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밖으로 나오니 푹푹찌는 열기와 습기가 단탈리안을 반긴다. 그냥 경찰서에서 잠깐 쉴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지만, 은행이나 동사무소도 아니고 경찰서에서 더위를 피한다는 건 아무래도 느낌이 좀 그렇겠지. 설령 특별히 죄를 지은것도 아니고 방금 막 길거리에서 주운 지갑을 맡기고 나오는 길이라고 해도. 단탈리온이 읽어낸 바에 따르면 아마 조만간 주인이 찾으러 올 것이다. 이른바 만사 해결! 오늘도 The Noom의 해결사 단탈리안은 이렇게 한 건의 사건을 끝마친 것이다!!!
"....뭐,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기는 하지만."
집에 있어도 더운 김에 차라리 뭐라도 해볼까 생각해서 나온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나오고 나니 햇볕은 따갑고 마땅히 할만한 일은 보이지를 않는다. 그나마 주인 잃은 지갑을 발견한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이제부터 뭘 할까."
멀뚱멀뚱 서서 망설인들 뾰족한 수가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흘러가니 뭔들 일어나지 않을까.
조디악 버몬트의 상담소는 The Noom에 들어간 이후 닫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상담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대상이 상담비를 내기에는 사정이 곤란한 사람들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자그마한 시간마저도 일이 생기면 다음 날로 미루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오늘은 사내에게는 충분한 여유가 있는 날이었음은 분명하였다. 그렇기에 오늘 올 아이를 위해 상담소 안을 시원하게 만들어 두고 간식도 충분히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사내는 아이와 함께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다. 네, 아르바이트 월급을 주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쫓겨났더니 그 분풀이로 야구 배트로 편의점 유리창을 깨부쉈단 말이죠. 서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는 부모님을 여의었다. 17살,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음. 특이사항은-검열됨]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괜찮은데. 왜, 선생님이 힘든 일 있으면 다 해결해준다고 했잖아. 그런 말이 오갔다.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소년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라고 한 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갔다.
“아직도 저런다니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달아나는 소년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경찰서 입구에 있는 기붕에 등을 기댄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저 남자는 서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본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날씨 참 덥죠? 그렇다고 경찰서 앞에서 계속 서 있는 건 수상한 사람 취급받기 딱 좋아요.”
해명할 자신이야 차고 넘치지만, 굳이 해명이 필요한 지경까지 상황을 끌고가고 싶지는 않기도 하고, 마침 말상대도 생긴 참이니 굳이 경찰서 앞에 멀뚱멀뚱 서있을 이유는 없겠지 싶어 단탈리온은 잠시 멈춰뒀던 머리를 굴렸다. 신사를 떠올리는 행동양식에 말끔한 차림새, 사람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치게끔 하는 태도나 어조.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다.
"같은 조직에서 일하는 사이끼리 거동 수상자로 신고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틀림없이 희극이겠네요."
아마 이름이 조디악 버몬트였나. 심리 상담사로 꽤 평판이 높은 양반이었지. 단탈리안은 자신의 머릿속을 뒤적이며 다음에 건넬 말을 떠올렸다.
"전직 탐정 나부랭이였던 단탈리안이라고 합니다. 뭐, 본명은 아니지만 적당히 그렇게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적어도 상대는 단탈리안을 모르는 듯 했으니. 하기야, 굳이 조직원들의 신상조사를 하는 단탈리안쪽이 상식에서 엇나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직업병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굳이 그런걸 일일히 알아둘 필요까지는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은 굳이 캐낼 생각도 하지 않겠지. 막상 본인도 특별한 동기 없이 그저 습관이 이끄는 타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통성명은 의외로 아지트 밖에서 더 많이 하게 되더군요. 경찰서 앞은 아무리 그래도 의외성이 좀 지나친 것 같긴 하지만."
저번에 통성명한 해그러스라던가, 앞으로도 종종 겪게 되지 않을까. 아닐수도 있기야 하겠다. 앞 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적어도 경찰서 앞에서 웃으며 통성명을 하는 경험같은건, 앞으로도 종종 일어날 일은 없는 드문 경험축에 속하겠지.
"상담사 버몬트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래뵈도 발이 꽤 넓은 편이거든요. 아니, 귀가 넓다고 해야 하려나?"
사무소도 정리하고 탐정일도 때려치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던 정보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이미 조사해둔 내용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당연히 각계의 유명인사들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다. 너무 대단하신 몇몇분들의 내밀한 비밀따윈 아무래도 잘 모르지만, 애초에 알아볼 생각도 필요도 없었다. 단탈리안은 괜한 위험을 감수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재능 기부라, 간단한듯 하면서도 꽤 어려운 일을 하고 계시네요. 기분따라 한두번이면 몰라도,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그래도 그정도는 되는 인물이니 나름대로의 평판을 쌓을 수 있던거겠지. 단탈리안은 일축했다.
