, 령 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한 령 님을 조용히 기다려드리고 있자 이내 들려오는 령 님의 대답. 그에 기쁜 듯이 배시시, 행복한 웃음을 살짝 흘렸다.
"...그래주신다면 저야말로 정말 영광이예요...! 네, 저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으니 앞으로 령 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생기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다짐이 섞인 각오였다. 그것을 표현하듯, 두 손을 꼬옥 주먹 쥐며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라... 령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동안이나 그 말을 복기하였다. 자신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주는 자도 있었다니... 리스의 고운 마음씨에 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꼭 리스의 말대로 되었음 좋겠다고 생각하며 령은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리스. 리스도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군요."
령은 고요히 웃었다.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기분좋게 울려퍼졌다. 그러고보니 자신에게 이 장신구를 줬던 인간 아이는 어찌 되었으려나. 그날 흑조들한테 쪼여서 상처를 입은 뒤로는 무서워서 자신과의 교류도 끊어버린 그 애가... 령은 새삼 자신을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다가 울컥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러면 안돼. 아직 리스와 대화중인걸. 령은 애써 그 마음을 꾹꾹 눌러담았다.
"감사할 게 뭐 있나요.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건 검무 뿐인걸요."
리스의 말에 령은 온화하게 웃으며 답하였다. 자신이 익힌 유일한 재주는 검술이었고 이 검무는 그에 따른 연장전이었다. 령은 문득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가 검 말고 다른 것을 배웠더라면 더 리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령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일 뿐인 가정은 안하는 것이 나았기에 령은 그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려 하였다.
리스는 행복하게 웃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저리도 좋았을까? 령은 리스를 따라 웃었다. 행복함이 잔뜩 베어나오는 미소였다. 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리스에게 부탁드리도록 할게요."
아, 그러고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리 되어버렸다. 너무 농땡이를 부리는 것은 좋지 않다. 어디선가 또 침입자가 이 궁 안에 들어올지도 모르니. 령은 리스와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하였다.
"리스, 저는 시간이 다 되어 이제 가봐야 한답니다. 혹여 들기에 버거운 짐이 있다면 저를 부르세요. 언제든지 달려가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령은 그 말을 하고는 일어서서 수라간을 나갔다. 자,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막레 드리겠습니다. 리스주 수고하셨어요. 리스 너무너무 귀여워서 돌리는 내내 힐링되는 기분이었어요!
사실 저도 가고 싶네요... 이 시리즈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항상 가고 싶어요... 8ㅅ8 평화롭고 조용하고 여유롭고 느긋한 저쪽 세계 가서 살고 싶어요! 라온하제는 에너지도 무한이라서 하루종일 에어컨 틀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데... 흑흑... 무엇보다 먹을 것도 넘쳐나는데..!!
그녀는 아라이 한 거리에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무 호응이 없다가 점차 주변으로 신들이 모여들어 듣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 그녀에게 환호하며 휘파람을 부는 신, 노래를 들으며 과자를 먹는 신 등 다양한 반응이 보여진다. 점차 신기척이 적던 거리는 노래소리에 이끌리듯 신들이 모여들어 어느세 하나의 게릴라 콘서트장 같은 느낌이 되간다. 노래가 끝나고 그녀는 그저 꾸벅하고 인사를 하고는 이야기한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뒤이어 나오는 앙코르-란 요청은 신경쓰지 않고는(정확히는 그 의미를 모르고는) 짐을 챙겨 유유히 그 자리를 뜬다.
소년은 어느 날과 같이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같은 영웅담을 동경하는 그 소년은 헤라클레스처럼 되기 위해 나도 사자를 잡겟어!라고 외치고 잡스러운 무장을 지닌채 산 속으로 들어갔다. 다행인 점은 그 숲에는 아무런 맹수가 없었고 기껏해야 다람쥐 토끼같은 생물이 전부였다는 것일까. 그러나 산의 지리는 복잡해서 오래되지 않아 소년은 길을 잃게 되었다. 시련인건가?라고 생각하면서 발발 떨며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 소년. 그런 소년의 귀에 노래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세이렌?!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것들의 출몰지는 바다니 산 속에는 있을리 없다라고 소년은 나름 침착하게 생각한다. 이 깊은 산 속에 노래부르는 이라니 대체 누구일까. 소년은 호기심에 노래 소리를 따라간다. 그 곳에 나타난 것은 동굴, 안에는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흠칫하고 놀라지만 안에 들어서니 소년의 눈에 여신과 같은(실제로 여신이지만) 금발의 여성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보인다. 노래 소리에 홀린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그 것을 바라본다.
할 것이 없어 부르는 노래가 끝난 메귀리 신은 있을리 없는 시선이 느껴져 그 곳을 돌아본다. 토끼나 다람쥐인가 생각했더니 그 곳에는 인간 소년이 서있다. 흠칫하고 놀라자 상대가 핫!하고 정신 차리더니 소년은 메귀리 신에게 물어봤다.
"누나는 누구야?"
메귀리 신은 당황했다. 딱히 자칭할만한 이름도 없을뿐더러 나는 메귀리다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겁을 주기엔 그런 방법을 모른다.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소년은 메귀리 신을 보며 이야기한다.
"혹시, 누나가 그 음악의 신 뮤즈 중 한 사람이야?!"
"...응?"
메귀리 신은 의외의 발언에 뭐란거야?라는듯 이야기한 것이지만 소년은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그렇구나!하고 자기 스스로 납득한듯 하다. 그것이 여신과 소년의 첫 만남 이었다.
그 플라밍고 수인 신이 살고 있는 곳은 아마 이곳 아니었던가? 은호님에게 물어보니 이곳일 거라고 하던데. 내가 들은 정보를 떠올리면서 나는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벚꽃나무 숲을 둘러보았다. 다솜 지역의 명소인 벚꽃나무 숲은 오늘도 아름답게 분홍빛 벚꽃 잎이 솔솔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가리의 단풍도 예쁘지만 역시 이곳의 벚꽃나무도 상당히 예쁜 편이기에 올 때마다 와아, 소리가 지어졌다. 이 벚꽃 잎으로 벚꽃 차라도 달여먹어볼까? 그런 생각으 하기도 하며 나는 벚꽃나무 숲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기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외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일단 조금 더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두리번두리번 숲 안을 찾아보았다.
