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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아무리 놀란것을 숨긴다하여도 내 눈에는 다 보이느니라, 같은 흡사 은호가 내뱉을 것 같은(?)말을 하고선 그는 팔짱을 낀 채 웃었다. 앞 면이던 뒷 면이던 별 차이가 없지않겠냐는 가온의 물음에 그는 턱을 짚으며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러다가도 혼자서 의욕이 붙어선 제멋대로 해석을 해버리고 승부하겠다는 가온의 말에 그는 다시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 카카캇! 당연하지 않은가! 자, 덤벼라!"
긴장감이 흐르는 이 순간, 그는 손에 들려있는 동전을 튕겼다. 그리고 그것은... .dice 1 3. = 2
나도 모르게 꼬리가 바짝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나는 밤프 씨가 돌리는 동전에 주목했다. 뱅글뱅글 도는 그 동전을 바라보며 나는 제발 B가 나오는 것을 기도했다. 역시 한 개보다는 여러 개가 좋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빌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신통술을 쓰면 큰일날테니까... 무엇보다 반칙이니까 그런 것은 하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뒤이어 보이는 면은 뒷면. 그에 나도 모르게 꼬리가 아래로 축 쳐졌다. 물론 표정은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유, 유감입니다! B가 아니라니! 조..좋습니다! 그럼 특제 토마토 한 개를 받아가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특제니까 한 개라고 해도 엄청 맛이 좋을 거라고 확신하며, 나는 가만히 밤프 씨를 바라보았다. 그 특제 토마토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조용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뒤이어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고 내 구슬에 보라색 빛이 멤돌게 했다. 그러자 내 손에는 내가 직접 재배한 신과가 담겨있는 바구니가 소환되었다.
그가 자신에 손아귀에 들어온 동전을 훔치더니 검은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꼬리가 아래로 축 쳐진 모습을 보지못했는지 그는 특제 토마토 '한 개'만 받아가겠다는 가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신통술을 사용하려는듯 붉은 구슬에 빛났다.
- 신과입니다. 제가 직접 비나리에서 기른 맛있는 녀석들입니다.
가온이 먼저 신과가 가득 든 바구니를 자신의 앞에 내밀자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이다 하나를 집어들었다.
"뭐, 준다면야 사양않고 한 입 먹어보지."
하지만 그것을 입에 집어넣기 전에 그는 그 신과 역시 신통력을 사용하여 어디론가 보내놓고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새까만 박쥐들이 떼를지어 이 방 안을 가득채우듯 날아다녔고, 그의 가슴팍에 박혀있는 붉은 구슬이 밝게 빛나기 시작하자 이내 박쥐들 사이에서 거대한 '특제 토마토 한 개'가 떨어졌다.
ㅡ턱
수박의 두 배정도의 크기는 되보이는 토마토를 받아든 그는 그것을 들어보이며 자신있게 외쳤다.
"특제 토마토다! 보통은 크기가 커질수록 맛이없다고들 하지만 이 토마토는 꿀보다도 달콤함을 자랑할것이야 카카캇!"
이어 나는 바구니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혹시나 깨지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신과는 신들이 먹는 과일. 인간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 특유의 과일이다. 토마토를 정말로 좋아하시는 것 같지만 신과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내 떨어지는 거대한 특제 토마토 한 개를 바라보았다.
"....네?"
저것은 정말로 토마토인가?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수박보다 2배는 커보이는데? 저건 정말로 토마토가 맞나? 신계에서만 자라는 토마토인가? 정말로 멍하니,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비비면서 다시 바라보았지만, 분명히 그것은 크기가 엄청 큰 토마토였다. 정말로 멍하니 그 토마토를 바라보다 나는 밤프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만든 겁니까? 그 토마토?! 정말로 그것은 토마토가 맞습니까?! 시, 신의 힘으로 기른 것입니까?!"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토마토와는 차이가 있었기에 정말 제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정도 크기의 토마토를 가져가면 누리 님은 분명히 좋아하실 거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는 밤프 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니까 맛은 장담해도 좋을거라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혼자서 먹으려고 만든 토마토는 아니었기에 어떤 식으로라도 이렇게나 맛있는 토마토의 맛을 다른누군가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뭔들 안괜찮으랴. 그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가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령 님의 말씀 하나하나. 그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작 하나하나. 그 모든 것들에는 전부 다 나긋하고 따스한 친절이 담겨있었다. 자신으로서는 과분하기 그지 없을만한 친절이. ...제가 과연 이것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런 생각이 저절로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울 정도였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자신은...
