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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왕에게는 작은 책이 있었습니다. 수 많은 악마의 이름들을 적어놓는 책이었죠. 그리고 이것은 그들 중 한 명의 이야기, 악마라고 불리게 된, 악마의 이름을 가진 신의 이야기입니다.] . . . (중략) 그는 책을 덮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서재에서 홀로 토마토를 달여내 만든 차를 홀짝이며 컵에 담긴 양초를 후 하고 불어 꺼트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둠이 드리웠지만, 이미 그의 두 눈은 제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길을 찾아낼 수 있었기에 실수없이 손에 들린 책 한권을 다시 책장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창 밖을 내다보자 바깥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밭을 손봐야겠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위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선 아직 수면을 청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손에 들린 컵으로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는 다시 한 번 차를 들이키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잉.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키고 비어버린 작은 티컵을 아무렇게나 휙 하고 던져버리자 마치 처음부터 그것은 '진짜' 컵이 아니었다는듯 희미한 빛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나가볼까.
길고 긴 복도를 거닌 끝에 거대한 현관문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앉고 그 문을 열어 차가운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을 나섰다. 신통력으로 인해 몸을 젖지않게 하면서도 차가운 바람만큼은 그대로 맞으며 찰박찰박 젖은 흙길을 거닐던 그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건지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하다 이내 달리다 망토의 모습을 날개로 바꾸어 그것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음?"
그의 성 꼭대기층에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사역마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펄럭펄럭 날아가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 물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은 빛이 점멸함과 동시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따스한 봄의 지역인 다솜. 늦은 밤이었기에 이곳도 꽤나 어두웠지만 적어도 현재 그가 관리하는 가리지역처럼 폭풍우가 휘몰아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가리 지역에서 불어오는 폭풍우 탓일까 하늘에서 부드럽게 내려붓는 작은 가랑비를 맞으며 그는 어딘가로 무작정 향하기 시작했다.
다솜의 명소. 그가 향한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무언갈 곰곰히 생각하듯 사뭇 진지해보이는 표정을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듯 서 있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작은 존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밤프가 그곳을 돌아보았을때는 이미 주변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솜의 벚꽃나무 숲 어딘가의 작디 작은 오두막 안.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집 안에서,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면서 유리창을 톡, 톡, 치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들었다. 다행히 강한 비는 아니고 작은 가랑비지만... 그럼에도, 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조용한 중얼거림이 멍하니 새어나왔다. 먹구름 씨가 가득한 하늘은 보기만 해도 어두울 테니까 말이예요. 더군다나 지금은 꽤나 늦은 시간. 그랬기에 더더욱 주변이 어둡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분홍빛으로 가득한 자신만이 희미하게 밝힌 양초의 촛불과 함께 유일하게 어둠이 아닌 듯 해보일 정도였으니. 물론 보통 이런 늦은 시간 쯤이라면 자신은 이미 잠들어 있겠지만... 오늘은. 왠지 오늘은 유난히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잠시 걷고 올까요. 비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새벽은 조용하니 좋으니까 말이예요.
예전에 인간계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줍게 된 낡은 우산이라는 것을 펼쳐들고 집을 나섰다. ...전에 이것을 인간들 씨께서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쓰는 걸 봤었어요. 그러니 이렇게 쓰는 거겠죠? 톡, 톡. 우산을 맞고 떨어지는 빗소리는 의외로 듣기 괜찮은 편이었다. ...비도 안 맞게 해주고... 우산 씨는 대단하시네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 편에서 누군가가 서 있는 듯한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누구시죠...? 가뜩이나 비가 살짝 오는데다 한 쪽 눈만 잘 보이는 자신으로서는 그 인영이 누군지 알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좀 더 가까이, 천천히, 그 인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실루엣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밤프 선생님...?"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색이 다른 멍한 두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리고는 총총, 밤프에게로 다가가 팔을 들어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언갈 곰곰히 생각하던 그의 귓가에 작은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걸까? 이전에는 없을정도로 놀라하는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홱 하고 돌린 그는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고있는 리스의 모습에 그제서야 희미하게 자리잡아있던 경계를 풀고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리스였나?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해서 놀라버렸군."
역시 자신이 가르친 대로 사냥법을 익히고있구나, 따위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리스에게 사냥법을 가르친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다. 가르친거라곤 토마토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해 이어져내려오는 온갖 쓸모없는(...) 역사들 뿐이었지. 그는 이 시간에 어쩐일이냐는 리스의 물음엔 단순히 산책하러 나왔다는 말로 무마했다. 이런 늦은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나 비가 휘몰아치는 날에 산책을.
"그런데,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있는거지? 어린아이가 혼자 다니기엔 위험한 시간이라 생각되는구나."