"어디에 있을까? 그 귀여운 수인은?"
두리번, 두리번. 그렇게 둘러보면서 나는 나무 사이사이를 천천히 지나다가 그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았다. 혹시 듣고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이 곳은 다솜. 분홍빛 벚꽃잎들이 가득한 곳. 물론 다솜은 그 특성 상 봄의 기운이 흐르는 지역이니만큼 벚꽃 말고도 다양한 꽃들이 가지각색, 제각기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어 피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은 바로 이 벚꽃나무 숲. 다솜의 명소이기도 한 이 곳의 색깔은 보통 한 가지 뿐이었다. 바로, 분홍색.
......꼭 저 같은 색이예요. 가만히 벚꽃나무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자신의 색깔과 비슷한 그 속에 파묻혀있었다. 이질적인 색의 두 눈을 감으면, 더더욱 분홍빛만이 가득해지겠지. 하지만... ...저의 색깔은...
"......?"
몽롱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 때,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얼핏 보이는... 분홍색 속에 섞여있는 하얀색...?
...백호 님...? 다시금 한 박자 늦게 멍한 두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러나 움직임은 제법 재빠르게, 황급히 날개를 펼쳐내어 허공을 가로질러 백호 님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날갯짓의 속도를 느릿하게 줄이면서 맨발을 살며시 땅에 딛고,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았다. 동시에 분홍색의 날개를 접으면서 백호 님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백호 님.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예요. 백호 님의 부름에 늦게 응답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직접 불러주시다니...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백호 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백호 님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부르자 머지 않아, 저 위에서 리스가 땅으로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려오는 모습이 벚꽃잎 때문인지 분홍빛인 것이 정말로 예쁘네. 진짜 예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려오자마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날개를 접고 인사를 올리는 그 모습에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이런 인사를 받아도 곤란할 뿐이고 말이야.
"됐어. 됐어. 그렇게 예의 차리지 마. 내가 고위신도 아니고, 너하고 똑같은 레벨의 신일 뿐이야. 물론 너는 부정하겠지만 말이지. 너에 대한 것은 은호님에게 들었고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너는 신이고 나도 신. 그것으로 오케이. 그리고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너, 조만간에 있을 경주 대회에 나올 생각이니?"
이 아이는 전에 보니까 뭔가 상당히 이런 쪽으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조금 불안하단 말이야. 그런 느낌이 들어서 설명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모른다고 한다면, 이것은 설명을 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기에 확실하게 이 아이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모르는지 알기 위해서 나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애초에 카트라는 것이 뭔지 너는 알고 있어? 아...그리고 이건 궁금증인데, 발에 하고 있는 그건 뭐야? 발찌? ...왜 그걸 발찌로 하고 있어? 아니,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안 그래도 느릿하던 대답이 순간 더욱 느릿하게 나와버렸다. 멍한 두 눈까지 크게 떠지면서. ...지금... 백호 님께서 저에게 귀엽다고 해주셨어요...? ...세상에...! 결국 영광스러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두 손으로 입가를 살며시 가려버렸다. 그리고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백호 님께 살짝 꾸벅, 인사해보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백호 님. ...백호 님께서도 정말로 예쁘신 여우 신 님이세요." 묘하게 기쁜듯한 목소리와 함께.
하지만 자신의 공손한 인사에 백호 님께서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으셨고, 그에 한 박자 늦게 "...아."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 하지만 백호 님께서도 '신' 님이신 걸요. 저는 '신' 님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백호 님께..."
뒷말은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지고 흐려지면서 자연스럽게 끊어져버렸다. 아래를 향해 떨구어진 시선. 하지만 그것도 이내 들려오는 백호 님의 물음에, 다시 살짝 위로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네. 은호 님께서 준비하신 대회는 그것이 무엇이건 열심히 참여하고 싶어요. 그러면 은호 님께서도, 누리 님께서도 대회를 지켜보시면서 즐거워 하실 지도 모르고... 가온 님께서도 열심히 준비해주신 보람이 있으실 테니까요."
헤실헤실,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오는 대답은 결국 또 다른 신 님들을 위한 것들이었다. 숭배와 신뢰의 마음. 하지만 카트에 대한 물음에는 다시금 미소가 살짝 난감하다는 듯이 흐려지며 은근슬쩍 시선을 떨구었다. 그저 작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것으로 대신 대답하면서. 그러다 백호 님의 또다른 궁금증이 들려오자, 그대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잠시 자신의 오른쪽 발목에 두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살며시 들어올려 백호 님을 바라보며 그저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이건 저번에 '라온하제 스탬프 릴레이' 대회 때 참여해서 받은 소중한 물건이랍니다. 크기가 저의 발목에 맞지 않을 정도로 작긴 했지만 신통술로 열심히 키워봤더니 딱 맞게 되었어요. ...발찌... 아니었나요...? 이거...?"
순진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이내 고개가 갸웃, 하고 움직여지면서 은근한 궁금증에 물들었다.
"예쁜 여우 신님? 응! 그건 맞으니까. 은호님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한 외모하는 편이고. 아. 물론 난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에 가까울까? 인간들이 기준에선 그럴 것 같은데. 아. 귀여운 것은 누리님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중간으로 하면 되겠지. 뭐. 그리고, 너는 신이야. 애초에 여기는 신이 아니면 출입을 할 수 없어. 무엇보다...신이 아닌데 수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
은호님에게 말한 그 특성을 바라보며 나는 오호, 오호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된지 얼마 안 된 아이일까? 그러면 가끔 이런 이가 있을 수 있긴 한데... 단지 그것만이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지만.. 과연 그것 뿐일지. 아무튼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다시 이쪽을 보게 하기 위해서 나는 손을 올려 박수를 짝 쳤다. 고개가 내려지면 안되잖아? 말하는 도중에? 안 그래도 귀여운 얼굴인데. 그런 말을 속삭이듯이 이야기하면서 나는 리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참가하는구나. 그런데 카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거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거야. 짠."