괜찮으냐 묻는 남자의 말에 호즈노미야 라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여 이상 없다는 제 의사를 표했을 뿐이다. 아프지 않은데 괜찮다 않다 할 것도 없었다만 단지 흘러내린 피가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끈적거리는 건 썩 상쾌한 기분이 못 되었다. 좌우간에 그 기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겠지. 대답 대신이라고 해야 좋을까, 호즈노미야 라나는 제 후드티에 달린 주머니에서 낱개 포장이 된 박하맛 캔디를 하나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 고맙습니다. 사례라긴 뭐하지마는 지금 가진 게 없어 일단 이거라도 드리려 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
상대의 말에 조디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긴, 그 자신조차도 지금 이 시각에 경찰서로 올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아지트에 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자기 볼일만 보고 나가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확실히, 경찰서 앞에서는 정말 의외군요.”
사내의 경우에는 분명 후자였다. 호출이 있을 경우나, 특별히 볼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자신의 집이나 사무소, 간혹 공원을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다수니.
“탐정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뛰어난 정보력 아니겠습니까. 발이 넓다고 표현을 하던, 귀가 넓다고 표현을 하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래도 자신을 아는 것은 사내에게 조금 쑥스러운 일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될지 사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뭐, 솔직히 The Noom에 들어온 이후 신경을 쓸 일이 이것저것 생기다 보니 약간 힘이 들기도 합니다. 조금 특별한 경우긴 하지만 오늘 같은 일도 있고요. 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가서 마저 이야기할까요. 마침, 좋아하는 곳이 바로 근처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죠.”
사내는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참으로 무더운 날씨기에 목덜미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기에, 더 서 있기는 싫었다.
단탈리안 역시 근처 지리는 제법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지만, 사준다는 사람이 장소를 고르겠다는데 이의를 달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잠자코 따라갔다. 아무리 저렇게 사람이 좋아보여도 더운건 역시 더운거고 불쾌한건 불쾌한 것이겠지. 관계라는 요소가 엮이지 않으면, 의의로 인간의 가치감각은 제법 일관성이 있다. 재미있게도.
단탈리안은 메뉴판을 대충 훑고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옛날옛적에는 진동벨이라는 게 있어서, 그게 울리면 직접 가져가던가 하는 식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세상에서는 영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로봇이 알아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해주니 굳이 그런 일을 직접 할 필요따윈 없으니까. 덕분에 주문만 전달해두면 이렇게 마음놓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까 끊겼던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확실히 조직에 들고나서부턴 이런저런 일들에 엮이게 되는 면은 없잖아 있죠. 저도 뭐 그리 오랫동안 조직에 속해있던 것도 아닐뿐더러, 최근에는 개인적인 일을 좀 하느라 조직쪽 일은 소식을 들은 것 뿐이라서, 현장에 투입됐던 인원들쪽 이야기가 좀 듣고싶은데 기회가 안 생기네요."
소문은 신빙성이 너무 낮다. 현장인원의 진술인들 왜곡이 없지는 않지만, 그 왜곡조차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경우가 가끔 있으니, 그편이 훨씬 낫다. 적어도 원하는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으므로. 개인적인 허영이나 이런저런 욕구따위의 영향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정도도 걸러낼 능력이 없으면 탐정을 자처할리가.
높아. 한 번도 못 본 새로운 땅이 보이고, 새로운 밤이 보였더란다. 자네에게 있어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를 찾을 줄 누가 알았겠는지. 누가 혀를 차며 비웃는 소리가 들린 듯 싶다. 파브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갇혀있었지. 늘 이름이 불리면 자다가도 깨야만 했고. 온통 새하얗고, 가끔가다 폭발의 잔해나 붉은 피가 흐르긴 했지만 금세 하얗게 변하곤 했다. 사람도 희고, 모든 것이 하얀. 정신에 이상이 생겨도 뭐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응."
아저씨. 오, 사장님의 속을 그렇게 후벼파면 못쓴다네. 파브닐은 거기서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침묵했다.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는 듯 눈동자가 멍했지. 뭘 했더라....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하는가, 식스?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걸 배웠어요."
파브닐은 고개를 기울였다. 맞는 말이지.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주었지 않았나.
"소장님의 곁을 맨날 따라다녔고..소장님이 맨날 나보고 아들이라고 했어요. 귀중하다고 했나..아무한테도 넘길 수 없는 귀중한 연구자료라고 했는데...모르겠어. 으응. 거기까지밖에 기억이 안 나요."