늦은 밤 따위의 시간이 아니었지. 만약 시계가 있더라면 시계바늘은 12시를 훌쩍 넘어선 시간을 가르키고 있었을 것이다.
"토마토라도 먹고싶은가?"
잠시 입을 다물고있던 그가 손가락을 튕기더니 붉은 빛이 은은하게 풍기는 토마토를 손에 쥐고선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럼과 동시에 은연중에 옷을 길게 늘어트려 그녀가 쥐고있던 우산을 대신 들어주려했다.
점장이 보기에도 플라맹고 신의 행색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였지. 겉옷이 두꺼워지거나 눈만 보이도록 목도리를 꽁꽁 둘러매긴 하였어도, 안에 입은 원피스는 아라 지역에서나 입을 수 있을 법하게 얇았고, 눈을 밟고 가기에는 맨발이 너무 시려보였으며 날개는 반쯤 얼어서 깃털이 뻣뻣해 보일지경이였으니... 그런 꼴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안 쓰는 신발이라도 줘야겠지. 답지않게 남에게 선심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료는 그렇다쳐도, 사이드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제 구웠던 레몬 피낭시에는 하루가 지나서 버터의 풍미가 골고루 퍼져 있을 것이였지. 진열대에 미리 꺼내두었던 피낭시에는 레몬모양의 틀에 구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레몬 모양이였다. 고소한 냄새와 레몬 특유의 상큼한 냄새가 미미하게 퍼지는 피낭시에의 위에 체를 친 슈가파우더가 눈처럼 떨어진다. 같이 내놓을 자그마한 포크를 마른 천으로 닦으면서 리스의 한 박자 느린 대답에 사장도 조금 느린 답을 하였다.
"당신의 '신'이라... 사정은 자세히 모르겠는데, 너도 신이면서 굳이 찾는 이유가 뭐지?"
신이라고 해보았자 의외로 수가 많았으며, 그들 전부가 그렇게까지 선망받을 만한 인물들은 아니였었다. 물론 고위신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지언정... 역시 이해가 되질 않았었지. 자신도 신이면서 다른 신을 믿는다니.
...아무리 그래도, 저 플라맹고 신은 커피에 대해서도조차 모르는 걸까. 조금 어리숙한 태도라던가, 다른 신들을 동경하는 모습에서 사장이 짐작하건데, 신이 된지 얼마 안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였지.
"...그 '아무거나'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아?"
톡 쏘는 듯한 지적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카페에서 '오마카세'라니. 그건 어떤 종류의 진상이였을까. 물론 반쯤은 그렇게 나가긴 하지만, 적어도 음료는 손님이 고르는 것이였고. 게다가 생각보다 종류도 다양했었으니. 커피라던가 에이드, 차, 쉐이크, 주스, 쌍화탕(?)... 대분류만 해도 한 손가락으로 꼽기는 무리였지.
그래, 사장도 알고 있었다. 리스에게는 악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 고민을 하다가 사과를 하는 모습은 진짜 모르는 듯한 순수한 반응이였다. ...사장은 정말 아무거나 내오기로 하였다. 오지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데워지고 있던 커피머신이 아까웠으니 커피로 정한다.
자신이 너무 조용히 다가온 것일까? 어쩌면 작게 내리는 빗소리에 자신의 발걸음 소리 따위는 가볍게 묻혀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의 처음 보는 듯 할 정도로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홱, 돌린 밤프 님의 모습에, 순간 자신 역시도 덩달아 놀라 한 박자 늦게 몸을 움찔, 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팔을 높게 들어 밤프 님께 씌워드리고 있던 우산은 여전히 유지했지만.
"...놀래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밤프 선생님. 그게... 놀래킬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우산을 들고있지 않은 쪽의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살짝 허리를 숙여 공손히 사과 인사를 올렸다. "...다음 번에는 소리 내어서 다가오겠습니다." 하고 덧붙이며. 물론 사냥법이라는 밤프 님의 말씀에는 "...사냥법이요?" 하고 멍한 눈동자로 되물으면서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자신의 기억을 뒤져서 밤프 님의 가르침 중 '사냥법'에 관련된 기억들을 찾던 와중, 산책하러 나왔다는 밤프 님의 말씀에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두 손...으로 받으려 했지만 우산 때문에 살짝 쩔쩔매던 중, 밤프 님의 옷이 대신 우산을 들어주자 멍한 눈동자를 부드럽게 접어 웃었다. "...감사합니다, 옷 씨." 하고 옷에게도 인사를 했지만. 그리고 토마토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작게 끙끙거리면서 어떻게든 토마토를 반으로 잘라냈다. 그리고 그 중 조금 더 큰 반 조각을 밤프 님께 공손히 두 손으로 내밀며 헤실헤실, 희미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