이어 나는 내 신통술을 발휘해서, 내가 홍보할 때 사용하고 있는 '카트'를 가지고 왔다. 몸체는 하얀색이고, 앞면에 여우 그림이 그려져있고, 그리고 그 위에는 가리를 상징하는 단풍잎이 그려져있는 그런 느낌의 카트이다.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것의 조금 작은 버전이라고 보면 돼. 대회에 참가하려고 한다면, 이런 카트가 있어야 하니까 슬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 그래. 어차피 직접 만들긴 힘들 것 같으니까 너에게 이걸 줄게. 짠."
이어 나는 손가락을 퉁겨서 그 옆에, 조금 더 작은 카트 하나를 소환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장식도 아무런 색도 입혀지지 않은 하얀색 카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리스에게 이야기했다.
"너는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온 것이 다행이야. 자. 카트는 내가 줄게. 꾸미는 것은 네가 해. 알았지? 너를 상징하는 느낌으로 예쁘게 꾸미면 되는 거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리고...그거, 발찌가 아니야. 반지야. 손에 끼는 거."
이어 나는 은호님이 나에게 줬던 가리의 단풍잎 문양이 그려져있는 반지가 끼워진 나의 오른손을 보여주었다. 내 오른손 검지에는 분명히 작은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물론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올리는 건 무례한 것이겠지만... 백호 님께서도, 은호 님께서도, 누리 님께서도, 모두 다 예쁘시고 귀여우신 여우 신 님들이세요. 모든 신 님들께서 전부 다요. 그래서... 기뻐요. 이런 신 님들을 만나뵐 수 있다니... 정말로 크나큰 영광이예요."
헤실헤실, 신 님에 대해서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행복한 미소가 꽃피워졌다. 물론 그것도 이어서 들려오는 말씀에는 서서히 사그라들어, 그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지만. ...저는... '신' 님이 아니예요. 그런데 왜 다들 저한테 '신' 님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걸까요? 저는 그런 전지전능하고 깨끗하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데 말이예요. ...저는... 저는... 그저...
생각들이 섞여들어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초커에 달린 구슬이 희미하게 빛날 무렵, 갑자기 들려오는 짝, 하는 박수 소리에 몇 박자 늦게 "...핫...!" 하고 느릿한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어 놀란듯이 커진 두 눈동자, 정확히는 한 시야로 백호 님을 올려다보면서.
...하지만 백호 님의 속삭임에는 영광스럽다 못해 낯설어 두려울 정도로 기쁜 마음을 느껴 살짝 양볼이 빨개졌다. 괜히 어색함에 두 손을 들어올려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에, 서서히 다시 내려가던 고개를 한 박자 늦게 급히 치켜들고는, "...가, 감사합니다..." 하고 시선을 은근히 피하면서 감사 인사를 덧붙였지만.
그러고 이어지는 백호 님의 설명. 그와 동시에 나타난 하얀색의 '카트'에는 여우와 단풍잎이 그려져있는 모습이었고, 이어 들려오는 설명에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했다. 하지만 백호 님께서 아예 손가락을 튕겨 작은 카트 하나를 소환해내어 선물을 해주시자, 놀란듯이 멍한 눈동자가 커져 그대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이걸 정말로 제가 가져도 되는 건가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백호 님...! ...너무 예뻐요. 이대로도 너무 예뻐서 제가 감히 손을 대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한 번 열심히 꾸며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백호 님. ...저도 백호 님께 도움이 되고 싶은데..."
조금 시무룩해질 것 같던 표정은 이내 곧 '반지'라는 새로운 단어가 들려오자 다시 멍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백호 님의 오른손에 있는 '반지'라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몇 박자나 늦게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전혀 몰랐어요. 저, 발찌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
결국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미 귀까지 새빨개져버린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부끄럽다 못해 창피해한다는 게 확실해 보였겠지만.
"쓰라고 준 건데, 쓰지 않으면 내가 곤란하잖아? 써도 돼. 써도 돼. 쓰라고 준 거니 말이야. 이렇게 줬는데 안 쓰면 어쩔 거야? 집에 두고 그냥 먼지만 쌓이게 할 거야? 그건 곤란한데. 적어도 이번 대회에 나가고 싶으면 카트가 있어야 하는데, 카트는 없잖아? 그러니까 나의 선물이야. 전에 맛있는 것을 먹게 해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줘. 이래보여도 난 먹보거든."
정말로 맛있는 것을 좋아하기에 지금도 가리에서 살고 있고 말이야. 거긴 맛있는 것이 많거든. 물론 밤프가 관리자가 되고 난 이후부터 토마토가 좀 더 많아진 것 같지만 토마토도 싫어하지 않으니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 말에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누리님이 바라는 즐거운 내일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니까. 누리님은 비록 출생이 그럴지 몰라도 지금은 은호님의 어엿한 딸이자 이 지역을 물려받으실 분.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누리님이 원하는 그런 분위기를 가득 꽃피우는 것이었다.
아무튼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서, 귀가 빨개진 리스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톡톡 두들기면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거 발찌로 써도 상관은 없으니까 하지만 원래는 반지라는 느낌으로 줬다고 봐도 돼. 네가 편하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그렇게 해도 되지 않겠어?"
딱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을 하며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어 잠시 리스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나는 웃으면서 리스에게 이야기했다.
"참고로 나는 맛있는 것을 좋아해. 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정 어떻게든 뭔가 해주길 바란다면, 전에 요리 대회 때 만들었던 거 또 언제 나에게 만들어주지 않을래? 상당히 맛있었거든. 1등 요리사 씨?"