그러나, 령 님께서는 이내 자신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 우아한 부름에 순식간에 모든 상념들이 사라졌다. 색이 다른 자신의 멍한 두 눈동자의 앞에는 다시금 령 님의 칠흑같이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기에. ...령 님께서 다시 시선을 마주해주고 계세요. 지금, 저는 무려 '신' 님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온 몸이, 온 사고가 살짝 멈추어버렸다. 그래서 멍한 그 눈동자를 차마 다시 거두지 못 했다. 그 대신, 령 님께서 자신의 손을 잡고 가슴께까지 들어올려주시는 것을 멍하니 따를 뿐.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령 님의 또렷한 목소리마저, 그 말씀마저, 잡혀진 손의 따스한 온기마저, 그저 멍하니 크게 뜬 두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신통술. 제가 신통술을 쓴 것이 분명해요. 그렇죠? 그렇지 않다면... 저는... 이것은...
두 손에 느껴지던 따스함이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따스함이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려냈다.
"......가, 감사합니다, 령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너무 기뻐요. ...너무 기뻐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두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소중히 꼬옥 가져가면서 다시금 령 님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벚꽃마냥 밝은 미소가 얼굴 가득히 피워졌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했다. 두 손에 닿았던 따스함이 그저 경건하고 마냥 소중하기만 했다. '신' 님의 따스한 호의. 령 님을 향한 존경심과 숭배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물론, 자신이 '신'이라는 것에는 감히 대답을 드릴 수 없었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령 님의 이 따스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와, 이 소중하디 소중한 인연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꼬옥 간직하기로. 령 님이 다시 손을 잡아주시면서 깍지까지 끼어주시자, 멍한 눈동자가 다시금 커졌다. ...영광을 넘어선 영광이었다. 느껴지는 따스함이 자신의 환각 같은 착각 마냥 느껴져, 손이 감사함에 살짝 떨릴 정도였다.
"...저야말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령 님."
헤실헤실, 부드럽고 순수해보이는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물론, 감히 령 님의 손에 똑같이 깍지를 끼지는 못 했지만. 그렇지만... 움찔, 움찔, 작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서는 령 님께 그저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마음이 가득히 들어있었다.
"...령 님께서는 미리내에 살고 계시는군요. 미리내는 춥다고 들어서 아직 가본 적이 없어요. ...혹시 령 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제가 령 님을 종종 찾아뵈어도 될까요? ...령 님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하늘을 바라보아도 분홍의 구름이 넘쳐난다. 피어난 구름에서는 분홍색이 감도는 하얀 꽃잎이 나풀나풀 떨어진다. 가랑눈과는 유사하였지만 미세하게 다른 가벼움이였다.
숲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벚꽃을 멍청히 바라보는 청년은 퍽 이질적이였다. 따뜻한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두터운 목도리와, 피부가 보일새라 겹겹이 입은 옷. 제일 사랑스러운 색 한가운데에 뚝 떨어져있는 무채색. 그러나 그저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였다.
청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벚꽃 떨어지는 소리와 다른, 사뿐이 꽃잎을 즈려밟는 소리였다. 나타난 누군가는 섞여있는 붉은색이 인상적인 여인이였다.
"..."
아. 뻔히 기억하고 있었겠지. 정확히 65년하고도 94일 전에 처음 만났던 그녀를 말야. 무려 생명의 은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반가웠을까? 글쎄, 그랬더라면 첫 환영식때에 그녀를 아는 체 하지 않았으려나. 미세하게 눈을 깜박이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거동을 옮겼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등을 보인다.
이 자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령은 그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졌다. 그래. 이 사람은... 이 신은... 다른 이들을 모두 신으로 보고 숭배하고 있었지. 그 감정이 과연 바람직할까? 올바른 것일까? 자신이 감히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되었다. 령은 그리 생각하면서 애써 상념을 떨쳐내려고 했다.
리스의 눈동자는 색이 달랐다. 령은 리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 멍한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령은 자신이 혹여 이 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본다. 잘못된 게 하나라도 있다면 이 작은 신은 울상을 지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된다. 령은 자신의 행동을 꼼꼼히 복기해본다.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입니까?
아아,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거였다. 령은 리스가 입을 열고나서 그걸 깨우쳐냈다. 리스는 마음이 상한 게 아니라 기쁜 것이었다. 그렇구나. 앞으로 자주 눈을 맞춰줘야겠네. 령은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안도한다.
"기쁘다니 다행이군요. 혹여 제가 취한 행동이 당신에게 실례되었을까봐 노심초사 했답니다."