윙크를 하면서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그때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려봤다. 사실 다른 음식들도 다 맛이 좋았지만, 그래도 이 애에게 말하는 거니까 이 애가 말한 것을 바랄 수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정말로 감사하게 잘 사용하겠습니다. 정말 영광이예요, 백호 님.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예쁘게 꾸며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대회에도 열심히 참여할게요. 백호 님의 카트와 함께라면 1등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백호 님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손까지 작게 주먹 쥐어서 나름대로의 의지를 두 눈동자에 빛내기 시작했다. ...만약에 이번 카트 대회에서 제가 1등을 하게 된다면... 그 우승 상품은 반드시 백호 님께 드리고 싶어요. 이런 멋진 카트까지 받았다면 저도 더더욱 백호 님께 보답을 해드려서 은혜를 갚아야...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잠시 두 손으로 조심히, 아주 조심히 카트를 매만져보았다. 하얗디 새하얀 색. ...꼭 백호 님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행복한 미소가 헤실헤실 새어나왔다.
'즐거운 내일'. 백호 님의 그 말씀에, 잠시 누리 님이 겹쳐져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라온하제."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 말은 마치 마법의 말 같은 느낌이었다. ...저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준 곳. 라온하제. 즐거운 내일. 내일을 꿈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삶인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이었다. 자신이 지금 원하여 여쭤보고있는 것은 백호 님의 행복인데도...
리스, 잠시 스스로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동안. 하지만 그것도 이내 창피함에 굴복해버려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어버렸다. 이어진 백호 님의 말씀에는 그저 작게 웅얼웅얼거렸지만.
"......그, 래도 뭔가 부끄러워서... 저는 발찌가 익숙해서 당연히 이것인 줄 알았는데..."
...반지 씨라는 것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덧붙여지는 목소리는 창피함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백호 님께서 이어서 알려주시는 정보와 부탁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것조차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백호 님을 멍하니 커진 두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길 몇 초. 마치 굳은 듯 했던 시간이 흐르고, 몇 박자 늦게 환한 미소를 희미하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호 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맛있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다른 것들도 열심히 연습해서 만들어드릴게요, 백호 님. ...저도 백호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너무 기뻐요."
기쁜 마음이 순수하게 얼굴에 헤실헤실, 꽃피워졌다. "...물론 이번에는 이상한 맛의 고춧가루 씨는 안 넣을 거지만요."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희미한 장난기가 마찬가지로 스며들어 있었고, 백호 님의 윙크에 자신 역시도 두 눈을 꽉, 감았다 뜨면서 언제나와 같은 두 눈 윙크를 날렸지만.
/ ㅋㅋㅋㅋㅋ그래도 리스에게는 흑역사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끄덕) 아무튼 저는 잠시 씻고 오겠습니다! :)
그때 그 소스를 발라서 먹으니까 완전 좋았는데. 괜히 아쉬움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히잉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러니까 내가 엄청 먹을 것을 좋아하는 그런 신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맞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 것이 잘못은 아니잖아. 옛말에도 잘 먹고 죽은 귀신이 피부색도 좋다고 했어. 물론 나는 이미 신이라서 귀신이 될 이유는 없지만 말이야. 애초에 귀신이 될 마음도 없고...
그러다가 나는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뜨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한 후에 리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들어간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후우 바람을 불면서 리스에게 이야기했다.
"왜 눈을 갑자기 감았다가 떠? 눈 아파? 너?"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눈을 제대로 보았지만, 딱히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진 않아보였다. 두 눈의 색이 다른 것이 묘했지만, 아무튼 딱히 눈에 뭔가 들어간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나로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 백호 님, 그 소스가 맛있으셨나요...? 그, 그러면 그 소스 씨도 나오게 될 거예요...! ...그, 러니까... 그러니까..."
아쉬운 듯이 히잉, 하시는 백호 님의 모습에 순간 당황한 빛이 살짝 스쳐지나가 평소보다도 대답이 더욱 늦어버렸다. 하지만 나름대로 황급히 말을 정정하던 것도 잠시, 이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약간 쩔쩔매는 모습으로 입가에 올린 두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만약에 백호 님께서 '신' 님이 아니셨다면 꼬옥 안아드리거나 어깨를 토닥토닥해드렸겠지만... 백호 님께서는 '신' 님이신 걸요. 그런데 그런 '신' 님을 제가 감히 실망시켜 버렸어요. ...저, 어쩌면 좋죠...?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데굴데굴, 난감하게 굴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백호 님께서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살며시 자신 역시도 백호 님과 눈을 조심스럽게 맞춰보았다. 그런데...
"...!"
갑자기 자신의 눈동자에 후우, 바람을 부시는 백호 님. 그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하얀색의 왼쪽 눈을 먼저 가리면서 두 눈을 꽉 감아버렸다. 순간 묘하게 두려운 듯이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이내 들려오는 백호 님의 말씀에 서서히 닫혔던 눈꺼풀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은근슬쩍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눈을 가렸던 두 손은 살짝 내려와 입가를 가리면서.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리스를 바라보며 아차 싶어서 난감하게 웃으면서 두 손을 강하게 휘저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정말 착해도 너무 착하다니까. 라온하제에 잘 어울리는 순수한 영혼이 신이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저 아이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튼 리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아이는 윙크를 따라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두 눈을 감는 윙크라.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나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올려 리스의 얼굴에 갖다댄 후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고, 한쪽 눈만 살짝 내리고 다른 한쪽 눈은 뜨게 한 상태로 하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이렇게 한 쪽 눈만 감았다가 뜨는 것이 바로 윙크야. 알았지? 두 눈을 감고 뜨는 것이 아니야. 정말... 왜 이렇게 귀여워? 너. 내가 여우 신이 아니라 여우였어도, 너는 귀여워서 건드리지도 못했을 것 같아. 어쩔거야? 응? 응?"
너무나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고, 나는 슬그머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선 후에 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리스를 바라보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엄청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 다음 번에도 꼭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백호 님. ...그렇지만 그 빨간 고춧가루 씨만 드시면 혀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막 나오니까 백호 님께서도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백호 님께 얘기했다. 그랬다. 이것이 자신이 다음 번에 과일 샌드위치를 백호 님께 만들어드린다고 했을 때, 고춧가루를 넣지 않으려던 진짜 이유. 이미 그 고춧가루를 먹어봤다가 호되게 당했던 자신이었으니 만큼, 백호 님께서는 그렇게 우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백호 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래도 고춧가루 씨는 역시 적절히 사용하면서 조심해야할 것 같아요. 부르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작게 떨렸다. 평범한 홍학이었던 자신에게는 그것은 역시 너무나 큰 자극이었었기에.
아무튼 이어진 묘한 부끄러움에 조심스럽게 백호 님께 여쭤보자, 백호 님께서는 대답 대신 그저 웃음을 터뜨리실 뿐이었다.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에 기쁘고 행복한 마음 반, 영문을 모르겠는 마음 반으로 백호 님을 바라보고 있자, 이내 자신의 얼굴에 닿는 백호 님의 손길.
...아... 작은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백호 님과 똑바로 마주친 시선. ...'신' 님께서 지금 저의 얼굴에 손을 대어주고 계세요. 영광스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백호 님의 손길에 서서히 감겨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왼쪽 눈. 보이는 세상에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눈꺼풀이 닫히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왼쪽 눈이어서 다행이예요. 만약에 오른쪽 눈이었다면... 백호 님을, '신' 님을, 세상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자신만이 알고 있을 묘한 두려움은 그저 멍한 눈동자 뒷편으로 삼켜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백호 님의 말씀에, 다시 닫혔던 눈꺼풀을 서서히 올렸다. ...여전히, 자신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 그저 헤실헤실,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
"...이것이 '윙크'라는 것이었군요. 처음 알았어요. ...제대로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백호 님. ......저는 두 눈인 줄 알았어요... ......만약에 백호 님께서 여우 신 님이 아니라 여우이셨다면 분명 저보다 더 귀여우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어쩌면, 그러면..."
...제가 귀여우신 백호 님을 꼬옥 끌어안았을지도 몰라요. 감히 '신' 님께 무례하기 그지 없는 생각은 그저 희미하게 꽃핀 미소 속으로 삼켰다. 그 대신, "...백호 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저를 건드리셔도 괜찮아요. ...기뻐요." 하고 행복하게 대답하면서.
그러다 이어진 백호 님의 말씀에 나름대로 기합을 넣듯이 두 손까지 꼬옥 주먹쥐고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그리고는 ...끄응, 한 박자 느린 소리를 내면서 부들부들, 힘겹게 왼쪽 눈을 감았다 떴다. 오른쪽 눈이 그에 맞춰서 함께 감겨질 것 같았지만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며. 그리고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저, 성공했나요...?"
/ 다시 안녕하세요, 레주! :) 리스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백호도 너무 귀엽고 예뻐요...! 완전 자상한 큰 언니 같아요...!ㅠㅠㅠㅠ(???)(야광봉)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일부로 짓궂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새들에게 있어서 여우는 천적이자 사냥꾼이니까. 물론 여우라고 해서 모든 새를 다 사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플라밍고는 사냥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내가 더 귀여웠을 거라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만 해도 나보다 훨씬 귀여운 느낌이고 말이야.
아무튼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을 돌린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것에 대해선 굳이 꼽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에 힘겹게 윙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두 손으로 박수를 짝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처음 하면 힘들지도 모르지만, 많이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이야."
다시 한번 자연스럽게 왼쪽 눈으로 윙크를 한 후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차고 있는 구슬에 빛을 모았다. 그리고 신통술의 힘으로 내가 신이 되기 전의 모습. 온 몸이 새하얀 여우의 모습이 된 후에, 리스를 올려다보면서 이야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물이 되면 사람보다는 키가 작을 수밖에 없으니까.
ㅡ어때? 귀여운 편이야? 하지만 난 네가 더 귀여울 것 같은데. 일단 여우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것 같으니까 특별 보너스. 막 무섭고 그런 것은 아니지? 그리고 은호님이 너에게 준 것. 그것은 반드시 챙겨와. 알았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나는 직접 리스의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옮겼다. 동물일 때는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 대신 신통술을 이용해서 이렇게 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이 또한 신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나는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고 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전해줄 것도 다 전해주고 말할 것도 다 말했네. 돌아가볼게. 또 기회가 되면 보자. 플라밍고 아가씨."
//백호는 자상한 큰 언니, 혹은 큰 누나의 이미지로 만든 캐릭터니까요! 그렇게 느껴진다면 정말로 다행입니다!
헤실헤실, 백호 님께 보이는 희미한 미소 속에서는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신뢰와 호의 가득한 진심만이 느껴질 뿐. 그래, 자신은 모든 존재들을 좋아했다. '사랑' 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신' 님이시라면...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깊은 생각은 몽롱함 속으로 삼켜냈다. 그 대신, 백호 님의 설명과 가르침에 따라 힘겹게 제대로 된 첫 윙크를 해보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한 듯이 박수를 짝, 쳐주시는 백호 님. 다시금 예시를 보여주시려는 듯이 한 번 더 윙크를 해주시는 백호 님의 모습을 보면서 기쁜 듯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네. 앞으로 열심히 연습해서 백호 님께도 꼭 보여드릴게요. 윙크 씨를요. 이, 렇게..."
그러나 역시 아직은 어색했던 탓인지, 자연스럽게 또 두 눈 윙크를 해버렸다. "...아, 또 실수했어요..." 한 박자 늦게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묘하게 어색한 부끄러움이 살짝 묻어있었지만.
그러다 이내 백호 님의 구슬에 빛이 모여지자 그것을 신기한 듯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모습이 변하여 새하얀 여우가 된 백호 님.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백호 님을 내려다보면서, 놀란 듯이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멍하니 커진 두 눈동자는 여전히 백호 님께 향한 채.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머릿속에 들려오기 시작하는 백호 님의 목소리. 그에 영광스러운 기분만을 느껴, 드물게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무섭지 않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겠지만... 백호 님, 정말로 귀여우세요. 특별 보너스를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백호 님. ...백호 님의 여우의 모습도 만나뵙게 되다니, 정말로 행복해요."