령은 빙긋 웃었다. 다시 그 예의 친근감 어린 미소가 나타났다. 령이 눈꼬리를 휘었다. 동시에 검은 눈동자가 자취를 감췄다가 나타났다. 정말로 감사하다라... 자신은 해준 것도 없는데 이 수인 신은 그것마저도 감사함을 느끼는구나. 령은 문득 자신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움찔움찔 움직이는 손가락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 새어나왔다
"미리내가 비록 춥기는 하지만 새하얀 눈과 아름다운 별은 감상할 만하답니다. 물론이지요. 흑조의 깃털이 낭자한 곳으로 찾아오세요. 그곳에 제가 있을 것입니다."
령은 기품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아,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는가? 슬슬 미리내로 돌아가봐야 했다. 령은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저는 슬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미리내로 돌아갈 때가 다가와서 말이죠. 리스, 당신과 만나서 매우 즐거웠어요."
령 님은 비록 오늘 처음 만나뵈었던 신 님이셨지만, 그럼에도 령 님에 대해서 아주아주 조금 쯤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령 님께서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하신 신 님이시라는 것.
직접 무릎을 굽혀 자신과 눈높이를 맞춰주시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손을 살짝 잡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령 님의 따스한 마음이 가득히 묻어나와 자신의 마음 속을 순수한 기쁨과 존경심으로 가득히 채워주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행복하게. 그러나 자신 특유의 멍한 분위기는 그 기쁨에 솔직하게 마구 방방 뛰는 분위기로 바뀌지는 못 했다. 물론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랬었겠지만, 지금은...
상념을 떨쳐내며, 령 님의 말씀에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
"아닙니다...! 실례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영광인 걸요."
드물게 대답이 곧바로 나왔다. 물론 헤실헤실, 마냥 령 님을 신뢰한다는 호의 가득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러다 이어서 들려오는 령 님의 말씀과 기품 가득한 허락에, 이미 피어있던 미소가 더욱 기쁘게 살짝 피어났다. 비록 령 님께서는 곧 아쉬운 기색을 보이시며 작별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 다음을 기약해주시는 말씀만으로도 자신은 그저 행복했다. '다음'이 있다는 것. 다시 재회가 있다는 것. 그것은 희망이자, 살아가는 신비였으니. 그렇기에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군요. 미리내 역시도 무척 아름다운 곳이군요. 그렇다면 다음에 꼭 령 님을 찾아가겠습니다. 흑조의 깃털이 낭자한 곳, 반드시 기억할게요. ...저도 령 님을 만나뵈어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되어서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부디, 다음에 또 령 님을 만나뵐 수 있기를 바래요."
따스함이 피어올랐다.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은 한 눈동자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령 님의 방울과 그 딸랑거림은 두 눈동자와 두 귀로 소중히 간직하면서. 령 님과의 짧디 짧은 만남의 끝에 새겨진 것은, 새로운 행복감이었다.
/ 이렇게 막레를 드리겠습니다! 함께 일상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령주! 수고 많으셨습니다! 령이 너무 아름답고 예뻐요...!ㅠㅠㅠㅠ 마음씨도 따뜻해...!ㅠㅠㅠ(야광봉)
>>67 ㅋㅋㅋㅋㅋㅋ 어엌ㅋㅋㅋㅋㅋㅋ 리스가 너무 귀여워요!! 그리고 아니요. 은호 님도 당연히 적용이 됩니다. 이후에 등장하게 될 새로운 NPC 백호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그냥 이런이런 AU를 다음에 하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그것도 됩니다! 말 그대로 소원권이에요!
그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본디 입력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힘들었던 머리였지. 별 수 없이 기억에 남겨두게 되었지만, 떠올리지만 않으면 되려니. 그러나 지금 그때와 관련이 있던 여인과 마주친 것을 기점으로 떠올리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말을 걸어오는 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춘다. 더 이상의 몰라보는 척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세하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돌려내었다. 체구보다 더 넉넉한 두루마기가 그 움직임에 따라 너울거렸다. 그 무거운 입을 떼어 여인 앞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다.
"...기억하지 못하길 바랬지만, 오랜만이야."
본심부터 말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무례한 말버릇인건지. 축하한다라, 그 첫 환영식 때에 그녀도 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가. 고마워, 온화하게 축하하는 말에 간단히 감사를 전하였다.
능청스래 이름을 물어보는 여인, 너울 너머에서도 선명한 녹색의 눈과 마주쳤다. 말과 말 사이 잠시 텀을 두었다, 고요하고 어딘가 억양이 부족한 목소리로 이름을 입에 담아내었다.
"...세설."