...비록 꼬옥 끌어안는 것은 역시 못 하겠지만, '행복'하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헤실헤실, 그저 희미하게 웃음을 꽃피웠다. 백호 님의 주의에 고개를 끄덕끄덕이면서. ...그것은, 아마도... 그 때의 그 하얀색 구슬이겠지요. 반드시 챙겨가야겠어요.
그리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예쁜 백호 님의 꼬리에 마음을 뺏긴 듯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이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백호 님. 이어서 들려오는 백호 님의 말씀에, 배시시 웃으면서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았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올렸다.
"...네, 다음 번에는 꼭 맛있는 음식 씨들과 함께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모로 정말로 감사했어요, 백호 님. 돌아가시는 길, 조심히 잘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백호 님."
벚꽃잎들이 떨어지는 풍경 속. 또 하나의 분홍색이 마지막으로 웃어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홍색들 중에서는 아마 가장 행복할 분홍색이.
/ 완전 그런 느낌이랍니다! 백호 너무 예뻐요...!ㅠㅠㅠㅠ(야광봉) 아무튼 이것으로 막레를 하셔도 좋고, 막레를 써주셔도 좋답니다.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레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리자 특권이라고 하니 엄청 거창해보이지만... 그냥 가온이가 같은 관리자라서 조금 더 친근감을 느낀다 정도밖에 없답니다. 그런데...세설이의 경우는 뭔가...전에 함정카드가 발동한 것 때문에 뭔가 좋은 분위기는 아닐 것 같고...(흐릿)
>>819 그 정도면 엄청 거창한 거 아닌가요?ㅋㅋㅋㅋ 친근감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것인데요! :) 그런데 함정카드는...ㅋㅋㅋㅋㅋ 어느 쪽이든지 흥미진진하겠네요...! XD(팝그작)
>>820 ㅋㅋㅋㅋㅋ아니요! 리스는 '차도남' 단어 자체를 몰라서...ㅋㅋㅋㅋ(시선회피) 리스는 설이를 오히려 맛있는 것도 주시고, 얼었던 몸을 따뜻하게 녹이게 허락해주신 친절하고 고마우신 신 님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D 설이에게도 보답하고 싶어해요.ㅎㅎㅎ 그러니 설이는 싸가지 말아먹지 않았습니다!
>>878 네. 고위신급 뿐입니다! 일반신의 능력으로는 그 정도까지는 불가능하답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동물을 신으로서 만드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일반신에게 가능한 것은 원래 그 생명체에게 있는 신통력을 자극해서 깨우는 정도밖엔 가능하지 않아요. 뭐, 이 같은 경우는 만들었다기보다는 원래 신이 될 운명이랍니다.
아라. 이 곳은 여름이 가득한 곳이예요. 라온하제 지역 중 가장 덥고, 가장 물들이 많은 곳. 아라.
아라는 처음에 자신이 라온하제에 우연히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정착하려 했던 곳이기도 한 만큼, 다솜 다음으로 그나마 가장 잘 알고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위와 추위에 약한 자신이었으니 만큼 아라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에이렐 님의 노래를 들으려 한 날이었으니까요. 에이렐 님의 노래에 대한 것은 저번에 앵화영장... 이 아니라 장미영장에서 알게 된 정보이자 소식이었기에 잘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여유롭게 시간이 남는 날. 애초에 관리자도 아닌 만큼 평소에도 그리 바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더 느긋한 하루였기에 그렇게 결심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저의 '신' 님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에이렐 님의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처럼 그 마음 역시도 제법 컸기에. 그렇기에 이렇게 아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
...에이렐 님께서는 어디서 노래하시는 걸까요...? 가장 중요한 장소를 알지 못 했다. 그렇기에 조금 난감한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거리다 일단 아라에서 가장 북적이는 듯한 번화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보았다. ...이렇게 '신' 님들이 많으시다면... 어쩌면 에이렐 님께서도 계시지 않을까요?
"...에이렐 님... 아니, 에이렐... 에이렐 니임... 에이렐..."
중얼중얼,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호칭을 몰래 연습하는 목소리는 조그마했지만,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다리에 맞춰 겉옷자락이 사락사락, 움직였다.
/ 선레입니다! 아라에 번화가가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에이렐을 만나려면 이 쪽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써봤습니다.ㅋㅋㅋㅋ 그리고 전 잠시 씻고 올게요! :)
아라의 번화가는 역시 낯선 북적임이 가득한 곳이었다. 거의 아무도 없는 다솜의 벚꽃나무 숲에 혼자 살아와서일까. 그렇게나 북적이는 다양한 '신' 님들의 모습은 놀랍다 못해 신기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자동으로 두리번두리번, 낯선 장소를 둘러보는 멍한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의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렇게 헤매듯이 거리를 걷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도착해버린 광장. 더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결국 멈춰져버린 두 발걸음과, 이내 들려오기 시작하는... 노랫소리 하나...?
"...아..."
잠시 그에 귀를 기울이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눈이 좋지 않은 만큼 자연스럽게 더 발달해버린 청각은 그 노랫소리의 근원지를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골목길 거리.
이내 홀린듯이 멍하니 그 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다시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노랫소리를 향하여, 더 가까이, 살며시. 다른 신 님들과 섞이어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여 중얼거리면서도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고, 노랫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드디어 발견한... 에이렐 님의 모습. 희망이 가득한 노래 가사와 밝은 멜로디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두근두근, 울려오기 시작했고, 원체 음악을 좋아했던 자신이었으니만큼 자연스럽게 에이렐 님의 노래를 귀기울여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예쁜 노래예요. 가사도, 멜로디도, 정말로 좋아요. 많은 신 님들의 틈에 섞인 이질적인 분홍색. 그렇지만... 그 사실마저도 잠시 잊게 해주는 노랫소리에, 그저 에이렐 님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박자에 맞추어 까닥까닥, 좌우로 작게 흔들리는 고개까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었지만.
에이렐 님의 노래가 끝났다. 결국 끝이 나버렸다. 희망을 노래하던 노랫소리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몇 박자 늦게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에이렐 님의 부름에 정신이 돌아온 것이지만.
"......네...? 아..."
순간 대답이 평소보다도 더욱 늦게 나와버렸다. 에이렐 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 해서일까? 물론 자신의 색이 눈에 띄는 밝은색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이 인파들 속에 섞인 것까지도 눈치채어주실 줄이야...
더군다나 에이렐 님께서 아예 직접 인파들과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기쁘다 못해 영광스러운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에이렐 님과 함께 받게 된 주변 신 님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두렵도록 영광스러운 것이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왼쪽 눈가를 매만지면서 옷 소매 끝으로 입가를 가려버렸지만.
하지만 이내 에이렐 님께서 자신에게 노래가 어땠는지를 물어오자, 한 박자 늦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이어진 대답은 의외로 곧바로 튀어나왔다.
"완전 좋았어요...!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기엔 무례하지만, 에이렐 님의 목소리와 정말로 잘 어울리는 노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노래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너무 예뻤어요. ...사실 에이렐 님의 노랫소리를 듣고 홀리듯이 여기를 찾아올 수 있었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에이렐 님. 덕분에 이렇게 좋은 노래도 듣게 되고... 기뻐요."
꾸벅, 허리를 숙였다 피자 헤실헤실, 희미한 미소가 꽃피워졌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이 다시금 "...아." 하는 소리를 몇 박자 늦게 덧붙였다.
"...아니, 제 말은... 감사합니다, 에이렐 ㄴ... 이 아니라...! 에이레에엘..."
황급히 정정하던 목소리는 이내 말끝을 흐려지면서 작게 얼버무리듯이 사라졌다. 애매모호한 호칭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듯, 두 손가락들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며 멋쩍은 듯한 웃음을 살짝 흘렸다. ...당연하게도 시선은 옆으로 피했지만.
에이렐 님의 물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마 그만큼 정말로 좋았다는 뜻이겠지. 그렇기에 진심 어린 칭찬 섞인 감상이 대답으로써 섞여나왔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열심히 감상을 얘기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에이렐 님'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해버린 것. 물론 몇 박자 늦게 황급히 말을 정정하긴 했지만, 이미 에이렐 님께는 들켜버린 듯 싶었다. 그렇기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에이렐 님의 모습에, 괜히 입가까지 올린 두 손의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옆으로 떨구듯이 내린 채.
"......그, 그게..."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벌칙이라는 에이렐 님의 말씀에는 한 박자 늦게 몸을 움찔, 했지만. 그리고 정말로 추가로 덧붙여지는 에이렐 님의 벌칙에, 순간 드물게 반응이 곧바로 튀어나와 고개를 들어 에이렐 님을 바라보았다. 멍한 두 눈동자는 약하게 동공지진을 일으키면서.
"......그, 그건...!"
......큰일났어요. 저 이제 에이렐 님께 말을 걸지도 못 하게 생겼어요... 저의 '신' 님. 전 이제 어쩌면 좋죠...? 드물게 겉으로도 희미하게 울상인 표정이 되어버렸다. 물론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만, 앞으로는 에이렐 님께 어떻게 소통해야할 지를 고민할 뿐.
"......"
그렇기에 에이렐 님께서 건네주시는 메론맛 사탕도 그저 입을 다문 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꾸벅, 숙여서 '감사합니다.'라는 높임말을 대신하여 표현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에이렐 님의 말씀에는 다시 약하게 동공지진을 일으켜버렸다. 그리고 결국엔 다시 입을 열어버렸다.
"...하, 하지만 감히 '신' 님께 말을 놓을 수는 없는 걸요... 저는 '신' 님이 아니니까요. 에이레에엘... 으으은... 말 놓ㅇ... 아도 괜찮아요...! 저는 이게 더 편해서..."
그리고 이것이 맞는 것일테니까. 어쩐지 혼자 왕게임 때처럼 벌칙 수행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지금만 해도 목소리가 계속 늘어졌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에이렐 님의 말씀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두 손을 작게 주먹 쥐고, 고개까지 작게 연신 끄덕끄덕여가면서.
언제나 멍하거나 웃는 표정 정도만이 가득했던 자신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새로운 표정이 지어져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울상인 표정. 물론 그것조차도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하기만 했지만.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에이렐 님의 진지한 목소리에는 자신 역시도 희미했던 울상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마치 진짜가 아니었던 것처럼.
"......인간 씨..."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이렐 님께서는 예전에 인간 씨랑 말을 놓으신 적이 있으셨군요. ...역시 에이렐 님께서도 대단하시고 멋진 신 님이세요. 스스로를 겸허히 낮추시어 인간 씨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셨다니... ...하지만... 하지만, 저는...
...'인간' 씨가 아닌 걸요. 분홍빛의 두 날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분홍색, 분홍색.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분홍색들. 솟구쳐 위로 올라가는 분홍색들. 괜히 꼼지락꼼지락, 손가락들을 작게 움직이면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신 님께 말을 놓는다는 것 역시, '저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말이예요. 제가 어떻게 감히...
하지만 그 말은 그저 바닥을 향한 멍한 두 눈동자 속으로 삼켜버렸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에이렐 님의 말씀에, 꼼지락거리던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졌다.
......'외톨이'. 그 단어가 자신의 마음 속을 깊숙히 찔러왔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저는 지금... 그렇기에, 그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제서야 에이렐 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네. 전 이것으로도 괜찮아요. 이것이 저의 삶. 저의 운명. ...저는 지금 무척이나 행복해요, 에이렐 님. 에이렐 님께서 저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시고, 저를 이렇게 걱정해주고 계시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행복'해요, 에이렐 님."