조용히 잘게 흩날리는 눈. 그 당시였다면 그닥 어울리지는 않는 이름이였지만, 지금은 그 이름에 걸맞은 신이 되었을까?
낙낙한 두루마리가 움직임에 따라서 너울거리는 것에 곰방대를 너울 속의 입가에 가져다대고 불도 붙히지 않은 그것을 가만히 입술로 물었다. 무채색의, 신.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에 후후 하는 나긋한 웃음을 흘리면서 한발짝 상대와 거리를 좁히고는 곱게 눈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지 못하길 바랬다, 라.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자신의 신통력으로 구해낸 이들에 대한 것은 잘 기억하는 편이였다. 꽃 한송이, 나무 한그루. 그리고ㅡ 신까지.
"드디어 목소리를 듣는군요. 네, 60여년 만이던가요? 목걸이 하나 달랑 남겨놓고 훌쩍 떠나서 얼마나 아쉬웠는데."
축하한다는 말에 고맙다는 담백한 말이 떨어지자 곰방대의 끝으로 입가를 톡톡 건드리면서 말끝에 온화하고 나긋한 웃음을 흘렸다. 천만에요. 검은색의 한복 치맛자락을 들어서 인사를 해보인 뒤 가느다란 눈매를 한껏 접어서 미소를 띄운다.
어딘지 아쉬웠단 기색이 느껴지는 처음의 말과는 다르게 소복하게 쌓인 벚꽃잎을 밟고 있는 맨발은 가벼이 움직여서 좁혔던 거리를 살그머니 벌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휘어진 눈매는 그대로였고 불투명한 너울이 따스한 바람에 흔들린다.
"세설.. 좋은 이름이네. 60여년만에 주고 받는 통성명이라니 재밌구나. 그래도 다시 만나 몹시 반가워."
하오리를 한손으로 추스르고 곰방대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서 세설의 머리에 손을 대려한다. 혹 그동안 아프진 않았니? 묻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명도를 쏙 빼닮은 거울 속에 저가 있음에 바라보았다. 수수하기 그지없는 외모와 마주한 채, 지난 일을 그 면에 비추어보았다.
그래, 분명 신내림을 받는다 하였지.
*ㅡ
신이 들러붙는 일이더라도 그것이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온세상을 살피는 神을 모셔 무당 스스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과거 인간이 청동을 전신에 두른 자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채 우러러 바라본 적부터 하여, 마침내 현재까지의 길고 긴 세월을 되짚어보았을 때 언제나 그 모습은 무희 같이 화려하여서 오색찬란한 차림새는 가히 허락되었다. 의문 하나 없이 이어져 온 일이며 항상 그러기 마련이었으니 그 아이의 의식 또한 응당 화려해야 하였다. 반드시 화려해야만 하였지.
자신의 겉모습이 오죽이나 간소한지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신으로 거듭난 뒤로부터 죽 이어진 오래된 모습은 그런 동시에 가장 익숙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었지마는, 역시 지나간 시간이 길기만 하였다. 다르게 말해 낡은 모습이다.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지만서도, 기어이 멀기만 하였던 때가 끝내 목전에 다가서니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그것이라 함은, 낡은 것은 금방 새 것으로 바꾸어내어야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은 고요한 변화였다. 순전히 한 아이만을 위한 사고가 끝에 들어 결심하게끔 만들었다. 지당한 일이다. 고매한 가락 속에서 아름다이 춤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듯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음에도 거추장스레 여기지 않고 하늘을 우러렀다. 구름 한 점 없고 그 자리에 새하얀 빛이 가득한 무구한 자연의 풍경이었다 일러야 맞았다. 무엇과 비슷이 여겨진다 싶었더니, 그 아이 또한 고상한 순백에 가까운 순결함을 갖추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 고와지려거든 알고 있던 순수함과 비슷한 느낌이 없잖은 이곳에서 이루어야 하겠다고 여겼다. 다른 것을 얻기 위하여 본래의 것을 버리려거든 이런 곳에서 해야지.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ㅡ*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익힌 옛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알으라고, 그것은 아마 옛것을 지킨 채 곧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는 뜻 또한 되지 않겠는가.
몇몇을 제외하고선 전부 과거의 것 그대로였다. 장식으로 매만지어져서 허리 언저리까지 길어졌더라도 결 고운 머리카락은 흑색 그대로였고, 가느다래진 눈썹 아래 색 또렷하고 다채로워진 느낌도 없잖아진 눈이어도 그것은 여전히 녹색이었고,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여지거나 하여 적잖이 꾸며진 옷이지마는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유지한 동방의 생김새가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