신기루와도 같은 미소였다. 금방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분홍색. 그런 분홍색에게 에이렐 님께서는 이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진 '권유'. 친구, 그리고 별 것.
......'친구'. '친구'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론. 당신은 알고 있나요? 저의 '신' 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신가요? ...저는... 모르겠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신은 '텔레파시' 능력을 사용하지 못 했으니. 그렇기에, 그저 에이렐 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는... 이내 살며시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에이렐 님의 손을 부드럽게, 살며시 감싸듯이 두 손으로 잡았다.
"......에이렐 님. 저는 '인간' 씨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동물인 홍학일 뿐이예요. 그리고 '친구'라는 것을 알지 못 해요. ...그래도... 그 말씀 만큼은 정말로 감사해요. 에이렐 님께 그런 말씀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정말로 기뻐요. ...하지만... 에이렐 님께서 원하신다면, 알아낼게요. 배워나갈게요. '친구'라는 게 무엇인지. 그러니... ...천천히, 느릿하게라도 괜찮으시다면..."
끄덕,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그리고 두 눈동자가 부드럽게 접혀져 웃음을 지었다. 물론, 어쩌면 아직까지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어쩌면...
"...정말로 고마워요, 에이렐."
속삭이는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조용히 중얼거려졌다. 신기루. 환상, 그리고 환각. 어쩌면 그것들처럼 이것 역시도 그저 사라져버릴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행복'했기에. ...리스. 부디 두려움마저도 '행복'으로써 잠재울 수 있기를. ......리스.
/ ㅋㅋㅋㅋㅋㅋ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니...! 세상에...!(동공대지진) 그리고 분량이 폭발해 버렸습니다...(흐릿)(시선회피) 답레는 길이에 부담갖지 마시고 편하게 써주셔도 된답니다, 에이렐주! :)
그런 말로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띄워져 있다. 그거면 된 것이다. 누구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어려울뿐. 한 걸음을 내딛은 후에는 알게된다. 그 앞에 광활한, 자신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많다는 것을. 인간이 아닌 평범한 홍학이라 자조하는 리스에게 이야기한다.
"아, 그리고 넌 이제 평범한 홍학이 아니야."
잡초의 신이기에, 오히려 재앙신이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평범한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속세에서는 누구도 환각을 부릴 줄 아는 홍학을 평범하다고 부르지 않는다고?"
누구나 '특별'하며 개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모든 생명은 균등하게 가치있으며, 평등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리스의 손을 꽉 붙잡는다. 사라지는 신기루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러면서 리스에게 다시 입을 연다.
"고마워할 필요없어. 나도 너에게 고마우니까."
그녀에게 있어서도 첫 친구인 것이다. 그녀는 '한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외톨이였다. 다른 이들이 주변에 있어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비어있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친구로 삼고싶다고 생각했다. 그 것의 의미는 스스로도 리스도 모를 것이다.
"내 '첫 친구'로서 나를 잘 부탁한다?"
메귀리 신은 마침내, 영원한 외톨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무수한 메귀리가 전세계에 꽃을 피우는 것처럼. 씨익-하는 미소가 그녀에게 지어진다. 그러고는 이어서 이야기한다.
에이렐 님께는 미소를 지으셨다. '그거면 됐다.' ......그럴까요? 정말로 이것으로 된 것일까요? 저의 '신' 님. 저에게 알려주세요. 저에게 가르쳐주세요. ...정말로, 이것으로 된 것일까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신' 님께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고, 그렇기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에이렐 님의 목소리는 돌아왔다. 에이렐 님의 대답은 돌아왔다. '그거면 됐다.' ...그래, 느릿한 한 발자국을 떼어. 그렇다면...
절벽의 끝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두 날개가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순간의 찰나.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에이렐 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평범한 홍학이 아니다. 환각을 부릴 줄 아는 홍학. 자신을 표현해주시는 에이렐 님의 말씀에, 순간 희미하게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런가요? ......말씀 정말 고마워요, 에이렐."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은 '평범한 홍학'이 되지 않겠지. 에이렐 님의 말씀이 환각의 마법이 되어 자신에게 걸려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에이렐 님께서 자신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해지던 존재가 붙잡힌 손에서부터 점차, 점차 선명해져오기 시작했다. 붙잡힌 분홍빛의 신기루는 흩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어진 손에 부드러이 닿을 뿐.
"......하지만, 역시 제가 훨씬 더 고마워요, 에이렐.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어찌해야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예요."
진심이었다. 자신은 에이렐 님에게 해드린 것이 없었으나, 에이렐 님은 무려 자신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 주셨으니. ...믿기지 않아요. 정말로, 정말로 믿기지 않아요. ...저는 지금 신통술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지금...
꼼지락, 꼼지락, 에이렐 님의 손을 맞잡을 듯, 말 듯, 손가락이 작게 굽혀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저 입가를 가리면서.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에이렐 님의 활기찬 말에, 잠시 에이렐 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이내 덩달아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세게 위아래로 느릿하게 끄덕여보였다.
"...네! '첫 번째 친구'... 저도 잘 부탁할게요. ...네, 추천하고픈 장소가 있어요. 언젠가, 언젠가 한 번 쯤은 다른 신 님과 함께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예요. ...비나리의 명소. 언제나 무지개가 뜨는 폭포. 그 곳에는 '서약의 제단'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곳에 먹을 것을 제물로 바쳐 올려 서약을 나누면, 은호 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신다고 해요. ...나중에, 혹시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친구... 에이렐과 함께 언젠간 가보고 싶어요."
낯선 행복감에 부드럽게 양볼에 홍조가 띄워졌다. "지금은 어느 곳이든지 다 좋아요. 모든 곳이 다 행복해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마치 에이렐 님처럼 즐겁게만 느껴졌지만.
천천히, 느릿하게 손가락이 굽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살며시 에이렐 님과 손을 마주잡았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 좋은 따스한 온도. 배시시 웃는 얼굴은 두려움을 뒤로 한 채 행복에 젖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